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29 .( 섬진강. 하멜 표류기. 장보고. 청해진. 완도. )

donkyhote 2011. 2. 28. 04:00

섬진강.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발원한 섬진강
전북 남동부, 전남 북동부, 경남 남동부
3도를 흘러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강.

우리나라에서 아홉번째로 긴 강(212.3㎞)

섬진강 상류는 활처럼 휘어 흐르고
못처럼 깊은 소가 많아 천담이라 한다.

섬진강은 자라(龜)가 많이 서식해 구담(龜潭)
또는 아홉 소(沼)가 있다하여 일명 구담(九潭)

섬진강 유역은 신석기시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우리 민족이 저지대 민족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신,구석기시대 조개 패총을 비롯해 발굴된 유물.

'지금부터 그 흔적을 찾아 섬진강을 찾아가보자.'

섬진강은 자연 재해인 홍수에서 유래된 이름이 특징이다.
섬진강 유역은 그만큼 옛날부터 홍수가 많았던 지역이다.
태평양 고기압골이 지리산에 부딪쳐 비를 뿌리는 탓이다.

'태초에 섬진강 하구는 어디쯤 이었을까?'

선사시대 대마도는 섬진강 하구였다는 지질학자들 주장.
남해 저지대에 꽃핀 구석기 유적은 모두 물속에 잠긴 듯.
따라서, 남해 저지대 조상들은 차츰 한반도 고지대로 이주.

'제 4 빙하시대 끝 무렵에 낙동강 상류로 차츰 이주.
동해 서해 남해에서 대홍수 피해 모여든 곳이 지리산.
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개장터를 품은 섬진강.

화개장터는 하멜 일행이 모험담을 들려주며 구걸하던 곳.
한반도의 내륙과 해안가 주민들의 특산물을 이어주는 장터.
신석기시대로부터 옛 조상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화개장터.

철기문화가 싹트고, 한반도 고대국가 역사가 꽃 핀 섬진강.
한반도 판소리의 산실이며, 자연환경이 가장 잘 보존된 강.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가까운 강이다.

강은 그 주변에 사는 인간은 물론 생명체에게 '생명의 젖줄'.
섬진강은 아직은 오염이 안 된 자손만대에 물려줄 유산인 듯.
섬진강에 얽힌 유래 및 전설을 지금부터 하나 하나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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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내음 은빛 은어, 재첩 따는 여인들,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
한쪽은 지리산, 반대쪽은 백운산, 임실까진 물이 얕아 징검다리
곡성부터 남해 앞까지는 강물이 깊어 마을마다 나루터가 많았다.

섬진강은 남쪽에서 큰 배로 올라오던 소금이나 젖갈, 건어물 등등
수심 낮은 하동에서 멈췄고 지리산 약초는 하동까지 가기엔 멀었다.
따라서, 섬진강의 상,하류가 만나는 화개에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수십척  크고 작은 배들이 몰려 왔던 화개장날의 섬진강.

지금 화개에는 작은 줄배와 재첩 잡는 조각배만 한가롭다.
아직도 재첩이 있고 은어가 사는 옛 그대로의 모습.,섬진강.


'섬진강을 삶터로 아는 주민들도 옛 모습 그대로인듯.' 

섬진강  푸른 물 따라.. 바라보는 지리산은 참 아름답다.
지리산 자락 위로 어깨춤추듯 하늘로 솟구쳐 달리는 연봉. 
섬진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바라보는 지리산은 참 아름답다. 

한폭의 수묵화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듯한 착각.
지리산 곰과 수달이 섬진강까지 헤엄쳤다는 그 옛날. 
섬진청류란 말은 지금보다 범위가 넓은 옛 지리산 모습


'지리산에 포함된 경관 중 일부분이 섬진청류.'

.................심진강의 견지 낚시.................
섬진강은 견지낚시가 12 월에도 한창인 곳.

견지낚시는 보통 11월 하순 경이면 마감한다.  
그러나, 섬진강은 타 견지낚시터와 분명 다르다.

 

월동을 앞둔 통통한 누치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견지 낚시꾼을 유혹하듯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강 한가운데 서서 누치를 잡는 맛.

 섬진강에서만 볼 수 있는 강태공들의 견지낚시 모습.
원래, 견지낚시는 한 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피서법

'전남 구례 화개장터를 거쳐 다압 여울의 섬진강.'

이곳은 여울 폭이 좁아 견지낚시 하기에 제격인 낚시터.
물속에서 낚시줄을 감고 풀기를 반복하면 입질하는 누치.
낚시줄이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팽팽해지며 "우투투툭."


아침 햇살을 받아 허공에서 반짝이는, 누런 은빛 누치

손끝으로 느껴지는 쾌감은 말로 표현못할 견지낚시 참맛.
입질 뜸한 오후엔 꽁꽁 언 몸을 녹여주는 민물게 매운탕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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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동물의 왕국이었던 섬진강

오늘날에는 강태공들의 천국.,섬진강. 
섬진강가에서 사냥하며 살았을 옛 조상.


섬진강 일대에서 옷도 입지 않고 야생동물과 어울려 살았을 듯.
섬진강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자연 그대로 모습이 살아있는 강.
우리 말 뜻이 '뚝 나루' 섬진(蟾津)에는 <섬진강 전설>이 담겨 있다.

....................................섬진강 전설 -1......................................
어느 해 여름홍수로 범람한 강물에 떠내려가는 두꺼비를 구한 처녀.
불쌍히 여겨 그 두꺼비를 집으로 데려와 아침 저녁 밥을 먹여 키웠다.
처녀는 두꺼비를 기르고 보살피며 정이 들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또 다시 홍수로 온 동네가 떠내려 간 참변.
강북으로 건너야 살 수 있는데, 급류를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이 때 두꺼비가 처녀를 등에 업고 급류를 헤치고 건너가기 시작.

두꺼비는 처녀를 업어 건넌 후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 가 죽었다.
처녀는 슬픔에 젖어 그 나루를 '두꺼비 나루'라 하여 유래된..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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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전설 -2..............................................
섬진강은 모래가 많아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 두치강.
고려 우왕 11년(1385년) 무렵엔 왜구가 섬진강을 오르며 침입해 오자
수십만마리 두꺼비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 갔다는 전설
이때부터 '두꺼비가 사는 섬' 섬(蟾)자를 붙혀 섬진강이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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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전설 -1, 2 >를 보면 두꺼비가 등장한다.
두꺼비는 중국 3대 명절인 중추절의 전설에 등장.
달나라 월궁에 살던 달선녀가 두꺼비로 변한 전설.

.....................전설 속 두꺼비의 유래.........................
그 달선녀 항아의 남편은 중국의 기근을 면하게 한 인물
당시 열개 태양 중 9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린 향아의 남편.
그러나, 항아는 포악한 남편을 버리고 달나라로 도망 간다.
하여, 천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달선녀 항아는 두꺼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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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황해가 저지대일 무렵에 그곳에 살던 민족들.
섬진강은 그 저지대까지 흘러내린 큰 강이었을 듯.
하여, 저지대 민족에게는 두꺼비가 달선녀의 상징. 

대홍수를 피해 중국 고지대로 이동한 저지대 민족.
저지대 민족이 이룩한 중국의 고대 왕조.,하, 은, 주. 
특히, 대홍수를 잘 다스려 하 왕조를 다스린 우씨 민족.

하 왕조는 기원전 1600 년 경에 고대중국을 지배.

서해 일부 저지대 민족들은 섬진강으로 올라왔을 듯.
하여, 섬진강 두꺼비는 중국 중추절의 전설과 일맥상통.
섬진강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유물과 북경 유물도 일치.

출토된 유물들을 비교하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즉, 서해 저지대는 현재 사라진 고대문명의 발상지 아닐까?
제주도 낙동강 일대의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곡성군 섬진강 가에서 발굴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2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약 오육십 만년 전부터 2만 년 전까지가., 구석기 시대.
한반도의 인류 역사는 중국 북경처럼 5~60 만년 전 경.

인류의 역사는 300만년 전이지만, 서서 걷기는 5~60 만년 전.
불과 돌 도끼를 사용한 구석기시대 직립원인을 인간이라 한다.
구석기시대에는 화산에서 처음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힌 듯.

2500만년 전 중국 한반도 일본은 하나의 육지로 연결.
신석기시대인 2만년전 한반도와 일본은 연결된 빙하지대.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자 차츰 해수면이 높아졌다.


제 4 빙하기에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은 하나의 육지.

몽골리안 후예이고 아시아 풍습과 문화를 갖고 있는 인디언.
하와이에 사는 퉁가족은 한반도와 언어 음식 풍습까지도 유사.


제 4 빙하기 말 지구 상에서 민족 대이동이 있었던듯 싶다.
섬진강이 지금의 강변 모습를 드러낸 시기는., 약 6천년 전.
거대한 빙하들이 녹아 흐르며 패여나간 흔적이 섬진강인 것.

구석기 시대에는 집단생활보다는 독립된 생활을 했다면,
신석기시대에는 주변지역과 문화를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

섬진강 일대 청동기 시대 유물은 동서 해안지역 문화의 복합.
이 시기 주거 흔적을 보면 대가족에서 소가족 제도로 변한 듯.
씨족 모계사회에서 차츰 가장 중심의 부족사회로서 발전한 듯.

신석기시대 특징은 토속신앙의 등장과 여성이 중심인 모계사회.
모계사회는 삼국시대에도 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만큼 지속된 듯.
지리산 천왕성모의 역사적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 이전에 마한과 변한에 속했던 영역. 
백제의 영역에 언제 편입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섬진강 일대
한강 유역 백제가 4세기 근초고왕 때 남해안까지 영역을 확대.


무령왕을 거쳐 무왕 때 섬진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
그 후 백제는 의자왕의 실정으로 나당연합군에게 멸망.
부여 낙화암에서 3천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지는 전설.

신라의 삼국통일로  완산주는 무진주에 소속.
신라 왕권이 무너지자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

견훤은 무진주에서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


후백제 영역에 속하게 된..섬진강 지역.
원래, 삼국시대 전부터 역사적인 격전지.


반만년 유구한 단군 역사와 함께 소리없이 흘러 온 섬진강.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발원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강.
길이 212.3㎞. 유역 면적 4896.5㎢. 한국에서 아홉번 째 긴 강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경계선.
경상도와 전라도를 싫던 좋던 지리적으로 분활, 갈라 놓은 섬진강.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부터 고운 모래사장 하천 가이 펼쳐진다.

 

65년 운암제 아래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되어 유역 변경식 발전.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농업용수 공급 및 광양만에 제철소 가동.
지리산을 감싸고 흐르는 섬진강은 인간 역사를 말없이 대변하는 듯.

섬진강 발원지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봉황산 상추막이골.
섬진강은 진안, 임실, 순창, 남원, 곡성 등의 물줄기가 모여 흐른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 본격적인 위용을 갖춘뒤,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오백리 물길중 가장 깊고 넓은 화개나루
여기서부터 경남과 전남의 경계를 이루며 광양군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남한 5대 강이고, 진안 마이산 & 장수 팔공산 발원.
곡성 압록 화순 보성을 끼고 흐르는 보성강과 합류
섬진강은 승주,구례, 광양, 하동을 지나 남해로 간다.

이른 봄 바다로부터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황어
섬진강 본류 뿐만 아니라 화개천, 연곡천에서 산란
그 알은 섬진강에 서식하는 어류들에게 먹이가 된다.


그곳 섬진강 물고기는 다시 수달 및 야생동물의 먹이.
옛날엔 그 야생동물들이 지리산의 숲을 건강하게 했다.

현재, 섬진강 하류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에는 은어와 참게가 유명.
섬진강 일대는 변한 가락국 철기문화 및 백제 역사가 꽃핀 곳이다.
섬진청류를 따라 흘러온 인간역사 고대문명의 숨결을 들춰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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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인간역사는 신석기 시대부터로 알려져왔다.
전남 곡성군 제월리 3구 1009 번지 구석기 유적 발견
하여, 신 구석기시대까지 인간역사 흔적을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구석기시대보다 넓은 지역에 거주 유적
주변지역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생활한 흔적으로 보인다.

서해안과 동해안 문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들.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는 주거지가 점차 좁아지는 것이다.
이는 대가족제도에서 점점 소가족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초기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의 영역에 속했다.
섬진강 유역이 언제 백제 영역에 편입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강유역 백제가 4세기 근초고왕 때 섬진강까지 세력을 확장.

무령왕 때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 무왕 때 섬진강 유역 전체
그 후 백제 의자왕과 귀족들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
통일신라시대 섬진강 유역은 완산주에서 무진주로 속하게 된다.

신라 말 견훤이 무진주에서 시작해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
무진주 관내에 있던 전라도도 후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간 치열한 접경 지역.
후삼국 시대에는 견훤의 후백제가 신라와 고려를 상대로 접전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 섬진강 유역.
중앙 정부와 거리가 멀어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듯.
남원을 제외한 대부분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나 속군

그만큼 중앙정부 통제에서 벗어난나 지방 토착세력의 영역.
고려말 섬진강 유역은 왜구 침입의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

왜구의 약탈행위는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중 남서 해안의 곡창지대가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으며,
곡창지대권 조운의 통로인 서해안 지역이 중요한 약탈의 대상지.
하여, 섬진강 유역은 남서 해안으로 침입한 왜구에게 극심한 피해


<이조 시대>

섬진강 유역은 군사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대.
이 강의 중 하류 유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
고려때는 해로를 통해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지역

임진왜란 중에도 섬진강 유역은 국가의 중흥기지
호남지방의 보전여부는 섬진강 연안 방어에서 좌우.
임진년 6월 하순 임실 운암계곡 전투가 바로 그 사례.

이 전투는 양대박 휘하의 남원 의병이 거둔 승전이자
임진왜란 극복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었던 일전.
정유재란은 일본의 전라도 침략이 목적이었던 전란이다.
하여, 왜적으로부터 호남지방 전역이 철저히 유린되었다.

일본의 임진왜란 제1차 침략 패인은 호남 의병과 수군 때문
이로 인해 특히 섬진강 유역 호남지방의 왜군 만행이 심했다.
충무공은 퇴각하는 왜함대를 바다에 수몰시키며 나라를 구한다.

이조후기는 다른 삼남지방과 함께 1862년부터 농민항쟁
섬진강 유역 대표적 농민항쟁으로 순천과 광양 농민항쟁
그밖에 진안, 장수, 임실, 남원, 운봉, 구례, 옥과, 곡성
섬진강 유역의 거의 모든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수령과 아전들의 부정과 탐욕에 맞서 투쟁했다.

<현대기>

구한말 양반 지배체제의 모순이 극대화되며 민란이 빈발
밖으로는 국제 열강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때이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 물결은 섬진강 유역에도 거세게 일었다.
임실에서 하동의 화개에 이르기까지 호남전역이 농민군의 영역

그중에서도 남원과 순천·광양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대표적.
농민군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 설치
전라좌도를 통치했고 김개남의 측근 김인배는 순천에 영호도회소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섬진강 유역에서도 반일 의병전쟁이 전개.

1870년 후반 이후 약 2년 동안 전쟁과 다름없는 의병투쟁
전라도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은 섬진강 유역이었다.
기미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에 번졌다.

섬진강 유역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조직을 통해 서울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진안, 장수, 임실, 남원, 구례, 순천, 광양, 여수로 전달
만세시위는 섬진강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올수록 더욱 거세게 퍼졌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되었지만, 38선으로 남북 분단
섬진강 유역은 분단으로 인한 좌우 갈등이 격심한 지역.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 반란사건으로 극에 달하였다.

여순사건은 여수에 위치한 14연대 장병들이
제주도 4.3 항쟁 진압을 거부해 일어난 폭동.
여기에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지역민들이 합세
이후 섬진강 유역은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거점.

빨치산의 지리산 유격지구는 남한지구 유격대의 총 본산
남로당의 거물인 이현상이 관할하면서 북으로 무주 덕유산,
남으로 광양 백운산을 연결해 활동하다가 1953년 이현상 사살.
화개장터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되고 그 재는 섬진강에 뿌려졌다.

섬진강은 우리나라 민족의 애환이 가득 담겨진 역사의 현장.
그 물길 닫는 곳마다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현장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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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한 우리나라 5대 강 중 하나
전북 전남 경남 3도 12개 군 유역을 거쳐 500리 물결
광양만을 통해 여수 남해로 흘러나가는 전남 최대의 강

섬진청류는 지리산의 10 경 중에 하나로서 손꼽힌다.
지리산 자락을 서쪽에서 휘감고 남으로 흐르는 섬진강.
전북 진안에서 발원, 곡성 지나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

구례를 거쳐 하동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지고, 하동 송림
그리고 나서 남해 바다로 흘러 내려가는 550 리 섬진청류.
섬진청류는 현재 지리산 영역이 아니지만 지리산의 제 4 경.

섬진강은 광양 여수와 남쪽 섬들 사이로 빠져 남해로 간다.
남해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바다로서 평균수심이 101m 이다.
진도 서쪽과 제주도 서쪽을 연결하는 선으로 황해와 구분하고,
제주 동쪽 일본 규슈 고토 열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동해와 구분.

한반도와 일본은 이곳에서 대륙붕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빙하기 이전 한반도와 일본은 연결된 육지의 흔적.
여수에서 떠나는 한려수도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뱃길.

'지질학적으로 빙하기에 섬진강의 하구는 대마도.'

대마도는 척박한 자연환경 탓에 옛부터 해적들이 본거지.
한반도와 일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대마도주가 다스렸다.
즉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한반도 및 왜와는 별개의 자치구역.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는 한반도와 등돌리고 일본으로 돌아섰다.

'대마도와 이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세종대왕 때 대마도 정벌의 원한 탓만은 아닌듯.
임진왜란이 끝난 후 한일간에 조선통신사가 왕래.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 무역 교섭의 중개상 역활.
그 과정에서 대마도는 한반도와 등돌리고 왜에 밀착.

독도와 대마도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반도 영역.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반도와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
대마도는 거제도에서 40 km, 후쿠오카에서 80 km 거리.
대마도는 구석기시대에 섬진강 하구였던 곳으로 보인다.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제4 빙하기가 끝난 7천년전.
지금의 해안선은 7천년전 해안선과 거의 일치한다.
즉, 구석기 시대에는 한반도와 일본은 연결된 육지.

남해의 한려수도 많은 섬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려수도는 남해가 저지대일 때 모두 산봉우리였을 듯
이제는 저지대가 물속에 잠겨 산봉우리는 섬으로 변했다.

섬진강은 지리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품고 흐른다.
여수와 삼천포 앞바다의 사량도에서도 보이는 지리산.
한려수도의 다도해가 사량도와 어울어져 지리산과 같다.

마치, 바다에 뜬 지리산의 산맥 같은., 다도해.
사량도는 왜구들의 제 집을 드나들듯., 하던 섬.

사량도 지이산에는 근친상간 옥녀봉의 전설이 가슴 아프다.
광양은 포철 제 2공장이 있고 은장도와 김 양식장 명소이다.
철과 김을 좋아하는 일본인 탓에 왜침이 잦아 은장도가 유명.

섬진강은 이조 여인들의 애환이 가득 담긴 수난 현장.
섬진강은 한일 간 격전지이자 고대사회부터의 교역장소.
섬진강이 끝나는 광양만 여수 앞바다는 하멜의 탈출 경로.



 

 해변에 위치한 하멜호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1668년 발간된 네덜란드인 H.하멜 作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는

조선의 실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

 

네덜란드어(語) ·영역본(英譯本) ·

불역본(佛譯本) ·독역본(獨譯本)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 영국왕립협회 한국지부에서

'G.레드야드' 의 영역본 발간 《진단학보(震檀學報)》

 1∼3권에 이병도(李丙燾)씨가 영 ·불역본에서 번역 전재.

.......................줄거리......................

하멜이 탄 네덜란드 배 스페르웨르호(號)

1653년(효종 4) 1월에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바타비아, 7월 타이완에 이르고,

거기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8월 중순 제주도 부근에서 파선 조난을 당하였다.

선원 64명 중 28명 익사, 하멜 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

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간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유형

구걸 풍상을 겪으며 조선 팔도 여러 곳의 풍속 사정을 기록했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

교육 ·무역 등에 대하여 하멜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

하멜과 그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한 다음 해인 1654년 5월

한양에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

 

1666년 9월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타서 읍성(邑城)을 탈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귀국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존재를 유럽인에게 알렸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정 풍속 생활을 아는 데 귀한 사료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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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은 지리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품고 흐른다.
여수와 삼천포 앞바다의 사량도에서도 보이는 지리산.
한려수도의 다도해가 사량도와 어울어져 지리산과 같다.

마치, 바다에 뜬 지리산의 산맥 같은., 다도해.
사량도는 왜구들의 제 집을 드나들듯., 하던 섬.

사량도 지이산에는 근친상간 옥녀봉의 전설이 가슴 아프다.
광양은 포철 제 2공장이 있고 은장도와 김 양식장 명소이다.
철과 김을 좋아하는 일본인 탓에 왜침이 잦아 은장도가 유명.

섬진강은 이조 여인들의 애환이 가득 담긴 수난 현장.
섬진강은 한일 간 격전지이자 고대사회부터의 교역장소.
섬진강이 끝나는 광양만 여수 앞바다는 하멜의 탈출 경로. 


1653년 8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웨르호.
나가사키 항구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남제주에 표류
산방산 용머리 해안가에 닿은 64명 중 생존자는 36명

 



제주목사 이원진은 객사로 데려와 탕 한사발씩을 대접.
하멜 일행은 독약인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마셨단다.
이들은 광해군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초가에서 지냈다.

"양반이나 평민 할 것 없이 교육열(?)이 대단하다.

아이들은 밤낮없이 앉아서 글을 읽는다.

그렇게 어린 소년들이 현인(賢人)들의

책을 읽고 이해한다는 게 놀랍다.”

파란 눈 남만인(南蠻人)에게 17세기 이조는 신기했다.
이조 조정에서 통역관이 내려오자 하멜은 깜짝 놀랐다.
그는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얀 벨테브레(한국명 박연).
하멜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그의 얘기를 듣고 낙담.

"너희들이 새라면 몰라도

외국인은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지내다보면 정붙이고 살만한 나라다.”

이조 여자와 결혼해 남매를 둔 박연은 이미 반 이조인.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의 심문을 직접 받았고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북벌정책에 중요하게 쓰여질 계획.

그러나, 실제로는 잡역에 동원되거나 구경거리에 불과.
그러던 중, 하멜 일행이 청나라 사신에게 구명을 요청
이 외교적 사건 이후 이들에겐 고난의 유배생활이 시작.

하멜 일행은 전라좌수영에서 하루 170m의 새끼를 꼬았다.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13년 억류생활 끝에 일본으로 탈출
이때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한 하멜의 보고서가 '하멜표류기’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씌어진 '조선견문록’
'지리 상의 대발견'의 시기에 비상한 관심.
1년 뒤 프랑스판, 독어판, 영어판 속속 출간.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난 하멜은 독신이었다.
이조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연도별 기록...........
1653년 8월 16일 제주 표착
1653년 8월 21일 대정현 관아로 이송
1653년 8월 22일 제주목 관아로 이송

1653년 10월29일박연(벨테브레)와 면담
1654년 6월초 선박이용 제주항 출발
1654년 6월26일 한양도착

1656년 3월초 전라병영(강진)으로 이송
1663년 2월 생존자 22명을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1666년 9월3일 탈출.9월13일 일본 나카사키 도착

1667년 12월18일 나카사키 출발
1668년 7월 20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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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델란드 선원(?~1692.)
이조에 관한 서양인 최초 저술 '하멜 표류기.'

1653년(효종 4) 1월 배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
바다비아를 거쳐 타이완에 도착한 다음 그해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표류.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서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5월 한양 호송후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잡역에 종사.

그뒤 165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 여수 전라좌수영
그곳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했다.

1666년 9월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 거쳐 1668년 본국 귀환.
귀국 후 13년간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하멜 표류기'는 유럽인의 주목을 끌었던 책.

이것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책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 공동출연으로 세운 비.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에 하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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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에게 모험과 황금의 시대였던 17세기 중엽
그들에게 아시아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무역거점
늘 새로운 항해의 대상이고 개척의 대상이었던 아시아.

당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몇몇 국가들과 교역
일본도 그중 하나라 36명의 네델란드인들을 일본에 파견.
우선, 동인도 회사 지사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기로 결정

1633년 네델란드 탤슨항을 출발한 이들중 22세인 하멜.
이들은 일본의 나가사끼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
이들을 발견한 제주목사 이원진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실패

이 사실을 한양 조정에 알리고 조정에서는 통역관을 파견.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오기 22년전 왔던 네델란드인 박연
그 역시 네델란드를 출발 일본 동인도 지사로 가던중 표류.

결국 조국 네델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조에 귀화.
박연(벨테브레)은 이조 훈련도감에서 군사훈련을 담당
하멜일행은 박연을 통해 이조 임금에게 본국 송환을 요구

박연은 이조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박연은 왕(효종)에게 이 같은 사실을 자세히 보고
효종은 이들을 한양의 조정으로 불러 들여 만난다.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의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하멜은 한양으로 가면서 여수,순천 등을 들르게 된다.
표류기에 이조 지명을 네델란드식 발음으로 적고 있다.

드디어 한양에 도착한 이들은 효종 앞에 무릎 꿇고
박연의 통역을 통해 하멜 일행을 상대로 심문을 한다.

효종은 이들이 이조보다 작은 나라에서 왔고
수많은 상선이 있다는 말을 듣자 귀화를 종용.
병자호란 이후 추진해온 북벌정책에 쓰려한다.

북벌정책을 은밀히 추진해 온 효종.
이들이 지닌 신무기 제조기술을 활용
청나라 정벌의 꿈을 키워나가려고 한다.

효종은 이들에게 식량과 벼슬을 주고 군사 훈련에 참가시켰다.
또한 이들에게 이름도 지어 하사했는데 남북산, 남이안 등이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못한 남북산과 남이안
청나라 사신의 행렬로 뛰어드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이 돤다.
이조에 외국인을 두고 있음을 안 청 사신에게 뇌물로서 무마.

효종은 그 사건후 이들을 전라도로 유배시킨다.
이들이 유배지에서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한 듯.
그러나, 하멜표류기에는 이러한 기록 조차 없다.

이는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쓴 일지를 토대로
보상금을 더 많이 받아 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이조 탈출을 감행한 하멜일행.
그 일이 한반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킨 것일까?
그리고, 이조라는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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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그당시로 돌아가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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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 3월 여수 순천 남원으로 유배된 하멜 일행 탈출로.
섬진강이 끝나는 광양 남해 섬들은 하멜 일행이 떠돌던 곳.
유배된 후에도 효종의 배려로 매달 쌀 50근씩 배급 받았다.
그러나,그것만으로 모자라 좌수사의 허락을 받아 구걸로 연명.
닷새 장터를 떠돌며 서툰 말로 모험담 들려준 댓가로 옷감과 식량.

그렇게 모은 돈으로 어민으로부터 낡은 배 한척을 구입
여수 앞바다 섬들을 떠돌며 본격적으로 구걸하러 다녔다.
그들은 낡은 배를 수리해 장거리 항해에 알맞게 고쳐갔다.

그리고, 조류, 바람, 해안순시선, 항로, 등등 해양조건을 관찰
하멜 일행을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무렵 일본으로 탈출.
노를 젓는 돗단 배로 하루 반나절 만에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즉, 섬진강은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최단거리 항로의 들머리 깃점.


1653년8월 16일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호 표류기.
1666년 9월에 전라좌수영 소속의 하멜 이하 8인이 읍성을 탈출
나가사키 경유 1688년 7월 네덜란드에 귀국 13년간 이조 체험기

이조에 억류생활 중에18 명이 죽고 살아남은 16명중 8명이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화란에 무사귀국한 하멜 일행은 불과 6 명.
19세기 초반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조 입국 전에 읽던 참고서이다.

하멜의 일행들이 제주도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발생된 사건.
표류선에서 떠내려온 물건을 가져간 주민들이 관아에 붙잡혔다.
현감은 도둑도 아닌 주민을 도둑으로 몰아 곤장 30~40대를 명령

하멜이 주민들에게 포도주를 주자 신기해 하고 좋아했다는 기록.
그당시 200 년 앞선 서양문명을 처음 접한 주민들은 신기했던 듯.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본의 아니게 상륙해 억류생활을 하기 시작.

신임 목사가 새로 오자 표류인들을 각종 방법으로 구박하기 시작.
목사가 활쏘면 화살을 주워오게 하기, 밤새 할일없이 보초세우기.
곤장 맞다가 발가락이 빠진 광경을 직접 목격한 바 있는 화란인들.
표류인들은 마음대로 외출도 할 수 없었고 밤낮으로 감시를 받았다.

'압박과 멸시 속에 사느니, 죽음을 무릎쓰고 탈출을 시도.'

그러나, 표류인 6명은 주민의 배를 훔쳐 타고 도주하다 붙잡혔다.
그들은 관아로 압송되어 옥살이 하다가 각각 곤장 25 대를 맞았다.
여기서 화란인 6명은 마지막 생존자이며 여러 번 탈출 시도 끝 성공.

그 표류기에 강빈 옥사사건에 곧은 선비 김홍욱이 맞아 죽은 일.
남편을 살해한 여자나 주인을 살해한 노비가 고문 끝에 죽은 일.
이조시대에 옥살이하며 목격한 아전들의 비리까지 상세히 기록.

 

'당시 곤장은 무릎 아래까지 옷 벗기고 매를 치는 형벌.'

여인들도 옷 벗긴 채 형벌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듯.
이조에서는 재를 버리면 곤장 30대, 똥을 버리면 50 대.
하여, 집안 쓰레기를 버린 죄로 여자들이 곤욕을 치룬 듯.

"엉덩이와 허벅지를 교대로 내리쳐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매질.
고통을 못견뎌 형틀에 묶여 몸부림 끝에 엄지 발가락이 빠질 지경."

'하멜보다 26년 먼저 이조에 들어와 귀화한 화란인 <박연>.'

그가 통역했고 당시 이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직후
한창 국력이 곤궁할 때라 하멜 일행은 한반도에서 고생했을 듯.
하멜이 동인도 회사 상판이 있는 일본으로 보내달라 간청했다.

일단 일본으로 가면, 고국인 화란으로 돌아갈 길이 있기 때문.
효종은 하멜을 임진왜란 원수의 나라 일본에 보내줄 리 만무.

또 병자호란 이후 암암리에 북벌을 계획했기에 하멜 일행 억류.
하멜 일행으로부터 서양의 선진문명을 전수받으려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모르고 청나라 사신을 만나 일본에 보내달라던 하멜 일행.

그 죄를 물어 청나라 사신을 접할 수 없는 곳으로 하멜일행을 유배.
효종이 전남 장진에 유배시킨 하멜 일행은 그로부터 7 년후에 탈출.

박연과 하멜은 암스테르담에서 바타이유를 거쳐서
나가사키로 향하다 표류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멜 일행은 조선 체류 중 끊임없이 일본 행을 꿈꾼다.
결국 배를 구해 규슈의 히라도(平戶)를 거쳐 나카사키
일본은 하멜일행이 화란인 임을 알고 친절하게 대한다.
13년 간 억류한 이조와 단적으로 비교가 되는 조치였다.

이들이 나가사키에 당도했을 무렵 그곳엔 화란배 다섯척이 정박.
이들은 화란 상관(商館)에 도착해 지휘관 빌렘 볼거에게 안내된다.
그리하여 꼭 13년 28일 만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귀향하게 된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방을 향해 열려진 창구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 일본은 서양 문명에 눈뜬다.
1549년에는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가고시마(鹿兒島)에 첫발.

17세기 중엽 도쿠가와 바쿠후(德川 幕府)에 의하여 기독교 탄압정책.
주목할 것은 쇄국정책을 쓰면서도 서방과 해상무역을 통한 대화정치.
오직 장사만 하며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화란인들에게 일본 거주 허용

서양 의술, 천문, 지리, 생물, 지리학 다양한 근대 학문을 보급받는다.
이 무렵부터 쇄국정책만 일삼던 이조 국력은 쇄퇴하고 일본은 부흥한다.
일본은 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 도약하고 이조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하멜 표류기는 그당시 이조의 역사 풍습 문화 사상을 알수 있는 기록.
한반도에 이조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서양에 처음 알린 기록이다.

하여, 훗날 한반도는 이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이조 말기부터 구한말 천주교 박해로 하멜 표류기는 선교사의 지침서.
이조는 천주교 신도까지 목에 칼을 씌우고 곤장을 쳐서 박해를 했던 탓.

이조는 하멜 일행 억류를 통해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잘못을 범했다.
하멜 일행의 표류 사건은 이조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
당시 200년 앞선 서구문명과 교류했으면 한반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여수는 일본의 나가사키 못지 않은 국제항구로 잠재적 가치가 있다.
아울러, 섬진강과 지리산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도 있는 곳.
화개장터 일대는 국제 교역의 중심 상권으로 부상 가능성이 있는 곳.

'한반도는 실크 로드 동아시아 끝 지점에 위치.'

동북 아시아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천혜의 부동항만 갖춘 한반도.
이조는 그 사건 이후 일관된 폐쇄정책으로 서방 국가에게 소외된다.
결국,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외길 수순을 거쳐 일본에게 합병된다.

신라시대까지 이어진 해상왕국의 패권은 이조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한반도의 고대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도 왜로 넘어간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교역 중심지였던 화개장터 역시 쇠퇘하기 시작

 

 

 

섬진강이 남해와 만나는 광양만

여수 앞바다는 하멜의 탈출 경로.


                                                                                              여수 하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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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기록 중에서

탈출 직전까지 여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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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초 지방관이 우리에게 잘 대해준 것에 감사

작별을 고한뒤, 다른 곳으로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순천 여수좌수영으로 갔던 사람들은 같은 길을 선택.

 

4일후 순천에 도착해서 정부소유의 창고에서 하루밤

다음날 순천에 남게될 4 동료와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같은날 저녁에 여수 좌수영에 도착해서 지방관에게 인계.

 

갖춰진 것 거의 없는 집에 머무르게 했고 쌀배급.

그는 우리에게 친절했고 성격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가 도착하고 이틀 뒤 떠났다.

 

3일뒤 새 지방관이 도착했는데 그는 매우 난폭했다.

여름엔 뙤약볕, 겨울엔 비 진눈깨비 속에 세워두었다.

겨울이 거의 다가오자 우리는 새옷이 필요했다

여섯명은 일할 동안 나머지 여섯명은 외출을 요청.

우리는 구걸하거나 나무를 팔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공식 허용되지 않지만 묵인되었다.

이런 생활이 1664년까지 지속되었고

지방관이 더 높은 관직으로 가게되자

그 후임이 왔는데 훨씬 더 너그러웠다.

그는 즉시 우리들을 노동 임무에서 덜어 주었다.

우리들은 원래 약속한데로 한달에 두번 상황보고.

게다가 어디를 갈때마다 매번 지방관의 집무실에 보고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마침내 비참한 삶에서 벗어났기에 신에게 감사했다.

 

후임자는 우리를 자주 집으로 초대

향료와 음료로 따뜻한 대접을 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조국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를 사려고 했지만

 벌받게 될 것 같아 아무도 우리에게 배를 팔지 않으려 했다.

 

그 해말 우리는 잠시 하늘에서 두개의 혜성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남동쪽에서 거의 두달동안 볼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사람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왔다.

 

 전함이 태세를 갖추고 항만의 경계가 강화 되어

모든 군사기지에는 여분의 식량과 군수품이 지급

기병 보병은 매일 훈련, 어떤 램프도 밝힐 수 없었다.

 

이런 두려움은 청나라 침입을 받으면서 일기 시작했는데

일본과의 전쟁 초기처럼 청나라의 침입 때도 유사한 징조

많은 조선인들은 이런 천체의 출현을 나쁜 징조인지 물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도 이런 유사한 것들이 나타나면

재앙 전쟁 홍수 전염병이 돌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경계 심한 상태에서 배를 구하기란 더욱 힘들었다.

 

결국 우리 모두 이국에 머무르는 인질이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행복해 해야했다. 

 

한동안 지방관이 차례 차례 뒤를 이었다.

그들중 몇은 우리를 매우 친절히 대했고

또 다른 몇은 특권에 대해 탐탁치 않은 시각

 

한 지방관은 하루종일 우리에게 쌀을 밟게했고

어떤 이는 새끼 100길(1길=1.83m)을 꼬게 했다.

 

우리는 항의했고 왕에게 간청도 했다.

그러나, 암흑 같은 시간은 끝날줄 몰랐다.

 

매일 행해진 함대 훈련도중 부주의로

화약통 폭발로 승선했던 5명이 숨졌다.

 

지방관은 이 일을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정탐꾼에 의해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지방관은 체포되어 조정으로 압송

 

불명예스러운 사임과 곤장 90대에 종신 유배를 당했다.

새 지방관이 새끼를 꼬게 했을때 우리는 기적을 바랬으나

눈앞에 닥친 일은 어쩔 수 없었고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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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당나라에 건너가 장교가 되었으며,
해적으로부터 신라인을 보호하려고
신라시대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한다.

장보고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해적을 소탕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훗날 신라 왕위계승권 분쟁에 가담하였으며,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된다.
신라를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성장시킨 장보고.

'그는 신라인 일까?'
'당나라 신하 일까?'

일본에서도 '해신'으로 존경받는 장보고.
한반도 지리산 일대 사찰 번영에 크게 기여.
장보고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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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 반도에 남아있는 옛 신라인들의 발자취.
오늘날까지 제2, 3 신라방을 건설한 신라인 후손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신라를 떠나 그곳에 정착한걸까?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2차 답사’

재단법인 장보고 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 공동 주최.
9세기 중국 내 신라인 이민사회 자취를 돌아본 여행.
조국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신라인에 대한 의문.

인천항을 출발한 여객선은 14시간 만에 산동반도에 도착.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바닷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배에서 내려 룽청(榮成)에 자리잡은 항구 석도진로 갔다.

9세기경 신라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산동반도 끝이다.
석도진 츠샨(赤山)에는 820년 장보고가 창건한.. 법화원.
당시 신라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공간이 법화원이다.

마치, 재미동포 사회에서 교회가 중심 역할을 하는 듯.

수백명 신도와 승려가 모두 신라인이었다는 기록
844년 당나라 불교탄압정책에 의해 폐쇄된 법화원
1988년과 2000년 두차례에 걸쳐 룽청시 당국이 복원.

법화원은 절에 속한 농토 수확량만 한해 500석 규모.
산둥성 환경을 고려할 때 밭 13만평에 해당하는 규모
산동반도 사람은 화 잘내고 흥분 잘하지만 인정이 많다.

우리나라에 귀화한 한족 대부분 산동성 출신이며
우리나라 화교의 거의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다.

고조선 문화로 일컬어지는 고인돌은 산동성에도 많다.
동이족 강태공이 신교를 전해 뿌리 내린 제나라도 산동.
우리나라 신선설화가 중국에서 발원한 곳도 바로 제나라.

신라방과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이 정착한 곳도 산동성.

만주족이 청을 건설 후 한족 출입 금지령을 내린 산동.
그래서 만주와 요동에 사는 중국인은 산동인과 만주인.
그리고, 몽골인과 조선인이 몰려 사는 곳 또한 산동성.

산동성은 중국을 호령했던 고조선 후손들의 영역.

산동반도 신라인들이 조국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흉년과 기근을 피해 당나라로 이주했던 유민들.
신라 왕실의 권력투쟁 와중에 망명을 선택한 유민들.
신라 귀족사회 신분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던 유민들.

8세기 말 남해안 완도 근처에서 출생한 천민 장보고

'장'이라는 성은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다.
장보고처럼 뿌리 없는 유민이 스스로 붙인 성씨.
뛰어난 리더십과 무예실력으로도 넘지못한 골품제

장보고는 812년 당나라 무령군 군중 소장이 된다.
그가 승승장구한 관직을 접고 신라로 귀국한 828년.
황해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건설하겠다는 포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
조공 무역을 자유 무역으로 바꾸면서 해상왕으로 등극
중국 한반도 일본을 잇는 무역 조선 금융 사업을 전개

오늘날 종합무역상사 경영자 위치로 성장한 장보고.
신라 정권의 막후 실력자 자리에 오르는 데는 성공.
그러나, 천민신분 한계로 권력다툼에 밀려 841년 암살.

산동반도에서는 석도진, 유산포, 해주, 영파 등,
일본에서는 규슈의 하카다 우사가 신라인 거주지.

옌타이(煙臺)는 9세기 산둥성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옌타이 주요 항구 등주의 포구에는 7세기부터 신라방.
신라 상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신라관 관청도 설치한 곳.

신라관이 오늘날 대사관 무역대표부 기능을 겸한 곳.

장보고 시대 전부터 등주항은 고구려 백제 유민 마을
고구려의 장수 이정기가 10만 대군을 거느린 자치구.
중국 중앙 정부와 맞써 사운 거점이 바로 이 도시였다.

781년 병사한 이정기 잔여 세력을 정벌한 무령군 부대.
장보고가 산동반도에 신라방을 건설하는 밑바탕 세력들.
장보고가 살해되자 청해진과 산둥성 신라방도 서서히 붕괴

장보고라는 구심점과 법화원 구심점을 잃어버린 신라인들.
당나라에 동화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귀족층 일부는 신라로 돌아갔지만 천민층은 뿔뿔이 흩어졌다.

산동성 제일의 무역항 칭다오!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거리와 높이 솟은 빌딩들,
다국적기업의 간판들과 할인점들이 가득한 국제도시.
이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만 200 개, 상주 한국인 만명

불야성 나이트클럽 경복궁 등 곳곳에 우리 말 간판
인천과 칭다오를 오가는 여객선에는 보따리 무역상들.
일주일에 2번 이상 중국을 왕래한다는 상인들로 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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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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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 지방에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 법화원.
청해진(완도), 제주에도 장보고가 건립한 법화사.
법화사는 장보고 당시 유행한 법화경 경전에서 유래

법화경은 해상무역 선원들이 해상 안녕을 염원한 경전.
산동 법화사 터는 60여평의 목조건물 터와 3,000평 연못
신라 말기 화폐와 기와로 보이는 유물들도 일부 출토된 곳.

장보고가 세운 사찰들은 당시 국제무역사무소 역할도 겸했다.
완도와 제주의 법화사, 산둥의 법화원은 삼각 해상무역을 구축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다.

장보고가 창건한 제주 서귀포시 법화사.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쉼 없이 전해지는 곳.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선승과 사찰들이 몰려든 것.

신라 말 서남지역에만 11개의 선종 사찰이 있었다.
이 지역은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곳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선승과 사찰들이 몰려든 것.

당시 서남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해로를 통해 경주로 운반
해적들의 발호가 근심거리였는데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된 후
해적들의 활동이 저지되면서 안정적인 곡물 공급이 가능해졌다.

장보고는 해적들의 약탈대상인 서남지역 선종 사찰들을 보호
장보고의 도움으로 번창한 선종은 오늘날 최대 종단인 조계종

장보고가 세운 사찰들의 이름은 모두 ‘법화사'.
당시 ‘법화경’이라는 경전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
법화경은 해상무역 선원의 안녕을 비는데 많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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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846(문성왕 8)는 신라 하대 호족이자 대상.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
당에서 귀국후 828년(흥덕왕 3) 신라의 청해진 대사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신라왕 허락을 받아 군사 1만으로 청해진(완도) 건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 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
청해진 건설후 해적을 소탕해 서남해안 해상권 장악
당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 활동을 주도하기 시작.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
해상무역을 통해 해상왕국 형성
당나라와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
일본은 무역은 허용했고, 그 세력은 국제적으로 번성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산동반도에 법화원을 건립.
청해진과 당나라의 연락처 구실도 했다.

그는 차츰 신라 왕권 권력 쟁탈전에도 개입한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
청해진으로 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은 군사를 모집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 군사 5,000명은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
민애왕을 살해후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 뒤를 이은 문성왕은 그를 진해장군으로 책봉.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의 영향력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 왕이 장보고의 딸과 혼인하려 하자
신라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그혼사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 부하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한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 이후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김제)으로 이전




청해진(淸海鎭)




828년(흥덕왕 3) 현재, 완도의 통일신라 군진(軍鎭).
중국 일본과 신라를 잇는 해상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
851년(문성왕 13)에 철폐될 때까지 해군기지 무역거점.

장보고가 우리나라 서남해안 해적을 소탕할 목적으로
흥덕왕에게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해 설치.
그당시 청해진 1만 군사는 장보고 개인이 모집했을 듯.

장보고 직함은 다른 군진 책임자와 달리.,대사(大使)

그는 청해진을 근거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
중국에 견당매물사,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는 등
해상무역을 전개했던 청해진은 장보고의 해상왕국

일본 승려 엔닌(円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최훈(崔薰)이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를 지냈다는 기록
청해진은 신라 지배체제 외곽에 위치한 일종의 해상왕국
장보고는 부와 군사력을 배경으로 통일신라 권력구도에 관여

왕위계승전에 패한 김우징과 김양을 받아들인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문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 차비(次妃)로 들이려 한 시도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중앙정부에 반기
846년(신무왕 8)에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이창진(李昌珍) 등의 잔여세력에 의해
일본에 무역선을 보내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나
851년 청해진을 파하고 주민은 벽골군으로 이주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청해진은 완도에서 약 170m 정도 떨어진 장도에 설치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는 목책 흔적
사적 제308호 '장도 청해진 유적'으로 지정.

 

 

 

완도.

 

 

 

윤선도의 보길도 및 <서편제> 촬영지 청산도 등등
200개 섬을 거느린 완도는 신라때 해상무역 중심지
장보고 암살후 공도령 탓에 500년간 무인도였던 섬.

 

제주행 카페리호가 매일 하루에 1회 운행하는 관광지.
완도에서 귀경길에 이조 정통정원 담양 소쇄원도 볼거리 
상황봉 종주산행 4시간 후 귀경하긴 너무 아쉬운 관광명소.

 

'그렇다면, 완도에는 어떠한 볼거리가 있을까?'

 

상황봉 산행을 거부해도 좋을 만큼 명소가 수두룩.
우선, '해신' 세트장은 완도읍 불목리와 소세포 2곳.
약 3만 평에 신라촌을 재현한 완도읍 군외면 불목리

본영, 객사, 민가, 중국 거리, 설평상단, 이도현 상단
(무역품 거래 및 상인숙소)등 40 여동의 기와집과 수로
세트장은 타임 머신을 타고 그당시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

 

완도읍 대신리 소세포 세트장은

약 1만 6천 여평 청해진 포구마을


크고 작은 선박 6척이 바다에 둥둥 떠 있고, 포구엔 저잣거리,
군영 막사, 망루 등 청해진 본영과 신라 왕궁과 바다풍경 감상.
국내 최초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세트장의 볼거리가 다양하다.

 

'완도대교 ~ 정도리 구계등 16Km' 77번 서부해안도로.
한 폭의 수채화가 연상될 정도로 절묘한 바다 풍경을 연출.
완도대교를 건너 좌측 13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장좌리 마을

 

그 앞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넙적한 섬.


당나라와 왜를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한 청해진 본부였던 '장도'.
1200년전 당시 외성과 내성이 있었던 곳이고 남쪽에 나무 울타리
망루나 토성에 올라서면 점점이 찍힌 다도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물길이 열려 장좌리 마을로 걸어 들어갈 수 있으며,
파래에 물든 초록빛 열린 갯벌을 거니는 것도 이색적인 체험일 듯.
완도의 또다른 볼거리 '구계등'은 9개의 계단을 이룬 비탈이란 뜻.

 

수억년 세월을 파도에 씻기고 깍여., 공룡알 같은 갯돌.


태양이 해변을 비추면 진회색이었다가 바닷물에 젖으면 검푸 른 빛
특히 석양빛에 반짝이는 조약돌은 바다에서 옥을 보는 듯 아름답다.
구계등 뒷편에는 참나무, 떡갈나무 등 40여종의 상록수 숲이 방풍림

 

해질녘 화흥포구는 까닭모를 아련한 감동을 주는 곳이다.

백일도와 흑일도 바다의 밭고랑인 부포행렬 위로 붉은 노을
고단한 뱃일을 마치고 포구로 향하는 작은 배들이 그림같다.

 

완도에서 보길도 가는 배는 화흥포에서 출발.
화흥포 항 입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촌박물관
완도 어촌 민속 전시관이 관람객을 손짓하고 있다.

 

완도의 지붕인 상황봉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완도수목원
국내 유일의 난대 수목원으로 자연그대로의 원시림을 간직.
동백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등의 상록 활엽수

 

완도에서 청산도로 가는 45분간 뱃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보석 같이 박혀 있는 섬들에 흠뻑 빠져들면 어느덧 배는 청산도

 

도정항에서 섬을 일주하는 버스를 타는 것도 좋지만
영화 서편제의 송화와 동호처럼 당리까지는 산책코스.

 

송림 속 당집이 외롭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곳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명장면을 연출한 당리 황토길
한 여인과 두 남자의 운명을 진도아리랑 가락에 실은 곳.

 

굽이치는 황톳길과 돌담사이 청보리밭은 남도의 정취
당집 아래 자리잡고 있는 초분도 남도 외딴섬의 진풍경
 
읍리 고인돌과 하마비를 지나 고갯길을 넘으면 구들장논.
쌀 한톨 더 얻으려고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부어만든 논.

 

활처럼 휘어진 진산해수욕장을 지나면 노적봉 전망대.
일출이 아름답고 경관이 좋아 사진 작가들이 찾는 곳

 

울창한 해송에 1.2km 고운 모래가 깔린 지리 해수욕장

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완만해 가족 여행지로 적합하다.
근처 갯바위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면.. 묵직한 손 맛.

 

'이쯤되면,  

산행할까?

관광 할까?

고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