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31 ( 곡성. 심청전. 심청의 바닷길. 심청공원. )

donkyhote 2011. 2. 28. 04:08


곡성(谷城).



전남 북동부 곡성군은 황해도 곡성과 같은 지명.
지명 풍습 전설까지도 유사한 공통점이 많은 편.
하여, 먼저 황해북도 북동부에 있는 곡성부터 소개.

............황해북도 북동부에 있는 곡성군............
고구려 때 십곡성이라 했다가 고려초 곡주, 이조때 곡산.
주로 승격, 군으로 격하되길 반복하다가 1895년에 곡산군
개성부에 속하며 십곡성·덕둔홀·고곡·진서·상산 등 이름

북부 언진산맥, 동부 아호비령 산맥이 뻗어내린 곳.
양대 산맥을 따라 선바위산(1,106m)·명지덕산(909m)
덕업산(1,017m)·대각산(1,278m)·구봉산(906m) 등.

대동강 예성강 지류인 곡산천·대각천·길동천 등
30여 하천이 있고 곡산천 중류 연안에는 곡산분지.

논보다 밭이 많고 옥수수·쌀·밀·콩 등이 생산되고
산이 많아 소 양 축산업지대이자 중석·아연·납 자원.
특히 중석은 우리나라 전국 생산량의 80%를 찾이하였다.

'옛부터 산중삼읍(山中森邑)이라 불릴 만큼 오지.'

이저 신덕왕후 강씨와 관련된 용연(龍淵),
태조 이성계가 말을 타고 달렸다는 치마도
해서금강이 뛰어난 명승지로 알려졌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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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를 통해 광주 광역시와 쉽게 연결되는 곡성.
곡성읍·오곡면·삼기면·석곡면·목사동면·죽곡면·고달면·
옥과면·입면·겸면·오산면 등 1개읍 10개면 125개 동이 있다.

군청 소재지는 곡성읍 읍내리. 면적 547.01㎢,
인구 35,459(2003), 인구밀도 64.8명/㎢(2003).


섬진강·보성강·옥과천 등을 낀 선사 문화 유적지.
문헌상 백제 욕내군(欲乃郡)이 설치되었던 첫 기록.

삼국통일 후 757년 곡성군으로 개칭되어 무주(광주)에 속.
이때 동복현·구복현·부유현 등 3개의 영현을 거느렸던 곳.

9세기 중엽 혜철(惠哲)이 이곳에 선종 태안사 개창.
고려초 곡성은 승평부(昇平府:순천)의 속군이 되고
1018년에는 나주에 예속되었다가 이조 때까지 독립 현

1914년 면으로 병합된 '옥과'는 백제 때 과지현(果支縣)
과지현은 757년 옥과현, 고려초에 추성군(담양)의 영현
1018년 보성군에 예속, 1172년 곡성과 옥과에 감무 설치.

고려말 왜구 침입으로 읍이 함락되자
곡성은 치소를 동악산 아래로 이전했다.

1413년 곡성과 옥과에 현감이 파견
이조 말까지 계속 행정체제가 유지.
임진왜란 때에는 남원부에 잠시 합속.

1895년 군으로 바뀌었으며,
1910년 옥과군은 창평군에 병합
1914년에 구례군 고달면과 함께 곡성군으로 이속
1979년 곡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자연환경

곡성군은 소백산맥이 곳곳에 지맥을 형성한 곳
동부에는 깃대봉·곤방산 봉두산 희아산 천덕산
군의 중앙과 서부에는 형제봉 작산 국사봉 등등.

섬진강이 북동부를 흐르다가 고달면 동산리에서 남류,
서부산지 옥과천과 순천 보성강이 섬진강과 합류한다.

옥과천 유역의 무창리,
섬진강 유역의 송전리·
장선리·대평리·승법리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보성강과 그 지류에는 소규모 평야


산업·교통

총경지면적 99.33㎢ 경지율은 18.1%이다(1996).
농가수는 8,067가구, 농가 인구수는 2만 1,905명
양잠업과 소사육도 활발하고 과일 특용작물 생산지.
곡성군 왜성(矮性)사과는 옛부터 맛이 좋아 군의 명물

'압록리 섬진강 명물은 은어·쏘가리·황어·잉어.'

전주·순천·여수로 연결되는 전라선과 여수-남원 국도
전주-벌교를 잇는 국도, 정읍-화순을 잇는 군 서부 국도
1973년에 놓인 호남고속도로로 광주까지 40~50분 소요된다.

곡성읍 오곡면과 고달면 주민은 버스로 20분 거리.. 남원.
옥과면·입면·오산면·겸면 주민은 차로 1시간 거리 광주
석곡면·목사동면·삼기면·죽곡면 주민은 순천 생활권이다.


유물·유적·관광

전남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광자대사탑, 광자대사비
구원리 고인돌군·묘천리 고인돌군·입석리 선사유적,
옥과면 말무덤 등 유적 및 석곡면 돌실나이(삼베짜기)

민속놀이

정월 대보름 <곡성 액막이 놀이>
신승겸과 유팽로의 <말무덤전설〉
〈성덕산 관음사의 연기설화〉

<동락산 노래전설〉
〈산적 정갑산에 관한 이야기〉

민요로는 〈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장원질소리〉
그밖에 <이야기 노래>·<풍뎅이 노래> 등이 전해져온다.

특히 은어회는 이곳의 별미로 알려져 있는데,
여름철에는 하루 1만여 명의 피서객이 모인다.

태안사(泰安寺)는 신라 선문9산(禪門九山)의 하나이며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로서 경내에 많은 유물
성덕산 관음사, 동악산 도림사 등도 유명한 여름철 관광지


교육·문화

이조시대에는 옥과향교·곡성향교가 있었으며,
근대 교육기관으로 1910년 공립 곡성보통학교




심청전.



'심청전 배경은 어디일까?'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심청이 몸을 던졌던., 임당수.
황해도 장산곶 몽금포 앞 바다.


심청전 문화적 배경은 효녀
이조시대 유교관념 정신세계

심청이 연꽃에서의 부활
불교문화와 유교관의 혼합.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
"...범피중류(泛彼中流) 둥덩둥덩 떠나간다.
삼상(三湘)의 기러기는 한수(漢水)로 날아든다.
장사(長沙)를 지나갈 가태부(賈太傅)는 간 곳없고,
굴삼려(屈三閭)의 어복충혼(魚腹忠魂) 무양(無恙)도 하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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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三湘)은 호남성 임상현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이름.
"삼상의 기러기가 한수로 날아든다"= 동정호 철새 기러기
하여, 심청가 배경은 양자강 북쪽에서 흘러드는 한수(漢水)

'장사(長沙)'는 지금의 湖南省 長沙市를 말하고
소수(瀟水), 상수(湘水)가 흘러드는 동정호 남쪽
가태부는 가생(賈生)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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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黃鶴樓)에 당도(當到)하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오 ~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州)는
이태백(李太白)이 놀던 데요 ~

심양강을 당도하니 백락천(白樂天)
일거후(一去後)에 비파성(琵琶聲)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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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鶴樓"는 호북성 무창현, 서쪽 黃鶴山에 있는 누각.
日暮鄕關何處是 =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白鷺州"는 강소성 남경시 서쪽 양자강에 있는 모래섬.

'심청전 실제 배경무대는 중국 양자강과 한반도 서해.'

심청전은 한반도 옛 민족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듯.
양자강, 전남 곡성, 황해도 곡성을 잇는 옛 무역항로.
심청전 무대는 각각 달라도..뿌리가 같은 민족의 설화.

..........................심청전 줄거리............................. 
대명 성화연간 남군 땅에 심현과 정씨부인이 살았다.
심청이 3살때 정씨 부인이 죽고, 심현은 눈 먼 봉사.
심청이 자라서 눈먼 아버지를 부양하던 어느날이었다.

심청을 마중나가던 심현이 물에 빠졌는데
개법당 화주승(化主僧)이 그를 구해주었다.

심현은 고마워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기로 약속했다.
심청은 남경 상인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몸을 팔아
인단소 물에 던져지자 선녀가 심청을 용궁으로 데려갔다.

용왕으로부터 전생과 미래의 운명을 듣게 된 심청.

용궁에서 어머니를 만난 뒤, 다시 인단소에 이른다.
이때 남경상인들이 돌아오다 인단소 연꽃을 발견해
왕에게 바치자, 왕은 연꽃속 심청을 왕비로 맞는다.

심청은 왕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했고
아버지를 만나려 맹인잔치를 열도록 권유

맹인잔치에서 딸을 만난 심현은 기뻐 눈을 뜬다.
심현은 호부상서 겸 대사마 초국공에 제수되었고
좌승상 임한의 딸과 혼인후 망월산에 사찰을 중수

그뒤 심청은 3남 2녀를 두고,
심현은 2남 1녀를 두고 산다.

심현이 75세에 병을 얻어 죽자,
임부인이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심청은 부모를 고향에 정부인과 나란히 묻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죽으니, 이듬해 가을 왕도 죽었다.

심현의 두 아들은 과거에 급제해 문벌을 빛냈으니,
이 모두가 심청의 덕행 때문이라는 후일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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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연대 미상 소설이자 판소리 12마당 중 하나.
현재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




심청의 바닷길. 



'심청전’속 인당수, 용궁, 연꽃 등의 내용들
심청전은 바닷가 주변의 이야기를 소설화한듯.
심청이 살던 마을은 전라남도 곡성이었다는 설.

심청은 단지 소설 속의 인물일까?
아니면, 실존했던 사실 속 인물일까?

심청의 바닷길을 따라 추적해보기로 하자.
섬진강변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마을, 송정리.
심청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는 주민들.

이 동네의 한가운데 우물이 하나 있는데,
심청이가 마을 아낙들에게 젖얻어 먹던 곳
가뭄에 마르지 않는 이유는 심청의 효심 때문

'송정리 주민들은 왜 그렇게 믿고 있을까?'

곡성과 멀지 않은 송광사에 송정리 주민들
심청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
관음사 사적기에 효녀와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

내용은 심청전과 거의 같은데,
여주인공이 원홍장이라는 처녀.

관음사는 원홍장이 보내온 불상을 모셔 창건한 절.
중국으로 간 원홍장이 불상을 고향에 보내온 3 세기.
그러니까 원홍장은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의 인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산자락 관음사
관음사는 약 1700년 역사를 간직한 사찰.

소설 속의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고
원홍장은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원홍장이 불상을 보냈다는 중국 절강성
우리나라 곡성과는 엄청나게 먼 바닷길.
절강성 보타도 앞바다에 신라초라는 바위.

신라 상인들이 관음상을 싣고 가려다
이 바위에 부딪혀 좌초되었다는 전설.

원홍장이 살던 3세기경에는 중국과 상당한 교류
중국 상인들은 하필 내륙의 곡성까지 들어왔을까?
심청마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검붉은 담.

비만 오면 녹물이 흘러내린다는 돌담,
돌담을 쌓은 돌들이 철 성분을 다량 함유
중국 상인들이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온 이유

바로 철 광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당수는 과거 뱃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최대의 표현은 인신공희.

'사람을 제물로 삼았던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중국가는 길목인 위도와 죽망동 일대 인신공희 흔적
인신공회는 중국과 한반도를 오간 상인들의 옛 풍습.

백령도와 부안 외에도 심청 설화나 지명이 많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해상교통과 연결된 곳에 오래된 마을과 절이 있는 점.

내륙 역시 과거에 바다였거나
강을 통해 바다와 이어지는 곳.

심청전은 뱃길로 이어진 중국과의 교류역사
3 세기 곡성 심청마을은 가락국의 영역이다.
심청의 바다길은 철기시대에 철의 무역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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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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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觀音寺).
백제 분서왕(308년) 때 처녀 '성덕'이 창건한 사찰.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 보살상'을 모셔왔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에 원랑(元良)이란 사람이 살았다.
눈이 멀었으나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던 그.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던 원량에게 불행이 닥쳤다.

바느질 품팔이 부인이 산고끝에 세상을 떠난 것.
원랑은 유일한 혈육 딸 홍장을 젖동냥으로 키운다.
홍정 또한 성품이 현숙해 아버지를 극진하게 봉양.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홍법사 화주승 성공(性空) 스님을 만난다.
원량을 보자 성공 스님은 사찰 불사를 도와달라며 간청
원량은 스님이 빈털터리 자신에게 시주를 부탁하자 난감.

“내일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큰 시주가 될 것이니라”

성공 스님이 어제밤 꿈 이야기까지 하며 간청하자
원량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자신의 입장을 넋두리.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내 땅 한 뼘 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합니까?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불사에 도움될 수 있다면 딸 아이를 데려가시지요.”

성공 스님은 원량을 따라 그의 움막으로 함께 갔다.
아버지 원량은 딸에게 스님과의 약속을 말해주었다.
딸은 자신보다 아버지 앞날이 걱정되어 슬피 울었다.

홍장의 나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어린 딸을 보내는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스님과 약속한 것을.

홍장은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홍장은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라니 생각하니 아득했다.
난생 처음 산 넘고 물 건너 소량포 바닷가에 이르렀다.

너무 많이 걸어 잠깐 쉬려고 언덕에 앉아 있었는데,
바다 저멀리 수평선에 배 두척이 질풍같이 다가왔다.
그 배에서 내린 그들은 홍장을 보더니 예를 갖추었다.

“참으로 왕후마마이십니다.”
"......................."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늘 슬퍼 하셨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났지요.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백제에서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로 여기시고
과히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우리가 찾아가는 중.

저희들은 금은보화를 준비해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 하려
스님과 동행하는 중이니 배에 실은 모둔 폐백을
스님께 시주하면 소녀는 기꺼이 따라가겠나이다.”

진나라 황후가 된 홍장은 관음상을 조성하여
아침 저녁으로 모시며 고향 백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관음보살상을 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표류한지 한 달만에 낙안 단교 곁에 정박
그곳 수비병들이 잡으려 하자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 아가씨.
낙안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녀가 끌어당기듯 그녀에게 다가오는 배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고향인 옥과로 출발했다.
성덕에게 등에 업은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12 정자를 만나 쉬며 고향에 도착한 성덕.
고향에는 관음상을 모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9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서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관음상이 무거워졌다.

성덕은 관음사을 모실 곳이 가까이 있음을 깨닳았다.
마침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졌고,
가운데 적당한 사찰터가 있어 그곳에 관음상을 모셨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

성덕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산아래 마을사람들이 이를 보게 됐고
그들도 함께 기도하자 신기하게 소원이 한가지씩 이뤄졌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훗날 그 산은 성덕 이름을 본따 성덕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동을 자랑하던 거찰.

1832년(순조 32) 큰홍수에 전각의 거의 반이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36년 청운 스님의 중건.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 창훈스님이 근처 대은암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중건하고 1982년 중환 스님이 천왕문을 복원

요즘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불사가 활발.
원통전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
전쟁으로 원통전도 사라져 둘 다 없어졌다.


 

심청 공원.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원홍장설화.. 심청공원.
원홍장 설화는 심청전 소설의 원류로 추정되는 전설.

심청공원에는 관음사 사적기 심청전 배역인물 장승 23기
심청 효행 기념비, 관음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꽃을 식재.
흰불두화, 흰진달래, 흰만리향화 등 300 그루가 심어졌다.

흰불두화, 흰진달래, 흰만리향은 불교용어
우리나라 말로는 철쭉과 진달래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