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은 한반도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강이며
'천년 고도' 진주시의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발원지는 함양군 남덕유산 정상 아래., 참샘
남덕유산 금원산 기백산 백운산 괘관산 등
함양지역 산들에서 흘러온 물길이 모여 남강.
함양 화림동계곡, 용추폭포, 농월정 등은 절경지.
남강은 함양을 지나서 산청군 생초면에서
전북 남원 방향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합류
그 물줄기는 지리산 심원계곡에서 시작한다.
남원 운봉,인월 운봉고원에서 흘러온 또 하나의 물줄기
남원 산내면에서 합류하여 함양군 마천면 등을 지나서
산청군 생초면에서 덕유산에서 흘러온 본류와 만나는것
여기서는 경호강이라 부르는데 요즘 레프팅의 명소.
남강은 산청 신안면(원지)에서 다시 큰 물줄기와 합류.
의령군 합천군에 걸쳐있는 자굴산등에서 시작하여
합천군 삼가 산청군 생비량 등을 거쳐온 물줄기와
합천군 황매산에서 흘러온
물(단계천)들이 만나
신안면 원지에서 남강 본류와 만나 합류한다.
이곳은 진주 남강 다목적댐으로 인해
댐의 수위가 높을 경우 영향을 받는 곳.
아래 사진은 진주시 대평면의 진양호 상류.
남강댐으로 흘러온 남강은 다시 산청군 시천면 삼장면 등
지리산으로부터 흘러 온 큰 물줄기(덕천강)와 합류한다.
천왕봉에서 중산리와 대원사 방향으로 흘러온 물은
산청군 시천면(덕산)에서 합쳐 양당수 비경을 이룬다.
응석봉 등 주변 산골짜기에서 모인 물들을 받아들인 덕천강은
하동 옥종면 진주 수곡면
사천 곤명면을 지나 남강댐으로 유입.
아래 사진은 산청군 시천면(덕산)의 덕천강 양단수의 현장이다.
남남강댐은 우리나라의 다목적댐 1호로 1965년 완공된 댐.
남강댐은 유역 변경식으로
설계되어 홍수시 남해로 방류한다.
남강은 진주시를 관통하면서 촉석루 아래 의암을 만나고
뒤벼리와 새벼리 절벽을 지나 의령 함안 들판을 적셔준다.
남강은 창녕 남지읍에서
낙동강과 합류해 부산 앞바다로 간다.
선학산(뒤벼리 언덕)에서 본
남강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
촉석루(矗石樓) .
남강 변 벼랑 위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장원루
장원루는 병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 .,촉석루.'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 과거 고시장으로 쓰였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
앞면 5칸 옆면 4칸.,문화제 자료 8호.
논개.
우리나라 역사는 남성의 전유물로 알려져왔다.
여성은 역사에서 언제나 도외시되는 존재였다.
특히
이조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로 전락.
그러다 보니 역사상에 드러난 여성에 대한 평가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성 못지않게 역사상 걸출한 여인들도 있다.
이를테면 웅녀, 유화부인, 소서노, 낙랑공주,
허황옥, 우황후, 미실궁주, 선덕여왕, 선화공주,
신명순성황후, 기황후,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논개, 명성황후 등이 그러한 여인들
1. 웅녀(熊女) - 국조 단군왕검을 낳은 고조선의 국모.
2. 유화부인(柳花夫人) -
여신으로 모셔진 고구려의 국모.
3. 소서노(召西奴) - 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의 여걸.
4. 낙랑공주(樂浪公主) -
호동왕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 비련의 여인.
5. 허황옥(許黃玉) - 김수로대왕과 국제결혼한 김해 허씨 시조.
6.
도미(都彌)의 아내 - 백제 여인의 정절을 빛낸 절세가인.
7. 우황후(于皇后) - 제왕을 선택한 고구려의 여걸.
8.
한주(韓珠) - 고구려 안장왕을 사랑한 백제 미인.
9. 미실궁주(美室宮主) - 미색으로 서라벌을 울린 화랑들의 여왕.
10.
평강공주(平崗公主) - ‘바보’ 온달을 고구려 용장으로 만든 왕녀.
11. 선덕여왕(善德女王) - 관음보살로 추앙받던 신라 최초의
여왕.
12. 선화공주(善花公主) - 백제의 서동왕자를 사랑한 신라의 왕녀.
13.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 정종·광종을
낳은 태조 왕건의 셋째부인.
14. 천추태후(千秋太后) - 고려의 자주성 지킨 목종의 모후.
15. 기황후(奇皇后) - 고려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여걸.
16. 문정왕후(文貞王后) - 정난정과 ‘여인천하’ 구가한 중종의 제2계비,
17.
신사임당(申師任堂) - 현모양처의 모범, 빼어난 예술가.
18. 황진이(黃眞伊) - 풍류기행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개성의 명기.
19. 허난설헌(許蘭雪軒) - 삶의 아픔을 빛나는 시로 바꾼 대표적 여성시인.
20. 이매창(李梅窓) - ‘변산3절’로 꼽히는
부안의 명기.
고대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았던 걸출한 여성들
근대사회로 올수록 신분이 낮은 걸출한 여성들.
우리나라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뀐 흔적.
논개는 이조 중반 임진왜란 당시의 여성.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동반자살.
이조 충신과 열녀 행적에서 제외되었던 논개
그러한 논개 무덤에 연시를 받친 승려시인 한용운.
1879.8.29 충남
홍성 출생 ~ 1944.6.29 서울 死亡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
'한용운은 왜 논개에게 연시를
바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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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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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깊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에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이냐 울음의
모우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같은 그대의 손에 꺽이우지 못한 낙화대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밝히운 강 언덕이 묵은 이끼는 교긍에 넘쳐서
푸른 사롱으로
자기의 제명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가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만은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같은
굳은 언약을 져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잇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그대에게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가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에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
...............................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와는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집.
그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운명했던 한용운.
19 나이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던진 논개.
그는 논개의 애국심 앞에 연시를 받친 것 아닐까?
11세기 영국의 '고다이버'를 연상하게 하는., 그녀.
................고다이버 부인....................
1898 영국 화가 죤 콜리어 作 '고다이버
부인'
외설인가? 예술인가? 혼란스러워 지는 호기심.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새벽 미명에
마을 중심가를 향해 걷는 말 한 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 '고다이버'.
긴 생머리와 고개를 늘어트린 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시끌벅적해야 할 마을 광장은 이상할 만큼 고요한 정적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으며, 창문조차 굳게 닫힌
거리.
햇빛도 수줍은듯, 그녀의 알몸을 비껴 흩어지는듯.
그녀의 숭고한 알몸 시위에서 유래된 고다이버이즘'
......................................................
......'고다이버이즘'(godivaism)...........
마치, 전설 속 주인공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고다이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방 영주의 신부 이름에서 유래.
그녀의 남편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영주 리어프릭
그녀는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자
농노를 대신해 남편에게 세금감면을 간청.
영주는 17세 신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인간의 나신을
신이 주신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했다는데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장을 한바퀴 돌아
그 신의 예술품을 보여준다면 당신 뜻대로 하겠소."
아직 어린 신부 고다이버는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과중한 세금때문에 죽어가는 농민들
그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 뿐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
그녀는 긴머리로 가슴과 국부를 가린채
다음날 아침 알몸으로 말을 타고 나선다.
과중한 세금정책에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그러나, 놀랍게도 커튼이 드리워진 거리.
그녀의 소식을 소문으로 전해들은 농민들.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
그러나, 몰래 엿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
아직 17세에 불과한 아름다운 영주의 부인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엿본 양복 재단사 톰
마을 사람들과의 사전 약속을 잊어버리고
커튼을 들춰 몰래 엿보는 순간 눈이 먼다.
숭고한 그녀 뜻을 더럽힌 것에 대한 신의 벌
훔쳐보기 대명사 '피핑 톰'(Peeping Tom) 유래.
그녀
이야기는 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많은 논쟁거리
당시로서는 알몸 시위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
그녀의 시위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거룩한 뜻.
지금까지 ‘관행이나 상식, 힘의 역학에 대응하여
역의 논리로 대처하는 시위를 고다이버즘이라 한다.
전통적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행동 = "고다이버이즘'
.............................................................
............고다이버 부인의 동상...................
'영국 콘벤트리 광장에 있는 고다이버이
동상.'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 속의 여인.
긴 머리를 늘어트린채 알몸으로 말 타고 있는 여인.
'콘벤트리에서 아직까지도 존경받는 여인.'
런던에서 차로 70분 거리에 있는 콘벤트리.
그녀의 동상은
콘벤트리 대성당 옆에 위치.
2차대전 당시 독일군 폭격으로 폐허였던 마을.
옛 잔해를 그대로 둔채 그 옆에 신축한 대성당.
하필이면, 그 곁에 알몸 여인의 동상을 세운걸까?
전설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역사를 관광 자원화하는 지혜.
그
슬기로움은 본받을만 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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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축제는 논개가 탄생(1574년
9월 3일)한 날을 기념.
그 정신은 민족정신이며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모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숭고한 맥이
이어져오는 듯.
'그 숭고한 맥은 어디에서 발원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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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 전설 속
천왕성모의 8 딸은 8도 무당.
한반도 팔도로 보내졌고, 각각 터전을 잡았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8 무당은 곧 8도의 지배자.
셋째 딸은 벽소령을 넘어
청학동 삼신봉 거쳐 하동.
그후 하동에서는 함양 마천 백무동까지 가지 않았다.
하동에 하나 둘 무당이 늘어 백여명에 이르렀기 때문.
백무동은 무당 100명을 배출한 곳이라하여 일명 백무당.
길흉화복을 예고해 주는 100 무당은 예언자.
인간사 과거 현재 미래 운명을 꿰뚫는 존재.
무당은 하늘이 점지하고
선택한 선녀같은 존재.
미신이 기승을 부린 구한 말.
무당의 본향으로 정착한 백무동.
개화기 일제 치하에서 금지된
무속.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진 무당들.
화개면·악양면·적량면·횡천면·고전면·금남면·
금성면·진교면·양보면·북천면·청암면·옥종면,
신흥·위대 출장소 등 1개읍 12개면을 거느린 하동.
화개면 악약면 등
4개 면은 진주로 편입되었다.
하여, 백여명 하동 무당이 오늘날 진주기생 근원.
백무동에서 벽소령을 거쳐 진주에 뿌리내린 무당들.
하여, 벽소령(광대골) 부자바위에 얽힌 선녀의 전설
'형제봉 전설'과 연하천 일대 유혹적인 요정의 전설.
고대사회
통치자 무당이 신분 전락하는 과정의 전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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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기생의
신분은 8부류의 천민에 해당.
그러나, 그 삶은 사대부 권력 지배층들과 대등.
당대의 석학들과도 정담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다.
경회루에서 문무 백관을 한시로 제압한 소춘풍.
그 연회에서 궁궐기생 소춘풍에게 반했던 성종.
성종의 구애마저 거절해
더욱 유명했던 소춘풍.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후궁 자리도 사양.
기생 신분을 지킨 소춘풍은 성종의 숨겨진 연인.
선녀 같은 고혹적인 매력으로 왕을 사로잡은 여인.
'성종이 그녀를 찾아와 뜰에서 정사를 나눌 정도.'
우리나라 명기들은 선비 못지 않게 지조를 중시.
신분으로는 천민이지만 역사에 남는 여류 시인들.
풍류를 즐기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여겼다.
역사적으로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았던 기생들.
국가 위기마다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해낸
기생들.
구한말 기생 사진을 보면 왕실 여인 못지 않은 기품
'그 근원적 기품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우리나라 단군신화를 보면 인간의 조상은 곰.
천왕성모 전설로는 무당이 조선 8도의 지배자.
무당은 고대 사회
지배자이자 기생의 원조이다.
신라 김유신의 연인이자 국가제사를 담당했던 천관녀.
천관녀는 통일신라에 불교가 부흥하면서
무당으로 전락.
무당에서 비구니가 되어 천관사에서 여생을 보낸 천관녀.
천관녀는 원래 통일신라 화랑 집단을 이끈 원화.
지리산 세석평전과 노고단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천왕성모 전설 속 무당과 신라 원화는 무관하지 않다.
천관녀는 문헌
기록상 우리나라 기생의 원조이다.
하여, 기생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재조명해 보자.
역사적으로 진주는 평양과 함께 빼어난 기생의
고장.
'예전에 진주 의암호 인근 요정에서 묶었던 하룻밤.'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귀불가(歸不家)로 기억된다.
무척 오랜 기억이라 아스라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요정.
진주 친구의 환대를 사양할 수 없어 결국 밤을 지새웠다.
정통 가무와 판소리 가야금과 술시중 드는 기생.
어차피 객지의 노고를 풀 숙소가 필요했던 그날 밤.
올 땐
맘대로 와도 갈 땐 맘대로 못간다는 '귀불가'.
귀불가(歸不家)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는 내 곁 기생.
'다음날 새벽녁까지
고이 지새웠던.. 긴 밤.'
그녀가 내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할만큼 고혹적인 미모였던
그녀.
그녀를 품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도 품지 못했던 기나 긴 밤.
옛
성현이 누린 풍류를 몸소 체험하고팠던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던 밤.
그녀가 들려준 논개
이야기가 내 마음을 사로 잡은 탓.
풍류 묵객이 즐겨 찾을만큼 격조 높은 요정이었던 추억.
참으로 길고도 짧았던 잊지못할 추억이
서린.. 진주의 밤.
'진주는 옛부터 풍류 묵객들이 많이 찾아들던 고장.'
지리산 남쪽 자락 어느 곳을 가도 거쳐야
했던 관문...진주.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남쪽 허리 대중 교통 집결지는... 진주.
진주를 찾은 많은 여행자와 문인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촉석루.
논개가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뛰어 든 의암.
물이 깊고 소용돌이 치는 위험한 바위란 뜻의
이름 '위암'
논개가 열 손가락에 낀 반지로 왜장을 빠져나갈 수 없게 꼭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義를 펼친 의기를
기리기 위한 이름.'의암'
의암호는 촉석루 앞 남강의 거대한 호수
논개가 숨진 의암을 품고 있다하여, 의암호.
의암의 주인공 논개는 많은 이들에게 기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실이었다고 한다.
논개는 장수군 주촌부락의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 외동 딸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숙부 주달무에게 가 자랐는데
숙부가 강제로 임내면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보냈다.
논개는 도망쳤다가 붙잡혀 장수현감 최경회의 재판을 받고
무죄방면
되었지만 의지할 곳 없어 최현감 후실로 들어간다.
그후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현감은 의병을 모집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논개와 함께 진주로 부임한 그해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
'최현감 절도사는 김천일 고종후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
논개는 국치의 설욕과 부군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엿보던
중,
그해 7월 7일 촉석루에서 왜군의 승전잔치에 기생을 가장한다.
주흥에 취한 왜장 게다니무라 로꾸스케을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
'그 허리를 껴안고 물속에 몸을 던진, 논개 나이는 19 세.'
조정에서는 논개의 순절을 기려 의암이라는
사호(祠號)를 내렸고
그녀의 높은 정절을 추모하기위해 논개의 사당을 촉석루 곁에 짓고
1954년 그녀의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에도 의암사 사당을 건축했다.
의암별제.
이조 말기 진주기녀들이 지내는 제사가 바로 의암별제이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중에 날을 받아
지낸다.
....................의암별제를 만든 정현석 목사의 글..........................
“장수(長水) 기생 노은개(魯隱介)는 절도사 최 경회(崔慶會)이 소실
임진왜란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6만 군(軍)과 민(民)이 함께
전사하니,
논개가 촉석루 연회에서 왜장 허리를 끌어 안고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후 조정에서 논개의 사당을 세워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진주 부임 다음 해, 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義妓祠)를 중건
의암별제를 지냈고 제관은 진주기생
중에서 뽑아 제례의식 절차거행."
....................................................................................................
의암별제는 악사를 제외한 제관과 연희자가 모두 여자들이다.
통일 신라시대 천관녀가 주관한 국가제사 풍습에서 비롯된 듯.
초헌관을 비롯해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있는 늙은 기생 중에서 뽑고
당상과 당하의 집례는 글을 잘 아는 기생을 선임하여
맡겼다고 한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고 나면 대축이 논개의 영혼앞에 축문을 고한다.
“맵고 매운 영혼이여 산천의 정기로다.
빙옥같이 맑은 자태. 상설같은 곧은 마음.
임진년 난리를 만나 왜적에게 무너진 성벽.
육만 군민들이 한 구덩이에
묻힐 적에도
낭자의 충성심이 있어 죽음 앞에 겁낼손가?
백척 높은 바위 끝에 홀로 서서 맞은 웃음
왜놈 무찌를 때
티끝 같이 목숨 바쳤던 낭자
그 숭고한 충열에 힘 입어 나라강산 다시 밝아
천추에 높고 매운 논개의 절개 만고에 향기롭다.
돌에 새겨 높이 드러내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니
유월 한여름 좋은 날 때를 가려
삼백 미녀 분장하여 제청에
치성할 제
구슬픈 젓대소리, 제수도 푸짐하다.
임이여 내리셔서
맑은 술잔 드옵소서.”
의암별제는
전국기생들이 모여 촉석루에서 벌린, 국민적 축제.
1910년 일제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며 의암별제의 맥이 끊겼다.
진주 기생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교방의 전통을 이어 진주권번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의암별제를 전승하려했으나 실패.'
조선말
진주교방 출신의 최순이씨(1891~1973년)와 성계옥씨
최씨는 의암별제 진주검무를 배우던 제자 성계옥씨에게 전했다.
성계옥씨는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87년 ‘의암별제지’간행.
이에 따라 구전으로 이어온 의암별제 봉행이 본격적으로
가시화.
1992년 의암별제가 촉석루에서 맥이 끈긴 후 82년 만에 재현된다.
논개 (변 영로 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그 위에 흘러라.
아름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며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기리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남 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몇년
전까지.. 이조시대 충신과 열녀의 행적에서 제외된 논개.
단지, 천한 기생의 절개를 논하는 것이 가당하지도 않다는 이유.
1988 년 함양군수 최낙건이 논개의 묘를 재정비하며 논개의 삶에 매료.
논개에 관한 흩어진 사료와 유적을 찾아내 이전
통념과 다른 주장을 제기.
뒤늦게 나마 그녀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사실대로 밝혀져 다행한 일이었다.
의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왜장을 유인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기에 <의암>이라고 명명. 바위 서쪽 벽면에 의암이란 글자를 전각 남쪽에는 한몽삼(1598∼1662)이 새긴 의암
의암 옆면에 글귀.
"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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