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觀音寺).
백제 분서왕(308년) 때 처녀 '성덕'이 창건한 사찰.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 보살상'을 모셔왔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에 원랑(元良)이란 사람이 살았다.
눈이 멀었으나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던 그.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던 원량에게 불행이 닥쳤다.
바느질 품팔이 부인이 산고끝에 세상을 떠난 것.
원랑은 유일한 혈육 딸 홍장을 젖동냥으로 키운다.
홍정 또한 성품이 현숙해 아버지를 극진하게 봉양.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홍법사 화주승 성공(性空) 스님을 만난다.
원량을 보자 성공 스님은 사찰 불사를 도와달라며 간청
원량은 스님이 빈털터리 자신에게 시주를 부탁하자 난감.
“내일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큰 시주가 될 것이니라”
성공 스님이 어제밤 꿈 이야기까지 하며 간청하자
원량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자신의 입장을 넋두리.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내 땅 한 뼘 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합니까?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불사에 도움될 수 있다면 딸 아이를 데려가시지요.”
성공 스님은 원량을 따라 그의 움막으로 함께 갔다.
아버지 원량은 딸에게 스님과의 약속을 말해주었다.
딸은 자신보다 아버지 앞날이 걱정되어 슬피 울었다.
홍장의 나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어린 딸을 보내는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스님과 약속한 것을.
홍장은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홍장은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라니 생각하니 아득했다.
난생 처음 산 넘고 물 건너 소량포 바닷가에 이르렀다.
너무 많이 걸어 잠깐 쉬려고 언덕에 앉아 있었는데,
바다 저멀리 수평선에 배 두척이 질풍같이 다가왔다.
그 배에서 내린 그들은 홍장을 보더니 예를 갖추었다.
“참으로 왕후마마이십니다.”
"......................."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늘 슬퍼 하셨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났지요.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백제에서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로 여기시고
과히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우리가 찾아가는 중.
저희들은 금은보화를 준비해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 하려
스님과 동행하는 중이니 배에 실은 모둔 폐백을
스님께 시주하면 소녀는 기꺼이 따라가겠나이다.”
진나라 황후가 된 홍장은 관음상을 조성하여
아침 저녁으로 모시며 고향 백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관음보살상을 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표류한지 한 달만에 낙안 단교 곁에 정박
그곳 수비병들이 잡으려 하자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 아가씨.
낙안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녀가 끌어당기듯 그녀에게 다가오는 배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고향인 옥과로 출발했다.
성덕에게 등에 업은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12 정자를 만나 쉬며 고향에 도착한 성덕.
고향에는 관음상을 모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9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서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관음상이 무거워졌다.
성덕은 관음사을 모실 곳이 가까이 있음을 깨닳았다.
마침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졌고,
가운데 적당한 사찰터가 있어 그곳에 관음상을 모셨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
성덕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산아래 마을사람들이 이를 보게 됐고
그들도 함께 기도하자 신기하게 소원이 한가지씩 이뤄졌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훗날 그 산은 성덕 이름을 본따 성덕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동을 자랑하던 거찰.
1832년(순조 32) 큰홍수에 전각의 거의 반이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36년 청운 스님의 중건.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 창훈스님이 근처 대은암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중건하고 1982년 중환 스님이 천왕문을 복원
요즘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불사가 활발.
원통전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
전쟁으로 원통전도 사라져 둘 다 없어졌다.
용궁.
...............용궁 설화(龍宮 說話)......................
수중 세계의 왕궁인 용궁이 등장하는 설화.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설화
용궁은 환상적인 바다 밑의 이상향(理想鄕)
삼국유사에 해룡에게 납치되었던 수로부인
바닷속에 칠보궁전 음식이 맛있었다는 내용
진성여왕 때 거타지가 서해 괴물을 퇴치하고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가
고구려 권신에게 들은 구토지설(龜兎之說)
즉 토끼가 거북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궁에 갔다가,
병든 용녀를 위해 자신의 간을 약으로 쓰려고 하자
간을 꺼내두고 왔다고 속여 위기를 탈출한다는 내용.
훗날 용궁설화는 어부나 행인이
잉어나 자라 등을 구해주고 나서
용궁에 초대되어 보물을 얻는 설화.
옛부터 한반도에는 수많은 용궁설화.'
.........................................
남해에 거제 해금강이 있다면
서해에는 제2 해금강., 두문진
백령면 연화3리 해안지대..두문진.
선대바위 촛대바위 코끼리바위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기암절벽이 늘어서 있으며 바다와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
유람선을 타고 관람하는 여행객들은 연신 탄성을 내뱉는 곳.
특히 선대바위는 고려 충신 이대기가 '백령지'를 통해
늙은 신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비경.
또 백령도는 이조 시대의 소설 심청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몸을 던진 인당수
용궁에서 연꽃이 흘러온 곳이 바로 백령도 앞바다.
이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2층 건물., 심청각
건물 안에는 심청전과 관련된 갖가지 자료가 전시.
용기포구 남서쪽과 남동쪽 해안의 사곶 천연비행장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에서 단 두 곳인 특이한 지형.
해변 모래사장이 콘크리트만큼 단단한 천연 비행장.
과거 한국전쟁 당시 UN군이 천연비행장으로 사용.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된 콩돌해안
모래 대신 콩 크기 둥근 돌이 깔려 있다.
맨발로 밟으면 감촉이 좋은 해수욕장이다.
용궁은 전설속 '바람의 나라.' 풍이족의 궁전.
'신라의 영역' 진한은 풍이족이 세운 바람의 나라.
청동기시대 남해 저지대 민족에서 유래된듯 추정된다.
'신라시대부터 바다속 이상향으로 여겼던 용궁.'
인간이 꿈꾸는 하늘나라 이상향을 천당이라 한다면,
수궁 열락과 풍요를 갈망하는 환상속 이상향은 용궁.
용궁은 인간 세계와 동떨어진 바다 물속이나 외딴 섬.
바다속 신비의 세계를 다스리는 용왕이 산다는 용궁.
용왕은 그 곳에서 선녀의 옹위를 받으며
수국(水國)을 다스리는 이상향의 통치자.
비를 관장하고, 물고기를 다스리는 초인간적 존재
옥황상제 힘을 빌리기 위해 하늘에 오르기도 한다.
용궁은 신선사상, 또는 불교사상과 혼합되어 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 용에 관한 민간신앙
외래종교인 불교와 결합한 흔적이 곧, 용왕당(龍王堂)
용은 그 보답으로 절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믿음.
정치적으로 용 신앙을 숭배하던 정치세력인 신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며 용왕설화가 성행.
이조시대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용왕 설화가 만연.
'심청전은 용왕설화가 빚은 이조시대 문학작품.'
우리나라 용왕설화는 삼국시대 신라에서 성행한듯.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락국에서 유래된듯.
신라 옛 영역 용궁현은 원래, 가락국의 영역이었다.
.....................용궁현(예천읍).....................
경북 북부 내륙의 농산물 집산지인 교통의 중심지
예천읍·용문면·감천면·개포면·보문면·호명면·
상리면·유천면·용궁면·지보면·풍양면·하리면
등 1개읍 11개면 173개 동. 군청은 예천읍 노상리.
면적 660.84㎢, 인구 53,816, 인구밀도 81.5명/㎢.
예천은 예천군과 용궁현이 합해 이루어진 행정구역.
예천군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수주촌(水酒村)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으로 개명.
안인현(安仁縣)·가유현(嘉猷縣)·은정현(殷正縣)·
영안현(永安縣)·감천현(甘泉縣)·축산현(竺山縣)
6현을 관할했고 고려초 940년(태조 23) 보주(甫州)
1018년(현종 9)에 안동부에 속현으로서 병합되었다.
마제석기가 출토된 용문면 어림성터 고인돌군
예천읍 백전리에는 삼국시대의 석실분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두운이 창건한 용문사,
상리면 명봉리의 명봉사, 감천면의 수락대,
보문산의 보문사, 풍양면 청곡리의 삼수정 등
해마다 봄철이면 왜가리떼가 몰려와
풍양면 우망리 일대가 장관을 이룬다.
....................................................
용궁 김씨 (龍宮金氏).
1 시조 : 김존중[金存中]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용궁(龍宮)은 경북 예천군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 시대에 축산현,·원산현으로 불리웠으며,
고려 초 용주라 하다가 1012년 용궁현으로 개칭.
김존중은 신라 경순왕 4남 대안군(김은열) 8세 손
인종 때 태자시학, 1146년 의종 때 좌우승선 벼슬
이어 전조를 겸하여 문무백관의 선권(選權)을 장악.
태자소부, 이부상서, 정당문학을 거쳐 용궁군(龍宮君)
하여, 후손이 김존중(金存中)을 용궁김씨 시조로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신종때 예부전서 지철(之鐵),
판도판서를 역임한 지록(之錄)형제와 대장군., 우(祐)
우(祐) 아들 진(璡)은 이성계 원군과 합세 모반군 평정
순조 때 성리학자 호성(昊星), 독립운동가 홍권(弘權)
국현(國鉉) 등은 항일사로 명성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1985년 용궁김씨(龍宮金氏)는 총 3,327가구, 14,853 명
3. 집성촌
경남 산청군 차황면 장위리
경남 하동군 양포면 우복리, 적량면 관리
충남 서천군 서천면 오석리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영천리
용궁 최씨 (龍宮崔氏)
1 시조 : 최 현[崔 玄]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용궁(龍宮)은 경북 예천군에 속한 지명,
신라시대 축산현, 원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려 성종때 용주, 현종 때 용궁(상주 편입)
1914년 군을 폐하고 신하면은 의성군,
나머지는 예천군, 그 일부지역은 용궁면
용궁최씨(龍宮崔氏) 시조는 고려 때 최현(崔玄)
최현은 평리부 밀직사를 지냈으며
아들 안도(安道)는 전리상서를 역임
손자 유(濡)는 군부판서로 왕을 호종.
1399년 조적의 난 때 일등공신 취성군에 봉
공민왕때는 삼사사로 용성부원군에 진봉되고
후손들이 해주최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용궁.
그외 이조 밀직사사 성우(成雨)는 유(濡)의 아들.
성우의 후손 세담(世潭)이 훈도(訓導)를 역임하여,
첨정(僉正)을 지낸 알과 함께 가문을 빛낸 용궁최씨.
1985년 남한에 총 195가구, 804명 거주.
집성촌 : 경북 군위군 군위읍 사직동
용궁사
수평선 거머쥔 부처님 해룡 타고 오시네
바다, 용, 부처님이 하나된.,해동 용궁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바람처럼 속으로 말하라.' - 나옹화상 -
고려 공민왕의 왕사 나옹화상.
630 여년 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없이 살라 가르치는 것 같고,
허공은 언제나 티끌 하나없이 텅 비어 있다.
해동 용궁사 들머리에 세워진 12지신상
용궁사 가는 길목 곳곳에는 황금빛 가을
부산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416 - 3번지
이곳에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소원
탐방객 저마다 소원을 기원하는 모습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해동 용궁사.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300년이 흐른 1930년대 초, 보문사를 다시 세운다.
974년 정암(晸菴)스님이 주지가 되어 올린 백일기도
백일기도 마지막 날, 정암스님 꿈에 나타난 관음보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라 명명
그때부터 이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곤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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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조각배처럼 떠 있는 법당
법당으로 들어가는 108 계단에 수평선
마치 바다 속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 같다.
바다 위에 섬처럼 떠도는듯한 해동 용궁사
춘원 이광수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용궁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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