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35 ( 서불의 항로. 실크로드. 고대 중국 왕조.)

donkyhote 2012. 4. 5. 18:46

 

서불의 항로.




진시황이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던 서불.
그당시 발자취만 남긴 채 어디로인가 사라져버린 서불.
과연, 서불은 어디 어디를 거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불로초를 찾아오면 나라의 절반을 떼어준다는 진시황의 약속.
그당시 서해 항로의 성공율은 반반이라 목숨을 건 무역선 항해.
목숨 건 항해라 무역선 상인들 이익도 수십배에 달했다고 한다.

진시황이 서불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약속도 무리는 아닌 듯.
서불은 불로초를 찾겠다며.. 제주도 한라산으로 가서 신나게 유람하고
서귀포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처(徐市過處)’이라는 글을 새겨 놓는다.

서불이 그곳에 다녀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
서불은 항해한 곳마다 흔적을 남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불은 그당시 이미 서해항로를 꿰뚫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시황이 살아남기 위해 서불에게 걸었던 최후의 승부수.
서불은 서해 항해 이후 귀국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불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자신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서불은 왜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패망한 진나라 유민들도 한반도를 거쳐 왜로 유입.
우선, 서불이 한반도에서 거쳐간 항로를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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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서불은 우리나라까지 다녀간 것일까?'
참 궁금하다. 그러한 전설에 대해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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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불의 발자취...................
서불의 설화는 서귀포로 끝나지 않는다.
안덕면 대평리에도 그 족적이 남아 있다.
옛부터 중국과의 인연이 깊은 포구를 당케.
대평리는 제주에 있지만 제주답지 않은 고을.

제주시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창천 삼거리에서 오른쪽(대정 방향).
1㎞를 달려 안덕계곡 주차장그 왼쪽 방면에 대평리를 알리는 푯말
그 뒷산을 굽이굽이 흘러내려가 계곡을 낀 도로를 벗삼으면 '산방산'.
그곳이 오른쪽 차창에 스쳐간 후 바다가 보이는 산 아래에 작은 마을.

가파도 마라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병풍 절벽 동쪽 언덕 위에 하얀 집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길과 어촌이 길게 이어진 마을 풍경의 '당캐포구'

이곳을 통해 중국의 고대국가 당나라에 말과 소를 보냈단다.
정치망 어업이 성행했고, 큰 소나무가 있어 '마쓰미나토(松港)'.

대평리는 1948. 4·3 항쟁 사건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4·3 관련 젊은이들을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대피한 탓.
일본 무역상이던 이 마을 정태언 김규언씨 등의 숨은 공로.

당캐 서쪽에 조약돌 해변가! 골짜기가 막힌 곳에 있어..< 마궁굴>.
계곡 따라 500m 가량 산책로 그 끝 지점에 절벽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서불이 지나가다가 ‘서불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을 썼다는 곳.

기원전 230년에 썼다는 그 글씨는 현재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주민들은 ‘선비기돌’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절벽 만 설화를 말한다.
남제주군 대평리 당캐 ·병풍 절벽은 온갖 암석 가득한 바위 박물관.

진시황이 죽자, 서불은 귀국하면 죽을까 봐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서불은 진나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항로를 알고 있었던 듯.
서불의 무덤은 와까야마 섬에 있고 그 족적은 구례읍 서시천에도 있다.
기원전 230년 서불이 건넌 개울에 서불(徐市)을 '서시'로 잘못 읽어 서시천.

서시천은 지리산 골짜기 산동면 위안리에서 발원.
구례읍 남북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섬진강과 합류.
산동면 위안리는 중국 산동반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서시가 동남동녀 2백명을 거느리고 지나갔다는 서시천.
구례 지역의 논과 들은 대부분 서시천 유역에 몰려 있다.
섬진강 본 물줄기와 만나 사실상 구례군의 동맥역할을 한다.

넓은 모래밭이 있어 여름 피서객들의 모래찜질 장소였으나
지금은 수중보가 설치되어 낚시터로 각광받고 있는 서시천.
서시천은 서불이 다녀갔기에 붙여진 지명이 사실인 듯 싶다.

여수시 연도와 통영시 소매물도에도 서불 일행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서불 일행이 제주도, 여수, 구례읍 서시천, 일본 와까야마에 남긴 흔적.
그것은 서불 일행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던 항로가 아닐까?

진나라 - 강화도 - 제주도 - 여수 - 구례- 지리산 -섬진강 - 여수 -일본.

17세기 제주에 표류한 화란인 하멜이 이조 억류 후 일본행 탈출 항로.
<기원전 230년 서불과 17 세기 하멜>의 항로가 우연하게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불은 중국, 우리나라, 일본을 오갔던 거상이 아니었을까?

‘지혜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 - 공자.

서불은 불로초를 구했다고 해도 진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을 듯.
진나라에서 한반도를 잇는 뱃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
그 거친 서해항로를 거꾸로 거슬러 돌아가기란 매우 위험한 일.

설령 불로초를 구한다 해도 진시황이 서불을 살려줄지는 의문.
불로초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비의 영약인지도 알 수 없는 일.
서불은 진시황의 부하 그 누구라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탈출.

그당시 항해술로 진나라에서 일본까지 가기란 위험한 일.
서불은 스스로 살길을 열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한 듯 싶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면 서불은 어차피 귀국해도 죽을 목숨.

일본행 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것 아닐까?
아무튼 그 옛날 서해항로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서불이 일본항로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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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불로초의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했던, 진시황
심마니능선의 산삼 한뿌리가 중국 대륙만큼 소중했을 듯.
진시황에겐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꿈과 희망이었던 불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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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삼신산 불노초를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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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 년전 지리산 산삼은 진나라에 이미 알려진 약재.
사마천 사기에 진나라 옛 조상은 황해에서 이동한 민족.
지구 온난화로 저지대가 해수면에 잠기자 민족의 대이동.

진시황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했다는 역사 기록.

 

 

 

 

실크 로드.



'관리 3년이면 은자 천량을 벌 수 있다’
청나라 봉건주의 부패한 시절에 정경유착.
실크로드 상권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전 세계 상권을 누비던 아라비아 상인조차
비단장사 왕서방에게 눌렸다는 중국인 상술.
인재중심 경영, 신용제일 경영, 위기이용 경영.

'실크로드 상권장악 = 전세계 상권장악.'

왜구는 동아시아 육해 실크로드를 오간 상인.
무장 군대까지 거느린 대규모 거상들의 집단
한반도는 실크로드 동아시아 끝의 중요한 길목.

'실크 로드는 한반도 고대사와 밀접한 관계.'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해상무역로를 장악
삼국시대에는 가락국 거쳐 통일신라가 장악.
고려는 코레아로 불릴 만큼 동아시아 해상왕국.

'고려 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回回) 아비.'

고려에 정착한 대식국(아라비아 상인) 이슬람 교도.
고려가 원나라 속국일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대거 정착.
쌍화점은 1274년 충렬왕때 회회 아비가 고려에 차린 기방

당시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고려 개성상권을 장악.
당나라 송나라에서는 아라비아를 대식국이라 불렀다.
고려에서는 아라비아를 대식국이라 부른 기록이 있다.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장악.
고대부터 집단을 형성했던 아라비아 상인들.
고대사회 동아시아 해상무역 바닷길까지 장악

가야국 김수로왕 역시 아라비아 거상인 듯.
한반도에 최초로 정착했던 아라비아 왕족인듯.
김수로왕 골격에 관한 기록이 그 사실을 뒷받침.

한반도에 불교를 최초 유입한 허황후 일행.
허황후는 아유다국 공주이자 김수로왕 부인.
허황후는 마야계곡 전설의 여주인공 인도공주.

650년 이후 아라비아는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
중국은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라 하여 대식
원나라 이후 대식이란 말 대신 회회(回回 Hui-Hui)

13세기 중엽 이후 회회는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종족
고려와 밀접한 회회 실체는 이슬람화한 위구르계 종족
대식국 유민들이 고려에 들어온 첫기록은 11세기 전기

이슬람교는 7세기 아랍 예언자 마호메트가 창시.
이슬람 사료에 의하면 9세기 중엽부터 신라와 접촉
11세기 고려에 이주한 100명이 넘는 대식국 상인집단

'고려 현종 15년(1024) 대식국에 관한 역사기록'

"9월에 대식국의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다음해 9월에도 "대식만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정종 6년(1040) "11월 병인(丙寅년) 대식국 객상 보나합이
와서 수은·용치·점성향·몰약·소목 등을 바쳤다"는 기록.

대식국은 고려와 규모가 큰 무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식인들의 활동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다가
원나라가 일어난후 13세기 중엽부터 본격 고려에 진출

회회인들은 고려에 오는 몽골 공주 수행원으로 오거나,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고려 왕자 및 지배층들과 친분관계
그후 그들과 함께 고려에 와서 귀화하여 정착하기도 했다.

충렬왕비인 제국공주 시종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한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공민왕과 친분을 맺고 고려에 귀화한 설손의 아들 설장수와 설미수,

손자 설순은 고려말~조선초에 장수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고려말 회회인은 개경에 집단거주하며 원과 고려와 무역업
이조 초기까지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고려왕실과 밀착한 이들이 개성상인 뿌리 아닐까?'

그들은 고유의 종교적 문화적 습속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조 조정 하례의식에 그나라 대표로 초대받기도 했다.
1427년(세종 9) 이질문화 금지 칙령이 내린후 사라진다.

이슬람 교리는 엄격하지만 대식국의 성윤리는 문란.
아랍인은 골격이 굵고 예나 지금이나 성욕이 강하다.
하여, 변강쇠전은 대식국 상인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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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실크로드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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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로드(Silk Route)는 비단길이라고도 한다.
고대사회 비단 무역을 했던 육로와 바닷길 총칭.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준 길.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처음 사용한 말.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에서 시작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까지 이어진 무역로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까지 이르는 구간
장안을 기점으로 하면,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길
사막 북쪽(톈산 산맥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길.
남로는 파미르 고원 쿠시쿠르간에서 서쪽 쿠샨 왕국
여기부터 뱃길로 천축(인도의 옛 이름)까지 가는 길.

인더스강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는 해상무역로

북로는 강거 서쪽 이란을 지나 지중해와 로마로 가는 길.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개 국 통과.
실크로드를 보다 알기쉽고 간명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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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에서 - 둔황 - 타클라마칸 사막 - 사마르칸트
여기서 흑해 쪽 이스탄불로 이어진 유럽과의 통상로
지중해 연언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어진 아랍지역 통상로

아랍지역 통상로는 아프리카와도 연결점.
알고 보면, 세계를 하나로 잇는 실크로드.
지도상에서 완만한 커브길이 있는 직선도로.

'중앙아시아 서역 실크로드는...꿈의 길.'

꿈과 동경의 세계.. 타크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주변 고비사막의 뜨거움과 사막의 황량한 바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황갈색 비단과 같다고한다.

하늘에 우뚝 솟은 천산산맥 기슭 따라 동서 이동
옥, 아라비야 향료, 로마의 유리그릇, 카라반(隊商)
낙타 등에 타고 동서양을 오가던 실크로드 상인집단.

신강성, 감숙성 중국의 실크로드를 따라
로마의 궁정까지 운반되었기에..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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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
한 무제는 대월지 오손과 연합, 중국 북방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 교통로 확보하려 장건을 중앙 아시아에 2차례 파견.

전한 때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하여 서역과 관계 개선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 시리아 및 페르시아만까지 왕래.
실크로드 서쪽 끝을 연장시키는데 크게 공헌.

실크로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당대(618~907).

당시 중국 북방은 돌궐 세력이 중원을 위협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호가 말라 실크로드 남도가 끊겼고,
북도는 둔황에서 하미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

태종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해 동서무역을 활발히 전개
이무렵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 위구르족과 서쪽 이슬람 상인이 활발.

송대 이후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 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 시리아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
이와 함께 육로 실크로드는 점차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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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 왕조는 여러 나라와 사절 교환
민간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사신과 민간인의 왕래는 문물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 법승들 경전을 구하러 인도 여행.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현장(玄)의 역경 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의 유교 도교 불교는 당대의 3대 사상.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
등등의 종교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전해졌다.

당대 장안에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거주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폭넓게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에 전파.

실크로드는 상업, 동서 문화의 교류하는 교역로.
실크로드는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잇는 포장도로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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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의한 세계 각국 유민들.
지리산 일대를 비롯 강화도 제주도.
대부분 실크 로드를 오가던 거상 집단.

실크(비단)는 명주실로 짠 천연 섬유.
우리나라 실크 원조는 은나라 기자(箕子)
누에 치고 직조술을 가르친 한서(漢書) 기록.

'그후 삼한에 보급된 양잠 견직 기술.'

한반도는 실크(비단) 생산국.
뽕나무 + 누에고치 = 실크 산업.
옛부터 섬유산업이 발전한 한반도.

금 세공, 철기문화도 세계 첨단.
금관, 거북선, 세계 최초 금속활자

여수는 기원 전부터 국제 무역항.
광양은 옛부터 최첨단 제철 문화
육해 실크 로드를 잇는 화개장터.

실크로드 상인 거주지 지리산 일대.
대를 이은 소금장수 상인들 삶의 터전.
기원 전부터 왕래한 거상, 진나라 서불.

불로초로 진시왕과 진나라 절반을 흥정.
옛부터 불로초 산삼은 부르는 것이 가격.
진시황이 죽자 왜로 도망쳐 정착한 서불.

중국 왜는 당나라 실크로드 상인집단.
일본 왜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상인군단.
왜는 고대국가와 맞설 군사력도 갖춘 집단.

왜는 일본이 무역왕국이 된 원동력.

신라는 장보고가 있어 동아시아 해상왕국.
신라는 지리산 일대에 무수한 사찰을 건립.
그 경제적 원동력은 국제 해상무역이 수입원.

나당 연합군과 백제 일본 연합국 전쟁.
그 내막을 파고들면 국제무역 경제전쟁.
결국,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

당나라 수도는 전세계 민족 전시장.
신라의 당 유학파는 스님들과 최치원.
이조 말 청나라 유학파로는 추사 김정희.

세계 첨단문명을 한반도에 들여온 불교.
지리산 사찰 고승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
경전을 국내에 들여오며 세계 첨단 문물을 유입.

따라서, 지리산 일대는 선비의 고장.
역사적으로 이인을 많이 배출하게 된듯.
해외 선진문명이 일찌기 유입된 남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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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추역활을 했던 지리산의 사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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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는 전세계 문명이 한반도로 들어온 통로.
대부분 중국 서적을 통해 유입된 고대사회 첨단문명.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싹튼 원동력은 실크로드.

'고대사회 한문은 당시 동아시아 공통어.'

첨단문명을 받아들이려면 한문 공부는 필수.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면 한문은 필수 전공과목.
하여, 이조시대엔 어릴때부터 서당에서 한문공부

사실,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 뒤섞인 민족.
이민족에게 정권을 빼앗긴 역사도 수두룩한 중국.
중국 역사상 유명인물도 한족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

5,6세기 중국은 선비, 흉노, 저, 갈, 강종 5개 이민족
5호 16국의 혼란기를 거쳐 이민족과 한족은 연합 체제
이민족마다 독특한 정치, 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중국은 이민족간 혼인이 성행하여 광범한 혼혈민족.
차츰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질 정도.

한족은 양자강 유역의 동진 정권이 명맥을 유지
오랜 분열 끝에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정권.
한화정책을 강력 추진하자 북방 6진 군사들이 반란.

뒷날 수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성을 지키려 거병.
이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제국을 향한 소용돌이

6진 중 하나인 무천진 군벌 세력이 수나라를 건국
양견(楊堅, 수문제)과 당나라를 세운 이연(당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李浩) 이씨 집안
원래 대야씨(大野氏) 성을 가진 호족집단
중국이 자랑하는 수당제국 황제들은 오랑캐.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를 정복할때 황제가 직접 전투 지휘
중국 관념에서 볼때 대단히 드문 유목민 호족의 관습

당태종은 군주 칭호인 천자보다 칸 호칭을 선호했다.
유목민 군주 칸(可汗)에 天을 덧붙여 천가한(天可汗)

당 고종이 아버지 후궁인 측천무후를 황후로 삼은 일.
당 현종이 며느리를 귀비로 삼은 일은 유목민 호족 관습.
중국적인 관습이 지배하는 한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불륜.

'북방 유목민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혼례풍습.'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
여권을 존중하는 유목민 전통이 당나라에 끼친 영향
당나라는 전통 중국이라기보다 국제적인 제국의 연합.

따라서,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비 중국적 국가.

그 이유는 유목민의 개방적인 풍습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과 동아시아 각국 인종 전시장.
각각 자기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었다.

역사상 우리나라는 패망 중국 왕조들의 피난처.

우리 민족 중국왕조 성씨들이 그 사실을 뒷밭침한다.
특히, 한반도의 고대국가 삼한은 중국 역사의 축소판.
지리산 일대의 전통적인 풍습은 고대 중국왕조들과 일치.

종교도 페르시아 마니교, 유럽의 네로토리우스교 등
유목민의 뿌리깊은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적인 현상.
신라의 최치원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파 선비 및 승려들.

'한반도에 첨단문명을 들여왔던 선구자들.'

현재 한반도는 실크로드 선상에서 중요한 위치.
역사상 전세계 강대국들이 경쟁해온 전초기지.
해상과 육로를 잇는 정치 경제 전략적인 요충지.

 

 

 

 

고대 중국왕조

 



하나라는 중국 최고의 고대왕조(BC 2100~ BC 1600)
은나라는 중국 그 다음 고대왕조(BC 1600~BC 1046)
주나라는 BC 1066 ~ BC 771, 동주 BC 770 ~ BC 256.

하(夏) 은 주(周) 3대 왕조가 이어 중국을 지배했다는 역사.
하왕조는 고전에 기록되어 있을 뿐, 현재 발굴된 유물이 없다.
20 세기에 은나라 수도 '은허'의 발굴로 실존 왕조 였음이 판명.

은나라 전기는 기원전인 BC 1600 ~ BC 1300 년.
도읍을 은으로 바꾼 후기는 BC 1300 ~ BC 1046 년

전설 속 하왕조는 중국 전역을 휩쓴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주로 나눠 통치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
그후 17대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걸왕은 웅장한 궁전을 짓고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다.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고 장야궁을 짓고 남녀 합환의 유흥.
사기(史記)에 의하면,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퇴하였다.

걸왕은 부도덕해 도덕군자 은나라 탕왕을 하대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
결국,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했다.

당시 1년이 360일에 12개월, 1개월이 30일인, 달력이 있었다.
달력은 양력 음력을 모두 사용, 절기를 맞출땐 음력에다 윤달.

은나라 말기 주왕은 왕비 달기(己)에 빠져 국정을 그르쳤다.
하여, 은나라 패망후 주나라로 이어진 중국 고대국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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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기원전 770 ~403년) & 전국시대(기원전 403 ~ 기원전 221년)
진, 제, 위, 조, 초, 연, 송, 월, 오, 노, 한,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6 년)
흉노, 항우와 유방, 한(기원전 202~서기 220년), 5호16국 시대(316~439 년),
남북조 시대(서기 439~589), 수(581~618), 당 618~907), 오대십국(907~960)
송(960~1279), 원(1279~1368), 명(1368~1644) , 청(1644~1911), 중국(1912~),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역사와 맛물려 돌아간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공자.

공자는 주왕을 섬겼지만 그 폭정 탓에 물러난다.
공자가 은나라에서 물러난 결정적 원인은 달기 탓
훗날, 공자의 사상은 이조의 유교사상으로 정착한다.
하여, 달기는 한반도의 역사에 간접적 영향을 끼친 인물.

달기는 중국 역사상 양귀비와 쌍벽을 이루는 미인
음란하고 잔인한 독부로 주왕을 사로잡은 왕비이다.
주왕을 사로잡고 은나라를 망하게 한 달기는 누구일까?

.............................달기.......................................
여러 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화장법.
즉 오늘날 연지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던 전설속의 여인.

‘은행알과 같은 눈, 복숭아 같은 뺨, 눈꽃 같은 피부.
도화장(桃花)이란 연지를 바르고 주왕을 미혹시켰다.

“달기야말로 진짜 여자.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겪었지만
달기에 비하면 목석에 불과하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여자.”

오랑캐 나라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
주왕은 달기에 대해 찬탄하며 달기와 <주지육림>에 파묻혔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 덩어리를 걸어 숲을 이루게 한 후
수많은 젊은 남녀로 하여금 벌거벗고 서로 희롱하게 하였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한데에서 비롯된, <주지육림>

주왕은 숯불 위에 구리봉을 걸쳐 놓고 죄인에게 걷게 했단다.
기름 바른 구리봉에서 미끄러져 타 죽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이는 잘 웃지 않는 왕비 달기를 웃기기 위한 잔인무도한 놀이였다.

그 이글거리는 숯불 위 구리봉 위로 맨발로 걸어가는 죄수의 모습.
절박함속에서 발버둥치게 하는 형벌이라는 뜻의 포락지형(烙之刑)
달기는 높은 누각에서 그 죄수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웃었다고 한다.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천하절색이었지만 착하지 않았던 듯.

5년간 노나라 정치가로 있다가 스스로 물러났던 공자.
그 제자들이 저술한 논어에 <달기에 관한 일화>도 등장.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사직을 권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은 마땅히 사직하셔야 하겠습니다.일찍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도 처음에는 총명하고 뛰어난 왕이었으나 달기(己)에게 빠져 포락지형이라는 형벌을 즐기다가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에게 토벌되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지금 노나라의 임금과 권신이 모두 여색에 빠져있으니 노나라의 사직도 은나라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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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한반도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공자의 사상."
삼성 그룹 창업자 故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술회한 말이다.
<이조가 고수한 유교사상>의 근본 뿌리는 공자의 논어이다.

한반도는 지리적 여건상 역사적으로 홍수가 빈번했다.
중국이 대홍수가 빈번했던 시기는 우씨 왕조의 하나라.
고조선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대홍수를 겪었던 기록

하나라와 고조선은 홍수를 잘 다스린 황해 저지대 민족.
한반도에 우씨 성은 고대중국 하나라 유민으로 추정된다.
즉, 서해 저지대의 하나라 유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해온듯.

하나라의 하씨 은나라의 은씨 주나라의 주씨 진나라의 진씨
중국 최초 고대국가 은나라 왕실인 우씨 역시 한반도의 성씨.
우, 하, 은, 주는 중국 고대국가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성씨.

'우리나라 단기 역사는 은나라와도 일치.'

달기의 연지 역시 우리나라 여인들의 전통적인 화장법.
따라서 4천년 전 은나라의 조상들 역시 황해 저지대 민족.
황해가 물에 잠긴 후에는 섬들을 잇는 항로로 오고갔을 듯.

동이족은 고대 중국에서 상고시대를 지배한 종족.


그 단서는 일만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상나라에 있다.
기원전 17세기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의 대부분이 동이족
중국의 학자들은 요임금, 순임금이 동이족이라 증언한다.

요순이라면 공자가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제왕.


유교사상은 동이족에서 나왔고 산해경이 동이족의 경전.
산해경은 고대신화를 기록한 신선 도교사상의 원전이다.
초나라 굴원이 쓴 초사는 산해경의 집대성으로 알려졌다.

초나라에서 노자는 도덕경을 썼고
초나라는 상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초나라에는 태양신과 조상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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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마지막 왕은 악명높은 폭군 걸(桀 : BC1808~1766)

정사는 돌보지 않고 화려한 누각과 궁전에서 매일 술과 여자.
이러한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성탕(成湯) 제후.
성탕은 걸왕을 내쫓고 창건한 상(商)나라가 곧 은(殷)나라이다.

성탕이 출생한 가계의 내력에 관한 설화.

고대 삼황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제곡고신의 여러 부인 중에 간적(簡狄)
어느 날 목욕하다가 하늘의 현조(검정새)가 떨어뜨린 알 하나를 주웠다.

간적이 이를 받아먹고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설이다.
훗날 순왕과 하나라 우왕 때 상지방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리고 그의 후손 성탕이 하나라 말에 상나라를 세웠다.

앞서 언급한 검정새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말하며,
은나라 역시 그 뿌리가 동이족에 있음을 뒷받침하는 설화.

특히 알에서 태어난 설의 후손인 성탕, 즉 탕왕은 성씨를 자子
자는 12간지 중에서 북방을 의미하고 북방은 검정색을 뜻하므로
현조와 동일한 의미이다. 은나라 뿌리에 대해 중국학자들이 한 말.

중국학자 양관 - “현조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의 조상신이다.”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중국학자 필장복 - “상나라 사람은 동북아 민족과 밀접한 관계.”

은나라뿐 아니라 그 이전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 지류.
은나라는 거북의 등껍질과 동물의 뼈 등에 새긴 갑골문자.
은나라 역사를 서술한 단군세기 등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특히 갑골문은 주변의 다른 나라에 관한 표기.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등등.

이 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키는 명칭인 듯 하다.
중국역사 지도의 고조선은 산동성에 인방으로 표기

갑골문에는 은나라가 귀방을 정벌했다고 기록이 있다.
이는 후한서 및 단군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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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백제와 고대 일본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
백제는 4C 근초고왕 ~ 7C까지 300년간 왜 열도를 통치,
왜 열도에 정착한 백제 후손들이 본국에서 문화를 수입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인」에 관한 역사.

진사 왕과 아신 왕(침류왕 태자) 숙질간 권력투쟁
당시 왜 열도의 아신 왕 추종세력이 진사 왕을 제거.
신묘년 왜는 그곳에 정착한 한민족이 창건한 통합국가.

일본 천황가문은 物部系, 大伴系로 크게 나눠지고
物部系의 가계는 근초고 왕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묘년에 건너온 武內宿 니라는 백제계 집안이 천무의 선조.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백제 역사에서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비류백제는 한반도 남부 및 왜까지 진출했던 해상왕국.
일찌기 일본에 고대 국가를 건설한 민족이 비류 백제인

일본에 세워진 고대왕조는 비류 백제의 망명정권이었다.
백제 = 백가제해(百家濟海) = 바다를 널리 지배했다는 뜻.
왜 뿐 아니라 중국 산동지방 양자강까지의 영토가 백제권.

고대 일본은 7C경까지 거의 전부가 한반도 이주민 문화.
일본이 중국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인 시기는 7C 후반이다.
일본서기가 편찬 된 8C 초에는 황국주의 사상표현이 많다.

일본의 도시 '나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국가란 뜻이다.
망명백제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일본에 세운 망명 정부.
나중에 백제의 왕족과 귀족이 일본의 실질적 황실 귀족.

또한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려 촌을 이룬 곳이 있어 지금도 일본 지명은 고려 촌.

일본은 백제 고구려 고조선 국토 수복 명분으로 전쟁 도발.
일본 천황은 성이 없지만 조상이 김해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천황이 스스로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부터 일본까지는

모두 한 민족인 <동이족> 계보이다.
한중일 삼국은 고대부터 해상무역 왕국,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을 놓고 각축전.

 

황해 저지대에서 민족 대이동 이후 세워진 중국의 진나라.
그 뿌리는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들을 통해 밝혀진 것 같다.

 

저지대 민족을 대홍수에서 구해낸 우씨 민족이 세운 하나라.
하. 은. 주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국가 중 은나라는 고조선 이웃.
중국 고대국가 은나라가 고구려라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있다.

훗날 중국 대륙을 점령했다면. 그 세력 규모가 대단했을 듯.
즉, 진나라의 조상은 황해지대와 서해지대에 살았다는 민족.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그당시 세계를 정복한 민족이기도 하다.

한반도 삼한(마한 변한 진한) 이전의 원주민과 동일한 민족.
한반도와 제주도가 저지대 육지로 이어졌을 당시의 원주민들.
하여, 제주도 낙동강 신, 구석기시대 유물이 비슷한 것 아닐까?

서해가 저지대일 때부터 한라산과 지리산은 유서 깊은 명산.
진시황이 그 역사를 알고있기에 삼천동자를 지리산에 보낸 듯.
진시황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삼천동자를 보낼 수가 있었을까?

서해와 황해를 잇는 육지 시절엔 말 타고 육로로 왕래했을 듯.
서해 저지대가 해수면 속에 잠긴 이후에는 항로로 왕래했을 듯.

'진시황이 보낸 삼천동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당시 항해술로 서해 바닷길을 확실하게 열지 못한듯 싶다.
그후 서불이 500명을 이끌고 다시 온 것을 보면 풍랑 탓인듯.
서불은 그당시 진나라에 거점을 둔 거상 신분으로도 추정된다.

진나라 한반도 왜 삼국은 해상무역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반야봉 산삼은 불로초로 알려질 만큼 값비싸고 귀한 약재였던 듯.
한반도 고대국가 중에서 어느 나라가 진나라와 해상무역을 했을까?

그당시 한반도에서 해상권을 장악한 고대국가는 마한왕조 뿐인듯.
마한은 기원 전부터 고조선과 대치해 한수 이남을 다스렸던 고대국가.
한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중국의 진나라 이전부터 해상교류했던, <마한>.

2500 년전 진나라를 오고 갈 정도라면 항해술이 상당히 발전한 나라.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까지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시대의 최대 강국.
마한은 달궁에서 패망 후 바다를 유랑하고 그 영역은 백제로 넘어간다.

그당시 신라는 진한을 점령후 변한 영역 일부도 장악했다.
이어 남은 변한영역은 김수로왕이 점령 후 가락국을 창건.
우리나라에서 삼한시대가 막을 내리고 삼국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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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우리나라와 밀접했던., 고대 중국.'

 

고대중국 왕조들의 패망원인 뒤에는 미녀가 있다.
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왕은 정사를 망친다.
고대 중국 왕조들의 흥망성쇄 사례들을 살펴보자.

진시황의 환관 조고는 충신들의 황제 배알을 막고
간신들만 출입시켜 황제를 정사에서 손 떼게 만든다
술과 여자만 탐닉하며 만수무강하기만 바랬던 진시황.

끝내 객사하고 진시황의 2세도 조고의 농간에 빠진다.
결국 진나라는 진시황의 2세에 초나라에게 망하고 만다

당나라 현종 역시 양귀비 미모에 빠져 나라를 망친다.
양귀비 사촌오빠 양국충은 당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
그러나, 양귀비를 사로잡은 안록산에게 권력을 뺏긴다.

현종을 아버지라 부른 안록산.
현종이 아들처럼 믿은 안록산.

양귀비를 어머니라 부른 안록산.
양귀비보다 나이가 많았던 안록산.
사실은 양귀비의 숨겨인 연인 안록산.

훗날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

얼마후 아들(안경서)에게 살해되고,
다시 안경서도 사사명에게 살해된다.
(안록산 난 + 사사명 난 = 안사 난)

당시 지배계급은 귀족으로 관리가 되는 경우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경우., 두 계층.
하지만, 두 계층은 치열한 암투를 계속하였다

하여, 환관에게 뇌물을 공여하는 부패정치 만연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환관왕조가 된다.
끝내, 주전충에게 패한 당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명나라의 패망원인은 정덕제와 만력제 탓.'

당시, 정덕제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에 빠져,
방중술에 열중하더니, 여성과의 환락에 몰두,
모든 정무를 환관인 유근 등 8명에게 맡겨졌다

그 다음 만력제는 열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

초창기에는 장거정 재상을 통하여 개혁을 추진,
일단 성공하였으나, 장거정이 죽자 갑자기 돌변
환관에 의한 부패정치를 부활하여 명나라는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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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왕조 운명을 좌우했던.. 4대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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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침어(물고기가 헤엄치기 조차 잊을 미모.)

춘추 전국시대 말기의 월나라 여인 서시
오나라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보복을 위해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친 미녀.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 잡혀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한다.


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기러기가 날개짓 조차 잊어 땅으로 떨어질 미모.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 흉노와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
선우와 정략 결혼을 시킨 중국4대 미모의 여인으로 유명.


초선(貂嬋) = 폐월(閉月)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릴 미모.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한나라 대신 왕윤의 양녀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의로운 목숨을 다한다.


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을 정도의 미모.
당대 미녀 양옥환은 당명황에게 간택되어 입궁
당명황이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찬탄하여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하였을 정도의 미모.

삼국지 연의에서 왕윤(王允)은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과 여포를 유혹해 둘이 싸워 몰락하게 만든다.

서시는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이 싸우던 때의 미녀.
구천은 패하여 항복하고 부차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한다.
구천은 미인계를 쓰느라 요조숙녀 서시를 부차에게 바친다.

요조숙녀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 '군자의 좋은 짝’이란 뜻.
부차는 서시에게 푹 빠진 사이에 구천은 부차를 패망시킨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고사숙어는 그렇게 해서 생긴 말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미인이자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영웅.
한나라 왕이 흉노족과 화친을 위해 보냈던 한나라 궁녀.
전쟁이 끊이질 않던 두 나라는 오십년간 화목하게 지낸다.

양귀비는 원래 당나라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의 아내였다.
그런데 현종이 양씨의 미모를 보고 혹하여 첩으로 삼은 것.
황제로 하여금 불륜을 저지르게 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여자.

우리나라 역사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
특히, 중국 4대 미녀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
지리산 일대는 역대 중국 패망왕조 유민들 정착지.

중국 주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단이 노나라를 창건
그후 노나라 패망 후손들이 나라 이름을 따서 노씨.
우리나라 노씨의 시조 노수(盧穗)는 중국 범양 사람

755년(신라 효성왕 14년) '안록산의 난'을 피해
9 형제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각각 본관
광산 노씨가 큰집이고, 교하, 풍천, 남원 노씨 등.

'중국 역대 고대 왕조들과 밀접한 한반도.'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으로 형성된 당벌.
당씨 성을 갖고 있는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 마천.
원나라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귀화해 정착한 산청.

삼한시대부터 지리산 일대에 뿌리내린 원주민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이조 구한말을 거쳐 오늘날.
지리산은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

아울러, 고대 중국 역사까지 그대로 품고 있는 곳.
우리나라 성씨를 보면 중국 왕조와도 밀접한 관계.
지금부터 그역사적인 사실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중국 랴오둥 산둥 해안은 원래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촌.
이정기 왕국 이후에 신라방과 신라촌이 형성됐던 곳이다.
당나라 각지에 흘러 들어갔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

심지어 중국 둔황 지역에 신라촌이 수수께끼처럼 있었다.
당나라가 소수민족을 분산시키는 이주 정책을 구사한 결과.
고구려의 반항적 유민은 티베트로 보내져 동남아로 흘러갔다.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그를 통해 잊혀진 고구려 후손들의 역사를 알아보자.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고, 민족의 후예는 곧 선조의 얼.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 패자로 군림한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동이족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왔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불세출의 영웅들
수백만 중국인 뼈를 고구려 산하에 묻었던 영웅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
고구려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다시는 고구려 같은 강국이 생기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900년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670년 4월, 보장왕 외손 안승,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 국통을 계승
대진국을 세우고 당군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도 다시금 당나라로 쫓겨가야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역만리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고구려 후손.
그들은 뿌리가 고구려일 뿐,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
당나라에서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고구려인도 많았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 심장부에 나라를 세워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당나라에서 모욕 당하는 고구려인들을 보았다.
그래서,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큰 꿈을 키웠다.

이정기는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
755년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하북 지역을 장악.
하여, 요동 평로절도부와 장안 당나라 정부는 분리.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한다.

동쪽에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해 나라를 세우자
이정기는 당나라를 정벌해 중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에 상륙.

당시 산동성 부근에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대군이 왔다는 소식
산동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정기 병력에 합류했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작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몇 만의 병력을 보유했지만
패망 고구려의 유민들의 애국심과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군대는 10만 당군을 격파하고 10개 주를 장악.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
총 15개 주 영토를 통치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 준비.
781년, 당나라의 대동맥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한다.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해 20만 대군으로 총진격
그러나, 안타깝게도 49세의 나이로 이정기는 갑작스런 죽음
이정기의 대군은.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인 병력은 퇴각한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 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
황제에 오르자 그의 사촌과 측근들이 당에 투항하였다.
이납은 결국 당나라 정복의 꿈이 꺽이고 41세로 단명.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등극.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한
하음전운원 150칸 창고의 200만 섬 군량미를 불질렀다.
이어, 낙양성을 기습 궁궐을 불사르며 당나라 후방을 교란

그러나, 말년에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자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 헌종은 제국 공격을 명령.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서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또 한번 가슴 아픈 동족상잔 비극이 벌어진 것.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
이정기를 통해 되살아나 당과 대적한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역사의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망한 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
청해진을 무대로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
장보고는 이정기가 못다한 꿈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다시 10년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 승려 원인이 장보고의 배를 타고
중국 산동 지방 고구려촌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모여 사는 고구려촌을 보고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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