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동(한신) 계곡.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와
도촌, 송알, 강청 등의 행정지역 명칭
백무동으로 더 잘 알려진 강청리
백무동은 무속에 관한 관습이 유난히 많은 곳.
옛부터 100 무당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백무동.
백무동은 천왕성모와 8 딸에 관련된., 전설의 고향.
각각 팔도를 다스리는 무당이 된 천왕성모의 8 딸.
그 중 셋째 딸은 하동에 정착해 100무당을 배출했다.
옛부터 '하동과 백무동'은 정치 문화적으로 밀접했던듯.
지리산 북쪽 자락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찾는 백무동.
천왕봉을 오르는 북쪽 들머리이자 세석평전과 10km 거리
세석평전 철쭉제 즈음 백무동 일대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
세석평전 오르는 남쪽 길은 거림 청학동 대성리
지리산 북쪽자락에서 오르는 길은 백무동이 유일.
또 백무동은 우람한 폭포가 연이어 있는 한신 계곡과
백무동계곡의 매력 때문에 지리산 최고의 명당 피서지.
부산에서 백무동으로 가려면 예전엔 산청~함양을 경유.
휴천계곡 따라 생초에서 바로 들어가면 약 3시간 거리
차량 운행 소요시간이 부산에서 중산리와 거의 비슷하다.
백무동은 옛부터 많은 기도객이 붐비는 곳으로 유명.
전국 무당들 우두머리가 천왕봉 성모사를 받들기 때문
이곳에는 언제나 1백명의 무당들이 진치고 있었다는 곳.
주로 무당들은'굴바위' 주변에서 많이 활동하고
한때는 휴천계곡 용류담, 한신계곡 가내소 폭포
하동바위에서 활동했기에 무속이 성행한 곳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이라 불렸다.
다른 뜻으로 백무(白霧)는 안개가 많은 마을이란 뜻.
현재,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이라고 불리운다.
'백무동 계곡의 또 다른 이름인., 한신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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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조(한나라 시조 유방)가 일찌기 한신과 담소.
장수들 장단점을 논하다가 고조가 한신에게 물었다.
"나같은 사람은 (군사를) 얼만큼 거느릴 수 있겠는가?"
"폐하는 십만 병사를 거느릴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어떠한가?"
"신은(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따름입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사로잡혀 있는가?"
"폐하께서는 병졸을 다루지 못하시지만
병졸을 다루는 장수들을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제가 폐하께 사로 잡힌 까닭입니다."
高祖嘗從容與信言
諸將能不各各有差.
上問曰如我能將幾何.
信曰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於君何如.
曰臣多多而益善耳.
上笑曰多多益善何爲爲我禽.
信曰陛下不能將兵而善將將.
此乃信之所以爲陛下禽也.
짧은 대화이지만 긴장감이 흐르는 대화.
한고조 유방이 처음엔 한신 대답을 듣고
부하보다 못한 생각에 화가 났을 것이나,
한신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 흐뭇해졌을 것.
사람의 능력에 대한 핵심을 짚고 있는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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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 고사숙어 속 한신(韓信)
'한나라 양왕(襄王)의 10대 손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兎:토끼 토, 死:죽을 사, 狗 개 구, 烹 삶을 팽
'토끼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삶아 죽인다.는 의미.
'즉, 필요할 때 소중히 여기고 쓸모 없으면 버린다.'
한신은 초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한 한나라의 장군.
유방은 한신이 도전해올 것을 우려해 그를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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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이 천하통일을 다투던 진나라 말,
한신(韓信) 장군은 유방 측 명장이기도 하다.
한신 계곡은 중국의 한신 장군 이름에서 유래.
'이곳을 한신계곡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락국 10대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
신라는 평화합병 후 양왕으로서 예우.
그후 신라를 위해 백제와 전쟁 중 전사.
'혹시, 신라는 구형왕을 두려워한걸까?'
당시, 신라는 진골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
배타적인 진골 귀족들은 양왕을 경계했을 듯.
훗날,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도 같은 처지였다.
한신계곡 지명 속에는 역사적 의미가 담긴듯.
한신계곡 일대는 구형왕의 마지막 항전처인듯.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베일 속 수수께끼.
'앞으로 누구인가 풀어야 할.. 역사의 과제.'
함양은 '중국의 고대국가' 진나라 도읍지이다.
진나라 도읍과 같은 지명을 쓰는 것도 수수께끼.
또한 경남 함양은 지리산으로 가는 동쪽 관문이다.
......................찾아가는 길.............................
백무동 -2Km- 첫나들이폭포 -1Km- 가내소폭포
-1.5Km- 무명폭포 -2.5Km-내림폭포 -1Km- 장군바위
-2Km - 장터목 산장(총 10 Km, 등반 51/2, 하산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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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이곳을 찾을 기회가 드물다.
일부러 큰 마음먹고 찾기 전에는 발길 닿기 어려운 곳.
지리산 북쪽 계곡이라 한여름 무더위에도 추울만큼 서늘.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적 드문 계곡.'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 코스는 하동바위 능선.
세석평전에서 최단거리로 인기 높은 하산 길은 거림 코스.
따라서, <세석평전 - 한신계곡> 코스는 거의 인적 드문 계곡.
이곳은 색다른 풍습이 있는.. 천왕성모의 로맨스 산실.
한신은 일본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
신라신 원신(園神, そのかみ),
백제신 한신(韓神, からかみ)
고대 신라인이 일본의 왕들이 되고 훗날 백제인들이 일본의 왕
아무튼, 한신은 지금도 천황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
천황은 동경 천황궁 안에서 매년 11월 23일 신상제(新嘗祭)
이때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축문을 외운다.
아지매는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이자 신라어(경상도 말)이다.
아지매는 함경도에서 유래된 강원도 경상도 사투리.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동해 왔던 경로를 알려주는 말.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전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
스진 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인.
신라인 이즈모족 스진천황이 처음 다스린 국가가 '나라(奈良)’
백제가 패망한 후에야 비로소 '천황'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
'한신'이란 지명은 일본의 창건 신화 및 일본황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제신 한신(韓神)과 한신(韓信)계곡은 한자가 다르다.'
그러나, 한신계곡에는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풍습이 있다.
한신계곡에서는 옛부터 남녀 간에 목욕 문화가 개방된 편.
강원도에는 아직 사랑하는 남녀 간에 혼욕풍습이 남아있다.
강원도의 혼욕풍습은 고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신계곡은 전통적으로 뿌리가 깊은 옛 고려의 영역이다.
하여, 남녀 간에 개방적인 목욕풍습이 남아있는 고장이다.
그 풍습은 고조선 고구려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듯.
일본의 고대사회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된 가능성도 있을 듯.
한반도와 일본은 지리적인 여건상 동떨어진 문화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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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북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약 10 km 골짜기 한신계곡.
신라 화랑 '한신'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떼죽음.
그후 비가 내리면 그 혼령들 꽹과리 소리.
'그 전설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한신폭포.'
신라 화랑 한신 이름에서 유래된 한신계곡.
한신은 구형왕이 몹시 믿고 총애했던 화랑.
한신계곡 주변엔 가락국 흔적이 많이 있다.
청소년 단체의 화랑은 한사람마다 사조직이.. 수십~ 천 여 명.
풍악대가 있을 정도라면, 한신이 이끈 사조직은 규모가 컸을 듯.
유두류록을 보면 화랑 영랑이 3천 명을 이끌었던 곳이라는 대목.
한신지 계곡은 화랑 아니면 오를 수 없을 만큼 험한 산세.
구형왕은 신라와 합병 후 가락국 영화를 되찾으려 했던 듯.
'결국, 국골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가락국 구형왕.'
구형 왕은 신라와 합병 후 통일신라발전에 일조한 듯.
훗날,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은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신라 화랑 총 200 여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백무동은 천왕성모 셋째 딸이 하동에 정착 후
100 무당이 생겨났다는 전설의 고향.. 백무동.
하동은 김해 일대 가락국의 옛 영역을 뜻한다.
백무동 동쪽 중봉, 하봉은 삼한 이래 가락국 국경선
전쟁무기와 관련된 '괴점' 지명처럼 무기 武자 백무동.
백무동(百巫洞), 한신계곡, 백무동(百武洞)은 같은 지명.
각각 다른 지명으로 불려도 모두 한 지역 지명.'
수도권에서는 백무동, 한신계곡을 많이 찾는다.
지리산 북쪽에서 천왕봉 접근이 쉬운 한신계곡.
한신계곡 본류는 세석으로 이어지지만
주위에 4 갈래 물줄기가 있는 한신계곡
칠선봉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백무동 위로 세석까지의 한신계곡.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장터목에서 흘러내리는.. 한신지 계곡.
한신계곡에서 본격적인 산행은 '가네소'에서 '세석'까지 7Km.
가네소 왼쪽 흙비탈길을 올라 조금 가다보면 5단 '오련 폭포.'
폭포는 등산로 이정표에서 80 m 우측 계곡 아래 숨겨진 장소.
'이곳에서 1Km 거리의 바윗길을 따라가면 세석.'
이 숲속에는 비경의 폭포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
코가 땅을듯 급경사라, 겨울철엔 특히 조심할 구간.
자주 안개가 끼고, 구상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자생지
세석대피소를 출발한지 1시간 지나면 이정표가 나오고,
왼쪽으로 80미터 거리에 숨겨져 있는듯 한신폭포가 있다.
등산로에서 꽤 떨어져 있는 출입통제 구간인 외딴 곳이다.
약 30미터 길이 비스듬한 경사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폭포수
양쪽으로 단애를 이룬 깊은 협곡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
원시림이 둘러싸고 있으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소(沼)
'한신계곡을 대표할 위용을 간직할 만한.. 한신폭포.'
한신폭포에서 산죽길 지나 두어 계곡을 건너.. ‘오층폭포’
이름은 오층폭포지만 크고 작은 일곱 개의 폭포로 이뤄졌고
각 폭포마다 옥빛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예쁜 소가 숨어있다.
역광을 받아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푸른 나뭇잎.
주변 기암 사이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7단 폭포
오층폭포에서 10분 내려서면 왼쪽으로 가내소 폭포.
가내소 오른쪽 한신지계곡은 장터목대피소 가는 길.
한신지계곡 ‘무명폭포’, ‘천령폭포’, ‘내림폭포’
몇 해 전 폭우로 등산로가 끊어진 이후 폐쇄구간인 곳.
가네소 합수머리에서 800M 아래 왼쪽에 '첫나들이 폭포’
‘깊고 넓다’는 의미의 한신계곡은 일반적으로 이곳까지,
첫나들이를 지나면서부터 그 이름은 백무동계곡으로 바뀐다.
첫나들이 폭포에서 백무동까지 2KM는 음악처럼 들리는 물소리.
으름덩굴과 밤나무숲 터널 따라 50분 내려가면 매표소
오른쪽 야영장 뒤로 참샘을 거쳐 장터목 가는 하동바위길.
굴바위.
우리나라 원시 무속신앙의 근원지는 지리산 천왕봉
천왕봉에 사는 천왕성모(聖母)가 8명의 딸을 낳아
8도를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이 옛부터 전해져 온다.
천왕성모는 우리나라 무당의 시조 할머니 격이고,
백무동(百巫洞)이란 이름이 유래된 것도 그 때문.
하여, 성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었던 천왕봉.
이 성모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거나
옥황상제가 내려준 마야부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원시신앙형태로 자연스럽게 조성된듯.
성모상이 있는 곳은 천왕봉
백무동 천방산에 있는 굴바위
용류담에도 있어 세 곳을 삼굴(三窟)
..........용류담 성모상에 관한 전설.......
어느날 바둑을 두던 마적도사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계곡물이 붉은 색을 띠며 불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계곡따라 가보니 마고할미가 소피를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배필이 될만하다 하여 같이 살며
아흔아홉 딸을 낳아 8도 무당이 되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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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으로 오르다 보면 계곡 건너편으로
천방산에 있는 굴바위 기도처가 바라보인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이곳에는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머리에 고깔쓰고 한복입은 성모상.
백년전에 한번 도난 당한 이후로
다시 꼭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또 다시 도난당하고 말았다는 성모상.
무당들이 성모에게 제사를 올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을 이루고,
밥하고 소잡느라 솥과 그릇이 어지럽던 곳.
또한 밤이 되어 기온이 급강하하면 남녀가 부둥켜 안고
체온유지를 했으므로 풍기문란 문제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성모석상은 굴바위와 용류담에서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 남은 천왕봉 석상은 온갖 수난 끝에 현재는 두 동강
지금은 동강난 몸통을 봉합한 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지리산은 수천년 동안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
무속신앙의 발원지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던 곳.
대표적인 곳이 대성계곡 상류의 영신대를 비롯해,
천왕봉이 우러러 보이는 신선너덜, 백무동 굴바위당,
칠선계곡, 용류담, 피아골산장 뒤편, 중산리 계곡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즐비한 기도처들
수많은 득도 희망자와 무속신앙의 신봉자, 기도객들.
대성계곡 상류 영신대는 지리산 十대 기도처 중 하나.
신선너덜의 경우도 치성드리는 곳으로 안성맞춤인 곳.
신선너덜 오른편 반반한 바위가 벽처럼 있는 곳의 제단
산청군에서는 이곳에 지리산 제단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매년 평화제를 시작하면 이 제단에서 먼저 제를 올린다.
문화축제 차원으로 민중정서와 맞아 떨어지는 샤머니즘.
백무동, 한신계곡, 굴바위 가네소 등은 토속신앙의 산실.
백무동 굴바위당은 아들 못낳는 여인들 발길 잇는 곳.
한신계곡 가네소 폭포 인근은 기우제 장소로 유명하다.
칠선계곡과 용류담은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는 명소.
칠선계곡과 백무동, 뱀사골을 하나로 묶는 엄천강 용류담
우선 산속의 호수 같은 경관만으로 치성객을 끌 수 있는 곳.
아예 굿당이 지어져있고 언제 가더라도 굿판을 볼 수 있는 곳.
이러한 토속신앙은 근대에 와서 주민들의 정서에 동화돼
평화제(산청), 약수제(구례), 천령제(함양) 등의 지역축제.
지리산의 다양한 토속신앙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듯 보인다.
가네소 폭포.
한신계곡 중심으로 4 계곡이 빚은 백무동.
엄천으로 흘러 남강 상류를 이루는 한신계곡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 협곡이 빚은 가네소 폭포
가네소는 한신지 계곡과 합류해, 백무동으로 유입.
한신 계곡과 한신지 계곡은 잘 다듬어진 등산로
누구나 손쉽게 등반이 가능할 만큼 걷기 편하다.
바른재골, 곧은골은 접근이 어려운 미지의 계곡
'태고의 신비로움이 남아있을 만큼 위험한 산세.'
한신계곡 등반 기점은 백무동 야영장 지나. 첫나들이 폭포
백무동에서 첫나들이 폭포까지 약 2Km는 계곡과 절벽 오솔길.
20 개 물줄기가 만나는 첫나들이 폭포는 물안개 피는 '바람폭포'
'그곳에서 가네소폭포까지 1Km는 한신계곡의 진수.'
한신계곡은 일명 백무동 계곡이라고도 불리우는 곳.'
아직까지도 한신(백무동) 골짜기마다 굿판 흔적이 있는 곳.
옛부터 목욕재개 여성 기도객이 많았던 백무동(百巫洞) 계곡.
이조 말기에는 남녀 기도객들 간 혼숙으로 사회문제 되었던 곳.
목욕하는 여성 기도객이 많은 이유는 전통적인 옛 풍습.
영원한 젊음의 상징 천왕성모가 살았던 곳이 백무동계곡.
천왕성모가 목욕재개 후 천신에게 기도를 올린 백무동계곡.
한신(백무동)계곡의 맑은 물은.. 천왕성모 젊음의 비결.
피부가 고와지고 싶은 여심을 유혹하는 한신계곡 맑은 물.
옛부터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한신계곡 맑은 물.
한신계곡 지계곡은 옛부터 마을 주민들이 즐겨찾던 목욕처.
그중 옛부터 여성 전용 목욕처는 가네소 폭포
하필이면, 그곳이 여성들 전용 목욕처 였을까?'
가네소는 옛부터 기우제를 지내왔던 영험한 장소.
가네소 아래에서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그 중 한신지 계곡은 장터목에서 내림폭포로 간다.
나머지 한신계곡은 세석에서 한신 오층 폭포로 연결.
가내소 폭포 지나 긴 나무다리 우측 지계곡이 화랑골
계곡 너덜과 우거진 잡목숲을 헤치고 오른끝에 연하봉
그곳에서 장터목 향적사지 제석단을 잇는 지리산 주능선.
가네소는 15m 높이 폭포와 50평 검푸른 소.
이곳은 옛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영험한 장소.
기우제는 마을 부녀자들 목욕재개로부터 시작.
이곳에서 기우제를 주관할 여성들은 우선 목욕재개.
그 다음엔 알몸에 속치마만 걸치고 방망이를 두드린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일수록 기우제 효험이 크다는 믿음.
'옛부터 그렇게 믿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알몸 홀치마 차림은 마야부인 대신 반야를 유혹하는 행위.
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는 마야부인의 애통함을 상징한다.
반야가 떠난후 기다림 끝에 쇠별꽃으로 환생했던 마야부인
그 애통함을 천신에게 알리기 위한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마야부인이 반야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리기 위한 소리
마야부인의 애통함이 비를 불러 세상을 적시길 기대하는 주술.
천신이 방망이 소리를 듣고 비를 뿌리기를 염원.
하여, 여인들이 방망이를 두드리며 기우를 염원.
'지성이면 감천이다.'란 속담이 실감나는 기우제.
선정적인 기우제를 올려야 주술 효험이 크다는 믿음.
천신이 쏟는 정기로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싶은 염원.
아름다운 알몸 속치마 여인들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이유.
신라시대에는 공주나 화랑을 이끈 원화가 기우제를 주도
고려시대에는 선녀같은 처녀들이 목욕재개 후 올린 기우제.
이조시대 부녀자들을 동원해 산상 노상 방류로 기원한 기우제.
'천신을 유혹해 정기를 쏟아내게 하려 했던 기우제.'
또 한가지는 돼지 피를 바위에 뿌리고
돼지 머리는 가내소에 던지는 주술행위.
피 묻은 바위를 천신이 씻어줄 것을 바램
한신계곡은 가락국 백성들 피서지이자 목욕장소.
국골 가락국 양왕의 군사 주둔지에서 벗어난 위치.
1613년 作 동의보감 배경무대 산청 주민들의 피서지.
옛부터 한신계곡은 주민들이 목욕하는 곳으로 알려진 명소.
요즘은 지리산 종주 하산 길에 들러 땀을 씻기에 적당한 곳.
특히, 옛부터 피부 질환에 특별히 효험이 있다고 소문났던 곳.
'피부 미용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한신계곡 맑은 물.'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목욕 이야기
동천에서 목욕한 박혁거세의 몸에서 광채가 났고
입술이 닭 부리처럼 생겼던 알영은 북천에서 목욕후
완벽한 미인이 되었다는 2천년 전의 전설이 전해온다
한신계곡은 지리산에서는 북천에 해당.
끝없이 고와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女心.
아름다워지고픈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듯.
정말 이곳에서 목욕하면 피부가 고와지는 걸까?
'가네소 폭포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
옛날에 이곳 폭포 위에서 줄타기 하던, 스님.
자칫 한 눈을 파는 순간에 폭포 아래로 추락.
"가네. 나는 가네" 외마디 비명을 남겼다 한다.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 가네소.'
스님은 통일신라 말기 화랑으로도 추정된다.
그당시 화랑을 따르던 유녀들이 무척 많았다.
가네소에서 목욕하던 유녀에게 시선을 뺏긴듯.
칠선. 국골, 한신계곡 가는 길.
함양읍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방면으로 진행
조동에서 의탄 방면 1023 번 도로 추성리 추성마을.
이곳 마을에서 벽송사와 추성본동으로 갈라지는 분기점.
우측 추성본동 방향으로 30분 오르면 칠선계곡.
국골 및 한신 계곡은 그 위 아래로 나란히 위치.
함양에서 추성동행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배차.
기우제.
가뭄이 들었을 때 강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우리나라는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업 특성
한발은 고대사회부터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재앙.
기우제는 조정으로부터 자연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지내는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였다.
환웅이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하강했다는 기록
고조선 사회가 물에 의존하는 농경사회로 진입다는 증거.
삼국시대에는 명산대천이나 시조묘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법회인 태일(太一)이나 도교식의 초제,
그리고 무당을 모아서 지내는 취무도우(聚巫禱雨) 등 기우제.
이조시대에는 기우제를 중심으로 각종 주술적 방법까지 동원
가뭄이 들면 임금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모두 근신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천명을 잘못 받들고 정사에 부덕한 때문이란 인식
이조 초 〈용재총화 齊叢話〉기록에는 장소에 따라 12 제차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北郊)의 용신에게 기우제.
이는 이조시대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를 설명한 기록이다.
한편 민간에서도 다양한 기우 풍습이 있었는데,
동제(洞祭)의 절차에 따라 기우제를 지낸 다음
여러 가지 주술적 방법이 기우제에서 동원되었다.
매년 정초 줄다리기는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쌍룡상쟁(雙龍相爭)의 상징으로서 기우 풍습.
전라도 지역에서는 특히 산상분화(山上焚火)가 성했는데,
양(陽)인 불을 지펴 음(陰)인 비가 내리길 기대하는 풍습.
밤에 여러 마을이 함께 지냈기 때문에 대단한 장관을 이뤘다.
또 조정에서 북묘의 용에게 제사지내는 것 같이
민간에서도 장터나 기우제장에서 용제를 지냈다.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른 다음 비늘 등을 그려
용의 형상을 만들고 주술적인 방식으로 제를 지냈다.
용신이 거주한다고 믿는 못에
호랑이의 머리나 개의 생피를 뿌려
용이 비로 그것을 씻길 기대하는 풍습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처마 끝에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
비가 내리기를 기대하기도 하는 기우풍습이 성행했었다.
그러나, 현재 관개수리 발달로 인하여 거의 소멸되었다.
..................지구촌의 기우제 풍습..........................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제우스가 비를 내린다는 믿음.
제우스의 신목(神木) 떡갈나무 가지에 물을 적셔 기우.
로마에서는 작은 신상을 티베르강에 흘려보내며 기우제.
게르만 민족은 처녀를 발가벗겨 물뿌리며 기우제.
인도에서는 개구리 뱀에게 물을 끼얹는 기우 풍습
유럽에서는 돌에 물을 묻히거나 물 속에 담궈 기우.
중국에서는 용신(龍神)에게 지렁이를 바치는 기우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조정 지방관청 민간 기우제
왕이 정사를 잘못해 내리는 천벌이라 여기며 하늘에 제사
왕이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기고,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일로 국가적인 기우제
민간에서는 산상 냇가에 성역 제단을 만들고
마을 공동으로 무당의 가무까지 겻들인 제사
고려시대에는 종묘사직 구월산 신사 북교 남교
임해원(臨海院) 등지에서 무당이 주관한 기우제
가뭄이 심할 때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기우제
이조시대에는 종묘사직 흥인(興仁) 돈의(敦義)
숭례(崇禮) 숙정(肅靖)의 4대문, 동서남북 4교
종각 또는 모화관 경회루 춘당대 선농단 한강변
가뭄이 심할 때는 3품 이상 관원을 파견해 기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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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는 가뭄이 오래 계속될 때
신령에게 비가 오길 비는 제사로
동서양 모두 고대부터 전해진 풍습.
옛날 우리나라는 3~4년에 한번 가뭄이 들어
삼국시대에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에서는 산꼭대기,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마을 전체의 공동 행사로서 기우제를 올렸다.
제주는 마을·지방관청의 우두머리가 맡았다.
고려시대에는 종묘, 사직단, 구월산, 신사,
북교, 남교, 임해원(흥덕) 등에서 기우제,
대개 무당이 의식을 치뤘고 가뭄이 심할 때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비를 기원.
시장을 옮기거나 부채질 양산쓰기를 삼가했다.
종묘, 사직단, 4대문, 한강에서 제를 올린 이조시대
오래 가물 때는 3품 이상 제관들이 12차례 제를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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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민간사회에서 성행했던 굿 풍장 풍물 두레
8.15해방 이후에 국악정리 사업으로 농악이라고 통칭
무속신앙은 일제 치하에서 가장 중요한 탄압대상이었다.
그중 공동체를 형성 유지해온 마을굿을 철저히 제지.
1920~33년 농업장려운동의 하나로 두레굿만 허용했다.
굿은 우리나라 선조들의 축원 형태로 나타난., 제천의식
꽹과리와 방울로 두레 농악을 즐긴 신라의 〈도솔가〉
"쾌지나 칭칭나네" 꽹과리 두레소리가 지금껏 전한다.
고구려에서는 고깔과 수건을 쓰고 꿩꼬리를 꽂고 춤
남녀가 주야로 굿치고 놀더라는 기록〈삼국지〉후한서
백제에서는 산천에 제사지낼 때나 군사 열병(閱兵)할 때
농악을 쳤으며 일본 가면굿 미마지(味摩之)는 백제 음악.
신라 진흥왕 때 나라굿으로 처음 시작된 팔관회
국가적인 규모 굿으로 토속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점 등은 농악의 역사적 기원
우리나라에서 농악의 기원설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전통사회의 각 촌락마다 형성되었던 두레
파종과 추수를 신에게 축원하고 평안을 비는 음악
둘째, 농민을 반농반군(半農半軍)의 제도로 조직하여
농군으로 훈련시키고 유사시 군인으로 징집한 농군악
셋째, 사찰건립 중수 등을 위해 화주승이 걸립한 굿패.
다른 중과 함께 고깔 쓰고 농악기 들고 민가에 들러 걸립
농악의 쓰임새는 크게 나눠 마을굿·걸립굿·두레·풍장굿
마을굿은 마을의 평안과 번창, 그리고 재앙을 쫓기 위한
공동의 목적을 위해 마을 수호신에게 행하는 집단적 의례.
당제·부락제·산제(山祭)·산신제(山神祭) 등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고 일반적으로 동제(洞祭)라고 불렀다.
마을 대표를 주제하거나 직업 무당이 가무(歌舞)를 행했다.
무당이 주제할 경우 당굿·도당굿·별신굿 등 '굿' 명칭
마을 대표 또는 웃어른이 주제하면 '당 제' 명칭을 사용.
5.16 및 새마을 운동후 전국적으로 만연된 무속신앙 정비.
'그후 거의 사라진 직업 무당의 근거지..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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