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13 ( 풍류 문인. 강혼. 김삿갓. 선유락 배따라기. )

donkyhote 2011. 2. 28. 03:04


풍류문인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늬 곳애 퓌엿는고
석양(夕陽)의 호올노 셔셔 갈 곳 몰나 하노라. - 이색(李穡)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 호는 목은..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불린다.

매화는 눈밭에 피는 순결한 여인 또는 정절의 표상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 으뜸으로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겨울을 이겨내는 세한삼우(歲寒三友) 매화.

그 중에서도 눈 속에서 홀로 피는.. 설중매(雪中梅)
선비에게 지조와 절개, 강인하고 깨끗한 기품의 상징.

유독 매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퇴계(退溪)
1570년 매화가 피는 겨울 음력 섣달 초순, 임종
그 직전에 그가 남긴 말은.. “저 매화에 물을….”

그가 마지막 숨을 걷우면서까지도 잊지 못한 매화.
스물 남짓 꽃다운 나이에 숨진 그가 사랑했던 여인.
퇴계가 사랑하는 기생 매화에게 받친 두 편의 연시.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퇴계.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퇴계.

기생 두향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단양 관기 두향은 단양군수 퇴계 이황을 만나고
그를 사모하여 수 차례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지만
퇴계가 마음을 열지 않자, 두향은 애간장은 녹았다.

두향은 기품 넘치는 매화를 퇴계에게 바치자
단양 동헌에 심고 새 임지인 도산으로도 이식.
이황의 부음을 듣고 앉은 채로 숨을 멈췄던 두향.

너무나 짧고 아쉬웠던 연분 끝에 헤어지고
몇해 지나지도 않아 존경하는 사람의 부음
그 정한이 얼마나 컸으면 숨질 정도였을까? 




강혼(姜渾) . 



강혼(姜渾)은 1464(세조 10)∼1519(중종 14)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증조부는 영의정 맹경(孟卿), 아버지는 인범(仁範).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 급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인이라 유배된다.
얼마후 풀려나 문장으로 연산군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된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해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그뒤 대제학·공조판서·우찬성·판충추부사를 거쳤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저서에〈목계집〉.

진주관기 소매에 시를 쓴 풍류묵객으로 유명.
증주기(贈州妓)라는 문집에 실린 강혼의 詩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 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 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풍류묵객 강혼의 일화가 담겨있다는., 詩.
과연,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일까?

당시 기녀와 선비들의 로맨스는 교방의 멋이자 풍류.
경상우도 중심 진주에 옛부터 전해오는 '강혼의 일화.’
젊은 시절 한때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목계 강혼

그무렵 진주 목사가 부임해 그녀는 수청을 들게 되었다.
강혼은 그녀를 빼앗기게 되자 그녀 소맷자락에 쓴 시 한수
그옷을 그대로 입고 신임 진주 목사에게 숙청 들러간 그녀.

신임목사는 그녀의 소맷자락에 쓰여진 시 한수를 읽게 된다.
그 글재주와 호기에 끌려 그와 술한잔 나누고 싶었던 진주목사.
그리고,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강혼에게 돌려주고자 작정한다.

신관목사는 강혼의 시를 높이 평가하며 과거공부를 권고.
마침내 강혼은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학자가 되었다.
신관목사가 강혼을 아껴 깨우치게 한 계책이라고 전해온다.

강혼의 재주를 아낀 주변에서 신관목사에게 은밀하게 청탁.
기생 역시 강혼 마음을 바로잡는데 큰 역활을 했다고 한다.

........................................
........................................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내용.

영남 성산에 가서 기생 은대선을 사랑한 강혼.
돌아올 때 부상역까지 말을 태워가지고 왔는데
이미 침구를 가지고 먼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공은 기생과 이불도 없이 역사에서 하룻밤을 잤다.

“선녀같은 저 모습 옥같이 흰살결에
새벽 창문 열고 거울 앞에 눈썹그리네
묘주에 거나하게 취하니 얼굴이 붉어져
동풍이 살짝 스치니 검은 머리 흩날리네"

이후 강혼은 상주에 이르러 은대선과 헤어졌다.
강혼은 조령 넘어 잠시 쉬다가 도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성주 서생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나니
은대선이 불현듯 떠올라 바로 필묵을 들었다고 한다.

......................................................
“상산에서 헤어진 뒤 저물어 두메마을에 이르렀는데
텅비어 있는 객관이 쓸쓸도 한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량한데 등잔불을 돋우어 홀로 앉아 있으니

외로운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정과 회포는 서글퍼 말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 재를 넘으면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산새가 구슬피 지저귈 것이니 이 간장이 녹는듯.”-강혼.
.....................................................

강혼의 편지는 서생을 통해 은대선에게 전해졌다.
은대선은 강혼의 시와 편지로 병풍을 만들었는데
자획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용과 뱀이 움직이는듯,

남쪽으로 내려가며 성주를 지나가는 선비들은
그 병풍을 구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송계 권응인(權應仁)은 강혼이 세상을 떠난 후
은대선을 만났는데 은대선은 이미 여든이 넘었다,
그당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대선이 남긴 말.

“검은 머리 흩날리다가 이제는
흰머리 흩날리네로 변했습니다”

.................................
.................................


강혼은 지금 진주에 잠들어 있다.
호방한 기질과 시에 능한 그였기에
기생과의 연시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김삿갓.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풍류시인 김삿갓.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며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한 시조.

金笠 : 平壤妓生何所能
妓生 : 能歌能舞又詩能

金笠 : 能能其中別無能
妓生 : 月夜三更呼夫能

김삿갓 :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기생 : 노래와 춤 다 능하고 시도 능하다오.

김삿갓 :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기생 : 달 밝은 한밤중 지아비 부르는 소리는 더 능하다오.

........................................
........................................

김삿갓이 남긴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한토막이다.
그는 왜 평생 방랑시인으로 떠돌아다닌 것일까?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란 자책
안동 김씨 폐족이라는 세상의 멸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처한 그.

하여, 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했던 그.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만난 아들.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던 그.

57세 때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던 그.
어느 선비가 데려가 반년 가까이 보살펴주었던 그.
지리산 유람 3년 만에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운명.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세운 시비
강원도 영월에 전국시가비 동호회에서 세운 시비.

......... 시비에 새겨진 그의 마지막 시...........
날짐승도 길짐승도 다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홀로 상심(傷心)하며 살아왔노라.

짚신에 대지팡이 끌고 천리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슬픈 회포만 가슴에 남았노라.

어려서는 이른바 복(福)된 집에서 태어나
한강 북녘 이름있는 고향에서 자라났노라.

조상은 구슬 갓끈 늘인 부귀한 사람들이었고
호화로운 가문은 장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이웃 사람들도 귀공자 태어났다 축하해 주며
장차 이름을 떨치리라 기대했었다.

어린 머리칼 차츰 자라면서 운명이 기박해져
화를 입은 집안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했다.

의지할 친척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망했도다.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마음은 고향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니기 몇몇 해던고.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요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수록 아득하네.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풍월 읊은 행장(行裝)은 언제나 비었도다.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家風)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얼마나 긴 세월 길가에서 헤매야 하는가.
.. .........................................

지리산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인이 많다.
김삿갓은 역사상 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등지고 산 김시습,

선조때 예조정랑 벼슬까지 지냈던 임제
당파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은 여생 동안 풍류를 즐기며 보낸 인물.

순조때 풍자와 해학으로 일생을 보낸 김삿갓
서민적인 이미지을 풍긴 대중적인 방랑 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다.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이고, 아버지는 안근(安根)
그는 안근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안동김씨 세도가문
그의 가문은 19세기 조정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씨

그가 태어날 적에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익순은 그가 5살 때 평안도 선천(宣川)부사

그런데,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며
세도정치 가문 안동 김씨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국가 경제가 무너지며 농민들은 유민 또는 노동자로 전락.

이때 서북인 양반 홍경래는 난을 일으켜 안동 김씨를 타도.
홍경래 농민군은 10일 만에 가산, 곽산, 정주, 선천을 점령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맞서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는데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몸을 재빨리 피했기에 구사일생.

그후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잡혀 그들에게서 직함을 받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 목을 천냥에 사서 조정에 바쳤다.
이렇게 공을 위장했던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그 뒤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된 반면
김익순은 비열한 인물로서 회자되었다.
하여, 김삿갓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 노비가 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의 비호를 받아
모반대역죄는 김익순에게만 묻게되어.
그의 자손들은 노비가 신세를 면하였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아들 병하와 작은 아들 병연에게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들어가서 남몰래 숨어살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 농촌에 살았다.

자식들에게 집안 내력을 숨겼던 김삿갓 어머니
둘째 아들 병연은 서당에서도 남달리 영민했다.
스무살이 되자 병연은 지방 향시(鄕試)에 응시.

시제(詩題)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

병연은 자신있게 시를 써내려 갔다.
시의 끝구절은 다음 같이 매듭지었다.

“임금을 잃은 이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어머니에게 자랑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옛일을 더 감출 수 없었다.
그 옛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은 병연은 방황한다.

어머니는 그 마음을 가라앉히려 22세에 장가를 들게한다.
그러나 병연은 결혼 후 아들을 낳고도 마음을 잡지 못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헤어져 삿갓쓰고 팔도유람하며 세상을 풍자

병연은 집을 나온 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삿갓을 쓰고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에 김삿갓으로 통했다.
그는 형 병하가 세상을 떠나자 방랑 2년만에 집에 들렀다.

잠시 집에 머무르는 동안 둘째 아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와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
그후 발걸음이 닿는 대로 전국을 떠돌았기 때문

북으로는 강계, 평양, 금강산 아래로 여산,
지리산 자락까지 방랑하면서 시를 쏟아냈다.

양반의 허세, 벼슬아치들의 탐학,
굶주라는 농민, 정이 그리운 기생
위선에 찬 현실과 고단한 삶을 표현.

그는 그러한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일삼았다.
술만 보면 실컷 마시고 거침없이 시를 지었던 그.

누가 따뜻하게 재워주고 먹여주고 솜옷을 지어주면
마다않고 입었다가 헐벗은 사람을 만나면 벗어준 김삿갓.
남루한 겹옷 차림으로 57세때 전라도 이름없는 곳에서 운명.
그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태백산 기슭 영월에 묻었다.

'그의 삶 자체가 풍류이고 시였던 김삿갓.'

그는 위선에 찬 양반세계를 해학으로 풍자하며
양반의 형식적이고 음풍농월식의 시를 거부했다.
그의 시에는 더럽고, 뒤틀리고, 아니꼬운 속내들

김삿갓과 관련한 일화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온다.
그가 개성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나무가 없어 못재워 준다고 했다.

이때 그가 지은 시는 이러했다.

“고을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邑名開城何閉門)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 하느냐.(山名松岳豈無薪)”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시를 우리나라 말로 쉽게 풀어쓴 시인.
민중과 함께 숨을 쉬며 탈속한.. 민중시인.

김삿갓에 얽힌 에피소드는 참 많다.
그중 제일 유명한 처녀뱃사공 일화.


<처녀 뱃사공.>

옛날 옛적에 김삿갓이 전국 유랑 다닐 적에
처녀 뱃사공이 노젓는 배에 올라타서 하는 말.

"여보,마누라.."
"어째, 내가 댁의 마누라란 말이요."

"당신 배에 올라탔으니, 내 마누라지."
"......................"

처녀뱃사공은 묵묵히 노를 젓다가
이윽고, 배가 강 건너에 도착하자
처녀 뱃사공이 김삿갓에게 한마디.

"아들아. 잘 가거라."
"내가 어찌 처녀의 아들인가?"

"내 뱃속에서 나갔으니까,내 아들 아닌감~~~"
"허허허~~맞는 말일세 그려~~~"



......................................
詩 : 바람이여..- 서 정 윤.
......................................


바람이고 싶어라
그저 지나가버리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하니 지나가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선유락(船遊樂)  배따라기.



진주목사 박원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
14 정재무 중 하나 ‘선락(船樂)’- 배따라기.

뱃놀이 춤으로 궁중에서 이어져온 향악정재(鄕樂呈才).
향악정재는 고려에서 계승된 중국 당악정재와 다른 무용.

궁중 무용(정재)은 신하가 임금에게 재주를 바치는 것을 의미.
즉 선유락은 임금이나 대비를 위한 잔치때 올려졌던 궁중 무용.
중국사신(귀향살이) 떠날 때 이별 애환을 담은 대아악 배따라기곡

.............‘배타라기곡(排打羅其曲)’ 연행 모습 -기록.............

“자리 위에 그림 배를 놓고 어린 기녀 한쌍을 뽑아서 죄인을 잡는 사령으로 분장하여 붉은 옷를 입히고 붉은 칠한 모자(朱笠), 패영에 호수와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에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쥔다. 먼저 군례를 마치고 첫 곡조를 부르면 곧 뜰 가운데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녀들이 모두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를 입은 채 어부사를 제창한다. 음악이 반주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어린 기녀를 죄인을 잡는 사령으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발선하는 포를 놓으라고 노래를 부른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녀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닻 들자 배 떠난다.
이제가면 언제 오리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눈물질 때이다.”
..........................................................

진주목사 정현석의 선유락에 대한 기록.

錦帆高掛採船輕.......비단돛 높이 거니 아름다운 배 가볍네
擧정砲聲鼓角鳴...... 닻 올리자 포성 나고 북 나팔 울리고
系知此去何時返...... 이제가면 언제 돌아오나
洽是朝天駕海行...... 황제께 조회하러 바닷길 오르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