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7 ( 김수로왕과 허황후 로맨스. 망산도. 야후타국. )

donkyhote 2011. 2. 28. 02:31

김수로왕과 허황후 로맨스.



허황후는 인도 공주로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훗날, 칠불사에서 성불한 7 왕자의 어머니이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첫 만남에 관한 전설이 참 흥미롭다.

가락 기원 7년(서기48년) 7월 27일. 9간 대표들이 왕께 조알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으소서"

"짐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령 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짓는 것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마오." 그런 어느날 왕이 유천간에게 命.

작은 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에가서 망을 보게하시고
신귀간에게는 승점으로 나아가 기다리도록 이르셨을 때
마침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배 한척이 달려오고 있었다.

망산도의 유천간이 횃불로 신호를 올리자
그 배는 미끄러지듯 부인당으로 들어왔다.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
그 항구로 들어와서 배가 정박하였다고 한다.

그 배에는 공주 (公主) 한 분과 시종 20 인이 타고 있었다.
신귀간이 이 광경을 보고 대궐로 달려가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은 흡족히 여기고 그 일행을 대궐로 모셔오도록 했다.

9간 대표들이 대궐로 모시려 할때 공주께서 말씀하시길
"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리오"

천간이 돌아와서 공주의 말씀을 아뢰니
대왕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 6십리쯤 산기슭에 나아가
임금의 임시거처인 장막을 치고 몸소 영접했다.

공주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를 시종해 온 신하와 노비는 20 여 명
비단과 의상 금은주옥 패물 등등이 많았다.
공주는 대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대왕은 정중히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드시었다.
공주를 시종해온 사람들은 대왕을 뵙고 곧 물러갔다.
대왕은 공주의 시종들에게 방 하나 씩 주도록 명령했다.

그 이하 노비들에게는 한 방에 5, 6명씩 들게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나눠주고
무늬와 채색이 감도는 잠자리에서 잘 수 있게 했다.

그뿐 아니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 군졸들로 하여금 보호.
그리고 나서 함께 침전에 드시니 공주께서 말문을 여셨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皇玉), 나이는 16세."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말씀하시길"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리신 왕.
성스러운 사람이니 공주와 짝을 짓도록 하라"

"그런 말씀을 남기고 다시 하늘로 오르셨다 합니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하니 그곳으로 떠나라는 말씀.
하여, 배 타고 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갖고
이곳에 찾아 오느라 이제야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공주는 왕에게 '3천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를 선물로 내놓았다.
대왕 또한 공주의 말을 듣고 나서 조용히 응답하여 말씀 하시기를

"나는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지금까지 왕비를 맞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현숙산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행복하오"

두 사람은 장막에서 두 밤 하루 낮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는 왕후가 타고온 배의 15 사공에게 각각 선물.
쌀 10석과 비단 30필을 주어 그 노고를 치하한 연후에
아와타국으로 돌려 보내셨으니 8 월 1일 아침의 일이었다.

대왕과 왕후는 그제서야 신하를 좌우에 거느리시고
수레를 타고 본궁으로 돌아와서 두분이 힘을 합하여
금관가야의 정사를 펴게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셨다.

가락 기원 148년(서기189년) 3월1일
왕후께서 붕어하시니 향년 157세였다.

온나라 백성들은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했으며
금관성 서북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내고
능의 이름을 후능 (后陵)이라 칭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상륙한 나루.. '주포촌'
바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받친 언덕.. 능현,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 '기출변'(旗出邊)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 (泉府卿) 신보(申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30 년을 살다가 죽고
나머지 노비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다 모두 죽으니
그들이 살던 빈관(賓館)은 텅 빈채 아무도 없었다.

대왕은 왕후가 죽자 외로움을 달래며 슬퍼하다가
그로부터 10년 후 가락기원 158년에 붕어하셨다.

서기199 년 3월 23일로 재왕위 121년
재태왕위 (在太王位)38년 수(壽) 158년.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여윈 듯이,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 동북방 평지에 빈궁을 축조.. 수로왕묘.

아드님 거등왕에서부터 9대 손양왕에 이르기까지
이묘(廟)에 제향을 올렸는데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제물로 제사를 올렸다.
김수로왕과 허왕후(許王后)는 10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제 2 대 임금이신 거등왕,
차남은 거칠군으로서 3남과 같이 허씨.
어머니 성씨를 받았고, 7 왕자는 칠불사.
장녀 영안공주는 태사 배열문에게 출가했고
둘째 공주는 신라의 석 태자비가 되었다 한다.


- 김해 김씨 족보에서 발췌 -




망산도.



경남 진해시 용원동 망산도(望山島).
처용암 크기가 비슷한 약 1백평 돌섬.
뇌처럼 쭈글쭈글한 형태 기묘한 바위들

그 틈새로 삐쭉 선 머리칼같은 잡목 숲.
수천년 신비를 품은 허왕후 전설의 고향.

구간 대신들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수로왕.
구간들의 사위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인도 공주를 왕비로 맞은 이유가 무엇일까?

수로왕은 허왕후가 데려온 신하들을
궁전에 머물게하며 국정에 참여시켰고,
그 신하의 딸과 손녀를 왕자비로 맞았다.

'삼국유사' 기록에 전해져오는 내용.'

수로왕은 허황옥과 도래인(渡來人)의 힘을 이용
‘구간’(九干) 토착 세력을 견제하려 했던 것 같다.
수로왕은 토착세력보다 강한 자파 세력을 키우려한듯.

하여, 수로왕은 먼 곳에서 온 이국인 세력.

간척지 공사가 한창인 망산도 앞바다.
말무섬까지를 방파제로 이어놓은 상태,
방파제 서쪽 바다를 거의 다 매립했다.

매립지에는 부산 신항과 공업단지가 들어설 예정.
'21세기 해양강국,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플랭카드
개발신화 파도에 휩쓸린 망산도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간척공사로 바닷물이 빠져나가
방파제 옆 개펄 위에 덩그러니,
애물단지처럼 버려진 몰골이 처연.

물에서 놀던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온 꼴이다.
3년 전쯤 주민들이 추렴해 세웠다는 표지판 만
이 자그마한 돌섬에 얽힌 전설을 알려주고 있다.

망산도 안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곳 용원동에서 7대를 살아왔다는 지봉기(50)씨
망산도가 ‘우범지대’가 돼버렸다며 한숨을 쉰다.

고운 흙으로 깔려 있는 여느 집 안방 크기만한 평지
잡목과 큰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는‘불장난’의 명소
그 탓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있다.

수박 조각, 스티로폴 조각, 도시락 껍데기, 라면봉지,
과자봉지, 치약 칫솔, 깨진 술병 조각까지 널려져있다.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
기이한 조각과 붉은 무늬가 새겨진 돌은 인도산
바람과 파도를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담긴 진풍탑.


1990년대 초까지 망산도는 잘 보존되어 왔다.
특별히 누가 일부러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바닷물이 들어와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망산도.

방파제 공사로 바닷물이 빠져 개방된 망산도
예전에 노루들이 바다를 헤엄쳐 노닐던 망산도
또 배를 새로 만들면 고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

그곳에서 보이는 보배산(행정지명 : 명월산)
주민들은 여전히 보배산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그 산 왼쪽 고개가 전설 속에 나오는 능현.
허태후가 비단바지를 풀어 제를 올렸던 고개.
능현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비단고개'라는 뜻.

보배산 아래 마을이 허태후가 배를 맸다는 주포(主浦)
삼국유사 기록에는 마을 턱까지 바다물이 들어온 별포
상당히 큰 나루였고 보배산 능현고개 넘어, <웅천마을>

이조시대 웅천에서 김해로 가는 가장 큰 도로
주포는 김해 남쪽 40리에 보배산 자락의 포구.




야후타국.



태국 방콕에서 70킬로 미터 정도 떨어진 곳
아후타 왕조의 옛 도읍지가 폐허로 남아있다.

현재 태국 왕가는 18세기에 성립된 비교적 젊은 왕조
지금의 왕조와는 별 관련이 없는 샴(Siam)왕국의 수도
버마의 침략을 받아 도시 전체가 몽땅 불에 타버린 흔적.

우리나라 사찰이나 궁궐은 목조에 색을 입히는 단청을 사용
크메르, 버마, 타이와 같은 동남아에서는 금박 금장을 사용
이 때문에 건물에 불을 질러 녹아 내린 황금을 약탈한 흔적.

지금은 지구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로 꼽히지만
당시 동남아 강국 버마 왕조가 야후타국을 침공했던 흔적.
갖고 갈 수 있는 금붙이 이외에는 모두 불질렀던 흔적이다.

불에 탄 그을음처럼 시멘트 불상의 잘린 손과 발,
폐허의 궁궐 기단에는 검녹색의 이끼가 끼어 있다.

두보가 태어났을 때, 중국은 당 왕조의 개국으로 태평성대
오래지 않아 터진 안사의 난으로 온통 뒤숭숭하던 무렵이다.
이 무렵 야후타국은 버마 침공으로 폐허로 변한듯 추정된다.


.........
쌍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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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속 '허왕옥 출생의 비밀'.
특이하고 신비한 일로서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특히 가야 김수로왕 국제결혼은 당시 엄청난 사건

차의 원산지 사천에서 대대로 존경받던 가문의 여인.
세습 무사(바라문 집단) 금은보화를 비롯한 혼례예물
당시 사천지역 귀족의 차마시는 문화는 생활의 일부분.

'가락' 또는 '가야'라는 말은 물고기라는 뜻.

드라비다 계통의 말을 국가의 명칭으로 쓰고,
쌍어문 흔적을 남긴 김수로왕은 어디서 왔을까?

당시 가야 족장들이 배필을 구해주려고 해도
짝을 짓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한사코 거절
<유천간>과 <신귀간>에게 배필을 맞으라 명령.

그들은 허황옥과 같은 보주 출신 아닐까?

유천간 신귀간 허왕옥은 사천 보주 세력인듯.
가야 족장들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인듯 싶다.

촉에서 반란을 일으킨 광무(光武) 23년
즉, 47년 강하로 이주한 허황옥의 가문.
다음 해 가락국에 도착해 김수로왕과 결혼.

허황옥이 보주에서 출생후,
광무년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
강하(武昌)로 내려와 정착한듯.

김해는 당시 한반도 중국 일본의 국제도시
김해 가락국 김수로왕과 정략적인 혼인인듯.
김수로왕은 한중일 해상 세력과 밀접한 연관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무역집단 대표.'

인도인 허황옥은 정확하게 아유타국 공주.
가야는 원래 김해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옛 불쥬신 왕손 이비는 고령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이비는 정견모주 여인을 만나게 된다.
정견모주는 산신을 모시는 그 지역 무당이다.
이비는 정견모주와 결혼해 두 아들을 얻는다.

큰 아들은 '붉은 해',
둘째 아들은 '푸른 자손.'

바로 '푸른 자손'이 가야국 김수로왕.
부친이 죽자 '붉은 해'가 미오야미 국왕.
즉, 대가야 시조 이진아고왕이 두 왕의 부친.

그후, 미오야마 아라 고링 별뫼 구지 등을 정복.
공이 큰 푸른 자손이 구야(김해)를 얻어 통치한다.
원래, 대가야는 지금 인도 지역의 바로 위에 위치.

아유타 코살라 제국은 갠지스강 유역 경계로.
히말라야 산맥 근처 대가야와 맞대고 있었다.
대가야 바로 밑은 부다 가야 그 밑으로 인도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 가이아.'

가야는 여름철 장마로 갠지스강이 범람해
바다를 이루고 11~ 4월까지 6개월간 가뭄.
이때, 물고기들이 얕은 웅덩이로 모여든다.

이러한 웅덩이를 인도말로 '가라' 라고 한다.
즉, 가라란 언제나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란 뜻
쌀과 물고기로 살아가는 가야인에겐 생명의 상징.

'가라'에서 나온 문양이 바로 '쌍어문'.
쌍어문은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는 문양.
가락국 김수로왕의 상징 문양이 곧 쌍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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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 대문에 새겨진 神魚像(신어상).
두 물고기가 가운데 물체를 보호하는 형상.
뿐만 아니라 두 부부 왕릉 배후에는 신어산

신어산에 있는 銀河寺(은하사)라는 절에
수미단에 신어상(神魚像)이 두 개나 조각.
가야 영역권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아유타국을 방문했던 재야 사학자 故 李鍾琦(이종기)씨
雙魚紋(쌍어문 =신어상)이 많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귀국,
가야문화가 퍼진 경남 일대 사찰의 쌍어문 비밀을 풀어냈다.

1985년 뉴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동쪽으로 한 시간
럭나우라는 도시에 내려 차로 150km 동쪽에 아요디아
산스크리트語로 「정복되지 않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5 천축국 중 中天竺國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중흥 시조인 라마의 탄생지이다.
그런 만큼 아요디아에는 많은 전설과 역사가 색색가지
인도란 페르시아 동쪽 '힌두쿠시 산맥 너머 땅'이란 뜻

고대 중국인들은 불교의 나라라 하여 天竺國(천축국)
그전에는 인도인들의 피부가 검다고 하여.. 신독(身毒)

인도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등 여러 나라로 분리
힌두어 타밀어 우루두어 벵골어 등 수십 언어를 쓴다.
서로 다른 계급과 섞여 살지도 않고, 혼인도 않는 나라

인도인들은 그들의 영혼을 갠지스 강에 담는다.
갠지스 강가 바라나시에서 힌두교도의 화장의식
힌두교도의 몸과 마음을 씻어주고 있는 갠지스강

강가 이발사가 삭도로 순례자의 체모를 깎는 모습
그들이 행복해 하는 얼굴에 담긴 인도인들의 평화

BC 7세기 간다라, 펀잡, 마치, 코살, 마가다, 앙가
북인도 고대 왕국이 일어난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석가모니는 오늘날 네팔 카피라 성에서 태어난 BC 6세기
코살국 맹주의 아들이고 아요디아는 코살국의 중심이었다.

코살국의 조상 신화엔 태고에 대홍수가 있었다.
그때 세상만물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때 「마누」는 커다란 물고기 도움으로 살아났다.

마누의 먼 후손 '익스바쿠'가 코살국을 창건,
그의 아들이 힌두교 중흥 시조 「라마」이다.
하여, 쌍어문은 코살국 토템이자 힌두교 神像

아요디아 시내에는 수백 힌두교 사원이 서 있고,
사원의 대문마다 문설주 위에 새겨진 神魚 그림
박물관 입구, 경찰 계급장에도 神魚가 들어 있다.

神魚는 아요디아 전체에서 흘러 넘치고 있고,
그 州(주)를 대표하는 州章으로 발전해 있었다.
여기는 글자 그대로.. '神魚國(신어국)의 나라'.

거대한 석제 水槽(수조) 외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神魚像
동독의 박물관에 있는 수조는 바빌로니아에서 가져온 것
바빌로니아 센나게립王 궁전 중앙에 있던 신앙용 聖水통

페르시아의 가라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
페르시아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가라(加羅)
만병치료 영약 「고케레나」라는 나무 열매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惡神(악신)이
나무 뿌리를 파버리려 두꺼비를 파견
그러나, 두 물고기 '가라'가 있어 실패.

가라가 지성으로 보호하여 고케레나 나무가 자랐고
그 열매와 잎새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번창.
페르시아 신화 「가라」는 가락국 별칭인 加羅(kara)

그렇다면 가락국은 페르시아 신화 속., 신어국

아유타국 王孫 미쉬라 가문은 토착세력 土豪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재산권을 허용하고 있어서
학교·병원·莊園(장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그래서, 金鍾泌씨 초청으로 미쉬라氏 부처가 김해를 방문
이어, 김해 金氏 종친회와 김해 실업인들이 아요디아 방문
그 결과 아요디아 현지에 허황옥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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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인 허씨(許黃玉)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
일연의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수로왕비 전래설

........"그해 7월27일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 오는 배가 육지에 도착하자 젊은 처녀".......

32년 출생한 허황옥, BC 165년 아요디아를 떠난 그녀 선조들.
그들이 사라유 따라 하류로 흘러 갔다면 갠지스강을 만났을듯.

갠지스강은 동류하여 벵골만으로 들어가는데,
오늘날 방글라 데시로 독립한 동 벵골에 이르면
아삼지방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자무나강과 합류.

이 강 상류는 중국 서남부 운남성에서 내려오는 물.
그러니까 그녀 선조들이 강줄기를 타고 중국으로 이동
허황옥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로 들어온 듯 싶다.

옛부터 차 재배지였던 신흥마을 범왕마을 일대
허황옥을 따라 들어온 인도인들의 정착자였던듯
전설 내용보다 상당히 많은 인도인들이 들어왔을듯

'쌍어문이 새겨진 옛 고찰들은 그 흔적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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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
.......


인도 남동부 아요디아시(市)에 있는 허왕후 비.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가 해마다 참배
고고학자 김병모 교수가 허황후의 고향에 세운 비.

인도 옛 지도를 보면 아유타국은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국
아요디아국은 1세기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지배를 받으며
지배층은 쫓겨나 사천 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듯 추정.

허황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

허황후가 보주(普州)와 연관 있다고 보고 추적
보주가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임을 알아낸 것.
48년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이주 당한 허씨

얼굴이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인 허황옥
장강(長江)을 타고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에 이른 보우트 피플



......
인도
.......


'가락국의 김수로왕 왕비' 허왕후는 인도 공주.
한반도에 인더스 문명을 최초로 전파한 인물이다.
인도는 세계 모든 종교의 발상지인 동시에 근거지.

힌두교·자이나교·불교·시크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그리스도교·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애니미즘
아직도 산탈족·빌족·곤드족에 의해 신봉

그러나, 인도의 전통 종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힌두교
BC 2000~1500년경 아리아족이 성립시킨 베다 시대 이전
인도 국민의 83%가 믿는 힌두교는 강력한 국민 통합요소

하지만, 카스트 제도와 함께 분열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BC 6~5세기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
자이나교는 구자라트와 라자스탄 지역에 넓게 퍼져 있다.
이 종교의 비폭력주의와 금욕주의는 힌두사상에 큰 영향

마하트마 간디도 이 두 원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불교는 이 종교를 신봉했던 마우리아 왕조 때 발생.
아소카 왕 시기에 인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
그러나 아소카 왕 사후 불교의 영향은 점점 쇠퇴한다.

하지만, 불교는 티베트·중국·한국·일본·몽골
여러 지역에 전파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이와는 달리 자이나교는 인도에만 국한되어 있다.

현재 인도에는 불교도 숫자는 약 400만 명,
자이나교도가 약 300만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슬람교는 처음에 상인들이 들여왔으나
16세기 무굴 제국 당시 인도에 퍼져갔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던 지역이
독립 당시 파키스탄으로 분리됨으로써
현재 이슬람교도는 인도 국민의 약 10%

그리스도교의 일종인 조로아스터교
7, 8세기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서
인도로 들어온 페르시아인에 의해 도입.

오늘날 그 후손들은 주로 봄베이에 모여 산다.
그리스도교는 BC 52년 인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몇 개의 교회를 건설하면서 처음으로 전파되었고

19세기 유럽인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되어 시작
오늘날 그리스도교도 숫자는 인도 국민의 약 3%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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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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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자브 사히왈 행정구의 하라파에서 1921년 최초 확인
1922년 신드의 라르카나 행정구 모헨조다로에서 재확인
하라파와 모헨조다로(현재 둘 다 파키스탄에 있음) 발견

인더스 문명 흔적은 아라비아 해 근처의 수트카겐도르
그 동북쪽 1,600km 떨어진 구릉지대 로파르에서도 발견
서해안 남쪽따라 카라치 남동 800km 떨어진 캄베이 만까지,

동쪽으로는 델리북쪽으로 48km 떨어진 야무나 분지까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있던 문명.
모헨조다로는 일년에 한번 이상 큰 홍수로 유적이 파괴

인더스 문명은 해마다 반복되는 대홍수를 조절
넓고 풍요로운 인더스 유역에서 관개농경을 실시.
밀, 6줄 낱알 보리, 콩, 겨자, 참깨, 야자씨 목화

개·고양이·소·가금류·돼지·낙타·들소 가축들.

코끼리 역시 가축화되어 상아가 널리 사용되었다.
충적층에서 구할 수 없는 광물은 매우 멀리서 수입.

금은 인도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은과 구리는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서부
터키석은 이란(페르시아), 옥은 인도 남부.

인더스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도장

작은 끌과 송곳을 사용해 매우 아름다운 조각
코끼리·호랑이·코뿔소·영양과 같은 실제 동물
공상적인 동물들, 때로는 사람의 모습도 조각했다.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도장을 보면
후대 힌두교 신 '시바'도 조각한 듯

인더스 문명의 석조물은 12개 정도가 발견되었다.
실물 같은 들소의 청동상과 춤추는 소녀상이 유명.
이밖에 보석을 지니고 머리를 치장한 알몸 여인상.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인더스문명 구슬을 보면
메소포타미아·크레타·이집트 문명과 연관된듯.
인더스 문명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는 불확실.

모헨조다로의 문명은 극적이고 급작스럽게 종말.
이 도시는 BC 2000년기 중엽에 침략을 받았는데,
침략자들은 시체들을 방치한 채 도시를 휩쓸었다.

<리그베다〉기록에 의하면 침략자는 아리아족

이들은 원주민 성벽도시 또는 요새를 공격했고
세월이 옷을 낡게 하듯 성채들 부수었다고 묘사
모헨조다로는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쇠퇴

대홍수로 도시가 물 속에 가라앉기도 했고
가옥은 더욱 엉성하게 지어졌고 인구는 과밀.
인도 서북부 도시문명은 수세기 간 죽은 상태.

그러나, 카티아와르와 그 너머 남부지방은 달랐던 듯.
인더스 문명의 말기 단계와 순동문화의 문화적 연속성
BC 1000년 경 철기문명 사이에서 물질적 가교를 놓은듯.



덧 말.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인더스 문명권.
기아에 허덕이다가 굶어죽은 어린이가 많은 지역.
세계 최고의 문화 유적들이 밀림속에 방치된 지역.

열대 기후가 인더스 문명 영광을 쇠퇴하게 한듯.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란 말이 실감난다.
지구 상에서 열대 지방에 있는 선진국은 극소수에 불과.
유럽도 열대기후로 바뀌면, 선진문명이 쇠퇴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