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4. ( 무당. 광대. 신내림. 내림굿. 굿. 민간신앙. )

donkyhote 2010. 11. 12. 03:18

 

 

무당.




민간에서 전승되는 무속(巫俗)의 사제(司祭).
무당 또는 무인(巫人) 무격(巫覡)이라고 한다.
무당은 지역 별로 각기 독특한 고유 명칭이 있다.

서울·경기 지역은 기자(祈子) 만신 박수(남자무당),
호남에서는 단골·단골레, 영남에서는 무당·무당각시,
제주도에서는 심방이라 하는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사제

굿 이외에도 예언·치병 등의 역할을 하는 무당.

무당은 크게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나뉜다.
강신무는 신이 내렸다, 신이 지폈다, '신들렸다' 는 무당.
세습무는 무당의 가계에서 태어나 무업을 이어받아 된 무당

강신무는 한강 이북의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와
태백산맥 서쪽으로 한강 북쪽에 해당되는 강원도지역에 분포
한강 이남( 경기도·경상도·전라도 제주도 동해안)은 세습무

강신무 경우 남녀가 모두 무당이 될 수 있지만,
세습무 경우 모두 여성이며 제주도에만 남녀 공존

강신무 경우, 무병 강신체험을 겪어야 하고,
무당이 되기 위한 제의인 내림굿을 해야 하며,
내림굿을 해준 무당으로부터 수련을 거쳐야 한다.

비록 신이 내렸을지라도 굿 절차를 주관할 수 없으면
무당이 될 수 없어 수련 과정은 강신무에게 필수적이다.

세습무는 가계를 통해 무업을 전승,
강신무의 무병 같은 강신체험이 없다.

강신무와 세습무는 다른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강신무는 신단이 있고 세습무에게는 신단이 없다.

강신무는, 신 내림을 통해 신의 계시를 전하지만
세습무는 신을 내릴 수 없어 신내림 과정이 없다.

강신무는 무당 자신이 신들려 직접 신의 역할을 하지만
세습무는, 노래·춤·재담·놀이가 중심이 되어 연희성

강신무는 신내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타악기 위주이며
가무의 가락 속도가 빠르고 흥분된 도무(跳舞)가 뒤따른다.

세습무는 타악기 외 취타악기·현악기까지 다양하게 동원
가락이나 춤의 속도가 완만하며 신복(神服)을 입지 않는다.

세습무는 신의 하강로를 의미하는 신간(神竿)을 세우지만,
강신무는 무당 자신이 신을 내릴 수 있어 신간이 필요없다.
우리나라 무속에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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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원주민의 종교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
무당은 자연세계와 초자연세계 간의 중개자로서 중심
공동체의 의사 상담역, 타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자

무당은 보통 사춘기 때 '내림' 형식을 통해서 되는데,
사냥 어로활동 중대 사건들에 관해 사적 의식도 수행.
한강 이북의 세습무는 시베리아 무당으로부터 비롯된듯.

................세습무[世襲巫]..........................
부모로부터 무당의 신분이나 무직(巫職)을 물려받은 무당.
전라도 '단골레', 경상도 '지모산이', 제주도 '심방' 등

어렸을 때부터 무당인 부모로부터 춤이나 악기연주, 노래(巫歌),
의상, 제상차림, 조화 및 전지(煎紙) 만들기, 부적, 점복(占卜) 등
무업을 배운 무당 세습무는 영험보다는 재주를 가지고 무업에 종사

오랜 시간 무업을 수련하므로 이들의 무예는 매우 뛰어나며
오늘날 이들의 무예는 독자적인 예술로 인정받을 정도이다.
세습무 무당 가운데 명창이나 가수로 전업하는 경우도 있다.

무업을 세습하는 사회적인 신분제도에 그 원인

특히 이조시대 무업은 천한 직업으로 고정된 신분
자식은 부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무업에 종사해야 했다.
또한 무당의 피는 혈통적으로 유전된다는 편견도 작용했다.

이처럼 신분이나 혈통적으로 특수하게 취급받았기 때문에
같은 무업계통에 종사하는 사람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고,
그결과 동해안 남무(男巫)인 김석출(金石出)의 가계처럼
대규모의 무가(巫家)를 대대로 형성한 가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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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전문적으로 연희(演戱)를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광대
광대는 출신 성분과 하는 일, 소속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

① 얼굴, ② 얼굴에다 물감을 칠하는 것, ③ 가면(假面),
④ 가면을 쓰고 노는 사람, ⑤ 창우(倡優) 우인(優人) 재인

노래·소학지희(笑謔之戱)·판소리·가면극·인형극·춤·곡예
흥행물이 될 수 있는 민속 예능의 거의 전분야를 두루 했던 광대.
8천(八賤)에 속하는 천민으로 양수척(楊水尺)·백정의 신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당과도 특별한 관계가 있었는데
무당의 남편 무부(巫夫)가 광대로 되는 일이 흔했다.

놀이 이외에 다른 생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걸식도 하고, 사당패같이 유랑해, 늘 멸시의 대상.

산대희(山臺戱) 등의 국가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과거급제자 유가(遊街) 등 양반에게 재주를 팔기도 했고,
일반 민중을 상대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기도 했다.

판소리로 평민문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광대
특히, 전문 판소리 광대의 출현은 이조후기 소리광대
명창은 높은 대접을 받으며 벼슬까지 얻은 자가 생겼다.

광대는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세분될 수 있다.

첫째, 관민(官民)의 관계에 따라 궁중광대·
관청 광대·재야 광대·절충형 등이 있었다.

둘째, 생활방식에 따라 유랑광대·향인(鄕人)광대·절충형
남사당패 대광대패 굿중패 솟대쟁이패 등 이조후기 유랑광대
반드시 가무잡기를 펼쳐서 먹고 사는 전문 예인광대들이 동참.

셋째, 전문 예능에 따라 소리광대·탈광대·곡예광대
춤광대·잽이광대(三絃六角을 전문적으로 하는 광대)·
풍물광대·익살광대·덜미(인형)광대·절충형으로 분류

넷째, 출신 성분에 따라 무계(巫系)·농민계·승려계·
유랑인계·한량계·몰락양반계·불구자계·시장상인계·등

이조 후기의 광대들은 광대청이라는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
각도 우두머리를 대방, 대방 밑에 우도 도산주와 좌도 도산주
도산주 아래에는 집강(執綱)·공원(工員)·장무(掌務)를 두었고
군 단위에는 청수(廳首)라는 우두머리와 공원·장무를 두고 운영.

광대청은 광대들의 교육 전수·공연활동·연락·준비·
행사관리 등을 맡았고 오랜 시일에 걸쳐서 학습을 받아
스스로 예(藝)를 깨우쳐 전문 예인의 길로 접어 들었다. 
 



신내림. 



초자연적인 외부의 힘을 받는 민속적 종교적인 상태.
비정상적 행동, 비명, 신음 이상한 말을 되뇌이는 행위
몇몇 종교들은 초자연적인 이러한 상태를 인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악마에 씌웠다고 불러온 몇몇 상태를
이제는 간질 히스테리 몽유병 정신분열증로 다룬다.

'신내린' 사람은 무언가 죄를 범했다고 여기기 탓에
회복을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물을 통해 그 죄를 속죄

신내린 사람은 영(靈)을 다스리기 위한 매개자로 여겨
영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 전통이 영매(靈媒)
약물, 북소리, 집단적 히스테리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다.


.........
내림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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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사람에게 무당이 되도록 행하는 굿.
신들린 사람의 잡귀 잡신을 벗겨내는 '허주굿
주신(主神)을 받아들여 새 무당을 탄생시키는 굿

하여, 내림굿은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한강 이북의 강신무 지역에만 존재한다.

본래 허주굿과 내림굿은 별개의 굿이었으나
요즘에는 허주굿의 과정이 내림굿에 포함된다.

굿의 절차는 일반 재수굿에 내림굿 절차가 추가 진행
허주굿은 고통과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강신자를 정화
강신자가 새 현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

강신자는 신복(神服)과 무구(巫具)를 찾음으로써 확인.
'말문을 연다'는 것은 처음 신의 말을 주는 것을 의미.
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존재인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강신자가 신의 사제임을 보여주는 것
장래의 손님들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강신자는 자신에게 내린 신 이름을 밝혀야 한다.

'몸주신'은 강신자가 평생 모셔야 할 신.

내림굿을 마친 강신자는 별호를 얻게 되는데,
이는 인간세계에 속하는 존재가 아님을 의미.
강신자와 내림굿을 해준 무당은., 神父母 관계

신부모에게서 무업(巫業)에 필요한 것을 배워야 한다.
굿의 절차와 내용은 물론이고 수많은 종류의 무가(巫歌),
절차에 따라 달라지는 춤과 음악, 굿상 차리는 방법과 과정.

굿의 과정에 등장하는 무구의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
이렇게 무속의 절차와 내용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서
갓 무당이 된 강신자는 점차 성숙된 무당으로 성장한다.




굿.



무(巫)의 역사는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 예 무천(舞天)
고대 부족국가에서의 제천의식이 오늘날 무(巫)의 유래

제천의식 무속신앙은 이후 삼국시대까지 전승
이들 제례의식은 성격상 시조제 농신제로 분류.
삼국시대에 유교 도교 불교 등의 영향을 받는다.

외래 종교와 혼합형태를 띠며 민중들 사이에 정착.
오늘날 산신각(山神閣) 삼성각(三聖閣) 등이 그 예
무당신을 불교 사원 속에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신라 진흥왕 때 화랑제도,
고려 팔관회 연등회, 도교, 풍수지리
도참사상 속에서도 그 맥을 이어왔다.

신라시대 팔관회와 같은 굿은 나라굿으로,
이를 통해 백성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형성.

고려시대 나라의 천신제나 시조제와 관련하여
전통적 기능을 담당후 불교 및 도교에 의해 분화

통일신라 중기(8세기경)부터는 기복신앙이 형성되고
고려 말에 현재와 비슷한 굿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조시대 유교의 국교화로 불교와 무교가 탄압받지만
고려시대보다 더욱 강하게 무(巫) 의식을 갖게 했으며
그로 인해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종교들이 무(巫)와 융합

무속신앙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로서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역할
이러한 '굿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탄압을 받는다.

특히,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던 마을굿
일제는 농업장려운동의 한 부분으로 두레굿만을 허용
굿패들이 굿을 하는 데 있어 농악이라는 명칭만 사용

일제의 탄압은 굿을 농업에 국한된 음악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장애요소로 인해 전통무의 관습이 끊어지고 만다.

굿에서 제를 받는 신의 종류는 3가지로 분류.

첫째, 가신(家神)으로 조왕신·삼신·지신·성주신·
조상신 대감신 업신 우물신 우마신(牛馬神) 문신(門神)

둘째,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동신(洞神)으로
산신·서낭신·부군신·당신(堂神) 등이 속한다.

셋째, 집과 마을 밖의 외부신(外部神)에 속하는 것으로
천신 천왕신 칠성신 시준신 제석신 용신 요왕신 장군신
군웅(軍雄)신 신장(神將)신 손님신 창부(倡夫)신 잡귀 등.

동제는 마을 수호 동신(洞神)에게 주민들이 드리는 제의
당굿 도당굿 서낭굿 부군당굿 별신굿 등이 이에 속한다.
어촌마을 동제는 풍어굿 용신굿 연신굿 서낭풀이 별신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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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는., 굿.
제물을 바치고 가무와 의식절차를 하는 제의(祭儀).

무당이 하는 굿 이외에 삼남 지역의 동신제(洞神祭)
농악에서 징·꽹과리·장구 등의 풍물을 올리는 메굿.
제의를 올리려면 신도와 사제자 무당이 있어야만 한다.


< 유래. >

기록이 거의 없어 유래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한국무(韓國巫)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올라간다.
문헌 상 가장 오래된 제의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제천의식.

고대 부족국가 제천의식에서부터 무(巫)가 유래.
제천의식 무속신앙은 삼국시대까지 그대로 전승
이들 제례의식은 성격상 시조제·농신제로 분류.

무속신앙은 삼국시대 초기를 지나면서
유교·도교·불교 등 여러 종교의 유입
차츰 전통 무속의 기본구조를 바꾸었다.

전통무속은 차츰 새로운 외래 종교와 혼합형태
종교의 사상적 배경이 민중 삶속에 자리잡는다.

오늘날 사찰의 산신각(山神閣)·삼성각(三聖閣) 등
무속 신앙을 불교 사찰 안에서 받아들였던 흔적이다.

이밖에도 신라 진흥왕 때 화랑제도 팔관회의 실시,
고려시대 팔관회·연등회의 실시, 도교·풍수지리·
도참사상 등과 외래 종교는 토속 무속신앙과 혼합

신라시대 팔관회와 같은 굿은 전국적인 나라굿
이를 통해 민중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형성했다.

고려 때 나라의 천신제나 시조제와 관련해
그 기능은 불교 도교에 의해 분화되기 시작.

통일신라 중기(8세기경)부터는 기복신앙이 형성
고려 말기에 이르러 현재같은 굿의 형태를 갖춘다.
이조시대에는 유교의 국교화로 불교와 무속을 탄압

그러나, 오히려 고려 때보다 훨씬 더 무속이 성행.
이 시기에는 외래종교와 전통 무속이 더욱 더 융합

무속신앙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로서
역사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역할
이러한 '굿문화'는 19세기 후반부터 쇠퇴한다.

기독교 도입과 일제 치하의 이조문화 말살정책
무속은 다른 민속문화보다 심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마을굿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매우 심했다.

한편 일제 치하에서 두레굿 만을 허용 권장했다.
농악이란 명칭을 사용해야만 허가받을 수 있었다.
일제탄압으로 굿은 농업에 국한된 음악으로 전락.


< 구조. >

굿은 춤과 공수라 하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주술로 신령이 부르고 춤과 접대 등으로 대접한다.
그리고 무당은 제가집에 신령의 말(공수)을 전한다.

무당은 신령에게 감사의 뜻으로 춤 노래 술 등을 대접.
신령을 기쁘게 한 후 돌려보내는 것으로 굿을 마감한다.
굿의 끝판에는 신령 이외에도 잡귀 잡신을 위로하게 된다.

'굿은 청신(請神) - 대접,기원 - 송신(送神) 3단계.'


<무당의 역할>

무당은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알리고
신의 결정을 인간에게 알린다.

이러한 역할은 평소 상태로는 불가능하고,
춤이나 노래를 통해서 몰아의 경지에 빠져
자신을 잊고 신의 대리자가 되어야 가능하다.

무당의 종류는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

강신무는 신이 들려서 무당이 된 경우로서
신어머니와 신딸의 관계로 굿패를 구성한다.

세습무는 신들림의 경험이 없이
친척·인척으로 굿패가 구성된다.

강신무는 한강 이북 태백산맥 서쪽 지역권,
세습무는 한강 이남지역과 동해안 강원지역

특히 세습무는 혈연관계에 의해 무당이 되기 때문에
신의 영향력이 강신무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인정돤다.
그러나, 결속력이 강해 자신들만이 고유 영역을 갖는다.

특히 동해안 세습무들은 태백산맥 동쪽을 장악.

제주도에서는 세습무와 강신무가 모두 공존한다.
점치는 무구를 무당의 조상으로 섬기는 점이 특이.
강신무는 여자를 만신(萬神), 남자는 박수라 한다.

'습무 사이에서는 여자무당을 당골 혹은 단골.'


< 신의 종류.>

굿에서 제를 받는 신의 종류는 3가지로 나뉜다.
첫째, 가신(家神)으로 조왕신·삼신·지신·성주신·
조상신·대감신·업신·정신·우마신·문신(門神) 등

둘째,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동신(洞神)으로
산신·서낭신·부군신·당신(堂神) 등이 속한다.

셋째, 집과 마을 밖 외부신(外部神)에 속하는
천신·천왕신·칠성신·시준신·제석신·용신·
요왕신·장군신·군웅(軍雄)신·신장(神將)신·
손님신·창부(倡夫)신·잡귀 등이 있다.


<굿의 종류>

굿은 신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종류도 많은데,
굿의 규모·지방·목적·성격에 따라 구분한다.

'비손'(두 손을 비비며 신에게 소원을 비는 일)
'고사'·'푸닥거리' 그리고 규모가 가장 큰 '굿'

비손은 무당 혼자서 축원을 위주로 하는 약식굿이고,
고사는 대개 10월 상달에 추수를 기뻐하면서 하는 것.

푸닥거리는 잡귀를 쫓아내는 약식 의례로서
2~3 무당이 장구나 제금 같은 악기를 올리고
간간이 춤도 추는데, 3~4시간을 넘지 않는다.

굿은 신에게 바치는 음식·술·옷·지전(紙錢)장식
따위를 벌여놓고 여러 명의 무당과 무악(巫樂) 반주
춤·노래·축원·촌극·묘기·재담 등이 어울린 의례.


<지방에 따른 굿의 종류>

서울 지방 굿은 재수굿·병굿·진오기·
성주맞이·내림굿·당굿·진적 등이 있다.

비손으론 겜심바침·여람·푸닥거리·
영장치기·집가심·액맥이 등이 있다.

경기도 굿은 당굿·재수굿·병굿·
천근새남(진오기새남)·성주맞이
비손으론 삼신받이·씨앗고시·
푸닥거리·진오기 등이 있다.

경기도 굿은 서울 지방과 비슷

충청도는 성주굿·모기굿·당산굿 등의 굿이 있고
비손은 삼신축원·삼신풀이·객귀물림·안택 고사

함경도는 재수굿과 망무기굿(망묵이굿)
수왕굿이란 망자의 천도를 비는 굿이다.

황해도는 재수굿·산거리·수왕굿·
진오기·삼신받이·대택굿 등이 있다.

호남은 성주굿·영화굿·도산굿·축원굿·
성주맞이·병굿·환자굿·중천굿·명두굿·
곽머리·씻김굿·혼굿·연신굿·신굿 등등,

비손은 지앙맞이·삼신받이·근원손·
고사·액맥이·사제맥이 등등이 있다.

영남은 논부굿·도신굿·치방굿·삼제왕굿·
별상굿·맹인거리·광인굿·오구굿(오귀굿)·
해원굿·수망굿·물굿·별신굿·풍어제가 있고,
비손은 삼신풀이·손풀이·댓머리 등이 있다.

제주도는 불도(佛道)맞이·칠성제·맹감풀이·
일월맞이·성주풀이·서낭풀이·산신풀이·
시왕[十王]맞이·귀양풀이·큰굿·하직굿·
연신·요왕맞이·당굿·뒷맞이가 있고,
비념(비손)으로는 푸다시·비념굿·
마누라배송(拜送) 등이 있다.


<목적에 따른 굿의 종류>

무신제(巫神祭)·가제(家祭)·동제(洞祭)로 나뉜다.
무신제는 다시 강신제(降神祭)와 축신제(祝神祭)로
강신제는 신내린 사람이 무당이 되기 위한 성무제의

지역에 따라 내림굿·신굿·명두굿·하직굿 등

축신제는 꽃맞이굿·단풍맞이굿·진적·대택굿.
가제는 산 사람을 위한 생전제의(生前祭儀)와
죽은 사람을 위한 사후제의(死後祭儀)로 구분.

생전제의는 그 목적에 따라 6가지로 나뉜다.

① 기자육아기원제의(祈子育兒祈願祭儀)
아이의 탄생기원, 출생한 아이의 무병장수

삼신받이·겜심받이·삼제왕풀이·삼신풀이·
불도맞이·칠성제(七星祭) 등이 있다.

② 치병기원제의(治病祈願祭儀)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제의로는
병굿이나 푸닥거리가 일반적이고
영장치기·산거리·주천굿·명두굿

특정한 병을 치료하기 위한 굿으로는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 ? 별삼굿·손풀이·
마누라배송, 눈병예방·치료를 위한 맹인굿,
미친 병을 치료하는 광인굿·두린굿 등이 있다.

③ 가옥신축(또는 이사)제의
새 집을 짓거나 이사를 가면
성주맞이 또는 성주풀이를 한다.

④ 혼인축원제의
결혼 전날 아침에 조상에게 혼사를 알리고
성혼(成婚) 후의 행복을 기원하는 굿으로,
서울지역의 여탐과 호남 근원손이 있다.

⑤ 제액(除厄)·행운기원 및 기풍제의(祈豊祭儀):
행운이나 풍요를 빌고 액을 물리는 굿으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행해지는 주기제.

재수굿·영화굿·축원굿·성주굿·도신굿·
논부굿·치방굿·씨앗고사·맹감풀이·일월맞이·
안택굿·큰굿·산신풀이·고사·액맥이 등이 있다.

⑥ 해상안전·풍어기원제의:
해상의 안전이나 풍어를 비는 굿
연신굿·용왕굿·요왕맞이 등이 있다.

사후제의도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상가정화(喪家淨化) 및 망인(亡人) 천도제의:
상가 죽은 사람을 극락세계로 가게 하는 소규모 굿,
자리걷이·집가심·곽머리(씻김)·댓머리·귀양풀이

② 익사자(溺死者) 천도제의:
익사자 영혼을 건져 올리는 굿
물굿·수망굿·혼굿·혼건지기굿

③ 망인 천도제의:
망인 천도를 위한 굿,
진오기굿·천근새남·오구굿·
망무기굿·수왕굿·해원굿·씻김굿·
시왕맞이굿·다리굿 등이 전국적 분포.

마을 수호 동신(洞神)에게 주민들이 올리는 제의
봄가을 농촌 마을 동제와 어촌마을의 동제로 구분

농촌마을 동제는 제액(祭厄)풍농제의로서 액을 막고
풍농을 기원하는 당굿·도당굿·서낭굿·부군당굿·별신굿
어촌마을의 동제는 풍어굿·용신굿·연신굿·서낭풀이·별신굿.


<성격에 따른 굿의 종류>

축제굿·어업굿·연극굿·음악굿·가정굿·
모금굿·액맥이굿·놀이굿 등등이 있다.

축제굿에는 별신굿·판굿·잠희굿·난장굿·단오굿
어업굿에는 선창굿·배따라기·재굿·띠벳굿·풍어제·술비굿
연극굿에는 산대놀이·오광대·도둑재비·양반포수·파계승·일광놀이·탈춤

음악굿에는 소리굿·시나위·농부가·
사당굿·오화굿·신청·걸립굿·나례굿

이밖에도 가정굿에는 우물굿·성주굿·도와굿·
청룡굿·대문굿·고간굿·지신밟기가 속하며,

모금굿에는 구걸굿·걸립굿·걸량굿(동양굿)·굿중패.
액맥이굿에는 이사굿·거북놀이·사자놀이·황소굿
놀이굿에는 석전굿·고싸움굿·차전놀이·수박치기·
횃불싸움굿·기와밟기굿·농사놀이굿이 포함된다.

굿에는 음악이 따르는데 이를 무악이라고 하며
무가의 선율과 반주음악, 무무(巫舞)의 반주음악,
기타 의식 반주음악은 각 지역마다 악기편성,

무속음악은 무가 형식, 장단·선율
무무의 반주음악 등이 각각 다르다.

 

 


민간신앙.



신석기시대 간빙기는 인류에게 큰 두려움.
빙하가 녹자 바다 속으로 잠긴 삶의 터전
하룻밤 사이에 수십리씩 사라져가는 육지.

천재지변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재앙.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저지대에서 고지대를 향해 목숨을 건 탈출.
대홍수, 질병, 전쟁에서 살아난 소수 인류.

하늘을 천신으로 섬기며 제를 올렸을듯.
최초의 민간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듯.
부족을 위기에서 이끌던 통치자가 제사장.

천제의 최초 제사장은 여성이었을듯.
남성보다 위기감지 능력이 탁월한 여성.
하여,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통치자는 무당.

다가올 미래의 위험을 예견하는., 존재.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주술적인 힘.
신의 계시로 민족을 이끄는 존재., 무당.

한편, 만년설이 녹아내린 히말라야 초원.
목초지가 말라 삶의 터전을 잃은 유목민들
하천 따라 한반도까지 유목 민족들의 대이동

유목민족과 농본민족 간에 피할 수 없는 전쟁.
고조선은 유목 민족과 농본민족의 연합 공동체
부계사회로 바뀌며 무당은 통치자 권한을 상실.

'무당은 굿을 주관하는 무속인으로 전락.'

우리나라 민간신앙을 총칭하는 무속(巫俗).
좁은 의미에서 무속은 무당과 관계된 종교
무(巫)란 '신명(神明)을 다해 춤추는 사람'

'巫'자의 '工' 양변에 '人'자는 춤추는 모양
무당이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 가무를 하는 것.
무당은 여무를 칭하며 만신(萬神)이라고도 한다.

남무(男巫)는 박수 박사(博士) 또는 화랭
화랭은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유래된 말.
광대 우인(優人) 재인(才人)도 무당을 뜻

이조시대 무당은 8천(八賤)민 중 하나

선사시대 청동방울·청동거울·청동두겁 등
무속이 청동기시대에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제정일치사회에서 무당의 권한이 절대적.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도(蘇塗)는 신성지역
신라 2대 남해왕조(南解王條)는 왕 그 자신이 무당
고려시대에 이르면 현존하는 무속과 거의 일치된 기록

무속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많은 탄압을 받았다.
고려시대 신유학(新儒學)은 무속 폐해를 지적하고
무속배격 운동, 안향(安珦)은 상주에서 무당을 통제.

〈고려사〉열전에 권화가 요민 이금을 처단한 기록 등
이조 후기 무속은 유교의 강력한 배격에 당면하게 된다.
신당을 파괴했던 이조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의 행적

1702년(숙종 28) 삼읍(濟州·旌義·大靜) 음사(淫祀)와
불사(佛寺) 130 개소를 파괴, 무격(巫覡) 400 명을 귀농
무당의 풍기문란·민중현혹·재산갈취 음사금지법 5개조

동서활인원제(東西活人院制)·무세(巫稅)·
무사금률(巫祀禁律)·무의·출성(出城) 같은
무속금제(巫俗禁制)의 법적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무속에 의지해 왕권에 도전하는 사례도 발생
태종대에 강신공창하다가 처벌된 요무(妖巫) 백이(栢伊),
세조 때 상왕복귀 요언모역죄로 능지처사 당한 무녀 용안(龍眼),

연산군대 요술로 혹민하던 무녀 돌비(乭非) 등
요(妖)는 곧 혹세무민자로서 능지처사를 당했다.

아울러 민란 시기마다 확산되어나갔던 남조선신앙·
정감록·미륵신앙 운동은 무속과 관련된 왕권 도전.

무속은 외래종교 이전부터 우리민족의 생활 일부
신라시대 이차돈의 순교로서 불교가 공인된 기록
그만큼 전래 무속과 새로 유입된 종교가 빚은 갈등

불교·유교·도교는 여러 측면에서 무속과 하나

칠성각(七星閣)·산신각(山神閣)·삼성각(三聖閣)·
삼불제석 등은 불교와 무속이 융합한 대표적인 예.
칠성신앙 남강노인은 도교 요소와 결합된 민간신앙

당산제 당산굿, 서낭제 서낭굿은 무속과 유교의 결합.

무속은 마을신앙·집안신앙·주술·점복 등을 포함
마을신앙은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해
1년에 1~2번씩 정기적으로 갖는 풍어굿·풍농굿 제의

각 지역 및 신격에 따라 당산제·동제·영등제·
골매기굿·서낭굿·동신제·장승제·거리제·우물굿

집안신앙은 집 안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신격들인
성주·삼신·터주·조왕·대감·업·문신·곳간신
등을 모시는 의례로 정초 안택이나 시월상달 고사.

집안신앙에는 독경(讀經)도 포함되며
경잽이가 집안에 와서 안택이나 환자굿
이때 '천수경'을 읽어 환자 치병과 축귀.

충청도는 앉은반 독경이 유명하며 장님이 행한다.
점복은 운명을 예언하는 전문적인 복사(卜師)가 행
쌀점·새점·복점·육효점 동식물숭배와 사귀신앙 등

이러한 토테미즘은 산신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나
단군신화 곰과 연관되어 민간신앙의 기초를 형성

사귀신앙은 도깨비 수비영산(잡신) 왕신(처녀귀신)·
몽달귀신(총각귀신) 같은 사귀를 모시는 무속 의례로
사귀의 상징물로는 제웅 처용탈 도깨비문양 등이 있다.

자연신앙은 돌·나무 등의 자연물에 신이 있다는 믿음
당산목·서낭목·입석신앙·기자신앙 등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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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려 시대에는 장승을 장생(長生),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엽까지는 장주(長柱),
그후 장승(長丞) 장승(長承) 장주(長柱) 장선(長善)

우리 말로는 더승ㆍ쟝승ㆍ쟝성ㆍ쟝선ㆍ장신

장승을 부르는 이름도 지방마다 달라
평안도 및 북부지역은 더승 혹은 더신
경기도는 장승(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충청도 일대에서는 '수살 수살막이 수구맥이'
몸체 동서남북 사방에 장승 이름을 써 넣었다.

영호남에서는 벅수 벅슈 법수 미륵 등으로 부르고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호남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주도는 돌하루방, 글은 새기지 않았다.

장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경덕왕 18년(759)
전남 장흥 보림사 경내 보조선사영탑비에 장생표주

《삼국유사》에는 청도 운문산 선원에
11개의 장생표탑(長生標塔)ㆍ국장생(國長生)ㆍ
황장생(皇長生) 등은 돌기둥으로 훗날 돌장승

처음에는 입석이나 목주(木柱)가 후세에 산신이나 칠성,
불교 사천왕과 연합, 武人을 조상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장승은 석장승과 목장승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

대개 목장승은 통나무에 무서운 형상의 얼굴을 조상
남장승에 홍색, 여장승에는 황색을 채색하기도 하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외에 마을간 거리를 써넣는다.

장승은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

절 입구에 사원장승, 마을 입구에 벽사장승,
이정표 겸 노신으로 길가에 세우는 노표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에 세운 비보장승
제주도 하루방처럼 성문 앞에 세운 수문장장승

현존하는 장승 중 가장 오래 된 것
전북 부안군 서외리 성문안 돌장승
이조 초 숙종 15년(1689)에 세운 것

전남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터 돌장승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명문과 함께
숙종 43년(1717)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다.

1725년 실상사 모자 쓴 돌 남장승

왕방울같은 눈은 툭 튀어나와 있고
코는 주먹코이며 가슴까지 긴 수염
송곳니가 아랫입술 위로 삐져나와서
무섭다고 하기보다는 해학적인 형상.

목장승도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 많겠지만
쉽게 썩어 목장승 자체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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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의 대상 솟대 = 신간(神竿), 조간(鳥竿)
그 장대 위에는 1∼3마리 목조나 철조가 앉아 있다.
조간은 대개 동구 밖 장승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명칭 외 짐대, 진또배기 또는 '별신대'
장대 끝에는 한 마리 혹은 세 마리의 조형(鳥形)
때로는 용사(龍蛇) 형상 등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거제도에서는 솟대를 별신대라 하여
3년에 한번씩 별신제 때 신간이 된다.

솟대의 명칭으로 나오는 솟ㆍ솔ㆍ소
이조 초 무헌에는 등(騰)이나 용(湧)
몽고와 만주어 용목(聳木), 고간(高竿)

소대ㆍ솟대 = '소도(蘇塗)' = 까마귀

우리 조상들은 산의 영물 호랑이를 산신으로,
나그네의 벗인 말을 노신격(路神格) 서낭신으로
곡식을 없애는 쥐나 참새를 잡아먹는 구렁이를 업

이외에도 소를 조사의 상징,
돼지를 지신, 개를 객귀의 상징
까마귀와 까치 등의 조류를 신성시

비둘기는 주몽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유화가 아들 주몽에게 보내는 신모의 사자

고대인에게 암흑을 막을 태양의 상징물 = 까마귀

까마귀는 불길함, 재앙을 예시해 주는 신성한 영조
(달 = 오리, 여자 = 따오기, 물 =외가리)로 바뀐다.
그후 (학ㆍ용ㆍ봉황) 등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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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뼈요 흙의 정(精)이며 기(氣)의 핵"
고인돌처럼 무덤, 사후 안주처로 사용한 돌.
돌탑은 민간신앙 차원에서 매우 신성한 존재

사람들은 바위와 돌로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탑을 신앙하고 공경하였다.
사찰 석탑, 또는 제단 누석단(累石壇),

고개마루에 있는 서낭당,
마을의 삼재를 막는 조산

돌탑은 장승처럼 보통 2개를 쌓고
할아버지탑, 할머니탑으로 부른다.

아울러, 돌탑 내부 감실에 넣는 내용물들
오곡단지 금두꺼비 쇠스랑 부적 숯 등이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는 곡식단지,
금두꺼비는 지네를 잡아먹으라고 금으로 만든 두꺼비
숯과 소금은 마을에서 도깨비 불장난을 제어하라는 뜻.

간수(소금)는 부인들이 살림을 알뜰하게 하라는 뜻
거북이는 불과 상대되는, 음성적인 물에 사는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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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민간신앙.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계승적인 신앙이다.

고대 자연종교를 저변으로 하는 애니미즘 단계.
애니미즘으로부터 발전한 영혼 또는 조상 숭배
농경 어업 생산 생활과 밀착하여 산영(産靈)신앙

천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물상
땅에는 지맥을 통해 생기가 흐르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생기를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흥망이 좌우

그 생기를 타는 방법은 조상의 뼈를 통해서 전달
그러므로 후손이 번창하려면 명당을 찾아야 한다.
오행의 기는 땅 속에 흐른다는 믿음이 풍수지리설

풍수지리설은 천지개벽에서 비롯된 민간신앙.
제 4 빙하기 말 신석기시대에 잦았던 천지개벽.
인류는 오직 생존을 위해 지구를 방황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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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에서 농경 가축사육의 역사가 1만 5,000년 전
서아시아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은 6,000년 전의 일.
따라서 유목이라는 생활양식은 농경사회가 성립한 후 분기

유럽에서는 5,000~7,000년 전에 농경과 가축사육이 시작
신석기시대인 4,000~5,000년 전에 와서야 청동기시대로 이행
핀란드에서 서시베리아 삼림지대는 5,000년 전쯤 신석기시대

중국은 6,000년~7,000년 전 곡물·가축·토기·마제석기
동남아시아에서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5,500년 전으로 추정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는 BC 3000 ~ 2000년 시베리아 쪽 계통

서해안으로 들어와 남해안을 거쳐 동북지방으로 전파
김해 농소리, 부산 다대포, 사천 구평리, 양산 신암리
주로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과 암사동 집자리 유적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약 150 군데
약 6,000년 전 강 바닷가 움집에 살며 주로 조개를 채취
강가에서는 그물추, 바다에서는 이음낚시를 포함해 낚시

깊은 바다 물고기뼈들이 출토되어
먼 바다까지 나갔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배만들기와 항해술도 발달

깊은 바다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변형 귀뼈인 사람뼈도 발굴된다.

사슴 노루 등의 짐승과 멧돼지.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 여우 뼈도 출토
털을 얻으려고 겨울철에 주로 사냥한듯.

집짐승을 기른 흔적은 신석기말 경에 출토된 집돼지뼈
치레걸이 예술품 옷도 만들고, 외부와 교역도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고조선 고대국가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단군 이전까지 농본사회에서는 무당이 부족들을 통치.
단군이 출현하면서 모계사회는 부계사회로 전환된다.

천신을 섬기는 제석단은 부계사회의 소산물.
성모를 섬기는 성모사상은 모계사회 소산물.
천왕성모는 부계사회 전환기의 민간신앙인듯.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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