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빨치산.,남도부.
부산 산악인들이 '칠선계곡 학술조사대'를 조직
칠선계곡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1964년이다.
그들은 학술조사 보다는 등산로 개척이 주 목적
소와 폭포에 산악회 이름을 본따 명명한 것이 본보기
이 학술조사대는 칠선계곡 중턱에서 목기제작소를 발견
수령 200~300년 거목들로 만들어진 함지박들을 보고 경악.
선발대로 학술조사대보다 먼저 칠선계곡을 찾은 성산 님
기업형 도벌꾼들 '목마로(木馬路)' '도벌댐'을 보고 충격
칠선계곡은 전란후 이미 도벌꾼들의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 산악인 학술조사대의 첫발'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
그런데 도벌꾼 훨씬 전에부터 산막 치고 살았던 은둔자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 군데군데 산 흔적들.
.............................보광당..........................................
2차대전 중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 우리나라 젊은이들
일본을 위해 개죽음 할 수 없다 생각하여 도주하거나 잠적
중국군을 찾아가 입대하거나 임정을 찾아가 광복군에 가입.
징집을 피해 지리산에서 소규모 무장투쟁을 벌렸던 보광당.
하준수는 학도지원병제를 거부하고 귀국해 지리산으로 은닉.
징병거부 청년 300명 중 73명을 모아 1945년 3월 보광당 조직.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연합군과 호응할 군사훈련 실시
....................................................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명에 이르렀던 칠선계곡.
사실 그들에게는 훤히 뚫린 산길이 필요하지 않았을듯.
산길이 훤히 열려 있었다면 마음 놓고 숨지도 못했을듯.
어쨌든 칠선계곡은 오랫동안 지리산 최대 은신처였던 곳.
일제 징병을 피해 이곳에 숨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1921년 경남 함양 태생인 그는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 중 징집을 피해 칠선계곡에 은둔
해방후 남한 유격대 총책 '최초의 빨치산'이 된다.
남도부는 무쇠같은 체력과 유격총책으로 정신무장
칠선계곡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무수히 오르내렸다.
그는 칠선계곡에서 은둔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칠선계곡에서 키워왔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났다.
빨치산 투쟁 전주곡과 같은..최초의 천왕봉 무장봉기
남도부 빨치산부대(야산대)는 1948년 5.10 단선반대투쟁
그 이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아지트를 만들어 운영했다.
구례지방 박종하 야산대가 피아골에 본거지를 둔 것과 달리
이들은 천왕봉 꼭대기를 아지트로 삼은 것도 대비가 되는 점.
남도부 부대원은 100 여명 설과 500~600명 대병력이었다는 설.
이들은 5월10일 천왕봉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단선 저지를 위한 경찰관서 습격과 방화, 우익인사 암살,
통신망과 철도 파괴 등 2.7 투쟁 행태를 되풀이하려 했다.
1948년 5월 10월 천왕봉에서 남도부 무장봉기 계획.
사전에 그 정보가 경찰에 흘러들어간 D -데이 사흘 전.
5월7일 토벌대가 선수쳐 천왕봉으로 새까맣게 몰려갔다.
천왕봉으로 통하는 골짜기마다
토벌대가 빼곡이 들어찼을 정도.
토벌 1진은 함양에서 마천을 통해 칠선계곡으로,
다른 2진은 백무동계곡 따라 천왕봉으로 몰려갔다.
2진은 중산리 하동의 토벌대 1진과 장터목에서 합류
하동 토벌대의 또 다른 1진은 법계사에서 천왕봉 행
산청 토벌대 1진은 쑥밭재에서 하봉, 중봉타고 천왕봉
산청 2진은 내원사에서 써리봉 거쳐 중봉 통해 천왕봉.
천왕봉의 남도부 부대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남도부 빨치산 부대는 엽총 몇 자루가 무기의 전부
대원들은 거의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하고 있는 형편
소총과 중기, 박격포로 중무장하고 죄어오는 토벌대들.
마침내 교전이 벌어지자 서서히 물러가는 토벌대.
24명이 부상입은 남도부 부대도 천왕봉에서 퇴각
그들은 지리산을 떠나 비쭉산 야산으로 숨어든다.
"토벌대도 모두 완전 무장할 수는 없었다.
우익청년들은 대창만 들고 천왕봉으로 갔다.
당시 국민회 서기 김 모씨는 와이셔츠에 양복.
빨치산이 없는 줄 알고 천왕봉 행" - 남도부 상권-
총소리가 들리자 토벌대에 동원된 청년들 대부분이 도망
설마 빨치산이 천왕봉에 버티고 있을 줄 상상도 못한 것.
오합지졸 토벌대는 제 총소리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던 것.
토벌대가 그렇게 흩어지자 남도부 부대원들도 퇴각
천왕봉 무장 봉기는 어린이들의 병정놀이처럼 마감
토벌대에 동원된 우익 단체도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
피비린내 나는 전투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
1948년 5월 천왕봉에서 최초의 무장봉기를 했던 남도부
그후 지리산 빨치산 전사들의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친다.
이 남도부는 당시 함양군이 배출한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남도부의 특별한 이력과 투쟁 역정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도 소개.
<지리산>에 등장하는 20여명은 실존인물
이규, 박태영, 하준수, 이현상, 이태, 하영근, 김숙자.
이들 가운데 하준수가 곧 빨치산 부사령관 남도부로 활약
빨치산 남도부, 부사령관 하준수는 작가 이병주의 친구였다.
1921년 하동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이른바 '학병(學兵) 세대'.
소설 <지리산>은 남한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기록한 작품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있던 일.
징병을 피해 입산한 학생들이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를 주요 무대로 한 남도부 대원들의 투쟁
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 세대'에 연재
1977년까지 7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병주 作 대하 소설.
"태양이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이 바래면 신화가 된다" - 이병주 -
소설 <지리산>은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인생유전을 그린 작품.
소설 <지리산>은 상당 부분 이태의 <남부군>과 일치
이태가 원고를 작가 이병주에게 봐달라고 넘겼는데,
많은 부분이 소설화 되어 소설 <지리산>에 실린 것.
소설 <지리산>에서 하준규가 은빛 강물을 보며 한 말.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
...........................................................
...........................................................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보도연맹.
돌이켜 보면, 답답할 만큼 순박했던 농촌사람들 실적을 채우려 조금만 위협하면 보도연맹에 가입.
그 양민을 학살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경.
1950년대 전후 지리산 산간마을에 살았던 양민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죽어갔다.
그 누구도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피해자 유적들은 유골이라도 화장하고 싶다는 소망.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 유족들에게 최소한 보상은 해야한다. 과오로 인한 억울한 고통을 뒤늦게나마 덜어줘야 한다. |
'산 > 지리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8 ( 웅석봉. 경호강. 엄천강. 반달곰. ) (0) | 2010.11.12 |
---|---|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7 ( 국골. 상원사골. 성내(城內)마을. 왕등재. ) (0) | 2010.11.12 |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5. ( 칠선계곡. 선녀탕. 김경렬씨 개척보고서 ) (0) | 2010.11.12 |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4. ( 무당. 광대. 신내림. 내림굿. 굿. 민간신앙. ) (0) | 2010.11.12 |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3. ( 백무동계곡. 굴바위. 가네소 폭포. 기우제. ) (0) | 2010.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