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蘇氏)
고소산성은 한자로 고소(姑蘇)라고 쓴다.
姑는 마고를 뜻하고 蘇는 소씨를 뜻한다.
마고는
한반도 모계사회 여왕이자 제사장
소는 단군조선의 전신인 우리나라 국호.
마고와 소가 결혼하여 조선을 일궜다는 신화.
그 사이에서 태어난 8딸이 팔도를 다스린 무당.
고대 모계사회에서 무당은 공주의 신분를 뜻한다.
'공주가 통치자
후계자였던 모계사회.'
..................... 蘇(소)..................
한단고기는 단국을
일컫는 우리나라 옛 이름.
단군 조선의 전신으로 단군이 태자였던 나라.
소(蘇)는 단국(檀國)의 홍제(洪帝) 8년에
황제(黃帝) 손자인 제곡고신과 반목하던 기풍
홍제에게 귀순하여 숙신(하얼빈 북쪽)에 정착
단국과 제곡고신국 국경
수분하를 건너 침입 때
이를 물리쳐 하사받은 성씨가 晉州 蘇氏씨 시조
...............................................
...............진주
소씨(蘇氏)의 유래.....................
소씨는 동구이(東九夷) 중 풍이(風夷) 후손
기원 전 4241 년 풍주
배곡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 씨,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소씨의 시초이다.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길림성)의 하백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했다.
660년(태종무열왕 7) 3윌 3일 알천(閼川)이
진주(晋州)로 낙향,
경(慶)으로 이름을 고쳐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따님이 헌종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
그가 진산 부원군에 봉해지며 관향으로 삼은 진주.
소경(蘇慶)은 577년 (진지왕 2)에 태어나
647년 (진덕여왕 1) 2월에 상대등에 올랐다.
상대등(上大等)이란 신라 6대 귀족회의 의장.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귀족들은 공에게 섭정을 요청
그는 섭정을 사양하며 그대신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신은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태종 무열왕은 경(慶)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 소벌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소알천(蘇閼川)인데 팔순 넘도록 손이 없었다.
어느날 꿈에 나타난 선조 백공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9치(9장군)을 얻으리라"
그 후 무열왕 3년 3월 도사곡(진주
상대동)으로 이사
결국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그 기쁨으로 자신의 휘를 경(慶)이라 개휘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9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
9세 9장군(9世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
...............................................................
.......진주소씨 족보서문..............
「옛날에 적제(赤帝) 즉 황제요,
휘가 부해(復解)이고 호가
축융(祝融)」
한국의 제(帝)가 되어 기묘년에 나라를 세우고
풍주의 배곡에 도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인천제의 깃발인 휘가 부해,
즉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상징.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사람'
즉,
하늘에서는 태양을 상징.
땅위에서는 불을 다스리는 신.
부해란 해가 둥글게 떠오르는 것.
부상(扶桑)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즉,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이 부상이다.
항(姮)자를 파자해 풀이하면 '해맞이 여자'.
즉, 하늘과 땅
사이 태양을 맞이하는 여자.
신년 초하루에 한인천제를 맞이하는 해맞이.
일년동안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
9천년전 한인천제가 해맞이를 하며 기원했듯
한인천제는 최초로 태양을 숭배했던 제관
한인천제는 5제 중
남방적제(南方赤帝)
축융(祝融)은 축(祝)은 빌다, 기원하다.
또는 신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융(融)은
화합하다, 녹이다, 녹다 는 뜻
한인천제가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인간들 간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늘에 제사를
맡아 지내는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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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녀.
경주 인왕동 국립박물관 앞 도로로 이어진 남천내.
개울따라 한참 가다보면 천원동네에 천관녀의 절터.
김유신을 죽도록 못잊은 비련의 주인공이., 천관녀.
논 둑길을
따라 도착한 곳에 천관녀 절터 안내문
그녀의 슬픈 사랑을 더욱 아프게 떠오르게 한다.
석등 받침대와 탑 조각들은 바닥에
깔아 놓았다
그녀는 조국 가야의 멸망을 김유신과 함께 겪는다.
천관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박혁거세의 왕릉
천관(天官)은 원래 제사장의 역활을 하는 직업.
천관사에서는 저멀리 김유신의 생가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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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
역사 속에 그녀는 기생이었다고 전해온다.
김유신은 청년시절 그녀에게 흠뻑 빠진다.
'김유신과 같은 가야인이었던
그녀.'
김유신이 사랑에 빠져 학업을 게을리하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김유신을 꾸짖는다.
김유신은 그녀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
그러던 어느날 김유신은 활쏘기 연습에 지쳐
말등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그녀 집 앞에 간다.
애마가 평소의 버릇대로 그녀의 집앞에 멈추자
김유신은 칼로 애마의 목을 쳤다는 유명한 일화.
뒤늦게야 제
정신을 차린 김유신
스스로 결심을 가다듬기 위한 자책.
그 광경을 목격하고 비구니가 된 천관녀.
김 유신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그녀.
사랑하는 님의 오고 계시는 말발굽소리.
그 소리만 듣고도 반갑게 달려나온 천관녀.
님을
싣고 온 말이 님의 손에 베어지는 광경.
'두고 두고 피맺힌 한이 되었을듯.'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힘을 합쳐
삼국통일을 하고 다시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끝내 비구니의 길을 간 천관녀.
진평왕 때 태어나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거쳐
태종 무열왕까지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김유신
여동생 문희를 무열왕의 정실부인으로 등극시켰고
가문을 일으킨 김유신 가슴속에는 늘 첫사랑 천관녀.
평생 김유신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다가 죽은 비구니.
천관녀가
죽은 그 집에 절을 세워 명복을 빈 김유신.
천년 세월이 지나 그 탑도 무너지도 터만 남은 천관사
탑의 잔재가 두 사람의 가슴아픈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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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란 춤 노래 풍류로 흥을 돋우는 예기의 총칭.
그 원조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 원화(源花)에서 발생
고려를 거쳐 이조시대에 들어와 많은 관기가 생겨났다.
관기는
지방 관아에도 딸려 지방관 위락(慰樂)의 대상
기생을 즐긴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기생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成川)
해주(海州)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등이었다.
시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는
황진이 매창 소백주 등이 있고,
의기(義妓)로는 계월향, 논개(論介),가산(嘉山)의 홍련(紅蓮)
천민이지만 시와 서예에 능한
기생은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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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녀는 원래 기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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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원화였던
듯.
노고단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의 여사제.
여신을 모신 국가 제사라 여사제를 등용한 듯.
'천관녀는 김춘추와
김유신 둘 다 반할 미모.'
신라에 불교가 중흥하며 여사제 제도 폐지.
신라에서 여사제 신녀는 기생 신분으로 전락
따라서, 천관녀는 기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24대 진흥왕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
급변했던 신라 개혁시대
실상이 짐작간다.
삼국시대에 국가 존립이 위태로웠던 신라.
고구려 백제보다 국력이 약했던 신라.
꽃다운 화랑들이
위기 속 신라의 대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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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의 국가 제사를 주관했던 여사제.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높은 신분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이 여사제.
'신라의
<천관녀>는 <라합>과 같은 여사제.'
신라에서는 높은 신분이 보장되는 여사제.
노고단의 성도성모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
신라에서는 여사제가 성도성모를 모셨던 듯.
훗날, 불교가 중흥하며 제사 풍습이 쇠퇘.
천관녀
여사제 높은 신분도 무당으로 전락.
통일 신라시대 이후에는 기생으로 전락한 듯.
하여, 김유신을 사랑했던 천관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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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어가는 과정.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변했던 사회적인 변화.
모계사회가 붕괴되고 부계사회가 정착될 무렵.
메소포타미아(히브리 또는 합비아) &
이집트.
두 문명사회를 오가던 대상들이 지배한 노예층.
이집트 내에서 문명건설의 노역을 맡거나 떠돌이.
당시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노예들이 팔레스타인
이 탈출을 이끈 영도자가 성서속에 나오는 모세
모세가 죽고 여호수와가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정착한 히브리인들.
이집트나 로마의 천민 계급 내지는 노예층.
민족지도자 모세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탈출.
이집트 - 아라비아 - 요르단강 - 팔레스타인.
노예층이 요단강 건너가 정착한 축복받은 땅
일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곧 팔레스타인
그런데, 요단강 도하를 가로막는 견고한 성 '여리고.'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 여리고성 일대 지형을 탐지
정탐꾼들은 여리고성 내 '라합' 여인 집에서 정탐 업무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정탐꾼들을 내놓으라 성화.
라합은 그들이 이미 떠났다며 정탐꾼들을 도와준다.
여호수와 군에게 점령된 후 여리고 성 주민들은
전멸
라합은 정탐꾼들읠 도와서 구원받고 유다 청년과 결혼.
예수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라합>이란 어떤 여인일까?'
개역 성경에는 기생이라 번역
공동번역성서에는 창녀라 번역.
히브리는 노예와 유랑민의 집단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을 노예로부터 벗어나게한 해방신.
유랑민에게 정착할 수 있는
땅을 찾아주었던 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여호와(야훼)라 명명.
만군 = 군대를 총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라는
의미.
하여, 야훼는 신전이 없었고
광야에서 민중과 함께 행군
일정한 숭배 장소도 없었다.
그들이
정착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농경지방.
그곳은 그들이 조상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토.
그들은 비옥한 그 땅을 지킬 많은 자손이 필요.
'그 꿈을 이룰려면 건강한 여인과의 성생활.'
그래서 땅과 여인을 상징하는 신을 섬기게 되었고
이 신에 대한
경배와 제사의례로 거룩한 성교 의식
성교에 의해서만 자손을 번식시키고 농축산물의 결실
대표적인 여신 '아세라'를 섬기는
아세라 신전.
여사제가 상주하며 신전 순례자들과 성교 의례
이러한 여사제를 점령군 야훼 쪽에서 보면 기생
라합은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창녀가 아니라
신전에서 성교의례를 수행하는 여사제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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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여 신녀(神女)
여미을
금와왕이 국가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여미을과 의논.
예지력을 지닌 그녀의 자문을 받은 후 중요사안을 결정
고대국가에서 무당인 신녀(神女)는 제 2 인자.
신분 상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제사장.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
삼국시대 통치이념 불교 정착후 사라진 신녀(神女)
기생으로 전락하거나 비구니가
된, 신녀.
천관녀 역시 그러한 '운명의 길'을 걷는다.
천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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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天冠山, 723m)은 천관녀가 머리를 깍은 산.
비구니가 된 천관녀에 관한 전설이 서려있는 명산.
오매불망
못잊을 김유신 장군을 잊으려 한 천관녀
천관녀가 여생을 보냈다는 경북 월성의 어느 암자
전국을을 다녀보면 수많은
기암괴석 명산들.
환희대에서 바라 본 지나온 천관사 능선
대세봉, 구정봉, 천주봉 농안제쪽 지장봉
하나같이 천관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
구룡봉 능선에서의 진죽봉과 지장봉은 압권.
연대봉 억새밭에 술자리 펴고 복분자 한잔술
천관녀의 풀어헤친 젖가슴 속살 품에 안긴 듯
바람에 허리 꺾을 듯 억새의 유혹적인 춤사위.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억새평원 춤사위
천관사 능선 오름길 진죽봉, 지장봉 능선의 기암들
지장봉 내림길 천관사 능선의 대세봉, 구정봉, 천주봉
아름다운 기암괴석들의 승천하려는 듯한 산세.
수정재 돌아 산죽 터널을 지나면 천관사 주차장
하산후 회진항
포구 횟집 창밖엔 어둠의 그림자.
포구를 벗어난 귀경길에도 눈앞에 삼삼한 천관산.
'절세가인 천관녀의 미모를 알듯
모를듯.'
천관사.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삼국을 통일하고 경주로 돌아가던 김유신
천관녀는 자기는 천관보살의 화신으로 김유신이
신라 진흥왕 때 통령(通靈)화상이 창건한 천관사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천관산(723m) 중턱에
천관사 종 (위씨 성씨가 鐘위에 가득히 적혀있다.)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 천관녀.
큰 뜻을 품었던 김유신이 잊을 수 밖에 없었던 여인.
잠든 자신을 등에 태우고 천관녀의 집으로 갔던 애마
그 목까지 자른 김유신의 혹독하면서도 냉엄한 결단력
사랑하는 김유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긴 천관녀의 비애.
결국,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고
그녀 죽은 후 김유신이 그녀를 위해 지은 사찰.
그녀의 영혼이나마 위로했다고 전해오는.. 천관사.
아무튼 천관녀가 죽도록 이루지 못한 사랑
천 오백년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사랑
천관제.
천관녀의 애달픈 사랑을 위로하는 추모제.
김유신과의 못 다한 사랑을 추모하는 행사.
그날 하루라도 두 사람을 맺어주려는 천관제.
재매정 입구에 밝혀놓은 촛불.
두 영혼을 위해 밝혀놓은 화촉.
경주문화축제위원회가 주최하고
신라문화학교(대표 이홍렬)가 주관
매년 음력 칠월 칠일에 열고 있는 천관제.
견우직녀가 일년에 한 번 오작교에서 만나듯
천관사에서 칠월 칠석날 밤에 이루어지는 행사.
오작교를 만들기 위해 5 색깔의 흙과 물감을 준비.
하늘을 그리고 참가자들이 생각한 새를 그려 넣는다.
김유신 생가 연못인 재매정에서 열리는 천관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영혼을 위한 수백 촛불
천관녀 혼백을 천관사지에서 자매정으로 모신 흰가마
천관녀의 한맺힌 혼백인듯 가마 위로 날아 앉은 메뚜기
조금 있다가 또 다른 메뚜기 한 마리가 가마 위로 날아와
조금 전 날아와 먼저 앉은 메뚜기와 짝짓기를 하는 진풍경.
가마꾼들이 조심스럽게 신방으로 꾸민 초석 위에 옮긴 가마
'혹시,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짝찟기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별의 한을 달래듯 부둥켜 안은 한쌍.
김유신과 천관녀 영혼이 메뚜기로 변해 만난 듯 생각한 참석자들
정화수와 은은한 등불로 감싸여진 가마 안에는
두 혼백처럼 청색과 홍색의 작은 보자기 두 개.
두 혼백인 듯 짝찟기 하는 동안 오작교 퍼포먼스
두 영혼이 만났음을 알리고 칠석제물을 진설한 후에
헌다와 헌악, 헌시를 올리고 참가자들이 함께 둘러 앉아
떡과 막걸리로 음복했는데 마치 이것이 결혼 피로연인 양.
늦은 밤까지 피로연에 하나 둘 발길 돌리는 참가자들.
하지만 흰가마 위에 여전히 사랑을 나누는 메뚜기 한쌍
메뚜기 한쌍이 진정 환생한 '김유신과 천관녀'란 말인가?
당대를 풍미했던 신라 영웅.. 김유신.
김유신의 연인이자 절세가인.. 천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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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넘어 그대를 기다리리니
그대 내게 천년을 살라하네
즈믄의 새벽 두 번째 맞이한 오늘에도
또 한 천년 그저 그대만 그리며 살라하네
천관! 천관 !
애마의 말머리 베어내고 돌아서며
속으로 토해냈을 그리움
내 가슴으로 애끓게 느껴졌으니
그대 기다림이야
두 천년을 지낸들 무슨 불만이 있겠냐마는
통일 대업 이룬 그대의 당당한 얼굴
아니, 단석의 혈기 서린 굳은 손
아니, 풍진 세상에도 흔들림 없는 다리
아니, 구름의 장난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대의 그림자 한번만이라도 더 볼 수만 있다면…
하여, 견우직녀 만나는 오작교에 그리움의 넋 실네
천관! 천관! 남의 입이 부를 때는 목석이 된 내 이름.
그대 매정하게 돌아서 가던 길
흔적마다 민들레로 피어나
채이고 밟히길 기원하던
그때의 그 심정으로
오늘 여기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그대의 집
차라리 재매정 우물물이 되어
그대의 몸에 스며들 수 있기를 고대하리니
천년의 꽃 우담바라 되어
재매정 어귀에 무장무장 피오리니
천관! 천관!
그대도 나를 부르며
칠월칠석 오작교 타고
내게 오소서.
천년인들 만년인들
그대를 기다리리니….
김유신.
환갑이 되도록 독신으로 지낸 김유신.
김유신은 죽어도 못잊을 연인이 있었다.
김유신이 애절하게 사랑했던 연인 천관녀.
삼국통일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김유신.
그 꿈을 이룬 후 그녀를 잊지 못했던 김유신.
가락국의 영화를 되살리려 사랑을 버린 김유신.
김유신에게 버림 받은 그녀가 숨어 살던 곳.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있는 암자
그녀는 그곳에서 평생 김유신의 성공을 빌었다.
훗날 그 소문을 듣고 천관녀를 찾아갔던 김유신.
함께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그녀가 끝내 거절
김유신이 그녀를 위해 그녀 생가에 지은 사찰 천관사.
'김유신의 연인 천관녀는 누구인가?'
천관은 원래 국가 제사를 관장하는 여사제.
불교가 성행하기 전까지 여사제는 높은 지위.
그후 화랑을 이끄는 원화가 맡게된 국가 제사.
'불교 정착 후 국사가 국가제사를 주관.'
신라에서 불교가 중흥하며 국가 제사는 쇠퇴.
따라서, 천관녀의 지위도 한낮 무당으로 전락.
천관녀는 천관녀 신분에서 기생으로 전락한듯.
'하여, 신분 격차가 더욱 벌어진 두 연인.'
당시 급변하는 개혁시대에 만났던 두 사람.
신라는 귀족과 평민 계급차이가 엄격한 나라.
결국은 신분의 격차를 극복할 수 없었던 연인.
결국, 그녀는 김유신을 위해 비구니가 된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못다한 사랑이 가슴 아프다.
1500년 전 삼국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고소산성.
죽어서 왕이 된 김유신(흥무대왕).
신라 삼국통일의 실질적인., 주역.
당시 고구려의 멸망은 내분 때문이라고 하지만
연개소문 장군의 독단이 적을 많이 만든 것 같다.
김유신 장군에 관해서는 오늘날 재평가 되어야할듯.
만약,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했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으리라는 역사관.
그러나, 당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겼을듯.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과 김춘추의 탁월한 외교
그것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는 비법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 많은 교훈을 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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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장군.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
삼국지배를 꿈꿨던 당나라를 물리친다.
[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
'금관가야 10대 마지막 왕' 구해왕이 곧 할아버지.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
어머니는 지증왕 증손녀, 갈문왕 손녀 숙흘종의 딸 만명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
신라는 6세기 이후부터 비약적으로 팽창한다.
고구려에 싸우기 위해 나제동맹을 깨뜨린 신라.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해 신라를 위협.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합.
629년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큰공.
중당당주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을 돌격해 유린
신라군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한 김유신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 서쪽 40개 성을 함락
대량주(경남 합천)를 점령, 김춘추 딸과 사위를 사살.
신라는 적대국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한다.
이때 압량주(경북 경산) 군주로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
김춘추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김유신이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 방어
647년(진덕왕 1) 반란군 상대등 비담 염종 등을 진압.
그해 10월 압량주 군주로서 신라를 침공한 백제군을 격퇴.
648년 백제가 점령한 대량주를 공격해 12성을 함락시킨 공
김유신은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 직위에 오른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이 석토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운다.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
[삼국통일]
654년 진덕여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과 상의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고 그가 곧 태종 무열왕.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신라에서 영향력 행사.
김춘추가 즉위한 다음해에
김유신은 대각간이 되었다.
그해 10월 무열왕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한다.
660년 5만 군사를 이끌고 당 소정방과 연합한다.
황산벌에서 계백 결사대를 물리친 뒤 당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나라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한 소정방 군대에 군량미 지원.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자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은 김유신.
665년 당 고종이 김유신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
666년 김유신의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으로 임명.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 사령관격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든 김유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를 통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
그뒤 신라 지배층 원로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 자문
[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백제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
평양 안동도호부에서 고구려 군정을 실시.
심지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
삼국 지배권을 확보하려 한 당나라.
이러한 당나라와 맞서 대응한 김유신
아들 원술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며 결전의 의지를 표명.
.....................원술.................
김유신이 환갑을 넘어 결혼해 얻은 아들 원술.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김춘추는 환갑 넘은 김유신에게 셋째 딸을 보낸다.
평생 전쟁터에서 신라를 위해 늙어버린 김유신
김유신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춘추.
김춘추에게 자신의 셋째 딸을 시집보냈던 것이다.
김춘추에게는 외손자인 원술.
김유신에게는 늦동이 아들 원술.
김춘추는 김유신의 처남이자 장인.
근친 결혼은 신라 진골 귀족의 전통.
근친혼은 왕위 계승권과 관련이 깊다.
신라왕실에서는 양가 혈통 서열이 높을수록
진골 귀족회의에서 뽑는 왕위 계승권에 유리.
.................................................
그 귀한 아들까지 전쟁터에 내 보낸 김유신.
그 아들을 희생시켜 신라를 구하려 한 기백.
신라군에게 임전무퇴의 기상을 심어준 김유신.
672년 석문벌판 전투에서 신라가 당에게 패배.
김유신이 늙어 전쟁터 일선에서 싸우지 못한 탓.
김춘추는 원로 김유신에게 전략적 자문을 구한다.
673년 79세에 운명한 김유신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
676년 신라는 당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쫓아낸다.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그의 명예를 기록.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현재, 김유신의 묘소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
.................
김유신의 생가.
.................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 화랑무예 태권도 성지
보통 김유신 장군 생가라면 경주와 김춘추를 연상.
그 생가가 충청북도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할듯.
천안-진천 간 도로에서 태령산에 이르는 길
김유신 생가터에는 비각과 우물터, 옛집 한채가 고작
화랑 무예 태권도 성지도 조형물 하나만 달랑 있을 뿐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문봉리 계양마을
김수로왕 13세 손, 만노군(진천) 태수 김서현 장군 아들
진평왕 17년(595년)에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탄생.
김유신은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609년) 화랑이 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냈고, 삼국통일의 대업(668년)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 신라의 자주성을 지키는데 공헌했다.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대대각간(大大角干)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 시대까지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봄,가을에 올렸다.
화랑무예 태권도 성지.
아득한 옛날 흰빛 하늘 자손이 터전을 열었네
백두대간 차령산맥은 우뚝하고 화랑벌은 넓어라
흥무대왕 바로 이곳에 나시어 삼한일통 뜻 세울제
고구려 백제 신라 용자들 말발굽소리 천지를 덮었으리
살과 뼈가 부딪는
생사의 전장에서
화랑정신 찬란하고
태권무예 그 고절한 권과
각의 비의는 완성되었네
인생은 흰 이슬처럼 찰라였으되
나라사랑 부모사랑 친구사랑 의무사랑 생명사랑 속
화랑정신 태권무예의 장엄함은 영원으로 흘러갔네.
천 수백년 후 자손들은 결코 부끄럽지 않으리
바람이 전해주는 고인의 자취 그리워하며
겨레의 상무 기풍 다져진 성스러운 땅 이곳에
오천만 명 세계 태권도인들의 경외로운 뜻을 모았네
깊고 강고한 돌 속에는 세계평화의 염원
우리 마음은 태권정신으로 한 가족이라네
다시 천 수백년이 흐른다 해도
사해 염원은 표석처럼 생생하고
게양 옛터 이곳은 우리의 고향으로 영원하리
단기 4335년 1월 1일
화랑무예태권도 성지 선포에 즈음하여
세계 태권도인들이 삼가 받들다.
...... 찾아가는 길...........
1. 천안에서 갈 때
독립기념관 - 병천 - 동면 - 진천방향,
천안-진천 경계지점에서 5km 지점 이정표
2. 진천에서 갈 때
천안 방향으로 16km정도 달리다가
태령산 가는 길로 접어들면 된다.
..................................
...............
김유신의 외가
................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
본래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
증조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
본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만명부인의 조부인 갈문왕 입종은 진흥왕의 부친.
만명부인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진흥왕의 동생이다.
만명부인의 어머니인 만호태후는 진흥왕의 며느리.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 +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9대 손 구형왕(김유신 증조부) + 가야인 계봉의 딸 계화
10세손 김무력(김유신 조부) + 신라 진흥왕의 딸 아양
11세손 김서현(김유신 부친) + 갈문왕 입종의 손녀 만명
12세손 김유신
선덕여왕은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의 딸.
김유신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버지의 딸.
선덕여왕은 진흥왕의 증손녀
선덕여왕은 김유신의 먼 조카 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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