국골
함양 마천면 추성리 마을 뒤로 오르면 국골 들머리.
약 2시간 오르면, 물길을 둘로 가르는 산자락 험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등산로이지만 아직도 거친 편.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오르기까지 약 2시간 남짓.
가끔 움직이는 돌이 있어 낙석 위험이 도사린 코스
적요함이 감도는 숲속 오솔길 지나 국골 4거리 팻말
지리산 동부능선 분기점 이곳까지 약 4시간 30분 거리.
국골4거리에서 진행방향 왼쪽, 암봉이 두류능선 깃점.
두류능선 코스는 생각보다 거리가 먼 짭짤한 암릉 코스,
이곳 동쪽 산사면으로 허공달골(다리골), 어름터, 향운대
..................향운대.....................
智異山 十臺(지리산 10대) 수도처 중 한 곳.
뒤로는 높은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는 샘터.
절벽 틈 사이에는 수도자가 기거할 만한 공간.
...............................................
국골에서 쑥밭재 거쳐 동부능선으로,
오른쪽 오름길은 하봉을 거쳐 주능선.
국골 4거리에서 곧장 오르는 암봉은 말봉
그 능선 중간에 평평한 봉우리가 1432(두류)봉
요즘 그곳 이름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말봉에 두류봉이란 팻말을 꽂았기 때문.
하지만, 그 지역 사람 대부분은 말봉이라고 부른다.
동부능선 왕등재 야영 후, 쑥밭재 지나 국골4거리
멀리 반야봉의 낙조와 함께 펼쳐지는‘말봉의 낙조’
그 뒤로 오른쪽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달뜨기 능선,
정면 방향으로 왕산과 필봉산의 뚜렷한 모습.
말봉 옆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얀 독바위
동부능선 새봉, 좌 왕산 우 필봉산. 달뜨기능선
말봉에서 7~8분 내려서면 오른쪽 산사면에 향운대
숲향 짙은 숲속 길, 암릉을 번갈아가면 1432(두류)봉
함양 방향의 첩첩 능선과 중봉부터 천왕봉까지 마루금
1432봉 부드러운 숲길따라 무덤 2기를 지나 집수정
그곳 외딴 집 마당을 거쳐 내려가면 성안마을 임도
잣나무,밤나무,호도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자락 사이
추성리-국골들머리-국골4거리
-말봉-1432봉-성안마을-추성리
지리산 계곡과 봉우리들 중 '나라 國' 자 쓰는 유일한 지명.
이곳 지명에 나라 국(國)을 써야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애환이 깃든 지리산의 숨은 계곡.
가락국은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김해평야에 터전 잡았던 나라.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멸망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후예들.
가락국은 국가 형성 이전부터 '고구려'와는 구혼이 많은 듯 보인다.
가락국은 역사 상 기록을 보면, 친 신라의 노선을 걸었던 나라이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의 뿌리는 고조선이고 고조선은 단군환웅의 자손.
가락국은 기원 전 108년에 한(漢)에 멸망 당한 위만조선 후예라지만
가락국 조상은 양자강 남쪽 인도 또는 아랍에 가까운 고대중국 같다.
가락국은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김수로왕 탄생 신화의 나라.
가락국은 곰을 천시하고 호랑이를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하여, 칠선계곡의 선녀탕에서 곰이 국골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국골은 칠선계곡에서 쫓겨난 곰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가락국의 10대 '마지막 구형 왕이 추성산성을 축조했다는 곳.
국골에서 신라 침공에 대비 군마를 이끌고 훈련 시켰다는 구전.
국골은 가락국 구형왕의 마지막 피난처였다는 설에서 유래된 지명.
'추성산성 축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국골.'
국골 험한 산세가 천연적인 산성 역활을 한 것은 아닐까?
군사들과 군마를 훈련시킨 장소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국골.
가락국이 군마를 훈련시켰다면 그 비밀 장소는 어느 곳일까?
혹시, 군사훈련장은 세석평전 아닐까?
국골과 추성산성은 가락국 구형왕의 방어 기지.
훗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
하여, 신라 진골 귀족이 된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
전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준 비운의 왕.
가락국 영토를 식읍으로 받은 구형왕
나라는 잃었지만 통치권은 유지했던듯
지리산 동부 권역인 산청군 일대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들이 많다.
추성 산성터 주변의 두지 터(식량 저장고) ,얼음 터,
국골을 포함하여 왕등재 토성과 산청군 금서면 왕산
그곳에 있는 구형왕릉과 그 왕릉 입구에 있는 덕양전
덕양전은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 장군의 활터.
아울러, 이 일대는 2400 종류 약초 자생지이고
이조시대 명의 <유의태>가 의술을 폈던 고장이다.
하여, 옛날부터 한의학 의술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가락국의 유적들이 유난히 많은 국골 일대.'
개국 과정부터 베일에 가려진 역사가 정립되지 못한 가락국
구형 왕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신비감을 갖게 하는...국골.
구형 왕은 국골요새에 추성산성을 쌓아 신라와 항전했다는 <학설>.
왕등재에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
하봉과 중봉 사이 천연적인 요세 국골.
지리산은 1,500 년전후에는 가락국 영역.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532년)에게 양왕 칭호를 받은 인물.
신라와의 전쟁에서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는 국골이었던듯.
국골은 가락국 군사요충지이자, 선녀탕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곳.
선녀들의 노여움을 샀던 칠선계곡의 곰.
칠선계곡에서 쫓겨나 살게 된 곳이 국골.
국골은 그렇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골짜기.
칠선계곡 지류 국골은 중봉과 하봉 사이에 있다
칠선계곡은 추성동에서 오르는 3 계곡 중 가운데.
혹시 선녀탕은 구형왕 후궁들의 목욕처 아닐까?'
사향은 왕의 관심을 끌려는 후궁들이 몸에 지녔던 취음제.
사향 노루를 가까이 둔 선녀들은 '왕의 여자'로 짐작된다.
선녀탕은 인적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적 드문 위치.
'왕의 여자'들은 7선녀 처럼 목욕했던걸까?
왕의 여자들의 목욕을 훔쳐보면 국골로 추방했을 듯 싶다.
곰은 잘 참다가도 충동을 못 참는 젊은 병사를 뜻하는 듯.
선녀탕의 전설에서 사향노루는 왕과 후궁들의 측극을 의미.
하지만, 이러한 짐작들은 어디까지나 추측.
좀 더 가락국 역사 흔적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봉 능선 깊숙하게 이어진 국골
등반객 인적이 거의 끊어진 골짜기.
국골은 깊은 골짜기에 원시림이 가득.
체력과 등반기술 및 장비가 필요한 곳.
국골은 천왕봉- 하봉 - 쑥밭재- 왕등재.
- 유령계곡 또는 오봉리 하산 코스가 안전.
쑥밭재는 일제의 애국지사 석상용 선생 묘가 있는 곳.
아울러 이곳은 빨치산과 토벌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 현장.
빨치산은 토벌군에 협조한 양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학살.
토벌군은 빨치산에 협조한 양민들을 죽인 후에 매장한 곳.
쑥밭제는 마지막 남부군 활동무대지만 전략상 마을을 폐쇠.
그곳 인근 국골은 지리산 동쪽 끝 북사면 외딴 곳이지만 전략적 요충지.
인적 드문 골짜기이며 지형 자체가 산성이고, 위급할 때 쑥밭제 탈출로.
구형왕이 신라에 맞서 석성을 쌓고 항전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국골.
상원사골.
지리산 최대의 골짜기 칠선골은 천왕봉의 버팀목
천왕봉의 웅장하고 위대함도 칠선골이 있어서일듯.
골이 깊은 만큼 숨겨진 역사의 깊이도 끝이 없는듯.
과연, 국골에 피난 도성은 존재했던걸까?
옛부터 국골 깊숙히 궁궐이 있었다는 구전.
추성리 주민들이 궁궐터라 믿고있는 상원사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칠선골의 지류인 상원사골 대궐터.
그동안 난무해왔던 궁궐터 구전들.
“그 협소한 국골에 무슨 궁궐터..???”
전설 따라 그곳을 찾아간 '지리 99' 팀.
칠선골을 거느린 초암능선의 턱밑에 위치
상원사골 상부에, 기와 파편 및 축성 흔적들.
석성의 위치는 골의 물줄기가 끝나는 지점.
능선과 능선을 가로지르는 석성을 쌓아 위장.
계곡을 틀어 막아 밑에서 보면 물길이 없는 듯.
130m간격으로 똑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성을 축성
피난 도성의 축성 안에 궁궐터 지대를 상하로 구분.
편의 상 아랫 궁과 윗 궁으로 분류해서 이름 붙인다.
토기조각과 기와파편들이 있는 아랫 궁은 군주의 거처.
궁의 우측 지능에 주민들이 부르는 성문“남대문호매기”
수비군 초소 흔적으로 보이는 윗터는 수비군들의 막사터.
아랫 궁에서 윗터의 꼭지점 초암능선 날등까지는 200m,
초암능 등산로에서 내려다 보면 수목 사이로 윗터 축성
골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윗터 축성에 가려진 궁궐터.
윗 궁 아랫 궁을 합치면 궁궐 몇 채 들어설 면적
지리산 지형 특성상 너덜지대 여건이 아닌, 궁궐터
궁궐터 들머리 너덜지대는 궁궐터를 은폐하려는 흔적.
초암능선 1474 고지에서 분기한 지능이 남쪽 방어선
손에 잡힐 듯한 천왕봉, 내장을 다 드러낸듯한 중봉골,
합수골의 속살 등 발아래 다람쥐도 포착이 될 듯한 요새.
사람이 지나갈 길이 없는 요새지 남릉 주위
탐구팀이 고도 200m 낮추는데 무려 2시간 소비
그러나, 끝내 탈출을 시도해야 했을 정도로 요새
공중으로 날아들지 않고는 뚫고 들어갈 길은 없는 지형
초암능 날등을 따라 전략적인 특공대 진입이나 가능할듯.
옛부터 전해오는 구전이나 문헌상으로도 일치하는 궁궐터.
1485년 (성종 16년)에 편찬한 신동국여지승람의(권 31)
함양군 형승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
추성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에 있는 성터,
박회성은 대궐터의 성터를 말한 것으로 사료된다.
1719년 천왕봉을 등정한 <신명구>의 “유두류일록”내용
“천왕봉 수리에 고성이 있어 지금도 성터의 바위틈에서
투구나 창 도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대궐터에서 초암능선 날등만 넘으면 국골.
예전부터 국가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국골.
군량미를 보관했던 뒤주가 있었다는 두지터.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들머리 성안마을
삼국시대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추성산성 석축
두류능선 영감절터(향운대)좌측 골짜기 어영골
어영(御迎)은 임금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어영청은 신라시대 왕궁을 수비하는 기관
국골에서 군마를 훈련시킨 곳으로 알려진..말달릴평전.
두류능선상 말달릴평전 망루 역할을 했던 곳..망바위.
국골은 어느 시대 누구를 위한 대궐이었을까?
세간에서는 가야국 <구형왕>의 대궐터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 후손 김유신이 훗날 삼국통일 신라의 주역
함양은 6세기 초반 가야 연맹 중 소국인 <졸마국> 영역.
'국골은 베일 속 수수께끼를 간직한 '전설의 고향'.
성내(城內)마을
칠선골과 국골 사이에 초암릉이라 부르는 긴 능선.
이 능선 중턱에 초암이란 암자와 상원사란 옛 대찰
일제 시대 지리산 북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지름길
길은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암릉 구간이 많은 편.
추성리 추성산장 안마당에서 좌측 산쪽으로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두류능선으로 오르는 길.
우측길로 10분 오르면 좌측에 국골 성안마을 가는 길.
초암릉 들머리는 추성선장 옆 칠선교를 지나
두지동 못 미쳐 좌측 용소 방향 이정표 갈림길.
좌우길 모두 염소농장 가는 길이고 앞에는 용소
'추성산장에서 하봉까지 4시간 30분 소요.'
추성리 산 93번지 두류능선 초입 성안마을.
국골에 옛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마을.
우리나라 전략적 요충지마다 있는 성내마을.
우리나라 성내마을은 어떤 역활을 했을까?
운남면 성내마을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자.
...........운남면 성내마을.............
서해 무역 항로의 검문소가 있었던 마을
운남면 성내리 성안에 있어., 성내 마을
원래 성내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곳
현재는 16세대 25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이조시대에 만호(萬戶)가 거주한 규모의 성안 마을
마을 입구에 당산목 홰나무(괴목) 두 그루
그 앞에 옛 영광군수 홍대중의 '영세 불망비'
중국과의 교역 항로를 지키기 위한 성안 마을
중국과의 교역과 한양으로 곡물 수송을 할 때
'영산강 - 목포진 - 다경포진 - 임치진' 항로
중종 10년(1515년) 축성한 후 1895년 폐진(廢鎭)
그 규모는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돌로 쌓은 성
중선 4척 별선 4척 병사479명이 배치된 규모의 성
동문과 서문,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등
현재 성안은 네 가구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무덤 2기
사슴을 기르는 축사 한동이 있고 나머지는 개간한 밭.
장보고의 완도 청해진의 말목보다도 더 굵고 큰 말목
고대 다경진성은 서해안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곳인듯.
패총, 돌도끼, 돌칼, 삼각형석도편 등이 발견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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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 추성리는 옛부터 중국과 왜를 잇는 교역 운송로
국골 성내마을은 교역 운송로를 지키는 역활을 했던듯.
지금은 몇 가구 살지 않지만 옛날에는 큰 마을이었을듯.
왕 등 재
지리산 동쪽 끝자락에 왕등치(王登峙)에서 비롯된 지명.
즉, 왕이 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마루의 우리말 이름.
천왕봉·중봉·하봉에서 웅석봉 사이 정남향에 있는 명당.
해발 1000m급 높이지만 산청과 함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욕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는 경호강이 발 아래 있다.
천왕봉 용틀임 산세가 그대로 뻗어내린 지리산 동쪽 끝자락.
천왕봉과 동쪽 웅석봉 산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멀리 아스라이 다가오는 다도해의 물결도 한눈에 담겨진다.
지리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가을의 억새 능선
왕등재는 구형왕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왕산으로 쫓겨 최후
그 흔적으로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으로 싼 토성.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약 3m일 듯.
'구형왕이 백제 침공을 막으려 쌓았다는 추성산성 터.'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흔적들.
얼음터, 두지터, 토성과 성문, 왕등재 남쪽의 935m 깃대봉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왕등재를 궁으로 삼고 유평계곡을 요새로 삼은 듯 보인다.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요새를 구축한 이유는 뭘까?
왕등재는 해발 1000m 지점에 신비하게도 대규모 늪지대
넓이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
'왕등재 일원은 늪지대를 중심으로 광활한 분지.'
마치 세석평전과 흡사하고 1030m 고지와 아울러 천연요새.
왕등재 가는 쉬운 길은 승용차로 유평계곡 도로로 외곡마을
그곳에서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히 왕등재에 도착할 수 있다.
왕등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1030m 고지를 거쳐 밤머리재
왼쪽으로 가면 외고개와 새재·쑥밭재를 따라 하봉·천왕봉.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함양군 마천과 유평계곡을 잇는 쑥밭재·새재
금서와 유평을 잇는 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그대로 수수한 모습
가락국에 관한 역사나 문화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
옛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함양과 산청을 넘나들던 재.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로 알려진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왕등재와 웅석봉을 연결하는 고개마루인 '밤머리재'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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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곡마을에서 왕등재로 오르면 오른쪽 1030m 고지에 원형 토성.
토성 따라 일정 간격으로 자리잡은 남문·서문·북문에 석축 흔적.
국골에는 병마를 훈련했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얼음터와·두지터.
왕등재 남쪽 935m 고지의 깃대봉(군대의 깃발을 걸었다는 의미),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등이 남아있다.
왕등재는 구형왕의 도성인듯,
국골은 유평계곡을 잇는 요새.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 두 곳에 요새 구축.
그러나, 이의 실현 가능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곳을 같은 시기에 요새로 구축할 이유가 없다.
하여, 두 곳은 항전처라도 시대적 차이가 있을 듯.
왕등재가 가락국의 항전처였던 사실은 이해가 간다.
왕등재에 펼쳐진 풀밭은 발목까지 질퍽거리는 늪.
광활한 산상과 평원 위에 솟아오른 천왕봉과 중봉.
북쪽에 왕산과 이어진 능선을 두고 있어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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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년 4월 27일 왕등재(935.8m) 중턱에 4가구가 사는 외곡 마을.
이곳은 대원사 계곡으로 유명한 경남 산청군 유평리 맨 꼭대기 마을.
반달곰이 외곡마을 염소 3 마리를 공격, 염소주인은 24 마리라고 주장.
환경부는 지리산에 반달곰을 올해부터 6 마리, 총 30 마리 방사할 계획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밀렵을 우려해 반달곰을 방사한 활동영역을 비밀
반달곰은 산딸기, 도토리, 밤 등의 나무열매와 연한 산나물, 풀잎을 먹고
개미, 벌 등의 벌레를 잡아 먹는데 토종벌 농가를 습격하는 경우도 있다.
2003년에는 벌꿀 등에 대한 피해 보상으로 1억원 보험금이 지급됐다.
2001년에 방사한 반달곰 4 중 3 마리는 화엄사 입구 우리에 갇혀 있다.
산청군은 포수를 동원해 농작물을 습격하는 왕등재 멧돼지를 붙잡는다.
2002년 29 마리, 2003년 36 마리, 2004년 23 마리를 포수들이 구제했다.
태극종주 코스 초입 왕등재에서는 산행 중 야생 멧돼지를 조심해야 한다.
왕등재 일대는 가야를 애워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계선이 되는 위치.
가야의 유적지들 대부분은 교통의 중심지가 아니면, 해상무역의 중심지.
가야의 유적지는 전략적 목적보다 경제적인 효용가치가 높은 곳에 있다.
가야국의 발원지 김해에는 가야의 유물들이 많다.
부산 가야동도 가야의 옛터. 즉 가야국의 지명이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가락동 역시 가야의 옛터.
서부산. 인천. 우포늪. 교통의 중심지. 상권의 중심지.
가야 터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상 무역항, 선착장들.
우선, 비야 가야의 도읍 창녕 우포늪 일대부터 살펴보자.
..............우포 늪의 공룡 발자국 및 창녕 일대..........................
우포 늪은 1억 1천∼2천만년 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
빗방울 무늬 화석과 곤충 화석 그리고 약 6,000 년 전에 빙하 흔적.
한반도 육지의 해안선, 낙동강,우포늪은 빙하가 녹아 흘러나간 흔적.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자 육지의 빙하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던, 당시.
낙동강은 지금보다 좁았고, 화왕산에서 시작된 토평천 규모도 작았다.
빙하는 강바닥을 깎아내리고 그 깎인 돌멩이 모래가 바다로 흘러갔다.
빙하가 녹아 높아진 해수면 역류현상이 일어나자 강주변으로 둑이 형성.
그후 낙동강과 토평천 주변 둑이 오목한 그릇모양을 만들어 고인 우포 늪.
우포는 우포늪 목포늪 지포늪 쪽지벌 4개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일 큰 우포늪 소벌은 '물 마시는 소'라는 의미이다.
우포는 예전부터 소를 많이 키운 곳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소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기 적당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목포늪은 한자로 표기하면 木浦가 되는데, 원이름은 나무벌
여름엔 하천을 따라 땔감이 많이 떠내려 와 붙여진 지명이다.
사지포늪을 한자로 표기하면 砂旨浦가 되는데, 목포늪과 동일.
사지포늪은 가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늪벌이라 불렀단다.
마지막으로 쪽지벌은 4늪 중 가장 규모가 작아 붙여진 이름.
우포는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 대지면
(동경 128°25′북위 35°33′), 직선거리로 주남 저수지와는 약 36㎞,
을숙도와는 약 70㎞ 정도 떨어져 있고 현재 '자연 생태계 보전지역
전체 면적은 약 8.54 ㎢(약 854 ㏊) 여름엔 약 2.314 ㎢(약 231.4 ㏊)
우포에 물이 가득찬 면적은 서울의 여의도공원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습지가 제공해 주는 경제적인 가치는 정확히 평가할 수 없지만,
수자원 확보로 어업 및 수산업의 산실로서 막대한 수입원이 된다.
그 외에 농업, 목재 생산, 이탄과 식물자원 에너지 자원, 야생동물
교통수단, 휴양 및 생태관광을 제공하는 높은 경제적 가치가 있다.
비야 가야의 도읍지였던 창녕군 일대 곳곳은 석기시대 고인돌 유물들.
선사시대에 화산으로 알려진 화왕산(火旺山)억새풀 태우기, 큰줄다리기
그곳 박물관엔 철 무기류와 은과 금으로 만든 말 장식과 여성용 장신구류
창녕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문화재로 돌정승, 20분 거리의 부곡 유황온천
창녕은 낙동강 하류와 '교통의 중심지' 대구를 잇는 중간지점 위치에 있다.
비야 가야가 이곳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는 우포 선착장이 있기 때문 아닐까?
지금은 이곳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지만, 옛날에는 가능했을런지도 모른다.
빙하가 뒤덮혀 있었던 6천년 전까지는 좁았을 낙동강과 토평천 강폭.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이후로는 넓어졌을 강폭.
빙하가 녹아 높아진 바닷물의 역류현상이 일어난 후로는 메꿔진 강바닥.
533년전 이조 이륙의 '유두류록'을 보면 지리산은 현재 날씨보다 추웠다.
2000년 대 이후로 한반도는 아열대성 기후에 돌입한 징후가 역력하다.
육,칠천년 전엔 빙하로 덮혔던 한반도! 그후 아시아의 몇 안되는 부동항.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부동항의 가치가 높았던 한반도.
항해술이 발달되면서 한반도는 역사 상에서 강대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 옛날 가야국은 부동항을 찾아서 한반도로 민족이동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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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구형왕은 왕등재에서 신라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
신라가 마음 먹기에 따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 듯.
구형왕은 백성들의 고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항복.
신라는 구형왕에게 양왕의 칭호를 주고 준왕의 예우를 했다.
그것은 9 부족과 6 나라인 가야 연합국을 겨냥한 신라의 전략.
가락국을 합병해 남은 가야 세력의 반발을 막으려 했던 것일까?
구형왕은 김해 가락국을 인천 허씨에게 맡기고
금관가야 만 단독으로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인천 허씨는 김수로왕의 허황후 성씨를 따랐던 가락국 왕실혈통.
신라는 가락국과 합병 후 선진 철기문명 및 불교문화의 꽃이 핀다.
국골은 가락국의 구형왕이 신라와 마지막 항전처로 각오했던 곳.
구형왕이 왕등재에서 신라에게 패망한 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훗날 구형왕의 증손자 김 유신은 삼국통일 후 신라를 장악.
가락국의 마지막 10대 구형왕은 백성들을 아꼈던 인품으로 추정된다.
가락국은 원래 역사상 오랜 세월동안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던 나라이다.
고구려에게 밀려 김해평야에 자리잡은 후에도 신라와 백제에게 시달렸다.
가락국은 백제보다는 신라에 가까운 노선을 걸어왔던 국가.
가락국은 멸망한 후에도 한반도에 가장 많은 계보를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는 박씨와 이씨 성보다 김씨 성이 훨씬 더 많다.
'가락국은 패망 후에도 후손에게 신뢰받은 왕조라는 뜻일까?'
엄한 국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나라와 통치방법이 달랐던 듯.
가락국 왕조는 무역과 교역으로 축적된 자금으로 왕실을 운영.
무역과 교역을 통한 고용 창출로 농사 외 일감을 만들어 준 듯.
백제 왕실정치는 백성에게 과중하게 조세를 징수한 흔적이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 군사력 강화 및 전쟁 준비에 몰두했었다.
가락국 왕조는 무역과 교역에 힘쓴 반면 전쟁을 벌린 역사가 없다.
가락국은 상권이 백성보다는 주변국가가 교역의 대상이었던 듯.
가락국은 여러나라 선진문명을 들여와 백성들 삶의 질을 개선한 듯.
가락국 왕조는 패망 후에도 오늘날까지 후손에게 욕을 먹지 않는 듯.
가락국 왕조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왕등재 일대는 가락국의 전략적 요충지 뿐 아니라 경제적 요충지인 듯.
고구려 신라 백제의 국경 지대인 왕등재 일대
3국의 정보를 수집한 교역의 요충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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