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69. ( 산청. 단속사터. 백운동계곡. 한지. 고령토. )

donkyhote 2010. 11. 12. 03:22

 

산청.



백두대간 양대 거봉인 백두산은 단군 할아버지의 양산(陽山)
지리산은 삼신 할미 음산(陰山)이라 산청 옛지명은 산음(山陰)
산청은 '산 높고 물 맑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이란 뜻의 지명.

'534년전 점필제 유두류록을 보면, 이곳은.. 산음.'

산청군은 경남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에는 합천군 의령군
서쪽에 함양군 하동군, 남쪽에 진주시, 북쪽에 거창군 인접
동서 38.8km, 남북 40.3km로서 주위는 대부분이 험준한 산령

특히 서부는 천왕봉을 기점으로한 지리산맥이 남북으로 질주
하동,함양과 경계를 이루고 황매산이 분수령을 형성하고 있다.
함양으로부터 산청군 중앙부를 경호강이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황매산의 양천강과 지리산의 덕천강이 단성면에서 합류되어
남강을 이루는 3강의 유역인 산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지질이 비옥해 농경에 적합하지만 광활한 평야가 적은 산청.

주변 관광 명소로 대원사, 내원사,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남명 조식 유적지, 산청 양수 발전소, 덕천서원, 중산리 계곡
류의태 약수터, 구형왕릉, 황매산, 웅석봉. 율곡사, 경호강.
문익점 목면 시배지, 성철 스님 생가, 거림계곡.

가야산에서 황매산을 이어 경호강 건너 웅석봉 왕산.
가락국 화려한 역사 흔적은 지리산 일대로 이어진다.
산청군은 옛부터 지리산의 들머리이자 중심부였던 듯.

산청군은 산청군을 대표하는 관광지 <산청 9景>을 선정.
천왕봉, 대원사계곡, 황매산 철쭉, 구형왕릉, 경호강 비경,
남사예담촌, 남명유적, 정취암 조망, 한방 휴양지 9곳 발표.

제1경 - 지리산 천왕봉 :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 번지
제2경 - 대원사 계곡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
제3경 - 황매산 철쭉 : 수십만평 고원의 전국 제일 철쭉 군락지
제4경 - 구형왕릉 : 우리나라 유일의 적석총 피라미드형 7단 왕릉

제5경 - 경호강 비경 : 거울같이 맑은 강물에 그림같이 비치는 수계정,
적벽산, 백마산 일대 옛 성터와 가야유적이 있으며, 여름철 래프팅 명소.
제6경 - 남사예담촌 : 수백년 고가와 매화향기 그윽한 농촌전통 테마마을

제7경 - 남명 조식의 유적 : ‘두류산 양단수’에 나오는 시천면 덕천강변
그 일대 산천재, 남명기념관, 덕천서원, 묘소 등 유적지가 관광명소로 자정
제8경 - 정취암 조망 : 대성산 기암절벽 비경이 소금강에 비유되는 천하절경.
제9경 - 한방휴양지 : 전통 한방의 본고장으로 세계적인 휴양관광지로 발돋움

...............................................
...............................................


경남 서부에 있는 군. 면적 794.52㎢. 인구 3만 8000(2003).
동쪽은 의령군·합천군, 서쪽은 함양군, 남쪽은 진주시·하동군,
북쪽은 거창군에 닿아 있다. 군청 소재지는 산청읍 옥산리에 있다.

삼국통일 후 지품천현(知品川縣)·적촌현(赤村縣)·궐지군(闕支郡)
757년(경덕왕 16) 지품천현을 산음현(山陰縣)으로, 적촌현을 단읍현
궐지군을 궐성군으로 개칭, 산음·단읍 2현을 궐성군의 영현으로 했다.

고려 초 궐성군이 강성현으로 강등되고, 단읍현이 단계현으로 개칭
1432년(조선 세종 14) 강성현과 단계현은 단성현(丹城縣)으로 통합.
1599년(선조 32) 단성현을 폐하여 그 일부를 산음현으로 편입하였다
다시, 단성현을 복구하고 산음현은 산청현(山淸縣)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 1979년 면이 읍으로 승격
1983년 하동군 옥종면 중태리를 시천면(矢川面)에 편입시켰다.
2003년 행정구역은 1읍 10면 2 자치구 109 마을로 구분되어있다.


천왕봉 서부에서 남쪽은 하동군이고·북쪽은 함양군.
천왕봉 북동부는 황매산(1108m) 소룡산(779m)·전암산(696m)

산청군의 남부에는 주산(主山, 831m)·우방산(牛芳山, 570m)
군 북부에 갈전산(764m), 중앙부에 웅석봉(1099m)·둔철산(812m)

경호강이 군의 중앙, 양천과 단계천(丹溪川)이 군의 동부.
덕천강이 서부를 각각 남류하면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들 하천유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하나, 넓은 평야는 적은 편이다.

군의 동부는 경상계 낙동통(慶尙系 洛東統)의 지층이며
혈암·사암·역암 , 서부 지리산 일대는 화강편마암이다.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12.8℃, 1월 -0.8℃, 8월 24.6℃
연간 강수량은 1322.8㎜, 86%가 임야이고 경지율은 14%

총농가의 70% 이상이 1ha 미만의 경작지를 가진 영세농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잡곡류와 채소류 등도 많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 잎담배를 재배하며 누에치기와 축산업이 발달했다.

산청군은 고령토 전국 1위의 산지.
덕산시장은 산약초·곶감 도매 산지.
부산·마산 상인들도 찾는 재래 시장.

교육기관은 1440년(세종 22)에 창건된 산청향교가 있다
고려 인종 때 창건되어 1752년(영조 28) 중건된 단성향교,

시천면 원리의 '산천재'는 조식이 건립한 서재.
선조 9년에 유림들이 이 곳에 덕천서원을 건립.

삼장면 덕교리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금서면 화계리에는 사적 제214호인 가락국 구형왕릉.

덕천강유역에는 신라시대 절터의 단속사 지동 삼층석탑
경복궁 산청범학리삼층석탑 단성석조여래좌상은 근래 이전.
율곡사 대웅전, 문익점면화시배지 등 산청은 유적지의 보고. 


 


단속사 터 

 


웅석봉 옥녀봉 아래 단속사(斷俗寺) 옛 사찰 터.
신라 불교의 꽃을 피운 지리산 불적 가운데 하나.
수많은 지리산 사찰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융성
함양군 마천면의 엄천사와 함께 지금은 옛 절터만.

S자 형태의 지리산 능선의 동쪽 끝머리 양지 바른 터
누가 보아도 명당이라 할 만큼 산세가 빼어난 사찰 터.

단성면 소재지에서 덕산방면으로 가다보면 칠정 못 미쳐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다리 건너 웅석봉 방면에 단속사 터
조그마한 다리 입구에 다물민족학교 이정표를 볼 수가 있다.

이 다물민족학교를 따라가면 탑동 마을과 운곡 관광농원
웅석봉 아래 옥녀봉 앞의 단속사터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두 개의 탑과 매화나무가 있는 그저 평범한 시골 풍경일 뿐

단속사는 광제암문에 짚신을 벗고 절 구경 하고나면
짚신이 썩어 못 신을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는 사찰.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과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행문.
여섯 번 벼슬을 사양하고 명종 13년 11번째 지리산 유람.
1558년 음력 5월 58세에 남명 조식은 단속사에서 시 한 수


솔 아래 천년 옛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망칫돌이 대신했네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松下千年寺 人隨獨鶴尋
僧飢조朝冷 殿古野雲深
燈點峰頭月 春聲水底砧
佛殿香火死 惟見己灰心


당시 남명이 방문했을 때 단속사는 이미 폐허가 된 후.
남명이 읊은 시의 내용을 보면 사찰이 이미 폐허 상태.
1489년 김일손이 단속사를 찾았을 때와는 사뭇 대조적.

이로 미루어 단속사가 망한 시기는 1400년 말~ 1500년 초
단속사는 임진왜란 당시 정유년 재침 때 왜군에 의해 방화
정유년 방화로 완전히 폐허가 된 것으로 보아 1500년 대 초.

'김일손이 1489년 단속사를 방문했을 당시의 상황묘사.'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 가서 꾸불꾸불하고 험한 오솔길을 지나 넓은 구릉에 이른다. 언덕을 따라 북으로 3∼4리 가서는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 들어서면 깍아낸 듯한 바위에 광제암문이란 넉자가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의 글씨라 한다.... 5리쯤 거가 수림속에 지리산 단속사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문에 들어가니 오래된 불전이 있는데 매우 질박하였다. 그리고 벽화로 면류관을 쓴 두 사람의 그림이 있었다. 행랑을 따라 돌아간 긴 집 아래를 걸어 50보쯤 가니 누각이 있었다. 그 건축이 매우 걸작으로 옛날의 건축기술의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 정원에는 "정당매"라는 매화나무가 있었다... 백간이나 되는 동쪽 행랑채에는 석불이 5백개나 놓여 있는데 불상마다 모습을 달리하여 그 모습들이 신기하였다.

남명이 보았던 단속사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면류관을 쓴 벽화는 신라 화승 솔거 작품,
절을 세운 주인공 두 사람 초상화를 벽화로 그린 것

솔거는 단속사에 오기 전 경주 황룡사 벽에 노송 그림.
함양 용추사 벽에 유마상(維摩像)을 그렸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단속사의 솔거 벽화는 정유년 왜군에 의해 불탔고
용추사의 벽화는 여순 반란 사건 당시 불에 타 안타까웁다.

단속사의 창건 시기는 신충, 김옹이 면직한 경덕왕 25년
충신 이순(李純)이 속세를 떠나자 왕이 단속사를 창건했다.

경덕왕 22년 신충은 두 친구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왕이 두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전설.

신라 경덕왕 당시 단속사는 금계사(錦溪寺)라 불렀단다.
금계사라 불릴 때에는 신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은 시기.
수도하기 힘들만큼 찾는이가 많아 단속사로 바꾸어 명명.

그후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불에 타 망했다는 구전.
진주 사람 강회백(姜淮伯)은 단속사에서 독서해 문과 급제
그는 독서 할 때의 기념으로 절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매화나무를 사람들은 그의 벼슬을 본 따 정당매(政堂梅)

그 매화나무는 지금도 잘 자라 산청군에서는 보호수로 지정
탑동마을의 석탑 뒤편에 강준백의 기념비각과 나란히 서있다.
단속사의 흔적은 이 매화나무와 함께 마을 한가운데 석탑 2기

단속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3층석탑(보물 제72호)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 기와조각이 남아있다. 

 

 

 


백운동 계곡. 



“나는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한 적이 있다.

덕산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신응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1558년 남명이 두류산 유람을 다녀와 지은 유람록 후미.
여기에 덕산동, 청학·신응동, 용유동, 백운동, 장항동.
남명이 덕산에 오기 전 여생을 보내기 위해 물색한 장소

행정구역 상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는 원래 진주 금만면 백운동
1906년 산청군 금만면 지역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진주 땅이었다.
1914년에 산청군 단성면에 편입된 백운동은 단성면과 시천면 경계

백운동 표지판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서면 백운마을이다.
마을 지나 2 km 더 가면 남명이 즐겨 찾았던 백운동계곡.
웅석봉 물줄기가 30리를 내려오며 바위를 깍아 빚은 비경.
약 500년전 남명은 이곳을 지나가며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


백운동에 놀며(遊白雲洞)

天下英雄所可羞(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 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留(일생의 공이 유땅에 봉해진데 있다네)
靑山無限春風面(가없는 푸른 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西伐東征定未收(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아직 공을 이루지 못했다네)


옛날 한고조 유방이 일등공신 장량에게
제나라 땅 3만호를 봉해주자, 장량이 사양

“3만호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조그마한 유(留) 땅만 봉해 주시면 만족합니다”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놀았다.
이 시의 뜻은 큰 공을 세운 장량은 자기 공을 사양하고
물러날 줄 아는데, 천하의 영웅들은 사양할 줄 모르니,
여러 영웅이 장량의 처신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는 뜻.

남명은 백운동을 찾아 제 분수를 지킨 장량을 생각했다.
그당시 권세 대신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만 좇아 당파싸움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보살펴 줄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조정에 벼슬을 하기보다는 은거하며 평생을 보낸 남명
자신이 살게 될지 모를 백운동에 들러 세태를 나무란 것이다.
이는 가난한 가운데서 도를 닦으려는 남명의 속내를 드러낸 것

백운동 계곡 용문폭포 근처 바위에 남명을 따르던 선비들
南冥先生杖구之所(남명선생 장구지소)라는 글귀를 남겼다.
남명 선생이 다녀간 곳이란 뜻이 담긴 남명의 유일한 흔적.

남명이 살고자 했던 백운동 계곡은 유원지로 변해있다.
남명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지 없는 지 알지도 못한 채
피서객들은 계곡에 발 담그고 옛 성현의 운치를 이야기.

“산을 오르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 같고,
산을 내려오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남명 - 

............................주변 명소.....................................
화장산, 수양산, 남명조식유적, 대원사(계곡), 내원사(계곡),
산청양수발전소 전력홍보관, 남사예담촌(남사고가마을),
성철대종사생가(겁외사), 목면시배유지
.........................................................     

산청군은 깊은 산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유명한 곳.
덕천강따라 올라가면 백운계곡, 백운폭포, 오담폭포
기암절경을 감상하며 시원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산천재, 덕천서원 등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

백운계곡 동쪽에 위치한 남사예담촌 돌담길과 고택
목면 시배지(목화를 처음 재배한 곳)와 문익점 묘소

삼장면 딱바실골과 단성면 백운동계곡.
창호지 원료 닥나무 밭 골짜기., 딱바실골.
지리산 동쪽 끝자락 웅석봉 달뜨기능선 서쪽

......................찾아가는 길......................
의령군 대의면에서 중산리로 이어지는 20번 국도따라가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갈라지는 칠정삼거리를 지나 1㎞여 지점
그 들머리에 백운동 계곡이라는 팻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 단성IC→단성면 칠정마을(국도20번)
→단성면 백운마을→백운동계곡 국도3호선 : 신안면 원지→
단성면 칠정마을(국도20번)→단성면 백운마을→백운동계곡

진주에서 덕산 버스를 타고 백운마을 하차후 약 2km 거리

(삼장면 홍계리) 동촌마을~딱바실골~능선삼거리(이정표)
~954봉~고령토채취장~백운계곡~(단성면 백운리) 영산산장
걷는 시간은 3시간30분 정도이며 휴식을 포함한다면 5시간

대형차가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번덕마을까지 20분,
진주행 노선버스가 다니는 20번국도까지 10분 거리.

삼장면 석남리 대원사 들머리 삼거리
직진으로 통과하면 2분쯤 걸려 닿는 홍계교
오른쪽 마을 진입로 입구에 표지석.,동촌마을.

딱바실계곡은 즐비한 폭포와 소가 매력이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아담한 정취가 그만.
숲그늘이 높고 등로가 깨끗한 점도 청량감

감투봉 갈림길까지 30분,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5분

감투봉 갈림길에서는 물길을 따라 직진해야 한다.
감투봉 갈림길 5분 거리 합수지점 바로 위 너른 소
오른쪽은 마근담계곡 혹은 감투봉으로 가는 길이다.

백운계곡은 여기서 넓은 길을 따라 10분쯤 더 내려가
백운산 백운계곡 상류지점은 폭우에 길이 패어 거칠다.
쌍폭까지 30분, 다시 출입금지 차단기까지 15분쯤 소요.
......................................................................

 




한지 



구사마을은 대대로 문관이 태어난 고장.
딱바실골 한지 원료와 무관하지 않을듯
한지와 문관은 서로 뗄수 없는 관계이다.

새터마을은 옛부터 무관을 배출했던 마을.
무기 도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관련 있을듯.
남명은 병법에 달통했던 영남의 대학자였다.

그의 제자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홍의장군 곽재우가 대표적인 그의 제자.
임진왜란 때 왜군을 혼내준 의병대장.

남명에게 학문과 병법을 배운, 문하생.

한지는 문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
한지는 군사 지도 문서를 작성하는 원료.
무기 식량 다음으로 중요한 전략적인 물자.

선사시대는 역사 기록 이전 시대를 의미
종이가 없었던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
종이는 역사기록을 남기는데 꼭 필요하다.

역사기록을 보존하기에 적당한., 한지.
우리나라 한지는 선사시대 이후로 유명.
옛부터 중국에 수출할 만큼 품질이 우수.

딱바실골은 고령토 산지이자 한지 원료인 닥의 산지.
함양 산청이 선비의 고장인 이유는 풍부한 한지 때문.
따라서, 한지에 관해 자세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닥나무껍질 등의 섬유를 원료로 만든 우리나라 종이.
중국 화지(華紙)나 일본 화지(和紙)와 구별하여 지칭
옛날, 계림지(鷄林紙) 삼한지(三韓紙) 고려지 조선지

종이는 BC 2세기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며
천수시 팡마탄 BC 179~141년 무덤에서 발견
이 종이는 마지(麻紙)로 품질이 매우 좋아서
그 이전에 이미 종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제지술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추정은 가능하다.

첫째, 3세기말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는 시기.

둘째, 610년(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 담징.
종이 먹 채색 맷돌을 전할 때 제지술도 전수.

셋째, 4세기 말 불경과 더불어 제지술도 유입.

넷째, '닥지'는 종이의 전래시기를 대변하는 말.
닥은 한지의 주원료로 한자로 표기하면 '저'(楮)
중국에서는 BC 2세기~ AD 2세기 닥으로 읽혀졌다.

하여, 우리나라 제지술은 2~4세기 경인듯.

현재, 한지 제지술은 2~4세기 중국 제지술과 일치.
먼저 닥의 경우는 11월에 잘라 쪄서 껍질을 벗긴다.
이 흑피를 물에 불려 검은 껍질을 벗기면 백피가 된다.

이 백피를 말렸다가 잿물로 삶아 깨끗한 물에 씻는다.
요즘은 잿물 대신 가성소다(NaOH)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다음으로는 티를 고르는 작업을 거치고, 자연표백을 한다.

한지의 특징은 두껍고 질기다는 점이다.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두꺼운 것을 중시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긴 신라의 백추지(白紙)

우산 부채 책표지 등의 용도
우리나라 종이가 인기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에 즐겨 사용했다.

한지 종류는 약 230 종.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원료에 따라

저지(楮紙)·죽지(竹紙)·마지(麻紙)·
송엽지(松葉紙)·상지(桑紙)·의이지(薏苡紙)·
유목지(柳木紙)·노화지(盧花紙)·고정지(藁精紙)·
포절지(浦節紙) 순왜지(純倭紙) 잡초지(雜草紙) 태지(苔紙)

둘째, 용도에 따라

공사지(公事紙)·관교지(官敎紙)·주지(奏紙)·
피봉지(皮封紙)·봉서지(封書紙)·부본지(副本紙)·
자문지(咨文紙)·표지(表紙)·저화지(楮貨紙)·세화지(歲貨紙)

시지(試紙)·호적지(戶籍紙)·형지안지(形止案紙)·
도배지(塗褙紙)·불경지(佛經紙)·인경지(印經紙)·
수화지(手畵紙)·낙폭지(落幅紙) 등,

셋째, 산지에 따라

연산지(連山紙)·평강지(平康紙)·
전주지(全州紙)·남원지(南原紙) 등,

넷째, 형태에 따라

주지(周紙)·백권지(白卷紙)·첩지(帖紙)·
시축지(詩軸紙)·대지(大紙)·소지(小紙)·
척지(尺紙)·중지(中紙)·후백지(厚白紙)·
박지(薄紙)·선익지(蟬瀷紙)·경면지(鏡面紙)

다섯째, 가공방법에 따라

도련지(搗練紙)·주지(注紙)·금분지(金粉紙)·
황지(黃紙)·청지(靑紙)·청자지(靑磁紙)·홍지(紅紙)·
자지(紫紙)·취지(翠紙) 등, 그밖에 상화지(霜花紙)·
설화지(雪花紙)·백로지(白鷺紙)·견지(繭紙)·상지(上紙)·
대호지(大好紙)·파고지(破古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밖에 원료와 용도가 합해진 이름으로
상용마지(常用麻紙) 저상지(楮常紙) 등이 있고,
가공한 종이를 용도에 따라 붙인 상용황지(常用黃紙) 등.

[용도]

한지는 지식전달 매체가 없던 시대에 중요한 서사 재료.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서적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
고려 문헌을 보면 불경을 인출하기 위해 많은 종이가 필요

현재와 같이 사용된 시기는 이조시대부터이다.
서책, 각종 관공문서, 창호, 꽃, 종이돈, 그림
부채·우산 등에도 많이 사용되어 중국의 호평

이조시대 이후 벽지로도 사용했으며,
종이를 꼬아 생활용기 장식품을 제작.
지승공예(紙繩工藝)는 사대부들이 취미

형태도 바구니 가방 상 물병 지갑 등 다양
오늘날에는 서화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며
특별한 풍취를 낸 서간지로도 유통되고 있다.

질기고 부드러우며 탄력성과 번짐성이 있는 판화지
보존성이 뛰어나 작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재료
한지는 기계지보다 50배나 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요즈음, 한지 작품 작가들이 늘고 있어 매우 고무적.

...............................................
...............................................

한지는 우리민족 생활 속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
오늘날까지도 세계 속에 한지의 우수성을 펼치고 있다.
한지는 '닥'이 주원료 순 우리말로 '닥종이'라 부른다.

신라시대 중국에 희고 곱게 다듬은 종이가 수출되었고,
고려시대 인쇄술 제지술이 발달로 질 좋은 종이를 수출
고려의 희고 광택이 있으며 질긴 한지는 당시 천하 제일.

주로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한 용도로 가장 많이 소비
일반 민중속에서 다양한 공예 기법을 창조적으로 발전
전통적인 생필품과 장식 예술품 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령토(高嶺土). 



산청은 고령토 산지이자 한지의 산지.


선사시대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토기 종류.
고령토는 토기 종류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원료.
따라서, 고령토 산지가 곧 선사문명이 발생한 고장.

사기와 자기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 원료.
종이 고무 도료를 비롯한 여러 물건을 만드는 점토.
고령토는 중국에 있는 산(카오링 산) 이름을 딴 것

고령토는 프랑스, 영국, 독일의 작센 지방,
체크, 슬로바키아, 미국에서 채취되었는데,
미국 남동부지방에 유명한 고령토 광상(鑛床).

고령토는 종이 틈새를 메우고 표면광택 내는데 사용.
종이에 점성 색깔 불투명도(不透明度)를 주는 필수성분
종이 표면에 인쇄를 할 수 있는 것도 고령토 때문이다.

'고령토는 대가야( 도읍 고령)의 상징.'

2, 3세기경 낙동강 하류에 존재하던 가야 소국들
가야, 가라, 가락, 임나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 5가야, 6가야, 7가야국, 포상(浦上)8국,
임나(任那)10국 형태였으나 집권국가를 못 이룬 채
562년 대가야(大加耶)를 마지막으로 신라에 병합된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 군대로 가야를 공격
그 사건을 기준으로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로 구분.
전기 가야는 가락국, 후기 가야는 고령 대가야가 중심

선진문물 관문 위치에 있었던 남해지역 가야 소국들
일찍이 받아들인 중국 선진문물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ㆍ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 동외동 패총, 울산 하대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 문물

가야와 신라는 회청색 경질 토기와 적갈색 연질 토기
대표적인 토기로는 굽다리접시와 그릇받침 등이 있다.

가야와 신라의 토기는 거의 유사.

가야 토기가 신라 토기에 비해 곡선미
가야토기 구멍은 아래 위 일렬로 배치.
가야 토기는 토우장식 토기와 상형 토기

경질 토기는 굴가마를 이용해서 만들어
민무늬토기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구워내
회색빛이 감도는 단단한 토기를 말한다.

청동기는 구리, 주석, 아연 산지가 한정되어 있고,
장신구 무기 외 농기구 공기구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철기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 및 무기의 발달
철기문명은 고대 국가의 정복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영남지역은 철의 산지였기 때문에
일찍 철기문화를 접한 가야 소국들.
철기문화를 일본으로 수출되게 된다.

가야 문명의 철과 관련된 유물로는
창원 다호리 1호분 자루 없는 도끼,
김해 양동리 유적 '판상철부' 도끼

북방문물과 관련되는 가야의 철기 유물
마구류와 갑옷, 투구류를 들 수 있는데,
대성동고분군의 발굴 유적을 통해 볼 때
가야지역은 4세기 경 기마술이 보급되었다.

당시 갑옷과 투구 형식이 통일된 것으로 보아
그것들이 대량생산되었으며, 늦어도 4세기에는
중무장한 강력한 전사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 이외에도 고령 지방에서 발굴된 가야의 금관
찬란한 금속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

한반도의 청동기 발굴상황은 4400~4500년전
황하문명 4200년 전보다 약 200~300년 앞선듯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개시도 앞선듯.

유리(장신구)는 단군조선 BC 5세기 경 사용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 유리구슬
BC 5세기 납을 혼합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에서 유리 구술 제작시기는 BC 2세기 경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구술.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단군조선의 유리구술.

금강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보다 앞서 있다.
비파형동검(고조선 청동검)은 남한원료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