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6. ( 최초의 빨치산., 남도부. 하준수. 보도연맹. )

donkyhote 2010. 11. 12. 03:20

 

최초의 빨치산.,남도부.

 

 


부산 산악인들이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를 조직
칠선계곡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1964년이다.
그들은 학술조사 보다는 등산로 개척이 주 목적

소와 폭포에 산악회 이름을 본따 명명한 것이 본보기
이 학술조사대는 칠선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
수령 200~300년 거목들로 만들어진 함지박들을 보고 경악.

선발대로 학술조사대보다 먼저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 님
기업형 도벌꾼들 '목마로(木馬路)' '도벌댐'을 보고 충격
칠선계곡은 전란후 이미 도벌꾼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 산악인 학술조사대의 첫발'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
그런데 도벌꾼 훨씬 전에부터 산막 치고 살았던 은둔자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군데군데 산 흔적들.

 

.............................보광당..........................................

2차대전 중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우리나라 젊은이들

일본을 위해 개죽음 할 수 없다 생각하여 도주하거나 잠적

중국군을 찾아가 입대하거나 임정을 찾아가 광복군에 가입.


징집을 피해 지리산에서 소규모 무장투쟁을 벌렸던 보광당.
하준수는 학도지원병제를 거부하고 귀국해 지리산으로 은닉.

징병거부 청년 300명 중 73명을 모아 1945년 3월 보광당 조직.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연합군과 호응할 군사훈련 실시

....................................................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명에 이르렀던 칠선계곡.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듯.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 놓고 숨지도 못했을듯.
어쨌든 칠선계곡은 오랫동안 지리산 최대 은신처였던 곳.

일제 징병을 피해 이곳에 숨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 징집을 피해 칠선계곡에 은둔

해방후 남한 유격대 총책 '최초의 빨치산'이 된다.
남도부는 무쇠같은 체력과 유격총책으로 정신무장
칠선계곡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무수히 오르내렸다.

그는 칠선계곡에서 은둔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칠선계곡에서 키워왔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났다.
빨치산 투쟁 전주곡과 같은..최초의 천왕봉 무장봉기

남도부 빨치산부대(야산대)는 1948년 5.10 단선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아지트를 만들어 운영했다.

구례지방 박종하 야산대가 피아골에 본거지를 둔 것과 달리
이들은 천왕봉 꼭대기를 아지트로 삼은 것도 대비가 되는 점.
남도부 부대원은 100 여명 설과 500~600명 대병력이었다는 설.

이들은 5월10일 천왕봉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단선 저지를 위한 경찰관서 습격과 방화, 우익인사 암살,
통신망과 철도 파괴 등 2.7 투쟁 행태를 되풀이하려 했다.

1948년 5월 10월 천왕봉에서 남도부 무장봉기 계획.
사전에 그 정보가 경찰에 흘러들어간 D -데이 사흘 전.
5월7일 토벌대가 선수쳐 천왕봉으로 새까맣게 몰려갔다.

천왕봉으로 통하는 골짜기마다
토벌대가 빼곡이 들어찼을 정도.

토벌 1진은 함양에서 마천을 통해 칠선계곡으로,
다른 2진은 백무동계곡 따라 천왕봉으로 몰려갔다.
2진은 중산리 하동의 토벌대 1진과 장터목에서 합류

하동 토벌대의 또 다른 1진은 법계사에서 천왕봉 행
산청 토벌대 1진은 쑥밭재에서 하봉, 중봉타고 천왕봉
산청 2진은 내원사에서 써리봉 거쳐 중봉 통해 천왕봉.

천왕봉의 남도부 부대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남도부 빨치산 부대는 엽총 몇 자루가 무기의 전부
대원들은 거의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하고 있는 형편
소총과 중기, 박격포로 중무장하고 죄어오는 토벌대들.

마침내 교전이 벌어지자 서서히 물러가는 토벌대.
24명이 부상입은 남도부 부대도 천왕봉에서 퇴각
그들은 지리산을 떠나 비쭉산 야산으로 숨어든다.

"토벌대도 모두 완전 무장할 수는 없었다.
우익청년들은 대창만 들고 천왕봉으로 갔다.
당시 국민회 서기 김 모씨는 와이셔츠에 양복.
빨치산이 없는 줄 알고 천왕봉 행" - 남도부 상권-

총소리가 들리자 토벌대에 동원된 청년들 대부분이 도망
설마 빨치산이 천왕봉에 버티고 있을 줄 상상도 못한 것.
오합지졸 토벌대는 제 총소리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던 것.

토벌대가 그렇게 흩어지자 남도부 부대원들도 퇴각

천왕봉 무장 봉기는 어린이들의 병정놀이처럼 마감
토벌대에 동원된 우익 단체도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
피비린내 나는 전투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

1948년 5월 천왕봉에서 최초의 무장봉기를 했던 남도부
그후 지리산 빨치산 전사들의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친다.
이 남도부는 당시 함양군이 배출한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남도부의 특별한 이력과 투쟁 역정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도 소개.
<지리산>에 등장하는 20여명은 실존인물

이규, 박태영, 하준수, 이현상, 이태, 하영근, 김숙자.
이들 가운데 하준수가 곧 빨치산 부사령관 남도부로 활약
빨치산 남도부, 부사령관 하준수는 작가 이병주의 친구였다.

1921년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이른바 '학병(學兵) 세대'.
소설 <지리산>은 남한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기록한 작품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있던 일.

징병을 피해 입산한 학생들이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를 주요 무대로 한 남도부 대원들의 투쟁

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 세대'에 연재
1977년까지 7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병주 作 대하 소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 - 이병주 -

소설 <지리산>은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인생유전을 그린 작품.
소설 <지리산>은 상당 부분 이태의 <남부군>과 일치

이태가 원고를 작가 이병주에게 봐달라고 넘겼는데,
많은 부분이 소설화 되어 소설 <지리산>에 실린 것.
소설 <지리산>에서 하준규가 은빛 강물을 보며 한 말.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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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수.

 

 

 

 

남도부의 생가는 함양 병곡면 도천리.,일명  우루목.

이제 우루목 주민들은 이념과 상관없는 선량한 표정들.

마을 갯가 나리꽃의 꽃술엔 호랑나비의 애무가 진득하다.

 


 

옛 우루목 주민들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나리꽃으로 환생한듯

 


한 시절을 호령했지만 지금은 폐가가 되다시피한 그의 생가.

 

 

 


 

그의 생가는 7채 이상 당당한 기와집이었다는데

지금은 본채 만 남았고 담벽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세월의 무상이 무엇인지?'

 


 

능소화..양반이 아닌 상민이 뜰에 심으면 곤장칠 만큼

예전에는 양반집의 정원에만 심을수 있었기에., 양반꽃

 


 

하준수 남도부의 무덤.

 

시신도 없어 지리산 참나무를 베어 무덤을 썼다.

돌보는 이가 없는지 그의 무덤에는 잡초 만 무성

 

일제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일제 경찰에 쫓겨

지리산에 들어가 보광당을 조직 항일무장투쟁

해방 정국에서는 잠시나마 이승만의 경호대장

 

함양을 공산화 시키려했던 덕동무 권유를 뿌리친 그.

일제시대 친일 경찰 출신들 공작에 의해 지리산에 입산

결국 남로당에 가입하게 되고, 당 지침에 맞춰 비합법투쟁

 

월북해 6.25 동란에 인민군 중장 계급을 달고 전쟁에 참전

휴전 시까지 인민 유격대(빨치산) 총책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준수 외에 남도부 이름은 김일성의 작전명 때문.

남도부(南道釜) = 남조선 경상남도 부산을 탈환하라

 

후방교란을 위해 1954년 대구 지하투쟁을 추진 중

특경사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 하에서는 민족의 배반자 친일경찰들에 의해 쫓기고,

일제가 물러간 뒤 그들에게 다시 쫓기다가 34 나이에 운명.

 


 

함양 상림 내에는 그의 신도비가 있다.

해방이 되자 지리산에서 자신의 조직인

보광당 대원을 데리고 국군경비대를 조직

 

당시 우후죽순으로 난립한 국군경비대였지만,

남도부가 이끄는 부대는 일산불란하고 모범적

그의 항일운동 전력때문에 결속력이 강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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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람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곳이 있는 지리산.

그만큼 넓어 격변기마다 피난처이자 은둔자들의 삶터.
전남, 전북, 경남과 연결된 험준한 산악 지형.,지리산

 

 

경남도당

 

경남 도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의장 중심으로

지리산 하봉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불꽃사단 활약.

 

 

경북도당

 

경상 동부 산악지대는 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주도.

남도부(하준수)가 이끄는 동해여단과 별도로 활동.

 

 

충남도당

 

대둔산을 거점으로 도당 위원장 남충열이 사령관

추격이 심해지자 전남 완주군 운주면으로 이동.

 

 

전북도당

 

회문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도당 위원장 방준표, 부위원장 조병하

 

 

52년 1월 인민군 최고사령부 지시에 의해

남도부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시작된다.

 

제1지대 : 소백산지구

제2지대 : 속리산, 영동, 계룡산

제3지대 : 일월산, 보현봉 일대.

제4지대 : 이현상의 남부군(지리산, 덕유산, 운장산) 

제5지대 : 운문산, 관용산을 거점으로  울산 부산, 마산, 산청. 

제6지대 : 무주, 옥천, 영동, 보은, 금산.

 

그러나, 이미 남한 내 빨치산이 거의 괴멸

하여, 빨치산 조직 개편은 별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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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해방정국과 1950년 6.25 건국 초

그 혼란기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한 빨치산들.

죽음을 각오할 만큼 신념이 옳다고 자신한 용사들

 

또한 그들 중 상당수가 항일 경력이 있던 사람들

그런데도 그들은 북한으로부터는 소모품처럼 취급

미군정과 신정부로부터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것.

 

여순반란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서 벌교지역을 접수해

인민재판과 토지개혁을 실시했던 빨치산 두목 염상진

조직원들과 산속으로 숨는데서 시작하는 소설 태백산맥

 

그들은 잠시 6.25 직후 인민군의 진주로 해방의 감격을 맞이

그러나, 퇴각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가지 못하고 입산한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김일성 등은 그들을 남겨둔채 휴전협정

 

이때부터  빨치산들은 자신의 투쟁목표를 상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민공화국을 위한 순교자

결국 사면초가 상황에서 투항이냐 죽음이냐하는 선택 뿐.

 

'태백산맥 소설 속에서 그들의 선택은., 죽음.'

  

 

 

 

 
보도연맹(保導聯盟)

 
 
 
 
1949년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의 구체적인 운용책 중의 하나.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
 
이 단체에 빠짐없이 가입하도록 규정해 놓았고
그들에 대한 회유와 통제를 손쉽게 하도록 했다.
 
1949년말까지 이 단체 가입자는 약 30만 명에 달했으며,
1949~50년 당시 좌익세력을 와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
그러나, 6. 25 때 일부 위장전향자들과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
 
그 세력을 뿌리뽑는다는 정부방침에 의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실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상은 공개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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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보도연맹.
좌익 세력을 보호하고 교육한다는 의미의 조직.

하지만, 이것이 지역 별로 할당을 주게되었고
지방마다 숫자를 많이 채워 공을 세우려 했다.
좌익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

 

돌이켜 보면, 답답할 만큼 순박했던 농촌사람들

실적을 채우려 조금만 위협하면 보도연맹에 가입.
6.25 전후 반공이란 미명 아래 약 20만명 이상 학살.


 

그 양민을 학살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경.


그저 농사나 짓고 자식 교육 밖에 몰랐던 양민들

1950년대 전후 지리산 산간마을에 살았던 양민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죽어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미궁 속., 사건

 

그 누구도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피해자 유적들은 유골이라도 화장하고 싶다는 소망.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다.

과오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당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 유족들에게 최소한 보상은 해야한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역사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만 한다.

과오로 인한 억울한 고통을 뒤늦게나마 덜어줘야 한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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