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10 (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 동방견문록. )

donkyhote 2011. 2. 28. 02:40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지리산 반야봉은 반야심경의 상징.
서역에서 반야심경을 갖고 온 현장.
현장은 일명 삼장법사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에 불교문화가 꽃핀 시기는 신라시대.

고구려 백제보다 늦게 불교가 전파됐던 신라.

김유신과 천관녀가 사랑을 나눌 무렵 도입된듯.

 

불교에서 삼장법사는 곧 국사를 일컫는 대명사.

하여, 국사를 배출한 사찰을 삼장사라고도 했다.

한반도 불교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대당서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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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현장.
서역 법경을 구한 행적 기행문.
현장이 기술하고 제자 변기가 편찬.

138개 국가, 지구, 도시국가의 지리,
산천, 성읍, 교통, 풍습, 산물, 정치문화
당시의 불교 상황, 불교 고적, 역사 전설,
인물 전기 등에 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인도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중앙아시아 지역
역사 지리 종교 문화, 중국과 서역의 교역 연구자료

궁터와 옛 성터, 녹야원(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장소),
고찰, 아잔타 석굴, 날란다 유적 탐사와 발굴 증거자료
청대(淸代) 정겸(丁謙) 作.,〈대당서역기고증 大唐西域記考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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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三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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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을 <삼장>이라고도 한다.
삼장(三藏)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석가모니의 설법을 모은., 경장(經藏)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교리에 관해 제자들의 논문을 모은.. 논장(論藏)

'경(經) 율(律) 논(論)'을 합해서 삼장.

삼장은 본래 바구니 3개를 뜻하는데,
BC 1세기경 인도에서 경전을 바구니에
따로 보관한데서 붙여진 이름이., 삼장.

석가모니가 열반하자(BC 483경),
그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마하가섭 제안으로 그해 우기 3개월간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 밖 칠엽굴에서
뛰어난 제자 500명의 아라한들에 의해
석가모니 설법과 율의 결집이 이뤄졌다.

결집이란, 한데 모인 아라한들이 법과 율을 소리내 외어
부처 말씀 임을 확인후 교법으로 확정하는 불전 편집회의

당시 문자는 있었으나 종교와 철학 등 신성한 가르침은
기록하지 않고 구술로서 전하는 것이 인도 고래의 풍습.

제1결집에서는 제자들 중 으뜸 장로인 마하가섭이 좌장이 되어,
석가모니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다가 법을 송출(誦出)하고,
계율을 제일 잘 지킨 우바리(優波離)가 율을 송출했다고 한다.

아난다는 불멸 당시에는 아직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으나,
석가모니의 사촌 아우로서 석가모니를 순종하여 잘 모셨다.

석가모니 입멸 전 25년 동안
한번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석가모니 설법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석가모니를 수행하기 이전의 설법도
제자들로부터 들어 알기에 법 송출의 적격자

결집회의 전날 밤 깨우침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아난다.

우바리는 본래 석가족을 섬기던 노예 이발사
석가모니가 그의 출가를 받아들여 수계시키고
석가족의 젊은이들보다 윗자리에 앉히니
계율에 대해 특별히 흥미를 가졌으며,
석가모니가 제정한 계율규정을
모두 기억하고 잘 지켰으므로
그에게 계율을 송출하게 한 것.

이렇게 제1결집에서 경과 율이 결집되어
분류 정리되어 경장과 율장이 이루어졌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지 100년쯤 지나 제2결집
이때 교단 내에서 계율의 조목을 지킴에 있어
전통규율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파..상좌부,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자는 진보파..대중부'

이후 200~300년에 걸쳐 두 파로부터 지엽적인 분파
BC 100년 무렵 총 20부 불교를 부파불교(部派佛敎)
부파불교 시대에 웅대한 논서(論書)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대 아비달마 불교는 교리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으나,
불교교단이 사회와 유리되고 교단에서 멀어진 대중은 미신화
불교의 순수성이 상실될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부처 유골을 모신 불탑을 중심으로
개인의 완성보다는 전체의 완성이 우선해야 한다며
부처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
스스로 대승(大乘)이라 자칭하고
기존 불교를 소승(小乘)이라 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삼장들이 또 성립되었으나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지 못한 채 중국으로 전해졌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여러 삼장들을 집대성하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었고 그것이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중국불교에서 소승교를 삼장교(三藏敎)라 하고,
삼장학자에서 삼장은 소승 부파불교를 가리킨다.
삼장은 삼장사 약칭이며, 최고 학승에 대한 칭호.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이 곧., 삼장법사.'

그가 번역한 불교 경전은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다양해 역사학자와 고고학자에게 소중한 가치

현장은 어렸을 때 정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형의 영향을 받아 불교 경전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곧 불교로 개종 그 형을 따라 장안(長安)까지 갔으나,

당시 중국 전체를 뒤흔들던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자
四川 지방으로 가서 머물며 불교 철학을 배우기 시작
불교 경전에서 수많은 모순과 상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스승들로부터는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자
현장은 불교의 근원지 인도로 유학하고자 결심했다.
허나 여행허가를 얻지 못해 629년 비밀리에 인도 행.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지나 투루판·카라샤르
쿠차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오아시스 거쳐 철문 넘어
박트리아로 들어갔으며,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서북 인도의 카피사·간다라·카슈미르 등지를 통과.

카슈미르에서 갠지스 강을 따라 내려가 마투라를 지나,
633년에는 갠지스 강 동북유역의 불교 성지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 있는 성지순례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해안선을 따라 여행했다.

그러나 현장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날란다 사원
이곳에서 그는 산스크리트·불교철학·인도사상을 습득.
인도에서 현장은 북인도 하르샤 대왕마저 그를 만나 경배

643년 귀국 여행은 하르샤 대왕 후원으로 순조롭게 여행
645년 현장은 다시 당의 수도 장안에 16년 만에 돌아왔다.
그곳에서 대대적인 환영, 며칠 뒤 황제로부터 공식적 영접

황제는 낯선 나라들에 대한 현장의 이야기에 큰 매력
대신 직위까지 수여하려 했으나, 현장은 정중히 거절.

653년 일본 승려 도쇼[道昭]가 중국에 들어와
현장 밑에서 배우고, 660년 배움을 끝내고 귀국
일본에 돌아가 법상종 유식학파 가르침을 전했다.

7~8세기 법상종은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종파로 성장.
현장이 입적했을 때 당 황제는 3일 동안 국사를 중지.

 

 

 

왕오천축국전



지리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요람.
삼국시대 융성했던 우리나라 불교.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까지 전성기.

당나라와 외교가 밀접했던 신라.
그당시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 신라'
불교 종주국들 선진문명도 받아들인듯

멀리 인도제국까지 오간 신라 고승들.
지리산의 불교문화에 큰 공헌을 했을듯.
아울러, 세계 각국의 선진문명을 도입한듯.

동서양을 하나로 이어주었던 실크로드.
해상 및 육상 실크로드가 발달했던 신라.
7~8세기 경에 동서양 각국과 교류한 흔적.

'신라 항로는.. 놀랍게도 오늘날 수준.'

불교 종주국인 인도까지 여행했던 혜초.
당나라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83세 타계
신라 고승 혜초가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도움될.,기록.'

통일신라 승려 혜초(704~787)가 지은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5천축국(인도) 여행기록이란 뜻'
인도 대륙을 동서남북과 중앙으로 구분해 부른 이름.

1908년 3월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
중국 둔황의 천불동 석굴에서 발견

내용은 중부 인도 갠지스강 유역 마가다국 기행에서 시작.
불교 유적이 많은 곳이나, 혜초 방문 당시는 힌두교가 성행.
그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쿠시나가라(Kusingara)까지 찾아갔다.

이곳에 있는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을 기록.
1개월 동안 다시 남쪽을 여행해 바라나시(Varanasi)에 도착,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녹야원(鹿野苑)을 방문하기도 했다.

약 1세기 전 당나라의 현장(玄)도 찾아왔던 녹야원.

다시 동쪽으로 가 라자그리하(Rjagrha)에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의 설법지 영취산(靈鷲山)을 방문했다.

그리고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를 거쳐,
서북쪽으로 향해 중천축국의 수도 카나우지로 갔다.
왕은 코끼리 900 마리, 대수령들은 200~300마리 보유

여기서 인도 전역의 기후와 풍속을 총괄적으로 서술
음식은 쌀로 빚은 떡, 미숫가루 우유 소금 등이 있고
장(醬)은 없고, 가축사육은 않지만 소는 기른다고 했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현재의 데칸 고원이다.
용수보살이 신력으로 세웠다는 당시 폐허인 산속 사원
이후 서북쪽으로 향해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

현재 파키스탄 남부와 간다라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
이어 북쪽 현재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
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 후, 간다라 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길기트·페샤와르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을 답사

이곳은 모두 투르크족이 지배하고 있지만,
불교가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고 기록.
이후 실크로드를 따라 서부 투르키스탄 방문.

그의 오천축국 순력은 끝난다.
그곳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기록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

특히 이 지역은 동서 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인근 페르시아나 사라센, 동로마 제국까지 언급.
이후 파미르 고원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 쿠차에 도달

727년 11월에 이 여행기는 끝난다.
8세기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관한 한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 왕오천축국전

1909년 중국 학자 뤄전위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1915년 일본 다카쿠스가 혜초의 기록임을 밝혔다.
왕오천축국전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혜초.........................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700년 전 후에 출생,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후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연구.
740년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 유언에 따라 이 경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773년경 금강지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황제에게 청원.

그뒤 수년 동안 중국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채록.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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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요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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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 신라 성덕왕(727)때
갈래 : 기행 수필
작자 : 혜초
구성 : 병렬식
성격 : 성지 순례기
출전 : 왕오천축국전

의의 :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불교유적 순례기.


줄거리

혜초는 중국 남쪽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들어간다.

먼저 나체의 나라를 구경하고
석가가 입멸(入滅)한 구시나국에 도착하여
그 곳의 풍물을 구경한다.

이어 파라나시국 등 인도의 각 지역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옛 소련의 국경 지대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파미르 고원 등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각 지역에 대한 정세와 풍물을 기록하였다.


내용 연구

이 녹야원(鹿野苑)과 구시나(拘尸那)와 사성(舍城)과
마하보리의 영탑(靈搭)이 모두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같이 시행된다.

마하보리사 예방은 평소 숙원이었기에 무척 기쁘다.
이 기쁨을 감출 길 없어 이 뜻을 시로 읊어 보았다.

보리사가 멀다고 근심할 것 없었는데
녹야원이 먼들 어찌하리요.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불어닥치는 악업(惡業)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
여러 차례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어찌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줄거나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오리.

마하보리사 방문의 기쁨과 감격

이 파라나시국에서 반달을 걸어서
중천축의 국왕이 살고 있는 성에 도착하였다.
이 이름은 갈나급자(葛那及自)이다.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왕은 코끼리 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그밖에 큰 수령이 다 각기 3백 또는
2 백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언제나 스스로 병마를 거느리고 싸움을 잘 하는데,
항상 주변 네 천축국과 싸우면 이 중천축의 국왕이 이겼다.

싸움에 진 나라는 코끼리도 적고 병력도 적어 이기지 못해
곧 강화하길 청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휴전.


<중천축국 세력과 주변국 정세>

의복과 언어, 풍속, 그리고 법은 다섯 천축국이 비슷.
오직 남천축의 시골 백성들 언어가 다른 곳과 약간 차이
벼슬아치들의 언어와 생활은 중천축국과 다른데가 없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죄수의 목에 칼을 씌우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또는 가두는 감옥 같은 것은 없다.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 제도도 없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냥 매를 날리거나 개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길에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풀어 보내고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 아니한다.
그러나 물건 주길 꺼리면 해를 끼치기도 한다.

<다섯 천축국의 사회상과 풍속>

.................해설......................
녹야원 : 사슴이 많은., 석가 최초 설법지.
왕사성(王舍城) : BC 5세기까지 마가다국 수도.
불교 사상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진 곳이다.

마하보리 : 대각(大覺)의 뜻. 사찰(寺刹)이름.
대승(大乘) :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불교의 한 유파.
이와 달리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소승.

갈나급자(葛那及自) : 현재의 카나우지.
당 현장법사 서역기(西域記)에 곡녀성(曲女城)

공물(貢物) : 종주국에 바치던 특산물.
천축(天竺) : 중국에서 부르던 인도의 옛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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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승려 혜초의 불적 순례(巡禮) 견문 기행문.
이 여행기는 마가다국 녹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오도(悟道)했다는 부다가야

그곳 마하보리사·중천축국·남천축국(데칸 고원),
그리고 북천축국으로 북상하여 캐시미르·간다라·
토하라 각지를 둘러보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자리잡고 있는
구자(龜玆)에 도달하고, 기록도 여기서 끝난다.

이러한 긴 여행에서 불교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정세·지리·풍속·언어 및 여수(旅愁)까지 담고 있다.
또, 이 기록은 1200년 전 중국과 인도의 여로를 알려준다.

그리고 이것이 외국 기행문으로서 첫 작품이고,
풍물과 여정을 노래한 오언 율시(五言律詩) 5수
인도, 중앙아시아 정세와 풍습을 기록한 귀한 자료


'파라나시국, 중천축국' 견문 기행록.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지은 인도 여행기. 1권.
필사본. 완질이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만이 현존.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 현존본은 약본, 앞뒤가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 gara)에 대한 견문이며,
석가모니가 입멸한 다비장, 열반사(涅槃寺)를 기록.

한 달 동안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 도착.
석가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해 최초 설법한 곳.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王舍城) 도착.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 참배
법화경(法華經)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했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 참배
대각사(大覺寺) 보리수 언급

이어 서북쪽 중천축국에 도착.
사대영탑(四大靈塔) 각각을 방문
석가 탄생지 룸비니(Lumbini) 방문

다음 여행지로서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방문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 거쳐 북천축국 방문

지금 파키스탄 남부 및 간다라
그 서쪽 파키스탄 서북 일대 답사.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방문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 지방을 거슬러 내려와
스와트·길기트·페샤와르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도 답사.
다시 실크로드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景國)·
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그곳 이야기 만을 기록했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진기한 풍속을 소개.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升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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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 중앙아시아에 관한 서술이 간략.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된 점이 특징.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

인도왕들이 코끼리 병력을 얼마나 소유했는지,
아랍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로 세력을 펼쳤는지

튀르크족 한족(漢族) 지배받던 나라가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상세하게 언급.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음식 의상 습속 산물 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인도에는 감옥 사형제도가 없고,
죄인은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

혜초가 여행할 당시 불타 유적은 황폐해 가고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승려 3,천명 사원에 공양미가 매일 15석이 소요.
그러나, 공양미 조달이 안되어 유지하기 어려웠다.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
아내와 코끼리까지도 사시하는 독신자
나체 생활, 여러 형제에 아내 한 사람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 짓기 등
여러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여분을
서북쪽으로 날아 도착한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
모래 울음소리 들린다는 명사산 동쪽 절벽 둔황 막고굴

1,000 부처상을 모신다는 신념
4세기부터 석굴을 판 불토의 땅.

신라 혜초(慧超ㆍ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기록.
이곳에서 약 1,100년을 잠자고 있었다.

'항하(갠지스강) 북안에 3개의 큰 탑이 있다.
셋째 탑은 부처가 태어난 가비야라국에 있다.
마야 부인이 그 밑에서 부처를 낳았다는 보리수.

그러나 성은 이미 황폐해져
탑은 있으나 스님은 없었다.

막고굴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석굴.
당 말기 5만권 불교 서적이 무더기로 발견.
지금은 중국 스님 소조상과 벽화만 남아있다.

왕오천축국전은 230줄에 한 줄은 30자 내외,
총 6,000여 글자에 불과한 짤막한 기행 기록.
혜초가 723년부터 5년 여 동안 여행한 기행문.

풍속은 고약하여 혼인을 서로 뒤섞어 하고,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맞아 들인 페르시아
형제가 열 이거나 다섯 명이거나 아내는 하나.

람파카국에서 서쪽 산속으로 8일을 가면 카피스국
이 나라에서 낙타 노새 양 말 포도 보리 밀을 생산
삼보(三寶)를 공양하는데 큰 성안에 절 하나 뿐이다.

그 절에는 부처의 머리카락 뼈 사리 등이 보관.
왕 벼슬아치 백성이 매일 공양하는 소승 불교국.

당시 당 수도 장안(長安)은 실크로드의 출발점
대식국(아라비아) 사람의 성질은 무역을 좋아해
사자국(실론)까지 가서 여러가지 보물을 가져온다.

곤륜국까지도 가서 금을 무역해오고,
곧장 광저우(廣洲)까지 가서 능(엷은 비단)
견사(명주실) 솜을 무역하는데 살생을 좋아하고
하느님을 섬기되 불법을 모른다.' - 혜초의 기록 -

16세 때 광저우로 건너가 평생 경전 연구를 한 혜초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83세에 열반 때까지 타향살이.

혜초가 향수를 달래며 5년 여행을 마치고
신장 자치구 쿠차에 도착한 727년 11월 상순
'왕오천축국전' 말미에 혜초가 쓴 인상적인 글귀

"여기서 동쪽은
누구나 잘 아는
중국의 본토이니
더 기술하지 않겠다"

구도 여행을 마치고 서역에서
중국의 관문 양관에 도착했을 때
혜초의 심경이 잘 담겨있는 듯 하다.

그가 70세 때 당나라 명승 불공(705~774)의
6대 제자 가운데에서 두 번째 제자가 된 것도
이 기행에서 얻은 깨달음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역시 몇 번이고 눈길이 가는 것은
혜초가 인도 남천축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시.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鷄林)으로 소식 전해줄까.'




동방견문록.



불교종주국 코레아로 알려진 고려.
동아시아 무역왕국이기도 했던 고려.
고려를 이해하는데 도움될 동방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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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보다 500년 이후 기행문.
1254경 베네치아 상인의 탐험여행 이야기.
1271~1295년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 기록.

원나라 황제의 신뢰를 받았던 폴로 가족.
통찰력이 있고 기민하며 용감한 폴로 가족
고려 시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듯.

당시 전 세계 정치 경제를 장악한 원나라
고려 항해술을 빌려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
고려는 원나라와 더불어 해상왕국으로 도약.

고려시대에 동방견문록은 항해 지침서였을듯.
하여, 지금부터 동방견문록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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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변화를 내다보고
부동산을 팔아 보석에 투자 후, 볼가강으로 떠났다.
폴로는 몽골 황실과 가까이 하며 재산을 2배로 불렸다.

'소금을 비롯한 국가 전매 사업에 깊이 관여한듯.'

그들은 정치적 사건 때문에 귀국길이 막히게 되자,
동쪽의 보하라로 갔다가 1265년 몽골 제국의 수도로
'황제의 여름 주거지' 상도(上都)에서 여행을 끝냈다.

위대한 황제 쿠빌라이 칸(세조)과 우호적인 관계
이들은 쿠빌라이의 사절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들에게 주었다.

동방견문록을 쓴 폴로는 1254년 경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인 1269년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새 교황이 선출되길 베네치아에서 기다렸지만,
2년이 지났는데 후임자가 선출되지 않자 여행길

팔레스타인에서 교황 특사 피아첸차의 테오발도는
몽골 제국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폴로 가족은 다시 여행길에 오른 지 며칠 지나기도 전에
친구 테오발도가 교황(그레고리우스 10세)으로 선출된 소식
그들은 아크레로 돌아가, 정식 신임장을 받고 수사 2명과 동행

그러나 수사 2명은 곧 용기를 잃어버렸기에,
폴로 가족만 아쿠레에서 아야스로 여행을 계속.
1277년 초 이들은 터키 동부에 있는 에르주룸과
오늘날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통과한 다음,

산적들이 출몰하는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 연안의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
인도와 몽골 제국의 수도까지 가기로 결정.

그들은 이란 동부 호라산 지역을 향해
'지독하게 건조한'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차츰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발라시안)에 도착
1년간 머물며 오랜 말라리아 질병에서 회복

마르코는 또한 이 시기에 남쪽 지역
(아프가니스탄, 카피리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 등)을 방문한 것으로 짐작된다.

폴로 가족은 바다흐샨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횡단
이 일정은 훗날 많은 논의와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오늘날 중국 카스가르(지금의 카스)에 도착.

이제 폴로 가족은 실크로드(비단길)에 올라 있었고,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과 동쪽 오아시스를 따라 여행
(야르칸드, 허톈, 카르칸, 로프노르 호 등지를 다닌듯)

폴로 가족은 사주 도착 전 이슬람 교도 지역을 여행했고,
그리스도, 불교도, 마니교도, 조로아스터 교도도 만났다.
그후 전혀 다른 문명이 지배하는 간쑤 성으로 들어간 그들

그들이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로 곧장 갔는지,
돌아 갔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1275년 몽골 궁정에 들어가,
예루살렘 성유와 교황 편지를 후원자 쿠빌라이 칸에게 바쳤다.



[마르코의 중국 체류]


그후 16년 동안 폴로 가족은 황제의 영토에서 살았다.
황제의 여름 별장 상도, 겨울 별장 대도로 함께 이동
폴로 가족은 가장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몽골제국에 적응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은 기술직에 고용되었을 것
그들이 샹양[襄陽] 공격 때 군사 고문으로서 활약한 기록
아버지와 삼촌의 설계도에 따라 만든.. '거대한 투석기'

마르코 폴로는 젊은 나이(20세 정도)에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어를 몰랐지만, 튀르크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능통
쿠빌라이 칸은 낯선 나라 이야기를 좋아해 마르코를 총애.

원(元) 제국을 제 2 의 고국으로 여겼던 마르코 폴로

1292년 몽골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군 칸 왕비가 될 예정이라 폴로 가족이 수행

당시 쿠빌라이 칸은 거의 80세에 가까웠고,
그가 죽으면(그결과 정권에 변화가 일어나면)
외국인 집단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고향 베네치아와 가족을 보고 싶어한 것도 당연
600 궁정 신하와 선원을 거느린 공주와 폴로 가족은 항해
14척에 나누어 타고 취안저우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갔다.

함대는 참파(베트남) 수많은 섬과 말레이 반도에 들렀다.
수마트라 섬에서 5개월간 우기에 폭풍우를 피해 머물렀다.
북극성이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는 광경에 감명받은 마르코.

함대는 니코바르 제도(네쿠베란)를 지나,
실론(세일란) 섬에서 다시 육지에 닿았다.

호라산에 도착하자 아르군 칸은 이미 고인.
그 아들 마흐무드 가잔이 공주를 넘겨받았다.

폴로 가족은 그후 유럽을 향해 출발했지만,
트레비존드에서 그동안 수입을 거의 빼앗겼다.
그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 도착(1295).

그들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친지와 이웃들
그들을 극적으로 알아 본 이야기는., 폴로 전설의 일부.


마르코가 돌아온 직후,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이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투
마르코는 베네치아 해군 함장의 고문관으로 참전

9월의 크루조라 해전에서 패함으로써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에서 만난 베네치아 여행가 루스티차노
마르코의 25년간 아시아 여행담을 그가 기록으로 집필.

서양의 지평선이 넓어짐에 따라
마르코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일본에 대한 묘사는 콜럼버스에게 큰 영향
1492년 지는 해를 따라 여행을 떠난 콜럼버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풍성한 새로운 지리적 정보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대양 항해한 15세기말~16세기
그무렵 해상왕국 고려도 지리적 정보로 사용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