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기생.
진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깊은 기생의 역사를 갖고있다.
진주 기생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한반도 기생의 역사를 뜻한다.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술자리의 시중을 들던 특수한 계층의 여성.
기생 또는 창기문화는 고대중국
은나라에서 유래.
특히, 당나라에 들어와 창(娼) 자를 사용한 흔적.
기(妓) 자의 뜻도 현대와 고대 중국과 전혀 다르다.
기(妓)란 '婦人小物也' 뜻풀이를 하면 놀이개란 의미
娼 또는 妓 명칭은 한나라 이후 倡妓, 女倡, 女妓, 御妓
(1) 은나라 湯왕에서 紂왕까지(BC 1783 - BC 1123)
660년간 무창(巫娼)시대, 즉 일명 종교적 매음 시대.
이 시기를 고대중국 창기 역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2) 西周에서 東漢이 멸망하기까지(BC 1122 - AD 219)
약 1330년의 기간으로 노예 창기 및 官娼의 발생 시기.
(3) 남북조를 지나 수(隋)가 망할 때까지(AD 220 -
617)
약 435년간 家妓와 노예 창기가 함께 발전하던 시대였다.
(4) 唐, 宋, 元, 明의 4대(AD 618 -
1643)는 관기 전성시대.
약 1028년 간 당과 송에 관기(官妓)와 영기(營妓)가 있었다.
(5) 1619년 淸의
건국후 1911년 신해혁명까지
약 290년간, 사설경영(私設經營)의 창기 시대.
송나라 창기 제도는 당나라 제도에서 기인.
북송(北宋)은 관기 및 영기 제도가 있었다.
남송(南宋) 항주(杭州)에는 많은 와사(瓦舍)
송나라 태종이
북한(北漢)을 멸망시킨 뒤
부녀자들을 탈취해 군영으로 끌고 다닌 것
이것이 영기 제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관기 제도는 식구가 없는 관료들에게 제공되었다.
관기 몸값은 5천 냥으로 5년 만기 후에야 귀가가 가능.
본관이 관기를 데리고 갈 경우 다시 2천냥을 내야 했다.
중국 장안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방탕한 매음굴.
그들의
자제들까지도 흘러 들어 타락의 장소로 변했다.
소흥과 양기 군영이 많은 지역은 서북 사람들이 많았다.
서북사람들은
와사(매음굴)를 만들고
기녀들을 모아 병사들을 상대로 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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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한량들은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 했다.
해어화(解語花)란 '말하는 꽃' 기생을 일컫는다.
한반도의 기생은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에서 비롯.
전쟁에서 패한
고대국가 부녀자들은 관기(官妓).
고려 때 교방제도와 기생학교는 이조시대에도 계승.
이조 중기 유교문화와 융합 독특한 기생문화를
낳는다.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 등등은 시조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고려가요도 문학성이 뛰어난 기생층이 향유,
전승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난 기생을 명기라 한다.
미모로 이름난 기생, 가무를 잘해 이름난 기생.
시사(詩詞)를 잘하거나 해학을 잘해 이름난 기생,
서화를 잘해 이름 난 기생,
신의를 지켜 이름 난 기생.
황진이, 홍랑, 매창 처럼 시를 잘하는 기생은 유난히도 많다.
이들 기생의 시는 당대 시인들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이조시대 문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정적인 작품들.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보내오니
님
주무시는 방 창가에 심어두고 보시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나를 본 듯 여기소서.'
이조시대 선조 때 함경도 경성
기생 홍랑의 작품이다.
홍랑은 당대 최고 시인 중 한사람 최경창과 정분 깊었다.
선조 6년 최경창이 북해 평사(北海評事)로
경성에 가 있을 때
홍랑이 이듬해 서울로 돌아간 최경창을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러 저문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마음 담았다 한다.
이조 유교문화에서 관기는 천대와 멸시를 겪으며 태어났다.
나라의 중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엄격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
하여, 중죄인은 왕에게 사배 후 사약을 기꺼이 마셔야만 했다.
중죄인의 삼족은 살아 남더라도
노비가
되어 대물림 벌을 받았다.
하여, 사면을 받지 못하면 대물림 노비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특히, 중죄인의 삼족 여인네들은
관기가 되어 살아가야 했었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어도 기생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기생이 멸문 가문을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
몸을 팔아 부를 축적 또는 권력의 힘을 빌리기.
장래성 있는 당대 석학을 지극 정성 섬기는 길.
당대 석학을 분별할 안목과 사로잡을 만한 재색.
'이조 때 진주에 기생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조의
시조 이성계는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불렀다.
그후 이조는 지리산 일대의 불교문화 탄압정책을 썼다.
지리산은 고려 세력 은둔처이자
우리나라 불교의 성도.
사찰에 암행어사를 파견하거나 과중한 세금을 부과.
국사제도 승과 과거시험 폐지.도성안 승려
출입금지.
불교종파를 소수로 통폐합하고 종파 별 사찰 수를 제한.
'수많은 사찰이 문을 닫자 갈곳 없는 승려들.'
비구는 관노 삼고 비구니는 방지기 또는 관비가 된다.
이조 억불정책에 의해 수많은 승려가 8천민으로 전락.
남원
진주의 기생문화는 이조 억불정책 유산인듯 싶다.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불렀던 이조시대.'
당파싸움으로 억울하게
가문이 몰락한 양반 규수.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한 듯.
진주를 찾는 명사 또는 유배지 당대 석학들과의
교류.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듯.'
진주기생은 옛부터 충절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조에서 박해받았던 승려와 기생은 국란 때마다 나라를 구했다.
이조를 임진왜란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조는 잦은 당파싸움으로 중죄인 신분이 뒤바뀌었다.
공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공신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관비가 되었다가 신분회복이 된 후의 사회 문제.
하여, 관비제도로 인한 문제점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기생학교에서 관기를 양성하는 교방제도를 도입했다.
14살 전후 어린 처녀를 모아 3년 이상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교방은
고려·조선 시대부터 기생들의 노래와 춤을 관장한 기관.
교방청은 중국 당나라 궁중에서 관기에게 가무를 가르치던 관청.
중국 교방은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때 도입,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이조에는 장악원 소속의 좌방(아악)과 우방(속악)을 교방이라 불렀다.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 기생들은 악기 노래 춤과 예기를 익혀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조선 말기에 기생은 일패(一牌)·이패·삼패 등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고
이패는 밀매음 (密賣淫) 기생,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기생의 신분을 3등급으로 나누어 관청
별로 관장한 삼패제도.
이조 제도에서 관기는 본관 사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남원고을 춘향의 정절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유 그 때문.
기생이라도 언제 신분회복이 될지 모른다는 의미도 담긴 듯.
하여, 격조 높은 기생은 사대부 양반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기방은 품격 높은 사대부와 기생의 로맨스 산실.
격조 높은 기생은 당대 석학들과 겨룰만한
시를 구사했다.
아울러 신분 격차를 초월한 깊은 연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1905년 ‘진주교방’은 을사조약으로 문을 닫게
된다.
진주교방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기생조합’이 생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조합이 서울의 광교 조합이었다.
광교조합은 유부녀 기생조합에서 한성권번으로 개칭.
기생조합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14년 경이다.
'권번은 이조때 기생을 총괄하던 교방청의 후신.'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대동권번·한남권번·조선권번,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고, 그 밖에 진주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등에도 각각 권번들이 조직되었다.
당시 기생 1백여명과 견습생 5-60명으로 학부를 설치해서
오전과 오후 2번에 걸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을 교육.
약 3년의 수업 연한을 거쳐 고전시조 가야금 등 무곡 유행가
서화 국어 예법 등 학술 과정을 더해 졸업자에 한해 기생 자격
'관기가 기생이 된 교방은 일제 때 유곽으로 바뀐다.'
기생 본연의 품격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진주교방.
100 년전 위암이 진양삼절 중 하나라고 만천 하에 알린.. 진주기생
진주기생들이 만든 교방이 있어 많은 시인과
가객이 진주를 찾았다.
당대 문인들은 풍류를 찾아 진주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주 권번은 1915년 진주경찰서
경무부장 전전승(前田勝)이 설립.
진주 기생조합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경찰서에 함께 근무하던 경부인
최지환에게 은밀하게 재조직을 지시.
이때 금향을 비롯한 고참 기생들이 만든..‘진주기생조합’
얼마 후 부채를 갚고 재정이
건실한 진주권번으로서 발전.
당시 진주기생조합은 기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으로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뀐다.
그리고, 남자들의 손으로 권번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1939년 11월 2일 드디어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의 창립
이 회사는 자본금 5만원을 최지환씨등 8명이 평등하게 출자
전통적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취지로
만들었다.
권번에서는 동기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화대 받는 역할을 담당.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라서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고
이들 권번기생은 다른 기생들과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즉, 1970년대의 밀매음 기생문화와는 품격이 달랐던 것이었다.
...................진주기생들의 삼일만세
의거......................
논개의 충절, 매국노 이지용의 첩이 되기를 거부한 산홍이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를 외친 진주의 기생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기생들의 태극기 행렬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
기생 6인을 구금했을 때 한금화의 혈서.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가 피누나.”라는 노래 가사
고은 시인도
<만인보2>에 <기생독립단>에 대한 시를 남겼다.
-기생독립단-
평양기생 아미녀가
떨쳤지요
사나이들 뼈깨나 녹았지요
평양하고 비슷한 데가 진주성이지요
대동강하고 남강이 사촌이지요.
진주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 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병원으로 가서도 검진 거부하고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외쳤지요.
만세를 부른 기생들은 다 붙잡혀 가서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기생들은 꽃값을 받아 영치금을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만세 주동자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궁할지라도
조선 불효자식에겐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따라 주지 말고
권주가 또한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김향화>는 진주기생이 아니고 수원기생.
3월
29일에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
검진받기 위해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독립만세.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의 만세 의거
사건.
진주 기생들의 만세 의거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자못
불온’이란 기사.
이때 기생들의 의거는 진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거.
4월 1일 해주의 기생일동은 손가락을 깨문
피로 그린 태극기
이에 용기를 얻고 참여한 만세시위 군중은 3천명이나 되었다.
진주기생조합 기생들의 3·.1 만세 의거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생은 나라로 부터 대우를 받기보다 멸시를
당하던 신분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나라에서 기생에게 베푼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굳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유가 없었던 기생들.
이 시대에서 다시 한번 곰곰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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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남원은 반야봉을 마주보는 위치.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은 지리산을 닮았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삶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지리산자락 마을마다 풍습과 삶도 각양각색.'
지리산을 바라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보인다.
격동의
역사와 피맺힌 민족 한까지 품은 지리산.
섬진강은 그 아픔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손길 같다.
진주와 남원은 서편제와 동편제
판소리의 본 고장.
지리산과 낙동강은 풍류문화와 판소리의 산실이다.
진주 기생은 우리나라 문학의 큰 주류를 이룬 산실.
'산홍, 승이교, 채란, 매화는 진주 명기들.'
산홍.
의암사에는 매국노를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의 시가 걸려있다.
김소월 시인의
정한(情恨)을 뜻하는 진달래 꽃이 산홍화(山紅花)
마산 출신 가수 진방남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산홍이기도 하다.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 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 달없는 사막, 불꺼진 항구.'
옛부터
‘북 평양 남 진주’라고 불릴 만큼 명성 높았던 진주기생
가무가 뛰어났고 , 정조가 두터워 왕실잔치에 불려나갔던 명기들.
구한말의
애국선비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도 기록된 기생 산홍.
'매국노 이지용이 천금을 싸들고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
"모두가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들에게 주시지요."
산홍은 당대의 권력자 이지용을 매국노라 꾸짖었던 정의로운 기생이다.
이지용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
그당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을 산홍이 했던 것.
역사는 산홍의 정의로움을 논개의 정절 못지않게 높이 평가한다.
1906년 이지용이 산홍에게 거절 당했기에 의암사 현판에
걸린 시.
'촉석루 곁 의기의 벗들
평양성 안에 충랑의 이름
산홍이 한낱 유곽에 남았으나
누군들
열녀의 정렬로 일컫지 않으랴
어느 역적 부엌에다 요리상 올리라 하니
큰 소리로 도마치며 문밖으로 나갔네
가련하다
그날 여러 역적들 살려 두었으나
개들도 주인 마음 알아 남은 음식 먹지 않았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紅一點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매국노를 꾸짖은 산홍을 위한 시'가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그곳 현판의 시를 음미해 봐도 좋을 듯.
승이교(勝二喬).
진주 기생 중에 가장 뛰어난 시인은 승이교(勝二喬).
승이교는
‘해어화사’에 조선시대 명기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 억춘이 승이교라고 이름을 지었던 사연는 무엇일까?
중국 삼국시대 강동의
영웅 손책과 주유는 동서지간이다.
이들은 당대의 미인, 대교와 소교를 각각 아내로 맞이했다.
손책의 부인이 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이
소교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승이교는 ‘대교와 소교 즉 이교를 능가한다’는 의미.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그렇게
불리웠을까?'
승이교에게 마관(馬官)벼슬을 한 김인갑이란 애인이 있었다.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 6 품 외관직인
조선시대의 관직.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를 총괄.
승이교는 총명하여 김인갑의 사랑을 받았고
그에게 시를 배웠다.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일어나니
뒷산은 붉게 물들고 앞 강은 맑아
비단 창에 달 밝으니 벌레소리
목메어
외로운 베개 찬 이불에 잠못 이루네
江陽館裏西風起
後山欲醉前江淸
紗窓月白百蟲咽
孤枕衾寒夢不成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설은 것을
연당에 가을비 부슬부슬
이슬맺힌
가지엔 매미소리 목메이네
추위에 놀란 기러기 저소리
쓸쓸한 산성을 넘어가누나
님 그리는 꿈에서 깨어나 보니
가을 달빛이 창으로 비쳐드네
西風吹衣裳
衰容傷日月
蓮堂秋雨疎
露枝寒蟬咽
霜雁墜飛聲
寂寞過山城
思君孤夢罷
秋月照窓明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격찬.
“아직
어리고 총명하니 정진하면 옥봉(玉峰)의 경지에 이르리라."
옥봉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연시는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창가에 달 오르니 그리움 사무칩니다
꿈을 꾼 것들이 만약 흔적이 되어있다면
그대 집 문앞 돌길에 깔린 모래가 되었겠지요.
갈바람이 치마폭 휘 불때마다
뜬 몸엔 가는 세월 속 설운 것을
연당에는 가을비가 부슬거리고
이슬 맺힌 가지엔 매암이 우네.'
'김소월의 스승' 김안서 저서
‘한국여류 한시선집’ 中에서..
채란.
채란은 진달래 꽃과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기생.
봄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한반도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꽃.
바라만 보아도 곱고 하도 흔해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꽃.
그녀는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떠돌며 몸이 팔려다녔던
신세.
김소월 시인이 남긴 불멸의 대표작 <진달래 꽃>의 여자 주인공.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으로
돌아온 민족 시인 김소월.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에 민족 설움과 애한이 깃든 시를
발표하며 채란을 만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채란은 생모 아닌 편모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채란이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탓.
편모는 개가 밑천을 마련하려고 13살 채란을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가 연변에서 소월을 만난다.
그당시 진주는 관기, 교방도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뀔 무렵.
채란은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없는 몸’.
타향으로 팔려다니면서 스스로 춤과 노래를 익히고,
멀리 고향이
그리울 때에는 시로 마음을 달랜 듯 보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 붓들면 님이지.
............팔베개
노래............
花紋席 돗자리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팔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 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 차비를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뿐.
................................................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알려졌다.
채란은 김소월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던
여인.
대표작 <진달래 꽃>은 채란과의 이별을 시로 표현.
채란을 만나 헤어져 죽을 때까지 남긴 시엔 그 흔적들.
.......김소월(1902 8.30∼1934]........
본명 :김정식( 金廷湜) 배재고보 졸업
경력은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운영했다.
본관은 공주(公州).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생.
오산(五山)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
...................................................
.........김소월의
작품들................
1922년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 춘강(春崗)
오산중학시절 作. 문단에 오른 후 발표.
먼 후일,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배재고보에 편입한 후
대표 작품.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등등 8편.
1922년 -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진달래꽃>,
소설-<함박눈> 산문시-꿈자리, 깊은 구멍. 등등 발표.
1923년 - 설움과 애한의 정서가 깃든..'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시 작품을 발표.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면에서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진달래꽃' 시집.
....................................................................................
매화
매화는 기생이나 인물고운 계집 종 이름.
사랑하는 남녀 결합을
상징하는 꽃 매화.
매화는 이조시대 기생 이름으로 널리 통용.
눈 속에 홀로 핀 소녀 기생.. 매화
'재가열녀'라고도 하는 이조시대 명기.
약 220 년 전, 황해도 곡산 16살 동기(童妓)., 매화
빼어난 청순미에
노래도 잘 불렀고 특히 시조에 능했다.
정절을 받치면 일생을 섬겨야만 한다는 철저한 정절 관념
그 소녀 기생의 정절을
취하려는 뭇 풍류 묵객들
그만한 남자 아니면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매화.
전국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남자들을 마다했던 그녀.
칠십 고령 어윤겸에게 열 일곱 순결을 받친 매화.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이 곡산에 순시 차 들렀을 때 였다.
곡산 사또가 마련한 주연에서 매화를 보고 반했던 어윤겸.
그날 밤, 어윤겸의 시중을 들기 위해 객사로 찾아 온 매화
내면에 일렁이는 흔들림을 감출 수 없었던 어윤겸.
그녀가 금침을 깔아 놓고 나가려하자 불러 세웠다.
매화는 그
의중을 짐작하고, 살포시 곁에 앉았다.
"올해 네 나이 몇이냐?"
"예, 열 일곱이옵니다."
"너는 여지껏
머리얹어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더냐?"
"아니옵니다. 있긴 있었사오나 소녀가 거절하였습니다."
"거절하다니..그 연유가
무엇인고?"
"황공하옵니다마는 천기일지라도,
한번 몸을 허락하면 수절해야 하옵는데,
아직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음, 갸륵한 생각, 여자는 정절이 생명이어야지.
너의 정절을 지키려는 갸륵한 뜻에 감탄했느니라.
너는 네가 바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정절을 지키거라."
"......................."
"내 비록
늙었으나 몸이 동하지 않는건 아니다만,
네 뜻을 가상히 여겨 보내는게다. 어서 돌아가라."
"소녀는 오늘밤 여기 머물러 영감을
뫼실까 하옵니다."
17살 동기(童妓)가 첫 순결을 바치겠다고 하자
어감사는 당혹스러웠고 안스러웠지만 내심 기뻤다.
이백의 시를 생각하며 매화의 손을 끌어 잡은 어윤겸.
'인생은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환락을 다할 것이니
황금의
술단지를 달빛 아래에 헛되이 버려 두지 말라- 이백.
매화가 들여 온 주안상을 밀쳐낸뒤 촛불이 꺼졌다.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 두 사람 숨소리만 들렸다.
칠십 고령 어윤겸과 17 순결을 여는 매화와의 첫날밤
어윤겸의 극진한 애무가 난생 첫
남자였던., 매화
차츰 그녀를 달아 오르게 하고 몸부림치게 하였지만
나이 차가 워낙 많아 매화의 뜨거움을 식히는데는 한계
스물이 되자 매력이 철철 넘치는 무르익은 여인의 모습
한편, 어윤겸의 몸은 초췌해지고 점점 늙어 무력해졌다.
그무렵, 죽기 전에 보고 싶다는 어머니 편지를 받은 매화.
이 편지를 매화로부터 전해 본 어윤겸은 걱정과 위로
부담마(負擔馬)와 로수(路需)를 주며 다녀오라고 했다.
다음날 일찍 매화는 고향 곡산에 도착해 어머니와 상봉.
병이
위독하여 죽을 날을 기다리며 누웠다던 어머니.
버선발로 달려나와 사립문을 열고 딸을 반긴 어머니.
어머니가 매화를 황급하게 부른
사연은 따로 있었다.
어윤겸이 해주 감영으로 간후, 후임 곡산 사또 홍시유
매화를 찾았으나 이미 어윤겸따라 해주 감영으로
간 후.
홍시유는 안타까워 매화의 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펴준 것.
매화의 어머니는 감동해 딸에게 편지까지 보냈던 것.
그녀가 곡성 사또를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자 화답.
"매화야, 내가 너를 위해 매화타령을 부르마."
몽매에도
그리워했던 여인을 눈앞에서 만나자
그녀가 상관의 여인인 사실도 잊어버린., 홍 시유.
홍 시유의 젊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반한, 매화
매화타령에 맞춰 춤추고 오랜만에 흥을 맘껏 돋우었다.
어윤겸에 대한 죄책감과 홍 사또 매력에 빠져드는 자신.
난생 처음 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는 기진맥진한 그녀.
태우고 태워도 끝없는 정염
퍼내고 퍼내도 바닥없는 욕정
보름 동안이 너무나도 짧았던 두 사람.
그러나, 어윤겸에게 돌아가야 하는 매화.
'죽어 니즈랴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 매화.
강 위에 눈 녹으니 강물이 불었는데
밤이 되니 강 위엔 죽지가 슬픈 곡조.
당신을 보내고 나면 그리움을 어찌하오.
천리라도 그리운 맘을 물결 위에 보내리. -홍시유.
살들헌 내 마음과 알돌헌
님의 졍을
일시상봉 글리워도 단장심회 어렵거든
하물며 몃몃 날을 이대도록 - 매화
해주 감영으로 돌아온 매화
홍시유를 향한 마음속 그리움.
"꿈에 뵈는 님이 인연 업다 하건마는
탐탐이 그리온제 꿈 아니면 어이하리
꿈이야 꿈이언마는 자로자로 뵈여라" - 매화.
심중(心中)에 무한사(無限事)을 세세(細細)히 옴겨다가
월사창(月紗窓) 금수장(錦繡帳)에 님 게신 곳 전하고져
그졔야 알들이 그리는 쥴을 짐작이나. - 매화.
야심(夜深)
오경(五更)토록 잠 못 일워 전전(轉輾)헐 졔
구즌 비 문령성(聞鈴聲)이 상사(相思)로 단장(斷腸)이라.
뉘라셔 이 행색(行色)
글려다가 님의 압혜 - 진주기생 매화
매화 녯 등걸에 춘절(春節)이 도라오니
녜 픠던 매지(梅枝)에 픠염 즉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똥말똥 하여라 - 매화.
죽어 니저야 하랴 살아 글여야 하랴
죽어 닛기도 얼엽꼬 살아 글의이도
얼여왜라
져 님아 한 말씀만 하소라 사생결단 하리라 - 매화.
홍시유를 향한 그리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매화
자리에 누워버리자 놀란 어윤겸이 명의를 불러다 진맥
좋다는 약을 다 조제해 먹였으나 나을 리 없는 상사병.
어윤겸은
할 수 없이 매화를 고향 곡산으로 돌려 보냈다.
매화는 모처럼 그리웠던 홍시유 품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병신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된 홍시유.
어윤겸 감사의 해주 감영에 갇혔다가 참형을 당한 홍시유.
홍시유가 참형당하자 그
정실부인도 남편따라 목 매어 순사
매화는 그 부인의 죽음을 보고 존경과 흠모의 정을 느끼었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를 선영에
안장하고
날마다 그 묘를 찾아가서 울며 지냈다.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리워 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씀만 하소서, 사생결단 하리라. -매화 -
다음날 매화의 시신은 홍시유 무덤 곁에서
발견되었다.
어윤겸을 떠나 사랑을 찾아 홍시유에게 달려 갔던 매화.
홍시유를 위해 죽자 '재가열녀(再嫁烈女)라 불리운 매화.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매화.
고희 감사 애무만으로 갈증을 채울 수 없던 그녀.
결국, 홍시유
무덤 앞에서 숨진 재가열녀(再嫁烈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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