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34 ( 진시황. 미망인. 지산동 44호분. 개성상인. )|

donkyhote 2012. 4. 5. 18:45

진시황.



중국 고대국가 역사는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다.
북경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중심.
고대 중국 대륙은 넓어도 인구 밀집 지역은 북경

'북경을 고대사회부터 중국을 장악하는 위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 또한 중국과 일맥상통.
북경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인접국가인 때문.
특히, 진시황은 한반도의 역사흐름과 밀접한 관계.

진에게 멸망한 고조선 1차 유민들은 왜로 건너간다.
왜 최초의 신무천왕은 고조선의 1차 유민들의 후예.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에 창건한 오가 제국(가락국)
신라에 합병후 2차로 왜로 건너가 이자나키 신화 창조.
갑비고차(강화도) 유민과 가야 연합국 유민이 세운 왜.

강화도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군사적 요충지.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 한성이 함락
하여, 고구려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고,
강화도 또한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갑비고차'라고 하였다.

훗날 신라에 패망한 백제세력이 일본에 망명
백제 망명정부 및 조선족 유민이 창건한 일본.
일본은 조상이 동이족 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여, 일본 역사를 <신도와 마쓰리> 신화로 각색.

'혹시, 진나라와 우리 조상은 같은 민족 아닐까?'

진시황에 관한 기록을 보면 떨쳐버리기 어려운 느낌.
동이민족이 조상인 진시황은 우리나라와 핏줄이 같다.
진시황은 스스로 한반도의 민족을 같은 핏줄로 여겼다.

진시황 당시에 진나라는 한반도와 문화교류를 한 듯.
진시황이 지리산에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것이 한 예.
하여, 진시황에 관한 기록을 여기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진시황은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중국을 통일한 황제.
단군의 고조선이 무너진 직후 황제 칭호를 처음 썼다.
진시황 천하통일 전까지 중국은 소국들이 난립했었다.

단군 신검 역시 진시황 이전에 소국들을 거느린 황제.
고조선 영토는 진나라 영토와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나라는 고조선 역사와 상호 무관할 수 없다.

진시황은 한반도 정치, 문화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
삼국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중앙집권 정치제도.
고조선이 무너진 이후 한반도는 중앙집권 세력이 지배한다.

진시황이 불노초를 찾으려던 집념에 관한 일화가 유명하다.
'진시황이 지리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한 것은 사실일까?'
진시황은 어떠한 인물이기에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을까?

......................진시황.......................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원래 후계자가 아닌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다.
거상 여불위 후원에 힘입어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다.

이때 진은 중국 북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지역 나라까지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산지로 이루어진 서부 변방에서의 강력한 위치 때문에
진은 전체주의적인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로 발전.

BC 238년 공식적으로 친정을 선언하기 전까지
진나라는 사실 상 여불위가 정권을 담당했다.

진시왕은 왕으로서 그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어머니와 정을 통한 반대파의 신하를 살해하고
여불위를 제거한후 이방인 추방 법령을 폐지했다.

진나라는 여섯 경쟁국 및 제(齊)나라까지 멸하고
BC 221년에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게 된다.
그는 자신을 시황제라 선언하고 중앙집권화를 확립

또한 그 이전 진나라에서의 봉건세력을 철폐하고,
각지의 부호들을 수도 셴양[咸陽]으로 이주시켰다.
도로와 운하망,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건설.

BC 220년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 조직을 감독하며 신성한 여러 지역에서 제사
각지에 제국통일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을 세웠다.

BC 219년 그는 계속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유가들은 그 조치들이 사기성 짙은 행위라고 강력 비난
이로 인해 그들 가운데 460여 명이 진시왕에 의해 처형.

옛 봉건적 질서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논쟁
BC 213년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었다.

시황제 말년에는 측근들의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
3차례 암살기도 후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근 금지
신적인 존재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다가 BC 210)년에 죽었고,
산을 깍아내 우주의 형태를 본떠 만든 거대한 능에 묻혔다

강력한 지배자가 죽자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들이 항쟁
결국 BC 206년 진은 붕괴되었고, 황족들이 제거되었다.
그에대한 기록은 진을 계승한 한(漢)나라에서 나온 것.

한나라는 유교를 숭상했으므로 법가를 중시한 진을 비방
그가 여불위 아들이라는 기록도 그시대의 조작인듯 싶다.

그가 지나치게 잔인했다거나 인격파탄자였다는 비방 등은
법가 철학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각색된듯 보인다.

시황제는 확실히 위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전제적인 지배와 가혹한 형벌은 법가사상에서 나온 것.

전통적인 역사서에서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교양 없고 미신적인 사람으로서 취급했던 그.

당시 그가 실시한 제도화된 관료 행정구조.
역대 국가들은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부인
사실상 후대 국가들의 통치기반이 되었다.
.............................................

진시황은 13 살에 '정 호랑', 왕으로 등극하여, 39 세에 천하통일.
말년엔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불로장생 불로초를 찾기에 집착했다.
3000 동자를 풀어 동해 건너 지리산에서도 불노초를 찾았다는 기록.

'그당시 진나라에서 동해라고 부른 바다는 한반도 서해.'

기원 전부터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항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하루 한석(30 kg) 분량 서류를 결재할 만큼, 치밀했던 정치인.
극단적 합리성과 비합리적일 만큼 낭비벽 심했던 양면성 성격의 소유자.

만리장성, 화려한 아방궁, 묘역 둘레 2.5km의 시황릉이 그가 남겼던 유물.
시황릉 속의 알렉산더 마케도니아군을 꺾었던, 직사각형 방진 유물도 유명.
결국, 지리산에서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50 여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진시황이 단명했던 이유는 수은 독성에 중독된 탓이라고 한다.
시황릉 천정은 진주로 장식한 별천지가 고래기름 촛불 빛에 영롱.
시황릉 무덤 안의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시황릉 바닥에는 수은을 쏟아부어 흐르는 강물을 장식했다고 한다.
시황릉은 진시황이 죽고나서도 몇년간 공사를 계속할 만큼 큰 규모.
진시황이 궁궐에서 거느린 시종들까지 함께 생매장했다고 전해온다.


진시황의 아방궁은 전국에서 뽑혀 온 미녀들 대기실만 600 개.
진시황은 늘 침소를 옮겨다녔지만 죽을 때까지도 다 못 다녔다.
진시황은 말년에 코가 문드러질만큼 흉했는데 성병 탓이란 구전.

도에 지나칠 만큼 주색을 탐했던 진시황.

패망왕조는 새 왕조에 의해 그 역사가 왜곡되기 마련.
아방궁은 기록에는 있지만, 유적이 없어 신빙성은 미궁.
아방궁은 진시황이 통일한 육국(六國)의 궁전을 본뜬 육국궁

동서 700m, 남북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1만 여명을 수용.
죄수 70만을 동원해 건설했으나 진시황 생전에도 미완성 규모.
BC 207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3개월 동안 불탔단다.

신상필벌 정책을 바탕으로 인재를 모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진시황의 강력한 중앙집권 군주제는 연합국 통치형태보다 강했다.
훗날, 아시아 고대국가들은 진시황의 중앙집권 군주제를 채택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과 권모술수로 진나라를 통째로 삼킨 여불휘.
주체사상이 없었던 진나라는 두 영웅의 시대로 명백이 끊기고 만다.
진시황과 여불휘는 정경유착의 현대국가 체재 및 운영 방식의 근간.

진시황과 여불휘의 정경유착은 세계 최초

진나라의 아방궁 역사는 오늘날까지 전세계 유곽문화에 큰 영향.
독일 함브루크, 네델란드 암스텔담을 비롯, 우리나라의 유곽 문화.
한반도 고대국가 구중궁궐 궁녀 및 왕의 축첩제도에도 상당한 영향.

진시황은 아방궁 모든 문에 자석 장치로 자신의 신변을 보호.
그 누구도 무기를 감춘 채 궁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기원전 자석으로 묘소 방향을 잡았고 11세기에는 항해에 사용.

자석은 아랍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유럽에 전해졌다.
자석은 철을 끌어당기는 모습이 어머니를 연상한다는 뜻.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을 때의 모습을 비유한 말.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마그네시아 지방에서 발견한 암석
'마그네타이트' 암석은 자석을 뜻하는 마그넷<magnet>의 어원
'마그네타이트'는 잘게 쪼개도 다시 새로운 N극과 S극을 가르킨다.
이 특성을 이용해 나침반을 만들었고 오늘날 자기열차도 발명한다.

진시황은 죽기 전까지 불로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법사 '서불'에게 동자 500 명을 딸려 불로초를 찾게 한다.

미망인.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죽은 사람의 부인을 미망인이라 한다.
미망인이란 부계사회에서 신분이 높은 과부에 대한 높임 말.
미망인(未亡人) 이란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죄인'이라는 뜻.

'미망인은 한반도 부계사회에서 순장 풍습의 상징.'

한반도 고대국가 왕이 죽으면, 후궁들까지 생매장하던 풍습.
과거 중국에서 남편이 죽을 때 그 아내를 함께 묻는 순장 풍습.
남편과 함께 무덤에 묻히지 않은 부인을 죄인 취급해 생긴 단어.

'중국과 한반도의 옛 풍습이 일치함을 뜻하는 미망인.'

지산동 44호분.


진나라 순장풍습과 한반도의 순장묘는 유사한 점이 있다.
혹시 먼 옛날에 같은 조상에서부터 비롯된 풍습이 아닐까?
하여, 고령의 순장묘 지산동 44호 분을 여기 소개하려 한다.

한반도에서 궁궐 시종들까지 생매장한 순장무덤은 고령에 있다.
'전설 속의 나라' 대가야의 각종 토기와 금관이 출토된 순장 무덤
고령의 70 기 고대 순장무덤은 슬픔으로 가득한 여인을 연상시킨다.

신라 진흥왕 때 이사부의 손에 멸망한 대가야 500년 역사.
대가야는 건국신화부터 여인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신 이비가를 맞이하여 대가야의 왕인 뇌질주일을 잉태
대가야를 건국했다는 설화가 적혀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가야의 문화는

백제의 우아함이나

신라의 화려함과 다르다.


각종 철기 장식품과 토기류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
철기 문화가 발달한 대가야가 시작되는 지점은 고령군 야로면
거창과 합천 해인사 가는 길에 있는 대장간과 화로 유물 흔적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다곽순장묘.
무덤방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개의 무덤방에 30명을 함께 매장.
사후에도 생전의 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믿음의 매장풍습

고령의 무덤은 모두 산등성이에 있고 고분가는 길은 산책로.
현재 발견된 무덤은 200기 정도이고 그중 70 기를 재현했다.
지산동 고분군으로 오르는 길은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시작.
전시관에는 왕이 묻힌 주실 외 32개의 소형 무덤이 원형 재현.

순장무덤 안 22개 인골에는 머리를 둔기로 때리거나 묶인 흔적
순장에 순순히 응하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시관 뒤편 돌계단 따라 하늘을 향해 굽이 굽이 봉우리 고분들.

'하늘을 향해 봉긋 솟은 무덤들의 형태는 달을 순장한 듯..'

달은 '여인의 상징'이자 인류의 조상이 유래된 곳이라도 한다.
지산동 고분 44호에는 부부, 부자지간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있다.
살아 누린 부귀영화를 죽어서까지 영원히 누리고 싶었던 흔적이다.

매년 천왕제를 지내기 위해 고천원지를 찾는 일본인이 많다.
고령이 일본 황실 선조의 고향이라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옆 성보박물관은 해인사와 조계종 12교구 말사의 유물관

이곳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나타나며
부도를 지나 10분 가량 올라가면 사찰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너머 연못 영지를 지나면 해인사의 중심인 대적광전 앞.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은 문 하나를 더 통과해야 나타난다.

16년에 걸쳐 만든 팔만대장경은 그 제작과정이 경이롭다.
제주 거제 울릉도 후박나무를 수년간 바닷물에 쪄서 진 빼고
이를 다시 수년간 그늘에 말린 후 판목으로 정성껏 다듬었단다.
그러나, 아직 팔만대장경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수수께끼.

'오늘날까지 손상되지 않았던 과학적인 보존방법.'

목제를 다듬는 기술과 보관방법이 일본으로 건너간 듯 하다.
아울러, 지산동 44호분 순장무덤은 일본 가부장 제도의 뿌리.
고령은 지금도 백자 토기를 비롯해 딸기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

개성상인.



고려, 조선시대에 항상 앞선 상술 대표적인 상인집단.

고려시대 송악 근처 예성강 입구 벽란도는 국제무역항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로 공무역과 사무역이 발달한 개성.

조선시대 소외당한 구왕조의 사대부 계층과 지식인들

이들의 지식은 상업의 합리적 경영과 상술을 개발하여

서양보다 2세기 앞선 사개송도치부법 복식부기를 사용

조선 중기 이후 상품, 화폐경제 발달에 따라

개성은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개성상인은 송방이라 불리워졌고,

이들이 축적한 자본은 개항 전에 국내 최대

개항 후 외국자본에 대항한 가장 강한 민간자본

근면과 앞선 상술, 철저한 상혼,

전국적 규모의 상업, 송방 등은

오늘날까지 개성상인의 대명사.


당나라 신라 왜 무역로를 연 해신 장보고.
장보고가 무너지자 해상권은 왜구들이 장악.

왜구란 고대중국, 한반도 일본을 오가던 무역군단.
중국 왜, 한반도 왜, 일본 왜를 통털어 왜구라 지칭.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 후 유래된 왜.

동아시아 해상무역에 종사한 고조선 패망 세력들.

중국과 우리나라는 농업 정책 위주의 농본 국가.
명나라와 고려가 농본정책을 펴며 해상봉쇄령 선포.
사실상 중국 한반도에서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상인들.

일본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해상무역의 거점을 확보.
명나라와 고려를 무력으로 침입하며 무역활동을 전개.
이 무렵부터 왜구는 일본 해적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왜구 상행위로 무역적자 폭이 컸던 명나라.
국가 경제가 위태로워지자 왜구 무역을 억제.
중국 명나라 때에는 해안봉쇄령을 내릴 정도.

한반도 고려에서도 공도령을 내려 해안 봉쇄.
무역 항로가 봉쇄된 왜구들이 극렬하게 반발.
이조는 삼포를 개방해 왜구의 무역활동을 승인.

왜구는 일본 춘추전국시대 토호세력과 정경 유착.
500척 이상의 군사력까지 갖춘 해상군단으로 발전.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

'중국 명나라와 고려 정권을 위협했던 왜구.'

한편, 한반도는 개성상인 군단이 고려 왕실과 유착.
그러나, 일본 토호세력들과 정경 유착 왜구에 밀린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무역을 제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국력 약화.
고려가 패망하게 되는 커다란 원인으로도 작용.
하여, 고려와 정경유착한 개성상인도 점점 쇠퇴.

개성 상인의 뿌리는 패망한 발해의 동경 상인들.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의 도읍 개성에 유입되었다.

그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성상인은 패망한 진나라 유민들.
중국 격변기를 피해 한반도로 유입.

진나라 유민들은 한반도에 진국을 건설.
삼한시대에 진한이 바로 진나라 유민들.
진한은 신라에 흡수된, 지금의 경상도 일대.

훗날, 당나라와 신라는 상호 활발한 교역.
신라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개척자.
그 해상왕국의 뿌리는 진나라로부터 이어진 듯.

'따라서, 그 역사적인 뿌리가 깊은 개성상인.'

고려와 이조시대에 개성상인(송도상인 또는 송상)
개성상인은 시전인(市廛人)과 사상(私商)으로 분류
사상들은 이조 후기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인 상업망
송방을 통해 각 지방 특산품을 매점하거나 판매했다.

개성상인은 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고,
오늘날 복식부기와 비슷한 개성부기(開城簿記)를 고안
상술이 뛰어났으며 주요한 상품은 의류·도자기·인삼

일제때 근대 공업제품을 취급하는 일본상인들에게 압도
그러나, 개성, 종로에서 일본상인과 대항하여 단결했다.
상인의 종류에는 객주(客主)·도상(都商)·산상(散商)
용인(傭人)으로는 사환(使喚)·차인(差人) 등이 있었다.

개성상인의 특성 5 가지,

1. 골짜기 골짜기 찾아가서 판매하는 상인,
2. 팔 물건과 살물건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인,
3. 한푼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십리를 가는 근성,
4. 상인 간에 서로 서로 공동체 의식을 갖는 연대감.
5. 생존과 이윤에 대한 정보를 중요시 하는 유목민 정신

개성상인의 5대 정신

1.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2.한가지 업종을 선택해 그 분야 최고 기업으로 키운다.
3.장사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용을 지킨다.
4.자식이라도 능력이 모자라면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
5.기업은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해야한다.

개성상인의 정신은 중국인 상술을 떠오르게 한다.
개성상인은 옛부터 중국을 오가며 생업에 종사했다.
하여, 상인에겐 옛부터 국적보다는 상권이 중요했다.

산동반도 - 강화도 - 개성 - 인천 - 여수 -김해 - 왜.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 상권을 장악했던 '개성상인'.
고대국가 영역다툼도 치열했지만 상권다툼도 치열했다.
장보고 이후 고려 이조 구한말 근대 한반도 상권의 핵.

개성 상인의 주종 상품은 오늘날까지 유명한 고려인삼.
산동반도와 거리상 가까운 강화도는 수출용 인삼 원산지.
개성 상인은 반야봉의 산삼도 중국에 수출하지 않았을까?

일제시대에는 종로 민족자본을 형성해 일본 상권과 대항.
이조 초기에는 고려왕조의 부흥을 위해 이조 정권과 대항.
이조시대에는 개성 사람을 중요한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막강한 재력이 이조 정권을 뒤엎을까 두려웠던 탓.'

국가상대로 거래하는 거상들의 재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
정경유착으로 밀착된 먹이사슬 고리는 '보이지 않는 큰 손.'
특히, 첨단무기 취급상들은 국가간의 전쟁 승패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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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말기에 전란의 격변기를 피해
진나라의 유민들이 한반도로 몰려든다.

중국은 진나라가 무너지고 한나라가 장악
그 혼란기에 한반도의 정세도 크게 바뀐다.

진나라에게 무너진 고조선 세력은 분열.
한반도에는 중앙집권 고대국가들이 득세.
삼한시대가 무너지고 삼국시대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