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1552(명종 7)~1608(선조 41).
조선의 제14대 왕(1567~1608 재위).
재위기간에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부터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에 걸친
전쟁이 발발했다.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
첫 왕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
[사림정치의 확립]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
선조가 즉위할 무렵은 사림이 정계를 주도했던 시기였다.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 인재들을 널리 등용했다.
선조는 이황 이이 성혼 석학들과 토론할 수준의 학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간 노수신(魯守愼)·유희춘(柳希春)을 석방
훈신세력인 남곤(南袞)·윤원형(尹元衡) 등의 관작을 삭탈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 등을 천거
조식 성운(成運)을 등용, 유교사상 확립을 힘썼다.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1585년 교정청을 설치해 훈해(訓解)를 교정.
1588년 사서삼경
음석언해 소학언해를 간행.
한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문제점을 해결했다.
명나라 태조실록 대명회전에 잘못된 기록 수정.
이성계가 고려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던 내용.
[동서분당과 붕당정치 성립]
선조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와 후배(後輩)가 대립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
파.
심의겸은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 몰락후 진출한 후배들이 구세력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동인의 주요인물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
서인 세력은 동인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며 동인이 집권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그뒤 선조 때 정국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남인이 주도
이항복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했고
대외적으로는 여진족과 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회령지방
여진족 반란으로 경원부가 함락,
경기감사 정언신을 도순찰사로 삼아 이를 진압했다.
1587년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이순신과 이경록이 격퇴
이듬해 북병사 이일을 시켜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소탕.
1590년 황윤길 김성일 허성을 파견해
일본 동태 파악.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했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멀지 않아 침입할 것이라 보고
동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의 사신.
"1년 후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
이조 조정은 놀라 경상도 전라도 연안에 성을 구축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
선조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했다.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 그해 12월에 4만 5천명 지원군.
그사이 이순신 권율이 이끈 관군이 왜군과 싸워
승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
천인이 신분 상승할 제도를 마련해 전국민이 적극 전쟁에 참여
1593년 4월 왜군이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맹활약으로 왜군의 침략을 물리친다.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마감.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과 전후 수습책]
7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 1603년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
또한 전쟁중 명군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을 확대.
납속책 실시로 부유한 상민과 천민의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하여, 이조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왕자 옹주
23명에게 예빈사 사찰의 재산을 환수.
어전(漁箭) 염분(鹽盆) 시전(柴田)으로 궁방전 건립.
1604년 호성 선무 정난
공신 등을 녹훈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본 통신사로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강화조약.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선조는 주자학 조예가 깊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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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과연 무능했던 군왕이었을까?'
명나라와의 원만한 외교정책을 펼쳤던 선조
동인 서인 권신들 간 붕당정치를 조율한 선조
남인 북인으로 나눠진 권신들을
잘 중재한 선조.
인재와 용장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한 용병술
임진왜란 후 일본과 통신사를 교류한 외교술.
바닥난 국가
재정으로도 임진왜란 때 승리한 점.
'통치자로서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던 군왕.'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세도 권신세력에 밀려 쫓겨난 연산군.
연산군을 쫓아낸 권신들이 선출한 중종.
선조
역시 권신 세력에 의해 선출된 군왕.
권신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책봉한 세자.
왕권과 권신세력 간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
이조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점점 약해진다.
집권층 권신 세력이 오히려
왕권을 능가한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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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의병대장 김덕령은 큰 공을 세우고도 사형.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병을 해산후, 산속에 숨어 화를 모면,
영호남
지방에서는 서로 의병이 되지 말라고 경계할 정도였다.
정유재란 말엽 의병대장과 영웅들은 몸을 사리기에 바빴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낙동강 수로에 말뚝박기 전술로 유명하다.
왜군 보급수로에서 수심이 얕은 곳에 말뚝 박아 왜수송선 기습.
왜군 배가 움직이지 못할 때 기습해 왜군을 섬멸.
권율장군 역시 선조에게 늘 충성심을 보여 몸사리기 바빴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도 툭하면 양위를 하겠다면서도 권력욕.
선조는 한양 도성과 종묘사직을 버리고 임진강 넘어 평양 피난.
선조 권력을 위협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던진 백성들.
"세자를 왕위로 올리시고, 상왕으로 물러나십시오."
분조(分朝)를
이끌고 나간 광해군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자
선조는 툭하면 양위 발언으로 왕세자인 광해군을 괴롭혔다.
특히, 왜군의
수륙병진을 무산시킨 충무공이 두려웠던 선조.
칠천도에서 원균이 대패하고, 이조 수군이 거의 전멸한 상황.
충무공이 불과 12척
함대로 330척 왜 함대를 박살낸 명량해전.
거북선도 없었던 상황에서 충무공은 왜군을 박살냈고,
충무공 승전보와 함께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충무공은 수개월만에 수십척의 전선을 다시 건조하였고,
군사를 모우고, 군량미와 전쟁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수개월 만에 이조 수군이 부활하자 선조는 모골이 송연
전라도가 이조의 병참기지가 되자 충무공은 백성의 희망.
만약, 충무공이 살았다면 선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선조는 왜군에게 항복해도 목숨은 부지했을 듯.
그러나,
반란이 일어나면 살기 어려웠을 듯 싶다.
하여, 선조는 충무공을 누구보다도 경계했던걸까?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신화를 창조했던., 충무공.
명나라.
임진왜란 당시 이조에 구원군을 보냈던 명나라.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장악 고지다툼
임진왜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소진된 명나라는 후금에 패망.
'동아시아 세력 판도를 바꿔놓은 임진왜란.'
후금은 중국통일 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다.
명나라는 이조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나라이다.
정치 문화 및 사상
면에서는 불교 유교 도교 등.
학문 상 백과사전 <영락대전>
계몽서적
<사기평림>,<십팔사략>
지리서적 <천하일통지>,<광여도> 등
마테오리치·아담샬
등의 천문·역법·
수학·지리학·포술학도 영향을 받았다.
<삼국지연의>,<수호전>,<금병매> 등
기서.
회화에서는 원나라 때 폐지된 궁중화가를 양성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띤 것도 영향.
조각에서는
남북조나 당 같이 불교조각이 소멸
부처, 보살의 조각상보다 관음, 나한의 조각상.
도자기는 송대까지 성행한 양질의
청자·백자·찻잔
명나라 때엔 화려한 무늬를 입힌 청화백자·적회·진사
건축은 명초에 남경에 축조한 황성·궁성들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도 이 때 축조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형식의 명나라 탑.
정치적으로 안남(베트남)을 정복후 항로
개척.
이조는 명나라를 통해 안남과 상호 해상 무역.
'표방'에서 유흥과 환락에 빠졌던 명나라 왕실
명나라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뇌물이 성행한 풍습.
도교에 매혹되어 더욱 문란해졌던 명나라 지배계층.
북쪽 몽고의 알단 칸이 해마다 명나라로
침입
남쪽에서는 왜구가 출몰하여 살인과 약탈 방화
이때 저장,푸젠의 호족 등은 일본상인과 밀무역
나라 경제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던 명나라 시대.
1583년 누르하치 가문은 명나라를 위해 여진족과 전쟁.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려 죽게한 명나라.
누르하치는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한다.
'훗날, 누르하치는 중국통일 후 청나라를
건국.'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 후금이 곧 청나라의 전신.
병자호란 때 침공한 청나라 황제가 곧 누르하치.
'청나라
이전 중국패권을 장악했던 명나라.'
명나라 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분산 정책.
인구과밀한 강남에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 부흥에 주력하였다.
하여,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 인구 이동 현상
명나라는 호구제도 이갑제 자치조직을 편성한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 부유호 10호를 이장호로,
나머지
100호를 10호씩 10갑으로 나눠 이장 1명
명나라 태조는 중국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
‘어린도책’토지대장을
만들고, 호적대장을 만든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있는 연로자 = 이노인(里老人)
이민의 교화 및 쟁송을 맡도록 하고,
육유라는 교육강령 공포로 사학 육성.
명나라 태조는 권농에도 힘써 처음에 곡물의 자급생산
특히 목화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면직공업 발달.
또한 뽕나무 재배도 성행하여 이조도 뽕나무 재배 활발.
16세기 후반 중국상권을 양분한 동향
동업자 결합
요지에 설치한 회관·공소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명나라는 대운하 연안에 초관을 설치해 징세했다.
보초는
주요 통화이고 동전은 보조통화였으나,
불환지폐인 보초는 유통이 안되어 은을 주로 사용
1436년 조세의 은납도 공인되어 금화
은화가 유통
16세기 은의 화폐적 기능이 확립되었다.
대외무역은 국수정책에 따라 거의 단절
영락제 이후 여러 나라와
조공무역이 성행.
15세기 후반 해안봉쇄령에 저항한 밀무역 성행.
1567년 해안 봉쇄령을 해제후 국제 무역이 활발.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무역근거지를 잡고,
이보다 조금 늦게 에스파냐도 마닐라시 건설
생사·견직물·면포·자기·철기
등이 많이 수출
대신 은이 수입되며 상공업 발달로 경제도시 속출.
주로 양자강 강남을 중심으로 속출하였는데,
대도시
가운데 상공업 노동자 숫자만 수만명.
제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제2대 혜제건문제 주윤문
(1398-1402)
제3대 성조 영락제 주 체 (1402-1424)
제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1424-1425)
제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제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1435-1449)
제7대 대종 경태제
주기옥 (1449-1456)
제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1457-1464)
제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1464-1487)
제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487-1505)
제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1505-1521)
제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1521-1566)
제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566-1572)
제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제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1620)
제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1620-1627)
제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1627-1644
제1대는 이름은 주원장(朱元璋)이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기에
홍무제.
중국을 약 300년간 지배한 명나라 초대 황제.
재위 중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개혁.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와 비슷한 시기의 통치자.
주원장은 1328년 난징(南京) 가난한 농부의 아들
16세에 고아가 되어, 펑양
황각사(皇覺寺)에 입문
당시 굶주림을 면하려 출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당시 중국 중부와 북부는 700만 명이
굶어죽었다.
1325년부터 굶주린 백성들이 끊임없이 일으킨 반란
반란군 지도자 곽자흥은 1352년 호주를 공격해 함락
주원장은 반란군 병졸로 참가해 제 2 인자가 된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후 저주를 함락한다.
1355년
곽자흥 사후 주원장은 반란군 지도자가 된다.
주원장은 양쯔 강[揚子江] 유역까지 점령
그곳에서 사대부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
이들 중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한다.
주원장은 그들로부터 중국어 기본을 배웠고,
중국사, 유교경전,
통치술,행정 조직을 공부.
주원장은 원나라의 국민적인 지도자로서 성장
홍건적을 일으켜 몽골족 원나라를 타도
한족을
바탕으로 하는 명나라를 세운다.
제2대 주윤문(朱允火文)은 불 화(火) 옆에 글월 문(文)
불화자 옆에 글월문 두 글자가
아닌 하나의 또 다른 자.
주윤화문이 아니고 주윤문이라 부르는 홍무제의 손자이다.
문치주의자였고 마음도 선량하고 어질어
때로는 문약하다는 평도 받았던 통치 군주.
그래서, 삼촌 연왕이 일으킨 정난의 변으로 하야.
황제자리를 빼앗기고
어디로인가 행방불명이 된다.
연호는 건문(建文)이라 하여 건문제라고도 불리운다.
여기서 연호란 연을 세는 단위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홍무 3년이라고 하면 홍무 연호
원년은 그해에 그런 연호를 지었다는 의미.
예를 들어, '홍무 원년'이란
그해가 홍무 연호를 지은 해.
제3대 시호는 성조(成祖)이며 연호는 영락(永樂).
하여,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쫓아낸 황제이다.
이조 태종 방원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조에서 명나라에 공출된 후궁의 아들이란 설.
초기에 패륜을 저지르고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정치는 잘해 명나라를 강대국으로 부흥시킨 황제.
아프리카까지 명나라
대함대를 보내 국위를 선양
조공 무역의 길을 트게했고
백과사전인 영락대전을 편찬.
제4대 주고치 시호는
인종(仁宗)이며 연호는 홍희(洪熙)
홍희제는 대범하고 호탕하며 부드럽고도 어진 성격이었다.
그러나 너무 뚱뚱한 비만 체질이라
걸음도 제대로 못걸었다
그래서 영락제가 음식조절과 운동을 엄명했을 정도.
비만이 원인이 되서 황제가 된지 9개월만에
죽는다.
제5대 주첨기 연호는 선덕(宣德)시호는 선종(宣宗).
역시 어질고 똑똑하며 대범한 황제라고 알려져 있다.
역시 정치를 잘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안정시켰다.
삼촌인 진왕 주고구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후
주고구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서 죽였다고 한다.
6대 주기진 시호는 영종(英宗)으로 연호는 정통(正統).
아버지 선덕제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주기진은 환관 왕진 농간에 말려 나라를 망쳤고
북방 민족 오이라트족 포로가 되어 오이라트에서
산다.
7대는 주기옥 연호는 경태(景泰)로 정통제의 동생.
오이라트에게 형 정통제가 잡혀가자 황제가 되었다.
형을 납치한 북방민족과 강화회담으로 허송세월
태자인 조카를 폐위시키고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
그후 정통제가 돌아와
경태제를 내쫓고 황제가 된다.
하여, 8대 황제는 오이라트족에세 붙잡혀갔던 정통제
새로 연호를 천순(天順)이라 정하고 국가
기강을 확립
제9대 주견심 연호는 성화(成化) 시호는 헌종(憲宗).
귀빈 민씨와 환관 내시들에게 폭 빠져 정치를 망친다.
제10대 주우탱 연호는 홍치(弘治) 시호는 효종(孝宗).
명나라 황금기를 열었고 태평성대를 이루어낸 황제이다.
홍치제는 칫솔의 발명자로도 알려져있다.
동물뼈에 솔을 박은 쓴 것이 칫솔의 기원
안타깝게도 36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
제11대 주후조 연호는 정덕(正德) 시호는 무종(武宗).
술과 여자에 빠져 요상스런 궁전을 지어 음란한 생활
호수에서 물놀이하다가 배가 뒤집힌 충격으로 죽는다.
제12대 주후총 연호는 가정(嘉靖) 시호는 세종(世宗).
미신을
지나치게 믿은 가정제는 홍치제 동생의 아들
홍치제 뒤를 이었기에 아버지를 황숙이라 해야 마땅
그러나, 아버지 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결국 패망한다.
이때부터 북로남왜의 화라고 해서
북방 이민족들과 왜적들이 노략질.
명나라의 해안 일대가
초토화 된다.
특히 북방 이민족들이 쳐내려오고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극도로 혼란
이때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척계광
복건과 절강에서 날뛰는 왜구들을 소탕.
가정제는 후궁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구전.
제13대 주재후 시호는
목종(穆宗) 연호는 융경(隆慶)
북방 이민족 지도자인 '알단칸'과 화의로 정국 안정.
북방 오랑캐들의 남침을 막는데는 성공했던
통치자.
제14대 주익균 시호는 신종(神宗) 연호는 만력(萬歷).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이조 왕조의 은인인 인물.
10세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장거정 신하에게 정치를 의존.
양명학파 장거정이 죽자 성리학 재야세력이 득세.
동림당 성리학파와 장거정 양먕학파 간 당파싸움.
그틈에 만주족 추장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일으킨다.
제15대 주상락
시호는 광종, 연호는 태창
황제에 즉위하고 나서 한달 만에 죽는다.
제16대 주유교 시호는 희종(熹宗) 연호는 천계(天啓)
만력제의 손자로 내시 위충현을 총애하여 망조의 길.
제17대 주유검 시호는 의종(毅宗) 연호는 숭정(崇禎)
희종의
동생으로 17세 즉위후 위충현 세력을 제거한다.
그러나, 의심이 많아 신하 죽이기를 밥먹듯해 인재 부족
황제의 무능과
내시들의 횡포로 나라가 망해가고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 도읍 북경이 함락된다.
숭정제는 왕자들을 여자로 분장시켜 피난시키고
자살
숭정제를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
농민군 반란 지도자.. 이자성.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마자
후금이 쳐들어와서 북경을 함락
이자성을 멸망시키고 청나라 건설.
명나라 혼란기 마다 한반도로 이주한 명나라
유민들.
임진왜란 7년 동안 한반도에 주둔했던 명나라 군사들.
임진왜란 격전지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정착한다.
'광양. 여수. 통영 일대는 명나라 수군 정착촌.'
지리산 일대 임진왜란 격전지에는 명나라 풍습.
명나라
지배계층 유민들도 대거 한반도에 정착.
이조는 명나라 유민들을 은인으로서
받아들인다.
이여송
자 자무(子茂). 호 앙성(仰城).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
1592년 닝샤[寧夏]에 발배(틋拜)의 난
당시 제독(提督)으로서 이를 평정했다.
같은 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2차 4만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군 격파
그러나 벽제관 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참패
그후 평양성 거점으로 화의교섭을 하다가 그해 말
철군
1597년 요동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토번 침범을 받아 반격 중에 전사.
그의 5대조는
명에 귀화한 성주(星州) 이씨(李氏)
당시 이조에 주둔 중 부인을 얻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자손들은 경남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진린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연합작전을 폈던 명나라 장수.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통곡했다.
진린의 손자는 명나라가 망하자 고금도(완도)로 망명
이들 가족은
다시 해남도로 갔는데
현재 그곳의 진씨들은 진린의 후손.
광동 진씨는 수군도독 진린 장군의 후예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
진린의 손자 영소는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망명.
영소는 진린이 싸웠던 고금도(완도)를 찾아 칩거하다가
해남으로 와서 결혼해 아들 석문(碩文)을 낳고 정착한다.
진린 장군의 증손자인 석문은 여러 곳을 떠돌다
34세 되던 무렵에 황조리에 터를 잡고 정착한다.
관제(關帝)
관공(關公),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도 함.
관우(關羽:?~219)를 무신(武神)으로 받든 이름.
악령을 제어하는 힘이 매우 강해서
극중 관우의 역을 맡은
배우에게도
그 영력이 미친다고 믿을 정도였다.
예전부터 군인들은 말할 것 없이,
많은 상인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
관우를 자신들의 후원자로서 섬겼다.
예를 들면 두부 장수들이 관우를
자신들의 후원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가
젊은 시절 두부장수를 한 때문.
기사도 정신이 살아 있던 3세기
관우는 삼국지 소설 속 등장인물.
민간 전설 및
희곡 등에서도 묘사.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싸움을 화해시켰고,
3사람은 의형제를 맺어 죽을 때까지 충절을
지키자고
맹세했다는..도원결의 3형제 이야기.
219년 관우는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했지만,
그 명성은 계속 높아져 사후에.,
제(帝) 칭호
1594년 명 신종(神宗)은 관우를 무신으로 선포.
무묘(武廟) 또는 성무묘(聖武廟)라는 사당들
국비로 세웠고, 2월 보름과 5월 13일에 제사.
망나니 칼을 관우 사당에 안치한 적도 있었다.
범죄자에게 형을
집행한 뒤
형집행을 맡은 최고 판결자는
관우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는 죽은 사람의 혼이 감히 사당이나
판결자 집에 들지 못하게 하리라는 믿음
관우는 녹색 옷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거의 항상 아들과 종자(從者)를
데리고 있다.
중국 고전 '좌전(左傳)'을 든 그림도 있는데
그는 생전에 이 책을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암기술 때문에 문예의 신으로도 받든다.
17세기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이조로 전해져
관우가 나라를 구해주리라는
민간신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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