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24. ( 광양. 은장도. 매화마을. 여수. 오동도. 항일암. )

donkyhote 2011. 2. 28. 03:40


광양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를 국란에서 지킨 이조 수군.
당시 수군이 없었다면 이조도 존재하지 못했을 듯.
광양 여수 통영은 이조 수군들의 대표적인 격전지.

버려진 오지 귀양지로 취급받던 이조시대 섬.
그 외딴 섬, 넓은 바다에서 고기잡던 뱃사람.

국란 앞에 조정의 지원없이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미를 각출하고 나라위해 목숨까지 받친다.
결국 그들이 있어 임진왜란을 무사히 넘긴 이조.

역사 앞에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될 고장.
광양 여수 통영 등지의 고대 선사시대 유적들.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의 숨은 저력이기도 하다.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바라 보이는 섬진강
지리산 십경 섬진청류가 끝나는 지점이 광양.
섬진강 하구는 '광양 제철소'가 자리잡은 곳.

광양 장도는 중요 무형 문화재 제 60 호로 지정.

칼날은 특수공법 담금질 제작으로 실용성이 높고
장식과 칼자루, 칼집, 칼날 등이 전체적인 균형미
광양장도는 세종대왕이 차고 다닐 만큼 옛부터 명품.

총 23 단계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칼날과 칼집,
칼손잡이로 연결되는 끝에 꽃무늬장식을 하고 있으며,
칼날은 주로 강철, 칼자루나 칼집은 먹감나무, 대추나무,
매나무, 서각, 상아 등을 사용하여 관광상품으로 인기 높다.

광양 궁시는 중요 무형 문화재 제 12 호로 지정.

활은 선사시대부터 생활수단으로 개발되었는데
전쟁, 수렵, 궁중연사, 향음 주례 등에 쓰였다.

광양은 충무공 전승지 인근으로 옛부터 국궁이 성행
광양 화살은 정교하며 성능이 우수해 명중률이 높다.

시누대, 꿩깃, 화살촉, 복숭아나무로 만드는 오늬.
광양 궁시는 120회 이상의 손길이 가는 전통공예품.

................................................
................................................

광양은 현재 섬진강이 끝나는 지점의 항구도시.
광양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의 노량해전 격전지.

철갑 거북선을 앞세워 수많은 왜함을 바다에 수몰.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
두 제독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의 노량진 앞바다의 해전.
1597년 이조를 재침략한 왜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

지상전에서도 고전 중 다음해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작전을 서둘자 이순신이 퇴로를 차단.
왜교(倭橋)에 진을 친 왜군대장 고니시(소서행장)의 부대를 섬멸.

다급한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
진린은 고니시가 애원하는 통신선(通信船)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하였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연합수군을 협공하며 퇴각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속셈.
이런 왜군의 전략을 간파한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해 진형을 정비

11월 18일 밤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집결한 왜선 500척을 공격.
19일 새벽, 왜 함대는 200척이 분파되고 패잔선 50척만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이 때 세계 해전 사상 그 유례가 없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 가리포첨사(加利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이 전사.

한편, 순천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사들은 남쪽으로 퇴각
시마쓰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해 철수한 후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
...............................................................

산을 '아버지의 품'에 비유한다면 강은 '어머니의 젖줄'

섬진강은 그 일대에 서식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젖줄인 셈.
낙동강 섬진강 일대는 변한 싯점부터 철기문화가 발달했다.
현재 포항제철이 철강왕국으로 등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안만 일대는 변한시대부터 철기문화가 발달했던 곳이었다.
아울러 섬진강 하구(광양)는 가락국 철기문화가 발달했던 곳.
가락국(금관가야)는 한반도에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해상왕국.

신라는 그 철기문화에 힘입어 통일 삼국시대의 위업을 달성한다.
선진 철기문화의 발달은 곧 무기를 대량생산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섬진강 일대에서 번성했던 철기문화의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비 父(부)는 쌍도끼 형상 문자로 철기문화를 상징하는 한자.
철기문화가 발달하며 모계사회는 부계 중심사회로 바뀌어간다.

철기로 만든 무기로 강력한 힘을 얻게 된 유목민 중심의 부계사회.
농업 중심 모계사회에서도 철기문화로 농기구가 급격히 발달한다.
그러나, 모계사회 농기구는 유목민들 철기 무기를 당할 수 없었다.

하여, 모계사회 영역은 유목민 부계사회 부족들에게 점령을 당한다.
아울러, 농업으로 애써 수확한 곡식도 유목민 남성들에게 빼앗긴다.
그러나, 억울해도 유목민 부족에게 맛서기에 모계사회로는 역부족.

모계사회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는 부계사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모계사회를 보호해 줄 부계사회에 조공을 받친 관례가 세금의 기원.
강력한 부계사회는 한반도에서 농업 중심의 고대국가로서 발전한다.

'삼한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이조로 이어진 철기문화.'

철기문화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시대를 거쳐, 이어지는 문화.
철기문화는 땔감이 많은 산과 물이 가까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이 가까운 섬진강 하구는 천연조건을 갖춘 곳.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철기문화가 발달한 광양.'

당시 땅을 판 주위로 진흙을 두껍게 쌓아 올린 초보적인 가마를 운영
사철과 목탄을 혼합하여 철을 제조, 삼국시대엔 광석을 채취하고 제철.
삼국시대 후기인 BC 2세기~ AD 3세기에는 보다 더 발달된 용광로가 등장.

철기시대는 농기구를 비롯해 전쟁에 필요한 무기 생산에 주력했던 시기.
고구려 시대에는 주로 전쟁무기를 제작( BC 1세기~ AD 7세기 고대사회)
AD 6세기 후반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야철신과 제륜신의 모습이 보인다.

고구려 오회분 4호묘는 압록강 부근의 집안에 밀집한 무덤군(群) 중의 하나.
철을 단조하는 고분의 벽화를 보면 철의 제조가공은 그당시 생활에 큰 비중
AD 10세기에서 14세기 고려시대에는 주조기술을 활용하여 철불상을 제작.

이조 말기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던 불씨가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풍속도.
불끈 달아오른 쇠를 망치로 때리고 담금질하는 남성미가 넘치는 대장간 풍경.
단원 김홍도 작품은 그 시대 성풍속도를 대변하는 낯뜨거운 춘화도 더러 있다.

벌겋게 달아오른 긴 쇳덩이를 찬물에 급히 식히는 담금질.
찬물에 식히고 벌겋게 가열하며 두드려댈수록 강해지는 쇠.
웃통을 벗어젖힌 남성이 쇠망치를 휘두르며 담금질하는 그림.

애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 건장한 남성을 엿 보던 여인의 춘정.
참다못한 여성과 담금질하던 남성이 벌리는 대장간에서의 정사도.
김홍도 그림을 보면, 장소나 시도 때도 가리지 않을 만큼 대담하다.

긴 담배대를 문 기생을 허리 춤에 품은 갓 쓴 사대부 양반의 정사도.
서로 옷도 벗을 겨를없이 어울린 춘화는 당시 성풍속을 그린 듯 싶다.
김홍도 그림은 17세기 전란이 잦았던 이조 풍속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하멜 표류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조의 법과 질서가 뒤흔들렸던 시기.
전쟁, 가뭄으로 인한 흉년, 전염병, 성풍속 문란, 도둑이 끓던 암흑시대.
사회기강을 세우려 곤장이 성행했지만 아전 비리도 심했던 17 세기 이조.

독일 함부르크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된 김준근의 무쇠솥 만드는 풍속화
이 그림을 보면, 철제품 생산공정 중 하나인 주조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려고 거푸집에다 쇳물을 붓는 제조공정을 그린 그림.
현대 소규모 주물공장 공정과 같고. 요즘 장인의 수공 제작과 차이 없다.

독일 엘베 강 유역 함부르크는 755㎢의 면적, 인구 330 만명 대도시
독일 북부에서 베를린 다음이고 유럽 최대의 항구이자 환락의 도시.
멘델스죤과 브람스의 고향이고 서울 면적에 인구는 서울의 1/7 수준.

함부르크는 독일의 두 번째 산업 중심지이며, 메트로 폴리스의 심장.
우리나라의 17세기 화가인 김홍도 그림이 그곳에 전시된 것은 획기적.

...........우리나라 철기문화 역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제작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및 장영실의 측우기 발명
'최무선'의 화약무기 제조, 및 팔만대장경 완성.

금속활자본 상정고금예문, 고려 삼대목 편찬,
장보고의 청해진, 금관가야, 고구려 진대법,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최첨단 철기문화.
..........................................................

삼국시대 이전 1세기 김해는 가락국의 철기 문화권.
중국 문헌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변진한 24국 국명.

"변진에서 철을 생산하였고,
한인(韓人), 예인(濊人), 왜인(倭人)
이것을 가져가며, 중국 엽전 처럼 사용."

부산 동래 패총에서 철을 주조한 용광로 터가 발견
복천동 고분을 발굴할 때 많은 철정이 출토된 사실
부산은 삼한시대부터 철 수공업 및 해상교역의 거점




은장도.




칼날이 양쪽에 있는 것을 검(劍)이라 하고
칼날이 한쪽에만 있는 것을 도(刀)라 한다.
은장도 제작 공구는 무려 2백 종류가 필요.

'은장도 제작 기술은 금속공예의 꽃.'

은장도 제작 기술이 만들어낸.. 철갑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된다.
세계 최초의 잠수함으로도 알려진 거북선.

청동기시대 이후 철의 야금술이 발달되면서
칼은 금속가공 기술의 중요한 대상으로 등장.
장도(粧刀)는 치장된 작은 칼을 이르는 말이다.

장도는 실용성 외 의식용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호신용
고대로부터 장도는 금은과 같은 귀금속재로 만들어졌고
금속 이외에도 대모, 옥, 비취 등 여러 가지 재료로 치장

그 중에서도 은으로 치장한 은장도(銀粧刀)가 제일.

몽고 영향으로 고려 때 장도 패용이 성행하였는데
이조시대 장도는 길이가 10∼15cm 내외가 대부분
은장도는 충절(忠節)이나 정절(貞節)을 의미

금속 공예품으로 생활 속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또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패용(佩用)하였는데
특히 노리개의 하나로 장신구 역할도 담당했다.

은장도는 남녀 구별없이 호신용 장신구.

허리띠나 옷고름에 노리개와 함께 차고 다닌 패도.
은장도 중에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囊刀)
이러한 은장도를 만드는 기능인을 장도장이라고 불렀다.

고려시대부터 성인 남녀들이 호신용으로 지녔고
임진왜란(1592) 이후 순결을 지키기 위한 여성용.
이조 후기 손칼 기능보다 상징성과 장식성이 강조

'여인들의 노리개로 쓰이면서 화려하게 장식.'

장도의 종류는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에 따라서
은장도(銀粧刀), 목장도(木粧刀), 골장도(骨粧刀)

형태에 의하여 일자도(一字刀), 을자도(乙字刀)
그리고 젓가락이 꽂힌 첨자도(籤子刀)로 분류된다.

칼자루와 칼집이 맞물리는 곳에 턱이 있으면 몽개칼,
턱 없으면 맞배기, 원통형 평칼, 팔각 모난 팔보장도
장식에 문양이 있으면 장석칼, 장식이 없으면 민자칼.

울산 진주 광양은 은장도 조각 솜씨가 능한 고장.
은장도는 은으로 만든 작은 칼. 평복에 차는 노리개.
이조 여인은 노리개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 호신용.

은장도 칼집 밖에 꽂혀 있는 은젓가락은 독음식 감별용.
왕실에서는 임금 수라상을 검사하는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은젓가락 은장도는 귀한 신분의 상징.

.....................................................
......................................................

은장도는 여인 특히 애기씨 정절을 지키기 위한 필수품.
'울산 큰애기'는 시집 가기 전 순결한 처녀를 일컫는 말.
애기씨는 이조시대 양반규수의 꽃같은 아름다움을 뜻한다.

'야생화 이름에 들어있는., 애기 = 처녀.'

'애기' 이름 꽃들은 한결같이 '작고 앙증맞다.'
아기들이 재롱을 피우듯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을 수 있는듯한 꽃.

'고난을 뜻하는 보라색' 애기풀꽃
봄철에 풀섶에 숨어서 피는 야생화.
봄꽃은 꽃샘 추위에 고난겪는 공통점.

바람결에 피었다가 바람결에 스러지듯.
쉽게 잊혀지는 애기꽃. 지천, 복수초, 등
아예 잎조차 찾아볼 수 없이 봄에 피어난다.

살포시 고개 숙인 봄꽃의 수줍음은 처녀의 청초함.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 핀 형태, 꽃말은.,교만.
'순결한 처녀의 넋' '깨끗한 마음'은., 나리꽃의 꽃말

......................나리꽃 전설.............................
예전에 마을 처녀만 보면 농락을 일삼았던 원님 아들.
자태 고운 처녀 나리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그만 자기를 희롱하려는 줄 알고 은장도로 자결.

정말 그녀를 사랑한 원님 아들은 그동안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양지 바른 곳에 묻은 이듬해 봄 그 무덤 위에 핀 꽃.
수줍은 듯 고개 숙여 핀 그 꽃이 그녀의 이름을 본딴 나리 꽃.
......................................................................................
............'애기 달맞이'꽃 전설.........................
달맞이꽃은 달빛 속에 님 그리듯 피어나는 노란 꽃
애기달맞이 꽃은 달빛 그윽한 호숫가에 작은 노란꽃.
비바람속 별빛없는 밤이 무서워 의지하다가 싹튼 사랑.
.............................................................................

.........................애기 도라지...............................
꽃이 도라지를 닮아서 '애기 도라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늘고 긴 줄기 끝에 보일듯 말듯 숨어 피는., 작은 봄꽃
..................................................................................

'얼마나 왜구들의 만행이 잦았던 것일까?'

봄꽃 같은 처녀의 가슴 속에 은장도를 품게 한 왜구들.
심지어 은장도를 품은 채 잠자리에 들었던 이조의 여인들.
그것은 호신용이기도 했지만 정절을 잃으면 자결하려는 용도. 



매화마을. 



섬진강 은빛 물결 금모래톱 위로 날리는 매화꽃잎
바람 부는 매화마을에서 보이는 것은 온통 매화꽃.
논두렁, 밭두렁, 개울가 할것없이 온통 '매화마을’

30만 평 대지 위에 100만 그루의 매화나무
3월 내내 매화마을에는 꽃눈이 펄펄 날린다.

매화나무 밑에는 파릇한 보리밭이 펼쳐져있다.
늦봄 보라색 자운영, 다음엔 진달래와 클로버.
그 다음엔 엉겅퀴, 들국화, 구절초가 피고진다.

'초가을 매실 열매가 알알이 익을 때까지..'

....“매화꽃 향기를 맡아봤나요?.....
그 향기가 어찌나 진하고 좋은지,
꽃한송이에 그 꿀이 얼마나 많은지
벌 두 세 마리가 한번에 달라붙지요.

매화꽃 피는 소리를 들어봤나요?
바람도 한 점 없는 밤 달빛 아래서
툭툭 꽃망울 터지는 가슴 울리는 소리."
...........................................

청매실농원 산책로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수백 개 장독과 섬진강이 바라보이는 지점
섬진강 은빛물결, 금모래, 흰 꽃, 파란 하늘

'누구나 이곳에 서면 사진작가가 된 느낌.'

만약 이곳에 와 매화 개화시기를 놓쳤으면
일주일 늦게피는 해남 매실농원으로 가보자.
유난히 흙이 붉은 해남 산이반도에 보해매원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보해 매실농원
보해양조가 1979년부터 매화꽃밭을 조성했다.
4만 평 규모이고 해마다 3월 20일 전후에 만개.

1500년 고찰인 순천 선암사의 고매(古梅) 군락
법당을 둘러싼 돌담 너머 홍매화와 백매화 꽃숲.
만개 시기는 3월 말경. 4월엔 화려한 벚꽃도 핀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IC에서 임실을 거쳐 남원까지
구례 19번 국도 간전교, 섬진교 건너 861번 도로
좌회전 하면 매화마을, 도로 좌측에는 청매실농원.




여수(麗水)



역사적으로 지리산의 사찰 및 화개장터와 밀접한 곳.
전남 남동부에 있고 임진왜란 당시 해안 방어 요충지
오늘날 호남 남부의 대표적 항구도시이자 어업 중심지,

돌산읍 소라면 율촌면·화양면·남면·화정면·삼산면
여서·경호·고소 공화·관문·광무·교·국 군자·남산
덕충·동산·둔덕·만흥·문수·미평·봉강·봉산·서교·
수정·신월·연등·오림·오천·종화·중앙·충무 학 학룡
안산·소호·시전·신기·웅천·여천·화장·선원·주삼·봉계
해산·중흥·화치·월하·평려·월내·적량·묘도·상암·낙포
신덕·호명 등 1개읍 6개면 51개동이 있고 시청소재지는 여서동.
면적 45.21㎢, 인구 311,051(2003), 인구밀도 623.7명/㎢(2003).

삼국시대 백제 원촌현, 신라가 삼국통일 후 해읍현
승평군(순천)의 영현을 삼았다가 고려 초에 여수현

1018년(현종 9)에 순천의 속현으로 병합되었고
1350년(충정왕 2)에 다시 여수현으로 독립했다.

1396년(태조 5) 당시 현령 오흔인이 이조 왕조에 불복
하여 현을 폐지 순천에 병합시켰다가 전라좌도수영 설치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이 충무공이 이끈 수군의 중심

1593년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영 설치
1601년 삼도수군 통제영은 경상도 거제로 이전.
1725년(영조 1)에 여수를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전라좌수사를 겸하게 했으나 1년 만에 폐지했다.

1895년에 종래의 병영·수영·진영·진보를 폐지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돌산군을 신설함

1897년 순천군 여수면·율촌면·소라면·삼일면
따로 분리해 여수군으로 편입 신설하여 독립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돌산군이 폐지되고,
돌산군 두남면·남면·삼산면은 그대로,
화개면과 옥정면은 화정면으로 통합되어 여수군

여수군 여수면·화양면 그대로,
덕안면·구산면이 소라면으로,
율촌면·구산면이 율촌면으로,
삼일면과 돌산군 태인면 일부가 삼일면으로,
덕안면·쌍봉면이 쌍봉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여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여수지역 국군 제14연대 반란사건.
이 지역 주민들이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1949년 여수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8년 여천군과 여천시를 통합 여수시로 출범.


<자연환경>

소백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여 높은 산은 없으나
천성산 호랑산 고락산이 모두 능선으로 이어져 있고,
시내 곳곳에 봉화산 호암산·마래산·장군산·구봉산
종고산 등이 있고 남해안 시의 남, 동부는 해안선 복잡

대경도·소경도·야도·풍락도·노량도 등이 천연방파제
시의 북서부 호랑산에서 발원한 연등천이 여수만에 유입.
하천 상류는 좁은 충적평야이고 중하류 일대에는 시가지


<유물 유적 관광>

미평동·둔덕동에 고인돌이 있고,
봉산동성터와 문수동의 괘락산성.
해안에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지들

군자동의 여수진남관(麗水鎭南館:국보 제304호)
충무공 사후에 전라좌수영의 본영(本營)으로 창건

고소동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에는
이항복이 이순신을 기리며 쓴 글이 각인.
덕충동 여수충민사는 충무공 영혼을 모신 곳

종고산(鍾鼓山)은 충무공이 승전고를 울리자
온 산에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려 명명한 이름


<교육·문화>

함양 여씨, 동백꽃, 아기장수 설화. 토끼와 거북이 우화,
민요로는 가래질 시집살이 화투타령 덜이덜롱 등이 전승 



오동도.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여수시 수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긴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된 토끼 모양의 작은 섬
여수역에서 1.2㎞, 여수공항에서는 19.7㎞ 지점에 있다.


<유래>

멀리서 보면 지형의 생김새가 오동잎처럼 보이고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빽빽이 있어 오동도라 했다.
충무공이 화살의 원료인 신우대를 심게 한 후 죽도

고려 공민왕때 요승 신돈은 전라도라는 전(全)자가
사람인(人)자 밑에 임금왕(王)자를 쓰고 있는데다가
남쪽땅 오동도라는 곳에 서조인 봉황새가 드나 들어
고려왕조를 맡을 인물이 전라도에서나올 불길한 예감
이에 봉황새 출입을 막으려 오동나무를 베었다고 한다.


<전설>

먼 옛날 오동숲 우거진 오동도에 어부와 여인이 살았다.
어느날 도적떼에 쫓긴 여인이 정조를 지키려 벼랑에서 투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남편이 오동도에 정성껏 만들었던 무덤

북풍한설이 내린 그해 겨울에 무덤가에 피어난 동백꽃
그녀의 정절을 알리듯 신우대가 파랗게 돋아났다고 한다. 



 
항일암 

 



12월 31일 떠나 1월 1일 새벽 일출을 보는 명소.
어둑한 바다에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솟는 태양
새해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질 것 같은 명소.

대웅전 앞마당부터 관음전 언덕, 금오산 정상까지
바위 언덕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항일암의 일출.

여수 돌산대교를 지나 향일암으로 가는 해안도로
남해 갯마을의 정취가 담겨진 좋은 드라이브 코스.

방죽포 해수욕장 옆을 거쳐 밤섬을 바라보며
대율과 소율 마을을 지나 길 끝나는 임포마을
거북 모양을 닮았다는 금오산의 거북 목 부분.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8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원통암이라 불렀으나 고려 제4대 광종 9년에 금오암
대웅전 뒷산에 두부같이 생긴 절벽 위에 돌이 경전바위

대웅전 우측 언덕을 오르면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관음전 오른쪽에 바다를 보고 선 석조 해수관세음보살
국내 가장 마음 좋게 생긴 미인으로, 볼수록 정이 간다.

금오산은 ‘거북이 불경을 지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