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1 ( 남사당. 풍류. 풍류도. 유불선. 솟대. 장승. )

donkyhote 2010. 11. 12. 03:17

 

 

남사당.



남사당은 꼭두쇠 밑으로 예인 4∼5명 중심 민속놀이 집단
일정한 거처 없는 독신남자들과 간혹, 여자 1∼2명이 낀다.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 민속놀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밤새도록 흥겹게 놀이판을 벌린다.

남사당패 서열은 맨 위에 꼭두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 40∼50명 패거리

꼭두쇠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인다.
남사당 조직 패거리는 일사분란하다.
남사당 조직은 서열 간의 규율이 엄격.

고아, 가출 농가 아이, 등으로 구성.
곰뱅이쇠는 꼭두쇠 보좌 역활을 한다.
마을 놀이마당 허락을 받아오는 일꾼.

뜬쇠는 각 연회 분과 별 선임자 역활.
분과별 연예를 익힌 몇 사람이 곧 가열.
가열 밑에서 연예를 배울 초입자가 삐리.

삐리는 뜬쇠들이 지정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
한가지씩 기예를 익힌 후에야 남사당에서 가열이 된다.
이들 삐리는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한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 독신남자 조직
숫동모는 남사당 패에서 가열 이상의 책임자.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데 일정한 보수는 없다.
대개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 허우채를 받는다.
마을 사람들이 암동모와 자고 난 댓가로 노자를 주는 것.

암동모란 몸을 파는 여장(女裝) 남자 사당패이다.
마을 사내와 하룻밤 잠잔 댓가로 허우채를 받는다.

남사당은 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줄타기 줄을 매고
꼭두각시 놀음 포장막과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풍물은 인사굿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
양상치기 허튼상치기 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
무동놀림·네줄백이 등등의 굿판 놀이를 벌린다.

판굿이 끝난 다음에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
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 채상놀이 등등을
차례대로 하는 것을 보통 풍물놀이라고 한다.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를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

버나 연예인이 관객에게 묘기를 보이는 동안
버나잽이와 소리꾼 어릿광대들이 재담을 한다.

'살판은 오늘날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묘기.'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 팔걸음·수세미트리·
앉은뱅이 모말되기·숭어뜀 등등의 순서로 진행한다

살판쇠와 어릿광대가 재담을 주고받으면,
잽이 장단맞춰 정해진 차례로 곤두질한다.

어름은 풍물놀이에서 줄타기 묘기 종류를 말한다.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다니는 '광댓줄'과는 다르다.

일정한 보수 없이 민중 취향에 맞는 놀이판.
어름산과 어릿광대가 재담을 주고받는 동안
줄 위에서 잽이 장단맞춰 노래로 흥을 돋군다.

덧뵈기는 그때 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

먼저 놀이판을 확보, 둘째 외세를 잡고,
셋째마당은 내부 모순을 불식하는 놀이,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놀이판.

'덜미' 놀이는 맨 마지막 순서이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

<목덜미를 쥐고><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 놀이.

인형극 줄거리는 지배층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 및 불교 및 종교의 비판.
40 개 인형과 10개 소도구를 사용해 인형놀이

2마당 7 거리 <꼭두각시놀음>.
2 마당 7 거리는 <박첨지 마당>·
<평안감사 마당> 등등의 인형놀이. 

...............풍악대........................
별신과 전쟁에서 유래된 진(陳)나라 굿.

1) 경상도 내륙지방의 전형적인 풍물굿.
2) 풍물굿의 군악적인 영향이 아주 강하다.
3) 320년 역사를 지니고 있고 상쇠의 계보가 뚜렷.

제1대 정재진 제2대 이군선 제3대 윤상만 제4대 우윤조
제5대 이남문 제6대 김홍엽 제7대 한기식-손영만

4) 편성에서 큰북(대북)이 장구 앞에 선다.
5) 가락의 바뀜과 진풀이가 매우 많다.
6) 큰북은 북채 두개를 두 손에 들고 친다.

전라남도 진도의 북춤과 비슷.
북의 크기따라 그 맛이 다르다.
........................................

................풍물(굿판)................
꽹과리, 징, 장고, 북 4가지 주요악기를 치며
소고 들고 춤 추고, 노래 부르며 가장행렬하는
잡색놀이 연회형태를 풍물 또는 굿판이라 한다.

'풍물은 노래, 춤, 음악, 놀이의 사물놀이.'

옛부터 정월 초에는 동제나 지신밟기를 하며 한해를 시작.
농번기에는 일터에서 두레굿을 쳤고, 추석에는 풍년 기원굿.

싸움에 임해서는 싸움 굿, 줄다리기, 차전놀이등
대동놀이로 대동판을 형성하는 역할수행이 곧 농악

풍물을 농악이나 사물놀이라 부르는 말은 잘못된 말.
<농악>은 일제 시대에 농업 장려를 위한 목적의 놀이.
<사물놀이>는 풍물의 한 구성 요소인 놀이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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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은 신라 말 화랑문화 변질에서 파생된 놀이 문화.
'화랑세기' 기록을 보면 화랑은 원화제도에서 비롯된다.
옛날 연부인이 많은 미인을 기르며 국화(國花)라 불렀다.

그 풍속이 신라에 들어와 ..원화(源花) 제도. 
원화제도는 중국 연나라 풍속에서 유래된 것.

신라에서는 원화 2명이 화랑 단체를 이끌다가 문제가 많아 폐지.
신라 귀족들 남성은 물론 여성들에게도 정조란 개념조차 없었다.
특히, 미실은 진흥왕의 사랑을 얻어 원화가 되자 화랑을 좌지우지.

결국, 미실은 58세에 운명할 때까지 신라 권력을 좌우한 여인.
미실은 먼훗날 이조 장희빈, 장녹수, 정난정 만큼 알려진 요부.
그녀가 신라 권력의 핵심이었던 비결은 남성들을 사로잡은 방중술.

'남사당은 신라 화랑을 떠돌이로 풍자한 놀이문화.'

 

 

풍류.



원래 풍류 뜻은 '속되지 않고 운치가 있는 일'.
오늘날 술 마시고 질탕하게 노는 뜻으로 타락.

〈삼국사기〉 진흥왕 화랑제도 설치에 관한 기록.
최치원이 화랑 난랑을 위해 쓴 난랑비 서문 중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

유불선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중생을 교화.
그리하여, 그들이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 가르침

또 행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
그것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 그대로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행함

"이것이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다"

신라 유불선 3교 이전에 이미 고유의 풍류라는 가치관
풍류의 수련자들이 바로 화랑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최치원에 따르면 이 풍류도의 내용은 3교를 두루 포함

그 실천에 있어서 화랑의 교육을 위한 교과목은 3가지

① 도의로써 몸을 닦고,
② 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며,
③ 명산대천을 찾아 노니는 것 등.

②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신령과의 교제술로서 종교적 제의
③ 역시 명산대천 신령과 교제를 위한 제의적(祭儀的) 행사
따라서 풍류도는 샤머니즘의 색채가 강했던 우리 고유 사상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와 관련된 풍류.

"복희씨가 천하의 왕이 된 뒤로부터
최고는 우리 태조의 삼한(三韓)이요,
저 막고야(姑射) 산에 있다는 신인(神人)은
월성(신라 서울)의 사자(신라의 대표 네 화랑)."

고려 궁중 연중행사였던 팔관회의 제의에
양가(良家)의 자제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고 춤추게 한 풍류가 전해져왔다.

고려 때 풍류를 수행하던 화랑들이 사라지면서
그 유습과 제의에 이용된 노래와 춤만 남아 풍류

이조 시대에는 "청사초롱 수십 쌍을 고이 입은 기생
풍류를 치고 만세교로 나가니" 등의 내용이 곧 풍류.
즉, 고려 풍류 음악만 남아 이조 시대에 풍류라 한듯.

자연과 친화하며 시문(詩文)·음주가무·
청담 등을 즐기는 풍치있고 우아한 태도
선비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따라서 이조시대 풍류는 예술에 의한 탈속성
술에 의한 무아경(無我境)이 풍류의 주요 요소

신라 현묘지도(玄妙之道)에서 그 종교성이 탈락
의례적인 부분만 남아 세속화한 것이 이조 풍류.

신라 화랑이 이조시대에 와서 남무(男巫)·창우(倡優)·
유녀(遊女)·무동(舞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변질
풍류는 단지 술먹고 기생과 질탕하게 노는 말로 타락.



풍류도(風流道)



고조선 단군에서 신라 화랑으로 이어지는 國仙花郞
한민족 역사 속에 정통성의 뿌리로 전승된 철학사상.
신라시대 風流道와 花郞思想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

신라 멸망후 화랑정신은 고려시대의 郞家思想
이조시대에는 선비정신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우리 민족문화 밑바탕에 깊게 깔린 檀君文化
한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이 곧 광명(光明)사상
풍류도 중심은 생명의 진리인 밝음을 닦는 도.

풍류도는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이며
自然 人生 藝術의 혼연일체 삼매경
면면히 이어 온 민족문화 기초이념

풍류도는 우리 민족문화와 사상전통의 골수
한낱 춤추고 노래하는 세속적 유희가 아니다.

羅初의 원효, 羅末 최치원, 삼국유사를 쓴 일연
'玄妙의 道' 현묘란 그윽하고 그윽해서 묘한 것

풍류도는 유불선(儒佛仙) 3교가 아우러진 것.
즉, 유불선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사상.
'우리 민족 사상' 풍류도에 기대어 정착한 유불선.



유불선(儒佛仙)



유불선은 풍류도에 기대어 정착한 외래종교.
신라 말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난랑이라는 화랑에 관해 최치원이 지은 글 내용.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우리나라의 현묘한 도를 '풍류'라고 한다.
고구려 아도화상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

“고구려는 불법을 알지 못하나 신라 경도(京都)에는
일곱 절터가 있으니 모두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

지금 불교에서는 남방 불교의 불기를 쓰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방불교를 사용했다.
민통선 비석이 그 사실을 뒷받침(불기 2955년)

석가모니 예언에 의하면 3000년 후 말법시대에서도
말법인 멸법 시대로 간다고 했으니 지금은 멸법 시대.
외래종교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 7500년전부터의 풍류도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때 사상.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

주나라에 주사라는 벼슬이 있었다.
주사는 오늘날 도서관 직원에 해당.
노자는 주나라 도서관 직원을 했다.

노자도 역시 신교 중 자신의 사상.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나쁜 일은 삼가하고 선한 일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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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천재를 힘겹게 넘어 횡천강(橫川江)을 거슬러 오르면
하동호(河東湖) 하늘색을 닮은 물이 반갑게 맞는 청학동.
민박집들이 들어선 청학동(靑鶴洞)이라 부르는 학동마을

청학(靑鶴)은 봉황새 같이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청학은 신선이 나들이할 때 타고 다니는 새로도 알려졌다.
청학이 울면 태평천국이 이뤄진다는 '전설의 고향' 청학동

옛부터 민초들이 가혹한 조세 수탈과 전란으로부터 피신
안전하게 살려는 의지로 이상향을 추구했던 곳이 청학동
신라 말 혼돈과 고려 무신정권의 횡포, 이조때 임진왜란.

'청학동에 살면 자손이 번창 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

정감록 신봉자들은 전설에 따라 이곳에 모여들었다 한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김재욱씨가 청학동 최초의 주민인듯.

洞假宿雲歸(동가숙운귀) 골에서 밤을 새운 구름은 돌아가고
秋深人跡絶(추심인적절) 숲이 깊어 사람 발길은 그쳤더라.
松風赤有情(송풍적유정) 솔바람은 유정도 한데
虛送晴巒月(허송청만월) 맑은 봉우리 달을 불러서 보내더라.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학동마을
이곳을 이상향으로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벌떡거리 장에서 50리 길을 올라가면 청학동.’
벌떡거리는 횡천장(橫川場)이며 50리 단일 계곡길

7세 이상 마을 남자는 여명이 밝기 전 목욕재계
제당에 모여 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무명백의를 입고 결혼 전엔 머리를 땋아 기른다.

결혼 후에는 상투를 틀어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고
고무신을 신으며 청학동에서 일생의 안락이 보장되고
죽어서 신선이 된다고 믿는.. <유불선 합일 갱정유도>

신선이 되기 위해 속세의 유혹을 뿌리치고
외부와 담쌓고 전통생활을 고집한다고 한다.

개고기를 먹지 않고 담배피우지 않으며
신선이 되기 위한 최선의 길은 백일기도

기도 한 달 전부터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거나 개고기를 먹으면 미치거나
뱀에 물려 죽는다는 학동마을 주민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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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마을 주민 자녀들은 대부분 서당을 다닌다.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아 학력이 없어 입영 면제
대부분 곧바로 예비군에 편입되기에 문제가 발생.

예비군 훈련에서 언제나 이곳 대원들은 두발상태 불량
머리를 길러서 땋았으므로 교관도 어쩔 수 없는 문제점.
'노래 일발 장진’'발사'로 용서하려 하면 노래도 창(唱)

삼성궁 입구에서 징을 치면 화랑 복장을 한 총각
삿갓 쓰고 안내하는., 청학선원 배달성전 삼성궁’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곳에 고조선 소도를 복원

서양 귀신을 반대하고 우리 조상 숭배를 강조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고유 정신을 되찾으려는 전통무예
그러한 것들을 배우고 익히며 수행하는 곳이 삼성궁.


‘지리산 삼신봉’- 시(작자 ?)

眞珠庵 목탁소리 절골에서 멀어지니
巨林골 타고 오는 반가운 天使바람
大成골 花開洞天이 웃으면서 반기네.

左로부터 헤아리면 구름 속의 老姑壇
碧霄嶺 머리 위에 낮달이 졸고 있고
天王峰 우뚝 솟은 뒤 숨어사는 써리봉.

哀타는 내 肉身은 三神峰에 꿇어앉아
靈神께 비옵니다. 聖母님께 비나이다.
神이여! 아픔과 매듭 풀려나게 하소서


‘靑鶴洞’- 시(작자 ?)


벌떡거리 장(場)을 지나 협곡(峽谷) 따라 오십리길
청학(靑鶴)이 울든 자리 찾다 모인 묵계리(黙溪里)
정감록 십승지 명당 수(繡)를 놓든 이상향(理想鄕)

봄이면 벌통 받고 소꼴 깨는 상투머리
일생이 안락(安樂)하고 신선(新船)으로 가는 길
하이얀 바지저고리는 태평천국 이라든가?

대통밥 익는 냄새 찌지고 굽는 소리
청자(靑字)는 어디가고 학동(鶴洞)만 남았는가?
골 안에 가득 찬 매연(煤煙) 울고 있는 진주암터

 

 

솟대.



나무로 만든 새를 장대 위에 앉힌 민간신앙 대상물.
돌로 만든 새를 돌기둥 위에 앉힌 것도 솟대라 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올릴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년을 위해 세운 솟대.
보통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는 것이 대부분

장승·선돌·탑·신목 등과 함께 세우기도 한다.
솟대의 새는 대개 오리 형상이며, 일부지방에서
까마귀·기러기·갈매기·따오기·까치 등의 형상.

솟대신앙은 물을 상징하는 물새들을 장대 위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으로도 삼았다.

풍수지리설과 과거급제 입신양명의 풍조가 널리 퍼지자
떠나가는 배모양의 솟대에 돛대로 짐대를 세우기도 했고
급제를 기원하는 화주대(華柱臺)로 분화되어 점점 더 발전.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분포는 만주 몽골 시베리아 일본에 이른다.

이는 솟대가 북아시아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 대상물 임을 알려준다.

솟대는 형태를 기준으로 솟대 짐대·
돛대 설대 새대 장승대 등으로 구분

기능을 기준으로 수살·추악대·진목·
소줏대·표줏대·효대 등으로 나뉜다.

동제와 관련해서 : 당산·진또배기·별신대·성황대
세워진 위치에 따라서 : 거릿대·갯대,
의인화를 기준으로 해서 : 거릿대장군님·대장군님·
당산할머니 당산할아버지 진또배기서낭님 등으로 구분.
이들은 모두 신간(信竿)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지닌다


솟대 신앙은 북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 현상이며
청동기시대 조형물이나 문양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솟대는 북아시아 전지역에 퍼져나간 보편적인 신앙

한반도에서는 천신 신앙을 바탕으로
나무와 천신의 사자(使者) 새가 결합
솟대 신앙이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솟대신앙은 티벳 고원에서 유래된듯.

티베트의 기이한 장례풍습, 천장(天葬)
천장은 일명 조장(鳥葬)이라고도 한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독수리가 살점을 뜯어먹게 하고,
뼈까지도 으깨어 새 먹이로 바친다.

그렇게 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새와 함께 하늘로 오른다고 믿는다.

티베트 문화를 이해 못하는 이에겐
지극히 낯설고 놀라운 장례풍습이다.
티베트에서는 다섯 가지 장례법이 있다.

천장, 토장(土葬), 수장(水葬),
화장(火葬), 탑장(塔葬) 5가지

어느 장례법을 선택하는 것은
고인과 그 유가족의 경제력이나,
고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다.

천장은 조장이라고도 하며
티베트의 기이한 풍습이다.

유체를 독수리가 먹어치우게 하는 장례법
티베트에서 가장 일반적인 유체 처리방법.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유체는 3∼5일 동안 집안에 안치

사승(스승인 스님)을 모셔와
시신 머리 맡에서 '보아 의식.'

머리 위 구멍으로부터 죽은 사람의 의식을 빼
아미타여래의 마음에 녹여 넣어 윤회에서 해탈.

장례식날 아침 유체는 옷벗기고 손발은 묶은 채
흰 헝겊으로 싸여 조장의 청부인에게 인도된다.
천장터에서 유체는 배를 째고 창자를 끄집어낸다.

그 다음 목, 양손, 양다리를 잘라내어
살은 살, 뼈는 뼈로 구분해 갈라놓으면
부근에 와 있던 독수리들은 모두 모여든다.

먼저 허벅지 살 또는 먹기 좋은 살을 주면
독수리들이 달려든다. 그러나 살은 좀 남긴다.

주변 바위에는 구멍이 여러 개 있어,
그곳에 뼈, 두개골을 넣어 잘게 부수고
보리 볶은 가루와 남긴 살을 넣고 섞어서
경단같이 만들어주면 독수리들은 먹어치운다.

결국, 남는 것은 머리카락 뿐이다.
티베트에는 우리나라 같은 묘가 없다.

"혼이 빠진 육체는 다른 생물에게 포시(布施)
그러한 행위가 자비스러움으로 이해되고 있다.

 

 

 

 

장승.

 

 

장승은 머루랑 달래가 익는 농촌 마을의 상징. 
장승은 성풍습을 바로 세우려는데서 유래되었다.
그  중 근친상간에 관한 두 가지 전설이 전해져온다.

.......................전설 - 1................................
외딴마을에 철모르는 딸과 홀로 된 아버지 단둘이 살았다.
오직 딸 하나만 잘 키우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았던 아버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늙고 딸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품에 안아 키웠던 딸에게 연심.
어느날 더이상 연심을 참을 수 없어 딸에게 덤벼든다.
아버지가 싫지는 않았지만 천륜을 저버릴 수 없었던 딸.
궁지에 몰린 딸은 정절을 지키려 아버지에게 고심 끝 제안.

""마루 밑으로 들어가 개처럼 짖으면 몸을 허락할게요."

참고 참았던 연심이 봇물처럼 터지자 이성을 잃은 아버지
정말 마루 밑으로 들어가 개처럼 짖자 딸은 목 메어 자살.

차마 천륜을 저버릴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만 딸.
딸의 죽음을 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다 숨이 끈긴 홀아비.
마을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 장승의 기원.
...................................................................................

사량도 지이산 옥녀봉에도 이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온다.
'옥녀봉의 전설'은 섬진강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하자.

...........................전설 - 2...........................................
장승은 오누이 근친상간에서부터 유래되었다는 전설.

'외딴 섬에서 오누이 단둘만 살게하면, 어떻게 될까?'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한 신하는 오누이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답변.
왕은 오누이라도 남녀라 부부 사이로 변할 것이라고 주장.
왕과 신하는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아 내기를 걸게 되었다.

왕은 내기를 건 신하의 자녀를 외딴 섬에 보냈다.
신하들은 그 내기의 결과에 대해 모두 궁금해 했다.
몇년이 지나 외딴 섬에 보내진 오누이에게 생긴 자녀.

장 승상은 자녀가 인륜을 어신 사실이 수치스러워 자살.
왕은 고인이 된 장 승상의 뜻을  기려 장승을 세웠다 한다.
...................................................................................... 

우리나라에서 장승이 지명으로 남은 곳은 상도동 <장승백이>.

상도동은 옛날 상여꾼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상투굴. 
'성도화리, 상도리' 지명은 1955년 상도동으로 바뀌었다.
상도동에는 아직도 옛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곳이 많다.

숭실대에서 관악구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은 <살피재>.

 
'산적을 피해 잘 살펴가야 하는 무섭고 험한 고개'라는 뜻이 담겨있다.
상도 2동 영도시장 맞은 삼거리 장승배기는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 격.
'변강쇠가' 대방장승이 있던 곳이라,  아직까지도 '대방동'이라고 한다.

<1777년 수원화성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러 가던 정조.
행인들이 쉬어가고 마을 안전을 지켜주라는 뜻에서 세운 장승.

<장승백이> 아래 동네가 <노량진> 배가 들어오는 강변마을
흑석동은 예전에 바닷물이 역류해 갯벌이었음을 알리는 지명.
노량진 옆 <본동>은 '이조시대에 노량진의 원마을'이란 뜻이다.

 
본동 內 가칠목(架七木)은 한강물이 불면 길이 막힌 강변마을. 
옛날 전염병자(호열자, 염병)와 돌림병자들을 격리시켜 가둔 곳.

당시 마을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던 곳이 매봉재 서쪽 서낭당 고개.
이곳 이외에도 민절서원 뒷편, 또 하나는 사육신묘 뒷쪽에 있었다
이조시대 성도화리 지명은 상도동이 매음굴 이었음을 뜻하는 지명.

그 당시 죽은 시신의 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는 곳이라 사당동.
관악산 자락의 봉천동(奉天洞)은 혼이 승천하는 뜻의 공동묘지.

'장승이 어떤 용도로 씌였는지 알려주는 장승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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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문화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기자신앙.
불교가 쇠퇴한 이조시대에 민간신앙이 성행

우리나라 장승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장승은 하와이 퉁가족 마을에서도 볼 수 있다.
장승은 아프리카에도 있는 전세계적인 민속문화.
장승은 다른 부족 침범을 경계한 고유 영역 표시.

'경고를 어기고 침입하면 공격하겠다는 뜻.'

아프리카 식인종은 침입자를 잡아 삶아 먹고
그 해골을 장승에 걸어두는 옛 풍습이 있었다.

'타잔'이라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장승.

우리나라 장승에도 침입자를 경계하는 뜻이 있다.
우리 조상은 옛부터 천신(天神)이 있다고 믿어왔다.
자연환경에 기대어 사는 인간들의 천신을 향한 신앙.

장승은 인간 최초의 조형물이자 토탬신앙의 상징.

사유지 경계선을 알리려고 장승을 세우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장승은 솟대(蘇塗)로부터 유래되었다.
돌로 만든 장승은 선돌(立石)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이조시대에는 후(瑢), 장생(長慷), 장승(長丞, 張丞,長承)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법수 당산 할아버지 수살목 등.
장승은 <지역간 영역 표시> <이정표> <마을 수호신>의미가 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장승은 마을 위치와 지리를 알려준다.
천하대장군과 같은 글씨가 없는 장승은 그 마을의 수호신.

남자 관모를 쓴 장승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형태의 장승은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또는 앞면 허리에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지방에 따라 색갈 모양 크기는 각양각색
장승의 괴상망칙한 얼굴 형태는 비슷하다.

장승은 서낭당 산신당 솟대처럼 씌이고,
액땜을 하거나 질병을 예방하는 용도이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 농경 유목사회 토탬신앙
삼국시대에는 불교 영향으로 장승이 자취를 감춘다.
이조때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부활.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긴 왜적이나 청군의 만행
그들에게 천벌을 받게 된다는 경각심이 주목적.

장승은 소나무, 밤나무 등으로 만든다.
장승 조각은 반드시 죽은 나무로만 한다.
성기처럼 깍아 꺼꾸로 세워 땅에 밖는다.

즉 나무뿌리가 하늘을 향하고
나무가지 방향은 땅속에 묻는다.

왜 죽은 나무를 꺼꾸로 묻는 것일까?

산나무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지만,
장승은 하늘에 뿌리를 내린다는 믿음.

죽은 나무는 꺼꾸로 세워야 썩지 않아
장승의 수명이 두배로 늘어나게 된단다.
나무뿌리 쪽이 넓어 큰얼굴 조각에 적당.

'얼굴이 크면 기운차게 보이는 장승.'

천하대장군은 눈알이 튀어나온 듯한 얼굴
지하여장군은 흉하게 일그러진 듯한 얼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나란히 세운다.

허튼 짓 하면 혼낼 듯 거칠게 도끼질한, 장승 얼굴.
튀어 나온 눈은 낯선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이 주목적.
큰코는 다산을 기원하는 바램이고, 큰입은 풍년을 기원.

'삶의 표정, 세월과 자연이 담겨있는 장승.'

짓밟혀도 버티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긴 소나무 장승. 
대들보, 나무 관을 만들때 소나무를 사용한 이조시대. 
성풍습이 문란했던 시기는 임진왜란 ~ 병자호란 전후.

 
'그당시 장승 문화가 꽃 핀 이유는 무엇일까?'

이조 후기 판소리의 주인공 '변강쇠'.
장승귀신들에 의해 젊은 나이에 요절.

변강쇠는 삼남에 살며 빌어 먹고,
우물에 똥누고 임신부의 배를 차고
호박에 말뚝을 박는 등의 몹쓸 짓만
골라하다가 동네에서 쫓겨난 잡놈이다.

허구헌 날 성애(性愛)만 밝히고
옹녀 부인이 먹여 살린 기둥서방.

마을에게 쫓겨나 옹녀와 함께 지리산 행.
그곳에 살면서 부인의 바가지에 시달린다.

난생 처음 나무하러 가서는 낮잠만 실컷 자고
별이 총총한 밤에 일어나 장승을 빼어가지고 와
도끼로 잘라 불을 지핀, 생각이 짧고 게으른 인물.

장승 귀신들의 공격을 받아 49일 간 병고
결국 몹쓸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변강쇠는 오장 육부 장기들이 서서히 마비되며 운명.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성애를 추구했던 변강쇠의 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의 피부가 썩고 문들어진 산송장.

성문란은 그만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장승문화에 담긴 교훈.
서양의 정조대나 이조에서 은장도가 성행한 시기는 국가적 위기.
장승문화는 이조시대 전란으로 성풍속이 흔들렸을 때 문화의 소산.

'오늘날 장승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같은 맥락.'

변강쇠가 8도 장승들의 집단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산청.
홑치마 여인들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기우재의 고장..'한신계곡'.
마천 실상사,  추성리 벽송사, 삼봉산 오도재 일대는 장승의 고장.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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