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22 ( 진린이 본 이순신. 충무공 죽음에 관한 기록. )

donkyhote 2011. 2. 28. 03:35

명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그가 명 황제에게 올린 서신.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충무공의 죽음에 관한 기록. 



충무공 조카의 행장(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 유언.
이순신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회와 조카 완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소리를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적들이 기세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게다가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신..종 김이와 희와 완, 세 사람만 알뿐
그러나 훗날, 충무공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

예기치 못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순국론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택했다는 자살론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일흔까지 살았다는 은둔론.


<선조실록> 31년 11월 무신일조 기록

"사관이 말하기를…

순신이 스스로 왜놈들을 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자..
그 아들이 곡하려 하므로 군심이 어지러워지려 하였다.

곁에 있던 이문욱이 울음을 저지시키고..
옷으로 공의 시신을 가린 뒤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우매…
사람들이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이문욱은 당시 일본어 역관으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해 공을 세운 인물.


<선조실록> 31년 12월 25일자 기록.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탄환을 맞자..군관 송희립 등 30여명이
상인(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모든 배가 주장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였던 권율 장군도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이순신이 죽은 뒤에
다행히 손문욱(이문욱) 등이
마침 지혜있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사옵니다"

라고 적고 있다.


..............충무공 죽음에 관한 사료..................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해 2월 11일 장례
그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600km 떨어진 곳에 이장.

충무공 전사소식은 11월 23일에 선조에게 보고되는데
이 때는 전쟁이 끝난 후이며 장례비도 국가에서 지급.
장례를 늦출 이유가 없는데도 80일이 지나 치룬 장례.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이장한 것은 더 더욱 이상하다.

450년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

충무공은 임진왜란 패전국 일본에서조차 평가 받는 인물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
러일전쟁 전승 축하연에서 충무공과 동격발언을 듣자 반박.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냈다.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 이순신 제독에게
나를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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