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5. ( 칠선계곡. 선녀탕. 김경렬씨 개척보고서 )

donkyhote 2010. 11. 12. 03:19

 

 

칠선계곡. (지리산 제 10 경)

 

 

 

목욕하는 선녀의 속살까지 들여다보일 것만 같은 비선담 옥빛 물.

 

 칠선계곡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



햇살을 받아 그대로, 튀는 칠선계곡 개울물.

 


............................................................쑥밭재.....
..........................................................................↖
................................................* 국골~~~~~~~~>하봉...........무재치기 폭포.
............................................................................./.....치밭목 산장.. 대원사.조개골.
......................................↙..................................중봉
.................................↖......................................./~~~~~*마야계곡(중봉골)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청소년 수련장.
........................................↖................↙.........제석봉
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산장....산희샘.......중산리 계곡.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영신봉....한벗샘...........↗..삼신봉.............청학동.


지리산 최대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자랑하는 칠선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3대 계곡.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탕에서 천왕봉까지 장장 16km에 이른다.
계곡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골은 더욱 깊고 날카롭다.

칠선계곡은 지형이 험해 일명 "죽음의 골짜기"

칠선계곡은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천왕봉까지 9.4km
위험성 때문에 상당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진 등산로.
발길을 둘 곳 없을 정도의 계곡은 험한 산세의 연속.

추성리를 출발하여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에서부터
두지터, 망바위,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른다.

자연휴식년제로 출입 통제함.
(2006. 1. 1~2007. 12. 31)
칠선계곡 (비선담~천왕봉 구간)


.........................찾아가는 길.........................................
추성리 매표소 -0.5Km- 두지터(두지농장) -2Km- 선녀탕. 옥녀탕.비선담
-3.5Km- 칠선폭포 -0.5Km- 대륙폭포 -4Km- 마폭포 -3Km- 천왕봉
(총 !4 Km, 등반할 때는 7시간, 하산할 때는 5시간 도보거리)

경남 함양읍을 떠나 칠선계곡의 벽송사 서암을 찾아 가는 길
'지안치' 라는 지그재그 고갯길은 추성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함양읍∼24번국도(마천 방향)∼1023번 지방도∼지안치
∼오도재∼지리산 조망공원∼의탄교(마천면)∼칠선계곡.

의탄에서 계곡따라 오르면 18 Km,
칠선계곡은 산세가 험해 위험하다.

추성리에 벽송사가 볼만하고, 옛 가락국의 식량창고였던 두지터.
가락국 구형왕이 신라군에게 쫓겨 최후의 항전을 벌렸다는 국골.
그당시 가락국 군사들의 식량창고였다는 칠선계곡 초입의 두지터

용소 선녀탕 청춘홀 칠선폭포 합수(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 볼만.
초암릉 국골과 칠선계곡 사이 암릉은 바위봉우리 연속으로 위험하다.

추성동은 칠선계곡과 동떨어진 들머리.
의탄마을은 계곡따라 올라가는 들머리.
........................................................

이조시대 칠선계곡 들머리는 의탄마을.
그곳부터 출발해야 계곡미 진수를 감상.

...............1472년 유두류록 속의 의탄마을................
1471년 함양 원님 김종직은 이듬해 음력 4월 지리산 등반.
제자 유호인 조위 한인효과 휴천계곡을 거쳐 의탄마을 당도

'서너 모퉁이 돌아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은 아래 개울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듯.'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이 동행한 제자 유호인에게 심중을 드러낸 말이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은 칠선계곡 청정계류가 흐르는 명소.
김종직 일행은 의탄마을에 도착하기 앞서 용류담을 지나친다.

김종직 보다 17년 후 두류산에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
인간 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 듯 했다... 못가의 돌들
고기 비늘무늬를 새긴듯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경.'
.....................................................................................

칠선계곡은 7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7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상징하며, 한반도 민족에겐 행운의 숫자.
불교 단체에서 중요한 행사는 대부분 7의 배수 날자로 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7선녀 전설을 간직한 세 곳

지리산 칠선계곡,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제주도 서귀포 천제연 폭포.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
군수가 제천을 올린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 화경으로 인화.
날씨 흐리면 부싯돌로 점화하는 7선녀는 단군신화에서 비롯.

단군이 제천할때 7선녀가 합그릇을 받들었다는 기록에서 유래.
옛부터 7 선녀를 왕 또는 신선을 모시는 선녀로 여긴 우리나라.
제주도 서귀포 천제연폭포 '칠선녀 전설'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서귀포 천제연폭포 '칠선녀 전설'........
옥황상제를 모시는 칠선녀가 별빛 속삭이는 밤이면
영롱한 자주빛 구름 다리를 타고 옥피리 불며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감고 노닐다 올라간다 하여 천제연(天帝淵)

'하느님의 못'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는 천제연.
울창한 난대림 사이로 3단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은 장관
제1폭포 못 수심은 21m, 제2, 제 3 폭포를 거쳐 바다로 간다.

특히, 암석동굴 천정에서 떨어지는 제 1 폭포
백중, 처서에 맞으면 모든 병이 사라진다고하여
탐방객들이 찾았으나 현재 수영이 금지돼어 있다.

일곱 선녀상을 조각한 천제연 계곡 '선임교'
아치형 다리와 '천제루' 누각이 세워져 있다.

천제연 주변 난대림에는 솔잎난이 자생하며
담팔수,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류, 빗죽이나무, 감탕나무 등 상록수
푸조나무, 팽나무 등이 혼효림을 이루고 있다.

서귀포시 칠선녀축제위원회가 주관하는 칠선녀제.
칠선녀제, 다례시연, 도립무용단 및 연예인 축하공연,
칠선녀 공연, 멀티미디어 및 불꽃놀이와 한밤의 영화극장

2006년 10회를 맞는 칠선녀제는 중문 관광단지 대축제.
중문(中文)에서 文은 글이란 뜻으로서 인식하고 있지만
'아름답고 찬란하고 착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

칠선녀는 북두칠성 칠석(음력 7월 7일)에서 유래.

칠석은 중국 도가에서 유래되었지만 한중일의 세시풍속.
심지어 사찰에서까지도 칠석날에 신도들을 불러 모으고
마음을 깨끗이하라면서 며칠 후 '백중날' 준비를 시킨다.

무속에서는 무병성장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밀국수와 밀전병을 만들어 칠성신에게 기원
칠석 신앙은 당나라 무렵에 성행했고 신라시대에도 성행.

칠석 신앙은 엄격히 말하면, 우리나라 민족의 민간신앙.
칠석 신앙은 당나라 이전에 고조선에서 유래되었기 때문.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는 BC 7199 년 경 시작.

바이칼 호수 근처의 환국(桓國)이 7세, 3301년 동안 지속,
환웅이 BC 3898년 산동반도에 배달국을 세우고, 신시에 도읍

배달국은 18세, 1565년간 이어진다.
그리고 BC 2333년 단군이 세운 조선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된다.

BC 108년 위만조선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연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 온 위만이 창건했고.
위만조선은 4대까지 왕위가 이어졌으나, BC 108년 패망

한나라가 이곳에 한4군 설치 - 중국 <전한서> 기록.

우리나라 역사는 태초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까지 무려 9204년이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3년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단기 4338년 역사를 갖고있는 셈.

도가에서는 칠석날 칠성낭랑(七星娘娘)에게 제사
칠성낭랑은 일곱 분이며 칠성의 음신(여신)이다.
칠성(음신 & 양신)에서 북두칠성이 곧 양신(남신).

따라서, 칠성낭랑이 바로 도가의 칠선녀.

제 1 현상선녀(玄上仙女)
제 2 영상선녀(靈上仙女)
제 3 영비선녀(靈妃仙女)
제 4 신비선녀(神妃仙女)
제 5 금개선녀(金蓋仙女)
제 6 신화선녀(晨華仙女)
제 7 옥화선녀(玉華仙女)

이조 중기 김만중이 쓴 소설 구운몽

오랜 세월 수절했던 모친을 위해서 쓴 책.
세상에 태어나 함께 환생한 팔선녀를 만나
사랑하고 부귀공명을 누리지만 꿈이란 줄거리.

따라서, 팔선녀는 상상 속의 가공인물.

...................................
...................................

천왕봉에서 중산리 반대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계곡.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3 대 계곡.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7 폭포수, 33 소를 품은 칠선계곡

천왕봉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18km 에 걸쳐 이어진 계곡.
지리산에서 여성을 상징한 유일한 지명일 만큼 까탈스럽다.
칠선계곡은 조난사고가 많이 발생해 일명., '죽음의 골짜기'

전문 산악인들의 해외원정 동계훈련 적지인 험준한 지형.
여름철 우중산행할 때 칠선계곡에서 천왕봉 구간은 위험.
추성동에서 천왕봉까지 14km (추성동-함양읍 운행 버스)

.....................................................
.....................................................

함양경찰서 소속의 마천 산악구조대의 구조활동 주무대.
칠선계곡 들머리 의탄, 한신계곡과 백무동 들머리 강청리,
벽소령 들머리 삼정리를 활동 지역으로 산악 인명구조를 한다.

구조대가 가장 바쁜 때는 방학과 휴가철이 맞물리는 7, 8월.
해마다 이 때면 하루 24시간 비상근무로 숨돌릴 틈조차 없다.
구조대 창설 초기에 비해 요즘은 산악사고가 감소 추세에 있다.

94년 1월 칠선계곡 동계훈련 특전사 군인 척추부상 사고
95년 한신계곡의 급류에 갇힌 등산객 3명을 밤새도록 구조.
칠선계곡 일대는 구조대가 상주할 만큼 조난사고 다발지역.

지난 7년간 자연 휴식년제로 묶여있던 곳.
2006년부터 단계적으로 개방하고 있는 코스.
지방 지자단체와 환경단체 등이 첨예하게 대립.

이곳은 야생곰, 노루,삵 등 야생 포유류의 서식처.
다양한 우리나라의 고산 희귀 동식물 씨앗 저장고.

'공단 지리산 관리사무소 고병준 소장.'

2006년 이후 자연 휴식년제는 그대로 연장 적용.
추성리 매표소에서 선녀탕까지 3km 출입구간 허용.
선녀탕,옥녀탕,비선담 안전시설 및 보완공사 완료.

추성리 주민들은 칠선계곡 개방을 요구.

"주말에 등산객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주로 벽송사 관광객들이 주 수입원이지요.
하루 속히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방했으면.."

그러나, 반달가슴곰 관리팀의 한상훈 팀장

“치밭목에 방사한 연해주산 반달곰 6 마리중
일부가 내년쯤 칠선계곡으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
하여, 칠선계곡 상류를 개방하면 안될 것이라 주장." 



...........
두지터. 
............


 

 

 


수직에 가까운 골짜기가 깊고도 깊은 칠선계곡.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함양 마천의 칠선계곡.

칠선계곡에서는 마지막 산마을..두지터

2.5km 아래에 있는 추성동마을 느티나무 점방.
두지터 주민에게 온 우편물은 그곳까지만 배달.
우편물은 먼저 본 사람이 주민들에게 배달한다.

1970년 대에 전기가 들어왔고
1990년 대에 전화가 가설됐지만
아직까지 도로는 뚫리지 않은 때문.

하여, 두지터 5가구 주민 운송수단은 지계.
자동차 대신 집집마다 두 세개 지계가 있다.
원래, 두지터는 이헌상 남부군 사령부가 있던 곳.

백무동의 인민군 사령부
벽송사 인민군 야전병원
그 중간에 위치한 두지터.

김일성이 격려차 보낸 해당화.
그 씨앗이 퍼져 해당화 자생지.
아무튼 해당화가 지천에 널린 곳.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두지터.'

가락국 식량창고인 뒤주가 있었다는 전설의 고향.
19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이곳에 지어진 집 한채
부엌 2개 딸린 주택에 이주시켰던 지리산 화전민들.

현재, 두지터 주민은 5가구에 10명.

................두지농장............
1980년대 은퇴 후 내려온 여균호씨,
1만 2천평 농원에는 1천구루 호두나무.

1/3은 야생동물들의 먹이감이고
1/3은 오가는 등산객들의 몫이라
1/3은 그의 몫은 오육십 만(?)원.

호두 수확이 한창이던 2006년 9월 중순에
현장답사 겸 여균호씨 집에서 하룻밤 민박.
순박한 부부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곳.

이젠 하룻밤 묶어가도 후회없을 규모의 사설 산장.
멧돼지가 농사지은 수확물을 다 먹어치울까봐 걱정.
한겨울엔 아무리 감춰 놓아도 밤새 다 찾아 먹는단다.

등에서 지계를 내려놓을 틈이 없는 여균호씨.
그 바쁜 틈에도 찐고구마 접시를 내미는 부인.
.................................................

.................허정 씨................
연하천 옛 산장지기 허정씨 칠순부부.
산나물 반찬이 별미인 두지터.. 민박집
약초꾼 문상희씨 따라서 이곳에 정착했다.
...............................................

................약초꾼 문상희 씨................
추운 겨울에는 산바람이 매우 거센 곳.
장작때는 불편 탓에 외지에서 겨울내기.
지난 겨울에는 문씨 혼자 마을을 지켰다.

올해는 두어 명이 더 남아 외롭지 않다단다.
문씨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인(茶人)이었다.
진주 경상대 시절(1981년) 진주에 다람 전통찻집

1983년 화개 다우당 찻집에서 차와 다구를 생산.
지금 화개골 찻집이 80곳이지만 당시 세곳에 불과.
차주걱과 다포(찌꺼기를 거르는 체)는 그가 처음 개발.

서울 인사동 다구들도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다구 전시회도 개최.

전국에 차와 관련된 지명(897개)을 조사
그의 대학 졸업 논문 ‘한국 야생차의 연구'
한동안 다도를 즐기는 이들의 지침서로 통했다.

지리산과 차에 미쳐 대학을 9년만에 졸업한 그.
한때 쌍계사에서 출가해 내원암에서 3년간 스님.
그가 두지터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는 1993년 경.

중국차가 몰려오자 미련없이 화개골을 떠난 그.
칠선계곡 두지터에서 약초차를 만들고 싶은 마음
이 일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약초를 캤던 곳.

“칠선계곡엔 한국의 약초들이 거의 다 있어요.
헛깨나무가 지천인 이곳 약초의 약성은 강한 편.”

흙으로 지은 담배막 ‘흙내’라는 나무간판
그곳에서 차 연구에만 몰두해왔던 문상희 씨.

다구 깎는 조각칼도 버리고 심마니가 된 그.
그렇게 꼬박 4년 연구 끝에 개발한 차..‘초향’

둥굴레, 오가피, 두충, 산작약, 당귀, 산다래,
구지뽕, 의성초, 오미자, 솔잎, 감잎, 칡순 등
봄에 나는 100가지 안팎 약초 새순으로 만든 차.

양이 많지 않고 찾는 이가 많아
봄이면 만들자마자 동이 난단다.
요즘‘백초정’이란 효소를 연구.

“약초찾는 사람 중에는 사형선고 환자가 많아요.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돈 욕심을 낸 적은 없어요.
귀한 약초는 연이 닿아야 하고 주인이 따로 있는 법.”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들도 그를 많이 찾는다.
몇해 전 지리산 반달곰을 카메라에 담은 MBC 제작팀
‘반달곰은 살아있다’ 제작팀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문씨는 요즘 금낭화, 개불알꽃 등 야생화를 재배.
산은 사람에게 쉽사리 품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독 자신은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하는 문상희씨.

그가 받은만큼 산을 지키고 싶다는 문상희씨.
- 2004.04.29.~8시 / KBS1 피플세상 속으로 -
.................................................... 


 


선녀탕. 

                            

 


▲ 곰이 목욕하는 일곱 선녀의 옷을 감추었다는 선녀탕

 

 

 

 

 

 



▲ 비선담, 칠선계곡에서 허용된 등산로의 끝.


추성리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곧장 가면
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가는 길을 표기했지만
안전을 고려,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

계곡 따라 5백m를 오르면 만나는 용소
산신제 때 산 돼지를 집어 넣는 곳이다.
그곳에서 2 km 더 오르면 두지동(두지터).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 두지동은 화전민들의 마을이다.
현재 담배건조장과 농막만 남은 등산객 휴게소

담배 건조장은 찻집으로 변해있고
창암능선 넘으면 백무동으로 가는 길.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아래에서
들릴듯 말듯 전망 좋은 쉼터 추성망.
여기서부터는 험난한 계곡 길의 연속.
추성동에서 4km 지점, 선녀탕부터 험로.

선녀탕 전설에는 칠선계곡의 유래가 담겨있다.
7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
돌과 모래로 메워져 선녀 목욕장소로는 초라한듯.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7선녀가 목욕할만한 곳.
선녀탕 바로 위에 선녀들이 몸씻기 적당한 너럭바위.
옥녀탕에서 샤워처럼 너럭바위로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

그 앞 너럭바위는 선녀가 샤워하기 알맞는 장소.
선녀탕에서는 선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곳.
선바위와 두 줄기 폭포 사이에 있는 너럭바위 공간.

선녀들이 몸을 숨기고 목욕하기에 적당한 장소.
그 아래 선녀탕은 선녀들이 뛰어놀기에 안성맞춤.
아득한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오늘날 등산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선녀탕 목욕처.

7선녀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듯한 선녀탕 인근 등산로.
그렇다면, 이곳이 선녀탕이라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선녀탕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이곳 풍경을 음미해보자

.................. 칠선계곡 선녀탕의 전설............................
7 선녀가 목욕 중 잃어버렸던 옷을 되찾아 준... 사향 노루.
그 옷을 훔쳐 바위 틈 나무가지에 숨기고 몰래 훔쳐 본... 곰.
(오늘날 등산로로 이용되는 그곳 나무숲 사이의 너덜바위 지대)

목욕을 마친 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옷을 찾아 헤멘 선녀들.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곰이 바위 틈 나무가지에 옷을 숨긴 곳이 우연히 잠든 노루의 뿔.

그 후 선녀들은 사향 노루를 그곳에서 살게 했고 곰은 국골로 추방.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메는 모습을 숲속에 숨어 엉큼하게 엿본 죄값.
선녀에게 옷을 돌려 준 착한 노루는 칠선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

<노각나무>는 나무가지가 노루의 뿔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

매끄러운 연갈색 표피에 여름철엔 향기가 짙은 커다란 흰꽃.
간염, 간경화증, 지방간, 간질환, 손발마비, 관절염, 약재 원료.
노각나무 껍질은 삐끗한 발목 붓기를 가라 앉히는 응급 치료제.

'선녀탕의 곰은 사향노루 뿔을 노각나무로 착각한 듯.'

...........설악산 7선녀에 얽힌 선녀탕 전설.............
병풍바위로 둘러싸인 선녀탕에서 목욕하는 일곱 선녀.
몰래 따라온 선관이 가장 예쁜 두 선녀의 옷을 숨겼다.

옷을 잃어버린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두 선녀.
애닲게도 한 선녀는 그곳에서 옥녀폭포가 되었고
다른 한 선녀는그 인근 여신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선관은 사라진 두 선녀를 찾으러 올라갔던 대청봉
올라가다 지쳐 그곳에 주저앉아 폭포가 되었는데
그 곳을 독주골, 폭포는 독주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선관이 감추었던 선녀들의 옷은 폭포수에 떠내려와
치마폭포로..선관의 상투와 감투는 상투바위와 감투바위

옥녀폭포와 여신폭포에서 약수터까지 흘러내린 물을 음수,
선관이 변한 독주폭포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양수라 하여
그 양수와 음수의 조화로 <오색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칠선계곡에 7명 선녀가 살았다는 유래를 뒷받침 해주는 선녀탕.
선녀탕 위에는 수십 평 소와 매끈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옥녀탕'
자연의 빚은 '오줌싸개 소녀'인듯 곧게 쏟아져 내리는 힘찬 물줄기.

'그 물줄기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옥녀탕.'

남자 여럿이 희희낙낙 목욕을 해도 좋을 만한 옥녀탕.
가장자리는 얕지만 그 가운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
마치, 여성의 성기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담겨진 옥녀탕.'

옥녀탕 위로 선녀들이 하늘을 날아다닐듯한 비경의 극치 '비선담'.
선녀가 하늘로 날아서 올라갈 것만 같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 같다.

비선담에서 한시간 거리인 <칠선폭포>는 칠선계곡을 대표할 비경.
비선담 지나 목기막터가 있는 산죽밭 지나 오른편 계곡 건너 바위굴.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알려졌기에... '청춘 홀'.

..........................'청춘홀 위치.............................
선녀탕 0.5km 전 지점에 좌측 <탐방로 아님>표지판.
그 옆 희미한 길이 있고 옛날 마을터 같은 초암 능선
단풍나무 드리워진 옥녀탕 우측으로 가면 일반 등산로.

청춘홀 가려면 비선담 통과후 좌측 계곡을 건너야 한다.
두지터를 지날 경우에 다리를 통해 계곡을 두 번 건넌다.
칠선폭포 못미쳐 계곡 우측으로 우뚝 솟아오른 검은 바위.

' 흰색 페인트 글씨 - '청춘홀. 지리산악회.'
일반 등산로와 동떨어져 찾기 어려운 곳이다.
................................................................

암반 위로 흐르다가 물이 고이면,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이고
물줄기가 떨어지면, 칠선폭포, 대륙폭포, 마폭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 없는 소와 폭포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칠선계곡.

마폭 - 천왕봉 거리는 1.6km이고 표고차 700m 급경사 오르막.
오르막 곳곳마다 주목, 야생화, 고사목, 제석봉, 중봉이 보인다.
이 계곡 곳곳의 지명을 보면, 개척시기가 짧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선녀탕을 제외하고 나면, 전설이 뒤따르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명에 유래나 전설이 없는 곳은 곧 역사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여,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보고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경렬 씨 개척 보고서. 



칠선계곡 등산로는 1964년 11월 하순과 12월 초순에 개척되었다.
부산 산악인, 학계인사들인 김경렬, 성산, 곽수웅 등 17명 개척단.
이곳 담과 폭포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굳어져 있다.

6개 중 높이 10m 쯤 폭포는 부산일보의 이름을 본 따 부일폭포.
그 다음 폭포는 대륙 산악회의 이름을 본 따 '대륙폭포'라고 명명.
자일산악회, 동아대 산악회 단체 명칭을 본 따 자일폭포, 동아폭포.

개척단은 목기 제작자들이 토벌한 세아름 300 년생 고목도 발견.
해발 1,500m 원시림에서 함지박이 쌓여 있는 목기 제작소도 발견.

스무개 정도 함지박이 초벌갈이가 된 채 돌담 안에 포개져 있을 뿐,
아무 기구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목기꾼들은 연장을 챙겨 도망친 모양.
개척단이 들어갔을 때, 마을주민들은 이미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했다.

청춘홀부터는 점차 경사가 심하고
길바닥은 험악한 돌밭의 연속이다.

돌밭길을 지나 칠선폭포를 거쳐 10분 후 왼쪽 계곡을 건너면
중봉과 하봉에서 흘러온 개울이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골.
폭포가 무려 3 개나 몰려 있어 폭포수골인 합수골은 도벌꾼들 초막.

이곳은 산장설립을 추진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흐지부지된 곳.
칠선계곡은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선계곡은 험하고 깊어 다른 곳보다 등산로 개척이 늦어졌다.

'칠선계곡은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 도피자들이 은둔처.'

일제시대엔 징병, 징용을 피한 젊은이와 지식인 수백명이 은신.
남한유격대 총책임자로 최후의 빨치산으로 불린 남도부(南道富).
본명 '하 준수'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민족 자주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 교관을 거쳐 빨치산 수괴가 되었다.

칠선계곡은 세석고원을 지켰던 우천 허만수씨 사라진 곳.
그는 평소늘 흔적없이 칠선계곡으로 사라지겠다고 말했다.
법계교 옆 추모비에도 평소 그가 한 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륙폭포, 3층 폭포 이정표를 지나면 평범한 길이 계속되다가
마지막으로 통천문 쪽의 중봉, 천왕봉 계곡이 합쳐지는 마 폭포.
마폭에서 계곡과 동떨어진 급경사 등산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마폭포 - 천왕봉 3㎞는 거의 일직선형의 산길에 표고차 500m
60∼70 도 바위 틈새로 길이 이어뎠고 원시림 고산식물의 연속.
침엽수림엔 주목도 많고 음습한 토양 탓에 강렬한 고산식물 냄새.
쓰러진 고목이 길을 가로막고, 산사태 난 곳이 많아 가슴 아팠다.

이 길은 서두르지 말고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다.
64년 개척단은 이곳에서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비에 봉착했다,
정글 숲, 한 길 넘는 눈속을 피해 때론 산사태 지역을 올라가야 했다.
표고 1,700m 쯤 올랐을 때 바람이 일고, 사태난 절벽에서 낙석(落石)

천왕봉 바로 밑인 것 같은데, 작은 봉우리들이 쭈볏쭈볏 앞을 막았다.
눈비로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여러군데라 목표를 제석봉으로 바꿨다.

눈과 낙엽, 구상나무 군락, 잡목 숲에서 베낭이 걸리고 옷이 찢어졌다.
잠깐 멈취 쉬면 등산화가 꽁꽁 얼어붙어 부득이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가까와진 것 같아 한숨 놓으려 했지만 능선은 보이지도 않았다.
1, 2 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전기에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중 략...............................

1964년 개척 전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칠선계곡.
기업형 도벌꾼들 이전부터 칠선계곡은 은둔자의 천국.

...........최초의 빨치산.,남도부...................
부산 산악인들이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를 조직
칠선계곡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1964년이다.
그들은 학술조사 보다는 등산로 개척이 주 목적

소와 폭포에 산악회 이름을 본따 명명한 것이 본보기
이 학술조사대는 칠선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
수령 200~300년 거목들로 만들어진 함지박들을 보고 경악.

선발대로 학술조사대보다 먼저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 님
기업형 도벌꾼들 '목마로(木馬路)' '도벌댐'을 보고 충격
칠선계곡은 전란후 이미 도벌꾼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 산악인 학술조사대의 첫발'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
그런데 도벌꾼 훨씬 전에부터 산막 치고 살았던 은둔자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군데군데 산 흔적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명에 이르렀던 칠선계곡.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듯.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 놓고 숨지도 못했을듯.
어쨌든 칠선계곡은 오랫동안 지리산 최대 은신처였던 곳.

일제 징병을 피해 이곳에 숨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 징집을 피해 칠선계곡에 은둔

해방후 남한 유격대 총책 '최초의 빨치산'이 된다.
남도부는 무쇠같은 체력과 유격총책으로 정신무장
칠선계곡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무수히 오르내렸다.

그는 칠선계곡에서 은둔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칠선계곡에서 키워왔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났다.
빨치산 투쟁 전주곡과 같은..최초의 천왕봉 무장봉기

남도부 빨치산부대(야산대)는 1948년 5.10 단선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아지트를 만들어 운영했다.

구례지방 박종하 야산대가 피아골에 본거지를 둔 것과 달리
이들은 천왕봉 꼭대기를 아지트로 삼은 것도 대비가 되는 점.
남도부 부대원은 100 여명 설과 500~600명 대병력이었다는 설.

이들은 5월10일 천왕봉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단선 저지를 위한 경찰관서 습격과 방화, 우익인사 암살,
통신망과 철도 파괴 등 2.7 투쟁 행태를 되풀이하려 했다.

1948년 5월 10월 천왕봉에서 남도부 무장봉기 계획.
사전에 그 정보가 경찰에 흘러들어간 D -데이 사흘 전.
5월7일 토벌대가 선수쳐 천왕봉으로 새까맣게 몰려갔다.

천왕봉으로 통하는 골짜기마다
토벌대가 빼곡이 들어찼을 정도.

토벌 1진은 함양에서 마천을 통해 칠선계곡으로,
다른 2진은 백무동계곡 따라 천왕봉으로 몰려갔다.
2진은 중산리 하동의 토벌대 1진과 장터목에서 합류

하동 토벌대의 또 다른 1진은 법계사에서 천왕봉 행
산청 토벌대 1진은 쑥밭재에서 하봉, 중봉타고 천왕봉
산청 2진은 내원사에서 써리봉 거쳐 중봉 통해 천왕봉.

천왕봉의 남도부 부대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남도부 빨치산 부대는 엽총 몇 자루가 무기의 전부
대원들은 거의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하고 있는 형편
소총과 중기, 박격포로 중무장하고 죄어오는 토벌대들.

마침내 교전이 벌어지자 서서히 물러가는 토벌대.
24명이 부상입은 남도부 부대도 천왕봉에서 퇴각
그들은 지리산을 떠나 비쭉산 야산으로 숨어든다.

"토벌대도 모두 완전 무장할 수는 없었다.
우익청년들은 대창만 들고 천왕봉으로 갔다.
당시 국민회 서기 김 모씨는 와이셔츠에 양복.
빨치산이 없는 줄 알고 천왕봉 행" - 남도부 상권-

총소리가 들리자 토벌대에 동원된 청년들 대부분이 도망
설마 빨치산이 천왕봉에 버티고 있을 줄 상상도 못한 것.
오합지졸 토벌대는 제 총소리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던 것.

토벌대가 그렇게 흩어지자 남도부 부대원들도 퇴각

천왕봉 무장 봉기는 어린이들의 병정놀이처럼 마감
토벌대에 동원된 우익 단체도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
피비린내 나는 전투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

1948년 5월 천왕봉에서 최초의 무장봉기를 했던 남도부
그후 지리산 빨치산 전사들의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친다.
이 남도부는 당시 함양군이 배출한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남도부의 특별한 이력과 투쟁 역정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도 소개.
<지리산>에 등장하는 20여명은 실존인물

이규, 박태영, 하준수, 이현상, 이태, 하영근, 김숙자.
이들 가운데 하준수가 곧 빨치산 부사령관 남도부로 활약
빨치산 남도부, 부사령관 하준수는 작가 이병주의 친구였다.

1921년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이른바 '학병(學兵) 세대'.
소설 <지리산>은 남한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기록한 작품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있던 일.

징병을 피해 입산한 학생들이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를 주요 무대로 한 남도부 대원들의 투쟁

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 세대'에 연재
1977년까지 7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병주 作 대하 소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 - 이병주 -

소설 <지리산>은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인생유전을 그린 작품.
소설 <지리산>은 상당 부분 이태의 <남부군>과 일치

이태가 원고를 작가 이병주에게 봐달라고 넘겼는데,
많은 부분이 소설화 되어 소설 <지리산>에 실린 것.
소설 <지리산>에서 하준규가 은빛 강물을 보며 한 말.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

절벽에 둘러쌓여 있어, 선녀가 날아 올라갈듯 하면..,비선담.
소가 넓고 깊어, 그곳에 잘못 빠져 죽을 듯 싶으면..,옥녀탕
선녀가 목욕하기 적당할 만큼, 경관이 아름다우면..,선녀탕.

우리나라 어느 계곡을 가도 흔히 붙이는 이름..,세 가지.
칠선계곡에 붙어있는 세 이름은 1964년 개척단에서 명명.

'선녀탕의 전설'은 1964년 등산로 개척 이전부터의 구전.

전설 내용은 곰이 선녀의 아름다움을 엿본 곳이라 하여., 선녀탕.
선녀탕 이름은 그곳 목욕하는 선녀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미인 듯.
즉, 선녀 같은 아름다운 여성들이 그곳에서 목욕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선담 위 옛 목기막터 동굴 이름은' 청춘홀
청춘홀이란 동굴의 이름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

이곳 전설 속의 여주인공 선녀는 아름다운 여성을 비유한 듯.
곰도 흑심을 품고 옷을 감출 만큼.., 7 여성의 아름다운 자태.
곰이 국골로 추방당할 정도라면, 7 선녀같은 여성들은 높은 신분.

'선녀 같은 여성들의 목욕 광경을 즐길 신분은 누구일까?'

한 두명도 아니고 7 선녀같은 여성들의 목욕 광경을 볼만한 신분.
한두 명이면 몰라도 7명이라면 높은 신분이라도 꿈도 꿀수 없는 일.
최소한 한 나라를 통치할 정도인 왕의 신분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경희루에서 흥청들의 목욕 광경을 즐긴 연산군.'

이조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1476-1506, 재위12년)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31세로 사망후 그곳에 매장했다.

훗날 중종에 의해 도봉구 방학4동으로 이전된 연산군지묘
그곳 쌍분에 연산군은 부인 폐비 윤씨와 나란히 묻혀 있다.
중종이 윤씨의 청을 받아들여 연산군을 왕자로 예우한 덕분.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 선정을 베풀었지만, 말기엔 폭정을 거듭.
연산군은 경복궁 뒤 북한산 일대에서 말타고 사냥하기를 즐겼다.
북한산 수십리 일대 민가를 철거해 백성들 원성이 높았던, 연산군.

그 덕분에 북한산 국립공원은 현재 모습을 유지하게 된걸까?

어염집 규수까지 흥청제도로 강제 동원해 수치심까지 탐닉.
경회루의 주흥을 돋구려 연못에서 목욕하게 해 원성 높았다.
채홍사가 전국에서 뽑아 온 흥청들과 주색에 빠져 '흥청망청'.

흥청망청은 주색에 빠진 연산군이 나라를 망쳤다는 고사숙어.
연산군은 자색이 빼어난 신하의 부인까지도 강제로 겁탈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신하에 대한 복수극.

'선녀탕의 전설'은 어느 왕조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곰을 천덕꾸러기로는 여기지 않는다.
농업국가에서 '초식동물의 왕' 곰은 토탬 신앙의 대상.

'선녀탕의 전설'에서 곰을 구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은 토종농가 꿀통을 박살낼 만큼, 꿀을 즐기는 정력의 상징.
꿀은 향긋한 달콤함과 알딸딸한 맛 탓에 '여성 샘'의 상징이다
동녀의 순결한 정기를 회춘 비방으로 알고 꿀처럼 여긴 양반들.

오늘날까지 전통적 악습으로 이어져 온 원조교제 뿌리.
의학적 근거 조차 없는 이조 말기의 질퍽한 성풍속도
유교 가치관을 세우려했지만, 성 윤리관은 무너졌다.

'이조 후반 성풍속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었던 탓.
무례한 침략군들은 이조의 어염집 부인들까지 전리품.
금품을 요구하며 수많은 부녀자를 인질 삼아 끌고갔다.

결국, 이조가 은 2500 냥 속전을 물자 풀어준 인질이 환향녀.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의 치욕적 사건이었던 삼전도 수모.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갈 곳이 없어 방황했던 환향녀들.
침략자에게 수모를 겪고 가문과 가족에게 눈총을 받았다.
하여, 비극의 여인들 환향녀 일부는 청나라로 되돌아갔다.

가정이 있는 환향녀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많았다.
남편들 이혼 요구로 비극의 여인들은 두번 죽는 결과를 초래.
이조시대 가정 파탄이 빈번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환향녀.

결국, 갈곳 없는 환향녀들은 몸을 팔아서라도 연명했다.
그당시 김홍도의 성풍속 춘화를 보면, 적나라한 사실묘사.
선녀탕의 전설은 이조 말에 널리 성행했던 전설로 추정된다.

곰에 대한 경계심이 이유라면, '선녀탕의 전설' 배경은 이조.
그러나, '선녀탕의 전설'은 지리적 여건 上 가락국 냄새가 물씬.
이조의 왕실은 천리 밖에 있고 이곳은 지리산의 칠선계곡인 때문.

'사향노루가 <선녀탕의 전설>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 이 전설 속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쇄.

사향노루는 강한 동물성 냄새로 멀리 떨어진 이성을 유혹한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에서 축출한 약재이다.
역사상 사향을 최초로 사용한 문명은 중국인들로 알려지고 있다.

사향은 고대로부터 흥분제, 취음제, 약용 용도로 널리 사용.
그 효능은 평소보다 약 30 % 이상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효과.
클레오파트라, 양귀비, 황진이, 나폴레옹의 연인 조세핀이 애용.

'조세핀의 방에서는 무려 사후 60년간 사향 냄새.'

황진이는 남자를 사로잡을 미모는 아니였다고도 한다.
격조 높은 시 이외에도 남자를 사로잡는 숨겨진 매력.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 사로잡히고 마는 이조 사대부들

'마치, 동물이 짝을 부르듯., 애틋한 울부짖음.'

최근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북한 작가 홍 석충씨 소설 황진이.
폐쇄된 북한사회에서 거침없는 성애표현 대목이 눈길을 끈다.

'쓰다듬으며 점점 아래로..진이는 "아!~.." 하는 비명 소리를..
늙은 손이 그 젖가슴을 사정없이 움켜잡았다.' -홍석충 作 황진이 -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황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한듯.

북한에서 황진이가 천하일색으로 칭송된 비결은 사향 덕택이라 한다.
갓 설흔 나이에 죽은 그녀의 방에서는 야릇한 사향 냄새가 났다는 구전.
황진이는 이조 중기의 개성 기생이므로 북한의 자료가 사실에 가까울 듯.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알려진 그녀에 관한 매력은 많이 다르다.
그녀는 품격 높은 지성말고도 야성을 자극하는 매력도 갖춘 듯.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 사향은 취음제로 귀하게 쓰이는 약재.

'사향은 어떠한 성분이기에 야성을 자극할까?'

'사향 냄새는 여성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 듯.
옛날 중국 귀부인은 우물식 측간에 배설물 낙하.

우물에 새의 깃털을 깔아 낙하 소음을 줄였고
사향을 복용해 뒷간 배설물의 냄새를 제거했다.

사향 효과는 얼음 위에 대나무 잎 잠자리를 깔 정도.
신라 귀부인이 사향을 복용한 시기는 792년 이전인듯.
당시 신라에 합병된 해상왕국 가락국으로부터 유래된듯.

'곰에 얽힌 구혼'과 '곰에 대한 경계심'이 담긴 전설.
칠선계곡은 파고들수록 전인 미답의 신비를 품은 계곡.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