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5 (칠불사. 거문고 .불교음악. 칠불암과 허황후. )

donkyhote 2011. 2. 28. 02:19

칠불사.



섬진강변에서.,칠불사로 가는 길.

 

 쌍계사 입구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20여분 올라가면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m 고지에 칠불사가 있다. 

 

안개비가 옷을 적시는., 칠불사로 오르는 길,

 

 

 

 

 

 

 

아자방 ('칠불사 아자방址' 경남 유형 제144호)

한번 불을때서 장기간 난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구들 모양이 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한단다

 

 

 화개골 자생 녹차밭., 왠지 편안해 지는 느낌.

 


김해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 가야, 일명 가락국(駕洛國)
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金首露王)
그 일곱왕자가 와서 수도 후 모두 성불하였다는 칠불사.

『삼국유사, 가락국기』『동국여지승람 하동지』등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태어 났으며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기원전 5세기 태양왕조 아유다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했다.

10남 2녀 중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 왕자와 삼남 명(明) 왕자는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왕자는 출가한다.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를 거쳐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을 짓고 정진, 수로왕 62년(서기103년)에 모두 생불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 큰 절을 짓고 칠불사(七佛寺)라 불렀는데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372년) 보다 약 270년 앞선 기록.

고구려,신라,백제 자존심에 기인한 불교 북방전래설
당시 항해술로 보면 인도로부터 불교가 최초로 유입

『372년 불교 북방전래설』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불교를 최초 유입.

당시 신흥국 가야의 권력구조 개편에 불교는 큰 영향.
가야는 북방 기마민족이면서 탁월한 제철 기술을 보유
해상세력이던 토착민들은 가야에 밀려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 신천지를 개척하려 떠난 가야 해상세력들.'

그 공백을 메우려 가야가 끌어들인 허황옥 해상세력
그 세력과의 지분 정리로 김수로왕 측이 찾이한 왕위.
허황옥 측은 왕자 두사람의 성을 바꿔 내치를 담당한듯.

일곱 왕자가 모두 불문에 귀의한 사실은
허황옥 측과 동맹을 굳게 하려는 결단인듯.

당시 쇠를 다루는 제철기술 집단이었던 김씨.
삼국유사에 보면 가야에서 도망쳐 온., 김알지.
김수로 왕이 정병을 내보내 뒤쫒기까지 한다.

..........김알지[金閼智]............
65(탈해왕 9)~? 경주 김씨의 시조.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울음소리가 나서 보니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
궤에서 빛이 쏟아져나오며, 그 밑에 울고있는 흰닭

왕이 궤를 열자 수려한 사내아이가 있어 거두어 키웠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금궤에서 태어나 성을 김(金)이라 했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알지'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의 〈알지신화〉도 유사한 기록
〈삼국사기〉와 비슷하지만, '알지'는 '아기'를 뜻

이 설화는 박·석 양씨보다 먼저 경주에 정착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후에야 비중이 커지게 된 김씨 부족
그들의 토템인 닭과 조상을 연계하여 만든 설화인듯.

그 7대손 미추이사금 때부터 신라 왕족에 김씨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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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는 권력구도에서 밀린 김수로왕 측근 중 하나인듯.
허황옥 세력과 맞서다가 권력다툼에 실패후 신라로 도망친듯.
당시 제철기술 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지도자 위치.

당시 왕으로 군림하면서 경주 김씨 시조가 된 김알지.
장유화상은 일곱왕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 책임자.
가야는 제철 집단이 나라를 다스렸던 한반도 최초 문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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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독도 영토권을 놓고 일본과 맞서왔다.
우리나라 남쪽을 다스렸다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그러나, 그 설은 일본의 뿌리가 가야국이었음을 대변.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 편에 나오는 기록.

"徒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
拘邪韓國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海國"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데는 해안에서 순(循)하여 수행(水行)하고,
한국을 력(歷)해서 혹은(乍) 남(南)하고, 혹은 동(東)하여 그 북쪽 해안
구야한국에 도착하는 칠천여 리. 이렇게 해서 천여리 바다 넘어 대해국"

여기서 '사남사동(乍南乍東)'이란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이내 동쪽으로 방향을 꺾는 행로"

대방군에서 왜로 가려면 바닷가를 따라 한반도를 거치고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가라나라'에 다다르게 되며, 여기까지가 7천여 리 거리이다.

왜국에서 대해를 건너 북쪽 해안에 있다는 가락국,
왜국과 경계를 맞대었던, 변진의 한 갈래인 독로국.

................독로국[瀆盧國].................
변한 12소국 중 하나로 부산 동래지역에 있던 소국.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 있는 기록.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변진지역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소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현재 동래 지역은 옛 거칠산국
거칠산국(居柒山國)은 독로국과 동일한 곳으로 보여진다.

일찍이 경주의 사로국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되며,
거칠산군(居漆山郡)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동래군
현재 동래에는 복천동 고분군과 함께 오륜대·연산동·
반여동 등지에는 많은 옛 가야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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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에 실린 가락국의 경계선.........
"동쪽으로는 황산강으로, 서남쪽은 창해로,
서북쪽은 지리산으로,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으로..."
남쪽엔 동그라미 두 개만이 표시돼어 있음을 지적.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倻山 南而○○爲國尾) -삼국유사 기록.
알 수 없는 지명이 남쪽에 있는 사실을 표기한듯.

당시 가야국은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양국가이며,
일본 규슈 북부에도 가야국 영토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무슨 이유에인지 그것을 표시할 수 없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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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쓰시로 신사에 각인된.. 쌍어문
인도의 라마왕 탄생서원 앞에 있는 쌍어문
김수로왕릉 납릉 정문 장식판에 있는 쌍어문.

화황옥 일행이 들어온 경로를 알려주는 쌍어문.
'인도 - 타이완 -중국 -일본 - 우리나라'로 추정.

인도 야유타국에서 온 허황후에 관한 기록.
허황후의 딸 가야공주가 일본에 갔다는 사실
가야공주가 있었을 곳으로 보이는 묘견궁(妙見宮)

여덟 개의 성, 여왕릉으로 추정되는 자우스야마 터,
거북을 탄 여왕의 상, 여왕 유래 돌비석, 갓파도래비
(가야공주 상륙을 기념하는 쿠마가와 강변 '갓파도래비)

야쓰시로 북부 조난초에 있는 동굴의 아난도상 등
(이 동굴은 가야공주 측근의 비밀 제철 제련소인듯)
일본 야쓰시로에 있는 거북을 탄 여왕 히미코(가야공주)

1976년 일본 후타이 서원에서 출간후 강제 회수당한 책
“히미코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卑彌呼渡來の謎)”
이미 작고한 이종기 선생이 펴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저자 : 이영아(원제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서)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낳은 열 아들과 두 명의 딸.
이중 7 아들은 불도를 닦고, 2 아들은 거등왕과 거칠군,
한 딸은 석탈해 맏아들의 비가 되었다는 삼국유사 기록.

'그렇다면, 남은 공주 한 명과 왕자 한 명은 어디로 갔을까?'
그 왕자는 '김 알지'이고, 그 공주는 히미코 여왕이 아닐까?
아직 풀리지 않은, 앞으로 풀어야 할, 베일 속 수수께끼 역사

'그 강대했던 해상대국 가야국은 왜 역사에서 사라졌던 걸까?'

김해 구지봉에 올라가 보면 김해는 한 나라의 서울로는 좁은 땅,
가야가 번성했을 시절 낙동강은 큰 배가 육지 깊숙이 들어왔던 곳.
강 상류의 울창한 숲이 베어 없어지면서 배를 만들 조건이 사라진듯.

'당시 고조선의 멸망과 잇따른 북방의 정치적 격변.'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이동한 유민 집단들이 소국을 형성
경주를 중심으로 급량·모량·사량·본피·한지·습비 등
6족의 후예들이 사로국을 형성, 양산촌·고허촌 진지촌·대수촌·
가리촌·고야촌 6개 마을을 이루었는데 훗날 신라의 모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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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역사를 간직한 칠불사.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풀 마지막 열쇄..칠불사.
'칠불사 가는 길 일주문 앞 주차장은 해발 700m.'

쌍계사에서 북쪽 20리 올라간 반야봉 중턱의 사찰.
토끼봉에서 좀 더 가깝고 반야봉에서 떨어진 위치.
칠불사와 연곡사의 가운데 지점이 불무장등 통꼭봉.

허황후 오빠이자 아유타국 승려 보옥선사(장유화상)
김수로왕의 7 아들과 함께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생활.

그후 수도산과 와룡산을 거쳐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2년간 수도를 하던 수로왕 62년, 신라 파사왕 24년(103년)
7왕자와 외삼촌 보옥선사는 보름달을 보며 즉흥시를 읊었다.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왕자도 있었다.

이 때 철커덩 하는 쇳소리가 크게 울렸다.
보옥선사가 별안간 내려친 지팡이 소리였다.
순간 일곱 왕자는 진리를 깨치고 부처가 된다.

일곱 왕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수로왕은 운상원 터에 절을 짓고,
이곳에로 칠불암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신동 칠불암은 옛 운상원(진금륜) 터.'

보옥선사가 살며 옥피리를 즐겨 불렀다는 곳.
칠불사로 가는 도로 차창가 풍경은 퍽 이국적.
남방불교가 전래된 흔적이 물씬 풍기는 칠불사.

신라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했다는 운상원.
삼국유사 제 4절 헌강왕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기록.................
경주 성 안에는 초가집을 볼 수 없고
기와집이 연이어 섰으며 밤낮 노래소리.

통일신라는 차츰 사치와 유흥에 빠져
온 국민들이 노래와 춤으로 보내었다.

옥보고는 자신의 음악이 잘못 이용되자
경주를 떠나 지리산 운상원으로 들어갔다.
경주 왕실과 귀족들은 보물을 잃어버린 듯.

그래서 옥보고를 다시 불러내려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운상원까지 옥보고를 따라나선 제자 귀금.
귀금이 옥보고의 음악을 전수받았다는 소문.

왕은 윤흥을 남원태수로 임명
귀금에게 거문고를 배우라 한다.

윤흥은 남원에 부임하는 즉시
음악에 소질있는 청장과 안장을 뽑아
귀금에게 거문고를 배워오라고 명령한다.

두 소년은 수년간 운상원에 머물러
거문고를 배운 후 태수에게 보고했다.

"귀금이 심오한 비곡은 가르쳐 주지 않더이다."

윤흥 태수는 산해진미로 푸짐한 이바지 음식을 마련하고
귀금을 찾아가 자기 부인이 직접 술을 따라 권하게 하고
자기 자신은 귀금에게 큰 절을 올리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군왕이 나에게 남원태수를 명하심은
오직 선생의 비곡을 배워오라 함이거늘
3년이 넘도록 그 묘기를 얻지 못하였으니
제가 무슨 얼굴로 감히 군왕을 대하겠습니까?

듣자하니 숨겨놓은 곡조가 있다하니
엎드려 청컨대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귀금은 태수에게 감동되어 비곡을 전수
안장은 이를 배워 아들 극종에게 전하고
극종은 따로 7곡을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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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최초의 암자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칠불사.
1948년 여순 반란군 토벌 때 불타 모두 소실된 칠불사.
1952년 재건해 고색창연함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신라 담공선사가 지었다는 아자방은 복원.'

....................찾아가는 길...............................
남해고속국도 하동인터체인지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19번 국도따라 하동시내, 화개교, 화개장터를 지나
1023번 지방도로 화개천을 따라가면 범왕리 칠불사.

화개천따라 산비탈 된비알에 억척스럽게 조성한 차밭들.
화개천 따라 칠불사까지 이어진 벛꽃 터널 길이 아름답다.

1) 하동에서 버스 하루 3회운행(12;20, 17:20) 거리 35km
2) 칠불사 5km전 신흥마을까지 하루 10차례 정기버스 운행
3) 쌍계사 또는 신흥마을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편하다.

주변관광지

하동포구공원, 아라리호, 최참판댁,
평사리공원, 화개장터, 쌍계사 차 시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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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반야봉 남쪽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사찰.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는 가야국 시대의 사찰.
삼국시대 초기 김해 낙동강 유역의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사찰.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동국여지승람 하동지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태어난 김수로왕은 허황후와 사이에 10남 2녀

허황후는 기원전 5세기 창건한 이유다국의 공주,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 태양왕조의 공주 허황옥(許黃玉)
김수로왕 큰 아들 거등(巨登)은 가락국의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 왕자와 삼남 명(明) 왕자는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왕자는 출가한다.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長遊寶玉)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62년(서기103년) 음력8월 15일 모두 성불

이들 일곱왕자 혜진(慧眞), 각초(覺初), 지감(智鑑),
등연(等演), 주순(柱淳) , 정영(淨英), 계영(戒英)

성불한 후에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

칠불사의 창건설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수로왕과 왕비
기쁜 마음에 일곱 왕자를 만나려고 지리산 운상원을 찾았다.

일곱 왕자의 스승이자 외삼촌인 보옥선사
불법 계율에 따라 서로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경내 연못을 지켜보라'고 일러주었다.

일곱 왕자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 컸지만
어쩔 수 없이 왕과 왕비는 연못을 지켜만 보았다.
얼마후 연못에 비친 성불한 7 왕자의 찬란한 모습

일곱 왕자의 성불을 직접 목격한 김수로왕.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서 사찰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해서 칠불사(七佛寺)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372년) 보다
칠불사 사찰 역사는 약 270 여년 앞섰다.

..........우리나라 최초 불교 도래지..........
가락국 역사의발자취와 전설이 가득한 사찰.
영화 ‘달마야 놀자’의 배경무대였던 사찰

2001년 380만 관객을 동원한‘달마야 놀자’.

김해 신어산(神魚山) 중턱 천년고찰 은하사(銀河寺)
특히 신어산 정상 가득한 기암괴석은 나한상을 닮았고,
그 거대한 나한상들이 은하사와 어울려 절경을 연출한다.

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승과 석학들을 배출.
그 때문에 기도하는 불자가 옛부터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
42년 김수로왕이 사찰을 창건 허황후 오빠 장유화상이 발원.

은하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인조 22년(1644년) 복원
사찰 이름을 서림사로 지칭했다가 200년전 다시 은하사.
범어사 말사인 은하사 본존불은 관세음보살이란 점도 특징.

우리나라 불교의 온갖 전설을 간직한 신어산,
그 산에서 둥지 속 새알처럼 자리잡은 은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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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사.............................
후한 광무 건무 18년(42년) 김수로왕이 사찰을 창건하였고
인도에서 온 허황후가 오빠 장유화상과 더불어 천하태평 기도
이곳 산 이름을 금강산이라 명명하고 사찰을 금강사라 칭했다.

이곳에서 장유화상은 가야국과 만 백성을 위해 수행정진
일곱왕자를 출가하게 해 마침내 칠불로 탄생하도록 했고
국사로서 수행정진에 전념해 성불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

이후 신라 고려 고승대덕과 석학들이 이곳에서 수행 정진
신어산 정상의 우뚝한 바위들은 모두가 나한상이라 하여
이곳을 나한도량으로 삼아 기도하는 불자들로 인산인해

특히, 김수로왕이 서기 43년 도읍을 정하며
이곳을 16나한을 모실만한 곳이라고 했듯이
현재 은하사 나한전에 모시고 있는 16 나한.

임진왜란때 전소된 사찰을 인조 22년 (1644년) 복원
'서림사'라 개명하였고 별칭으로 '동림사'라고 했다.
현재, 은하사 사찰 이름은 약 200년전 중수할 때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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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은하사 대웅전에 있는 중수 서림사 선당기, 취운루 중수기
아유타국 공주 허왕후는 오빠와 함께 와서 남방불교를 전파.
한반도 최초의 인도승려 장유화상이 가야지역에 불교를 전파

김수로왕의 일곱왕자들을 성불시켰다는 '가락국기' 기록.
그렇다면, 한반도 불교는 가야에서 처음 유래된 남방불교
중국보다 먼저 바다를 건너 남방불교가 들어온 것이 된다.

김해지역에 내려오는 설화나 전설을 통해 보면
4세기 후반 이전에 가야지역에 불교가 들어온듯.

고구려 백제 신라같은 중국불교와 색다른 가야불교.
불국(佛國)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직접 전래
그러므로 가야불교는 약 2000년 역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당시 인도는 소승불교이므로 가야불교도 소승불교.
가야에는 불교를 전해준 서역을 향한 서향 절이 많다.

중국불교는 동쪽으로 전파되며 해뜨는 동향을 중시
남방불교는 열대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서향을 중시.

48년 가야불교 흔적은 바다 풍랑을 잠재우기 위한 파사석탑.
야후타국의 부왕이 공주인 허왕옥에게 하사했다는 파사석탑.

이 탑은 원래 김해 호계사에 보존되었으나 1893년 폐사
김해부사가 허왕후 묘옆으로 옮겨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이 탑의 모양도 기묘하지만,
돌이 약간 불은 빛을 띄고 있으며 그 성질이 연하므로
"이 나라 물건이 아니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닭벼슬 피를 묻히면 다른 돌은 굳어지지만
이 파사석탑은 그렇치 않았다고 소개하였다.

허황후는 그의 오빠 허보옥과 함께 김해로 왔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도승려 인 장유 화상.

인근 장유라는 지명도 여기서 비롯되었고,
장유계곡 위 장유사에 장유화상의 사리탑

중국 불교는 5세기 경 달마대사 이후로 부흥.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때는 기원후 68년.

이 때 인도승 두 분이 불경을 가지고 왔으며,
그들 무덤은 중국불교 성지 낙양 백마사 입구

장유는 중국으로 치면 바로 백마사 인도승에 해당.
김해 장유면 명월산(明月山)계곡 흥국사에 탑신 돌.

이것을 사왕석(巳王石)이라 하는데,
두 마리의 뱀이 부처를 호위하는 모습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

인도에는 뱀이 호위하는 불상이 많이 남아 있다.
김해지역 곳곳에 가야불교와 관련된 지명과 사찰
먼저 장유란 지명도 장유화상이 도래하였음을 증명

'장유 불모산 지명도 장유화상 흔적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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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남방불교가 처음 전래된 42년.
기록 상 중국보다 26년 앞선 한반도 불교.

칠불사는 남방불교에서 유래된 가야사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
사찬(벼슬이름)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간 거문고를 연구하여
신곡 30곡을 지어 명득(命得)에 전했고 그것은 뒷날
이 곳에서 왕산악 이후의 금법(琴法)을 정리하게 된다.

우륵의 가야금과 더불어 현악기의 쌍벽을 이룬 거문고.
칠불암을 찾아온 생육신 남효온의 1487년 이곳의 기록
당시 운상원(雲上院)은 일명 옥보대(玉寶臺)라 불리웠다. 



거문고 



가야금이 여성적이라면,
거문고는 남성적인 음색.

고구려의 옛이름 <검>은 '곰'과 '고'의 합성어.
거문고는 고구려의 현악기를 뜻하는 이름이다.

고구려 거문고는 통일신라에 전해져
옥보고 속명득 귀금 이찬 윤흥 안장
청장 극상 극종을 통해 널리 퍼졌다.

거문고는 신라 삼현삼죽(三絃三竹)의 하나
향악발전에 공헌했고 이조때 궁중에서 발전.
이조 후기에는 선비의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거문고 연주는 곧 마음 다스리기.

거문고는 고구려의 전통악기이다.
지리산 고목으로 만들어진 거문고.
운봉은 거문고와 더불어 동편제 산실.

운봉은 패망 고구려 유민들의 정착지.
신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
고구려 유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동편제.

지리산 자락의 광활한 분지로 형성된 운봉.
그곳 종마 목장과 칼싸움 놀이는 고구려 풍습
우리나라 국가 위기마다 앞장섰던 운봉 사람들.

나라잃은 설움을 일찍 깨닳은 고구려 후예들.'

고구려의 뿌리는 원래 중국 북방의 부여.
은정월에 하늘에 국가제사를 지낸 공통점.

'사기 흉노전 기록 - 일년에 3번 국가제사.'

한 해를 시작하는 은(殷)정월(음력 1월)의 제사
말 젖술로 봄의 축제를 벌리는 음력 5월5월 제사.
초원 풀이 죽어가는 8~9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사.

일년에 3회 국가 제사는 곧 국가적인 광란의 축제.
소를 잡아 그 발을 보고 국가 길흉을 점친 토템 신앙.
흉년이 들면 그 죄를 왕에게 돌려 왕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왕권은 엄하게 확립되어 부여에는 순장풍습
왕이 죽으면 100 여명까지 죽여 함께 묻었던 장례 풍습.
왕을 물러나게도 했던 토템 신앙 국가제사를 주관한 무당.

'645년 요동성 추모왕은 미녀를 뽑아 국가제사 주관.'

무당은 사제(司祭), 의무(醫巫), 예언자 역활 분담.
이러한 샤마니즘은 고대국가 민간 토속신앙으로 발전
하여, 한반도 고대국가마다 성대하게 치뤘던 국가제사.

'거문고는 국가제사에 사용했던 전통악기.'

은나라 부여 고구려에서부터 이어진 국가제사.
지리산은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의 국가제사 터.
고구려 전통음악이 지리산에서 맥을 잇게 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서의 국가 제사.

옛 신라 백제 민심을 포용하기 위한 국가제사.
옛 신라 민심을 잡기 위한 남악사 국가제사 등.
이조 때 민심의 분열을 막기위해 국가제사 계승.

가야금이 서민적이라면
거문고는 귀족적인 요소.

웅장하고 힘찬 거문고 선률.

삼국사기에 따르면 거문고는 고구려 왕산악(王山岳)이 만들었다.
고구려의 국상(國相) 왕산악이 진나라의 칠현금을 개량한 거문고.
진(晉 : 265~316)나라에서 보낸 칠현금의 연주법을 몰랐던 고구려.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아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했다.
이때 왕산악이 칠현금을 개량해 연주하자 날아와 춤춘 검은 학.
하여, 그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불렀고 훗날엔 현금(玄琴)

이 악기가 오늘날의 거문고이고 지안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과,
357년 축조된 황해도 안악(安岳) 3호분 벽화에 거문고 연주 그림.
당시 거문고가 고구려 왕실의 중요한 악기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진나라는 동진(東晉 : 316~419)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왕산악의 거문고는 그 뒤에 신라 옥보고(玉寶高)에게 전하여졌다.
옥보고는 속명득(宋命得)에게 전하고, 그는 또 귀금(貴金)에게 전수.

그러나, 훗날 지리산 운상원에 은거하며 나오지 않았던 귀금.

신라 진흥왕이 거문고 비법이 끊길까 두려워,
이찬(伊찬) 윤흥(允興)을 남원공사에 임명하여,
귀금의 거문고 연주 비법을 전수하게 하였다 한다.

이에 윤흥은 진흥왕의 명을 받고 남원에 도임하여,
남원의 안장(安長), 청장(淸長)을 귀금에게 보냈다.
결국, 고구려 거문고 맥은 지리산 일대에서 이어졌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거문고의 전신 칠현금

고려 예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송씨 가문
이조 말 윤용구(尹用求)에 의해 향악 연주법 개발
가곡 반주, 궁중 연회,문묘 제례악에서 연주한 악기.

고구려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맥을 이은 거문고.
고려 이조와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맥을 계승.
남원 운봉을 중심으로 동편제를 뒷받침하는 악기.

'거문고 음률은 부부간 화목한 금술의 상징.'

거문고 연주로 남심을 사로잡았던 황진이.
깊은 밤 그녀의 거문고 연주는 강렬한 유혹.
그녀의 거문고 음률은 남성을 사로잡았던 매력.

'고혹적인 몸매를 드러낸 그녀의 연주 자태.'

그녀의 거문고 연주에 초연했던 오직 한 남자.
그 남자가 죽고난 후에도 잊을 수 없던 황진이
황진이 죽을 때까지 사모했던, 송도삼절 서경덕.

국가제사, 궁중음악과 함께 사라져가는 거문고.
동편제 판소리 반주 악기로 맥을 이어 온 거문고.
운봉 남원 일대에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거문고.




불교 음악.



범패(梵唄)는 우리나라 불교음악을 대표하는 것
부처님께 예경하는 의식에서 불려지는 불교 음악.

범패의 범(梵)은 우주의 근본 원리을 의미하며,
패는 범어 bhasa의 음역, 패닉(唄匿), 파사(婆師)
'찬탄한다’‘염불 소리’ 또는 ‘노래’라는 뜻.

범어는 범음(梵音) 또는 어산이라 한다.
독경찬영(讀經讚詠) 소리를 길게 뽑으며
게송을 읊는 것은 가영(歌詠)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곡조가 곧 범패.
범패는 절에서 재를 올릴 때 쓰이는 의식 음악

'중요 무형 문화재 50호로 지정된 다섯가지 음악.'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 십왕각배재(十王各拜齋),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
다섯 가지 재에 쓰이는 범패가 불교음악 문화의 대표격이다.

범패는 세속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선비웅주의 ‘영산회상곡이다.
이것은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上佛菩薩)이라는 가사
성악곡이 세속적인 기악곡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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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 속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우리나라 불교음악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인도 불교음악은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크게 발전.
신라시대 중국에서 들어와 한반도 고유음악과 혼합
그후 일본 등지에 전파되었고 신라 고려때 매우 왕성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부 사람의 예식에서만 사용
이후 불교음악은 소멸되어 남아 있는 것은 '찬불가'뿐.
불교음악은 불교와 관계있는 모든 음악을 총칭해 범패.

우리나라 불교음악은 범패에서 시작해 범패로 끝난다
범패는 신라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들여와 최초로 전파.
불교음악은 우리나라 민요와 판소리에 큰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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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불교음악과 무관하지 않은 지리산 일대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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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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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달오름 행사는 불교 관념을 뒤흔든 사건.
불교에서 영산제란 스님들이 올리는 공양의식이다.

법현 스님이 세계 처음으로 각필 악보를 발견, 해석
1700년대 감로 탱화에 근거해 고대 의상과 춤을 재현
이번 영산제는 입석까지 매진된 폭팔적인 관심과 인기.

스님들의 화려한 의상, 무희들의 화려한 장식.
(특히, 방울달린 머리 장식은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사찰에 와있는 듯한 무대 세트와 정적인 밤

스님 목탁과 염불소리가 전통악기와 어울린 화음
졸리고 지루하기만 하던 두 분야가 한대 어울어져
흥미롭고 재미있는 또다른 장르의 음악이 탄생했다.

화려하며 장중하고 새로우며 고대를 재현한 영산제.
많은 호응과 지지 속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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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기적'같이 열리는 전남 진도의 바닷길.
바닷길이 열리는 현상을 보기위해 온 관광객들
바닷길로 들어가 미역따고 조개캐며 즐거움 만끽.

'제28회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

축제 첫 날부터 국내외 관광객 25만명이 찾아 성황.
길이 2.8Km, 폭 40-60m, 약 1시간 동안 열린 바닷길.
바닷길을 연 뽕할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씻김굿

진도 명창들의 국악공연, 충무공의 강강수월래 공연.
축제 둘째날 광주시립 관현악을 시작으로 한 영산제.
바라춤, 나비춤, 범폐,등 중앙대 국악과 학생들 공연

셋째날 국립창극단 창극 '뺑파막'. 진도 남도들노래,
다시래기, 진도 북놀이 등이 관광객과 함께 펼쳐졌다.
어선 100척이 펼치는 바다위에서 선박들의 강강수월래
패러글라이딩 시범, 소망기원 연날리기, 해상불꽃놀이,
레이저 쇼, 수륙대제, 치어방생법회, 웰빙 등산로 체험

지난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목격.
'나는 동방의 나라 한국 진도에서 모세의 기적을 보았다'
프랑스 신문에 소개된 후부터 전세계에 알려진.. 영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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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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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6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유입.
그 흔적이 담겨있는 인도음악의 선율과 리듬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본질적 특성은 오랜 세월 거의 변치 않았다.
선사시대 이미 예술적인 민족의 수준 높은 문화.

수메르인이 사용한 초기 하프(BC 2500~1500).

종교적 의식에 따라 인도에 도착한 아리아인들
3개의 음 높이 악센트로 엄숙하게 가사를 낭송
그 기본형식은 아직도 힌두 사원에서 사용된다.

인도 음악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인음악 '기타',
부수적 기악 음악 '바디아', '느르티아'라는 춤
사원에서 추는 남인도의 전통무용 바라타나티아

베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고대 힌두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헬레니즘과 불교가 지배하던 시대(BC 250?~AD 600)
고전적 전통이 다소 주춤했으며 이후 종교 부흥 시대
인도는 다시 한번 힌두교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음악의 기본형식은 여전히 성악이었지만
여러 형태 북이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다양한 악기가 독주나 소규모 합주로 연주되었다.

인도음악은 서양 음계처럼 7개 음으로 구성된다.
'사 리 가 마 파 다 니' 7개의 음이.. 한 옥타브.

낮과 밤의 서로 다른 시간들에 적합한 기분을 표현
마음 속 변화를 음악 또는 그림의 형태로 표현했다.

인도음악 리듬 구조를 이루는 2개 요소 = 라가. 탈라.

처음부터 끝까지 으뜸음 역할을 하는 드론에 의해 완결.
인도음악에는 조바꿈이 없기 때문에 드론은 고정되었으며
가끔 탄부르(목이 길고 줄받이 없는 류트족 악기)로 연주.

연주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창조적 성향을 라가 법칙에 종속
규정된 틀 안에서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연마
라가 연주자는 서양음악 연주자들에 비해 훨씬 더 독창적인 편.

인도음악 연주 양식은 북부와 남부가 상당히 차이.

항상 예전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부는 인더스 계곡과 그리스 식 불교 문화,
페르시아 제국(BC 5~4세기), 파르시교도, 아라비아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에 정복당했을 때에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영향은 이미 익숙한 것
새 통치자는 새 음악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 인도음악은 무굴 제국 말기(1542~1605)에 절정

남인도에서는 이슬람 영향에 비길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이미 아리아인과 힌두인이 결합된 북인도의 힌두스탄 음악
페르시아와 중동에서 새 선율과 양식을 흡수해 세속적 분위기

고대 대다수 인도악기 중 몇몇은 토착 악기이지만
대부분 중동, 힌두인 옛 악기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목관악기로는 가로 피리, 세로 피리, 숌, 샤나이(북부),
나가스바람(남부), 의식용 소라고둥, 땅꾼의 리드 파이프
북은 다이나, 쌍으로 이루어진 타블라(북부), 음리당가(남부),

모래시계 모양의 북인 다마루, 채로 치는 드럼 '돌과 돌락',
케틀드럼 나키라가 있고 여러 형태의 심벌즈·종·딱딱이 등.

무굴 제국이 쇠퇴하며 영국 영향이 커진 인도

인도음악은 다른 지역 음악에 주기적 영향.
불교와 함께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에 전파.
8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힌두인

그 영향은 미얀마와 시암(타이)에서는 배 모양 하프
발리 민속음악이고, 집시 음악의 모체가 된 인도음악.


덧 말.

서양 또는 북방 유목 민족들에게 쫓긴 인도 민족.
동쪽으로 이동하며 동아시아에 농본국가들을 건설.
오늘날 크게 나누어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도 음악, 불교 음악. 티벹 음악,
가락과 음률, 악기 등에서 공통점.



칠불암과 허황후.



반선.~~~~.~~~~~~~~~~~.뱀사골...산장.
........↖.............실상사............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 .*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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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 토끼봉 -3.5Km- 1293고지 -4.5Km- 칠불사 -5Km- 신흥
<총 13Km, 내리막 길 3시간 30분, 오르막길 5시간 20분 소요>
신흥에서 지리산 주능선까지 가장 빠르게 오르 내릴 수 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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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에서 차로 20분 거리 남산리 계곡에 칠불암. 
큰 바위에 새겨진 칠불암 마애석불(七佛岩 磨崖石佛).
8세기 중반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7 구의 불상 조각.

동쪽 큰 바위에 3존불,그 앞에 바위 각면마다 새겨진 4구의 여래상.
하여, 칠불암이라 하고, 삼존상의 본존(本尊) 구도가 특히 돋보인다.

좌우 보살 입상은 한쪽 어깨가 솟았고,
각각 반대편 다리에 힘을 뺀 삼굴의 자세.
허황후가 인도의 공주였음을 입증하는 불상.

이러한 불상은 중국 7세기 후반에서 8 세기 초기의 형태.
7 세기 후반 당나라 법승들을 통해 통일 신라시대로 전파.
한반도에 남방불교가 전래된 경로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

칠불사가 통일 신라시대 전후의 사찰 임을 알게 해준다.
아울러 <칠불사와 허왕후> 전설을 뒷받침 해주는 유적지.
성불한 7 아들 어머니 허왕후는 일명 마야 부인이라 한다.

가락국 왕후이자 성불한 7 아들 부처의 어머니.
허왕후는 천왕성모 또는 문수보살로도 비견된다.
허왕후는 지리산 문수보살 신앙의 상징적인 인물.

............................<'칠불사와 허황후'의 전설>..............................
가락국 김수로왕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 조차 7왕자가 있는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지만..

"우리는 이미 성불하여 속인을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세요"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는데..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세요."

허왕후가 연못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7 아들의 모습.
너무 상심해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합장한 7 왕자.
감동한 것도 잠깐, 다시 사라진 7 아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로부터 이 연못은 <영지>,
수로왕이 머물던 곳은 <범왕촌>
법왕촌은 현재 범왕리로 불리운다.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
지금은 대비리로 바뀌어 불리운다.
대비리는 쌍계사 아래에 있는 마을.
....................................................

쌍계사, 칠불사, 중산리 법계사,
마천의 벽송사, 남원의 실상사,
유평리의 대원사, 구례 화엄사
천은사 등등 지리산자락 사찰들

그 사찰에 있는 보물 연대를 보면
불교문화는 통일신라 시대가 전성기.

그러나, 칠불암은 그 규모를 떠나
지리산 어느 사찰들보다 유서 깊다.
하여, 허황후와 가락국 유래를 소개.


........................허황후와 가락국에 대한 유래 ...............................
천지개벽 아주 먼 옛날 지금 한강 북쪽은 단군의 고조선
졸본부여 땅에 고주몽(高朱蒙)이 고구려(高句麗)를 창건.
한강 남쪽 경기 충청 전라도에 걸쳐 五十국을 다스린 마한.

낙동강 동쪽 十二國은 진한(辰韓)
낙동강 서남에 十二國은 변한(弁韓)

훗날 진한 영역은 신라(新羅)로,
마한 영역은 백제(百濟)로 흡수.

이때 변한은 나라 이름, 왕과 신하 제도도 없었다.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 왕이 가락국의 초대 왕
허황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이자 김수로왕의 부인이다.

허황후는 48년(유리왕 25) 배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된다.
태자 '등거공'등 10 아들, 중 2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랐다.
......................................................................................
가락국 10 대 구형왕은 양왕이라고도 한다.
신라 법흥왕(532년)에게 나라를 넘겨준 왕이다.
신라로부터 양왕 칭호를 받고 왕에 준하는 예우.

가락국은 명맥이 끊긴 후에도 신라와 밀접한 관계.

통일신라는 가락국과 합병 후 불교의 전성기를 맞는다.
칠불암 가까운 쌍계사 화엄사 고찰들이 그 사실을 입증.

후세 사람들이 비겁한 왕이라고도 하는 양왕.
하지만, 칠선계곡 국골에 쌓았다는 추성산성.
양왕이 백제와 항전했다는 구전도 전해져온다.

하여, 김수로왕 후손 및 강청리 주민들
百巫洞' 보다 무기 武자 百巫洞'을 주장.

'칠불암과 허황후' 전설은 그 일대 지명에 영향.
행정 지명에 영향을 줄 만큼 소중한 무형 문화재 .
신라는 가락국과 합병 후 오랫동안 상호 우호 관계
.
훗날, '가락국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 장군
신라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활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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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은 또 다른 내용의 전설들을 품고 있다.
불교가 이조시대에 탄압 받은 흔적이 있는 전설.
7 왕자가 성불하는 순간의 유래가 담겨 있는 전설.

어사 박문수와 문수보살의 일화가 담겨져있는 전설.
6.25 동란 전후 반란의 역사속에 불탄 유래가 담긴 전설.
그 유래와 전설 내용들은 칠불사가 고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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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왕자의 견성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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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보옥선사>와 김수로 왕의 7 왕자...8 명.
서기 101년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와 3년간 수도

수로왕 62년(서기 103년) 음력 8월 15일 대보름 밤,
달이 중천에 떠 삼라만상을 두루 비추고 있을 무렵.

가락국 7 왕자 慧眞, 覺初, 智鑑, 等演, 柱淳, 淨英, 戒英.
보옥선사는 그들과 선문답을 펴며 달빛을 즐기고 있었다.

왕자들은 외삼촌 보옥선사와 함께 둥근 달을 보며 즉흥시.
"가을이 되니 바람이 서늘 하고 보름이 되니 달이 둥글도다."
"푸른 하늘, 삼경 달이 밝아 심장과 쓸개까지 훤히 비추는구나."

또 다른 한 왕자는 땅위에 가만히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지웠다.
그 밖의 네 왕자는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가는데 이 때에..
철거덩 하는 쇳소리가 크게 울리며 현묘한 진리를 깨쳐 7 왕자 성불.

金王光佛 金王幢佛 金王相佛 金王行佛
金王香佛 金王性佛 金王空佛.(7왕자)


아들을 출가시킨 뒤 아들이 보고 싶은 어머니 마음.
가락국 수도 김해에서 배타고 남해 거쳐 섬진강 도착.
칠불암까지 찾아 왔으나 장유 보옥선사가 상봉을 만류.

그 후 아들을 만나려 운상원(雲上院)을 찾은 허황후.
그때마다 보옥선사는 여동생인 왕비(王妃)를 꾸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황후는 운상원을 다시 찾았는데
보옥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7왕자 아들과 상봉을 허락.

"네 아들들이 모두 成佛했으니 오늘은 만나봐도 좋다."

이 때 공중에서 '연못을 보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부처님 계시.
그곳 연못을 들여다 보니 황금 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의 성불.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여 그 영지를.. 천비연(天飛淵).

허왕후가 아들을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옥선사가 머물던 범왕리.
범왕리(梵王里)... 보옥선사는 인도의 왕자 였으므로 그렇게 불리운다.
지금은 凡旺里라 하고, 허왕후가 머물던 곳은.. 정금리 대비동(大妃洞).
대비암(大妃庵) 있는 범왕 고개 너머엔 삼정승이 기다린, 삼정리(三政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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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방과 문수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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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방은 중앙에 십자형 통로가 있고
둘레에 높다란 4 개의 좌선방(坐禪房)
아(亞)자 형태 구조라 아자방(亞字房).

이중 온돌은 통로나 높은 방 모두 일정한 온도 유지.
일곱 짐 장작을 3 아궁이에 지피면 49일 간 따듯하다.
신라 지마왕 8년(서기 119) 또는 효공왕(897~911) 축조.

'아자방을 축조한 사람은 담공선사(曇空禪師).'

아자방의 전설에는 이조시대 불교탄압 흔적이 서려있다.
하동(河東)땅에 암행 순시차 온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
조선 후기의 문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7년 사서에 등용된 영남 소론파 암행어사 박문수.'

1730년 충청 암행어사로 부정한 관리를 척결해 백성의 구제.
1753년 우참판에 이어 영의정에 올라 4색의 인재를 고루 등용.
그가 암행어사 시절 행적을 보면 이조의 불교탄압을 알수 있다.

화개동천 1백여 사찰을 폐사할 구실을 찾아 칠불암 방문.
스님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괴이쩍게 생각하여 두리번.
아자방을 발견한 박문수는 그 곳으로 가서 문을 열어 젖혔다.

이때 한 동자가 조용히 하라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제재.
그런데 이미 열려진 방안에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일종식.
하루 한끼 식사하는 일종식(一種食) 점심 공양후 참선 시각.

각양각색 자세로 참선하는 스님들을 구경하던 박어사.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조는 스님.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 참선 자세.
동자 말에 박문수는 어이없어 웃는다.

박문수가 그곳 또 다른 스님을 바라보니
고개가 무릎에 닿도록 떨구며 조는 모습.
지하망명관(地下亡冥觀)이라는 동자의 설명.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자세는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
방귀소리 내는 것을 보고 타파칠통관(타파칠통관)이라 설명.
어느 한 가지도 참선자세가 아닌듯 하여 어이가 없던 박어사.

'동자승에게 법문만 잔뜩 듣고 이곳을 떠난 박문수.'

그로부터 5일후 박문수는 하동 현감과 함께 스님들 신통력을 시험.
하동 관아에서는 칠불암 스님들은 목마타고 관아에 오라는 출두통지.
목마를 타고 달리지 못하면 절을 폐쇄, 목마로 달리면 절에 양식 지급.

스님들은 모두 걱정 하며 출두 당일에 관아 마당에 모였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보며 어찌할 바 모르는 순간, 나타난 동자.

안장도 없는 목마에 올라타고 목마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치자
목마는 소리를 크게 질러대며 동헌 앞 마당을 몇 바퀴나 돌았다.

놀란 박 문수는 칠불암 스님들을 극진히 대우해 돌려 보내고
아자방에 두꺼운 장판을 다시 깔아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스님들 어떻게 하든지.. 수도에 전념하셔야 됩니다."

이날 동자승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서야 스님들은 동자가 문수보살의 현신 임을 알고
문수동자가 사라진 곳에 동자부도를 세워 기념했다고 한다.

이 '동자부도'는 일주문 아래
초의선사 다신탑비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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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칠불암 철비(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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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성총스님과 무가당 스님의 부도 오른쪽 모서리 방향
5m 거리의 대숲에 비신 없는 대석은..옛날의 칠불암 사적비.

'그 높이가 6척이고.. 넓이가 4척 이었다는.. 철비(鐵碑)'.
승노(僧奴)들의 후손들은 선조(先祖) 이름이 적혀 있다 하여
고려 말 왜적의 침입 때 비신을 뽑아 묻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칠불사 사적과 칠불의 성불, 불교의 전래에 대한.. 귀중한 유적.
일제 때 일본인 불교 학자들이 철비의 행방을 추적했으나 헛걸음.
해방 후 한국 사학자인 이병도, 권상로 등이 애썼지만, 행방이 묘연.


'반란의 역사' 속에.. 칠불암 종소리.

1951年 1月 눈 내리던 어느 날에, 태고의 정적을 헤집고
요란한 포성이 지리산을 흔들며 골바람이 일고 산을 울렸다.
뒤따라 칠불암에서 불길이 솟아 보광전(대웅전) 벽이 흔들렸다.

불길 속 종루(지금의 원음각)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골짜기에 내리는 눈은 무척 조용한데
그날따라 눈보라는 유난히도 스산했다.

아자방 구들을 감싼 벽안당 건물이 무너졌다.
설선당은 불길에 휩싸인 채 목탁소리만 울렸다.
그 목탁 소리는 서까래가 타는 소리였던 것이다.

종루에서는 끊기었던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종루가 불타 무너지며 울리는 종소리였던 것.
열흘 남짓 불타던 칠불암은 하얀 재로 변했다.

칠불암은 잿더미로 변해 골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후 은은히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멈추고 말았다.
칠불암을 방화한 군인들은 여순 반란군에 의해 몰살.

6. 25 동란과 여순 반란사건.
토벌대와 여순 반란군의 전투.

1600 년전 칠불암의 '약사여래 석조상'
이때 아자방과 함께 불타 사라져버렸다.

칠불암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종루에서 울려 퍼지던 '종소리'.

약사여래 석상이 불탔기 때문에
일어났던 이적(異蹟)이라는 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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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보물을 지키기 위한 모택동의 일화는 유명하다.
장개석이 중국 보물을 군함 여러 척에 싣고 항해할 때
모택동 함대에게 포위당해 격침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보물을 실은 군함들은 무사히 대만에 도착했다.
모택동이 군함으로 대만까지 호위하라 명령 내렸기 때문.
잘못하면 중국의 보물이 바다 속에 빠질까 우려한 모택동.

중국 본토에 있던, 대만에 있던, 중국의 보물이라는 생각.
대만과 중국은 언젠가 반드시 합쳐질 것이란 모택동의 생각.
전쟁 중에도 중국의 보물을 지킨 모택동의 판단은 본받을 점.

대만은 작은 섬나라지만 그 보물이 있어 큰 나라.
보물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대륙을 살 정도.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강대국들은 전쟁을 하면서도
그 조상이 쌓아올린 천년의 문화유산을 서로 지켰다.
연합군은 일본을 폐허로 만들면서도 역사유적들을 보호.

이 승만 대통령이나 군의 지휘관들이 좀더 현명했더라면
대대로 물려 줄 문화유산을 불사르는 작전방식은 없었을 듯.

자칫 파묻히고 버려지기도 쉬운..전설을 품은 현장들.
칠불암 전설은 배달민족이 겪었던.. 한과 역사가 담긴 곳.
그 베일 속에 가려진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칠불암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에 관한 전설이 있는 곳.

가락국의 허황후는 인도의 공주였고 마야계곡 전설의 주인공이다.
허황후의 아들 7 왕자가 성불할 정도라면, 김수로 왕 역시 불교신자.
마야부인으로 숭배받을 만큼 허황후는 가락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셈.
결국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가락국의 영토였던 것 같다.

아울러, 칠불암은 이조시대의 불교 탄압정책을 알수 있는 곳,
6.25 동란, 여순 반란사건, 남부군과 토벌군의 격전지 였던 곳.

절터 치고 명당 아닌 곳이 없지만 칠불사(七佛寺)는 그중 으뜸 터.
와우(臥牛)형국으로 암소가 배불리 먹고 누운 형상의 명당이란 터.
이 절에서 나는 샘물은 유천(乳泉)이며, 유천은 한반도에 단 세 곳뿐.
서기 97년 신라 김수로왕의 10명 왕자 가운데 7명이 입산, 6년 후 성불.
하여, 칠불사를 동국제일선원이라 하고 아(亞)자 형의 구들을 놓은 선방.

아자방은 별명 '구들선사' 운공선사가 897년부터 13년간 공들여 지었고,
그 구조가 오묘하여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 간다는 방이기도 하지만
아자선방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여, 묵언(默言)을 지키고, 앉되 눕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어야 머물 수 있었기에 서산, 부휴, 초의, 용성 등등 수행한 곳.
특히 추월스님의 계족정진, 즉 닭처럼 발 뒤꿈치를 든 채 하는 참선수행이 유명.

초의선사는 다서(茶書)인 동다송(東茶頌)을 여기에서 집필.
이미 대원사 편에서 소개한 초의선사는 추사와 '40년 지기'.
하여, 아자방은 칠불사를 동국제일선원이 되게 한 산실이다.

1981년부터 3년간 칠불사 대웅전 목불 조성할 때 전설같은 얘기가 있다.
27세의 젊은 목조각가가 약혼도 파기하고 끝내 여기에서 삭발했다고 한다.


덧 말.

역사관 시대관 사상관 및 종교관이 달라도 지켜져야 할 문화재.
우리나라의 문화재엔 그 하나마다 소중한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
칠불암은 오늘날 우리에게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주는 귀한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