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33 ( 제주도. 광해군의 귀양생활. 위리안치. )|

donkyhote 2012. 4. 5. 18:42

제주도(濟州島)

옛부터 유배문화라 불리울 만한 독특한 제주도 문화.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정치인, 지식인, 문인들 유배지.

이들의 유배생활은 당사자에게 절망적인 고통이었지만
제주 주민들에게는 학문과 문화기틀을 마련할 기회였다.
유배인들의 영향을 받아 제주도민은 학문과 예술의 발전

물론 사회불의에 맞서 싸우는 항쟁정신으로도 이어졌는데,
1800년대 임술년 농민항쟁, 방성칠의 난, 1901년 이재수 난,
4.3 항쟁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유배문화 영향을 받았던 사건.


1949년 봄까지, 제주도 유격대는 정부의 골칫거리

반란을 종식시키려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결정했다.

유재홍 대령이 지휘하는 특전사를 제주도로 파견한 것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회복을 과시하기 위해

이승만이 방문했고 5월 10일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날.

유권자 96%가 선거에 참여하였지만, 투표자 수는 적었다.

제주도 두 개 선거구 중 을 선거구에서 기표한 자는 5,766명

선거인 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도 폭동으로 인한 섬 인구 감소,

투옥된 게릴라 용의자 및 공산주의 동조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

4.3 비극은 제주도민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4.3 비극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한반도에 남한정부가 성립되는 과정에 있어서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농민항쟁 진원지.

제주도민은 자신들이 직접 제주도를 만들어 가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과 우익은 물리력을 사용해 진압하려 했던 것.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빨갱이 누명만 벗어났으면.,"

제주도 4.3 항쟁은 여순 반란사건을 불러 일으켰고

여순 반란사건은 지리산까지 그 후유증이 확산된다.

1950년대 전후 지리산 '반란의 역사 진원지'는 제주도.

....................................................

....................................................

제주도를 비롯 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下楸子島)·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마라도(馬羅島)

8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제주도
육지와 고립된 섬이었으나 국민소득의 증대와 더불어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며 전국 제일의 관광지로 발전.

목포와 약 140km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남한 면적의 1.8%
2개시 2개군 7개읍 5개면이 있고 도청소재지는 제주시 연동.

면적 553,864(2003), 인구밀도 299.7명/㎢(2003).


[연혁]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 후에는 신라와 관계를 맺었다.
탐라국이 육지에 예속된 시기는 고려 중엽 1105년(숙종 10)
1271년(원종 12)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도에서 몽골과 항쟁

1273년 패한 후 제주도는 원나라 직할지 목마장(牧馬場)
원의 직할지였던 까닭에 몽골의 문화적인 영향이 컸으며,
대규모 목마 사육으로 환경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겨놓았다.

그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도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완전히 고려에 회복.

이조시대 1416년(태종 16) 한라산 북쪽에 제주목(濟州牧)을 두고,
남쪽의 동부에는 정의현(旌義縣), 서부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
제주도는 행정구역을 전라도에 소속시켜 이조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64년 정의현과 대정현을 군으로 승격했으며,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23부제(府制)를 실시로
1895년 제주부가 정의군·대정군을 관할 했다.

1896년 13도제로 전라남도 제주군·정의군·대정군
1914년 정의군 대정군 완도군 추자면이 제주군에 병합

1915년에 도제(島制)를 실시하여 제주도라 했으며,
1946년 전남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승격
1948년 제주 4·3사태 등 현대사의 아픔을 겪게된다.


[인구·도시]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민들은 일본으로 많이 진출하여
8·15해방 직전까지 제주도의 인구는 20만 명 수준.

태평양 전쟁후 일본으로 건너간 도민들이 귀환하여
1944년 22만 1,366명, 1946년 26만 6,149명에 이르나,
1948년 4·3 항쟁 사태로 상당한 인구 손실이 있었다.

6·25전쟁 때는 피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모슬포에 육군제일훈련소가 들어섬에 따라
인구가 늘어 1955년 28만 8,806명을 기록
곧 해방 직후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제주도는 여자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1995년 인구의 남녀비율은 98:100인데,
남자가 외지로 많이 전출하기 때문이다.


도시


육상 자원이 빈약하여 취락은 해안 포구 중심으로 발달
물이 귀해 용천이 솟아나는 해안이 취락입지에 유리하다.
고려시대 전란을 피해 유입된 인구가 늘어 농경지가 확장

고려말에서 이조 초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지대의 많은 취락들이 산간지대로 이전.

오늘날의 표선면 성읍리가 대표적인 취락으로
성산읍 고성리에 있던 정의현이 이곳으로 이전.
새 성벽이 쌓임으로써 형성된 중산간지대 마을.

물이 귀해 빗물, 즉 봉천수(奉天水)가 식수로 이용
1920년대 해안 일주도로 건설로 취락 분포에 큰 변화
일주도로가 경제활동의 대동맥으로서 중요도가 높아져

중산간지대 취락들은 급격히 쇠퇴하는 한편
일주도로에 면한 해안지대 취락들은 급성장.
애월·한림·모슬포·서귀포·남원·성산 등

1977년에 제주-부산 간 카페리가 취항 후
쾌속화·대형화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제주와 목포·부산·완도·진도 항로
서귀포와 부산을 잇는 정기항로 개설.

제주-목포 항로는 여객수송이 가장 많고,
제주-완도 항로는 항로의 거리가 가장 짧다.

항공교통은 제주국제공항을 중심으로
국내노선 서울·부산·대구·광주·진주·
여수·목포·울산·포항·군산 간의 10개와
국제노선 오사카[大阪]·도쿄[東京]·나고야[名古屋]·
후쿠오카[福岡]·센다이[仙台]·괌 간의 6개가 운항된다.


한라산국립공원과 그밖에 민속 관광자원이 매우 풍부하고,
숙박·교통 등의 관광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국제 관광지역.

도내의 수많은 관광지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
천지연·천제연·정방 등의 폭포, 김녕사굴·협재굴·쌍룡굴

성산일출봉·산방산·산굼부리 등의 기생화산과 용두암·외돌괴·
안덕계곡·비자림 같은 경승지, 삼성혈·항파두리항몽유적지 등
사적지와 제주도 민속 자연사박물관·성읍민속마을이 인기 높다.

관광객은 3~5, 8~11월에 많으나 연중 비교적 고르게 분포한다.
1994년 현재 관광객은 369만 2,548명이며, 8,894억 원 관광수입
외국인 관광객은 22만 2,442명으로 그중 60% 이상이 일본인이다.

광해군의 귀양생활.



이조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폐허화된 도서 지역.
제주도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려웠던 유배지.
'1641년 유배생활 18년 만에 67세로 세상을 뜬 광해군.'

왕권정치를 확립하려다 권력 대신들에게 밀려 폐위된 왕.
폐위된 후 18년 간 왕위를 되찾으려는 온갖 노력도 수포.
이조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운명한 비운의 왕.

세자 질은 강화 유배지 집담 밑에 구멍을 뚫고 탈출 시도.
세자 비는 울타리 위에 올라가 망보다가 추락 후 자살한다.
남편이 탈출하다가 붙잡히자 더 살아갈 희망이 없었기 때문

광해군은 유배생활 1년 반 뒤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홧병으로 운명했다.
광해군 일가 중 무사했던 사람은 박씨 가문으로 시집간 옹주 뿐.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

이 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광해군에게 아들을 잃고 서궁(덕수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반정 성공 후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인조대비는 광해군에게 성은을 받은 궁녀들을 직접 친국.
김개시(개똥이)는 사지를 찢는 형벌을 가했다고 전해온다.

사형(死刑)·궁형(宮刑)·월형(形: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의형(形:코를 베어내는 형벌)·경형(얼굴 팔뚝 등에 문신)
이 중 하나인 궁형은 사형에 버금 가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시켜
자손의 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벌이다.

'찢어 죽일 년.'은 그 궁형 형벌에서 유래.'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과 광해군 파 관리들.
결사적으로 반정세력의 광해군 살해 기도를 막는다.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죽음의 위기

인조는 삼전도 수모를 겪은 후에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
광해군 복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저절로 죽게 하려한듯.

광해군은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태도.
심부름 나인이 '영감'이라 부르며 멸시해도 굴욕을 참아낸다.

광해군은 초연하고 관조적인 태도로 18년 귀양살이를 일관
그 기나 긴 세월 동안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
그러나, 애석하게도 1641년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광해군.


위리안치



19세기 이조시대 정치범은 '위리안치’유배지 형벌.
'위리안치'란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집안의 유배생활.
1614년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은 제주도 유배.

유배생활의 실상을 알려주는
정온(鄭蘊·1569~1641)의 기록


왕족이나 고위관료는 외인 출입금지 거주지 제한 유배형
위리안치 죄인은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섬에서 유배생활.
죽음을 가까스로 면한 정치범들이 받았던 가장 무거운 형벌.

제주도에서도 바닷가와 가깝고 지형이 낮은 대정현 동문 안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 기운이 극심한 곳.
피와 살로 된 몸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던 듯.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리고 사나운 바람과 안개 등
습기가 많아 옷, 재물, 곡식이 여름철만 지나면 썩어 무용지물
집이 낮아 바로 서기 어렵고 방도 좁아 무릎 추스르기 버거웠다.

온돌 연기와 그을음으로 의관이 더렵혀져 기거하기 힘든 환경.
집 동북쪽 모퉁이에 '곡식 저장소' 목두(木豆)와 변소를 설치.
가시울타리 남쪽 문은 출입구이고 서쪽 문은 음식 배식구멍.

'가시울타리는 4~5길 높이이고 둘레가 무려 50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오빠는 1776년 9월 흑산도로 유배
가시울타리 높이가 3길이며 4겹의 가시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가시울타리 높이 5~6m, 둘레가 12~13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가시가 처마까지 닿아 햇빛이 들지 않아 비록 백주대낮이라도
황혼 같았으며 하늘을 쳐다보면 우물 속에 앉아 있는 듯 했다.”

가시울타리 남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바깥에는 사령들이 거처하는 경비소가 사방에 설치돼
토착 원주민들이 이곳을 산무덤이라 부를 정도였다는 기록.

요즘 교도소처럼 편지를 보내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위리안치 10년 만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던 동계.
1641년 73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제주 5현으로 칭송받는다.

제주도는 삼별초를 섬멸하고 1세기 동안 원나라 직속령.
원나라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한 신하 170 명 유배가 최초.
그후 이조의 본격적인 유배지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 이후.

연산군은 강화도에서 위리안치 2달만에 숨을 걷우웠다.

31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도 견디기 힘들었던.,위리안치.
제주도는 5년 이상 유배형 또는 종신형 '유형 제 1 번지'

종신형을 선고 받은 유배자들 숫자가 압도적.

광해군, 김정희를 비롯 200 여명이 거쳐간 곳.
한번 들어가면, 거의 살아 나올 수 없었던 유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