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8 ( 청학사. 성제봉. 고소산성. 최참판댁. )

donkyhote 2011. 2. 28. 02:35


청학사. 

 

 

 

 

 


청학사 -성제봉 - 고소산성 - 최참판댁
청학사 아래 주차하고 산행할수 있는 코스.
세석평전 인근 청학연못까지 이어진 등산로.

'청학사는 청학연못과 관련된 사찰인듯.'

세석평전은 통일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호국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찰이 있었을듯.
성제봉 아래 청학사는 그 맥을 이은 사찰인듯.

청학사는 이곳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 있다.
경기도 가평 운악산을 비롯, 동강 청학사 등.
청학사는 신라, 고려시대로부터 호국 비보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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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청학사는 무학대사가 터를 정한 한양의 비보사찰.
비보사찰은 신라 말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에서부터 유래.
황룡사 구층탑, 사천왕사, 천룡사 등이 신라시대 비보사찰.

비보사찰은 자연재해의 방지, 왕경수호,
외침으로 인한 국토방어 목적의 호국사찰
지리적으로 왕경 중심부의 도성 곁에 배치

또는, 풍수지리적 전략적인 요충지에 입지

고려 때 개경 중심으로 전국에 3천 비보사찰이 설치
그 기록 대장인 『비보기(裨補記)』에 전해오는 내용.
비보사원에는 국가비보소(國家裨補所)등의 등급도 존재

이조시대 억불 정책으로 수많은 사찰들이 철폐되고
호국적 기능을 지녔던 비보사찰들 만은 그대로 유지

삼각산 청학사는 보현봉과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청와대 뒷산) 직전에 위치해 있다

무학대사는 한양의 주맥을 중시하여
보현봉에 보현사(일선사)를 창건했다
무학대사가 바위굴에서 수도했다는 터.

무학은 한양 요소마다 비보사찰을 배치
태조 4년(1395)에 약사사(봉국사)를 창건
이듬해 자운암 호압사 사자암 영도사(개운사)

그 외에도 안정사(청련사), 보현사(일선사),
회룡사, 불암사, 백련사 등을 중창하였던 것
특히 한양 주맥이 되는 보현사는 청학사 옛터

안정사와 백련사는 각각 도성의 동쪽과 서쪽
한양의 도성을 수호하는 비보사찰의 역할

자운암, 호압사, 사자암은 한양의 조산(朝山)
관악산의 풍수적 역세(逆勢)를 다스리는 곳.
특히 청학사터 보현사는 한양 도성의 주맥 위치.

무학대사의 비보사찰들은 모두 전통사찰로 지정
이조 때 모진 불교탄압에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이 일어난 원동력이 된 비보사찰.

..................비보사찰(裨補寺刹).................
비보사탑 사상(裨補寺塔 思想)에 의해 건립된 사찰.
비보사상은 신라말 고려초 승려 도선에 의해 체계화
밀교의 택지법과 음양오행 풍수지리사상이 결합된 것.

도선의 비보사상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

고려 왕건의 탄생을 도운 택지 선정과 제택건립(第宅建立)
도선은 왕건의 부친이 송악에서 집을 지을 때 곡령에 올라
산수의 맥을 살핀 다음 성자(聖子)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

그에 따라 왕건이 태어났고,
도선은 왕건이 17세 되던 해
다시 나타나 왕건의 창업을 예언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한편 도선은 밀교의 택지법이나 풍수도참설에 의거
전국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사찰을 건립

〈도선밀기 道詵密記〉에서 지정된 비보소(裨補所)는
약 3,800개소에 달하며 비보사탑설을 태조 왕건이 신봉

고려의 전 시기에 걸쳐 이 설은 크게 성행했고,
비보사찰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비보사탑설의 지나친 유행으로 국력이 쇠퇴

마침내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의 세찬 비난의 대상
비보사탑설은 고려의 패망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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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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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자 고구려 승려 3만명이 출전.
신라의 호국불교는 원광법사의 세속5계로부터 비롯.
황룡사 9층탑은 주변 9 나라의 귀복을 목적으로 건립

신라 왕실은 인왕(仁王)에 의한 국토 수호를 목적으로
인왕백고좌 도량을 열어 고승들을 불러 인왕경을 강설.
주술 성격을 띤 문두루도량을 열어 당나라 군사 격퇴설.

고려시대 호국불교는 보다 주술적이고 의례적인 형태
재난극복 및 국익증진을 목적으로 많은 도량을 열었다.

당시 도량으로는 금강명도량, 금강경도량, 관정도량,
제석도량, 약사도량, 문두루도량, 인왕도량이 대표적.
고려 8만대장경은 몽고를 격퇴하기 위한 호국불교 사례.

항마군(降魔軍)은 고려 승려로 편성 조직된 특수한 군대.
'항마'란 득도의 방해가 되는 악마를 항복시킨다는 의미.

제15대 숙종 때 여진(女眞)의 침입이 잦았다.
이에 여진족 기마병에게 고려는 늘 심한 타격
윤관은 이에 대처할만한 특수부대 조직을 건의,

1104년(숙종 9) 12월 별무반(別武班)을 조직.

뱔무반은 항마군, 신기군, 연호군 3군으로 편성
사원에서 종사하는 수원승려를 징발한 것이 특징.

이조 호국불교는 천재지변을 없애기 위한 주술적인 의례
보살계도량을 비롯한 장경도량, 식재도량, 정도량, 용왕도량,
무차대회 같은 것은 이조시대 호국불교도량의 대표적인 것이다.

이조 호국불교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僧軍)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병이 활발하게 일어난 이조시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지휘 하에 축성공사에 참여
상기와 같은 내용이 역사상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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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가 건국되면서 표방한 정치이념은 성리학(性理學)
이것을 기반으로 고려의 모든 문물제도는 새롭게 개혁.
고려 쇠망의 원인들을 파악하고 그 원인들을 제거했다.

그 개혁 대상의 중심부에 불교가 자리했던 이조.
고려 말 불교가 정책적 지원을 통해 지나치게 부패

당시 승려들은 세금이나 군역의 면제를 받았고,
불교사원이 융성은 국가경제 기반을 흔드는 요인.
고려 말 불교는 이조 신흥 세력들에게 비판의 대상

이것은 곧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직결.
사찰의 축소, 면세, 면역 폐지로 불교는 무력화
정도전의 저서 불씨잡변은 불교 배척 정책의 기틀.

정도전의 비판은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선택적 비판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자 불교 개혁은 예상된 결과.

이후 세종(世宗)에서 중종(中宗) 대를 거치면서
승려의 도성출입 제한, 과거제도 승과(僧科) 폐지,
그리고 모든 불교 종파가 선교(禪敎)로서 통합되다가
결국 종단조차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는 상황으로 변모.

이러한 유교적 예속화에도 불구하고 명종(明宗) 대에
보우가 문정왕후를 통해 종단 및 승과제도를 되살렸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동시에 억불 정책은 더욱 심화

보우는 일정론(一正論)을 통해 유교와 불교를 회통
불교의 현실적 위기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피살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며 불교는 또 쇠퇴.

그러나 그의 사상은 서산 대사를 통해 새로운 전기
불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불씨로서 자라났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묘향산에서 오랫동안 수양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서산대사는 30세 되던 해 슨과에 도 장원으로 합격

그러나 38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을 돌며 지내다가
묘향산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며 생을 마감했다.

하루는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로구나.”라는
원적송을 남기고 가부좌로 입적했다.
세수는 85세(1604년)였고, 법랍은 67년.

유교와 불교는 궁극적 경지에서 동일한 토대
불교와 유교의 회통을 모색하는 교량을 만든다.
성균관에서 배웠고 과거까지 치루었던 서산 대사

당시 이황과 고봉의 사단칠정론으로 계속된 논쟁들
그 심성 수양의 측면에서 불교와 교유될 수 있었다.
서산대사는 불교와 유교와 도교까지의 회통을 시도.

이조시대 승려들은 왜란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
이조 왕실을 수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성제봉(聖帝峰).


 

 


 

 

 

 

 

 

 

 

고소산성에서 내려다 본., 최참판댁.

 

통천문

 

구름다리.

 

 

 

 

 

 

 

 

 


경남 하동 성제봉(형제봉)은 조망이 탁 트인 곳.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 끝 봉우리.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멋드러진 코스'

하동과 구례를 오가는 19번 국도상
악양면 평사리 외둔마을 '소상낙원'

`소상낙원'-고소산성-고소대-통천문-봉화대-
신선대-성제봉-샘터- 청학사 (6-7시간 거리)

청학사-성제봉-고소산성-최참판댁

고소산상이 위치한 형제봉의 또 다른 이름.
성제봉에 지명 관한 유래는 여러 설이 분분.
성제(聖帝)봉은 거룩한 성군을 뜻하는 봉우리.

'성제란 과연 누구를 칭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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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신화에 나오는 신시,그리고 하백

성제란 단군조선이 일어나기 훨씬 전..단군의 조상.
한국에서는 인구가 불어나고, 각 종족이 번성했다.
하여, 읍(邑)으로 불리우는 소국들이 많이 생겨났다.

천제를 대리하여 소도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필요.

천제한인이 서자 한웅에게 천부삼인을 주어
소도의 관리자로 임명하는 내용이 단군신화.

천부삼인(금악, 삼위, 태백) 중
장차 소도로 쓸 태백으로 보내어,
신시(神市)로 하였다. (<신시본기>)

상고시대 신시를 열 수 있는 곳 = 청구

청구란 많은 사람이 모여 화백회의를 할 수 있는 구릉
천부삼인은 신시를 주관 할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증표.
우리나라 역사 상 처음 청구가 생긴 시기는 한웅천왕 때

첫번째 청구는 태백으로 불리우는 쇠머리 형상의 섬.
신시연구가 장동균 씨 주장은 청구는 황하하류 저지대
치우천왕이 다스린 청구국은 탁록에서 황제와 전쟁 직전.

이때 지진이 일어나 바다 속으로 침몰한 청구국
서북계도(西北界圖)에 그려진, 쇠머리형상의 섬
현재 한반도 서쪽 저지대는 서해 속으로 사라진듯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치우천왕의 청구국.
한인천제 당시 시작된 신시제도도 사실상 붕괴
청구국이 멸망한 이후에 생겨난 나라가 단국이다.

단국은 배달국 맥을 이어 3대를 유지.

태제(泰帝), 홍제(洪帝), 성제(聖帝)

성제((聖帝)는 단군조선을 창건한 단군왕검.
이 때 배달나라 국호를 숙신(肅愼)이라 한다.
당시 중원의 판도는 홍제와 수분하(綏芬河)를
가운데 두고 제곡고신과 대결구도 상태였다.

(주 : 수분하 = 서쪽에 있는 황하 지류)

제곡고신 영역에 있던 곤오는 풍이족.
한인천제를 조상으로 둔 풍이족 후예
그는 제곡고신 폭정을 피해 홍제에 귀순
숙신의 땅에서 불함산 북쪽에 살게 된다.

소씨(蘇氏) 족보에 의하면,

홍제 8년 제곡고신이 수분하 동쪽으로 침공하자,
이를 기풍(己豊)이 나가 맞이하여 싸워 물리친다.
홍제는 기풍의 공을 치하해 소성(蘇姓)을 사성(賜姓)

소성(蘇城)에 봉해 하백(河伯)이 된, 기풍.

하여, 기풍은 소풍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하백이 된 기풍은 소도를 관리하게 된다. 
하백은 구주 통합국의 통치자와 같은 위치.

홍제가 기풍을 소성에 봉했으므로,
그는 불함산 북쪽에서 소성으로 이주.

소성을 부소갑(扶蘇岬)이라 한 것을 보아,
소성은 갑(岬)이 있는 물가인듯 여겨진다.
그곳의 나라 이름을 유소(有蘇)라 부른듯.

한인천제가 처음 도읍한 배곡 = 북소(北蘇)
부소갑 = 남소(南蘇), 하남 업성 = 서소(西蘇)
이들, 북소 남소 서소를 삼소(三蘇)라고 하였다.

부소갑에서 태어난 곤오의 큰아들 이름은 갑(岬)
부소갑의 따님을 하백녀(河伯女)라고 하였는데,
단군 왕검의 둘째 부인이 곧 하백녀(河伯女)이다.

<소도>라는 말이 소풍에게서 나왔다고 추정된다. 
소도는 화백회의를 하는 신성한 장소로 자리매김.
곤오가 이곳에서 청동으로 솥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

'이곳 솥터라는 옛 지명이 소도로 변한듯.'

소도의 도(塗)는 도기(陶器)를 의미하는 문자
지나족(현재 중국인 조상) 선진사(先秦史)에는
곤오가 청동솥과 도기를 만들던 곳이라는 기록.

<후한서>에 나오는 진국(辰國) = 삼한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
진(辰)은 뱀과 용이 상징인 '풍이족' 국가.

풍이국은 한인천제가 세운 나라,
이를 승계한 사람이 곧 곤오이다.
곤오의 영역 삼한은 곧 진국에 해당.

마한은 마가의 나라로 볼 수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마고의 나라이다,

즉, 마한(麻韓)은 '마고의 나라'에서 변음.
진한은 풍한(風韓) 곧 '풍이의 나라'에서 변음
변진은 별진(풍이를 상징하는 별의 나라)의 변음

진(辰)은 훗날 진(眞)으로 변음

이들 문자의 변음을 유추하면,
후대에 생겨난 막조선은 마한에서,
번조선은 변진에서, 진조선은 진한에서
각각 고대국가 형태로 발전한듯 추정된다.

이들 중 신시 역할을 수행한 나라가 있었을 듯.
단군왕검은 조선을 선포후 10년에 한번 신시를 개최
단군왕검 관할인 진조선에서 10년에 한번 신시가 열린듯.

'따라서, 성제란 단군 왕검을 상징..'




고소산성.

 

 

 

 

 

 

 

 

고소산성에서 내려다 본 평사리 들판과  마을. 

 


삼국시대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소산성(姑蘇山城)
축조 시기에 관한 유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00년 전 즈음 삼국 간 격전이 벌어진 군사 요충지.

1966년 사적 제151호로 지정된 고소산성
하동-화개장터 국도 따라 차로 20분 거리

동북으로 지리산 준령을 등지고 있으며
서남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내려다 보며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통로의 길목이다.

'지금은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

화개장터 지나 불무장등 끝 지점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역.
지리산 형제봉 아래 섬진강 인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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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형제봉이란 봉우리가 셋이나 있다.
구례군 마산면 형제봉, 벽소령과 명선봉의 사이,
남부능선 마지막 봉우리, 함양군 악양면 형제봉.

'셋 모두 우애 깊은 형제 같아.. 형제봉.'

성불재 - 형제봉 - 신선대 - 고소산성 코스.
불일폭포나 쌍계사 못지 않은 아름다운 경관.
그러나, 두 명소 유명세에서 밀려 한적한 코스.

섬진강 풍요로운 물줄기 따라 펼쳐진 지리산 자락.
가고 또 가도 지겹지 않으면서도 구석 구석 볼거리
지리산은 언제 가도 돌아서는 발목을 끌어 당기는 곳.

지리산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곳이 더 많은 곳.
지리산 자락의 고소산에 있는 고소산성이 그렇다.
악양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다.

고소산성은 백제와 나단연합군 간에 치열한 격전지.
산성둘레 팔백m로 장방형 바위를 견고하게 쌓은 석성
남북 양쪽에 성문을 설치했고 성벽 높이는 3.5~4.5m

'아래 폭이 6m 이고 상단 폭이 2m인 사다리 모양.'

이 성터는 지리산에서 뻗어내린 평사리 뒷산 300m 고지
동북쪽으로 험한 산줄기를 등지고 서남쪽으로는 섬진강
고소산성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경사가 급해 무척 힘들다.

일단 올라서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눈길을 주고 보면,
기다란 섬진강 줄기와 평사리, 푸른 악양벌이 보인다.
부산의 동래산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성이다.

비록 그럴싸한 성문도 없지만 축성한 것을 보면 더 든든.
울퉁불퉁한 돌들의 아귀를 맞춰 빈틈없이 쌓은 것이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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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은 고소산성 일대.
정확하게는 화개장터 지나 불무장등 거쳐 삼도봉
신라와 백제 접전지역이 오늘날 영,호남의 경계선.

하동은 '한다사군'이었다가
삼국통일 후 경덕왕때 하동군

신라 김춘추 장군이 백제를 공격하려 당 원병을 청해 축조,
나당연합군 주둔기지로 활용하면서 백제와 왜의 협력을 차단
이곳에서 소정방 군이 주둔하면서 주력부대를 지휘했다는 곳.

그러나, 이 설은 산성 이름에 소정방을 끌어들인 느낌.
소정방이 이끈 나당연합군 주력부대는 당시 금강을 침공
악양도 신라에서 당과의 우호 목적으로 중국 악양을 모방.

백제와 왜(倭)와의 협력을 차단할 목적으로
신라가 나당 연합 전 고소산성을 축조했을듯.
아직 풀리지 않은 '베일 속 수수께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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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연개소문,
신라 김유신.
백제 계백.

3 장군은 삼국을 대표하는 같은 시대의 영웅.
삼국시대에 전력이 가장 열세였던 나라는 신라.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덕여왕 2년(648년).
김춘추는 당나라 사신으로 가 백제 정벌 원군을 요청
진덕여왕이 지은 '태평송'을 바치고, 당나라 연호 사용.

..................태평송(太平頌)....................
650년 진덕여왕이 당 황제에게 보낸 5언 고시.
당나라 위엄과 문화적 우월성을 칭송하는 내용.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
세계각국 모든 나라의 복속을 요구했다.
하여, 당 고종에게 태평송을 보낸 진덕여왕

647년 즉위한 진덕여왕은
그해 정월 비담 무리를 평정.
10월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갔지만 실패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를 개편.

당시, 당에서는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
이무렵 신라 김춘추는 사신으로 당에 간다.

그후 당에서 돌아온 김춘추
진덕여왕에게 태평송을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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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생존을 위한 김춘추의 눈물겨운 외교정책 결실
신라는 매년 당 황제에게 보내기 위한 미녀들도 선출.
미인 대회에서 선출되면 친선외교 사절로 당나라에 파견.

신라는 우여곡절 끝에 나당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집중 공격해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로서 배수진.

계백은 '죽기전엔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는다'는 신조.
계백 5천 결사대는 신라 5만 대군과 맞서 황산벌을 사수.
신라군은 10 배의 병력으로도 백제 결사대와 싸워 연전연패.

그 사이 당군은 기벌포로 진격, 부여 사비성은 풍전등화.
사비성을 당군에게 빼앗기면, 신라는 '죽 쒀 개 주는 격'
당나라가 백제를 함락하고서 신라까지 삼킬지도 모를 일.

당나라 대군이 백제 사비성을 함락할 것인가?
아니면, 신라군이 먼저 백제에게 항복 받느냐?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신라의 운명.'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여기에서 김유신이 채택한 전술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전의를 상실한 신라군 사기를 높이는 일.

하여, 꽃다운 화랑을 결사대로 이용한다.
화랑 관창은 선봉으로 나서 장열하게 전사.
그의 죽음은 신라군 분노를 흔들어 깨운다.

두번째, 백제군 결사대의 결의를 역이용한 김유신.
'죽기 전엔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는다'는 백제군.
비오는 날 진흙덩이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러자, 계백 결사대의 장점은 단점으로 전환.
진흙탕에 젖은 갑옷을 입고서 싸우기에는 무리.

김유신은 계백의 장점을 단점으로 전환시키고,
패배감에 빠진 신라군의 분노를 일깨워서 승전.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물리쳐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에서 유일하게 진골 출신이 아닌, 김유신.
김유신은 가락국 왕손이지만 신라에서는 이방인.
신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일.

김유신은 삼국통일 원대한 야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김춘추와 손을 잡는다.
그것은 김유신이 신라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

'나라가 위급하면 반드시 영웅이 필요한 법.'

김유신은 거의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까지 몰아낸다.
김유신은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마저 포기.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이 못 이룬 꿈.
'구형왕의 손자' 김유신에게 이어진 꿈.
결국, 김유신 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진 꿈.

'오직 그 꿈을 향해 내달렸던 김유신.'

신라 두 여왕 등극의 든든한 뒷배경은 김춘추와 김유신.
두 여왕을 앞세우고 두 사람은 꾸준히 자파 세력을 확장.
결국, 두 사람은 신라를 장악하고 삼국통일까지 이뤄낸다.


'고소산성은 언제 누가 축조했을까?'

나당연합군을 이끈 소정방이 쌓았다는 설.
삼국통일 후 신라까지 장악하려 했다는 설.
그러나, 정확한 축성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시대.
신라 삼국통일 열쇠를 쥐고 있었던 인물.
고소산성은 그무렵 쌓았을 것으로도 추정.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단단히 움켜쥔 여왕.
자신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이룩한 통치자.

7세기 초 신라는 정치적으로 변화가 심했던 시기.
원래, 신라 왕위는 부모가 모두 성골이어야 한다.
하여,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가 왕위.

왕위계승 자격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 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성골 다음 계급인 진골 남성 중 왕위 유력한 후보.
김용춘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듯 했다.
그러나, 화백회의는 김용춘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평왕의 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했다.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 왕위는 상상을 초월한 사건.
남성들 화백회의 만장일치로 덕만공주는 왕위 계승자

나라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왕의 자질.
즉, 통치자의 카리스마를 덕만공주에게서 발견.
덕만공주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권 획득.

선덕여왕이 보여준 군왕의 능력은 바로 인재등용.
그녀는 자신이 매혹적인 여성인 점을 적절히 이용.
김춘추와 김유신을 발탁하여 그녀의 휘하에 두었다.

왕위 계승권을 두고 선덕여왕과 경쟁한 김용춘.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 역시 선덕여왕에게는 정적.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정적이 될 수도 있는 김춘추.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역적으로 몰지 않고
그를 최고의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고 곁에 두었다.
김춘추에게 외교 전반에 대해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

김춘추가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정적을 곁에 두고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한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

선덕여왕 재위시 김춘추는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고
오히려 가장 충실한 신하로서 선덕여왕을 보필하였다.
선덕여왕이 그 누구보다도 아꼈던 인재는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원래 신라에게 합병 당한 가락국의 왕손.
김유신 가문은 가야 멸망 당시 신라의 진골로 편입.
그러나, 배타적인 신라 귀족들에게 김유신은 이방인.

명목상 진골일 뿐인 김유신을 발탁한 선덕여왕
김유신에게 신라 군사권 전부를 맡긴 선덕여왕.
잘못하면 국가 전체를 위협하는 파격적인 인사.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능력만으로 평가
합당한 지위를 부여해 충직한 신하로 곁에 둔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그를 조정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

선덕여왕 재위 때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는다.
웅대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이 시기에 속출.
정치적 문화적으로 꽃이 폈지만 국외 사정은 어려웠다.

원래 삼국 중 영토가 가장 작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
고구려 남하 정책과 백제 중흥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국가 존립이 문제되던 때에 선덕여왕의 화려한 외교술.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세력과 동맹관계 결성.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방어선을 구축.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
선덕여왕의 정치적 성공은 그녀 개인적 삶의 희생.

그녀는 여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독신생활을 했기에 후사가 없었다.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매력과 미모.
어지간히 남자의 속을 태우는 매력의 소유자.
신라 남자라면 모두 흠모할 만큼 만백성의 연인.

............삼국유사 속 선덕여왕에 관한 고사............
'지귀'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흠모하다가 상사병.
영묘사에서 불공 드리던 여왕은 그 소식을 듣는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잠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간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잠이 든 자신을 원망한다.

'타오르는 사랑을 참지 못해 불 속에 뛰어든 자귀.'

자귀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던 선덕여왕.
미천한 자귀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놓고 간 여왕.
자귀가 꿈속에서라도 단 한번 보고 싶었던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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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사를 보면 짐작가는 선덕여왕의 매력과 미모.
신라의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흠모하고 사랑했었다.
정작 그녀는 여왕이기에 누구에게도 정줄 수 없었다.

만백성의 연인으로 남는 것이 여왕의 길.
그녀는 당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평.

'선덕여왕은 어떻게 당태종을 사로잡았을까?'

독신생활로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지 않았던 여왕.
국가 안정에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화려한 독신생활.
그것이 신라 통치자로 존재하게 했던 그녀의 카리스마.

강력한 카리스마로 남자 신하들을 사로잡은 여왕.
평생 고독을 감수하며 국가 안정을 도모한 정치가.
신라의 제 27대 (632~647 재위) 선덕여왕(善德女王)

삼국시대의 애환과 비화를 간직한 고소산성.
수많은 역사를 침묵으로 대변하는 고소산성.
신라에게 삼국통일 기회를 안겨준 고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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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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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전선 동맹.
7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은 치열한 전쟁을 전개.
그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협공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나라도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신라와 연합.
신라는 고구려 백제가 침입때마다 당에 사절 파견

당나라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입장

고구려·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648년(진덕여왕 2) 나당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다.

그 내용은 삼국통일 후 패강(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를 당나라와 신라가 나누어 통치한다는 협약
이 협약에 의해 나당연합군이 구체적으로 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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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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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군은 산발적인 침공으로 고구려 국력은 피폐
660년 백제멸망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세 강화.
661년 당나라 소정방은 35만 대병으로 고구려 침입

연개소문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당군 패퇴.

그런데, 백제 멸망으로 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
고구려를 공격하며 당나라 군대에 군수물자 공급
이에 당나라 군대는 겨울철에도 군사 작전을 감행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 간의 내분
이때 당나라 고종 황제는 고구려 침략 감행.

666년 12월 당나라 이세적 장군이 총사령관
한편,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고구려는 내부 분란과 외부 침략 때문에 멸망.

고구려는 결국 668년 9월 평양성 함락으로
28대 705년에 걸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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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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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667 중국 당나라 무장으로 당 태종 때 동돌궐 정벌
657년 서돌궐을 쳐 중앙아시아 제국을 안서도호부에 예속.
660년(백제 의자왕 20) 3월 13만 대군 나당 연합군 대총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한 덕적도...........
삼국통일 전쟁 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도착하자
660년 신라 세자 법민이 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덕적도 방문.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전진기지였던 유서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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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반도에서 황해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
의자왕, 태자 융 ,신하, 백성 1만 2천명을 당으로 압송
그 이듬해 661년(고구려 보장왕 20) 고구려 평양성 공격

661년 정월 당이 35군대(軍隊)를 수륙으로 나누어 침공.
662년 정월 연개소문과 사수에서 싸웠으나 전군이 몰살.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소정방은 평양 포위를 풀고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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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소정방 피살사건 미스테리.

1천3백년전, 다리 밑에 매장된 소정방의 피살 사체.
소정방의 시체가 묻혔다는 당교는 상주와 문경 경계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을 살해하고 묻었다고 전해온다.

'소정방 피살사건의 단서를 제공해주는 사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당나라가 천하통일을 꿈꾼 곳.
소정방은 백제까지 정복해 최고의 전공을 기록한다.
이 업적으로 소정방은 왕 다음 높은 작위를 받는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소정방
그의 죽음은 어디에도 기억되고 있지 않다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공격
소정방의 당군은 서해안에서 백마강으로 진입
신라도 황산벌 거쳐 진격 후 사비성에서 합류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

백제점령 후 소정방은 신라까지 치려 했던 것.
삼국통일을 꿈꾼 신라에게는 절대절명의 위기.
소정방이 피살됐다는 당교에는 당군 주둔 흔적

전쟁터도 아닌 당교에 왜 당군이 주둔한걸까?

김유신은 소정방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다리 밑에 묻은 탓.

신라와 손잡고 이땅에 왔던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
기벌포를 통해 백제군을 공격하고 백제왕국을 점령.
하지만 이 기벌포에서 당나라 군대는 신라에게 패배.

당나라 군대가 점령한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세력.
신라와 뭉쳐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다.
당나라가 한반도를 점령 통치하려 한 때문이었다.

........신라 고전(新羅古傳).......
"소정방이 고구려·백제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김유신은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시신들을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당교(唐橋)가 그들을 묻은 곳이다.

"<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만약,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신라가 소정방 군사를 죽였다면
후일 어찌 당나라에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고구려를 멸한 후에
당나라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 이적 두 공을 죽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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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

 

 

 

 

최참판 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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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물레방아갓 앞의 유채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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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촬영장에서 바라본..옛 최참판댁 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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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네 집인지., 용이네 집인지.,  소설 속 그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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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의 배경무대 하동 최참판댁.
이조 말 사회 혼란상과 격변기를 대변하는 곳.
지금부터 약 150년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신라시대 고소산성 축성 시기는 약 1550년 전.
그 신라시대로부터 약 1400년 후까지 시간여행.
고소산성과는 시대적인 배경이 또 다른 최참판댁.

1550년 전까지 넘나들며 타임머쉰을 타고 바라본 지리산.
지리산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의 옛모습이 담긴 최참판댁.
최참판댁을 통해 지리산 자락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해 보자.

하동 군청과 한국 철도공사 자회사인 KTX 관광레저의 상품.
매주 금요일 정기운행하는 서울-하동 간 직행 관광 전용열차.
마치, KTX는 세월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달리는 타임머쉰 같다.

쌍계사, 화개장터, 섬진강을 비롯한 천년 야생차 시배지 관광.
하동 명물 재첩국, 최참판댁의 판소리 관람, 쌍계사 자연 녹차
매주 금/토 무박, 어른 6만 9000원. KTX관광레저 (02) 393-3100.

관광전용열차 : 서울 →하동역→불소유황천 온천욕→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관광→화개장터→쌍계사 차문화센터→구례역 출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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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은 KTX 관광 상품으로 부상될 만큼 인기 높다.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의 배경무대이자 하동의 관광 명소.
'토지'의 줄거리는 최참판댁 가문에 얽힌 비화로 시작된다.

....................'토지' 소설 줄거리........................
절에 불공 드리러갔다가 겁탈 당한는 최참판댁 윤씨 부인.
1862년 갑오 농민전쟁을 일으킨 주역 김개남은 쫓기던 신세.
'동학 접주' 김개남는 참수되고 윤씨 부인은 그 아들을 잉태.

'대지주이면서도 동학난에서 화를 모면한 최참판댁.'
어쩔수 없이 내연관계였던 김개남의 보이지않는 후광.
그 생모 젖 한번 못 빨고 핏덩이로 버려져 성장한 김환.

동학에 참여했다가 몸을 숨기려 최참판댁 하인이 된다.
서로 모자지간인지 모른 채 한집에서 지내는 기구한 운명.

김한은 윤씨부인 아들 최치수의 아내 목숨을 우연히 구한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김한은 그 별당아씨와 사랑을 하게된다.
결국, 두 사람은 신분차이를 넘어 지리산으로 사랑의 도피행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게 해 준 윤씨부인.'

핏덩이로 버렸던 자식을 또 다시 보내는 기구한 운명.
그렇게 보내며 끝내 아들에게 아들이라 못부르는 어머니.
훗날, 윤씨부인 사후에야 김한은 생모 무덤을 찾아가 통곡.

'한편, 최치수는 아내가 집안 하인과 야반도주하자 울분.'

더구나, 김한의 출생 비밀을 알자 어머니 윤씨부인을 원망.
최참판댁 하녀인 귀녀는 최참판댁 재산을 노려 최치수를 유혹
최치수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성불구가 된 비밀을 알게된다.

'강포수 씨를 받고 김평산을 꼬득여 최치수를 교살한 귀녀.'

귀녀는 최치수 아이를 잉태한 척하며 유산을 가로채려 한다.
그러나 그 음모가 윤씨부인에게 들통 나 귀녀는 사형 당한다.
그후 윤씨부인 역시 마을을 휩쓴 콜레라(호열자)로 병사한다.

최참판댁 재산을 강탈하려던 조준구는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일본인 힘을 빌려 재산을 강탈
여기에 더해 서희와 곱추인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

서희는 충직한 하인 길상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윤씨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로 성공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하고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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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1900년대와 1910년 우리 사회 격변기 시대가 소설의 무대.
3, 4부는 1920~1930년대, 특히 3 1운동 실패 후 일제 치하.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독립 운동의 여러 노선을 제시
지식인의 사상적 경향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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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 나르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영호남을 잇는 뱃길의 중심지 '하동포구 팔십리.'
옛 길손들이 지나칠 때마다 탄성을 자아냈다는 곳.

하동포구 팔십리 길을 달리다가 악양면에 이르면
평사리 공원을 지나 소설 土地(박경리 作)의 무대
최참판댁을 들러 소설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즐거움.

'최참판댁 서희 아씨 또는 그녀와 결혼한 머슴 길상.'

평사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 악양과 닮아 붙여진 지명.
평사리 강변 모래톱은 '금당'이고 그 안 호수는 '동정호'

최참판댁을 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옛돌담을 덮은 담쟁이
그 뜰안에서 풍요로운 옛고을을 내려다보는 평사리의 풍경
SBS 대하 드라마 토지의 촬영 현장이고 세트장이기도 한 곳.

2004년~2005년에 방송한 드라마 <토지>가 촬영세트장.
촬영을 위해 최참판댁 아래로 장터가 새로이 재현된 곳.
장터의 집들은 모두 20세기 초, 평사리 모습으로 꾸몄다.
주변 가옥들도 초가를 얹어 그 시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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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의 대문에서 내려다보는 악양 들판의 풍경.
낮은 언덕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향같은 평사리 마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 2,880평의 부지
건평 110평 18억원을 들여 새로 단장한 최참판 댁
안채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 초당과 사당까지 갖췄다.

이조시대 한옥은 국법에 따라 99칸을 넘지 못했다.
오늘날도 연면적 100평이 넘으면 호화주택으로 간주.
1칸은 사방 6척으로 사방 6자인 1 평보다는 조금 작다.

최참판댁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한 가옥구조가 이색적.
나즈막한 굴뚝은 밥짓는 연기를 가리려는 목적의 구조.
가난한 이웃이 그 연기를 보고 배고플까봐 배려한 의도.

'구멍 뚫린 뒤주로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나눠준 전통.'

굶주림을 모면할 만큼 뒤주 구멍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쌀.
오늘날 부자가 갖춰야할 덕목을 말없이 가르쳐 주는 가옥구조.
평사리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박경리 作)의 배경무대이다.

박경리는 경남 통영에서 1926년 10월 28일 출생
1945년 진주여고 졸업후 결혼했으나 남편은 납북
한국전쟁 이후 홀로된 그녀는 창작활동에만 전념.

토지는 집필기간 25년, 2백자 원고지 3만 2천장, 총 5부 16권
토지를 통해 평사리와 간도, 서울과 일본을 잇는 광활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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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소설속 주인공인 서희와 길상이 살던 평사리.'

지리산 남면 악양골 기슭의 평범한 산골마을이었던 곳.
지리산 자락에서는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보다 넓은 들판.
30 만평이나 되는 악양 평사리 들판이 소설 토지의 배경무대.

'지리산과 섬진강 혜택을 동시에 받은 평사리.'

그곳 마을의 모든 길은 최참판댁으로 이어진다.
현재 이 마을의 초가 50 채는 토지 촬영 세트장.
사람이 살고 있는 10 여 채는 원래 평사리 마을.

'마을 칠순 노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벌려놓은 좌판.'

곶감, 도라지, 토란대, 더덕, 늙은 호박 등이 옹색해 보인다
노인들의 거친듯한 경상도 사투리가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다.
돌담으로 이어진 고샅길 끝, 가장 높은 터에 최참판 댁이 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최참판댁은 평사리에 있던 집이 아니다.
소설 속의 공간을 현실에 되살려 새로 공들여 건축한 한옥.
관리인이 매일 쓸고 닦아 마치 안주인이 살고 있는 듯 하다.

'길상이 살던 행랑채, 최참판댁 마지막 당주 최치수 사랑채.'

최치수의 이복 동생인 김환과 야반도주한 별당아씨가 머물던 별당
아씨 서희와 머슴 길상이 어릴 때 함께 놀며 자랐던 최참판댁 정원.
최참판댁 솟을대문을 나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기름진 악양들판의 풍경

'서희가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평사리의 토지.'

박경리 선생이 25년간 집필한 5부 16권의 ‘토지’
4만 장의 원고지에 600 만 자로 이뤄진 대하소설.

봉건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한말에서 일제시대
1945.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60년 소용돌이 속 격변기.
한많은 삶을 살아가야 했던 여인의 애증을 그려낸 작품.

지리산 일대는 발걸음 닫는 곳마다 소설 같은 역사 현장.
평사리에서 가까운 고소산성은 백제와 나당연합군 격전지.
20∼30분 정도만 더 발품을 팔면 성벽까지 올라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