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2 ( 삼성궁. 쇠통바위. 삼신봉. 청학동. 성락건. )

donkyhote 2010. 11. 12. 03:18

 

 

삼성궁.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삼성궁.


‘칭~ 칭~ 칭’

징을 세 번 치자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진다.

솔향기 녹아든 연못 속에, 소슬한 가을 바람.
구름마저 밀려나간 하늘 위에 솟아오른 솟대.

 

그 사이로 ‘둥둥 ’ 울려퍼지는 북소리
무사들의 장엄한 춤사위가 벌어진다.

 

보검이 지나다니는 길마다 칼의 노래가 흐른다. 

솟대와 솟대 사이를 날아 다니는 무사들의 몸놀림

실타래처럼 묶인 억겁의 세월을 풀어 내리는듯 하다.

 

징을 세번쳐야 열리는 석문고구려복을 입은 수자

솔향기가 녹아든 청정한 연못과 솟대

1300여개의 돌탑솟대쌓기도 수행중의 하나

 
조형미가 뛰어난 돌탑
 
 
 
 
 
 
 
 
 

 

한눈에보이는 팔각정단풍이 든 움집돌탑 위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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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공연 - '미래로 도약하는 몸짓'.......삼성궁 한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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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악단과 함께 한 어울림 마당이 끝나고

한풀선사와의 禪을 아우르며 오고가는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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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몽 방영 이후에 1,700원 입장료를 받는..삼성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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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성, 삼신제례.,축문을 읽는.,  한풀선사 부인., <현모>



삼신봉 남쪽 묵계골에 신선도를 추구하는 10만 평 면적의 이색 마을.
청학동 도인촌이 위치한 골짜기 서쪽 능선 너머의, 정동쪽으로 열린 골.
무수한 돌탑이 쌓여 있고 한풀선사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구도자가 많다.

전북 진안 마이산 돌탑과 흡사한 모양의 원추형 돌탑, 맷돌로 쌓은 맷돌탑,
단지로만 쌓은 단지탑, 등등이 완경사를 이룬 골짜기 여기저기에 솟아 있다.
높이는 한 길 정도에서 10m 가까이 되고, 모두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 탑들은 실은 탑이 아니라 이곳이 소도(蘇塗), 즉 신성지역임을 알리는 솟대.

삼성궁이란 환인, 환웅, 단군왕검 세 분을 모신 궁이라는 의미.
삼성궁을 구경하려면, 우선 입구 석문에서 징을 세 번 쳐야 한다.
그러면, 칼을 찬 수행자가 한 사람 나와서 정중하게 손님을 맞는다.

한풀선사(36)와 함께 3년간 생활한 제자는 100 명 가까이 있으며
3주에서 몇 개월간 수련을 받았던 사람은 수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99년부터 16년째 이들은 매년 가을 개천절에 개천대제 행사를 연다.
이날은 삼성궁을 개방, 누구든 마음놓고 들어와 구경할 수 있게 한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배달겨레의 성전이며, 수도장.
한풀선사가 수도자들과 함께 수련하며 쌓아올린 1,500 돌탑

삼한 시대에 천신께 제사 지내던 성지인 소도(蘇塗)
일반인 접근을 막으려 높은 나무에 조각한 기러기 솟대.
성황당처럼 소원을 비는 옛 소도를 복원하고 있는 삼성궁.

3,333개 솟대를 쌓고 홍익인간 세계를 추구하며
무예와 가, 무, 악을 수련하는 이들의 터전이다.

위치는 청학동 마을 바로 옆에 있지만
들어가는 데에는 약간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산길을 3백여 미터 오르면
천하통일대장군과 민주회복여장군,

"징을 세번 치고 기다리세요" - 팻말

잠시 후에 수도자가 나와 설명과 안내.
영어가 새겨진 모자는 벗고 도복을 착용.
몇발자국 옮기면 단군을 모신 전각이 나온다.

"배달민족 후예면 이곳에 경의를 표해 달라"

정중한 요청을 받아 들여 차례로 줄서 절하고
환웅을 모신 천궁에도 절하고 나면 자유 관람.

이곳에서는 일년에 한 번 개천대체(열린하늘 큰마당)
이때 많은 방문객들의 자유로운 방문을 허락했던 명소.
2006년 2월 현재 새로운 지리산 관리공단 삼성궁 매표소.

'삼성궁을 들어가는 색다른 절차가 사라질 듯.'




쇠통바위.

 

 

청학동 마을에서 삼신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 내삼신봉, 오른쪽 외삼신봉으로 3 봉우리가 있다.
3 중 내삼신봉이 해발 1,354m로 가장 높지만 통칭 삼신봉

세석에서 10km 남쪽으로 뻗어내린 삼신봉 남부능선 코스
내삼신봉 - 상불재 - 형제봉까지 이어진 백 여리 남부능선
이 구간은 일반 등산객들에겐 무리가 따라 등산객이 드물다.

세석 - 삼신봉 - 불일폭포까지 20km 구간은 대중적.
세석에서 하산할 경우 삼신봉까지 3 시간 30분 가량,
다시 삼신봉에서 불일폭포까지 3시간 모두 6시간 30분

세석∼삼신봉∼청학동 또는 청학동∼삼 신봉∼불일폭포
두 구간으로 나누어 등반하면 당일 등반도 충분히 가능.
삼신봉 - 불일폭포 구간. 삼신봉-상불재-청학동 순환코스

장대한 주릉의 경관과 절묘한 형상의 기암절벽에 매료된다.
삼신봉 아래에는 쌍계사, 청학동, 세석산장 가르키는 이정표
여기서 쌍계사 방면으로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따라가면 송정굴.

내삼신봉, 쇠통바위 거쳐 상불재에 이르기까지 5km 남짓 거리
기암절벽들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있는데 대략 1시간 30분 소요.
처음 나타나는 송정굴은 길이 20 여m, 폭 10여m, 높이 1.5∼2m.

송정 하수일 선생의 피난처였다고 알려져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거대한 암봉을 만날 수 있는 내삼신봉.
신선대라 불리기도 하며 마치 금강산 한 부분을 옮겨 놓은 듯

신선대 절경을 지나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치 바위 위에 자물쇠가 얹혀 있는 듯한 모습
쇠통바위는 청학동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 곳.

청학동 마을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쇠통바위를 열면 천국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삼신봉.

 

 


삼신봉(三神峯)의 참다운 가치는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의 탁트인 경관.
특히, 인적이 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동쪽으로 묵계치, 서쪽으로 생불재(상불재),
남쪽으로 청학동, 북쪽으로 수곡재와 세석

삼신봉과 외삼신봉 기점으로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있다.
남부능선 코스 및 청학동- 삼신봉- 상불재- 청학동 코스
삼신봉 - 상불재 - 불일 폭포, 삼신봉 - 거림골 등이 그것.

'지리산은 옛날부터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

그 삼신산 중 하나가 이곳에 있음은 무엇을 뜻할까?
그 지리산에 신을 상징하는 "神" 자 붙은 봉우리 셋.
그것도 남북으로 삼각인 사실은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내삼신봉, 외삼신봉, 세석고원 서쪽의 영신봉.'

이 세 봉우리 주변 일대는 옛부터 알려져 온 이상향.
즉, 청학동의 유래와 이 곳 산세는 무관하지 않은 듯.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이 바로 삼신봉 3km 아래에 위치

천년 전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간 고운 최치원
그의 입산한 발자취는 쌍계사 화개동천을 포함한 이 일대.
이조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유독 이 일대에서 은거한 흔적

청학동이 어디에 있을지에 관하여

옛날부터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곳. 

 

 


청학동.



......1170년대 기행기 - 이인로........
원(元)나라 영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해
꽃과 꽃받침처럼 어우러진 봉우리와 계곡.
면면이 이어 내려오다, 대방군 수천리(里)..현재 남원

이 산 주위에 십여 고을이 있다고 하는데,
한 달 이상은 걸려야 다 구경할 수 있다.

노인들 말로는 이 산속에 청학동이 있다는데,
길이 매우 좁아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다.
구부리고 엎드려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동네
모두 비옥한 농토이라 곡식심고 농사짓기 알맞다.

푸른 두루미(청학)만이 그 안에서 살아 청학동.

대체로 옛날 세상을 피한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무너진 담장과 집터가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단다.

예전에 나의 집안의 당형 최상국과 함께
영원히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이곳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주.....................
(최상국은 고려시대 문신 최당(1135~1211).
상국(相國)은 오늘날 재상 또는 수상을 뜻함)
.............................................

살림살이를 두 세 마리 소에 싣고가면
속세와 멀어질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드디어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 묵었다

가는 곳마다 선경 아닌 곳 없고
천만 봉우리가 다투듯 빼어나고
천만 골짜기가 다투어 흘러내렸다.

대울타리 안의 초가집이 복사꽃, 살구꽃
보일 듯 말 듯하니, 인간 세상이 아닌듯.
그러나 청학동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하여, 시를 지어 바위에 남기고 돌아왔다 .

頭流山逈暮雲低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萬壑千巖似會稽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같네.
杖策欲尋靑鶴洞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隔林空聽白猿啼 숲 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뿐.

樓臺縹緲三山近 누대(樓臺)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苔蘚依俙四字題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試問仙源何處是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메인가?
落花流水使人迷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예전에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선생집을 뒤적이다,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기에 반복해 읽어 보았다.

대개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산과 물이 겹겹이 둘러쳐져 나무꾼도 갈 수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살았다.

진(晉)나라 태원(太元)6) 연간에
어떤 어부가 요행히 한 번 갔지만,
사람들이 그 다음 번에는 길을 잃어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왔는데,

도원(桃源)을 선계(仙界)로 여겨 우거표륜을 타고 다니며
장생불사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도화원기>를 제대로 읽지 않은 탓,
실은 저 청학동과 다름이 없는 곳이리라.

어찌하면 유자기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
나도 언젠가 그곳에 한번 가볼 수 있으리.
.................출처 : 파한집.................

이 작품은 고려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이인로가
'무신의 난'을 피해 청학동을 찾으러 나섰다가,
결국, 못찾고 바위에 시만 남기고 돌아온 산행기.

옛부터 신선이 되기를 꿈꾸는 한반도 도인들의 무릉도원
청학동은 신라시대 최치원도 찾아나선 산신봉 남쪽 마을.
청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이상향.

'옛부터 전해오는 청학동에 얽힌 설화.'

옛날에 나무꾼이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뒤쫓자 자꾸 달아나 해질 무렵 어떤 굴로 들어갔다.
굴안은 별천지라 나무꾼은 한 노인에게 이곳이 어딘지 물었다.

"옛날부터 난을 피해 이곳에 사는데 지금껏 살고 있다오."

나무꾼은 잘 대접을 받고 돌아온 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전설의 마을' 청학동은 전설의 새 청학(靑鶴)을 본딴 지명.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

..................<칭기스칸>과 청학동의 유래..........................
'칭기스칸'이 황제에 등극할 때 울었다는 전설 속 '5색의 새'.
칭기스칸(Chingis Khan)은 테무진, 또는 태조로도 불려진다.
태조는 묘호, 테무진은 아명이고 1189 몽골 부족 연합의 맹주.

칭기스칸은 고대 터키의 "텡기스(바다)"라는 방언에서 유래,
또는 1206년 칸이 즉위할 때 5색의 새 울음 "칭기스, 칭기스"
'광명의 신'을 뜻하는 'Hajir Chingis Tengri'로부터 유래 설.

칭기스칸은 몽골에서 116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살된 후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 했다.
하여, 가장 강력한 케레이트 부족 무사가 된다
1203 년 칸은 아버지의 원수인 '타타르'를 평정
이어, 칸은 자신을 키워준 케레이트 족을 평정,
훗날 몽골제국을 통일, 1206년 황제에 등극한다.

군사 행정 조직인 십호(十戶) 백호(百戶) 천호제(天戶制)
몽골 유목군단 95개를 편성하여 최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1204년에 내몽골과 외몽골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206부터 서하(西夏), 금(金), 만주를 차례대로 평정한다.

1219-1223까지 중앙아시아 평정 후 남 러시아까지 정복한다.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 후, 두 아들에게 분할해 훗날 한국(汗國)
1225 년 이슬람 정벌원정에 참전을 거절한 서하를 응징하려다가
1227년 8월 18일 중국의 간쑤 성 칭수이 현(縣)의 류판 산에서 사망.
칭기스칸에게 쫓긴 유럽은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며 역사가 뒤바뀐다.

칸은 세계정복을 위해 팔방으로 활을 쏘아 부하들에게 진격명령.
'바다가 앞을 막아 더 정복할 땅이 없다.'며 부하들이 되돌아왔다.
칸은 그당시 사실 상 세계를 정복한 전설적 지도자이고 몽골리안.

북아메리카 인디안도 혈통을 따지고보면 몽골리안.
따라서 그당시는 몽골리안이 세계를 정복했던 시기.

당시 흑사병과 징기스칸의 침공에 피난다닌 유럽 귀족들
그당시 배경무대로 해서 피난생활을 그린 소설이 데카메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몽골은 언어, 풍속, 핏줄에서도 밀접한 관계.
단군에 이어 고려가 1 세기 간 몽골 지배 하에서 친족관계로 변모했다.
고려는 몽골이 지배한 원나라에서 주자학, 문물, 각종 제도를 도입한다.
이슬람권 과학기술도 이때 전해져 고려 과학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 금속활자가 몽골에 전파되어 서아시아를 거쳐 서유럽까지 전해졌다.
제주도는 고려에서 원나라 직활 자치구로 넘어가 1세기 간 지배를 받는다.
원나라는 왜(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군마 종자를 제주도에 들여와 키운다.

몽고와 끝까지 싸운 '삼별초의 난' 자취는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를 찾아가면 삼별초 군 기개를 아직도 느낄 수 있다.


중국 왕조는 금(1115~1234년), 원(1206~1368년), 명 (1368~1644년).
1616년 창건한 후금은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후 1636~1911년까지 존속.
이조는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태종에게 삼전도 수모.

두 왕세자와 삼학사는 물론 수많은 부녀자들이 볼모로 끌려간다.
조선의 부녀자들은 청나라에게 속전을 치룬 후 귀향할 수 있었다.
청군에게 끌려갔던 부녀자들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환향녀(還鄕女).

이조가 중국에게 침략을 받을 때마다 꿈꿨던 이상향이 청학동이다.
지리산 청학동은 고려 신라 시대에도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이상형.
하여, 이상향을 찾으려는 천년의 노력 끝에 찾은 곳이 지리산 청학동.
1950년 전후에 찾아낸 청학동이 이상향으로 알려진 것은 50~60년 전.
....................................................................................................

청학동은 진주 서쪽 백리 밖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거쳐 십리.
전감록에는 그곳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청학동을 찾았던 인물은 이인로, 김종직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신라가 패망할 무렵부터 천년동안 못찾았던 그곳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다는 기록.
'사람이 겨우 통행할만큼 좁은 길을 엎드려, 몇 리를 가면 넓은 곳.
사방이 옥토라 곡식을 가꾸기에 알맞고 청학이 사는 까닭에 청학동.
옛세상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가시덤불에 남아 있단다.'

그러나, 이인로는 청학동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 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짐작했다.

현재 지리산 청학동 말고도 전설 속의 청학동으로 추정된 곳은 여러 곳.
불일폭포 부근 세석평전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선비샘 아래 등등.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전설 속 그 청학동일 것으로 알려져 왔던 셈이다.

그런 와중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 리 거슬러 올라간 해발 800 m
첩첩산중인 청암면 묵계리 학동마을이 청학동일 것으로 유력했던 이유는
그 입지가 전설 속 계곡과 유사했고 6.25를 모를 만큼 외부와 단절된 생활.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이곳 사람들이 매스컴을 타며 널리 알려진 탓.

청학동은 정감록 신앙에 연유된 십승지(十勝地)의 하나.
구한말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도들이 피난해 살던 곳.
특히 갱정유도 신자는 지금도 댕기머리 상투 바지 저고리

1948년에는 여순반란사건 패주 좌익세력 일부가 이곳에 은둔.
1950년 6.25전쟁 때는 북한 패잔병의 일부가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청학동 원조로 알려진 도인촌(道人村)이라고 불리우는 산골마을.
단군계 신흥종교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 교도>들 마을.

6.25 이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
<<인 의 예 지 의 인간 본성을 수양하여 인간 윤리를 실천한다.>> 는 교리.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온 마을이다.
유교, 불교, 단군신화, 문수보살, 천왕성모 등등의 장점을 살린 종교의 마을.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며
서당에서 훈장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80년대 후 청학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외부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졌고,
어쩔 수 없이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도인촌이라기보다 관광촌으로 탈바꿈.
예전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은둔지로서의 청학동 성격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지리산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첫인상
마치, 과거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세월을 여행하는 느낌.
비록 수백 년 뿌리 깊은 마을도 아니고, 대대로 전승해 온 역사가 있는것도 아니지만,
근대화 및 서구화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청학동 사람들이 지키려는 의식과 생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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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은 신라 말부터 지금까지 이상향으로 알려진 마을.
이조의 전통적인 유교관습에 배인 생활 방식이 눈길을 끈다.
이조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상투 튼 모습과 한복 옷차림 등등.

전통을 고집하는 이유만으로도 청학동은 소중히 여겨야 할 곳.
최근 들어 관광 수입에 의해 주민 소득이 높아진 청학동 주민들.
유교 교육만으로는 2세들이 현대 사회에서적응 어렵다는 생각에
자녀가 성장하면 하동이나 진주 등 주변 도시로 유학을 보내고 있다.

청학동 가는길은 하동읍 2 번국도를 타고 횡천면에서 1시간 20여분 산길.
지금은 청학동과 산청을 이어주는 삼신봉 터널이 뚫리고 주변도로가 포장.
새 도로를 이용해 청학동에 가려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단성I C에서 나와
20번 국도로 중산리 관광지에 간후 시천면 내대리에서 삼신봉 터널쪽으로 진입.

 

 

..........

도인촌

..........

 

 

동국여지승람에 진주에서 서쪽으로

140리의 거리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다.

 

불일폭포 근처라는 사람도 있었고,

악양면 청학골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묵게리 학동마을을 청학동이라 지칭

 

 예로부터 지리산에는 이상향 청학동이 있다고

많은 시인묵객의 글과 행적에서 나타나고 있고

오늘날에도 청학동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청학동의 실존 여부는 증명된 바가 없지만

정감록을 비롯 이인로의 파한집 등 문헌에서

청학동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역사는 오래 된듯.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正儒道)"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인촌.

머리 땋고 상투틀고 흰 옷 도포자락을 입는다.

 

일명 일심교인 갱정유도교는 신흥종교로

교조는 전북 순창군 구림면 태생의 강대성

 

강대성은 39세때인 1928년 인생무상함을 느껴

처자와 함께 수도를 했는데 이듬해 7월 죽었다가

7일 후 소생하여 중일전쟁과 2차대전을 예언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당국에 체포되어

전주에서 옥사하여 교도들이 흩어졌다.

 

1958년 서계룡이 교도 20여가구를 데리고

다시 들어와 이곳에 정착하고 지금까지 산다.

지금 교주는 없고 신도 간 서로 형제라 칭한다.

 

유명세를 너무 타는 바람에 엣정취는 많이 사라졌지만

20km에 이르는 청암계곡 덕택에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

 

 지리산에서 이상향 청학동이라 지목되는 곳은 아주 많았다.

청학동 도인촌, 악양 등촌리 청학골, 선비샘 아래 상덕평마을,

피아골, 세석평전 그 중 악양사람들은 청학골이 청학동이라 주장

 

정감록과 여러 문헌속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설정된 것이다.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아 나선 최초의 사람은., 고운 최치원

신라 말 혼란기에 최치원은 청학동을 삼신동의 개념으로 파악.

 

최치원은 쌍계사 부근에서 학을 타고 노닌 것으로 보아

청학동을  화개동천 부근으로 청학동을 파악한 것 같다.

 

지금도 불일폭포 아래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그리고 지금도 삼신동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최치원 이후 고려 한유한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나선  이는 이인로

최치원은 삼신동 개념이었다면 이인로는 무병장수 신선의 개념.

 

이인로는 그의 파한집에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 한다.

그는 파한집에서 스스로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고백.

 

이인로 후 청학동 기록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 김일손,

남명 조식의 두류산 기행문에서 이상향 개념으로 등장

 

김종직은 청학동 동쪽에 쌍계사,

서쪽에 화엄사가 있다고 여겼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불일폭포 주변을 청학동으로 부르고

 조식은 16일 동안 지리산 유람후 불일폭포를 청학동이라 결론

 

 

 


성락건



아내(남편) 몰래
지리산으로 도망가
숨어서 살기 좋은 곳.

1.산청군 금서면 오봉
2.남원군 산내면 팔랑
3.하동군 청암면 논골
4.하동군 화개면 판교
5.산청군 단서면 소리당

6.구례군 하동면 수락
7.하동군 악양면 등촌
8.구례군 토지면 당치
9.함양군 마천면 군자
10.구례군 마산면 신율

허풍도사 성락건 선생
등산학교 강의 중에서


"산이 있고 자유가 있기에 난 부자"
지리산 청학동 일대에는 기인이 많다.

성낙건(成樂建·58)씨도 기인 중 한 사람.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는 외모도 그렇지만
산과 벗하며 살아온 삶의 방식 또한 그렇다.

'죽은자(竹隱者)' 허풍도사 같은 애칭

1960년대 초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입학
군제대 후 서울 시청의 공무원이 되었다.
가정형편 탓에 복학을 포기했던 것이었다.

공무원 생활 10년후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내려왔다.
평소 산을 좋아했기에 직장마저 포기한채 산에 빠졌다.
국내의 산들은 물론 히말라야 원정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일본 북알프스는 적설기에 등반했다.
산행하며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긴 그.
집안 살림은 부인 남경옥(50)씨의 몫.

'산에 올라 삶이 기쁘고
산이 있어 죽음마저 고맙다’

등 두 권의 체험적인 시집도 출간했다.
등산 안내서 ‘남녘의 산’은 그의 역작.

그가 20년 방랑끝에 자리잡은 청학동 인근 찻집.
나무와 황토로 30평 남짓한 다오실(055-883-8618)
2년 걸려 손수 짓고 최근 문을 연 성락건 문화공간.

청학동 문화지도와 연구회 만들기가 첫째 과제
청학동에 사는 선사(禪師)들의 집과 토굴의 위치
화가와 도예가 거처, 바위와 샘 위치가 담긴 지도

테마산행을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계절에 따라 약초 버섯 샘물 명상 토굴을 찾기
지리산 도인들과의 만남 주선하기 등등 프로그램

청학동 총각과 진주 낭자 6명 씩‘맞선보기 산행'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삶을 살아온 성씨.
산에 가는 것이 처갓집에 가듯 당당해야 하고,
여름에 찬물 마시듯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

"가진 것이 없어도
더 얻으려 하지 않으면
그가 진정한 부자 아닐까요?"


... .......................
성락건 산행 육하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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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언제 산으로 가나?

봄이 좋다.
가을은 더 좋다.
여름도 괜찮다.
겨울은 시리도록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계절이 영락없이 더 좋다.
괴로울 때 가라. 기쁠 때나 외로울 때도 가라.

바람 부는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눈이 부시게 푸른 날.
천둥치고 번개치는 날.
달 밝은 날.

미쳤다고 생각되는 날까지 가라.



둘. 어느 산을 갈 것인가?

가까운 산 몇 번 간 후에 먼 산으로 달려가라.
낮은 산 오르고. 높은 산 올라라.
유명하고 아름다운 산은 자꾸만 가라.



셋. 누구하고 갈 것인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적다면 적어서 좋다.
서넛이면 여러가지로 좋고. 둘이면 손잡기 좋고.

혼자면 마음대로라 좋다.

홀로 가면 바람과 구름. 나무와 새.꽃과 나비를
몽땅 가슴에 담을 수 있어 좋을 뿐더러.
자연과 친구가 될 수 있어 희안하게 좋다.



넷. 산에 가서 무엇을 하나?

기진할 때까지 방황하다 쓰러져라.
두려움조차 내 것으로 껴안아라.
새소리도 흉내내보고. 나뭇잎에 편지라도 적어보라.
향기에 취해서 야생화를 뺨에 비벼보라.
도토리 한알 주워 친구에게 선물해보라.

산정에서는 고함보다 침묵이.
침묵보다 명상이 엄청 더 좋다.



다섯. 어떻게 산에 가면 좋은가?

발가벗고 가라.
허위와 영악함 부끄러움과
더러움을 가져주는 옷과
넥타이. 모자. 양말까지

벗고 가라.

그렇게 하면 솔바람에 마음을 정갈히 빗질할 수 있고.
맑은 계곡물에 더러움과 영악함을 헹구기 쉽다.


여섯. 왜 산에 가는가?

산이 있기에 간다.
우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태어났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존재론으로.
더 곤란하면 운명론으로 돌려라.
더더욱 곤경에 처하면 되물어라.

"당신은 왜 산에 안 가는가?"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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