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둘레둘레 느릿느릿 마음으로 걷는다. - 지리산 둘레길

donkyhote 2012. 5. 3. 23:04

 


지리산 둘레길이 시나브로 왕산을 오른다. 옛 가락국의 한이 서린 길이요,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민초들이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애환의 땅이다. 산사람들의 한과 눈물을 먹고 자란 때문일까. 지리산 단풍은 핏빛 보다 붉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만가 보다 구슬프다. 그날의 아픔을 어루만지듯 철 이른 낙엽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상사계곡 숲길을 한 겹 두 겹 덮는다.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의 농로를 터벅터벅 걸어온 지리산 둘레길은 천왕봉이 앞산인 경남 산청에서 비로소 호흡이 가빠진다. 그 호흡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 토하는 거친 날숨이 아니다. 피톤치드 상큼한 지리산의 숲 향기를 폐부 깊숙이 흡입하는 들숨이다.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 마을길을 씨줄날줄로 엮는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픈 길은 산청군 금서면 수철마을에서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6일.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수철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고동재를 넘는다. 그리고 잇따라 만나는 가현마을 방곡마을 점촌마을 등에서 700여명의 양민을 학살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수철마을은 한 폭의 빛바랜 수채화다. 벼 그루터기만 남은 다랑논은 무채색으로 퇴색하고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는 갈색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철마을과 이별한 둘레길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채색되기 시작한 산허리를 돌고 돌아 비포장도로로 바뀐다.

완만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수철마을에서 고동재까지는 3.5㎞. 그 옛날 가락국의 군대가 고동을 불렀다는 고동재를 넘으면 가현마을이 나온다. 지리산 둘레길은 고동재에서 가현마을 가는 길과 이별하고 원동마을 뒷산(601m)을 오른다. 붉은 단풍과 노란 단풍이 소나무 그늘 아래서 화염처럼 활활 타오르고 보랏빛 용담초와 순백의 구절초도 한주먹씩 피어있는 숲이 깊어가는 가을을 노래한다.

산불감시초소가 위치한 봉우리는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 동쪽으로 수철마을의 다랑논과 산청읍내가 희미하게 보이고, 단풍으로 물든 남쪽 연봉에 지리산 천왕봉이 걸개그림처럼 걸려있다. 방곡천이 흐르는 서쪽으로는 방곡마을과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전망대와 가까운 북쪽의 봉우리는 왕산과 문필봉으로 산허리에는 고령토를 채취한 생채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원동마을 뒷산을 내려오자마자 쌍재를 만난다. 쌍재는 바람재와 고동재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승용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길섶에는 학살당한 민초들의 넋인 양 붉나무 단풍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지리산 둘레길 쌍재 구간은 왕산(924m)의 산허리를 잠시 에두른다. 왕산은 고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을 품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구형왕은 즉위 11년만인 서기 532년에 국운이 다한 가락국을 신라의 법흥왕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는 죄책감에 돌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판 피라미드로 불리는 돌무덤 위에는 구형왕이 잠시 살았다는 수정궁터와 류의태가 한약을 다릴 때 이용했다는 약수터도 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쌍재를 넘으면 한 가구로 이루어진 쌍재마을이 나온다. 쌍재마을은 한때 30가구가 살았던 산촌이었으나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 30년 전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폐허로 변했다. 그러던 중 어린시절 마을을 떠났던 석재규씨(50)가 8년 전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인 쌍재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석씨는 버려졌던 땅에 당귀 백출 등 약초를 심었다. 산청군이 한방축제를 개최하는 등 약초산업을 육성하면서 석씨는 자연스럽게 성공한 귀농인이 되었다. 최근에는 둘레꾼들이 석씨의 외딴집을 찾아들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마을로 변했다. 석씨 역시 이들에게 손두부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고 있다. 쌍재 아래에 묵은터라는 마을도 있었지만 산청·함양 사건 때 불타고 없어졌다.

지리산 둘레길은 쌍재마을에서 왕산계곡 숲길로 접어든다. 오색물감을 흩뿌린 듯 단풍터널로 변한 숲길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평탄하다. 단풍터널이 계곡을 건너는 순간 발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폭포가 하나 나온다. 동네 처녀를 짝사랑하던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는 그럴듯한 전설을 간직한 상사폭포다. 30m 높이의 상사폭포는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더 웅장하다. 갈수기라 물은 적지만 은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린다. 폭포수와 함께 떨어진 단풍잎이 폭포 아래 소에서 맴을 돌다 구불구불한 숲 속으로 가을여행을 떠난다.

상사폭포에서 방곡마을까지는 약 1.4㎞로 완만한 내리막길로 엄천강의 샛강인 방곡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나온다. 고동재를 넘은 토벌대는 방곡마을 위쪽에 위치한 가현마을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총살시킨 후 이곳 방곡마을에서 다시 양민들을 학살한다. 야수로 변한 토벌대는 방곡천을 따라 내려가면서 점촌마을과 서주마을 등에서 학살행진을 계속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망국의 한을 품고 차가운 돌무덤에 묻힌 땅, 무고한 양민들이 견벽청야(堅壁淸野: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불 포기하는 지역은 모든 것을 없애 빈 들판을 만든다)라는 작전명령으로 학살당한 비극의 땅….

가을이 깊어가는 지리산 둘레길에는 그 아픈 역사가 생채기처럼 새겨져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둘러싼 3개 도(전남, 전북, 경남)와 5개 시·군(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 100여 마을을 이어주는 300㎞ 길이의 트레일로 현재까지 개통된 구간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지리산길 안내센터’에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마을까지 70㎞.

지난 8월에 완공된 5번째 구간인 산청 수철마을∼고동재∼쌍재∼상사계곡∼추모공원∼함양 동강마을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은 11.9㎞로 4시간∼4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산청터미널에서 수철마을 정류장까지 하루 5차례 군내버스가 운행된다. 승용차 이용객은 수철마을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끝낸 후 방곡마을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산청읍내까지 간 후 다시 군내버스를 타고 수철마을로 돌아와야 한다(산청 버스터미널 055-972-1616).

왕산 기슭의 산청한의학박물관(055-970-6437)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전문 박물관. 한의학의 역사와 발전 과정, 한의학의 우수성, 약용식물 역사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한방체험실에서 사상체질, 건강나이, 전신반응 등을 무료로 측정해 볼 수 있다.

산청은 감과 곶감의 고장이다. 생초면 노은리의 솔무리농원(010-7318-1618)은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대봉감을 택배로 보내준다. 가격은 15㎏ 한 상자에 택배비를 포함해 4만원으로 시중가격보다 20∼30% 저렴하다. 대봉감은 그냥 먹어도 좋지만 아파트 베란다 등에서 홍시로 익혀 먹어도 좋다. 홍시를 은박지에 싸서 냉동보관하면 이듬해 여름에 아이스홍시로 먹을 수 있다. 남사 예담촌에는 사양정사(055-972-7107)를 비롯해 민박이 가능한 고가옥이 몇 곳 있다. 마당이 넓은 사양정사의 숙박료는 1인 기준 1만원으로 5개의 방이 있다. 비록 고가옥이지만 화장실 등은 수세식으로 개조해 하룻밤 묵기에 불편함이 없다.

산청 읍내에서는 킹모텔(055-973-7645)이 묵을 만하다. 이밖에도 중산리계곡과 대원사계곡 등에는 전망 좋은 펜션이 수두룩하다(산청군 홈페이지 tour.sancheong.ne.kr).

박강섭 관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