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충무공.
"현자를 추천한 자는 상을 받고
현자를 숨긴 자는 사형을 받는다”
31세 때
선조 5년(1572) 병과(丙科) 급제
종9품이 된 이순신의 출발부터가 늦었다.
백호 윤휴가 충무공에 관해 남긴 기록.
"성품이 고상해 귀족들을 찾지 않았다”
충무공은 아부와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 거듭된 파직,
좌천, 백의종군.
충무공을 천거한 사람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젊어서부터 친구인 유성룡은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
....................유성룡......................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지 10년이 되도록 승진되지 않았다”- 장비록.
유성룡은 이조판서 이이(李珥)로부터
이순신을
만나겠다는 언질을 받아내지만
이순신은 이이와의 만남을 유성룡에게 거절.
이이 율곡은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인 때문.
거기에 인사권까지 갖고 있기에 만남을 거절.
하지만, 유성룡이 추천해 전라 좌수사로 임명
여러 단계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인사.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없었다.
이때가 임란 1년 전, 왜적의 동병 소식에 추천한 것.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이순신이 이조를 구해낸다.
............................................................
백의종군한
충무공을 보살펴 주어
역사에 남게 한 또 한 사람의 영웅.
..................권율....................
영의정 '철'의 아들로 1582년 46세 나이에
병과급제
1587년 전라도 도사, 1588년 예조.호조정랑,경성 판관
1591년 의주목사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영 장군 휘하
용인에서 왜군과 교전했으나 안타깝게도 패전
권율은 광주로 되돌아가 남원에 주둔, 1천여 의용군 모집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왜군을 대파후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
정병 8천명을 인솔해 한양으로 진격
2천8백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
3만 왜군 중 2만 4천 사상자를 내는 전과
1597년 정유재란 종전후 1599년 관직을 사임
그 해 권율은
예순 셋의 나이로 운명한 영웅.
오성과 한음 중에서 오성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
그때까지 소위 장안의 한량으로 지냈던 권율.
42세때인 1578년 마침내 아버지 권철이 위독
72세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남긴 유언 한마디.
"널 내가
낳았구나"
권율은 아버지 3년상을 치르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해 2년만에 46세에 과거
등과
당시 사위인 이항복은 정5품 반열의 정랑직
권율의 출사가 얼마만큼 늦었는지 알 수 있다
남원에서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포용한 권률.
충무공을 역사에 남게 했던 또 하나의 인물.
................................................
충무공은 임진왜란 이조를 위기에서
구해낸 명장.
한반도 해안 항로에 어두운 왜군에게 학익진 전법.
방향전환이 장점인 바닥이 평평한 배로 왜선을 공격.
울돌목 암초지대로 왜선을 유인
진퇴양란 속에 빠트린 후 공격.
왜군에 쫓기듯 유인, 왜 함대를 암초에
걸리도록 유도.
암초지대에서 방향전환이 자유로운 판옥선 장점을 활용.
전력이 우세한 왜군의 자만심을 건드려 함정에 빠트리기.
치고 빠지고 도망치며 암초지대로 유인해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
바다속 암초와 바다물의 유속과 주변산세를 이용한 효과적인
공격.
비록, 왜군보다 열세인 병력과 군함이지만, 전략 면에서 앞선 충무공.
충무공이 이끄는 군함이 나타나면, 도망치기
바빴던 왜 함대.
훗날, 전사한 충무공이 왜 함대를 혼줄나게 격파한 일화도 유명.
충무공의 갑옷을 입은 부하 장수들이 신출귀몰하게
출현했던 탓.
충무공이 전사한 줄 몰랐던 왜군들
충무공의 그 갑옷만 보아도 혼비백산.
자신의 죽음을 감추며 나라를
구한 영웅.
거북선은 왜 함대에게는 살아 움직이는 암초.
젖은 우엉 위장망을 덮어 불화살 공격을 차단.
왜선에서 쏜
화살을 모아 왜군을 공격한 거북선
'거북선 천정 위장망 속 숨겨진 날카로운 송곳.'
백병전과 칼싸움에 능한 왜군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했다.
충무공 함대의 수군은 주로 어부 출신이라 백병전에 취약.
그대신 충무공 함대 대포의 유효사거리가 왜군보다
길었다.
충무공 함대의 원거리 학익진 대포공격은 왜함대에겐 치명적.
왜 함대는 충무공 함대에 접근조차 못하고 속수무책
무너졌다.
충무공 함대가 왜 함대와 싸운 23전 23승 기록이 이를 뒷받침.
거북선 전면 용머리에 장착된 대포
왜선을 향해 정면 돌격할 때 효과만점.
거북선이 왜선 측면을 받으면 지름 3자 구멍이 뚫려 침몰.
거북선 용머리
아래 숨겨진 통나무 돌출부분이 암초 역활.
거대한 통나무로 성문을 찍어 부수는 이치로 왜선을 공격.
왜 함대는 돌격선인
거북선만 보면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아예 거북선과 접전을 벌리지 말라는 왜군 수뇌부의 명령.
그러나, 충무공 진영의 전 함대는
젖은 우엉발로 위장했다.
왜군은 어느 배가 거북선인지
일반 판옥선인지 분별이 불가.
특히 후퇴하는 척하다가
돌아서서 공격하는 거북선의 위력.
왜 함대 전렬을 뒤흔들어 놓고 빠져나가며 학익진으로 포위.
쌍 학익진으로 왜 함대를 둥굴게
둘러싸면서 도주로를 차단.
왜 함대 대포 유효사거리 밖에서 이순신 함대의 원거리 포격.
하여, 왜 함대는 충무공 함대가
나타나면 지례 겁먹고 도주했다.
충무공의 거북선이 진가를 발휘한 해전은 '한산대첩과
명랑해첩'.
한산대첩.
B.C. 480년 그리스 데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1592년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
4대 해전.
1907년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일본 도오고 헤이하치로
이순신 같은 위인이라고 칭송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영국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감히 비교해 따라갈 수 없다”
충무공의 거북선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
한산해전 승리로 왜군들은 수륙병진 작전에 제동
충무공은 남서해안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게 된다.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 야욕을 꺽은 해전.
만약 한산해전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면
왜군이 남서해를
우회 명나라로 진격하였다면
한일합방(1910년)은 300년 전에 이루어졌을 듯.
그 당시 내우외환에 극도로 혼란했던 명나라
일본의 대륙 지배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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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음력 7월 6일, 여수를 떠나
노량으로 빠져 거제도
이조 수군의 깃발을 나부끼는 55척의 전선을 이끈 충무공.
전라 좌수사 이순신 편진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
전선 합세
왜군에 쫓긴 경상 우수사 원균의 일곱척 역시 노량에서 합류.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진 거북선
상개판을 덮어씌우고 쇠송곳을 꽂은 전선.
선체가 단단해 충돌 파괴력과 화력이 우세
이번 출전에 앞서 이미 이순신은
5월 초순과 6월 초순
1차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2차 당포 해전 승리.
왜장 와끼사까 수군은 대형 전선 36척 주력으로
총 73척
거제도 견내량으로 진출하여 다음 작전에 임할 채비 중.
그들은 이순신과의 전투에서 계속적으로 패배하게 되자
일거에 전세를 엎으려 칼날을 세우며 기회를 엿보던 참.
7월 8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미 왜 수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이순신
이른 아침에 닻을 올려 당포를 떠나 견내량 행.
이순신은 공격을 퍼붓지 않고 슬그머니 돌아섰다.
이순신은 전선 대여섯척으로 공격하는 척하는 한편,
싸움을 피하려는 듯 한산도 앞바다 쪽으로 슬슬 항진.
“물길을 살펴 볼 때,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으며
수로가 좁기 때문에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활동하기 어렵다.
그동간 왜적들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올라가 백성들에게 해끼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충무공은 좁은 박지내에서 전투를 피하고
왜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왜함 대장 와끼사까는 벼락같은
명령을 내린다.
“뭣들 하고 있느냐! 총공격의 신호를 울려라.
빨리 닻을 감아올려 조선 수군을 뒤쫓으라.”
왜군 73척은 앞을 다투며 이조 수군을 추격한다.
어느 새 한산도와 미륵도가 마주보는 넓은 해역
이순신의 유인
작전이 마음 먹은대로 성공한 것.
이순신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일제히 공격 명령.
이 때 남도 연합수군 전선들이 펼친
진형이 학익진
즉, 학이 날개를 활짝 편 모양으로 포위 섬멸 진형.
함선이 진형을 이뤄 기동항진하는 일은 퍽 어렵다.
열을 지어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동
평소에 실전같은 거듭된 훈련을 쌓지 않으면 불가능.
특히 학익진
진형은 고도의 반복된 기동훈련 결과.
뛰어난 지휘관의 능력이 바로 이런 점에서 보여진다.
뱃머리를 돌린 이조 전선들은 왜군을 향해
전속력 돌진
서로 마주 쳐다보며 접근하는 속도는 무척 빠르다.
공격 개시를 알리는 포성이 울리자 전선마다 함성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화염과 함께 천자총통의 폭음
적선 속으로 들어가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거북선
좌돌격장에는
이기남, 우돌격장으로는 박이량이 활약
이순신의 학익진 함대들은 선봉장 적선에게 집중 포화
한산도 앞바다는 130 여척
전선들이 뒤엉켜 격전.
이조 수군의 천·지·현·황 총통 성능은 위력적.
전선구조와 재질에 있어서도 이조함대가 견고했다.
특히, 이순신의 뛰어난 해상 전투기량은 왜를 압도.
왜선의 대장선이 깨지면 그것으로 전세는 기우는 법.
군졸은
일시에 기세를 잃게 되고 진형은 무너지며 패색
그와 반대로 초전부터 이기게 되면 사기는 충천하는 법.
중위장 권준, 중부장
어영담, 우부장 김완,
후부장 배흥립, 전부장 이순신(방답 첨사),
좌별도장 윤사공, 좌부장 신호, 좌척후장 정운,
우척후장 김인영, 유군장 황정록,
우별도장 송응민, 이기남과 박이량,
용맹을 다투는 여러 장수가 분전 역투.
시간이 흘렀다. 폭염속에 정신없이 날뛴 싸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누구도 의식 못했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적선에게 화포를 쏘며 공격.
한산 앞바다에 이조 수군들의 긴 나팔소리
그것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과 전승을 알리는.,
신호.
그 싸움에서 남도 연합수군은 왜선 47척을 태워 버렸다.
왜장 와끼사까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도망 쳤다 한다.
그 이튿날, 이순신 좌수사는 전날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왜적을 찾아 안골포(의창군 웅천면)로 나아갔다.
그
곳에는 왜적의 수군장 구끼와 가토오가 이끄는 40 여척
부산으로부터 옮겨와 정박하고 있을 때 공격을 감행
이조의 남도
연합수군은 포구 깊숙히 박힌 왜군을 분쇄.
두 차례 전투에서 이조 수군은 전사 19명과 전상 114명.
한산 해전과 안골포
승리를 묶어서 한산대첩이라고 한다.
매년 8월 14일에 한산 대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대첩 제례
해군 장병과 사관생도가 400년
전의 전승을 상기하는 행사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국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한산대첩에 뒤이어 큰 전과를 거둔
부산포 해전이 있었지만,
그 때부터 남해 바다에서 날뛰던 왜선은 자태를 감추고 만다.
북진했던 왜군을 위한 지원활동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수륙 병행 공격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명랑해첩.
해남을 지나 진도의 울돌목’은 임진왜란 격전지.
충무공이 12척의 배로 왜선 330
척을 수장시킨 곳.
넓이 325m, 수심 20m에서 유속 11.5 노트 소용돌이.
밀물 때 왜함대를 유인해서 썰물 때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
조총 유효사거리 50 m 밖에서 학익진으로 대포와 불화살 공격.
썰물이 빠지면 왜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
갇혀 오도가도 못한다.
왜 함대는 중량을 줄이기 위해 참나무로 제조해 충돌에 취약.
넓은 바다 풍랑에 견디게 할 목적으로
배의 바닥이 좁고 깊다.
하여, 암초에 부딪치면 약하고 썰물에 갇히면 오도가도 못한다.
충무공은 왜 함대의 취약한 헛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썰물 시간에 쫓긴 왜 함대가 도주할 곳은 오직 암초지대 울돌목.
바다속 암초에서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20리 밖까지 울리는 곳.
중국 동해에서 밀려온 거친 조류가 신안 앞바다를 맴돌고 도는 곳.
울돌목에서 유속이 빨라지고
사나워져 바닷물이 사이렌처럼 운다.
충무공 함대를 추격하느라 울돌목으로 들어섰다가 자멸한 왜 함대.
충무공은 12척 배로 수백척
왜 함대를 유인해 바다에 수장한 해전.
'마치, 공룡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울돌목.'
진도대교 인근의
우황리는 공룡의 화석이 발견된 곳.
진도 사람들은 울돌목의 바다 울음소리를 듣고 산다.
울돌목은 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 격전지.
1592년(선조25) 4월 13일에 왜적 함대 선봉이 부산을 상륙
5월 3일에 이조의 도읍 한양이 왜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였다.
그해 8월 29일 벽파진 및 9월 15일 울돌골 유속을 이용한 전투.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충무공 어록.
12척 배로 330척 왜 함대를 물리친 충무공의 작전과 전략.
나라를 구해보겠는
민관군의 합동정신으로 이룬 값진 승리.
충무공은 서남해안의 일본 수군을 격파해 다시 재해권 장악.
왜군은 이로 말미암아
북진을 멈추고 전의를 상실
하여, 한반도 남해안까지 후퇴해 전렬을 다시 정비.
울돌목은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소용돌이
암초지대.
신안 앞바다는 650년전 침몰한 보물선이 발굴된
곳.
노량해전.
'올때는 마음대로 왔겠지만
갈때는 마음대로 못가..해전.'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마지막 해전.
정유재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병사(病死)들.
철군할 때 충무공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적의 퇴로 차단.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은 진린에게 퇴로를
열어달라며 뇌물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해 왜군에게 총공격.
결국, 고니시는 경남 사천과 남해 전선 500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
그러자 충무공은 노량 앞바다로 진격해 적선 50 척을 격파하고
200 명의 적병을 사살하자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포위
그러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왜군의 퇴로를
막고 400척을 격파하는 동시에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자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친다.
이순신은 왜군을 추격하다가 왜군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이조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 전사.
이 전투로 7년간 끌던 이조와 일본 간의 임진왜란은
끝난다.
......................................................
......................................................
1598년 정유재란이
막바지일 무렵 도요도미 히데요시 급사
왜군을 철군하기 시작했고 순천성에 있던 고니시부대도 퇴각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은 전남 여수와
광양에 진쳐 왜군 포위
충무공은 왜군이 점령한 순천성을 공격한다고 거짓 정보 유출.
왜 함대는 뱃길 지름길인 노량을 지나
순천성을 구원하러 간다.
1598년 11월 18일 술시(밤 9시~11시) 부터 다음 날인 11월 19일
이 때 왜 구원병은
4만 7천이고 400척의 안택선과 100척의 누각선
이조는 화포 300 기, 1만 6천 병력, 50 척의 판옥선과 20척의 소선
명군은 수군제독 진린의 5천 수군과 40 척의 호선과 사선이 있었다.
충무공이 유포한 거짓 정보가 왜군을 순천성에
묶어놓는데 성공.
이조는 1만 6천 중 1만 3천명 전사하고 판옥선 50척중 26척 소실
명군은 2천여명 전사하고 17척 호선만
무사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충무공은 어떻게 1/5 병력으로 왜군을 물리쳤을까?
전략 1. 순천성의 왜군을
봉쇄시켰던 점.
충무공은 1만 6천 병력으로 7만 왜군을 분산시켜 승리.
수십척 배에 탄 이조 백성들이 순천성 밖에서
횟불시위.
왜군은 밤안개 속에서 이조 수군으로 착각을 하게 한 것.
전략 2. 매복 및 야간에 기습공격.
노량은 여러 섬이 있어서 길이 좁고 험하며 밤에는 암흑.
이조 수군이 매복했다가 왜군을 기습공격하는데 성공한다.
전략 3. 조총 유효사거리 밖에서 공격하라.
이조 함포공격은 왜군 조총의 유효사거리보다 유리.
이조
수군은 원거리 선제공격을 통해 일본수군 섬멸.
왜 함대는 충무공 함대와 싸워보기도 전에 무너진다.
전략 4. 화살
유효사거리 안에서 공격한다.
이조 수군은 주무기가 활이라 유효사거리가 짧다.
하여, 갈고리로 왜선을 화살 공격범위로
끌어당긴다.
왜 함대보다 크고 높은 이조 함대는 위에서 아래로 공격.
이조 함대 지붕은 송곳으로 뒤덮혀 왜군이 접근조차 어렵다.
작전5. 사기를 높여라.
이순신은 군사를 사랑한 칭송받는 장군 중 하나.
이순신은 전쟁 승패를
좌우하는 군 사기를 격려.
왜장 함대를 집중공격 그 목을 배어 배위에 걸기.
대장 잃은 왜함대가 우왕좌왕하할 때 승리 굳히기.
명량해전 대패로 정복의지가 한풀 꺽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이순신 가족의 몰살을 은밀히 지시.
와키자카는 충무공과 당당히 맞서고 싶지만 아산으로 간다.
충무공은 막내아들 면을 잃은 슬픔을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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