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
산동 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 고대국가.
옛부터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교역로.
하여, 고구려 백제 유민이 많이 사는 산동반도.
나당 연합군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당나라의 인구분산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된 탓.
당나라는 패망한 고구려의 부활을 두려워했었다.
햐여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강제로 분산시킨 것.
그당시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유민들
당나라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었다.
그 참상을 보고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
중국 산동반도의 유민들을 적극 도왔다.
장보고가 설립한 법화원 사찰이 물적 증거.
'산동반도 일대가 곧
제나라 영역.'
제나라는 한반도와 비슷한 문화와 풍습
고대사회 어느 한 시점에서는 같은 민족,
서해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같은 민족인듯.
툭히, 가락국과 제나라는 빈번한 무역교류.
상호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상권을 공유한듯.
'관중과 포숙'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제나라에 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
.................................
춘추 5覇’ 제나라 환공의 통치 철학.
“먹고 살 걱정이 없어야 개혁도 한다”
훌륭한 인재를 활용하려면
통치자부터 훌륭해야 한다.
개혁정치에 성공하려면 목표 설정과 국력 집중이 필요.
환공은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천거한 포숙,
부민화 정책을 통해 민생안정을 이끈 관중.
인재들을 통해 제나라의 부흥을 이루어간다.
원래 제나라는 서해로 뻗은
산동반도의 북부와
황하 하류 평원지대를 바탕으로 대국으로 성장
제14대 군주 양공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무도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누이동생과도 통정(通情)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가문 타령으로 자기 무능을
변호하고
악행을 합법화하려다가 측근에 제거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는 측근에게 살해당하기 십상
양공도
믿었던 심복인 두 장군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들 역시 다른 대신(양공의 종제)에게 죽게된다.
삽시간에 대혼란이 전국을
엄습했다.
당시는 군주를 태양으로 여기던 시기.
그 자리를 하루도 비워두기 곤란했다.
그런데 양공에겐 아들이 없었고
배다른 두 동생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公子) 규(糾)와 공자 소백(小白).
두 공자는 양공의 포악무도함을 보자
신변 위협을 느껴 외국으로 망명했다.
공자 규는 외조부 나라 노국으로 망명.
그의 사부는 관중과 소홀(召忽)이었다.
한편 공자 소백은 이웃한 거(퀎)국으로 갔는데,
사부 포숙(鮑叔)은 관중의 가장 가까운 친우다.
이들의 사부
선정은 양공과 공자의 선친
제나라 희공(僖公)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사부 발령이 발표되자 포숙은 병을 빙자해 사양
소백이 어리고 서자라 장래성이 없을 것으로 보아 실망
그러자, 관중과 소홀이 앞날을 내다보고 그를 찾아갔다.
“양공
타계후 제나라를 안정시킬 군주는 두 공자뿐.
그런데 난세 타개는 위계질서대로 나가는 게 아니지.
앞으로 누가 등극할지 모르지만
공자 소백이 유망주
그 분은 잔재주를 피우지 않고
사물을 파악하며 기량이 크네.
도량이 커 이해하기 어려울 뿐.
미래를 예측하건대, 설령 공자 규가 집권한다 해도
나라일이 어렵게 되면 다스려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때야말로
공자 소백을 받드는 포숙 자네가 나서서
정치안정을 위해 헌신분투할 시기라고 보네.”
관중이 계속 말하였다.
“우리는 임명된 직분이야.
우선 모시는 분을 받들어
충성하며 사생을 초월해야지.
그러나 더 나아가서
국가이익과 민생안정에
이바지한다는 포부이면 좋으리라 생각하네.”
포숙은 관중의 충고를 받아들여 출근
공자 소백에게
충성을 고할 뜻을 표명
이로써 장차 어느 공자가 집권하든
사부인 두 친구가 서로 비호하고
천거할 사상적 준비가
갖춰진 셈.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성실해야 하며,
허영과 거짓말 같은 잔재주는 어불성설이다.
변전무쌍한 난세정국은 주마등 같았다.
결정적인 시각의 도래가 의외로 빨랐고,
상상 이상으로 양쪽 진영은 첨예화
대립.
폭군으로 악명을 날리던 양공이 시해되자
사촌 아우인 공손무기가 등극 후 곧 하직.
그동안 공자 규는
노나라로,
공자 소백은 이웃 거나라로.. 도피 중
공석인 군주 자리를 메우고자 긴급소집된 중신회의
다수 의견에 따라
거나라 소백에게 영접 사신을 파견.
한편 그러한 정보를 접한 노나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서열이나 나이로 보아 공자 규의
즉위가 당연할뿐더러,
이 기회에 제나라에 친노(親魯)정권을 수립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노나라 장공은 군대를 풀어
공자 규의 귀국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이때 관중이 계산해보니,
거나라가 제나라보다 가까워
소백이 먼저
귀국해 즉위할듯.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관중이 직접 수십량의 병차로
선발대를 편성해 서둘러 떠났다.
공자 소백의 귀국 행렬을 차단할 계산
공자 소백 일행은 이미 죽묵을 통과 중
관중이 귀국 중지를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관중은 공자 소백을 향해 활을 쏘아 암살.
관중은 되돌아와 제나라 수도를 향해 출발.
한편 공자
소백은 관중이 멀어지자
상반신을 일으켜주위를 놀라게 했다.
소백은 허리띠 장신구때문에 구사일생.
공자 소백의
‘임기응변 죽음 꾸미기’
훗날 제갈공명도 '죽음 꾸미기(裝死)’
공자 소백 일행은 제나라 수도에 입성했다.
그러고는
백관만민의 축복 속에 즉위했는데,
기원전 685년에 제나라에서 환공이 등장한다.
한편 노나라의 방대한 병력은 공자 규를
호송
뒤늦게 국경을 넘어서야 즉위 사실을 알게 됐다.
억지로 공자 규를 내세워 싸웠으나 대참패.
결국 공자 규는
자살했고 소홀은 순사(殉死).
관중 신병은 포숙이 인수해 당부에서 살려준다.
포숙은 귀국하자마자 환공에게 건의.
“관중은 저와 비교도 안 되게 우수하며,
천하에 둘도 없는 정치적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담하게 등용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활로 쏜 적이 아닌가.”
“그럴수록 포용력을 보이셔야 합니다.
관중을
보좌역으로 기용하시기 바랍니다.”
환공이 끄덕이며 포숙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환공은 관중을 일거에 상국(相國)으로 임명
이를 전해들은 국민은 환공을 우러러보았다.
환공은 오늘날까지도 기량이 더없이 큰 군주
포숙은 자기보다 나은 인재를
공정하게 천거
오늘날까지 훌륭한 참모장으로 존경받고 있다.
관중은 환공의 신임과 포숙의 우정에 보답
제나라를 천하
제일 부강국으로 부상시켰다.
당시 농업 입국일 수 밖에 없었으나
철제 농구가 새로 제작될 무렵이었다.
관중은
철제 농기구 도입과 관련해 특전을 부여
하여, 철기 기술과 자본이 제나라로 물밀듯 유입.
관중은 또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무하려
세제개혁
해안국의 특징을 살려 제염업과 어업을 진흥시켰고
내륙 유통구조를 개선했고 외국상인들의 참여시켰다.
외교에서도 제후국들이 따를 만큼 신의를 굳게 지켰다.
기원전 681년 제와 노의 무력충돌에서 제나라가 승리.
패배한 노 장공이 수읍을 할양하겠다며 화의를 요청
제 환공이 응낙하여 가(柯)라는 곳에서의 평화 회담
그 순간
단하에 있던 노나라 장군이 단상으로 올랐다.
자신의 주공에게 무언가 귀띔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향을 돌려 환공에게
단도를 들이댔다.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시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위기를 모면후 환공이 생각하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약속도 저버릴 생각이었으나 관중이 달려와 말했다.
“협박을 당한, 위급한 상황의 약속이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이미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죽이면
신의에 어긋나고 분풀이에 불과.
그 결과가
알려지면
제후들의 불신을 초래
하여, 백해무익합니다.”
환공은 관중의 간언을 수긍하여 받아들이고
조말과
약속대로 빼앗은 땅을 노나라에 반환.
이 소문을 듣고 제후들은 제 환공을 높이 평가.
신의를 지키는 큰 인물이라며
우러러보았다.
그후 모든 제후들이 환공을 맹주로 모셨다.
즉 환공이 처음으로 중원의 패자로 등장.
관중·포숙 등
충신들이 병사한 뒤
제 환공도 기원전 643년 이승을 하직.
곧바로 다섯 공자 간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는데,
권력투쟁 속에 환공의 시체가 60일 간 방치되었다.
이 사건을 고비로 제나라의 패업은 엉망이 되었다.
그 소동의
와중에 이웃 송나라 양공한테 피난 가 있던 태자 소
송나라 등의 후원으로 귀국하여 등극했으니, 제나라 효공(孝公).
한편
송나라 양공은 그 개입의 성공에 힘입어
제나라 패업을 자기가 계승하려고 뜻을 품었다.
실력의 뒷받침 없이 야심만 부풀어올랐던 양공
송나라의 라이벌은 남방의 신흥 강대국인 초(楚)나라.
이웃 정나라가 초나라에 공물을 바치며 밀착되어 갔다.
참지
못한 양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으로 쳐들어갔다.
한편 초나라는 정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자 대군을 파견
기원전 638년
송군은 '홍수'를 사이에 두고 초군과 대치.
'남방의 야만국’ 초군은 전쟁에 승리후 ‘일약 중원의
패자.
초나라.
양자강(揚子江) 중류지역 일대에서 발기한 초나라
초나라도 주나라 제후국을 거부해 스스로 왕을 칭.
주나라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틈만 나면 중원을 공격
중원에서는
초나라를 제압하는 제후를 패자로 인정.
그만큼 초나라는 중원의 큰 부담이 되었던 강국이다.
BC 638 패자를 자처하는 宋
양공을 사로잡고
홍수에서 격돌하여 송양공을 죽게 하였으나
진 문공이 이끈 宋,濟와 秦의 연합군에게
城僕전투에서 크게 패해
중원진출이 좌절
그러나 활발한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
장왕 때에 이르러 그 위세가 가장 강성
주 왕실에 대해
정(鼎)의 경중을 불었다.
진(陳)과 정(鄭) 등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들을 공격
멸망시키지는 않아 장왕이 패자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부친과 형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오나라로 망명
복수한 역사에 남는 오자서 이야기는 27대
초평왕 때의 일.
그후 200년이 지나 중국은 장의의 秦과
소진이 주도하는 초나라로 패권이 양립
전국시대에
들어와 노나라를 멸망시켜
초나라는 한동안 강성하는 듯 하였으나
춘신군이 이원이라는 신하에게 죽고나자
국력이 약화되어 15년
만에 망하고 만다.
秦나라 장수 왕전이 초나라를 공격
항우의 선조 항연장군을 죽임으로서
초나라는 망하고 진나라
군으로 전락
...............장왕...................
춘추 5패의 하나인 장왕은 24대 왕으로
BC 614년부터 BC 591년까지 25년간 집권.
"누구를 막론하고 간언하는 자는 참형(斬刑)."
포고령을 내리고
집권초 3년 간 주색과 향락.
그후 그가 처음 한 일은 수백 명의 간신들을 숙청
수백명의 충신들을 높이 기용한 왕으로서
유명하다.
장왕은 3년간 진정한 충신이 나타나길 기다렸던 것.
미인을 좋아했지만 정사를 그릇친 적 없는 장왕.
......................초령왕.................
허리가는 미녀를 좋아해 굶어죽는 여자들이 속출
미녀란 뜻의 세요(細腰)란 말은 초령왕 때 생겼다.
말년에는 쿠데타로 초가에 숨어지내다 굶어 죽었다.
대식국(大食國)
당, 송대에 중국에서 아라비아를 가리키던 말.
대식이란
무역상 뜻을 가진 'Tajir'에서 유래,
페르시아인이 아랍인을 'Tazi'라 부른데서 연유
650년 이후 아라비아가
영토를 확장해 나가자
중국이 '영토의 탐욕자'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원나라 기록에는 대식이란 말 대신 회회(回回)
회회는 투르크계 위구르인 회흘(回紇)에서 파생
13세기 중엽 이후 투르크계 종족을 가리키는 의미
고려와 관련된
회회는 이슬람화한 위구르계 종족
한반도 최초 회회는 11세기 전기 고려 현종 정종 때
그러나 이슬람 사료에는 9세기 중엽부터
신라와 접촉
11세기 고려 대식인 상인집단은 100명이 넘는 규모.
정종 6년(1040) "11월 병인(丙寅)에 대식국의
객상
보나합(保那盒) 등이 와서 수은·용치·점성향·몰약·
소목 등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볼 때
대식인들이
큰 규모로 고려와 무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식인들의 활동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다가
원나라 성립된 13세기
중엽부터 회회인이 고려에 진출.
회회인들은 몽골 공주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오기도 하고,
원에서 고려 왕이나 지배층과 친분
인연으로 고려에 정착
충렬왕비인 제국공주 시종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 이름을 하사 받은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공민왕과 친분으로 고려에 귀화한
설손(孫)의 아들 설장수와 설미수,
손자 설순은
고려말~이조초 장수 학자
고려말 회회인은 개경에 집단 이주,
원과 고려 사이의 무역에 종사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이조 초기까지도 고유의 종교적·문화적 습속을 보존
조정의 하례의식에 그들의 대표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1427년(세종 9) 이질문화 금지령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
아라비아.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외 제 4국 가야국.
김해 김씨 시조이자 가야국을
창건한 김수로왕
황금알에서 태어난 난생신화의 주인공 김수로왕.
그 외모는 아라비아 인과 같다고
김해 김씨 족보
기록에 전해온다.
꿈속의 왕자를 찾아 한반도에 온 인도 공주 허왕옥
두 사람은 장막에서 이틀 간 신혼여행 후 백년해로.
김수로왕과 허황후 전설의 고향, 화개 십리..혼례길
혼례길에서 사랑이 싹튼 연인
백년해로 한다는 전설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 '1001 야화'..............
알라딘, 알리 바바, 뱃사람 신드바드
이야기 모음.
중세 유럽 동화, 기사담, 전설, 우화, 일화로 구성
배경무대는 중앙 아시아, 인도, 중국의 섬이나 반도.
이곳에 사는 샤리아르 왕은 그가 왕궁을 비울 때마다
부정한 일을 저질러왔던 왕비와 배신자들을 처단한다.
그리고 모든 여성들을 혐오하여
매일 새 신부를 맞아 다음날 처형.
샤흐라자드, 둔야자드, 두 딸을 둔
샤리아르 왕의 신하.
맏딸 샤흐라자드는 자신을 왕에게 시집 보내달라고 한다.
결혼 첫날부터 매일 밤 그녀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늘 이야기 끝맺음은 다음날 밤에 마치겠다고 약속
왕은 그녀 이야기 끝이 궁금해 그녀의 처형을 연기
결국
여성에 대한 잔인한 보복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주인공 이름은 이란어,
이야기 골격은 인도식
등장인물 대부분 아랍인.
이란·이라크·이집트·투르크·그리스 등
배경 이야기들로 단일 작가 작품은 아닌듯.
'아라비안 설화는 어디에서
싹텄을까?'
......................아라비아...........................
105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나바타이아 왕국을 합병
게라사(요르단 제라시) 필라델피아(요르단 암만)를 건설.
시나이 반도의 서부
해안, 다마스쿠스 남쪽 시리아
레바논 현재 국경, 홍해의 동쪽 해안 에그라 지역들
2세기 경 번성했던 로마의 중요한 무역 관세
수입원.
로마 지배를 받았던 곳 보스트라(시리아 부스라앗샴)
로마 속주의 중심지이자 군단 주둔지 옛 왕도 페트라
다마스쿠스- 보스트라-게라사- 필라델피아-페트라-
아카바 만 아일라나를 잇는 도로를 건설한 로마인들
로마는
이곳 문물교류를 더욱 강화했고
동쪽의 베두인족을 지배하는 일도 강화.
3세기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라비아를
북부와 남부 속주로 구분
팔레스타인 지역 아우라니티스 트라코니티스를 포함
북부는 보즈라, 남부는 페트라를 도읍으로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합쳐진 남부 속주
357~358년 팔레스티나 살루타리스(테르티아)로 알려졌다.
두 속주에 있는 도시들은 5~6세기에 다시 큰 번영을 누린다.
632~636년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뒤에는 쇠퇴.
.......................................................
김수로왕은 기원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만약 그가 아라비아인이라면 거상일듯.
마치, 로마의 도시국가 형태를 띤 가야국.
'실크 로드
선진문명을 일찌기 깨우친듯.'
세계 4대 문명은 황허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말한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공통점
이라크 지역 함무라비 법전이 대표적 공통점
'해 뜨는 지역' '동방의
나라'인 점도 공통점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모두 강 유역 문화 공통점.
전재적 왕권, 강의 범람, 문자 사용, 다신교 공통점.
메소포타미아는 쐐기문자, 이집트는 그림 문자
메소포타미아는
태음력, 이집트는 태양력 사용
메소포타미아는 개방된 지형, 이집트는 폐쇄 지형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가 빈번한
편
이집트 문명은 오랫동안 통일국가로서 꾸준히 유지
이집트 문명은 아프리카와 유럽 문명의 연결고리.
아라비아 문명은
유럽과 아시아 문명의 연결고리.
김수로왕은 아라비아 소국의 왕자 또는 거상인듯.
......................................
......................................
아시아는 근동, 중동, 극동으로 분류.
소아시아는 아시아 근동 지역으로 추정.
근동은 유럽과 가까운 아시아 지역,
극동은 유럽과 먼 중국, 한국, 일본
등,
중동은 극동과 근동의 중간 지점의 나라.
중동 지역은 서남 아시아.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스라엘, 오만, 터키 등.
중동은 다양한 문화, 종교, 인종이 충돌,
특히, 이스라엘과 회교국 간 문제가
심각.
중동 지역은 종교도 다양하지만 주로 회교(이슬람교) 권역,
기독교(신교), 카톨릭(구교), 유태교, 등 기타 종교가
있고
중동 지역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문명이 만나는 지점.
...........대홍수(창7 : 6~12)와 노아의
방주.............
육백세 노아가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 암 수 둘씩 방주로 들어간 칠일후에
대홍수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2월 17일 40 주야 간 쏟아졌던 비
(창7 : 24) 물속에 150일간 잠겼던 육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즈음에 대홍수.
노아의 방주는 길이 125m, 폭 25m, 높이 15m.
방주를 만든
나무는 잣나무 종류.
잣나무 수액으로 방주를 방수처리.
인류 최초의 큰 배인 '노아의 방주'.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노아의 대홍수 이후 인류 최초의 높은 탑.
7층 건물에 90m 높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무렵
중동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
이후 중동지역은 차츰 사막으로 변해간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에 중동지역은 초원지대.
..............................................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아라비아(중동)인
이라면
한반도는 기원 전부터 실크로드 상인이 오간 곳.
가락국은 실크 로드 무장상인 집단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의 아라비아 상인들
중동지역의 사막에서 살기좋은 한반도로 이주.
김수로왕은 최초로 한반도에 정착한 중동인인듯.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고대 가야국 집단.
고대 인도제국은 중동 가야국을 포함한 영역.
수많은 동아시아 고대국가들이
왕래했던 인도.
특히, 불교 종주국일 무렵의 인도제국.'
1세기 경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비류 백제.
김수로왕의 가야국은 비류 백제 담로국들 중 하나.
비류 백제는 중국 한반도 일본 동아시아 해상왕국.
비류 백제는
인도 제국과도 무역교류가 잦았을듯.
가야 연맹 소국들 역시 인도 제국과 빈번한 무역.
고대 인도제국 역사 속에서 그 발자취를
찾아보자.
인도.
................................................
인도 역사는 6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인도문명의 전개과정과 관련 깊은 가야국.
김수로왕비 허황후는 인도 야후타국의 공주.
인도의
한 정치 집단이 한반도에 들어온듯.
'허왕후의 오빠' 보옥선사는 야후타국 왕자.
단순히 불교전파 목적 만은 아닌듯 추정된다.
가야국은 한반도 최초의 남방불교 종주국.
가야국은 고대 인도 제국과 관련이 깊은듯.
인도의 역사를 통해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1. 인도문명의 전개(BC 1750~AD 1200)
2. 이슬람 시대(1200~1680)
3.
무굴 제국(1526~1761)
4. 유럽의 팽창과 인도(1500~1858)
5.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1858~1920)
6. 인도의 독립
현재 인도공화국과 1947년 독립한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대륙의 역사.
....................................................
[개요]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 건조함 차단
인도 대륙 최북단을 제외하고는 아열대성 기후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은 이란, 동쪽은 미얀마,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
북부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 인도반도로
구분
인더스와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
BC 3000년 인더스문명, BC 1000년 갠지스문명
서쪽
나르마다 강은 북인도와 남인도의 경계선.
초기 선사시대
신석기시대 수렵인들이 인도대륙에서 활동
훗날
농경사회를 이루며 정착한듯 추정된다.
서부 발루치스탄에서 동부 벵골에 이르는 지역
북부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 스리랑카를
포함.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사냥과 채집에 의존
후기에 이르러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사육.
당시
수렵인들의 사냥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 범람으로 인해 확대 발전
1922년 영국 고고학자 마셜
경과 동료학자들에 의해 발견.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블록을 형성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 진흙 벽돌을 건축물 용도따라 사용.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
유적지 중 잘 알려진
모헨조다로, 하라파.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목욕탕이 발견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 바닥으로 설계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
한편 목욕탕 북쪽과 동쪽에는 방들이 줄지어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1.5m 높이
연단들이 보인다.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성소(聖所)인듯 추정.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형성.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 풍습이 다를 뿐.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
일정구역에 시신을
방치해 짐승들의 먹이
그후 유골만 다시 추려 항아리에 담아 매장
그들은 시신을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
영계(靈界)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은듯.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전후로 파괴된 듯.
최근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멸망원인은 베일속 수수께끼.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가지
학설이 분분.
1. 인도문명의 전개(BC 1750~AD 1200)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인더스 문명이 몰락후
인도문명 중심은 갠지스강과 남인도 해안지방
이 지역 중심으로
새 형태의 도시문화가 발달
이 문화의 형성 전후에 아리아인의 인도 정착.
원래 아리아인은 시베리아 남북부와
투르키스탄 유목민
이들은 BC 18, 17세기 경부터 목초지를 따라 민족대이동
아리아인들이 인도대륙에 이른 것은 대략 BC
15~13세기경.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은 처음에 펀자브 지역에 정착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으로 옮겨가며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원주민 드라비다인과 더불어 농경 위주로 정착생활을 영위
아리아인들은 카스트 제도 형성.
원주민들을 정복한
후 노예화한듯.
승려·사제 계급인 브라만(Brahman),
귀족·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평민계급인 바이샤(Vaiya),
노예계급(원주민)인 수드라(Sdra)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의지한 아리아인들
신을 찬양하고 경배한 성전이 리그베다(Rigveda)
아리아인들은 바로
오늘날 유럽 인종의 조상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 슬라브, 유럽 서양인.
<고대 도시국가의
성립>
인도(BC 500경) 번영기의 아소카 제국(BC 250경)
펀자브 지역에서 갠지스강으로 진출한 아리아인들
서서히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BC 7세기 무렵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국가들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적 성격을 띤 도시국가.
나라의 왕은 상징적인 존재였고, 실권은 부족장회의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강 동부지역에 위치
코살라 등이 잘 알려졌고 마가다국은 5만 부락을 지배.
한편 카시 왕국은 BC 7세기까지 북부인도의
강자로 군림
그후 코살라국에 합병되고,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 마가다, 남부 비데하 등이 BC 7세기 강자.
도시국가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 정복전쟁을 야기.
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은 BC 4세기 경까지 이어진다.
전쟁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
(BC 582~554 재위) 그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정책을 추구해 주변 소왕국들을 합병
대제국 기반을 닦았고 이즈음 싯달타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샤트루(BC 554~527 재위)
부왕의 뒤를 이어 계속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카시·코살라·비데하 등을 정복한
인도대륙 최강자
전성기 마가다국은 서쪽으로는 야무나 강에서,
동남쪽은 칼링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
알렉산드로스 대왕 침입(BC 327~326) 때에
난다 왕조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
<마우리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서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융합하는 계기
간다라 예술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조각 양식과
〈밀린다팡하 〉 같은 불전이 대표적 교류 흔적.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이
인도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즉 외부의 침입에 무력했던 인도인들이
새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제국 왕.
찬드라 굽타(BC 327 ~ 297경 재위).
우선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인도 평정.
계속하여
인더스강 유역에서 그리스 세력을 몰아냈다.
그는 카르나타가 남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한 셈이다.
이 통일은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서
마가다 경제적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사이슈나가
왕조 이래 마가다국의 팽창정책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인도통일은 인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통일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로부터 BC 273 ~ 232에 절정기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 때 인도 대륙을
통일.
완성된 행정조직과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통제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륙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무력전쟁에 회의,
불교에 귀의해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살생금지·비폭력
불교정신에 기초하여
국가를 자비로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한다.
그러나 마우리아 제국도 아소카 왕 사후에 몰락한다.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
다른 언어를 사용한 점 등이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아소카 왕 재임 시 잠재
그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가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
마우리아 왕조의 분열과 쇠퇴로 인도대륙은
다시 수많은 군소왕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4세기말 굽타 왕조>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종말을 고한 뒤에도,
통일 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우리아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서 평가한다.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지만,
인도 전역에거쳐 광범위하게 세력을 장악
굽타 왕조는 인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 역활.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마가다 지방의 지주 가문으로 추측
제3대 왕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 후
비로소 인도대륙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 공주와의 결혼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와의 혼인동맹
굽타 왕조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
시기가 320년 경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 동부를 지배.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준다.
찬드라 굽타 2세는 찬드라굽타 1세 손자.
할아버지
이름을 딴 군주(375~415년 재위)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
이들간의 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된다.
이것으로 서북인도가 굽타 왕조 지배에 들어가게 된 것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 지중해 연안과 문화적 교류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어 지배력을 강화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
중국의 구법승 법현이 405~411년 인도 여행기
〈불국기 佛國記〉에
굽타 제국의 평화와 번영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
굽타 왕조는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의 헤프탈족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한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왕국을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 위기도 가중되어 굽타 왕조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 민족 이동과 정치적
혼란
이 때 일어난 나라가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잠시 인도대륙 지배권을 확보
한편 남부 인도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
그후 300여 년 동안 남부 인도의 강자로 군림.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
왕실의
후원에 힘 입어 활발하게 저술.
조각 조형물과 건축물 등도 최고 수준
불행히 당시 건축물은 현재 거의 없다.
다만
불교 승원, 예배소 등이 전해올 뿐.
8세기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파괴 탓.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이때부터 힌두교는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
불교는 인도에서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
2. 이슬람 시대(1200~1680)
10세기 말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이 인도를 침입
인도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정복한 '가즈나' 마흐무드.
그의 사후에 '가즈나'를 타도한 구르 왕조의 무하마드
이들은
인도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은 델리 왕국을 건설
델리는 갠지스강 유역과 중부 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곳.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세력들은
번갈아 델리에 왕국을 세우고 술탄을 자처.
'이슬람의 왕' 술탄 왕조가 곧 델리 술탄국.
13세기부터 16세기 북인도
역사를 주도했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이슬람교도 지배자
최초로 델리에 궁전과 모스크(이슬람 사원) 및
거대한
탑을 세우고 인도에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그 후계자들이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왕조(1206~90)로서 투르크계 귀족들을 약화시켰다.
1220년 인더스강 북부
변경지방을 병합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1225년 벵골을, 1228년 신드 지방을 각각 점령
1229년 바그다드 칼리프로부터 술탄 칭호를 수여
1229년부터 이 왕조는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위세가 꺾였다.
노예왕조에 이어 1290년경 투르크계 세력집단 할지 왕조.
이 왕조는 알라 웃 딘
치세에 이르러 세력 팽창의 절정기
동인도와 데칸을 정복후, 1292년에 데바기리까지 공략했다.
자신감을 얻자 남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306년 몽골 세력이 북인도에서 물러나자
구자라트와 말와를 수중에
넣은 할지 왕조.
1310년 남인도 여러 지역을 성공리에 공략.
이제 알라 웃 딘의 영향력은 지배영역에 있어서나
그
세력에 있어서 어느 술탄국 지배자들보다도 강력.
그러나 알라 웃 딘의 야망은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
북인도
구자라트·치투르·데바기리 등이 독립을 선포
1316년 알라 웃 딘이 죽자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이다.
그는 1320년 술탄의 자리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도 역대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제국을 꿈꿨으나,
1398년 타무르의 몽골군이 인도를 다시 침입하기 시작하자
세력이 약화되고 티무르 위임을 받은
왕조들이 명멸을 거듭
술탄국의 약화를 틈타 소국들이 난립하는 시대.
13세기 말부터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1347~1527) 왕조
또한 인도 남부는 비자야나가르(1336~1646)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르는 힌두 왕국으로,
1565년까지 남인도의 지배자.
3. 무굴 제국(1526~1761)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 후예
바부르(1483~1530)
무굴 제국은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세운 (1526) 왕조.
1517년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는
인도의 역사에 등장
어릴 때 선조들의 땅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년, 1503년 2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배.
그러나, 1504년 아프가니스탄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옛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듯 영광.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라면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
악바르는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무굴제국은 북인도를 지배한다.
하여, 데칸과 벵골만 및 아라비아에 이르는
대제국 건설
한편 그는 여러 제국과 혼인동맹과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
악바르는 무굴제국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
힌두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에 공헌한 인물
무굴제국의
쇠퇴
악바르 대제가 위상을 높일 수 있던 것은
국제정치 역학상 힘의 균형이 이뤄진 때문.
그러나, 악바르가 죽자
힘의 균형이 깨진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으로 분열의 조짐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제국에게 커다란 위협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
마라타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단결
무굴로부터 독립후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확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한다.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
이후 혼란과 분열을 거듭할때
인도제국을 넘본 유럽
열강들.
4. 유럽의 팽창과 인도(1500~1858)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은 대부분
인도산.
유럽 열강의 인도대륙에 대한 주요 관심 대상은 상업적 이익.
그중에서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유럽인들 생활필수품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 후반에 2가지 위협에 직면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의 육로가 차단
더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을 받게 된 것.
당시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 도착.
포르투갈은 월등한 해군력으로 아랍
상인을 제압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1510년 동방 포르투갈령 수도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1580년 포르투갈은 1세기 간 적국 스페인에게 점령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대륙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
그러나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 식민지 쟁탈전에서 약자로 전락했다.
하여,
인도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간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안되는 동안
영국은 인도 대륙을 완전히 지배한다.
..........
인도 문화.
..........
인구 : 1,081,229,000
면적 : 3,166,414 ㎢
수도 : 뉴델리
정체·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언어 : 힌두어·영어
독립년월일 : 1947. 8. 15
공식 이름은 인도 공화국.
남부 아시아에 있는 국가.
1.
개요.
수도는 뉴델리.
국토 면적이 세계 7위.
인구는 세계에서 2위.
북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네팔·부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며
북동부는 방글라데시를 3면으로 싸고있다.
남동쪽면은 벵골 만, 남서쪽면은 아라비아 해.
남동쪽 앞바다에 섬 나라인 스리랑카가 있다.
면적
3,166,414㎢, 인구 1,047,671,000(2002 추계).
2, 자연환경.
아침 안개와 서리가
자욱한 인도의 남쪽.
지형적으로 인도는 크게 3지역으로 구분.
첫째, 인도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히말라야
해발
8,000m가 넘는 수십 고봉이 자리잡고 있다.
둘째, 갠지스 평원 100만㎢에 달하는 충적평야
셋째, 안다만 제도
러틀랜드 섬 남쪽 섬과 해안
인도양에 있는 몇 개의 군도들이 행정상으로 인도.
연방 직할주인 락샤드위프 제도는 아라비아 해
및
말라바르 해안 서쪽에 분포한 작은 산호섬 군(群).
동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상당히
크고 높아 벵골 만과 안다만 해를 갈라놓고 있다.
안다만 제도는 본토보다는 미얀마와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인도의 니코바르
제도 역시 인도네시아와 더 가까운 위치.
호수는 국토의 규모에 견주어 매우 적은 편이다.
히말라야 산맥 호수 대부분은
빙하에 패인 지형
하천은 히말라야 산맥과 데칸 고원에서 발원하는 것,
동고츠·서고츠 산맥에서 곧바로 바다로 흘러드는 것,
내륙 유역 분지로 유입되는 것 등 크게 4개 수계로 구분.
3. 기후
인도의 기후는 대체로 열대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6~9월에 습윤한 남서풍이, 12~2월에는 건조한 북동풍
이에 따라 건기와 우기가 교차되고 1년은 크게
3계절
인도는 강수량에 따라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서부 아삼·메갈라야 주, 봄베이에서 트리반드룸
서해안은
최다우지. 메갈라야 주는 세계 최 다우지.
4. 식생
인도 잠무카슈미르 코탕 고개 근처 히말라야 산맥.
남북간 위도 차가 크고 기후 변화 폭도 크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식생이 나타난다.
서고츠 산맥
서쪽의 해안지역에는 열대 식생.
코코넛·빈랑·후추·생강·고무·바나나 등,
고지에서는 커피·차·소두구 등이 주로 재배.
북서부 인더스강 유역 펀자브·라자스탄·구자라트
건조한 사막이고 갠지스강 유역은 다양한 삼림 분포.
브라마푸트라 강
유역은 키큰 풀과 활엽수림, 대나무숲
야자나무는 건조한 데칸 고원의 특산물.
동부 히말라야에서는 20종의 야자,
4,000여 종의 화초,
월계수 단풍나무 오리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진달래 대나무
서부 히말라야 고지는
전나무·자작나무·노간주나무 등이,
중간지대에서는 히말라야삼나무·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
저지에서는 살나무가 많이 발견된고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맹그로브·너도밤나무 등이 자라고 인도의 곡창지대인 지역.
벼·밀·콩·옥수수, 망고·코코넛·빈랑·감귤류 등이
생산.
히말라야 계곡에서는 사과·복숭아·배·살구·호두,
남부는 차·커피·소두구·후추·고무 등이 집약 재배.
5. 동물
라자스탄 주 동부 란탐브호르 부근 도로의 호랑이
카르나타카 주의 마이소르 부근 카바니
강에서 목욕
인도는 호랑이·표범·치타 같은 맹수들이 서식한다.
호랑이와 표범은 히말라야 산맥을 포함한 인도 전역
초원·늪지·삼림에서 볼 수 있고 치타는 사실상 멸종
인도산 외코뿔소는 아삼 주에 있는 보호구역에 400 마리
코끼리는 오리사 주에 많으며 서고츠 산맥의 정글 등.
코끼리는 산림지역에서 목재를 운반하거나 행사시 행진
들소는
타밀나두 주 보호구역에, 야생 염소는 히말라야,
야생 야크는 최북단 라다크의 고지대에 산다.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곰과
판다·담비·족제비·
수달·사향고양이·줄무늬하이에나·늑대·재칼·
살쾡이·스라소니·몽구스·사슴·영양·염소·양
가축으로
소·들소·양·염소·말·
노새·당나귀·낙타 등이 사육된다.
인도에는 400종에 이르는 뱀이 서식하고 있다.
길이가
4m 넘는 코브라는 일반코브라와 킹코브라
그밖에 살모사류 20여 종과 여러 뱀종류가 발견된다.
3종의 악어와 50여 종의
거북이 서식한다.
조류로는 독수리·매·물수리·펠리컨(사다새)·
가마우지·군함조·물총새·왜가리·도요새·꿩·
뇌조·앵무새·구관조·공작 등 약 1,200종 새들
'휘황찬란한 깃털을 가진 공작은 인도의 국조.'
6. 정착 유형
인도는 인종과 언어집단의 다양성을 반영하듯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전통적인 구역들로
구분.
인도 국민의 3/4가량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고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심지역으로의 이주현상
3,000개 도시와
60만 개 이상의 촌락이 존재한다.
캘커타, 봄베이 대도시권, 델리 대도시권,
마드라스, 방갈로르, 아마다바드,
하이데라바드,
칸푸르, 푸네, 나그푸르 등은 100만 명 이상 도시.
옛부터 '신들의 처소'로 알려졌던 히말라야 산맥
아리아와 몽골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문명의 합류지,
히말라야 산계 일대는 힌두교와 불교의 합류지이다.
인도 북쪽 끝
히말라야 라다크 고원(평균고도 5,700m)
주민은 티베트인, 불교를 신봉하며 진흙 벽돌집에 산다.
여러 층으로 올린 불교사원,
돌과 벽돌을 이용해 지은 집
라다크가 속한 잠무카슈미르 주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각각 점유하고
지형·인종·종교에
따라 3으로 구분.
북부에는 티베트 또는 반(半)티베트 지역
남부에는 넓고 평평한 잠무 지역 '길기트'
잠무
지역에는 힌두교를 신봉하는 도그라족
이들 지역의 중간 주민은 80% 이상이 이슬람교도
불교·힌두교·이슬람교 등 세 종교가
파생된 곳.
불교 사원들은 대부분 라다크 행정구 동부에 있다.
히말라야 지역 니시족·아파타니족·미슈미족·
몬파족·탕사족·완초족 등 다양한 인도몽골계
서쪽은 부탄, 북쪽은 중국의 티베트 신장 지역,
남쪽 아삼과 나갈란드는
남동쪽 미얀마와 이웃.
우기에는 급류로 변하는 수많은 하천
같은 씨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풍습.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지만
티베트 영향권은 일부다처제
< 인도갠지스 지방>
인도 바라나시에 있는 갠지스 강,
구형 범선에서 화장하는 장례 풍습
인도 라자스탄 주 알와르 궁전과 호수
우타르프라데시 동쪽 비하르 너머에는 벵골
걸출한 문인·예술가·철학자·종교인·정치인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스와미 비베카난다, 슈리 오로빈도
등이 벵골인
<드라비다족 거주지역>
인도 남부는 타밀족·안드라족·칸나다족·
말라얄리족 등 여러
드라비다족 거주지역
일처 다부제나 모계 사회제도 등 여러 풍습
안드라족은 고대부터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에 거주
드라비다어족의 4개 문어 중 하나인 텔루구어를 발전
드라비다족과 아리아족의 혼혈종족이고 힌두교를 신봉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도 상당수 존재한다.
안드라족은 미술 건축 음악 무용 문학 등 발전.
인도 고전무용인 쿠치푸디(Kuchipudy)
무용양식
인도의 그림자 연극이나 꼭두각시 놀이 발원지
경관이 뛰어난 케랄라 주에 거주하는 말라얄리족
힌두교
나야르족과 시리아계 그리스도 교도 사회
다양한 여러 사회집단 가운데 유대인 사회가 독특
그리스도교도 사회가 서해안을 따라
말라바르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 반면
유대인 사회는 코친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이슬람교도인
모플라족.
아랍 상인들의 후예인 이들은 서해안 일대에 거주.
케랄라는 모계사회의 영향이 여러 방면에 나타난다.
이
지역 여성들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자유를 누린다.
7. 종교
비하르주 가야를 흐르는 팔구 강 계단에서 목욕
기도를 올리는 인도는 세계적인 종교 발상지이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등 고유종교가 발달
이슬람교·그리스도교·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
외래 종교가 성장했지만 인도 토착 종교는 애니미즘
아직도
산탈족·빌족·곤드족 등 오지 부족들이 신봉
인도의 전통종교 중 가장 오래된, 힌두교
BC 2000~1500년경 베다시대
아리아족 종교
인도 국민의 약 83%가 믿는 국민 통합 요소
하지만 카스트 제도와 함께 인도의 분열요소
자이나교와
불교는 BC 5세기 힌두교에서 파생
인도 정복자들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이슬람교
처음에 상인들이 들여왔으나 이슬람교도
침입후
16세기 무굴 제국 건설이후 인도 전지역에 퍼졌다.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던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분리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인도 국민의 약 10%
그리스도교 일종인 조로아스터교
7, 8세기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들어온 페르시아인들이 도입
오늘날 그 후손은 주로 봄베이에 산다.
8. 자원.
인도는
광물자원이 상당히 풍부한 편
특히 석탄과 철의 매장량이 막대하다.
국토 절반이 경작지, 삼림지대가 1/4
인도는
가축수에서 세계 제1위를 차지
우유 생산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
단국.
백제 초기 한양의 이름은 '곰' '고마'
지나족 말로 고마의 어원은 마고(麻姑).
마고는
1,4000년 전 마고산(삼신산)에서 도래.
인류 최초로 문명을 전파한 전설속 인류의 조상.
마고의 후손이 오늘날 한국, 지나,
일본 등의 조상
삼신산이 있는 발해연안 사람들이 곧 '마고의 후예'
풍이, 오이, 발이, 래이, 회이, 우이
이름으로 불렀다.
동이족과 지나족이 섬긴 마고(할미)는 '구원의 여신상'
마고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모두 공유하는 여인상.
풍이족이 구려족(九黎族)으로 불리던 시대에,
구려족에서 분화한 하화족 여신 금모낭낭(金母娘娘)
훗날, 중국에서는
서왕모(西王母)로 바꿔 부르기 시작.
단군조선은 진나라에게 진시황 8년에 멸망
1차로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유민들
2차로 가야 멸망후 일본으로 간 유민들
마고 =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 = 阿麻洞窟宿
이를 풀이하면, 阿는 나라의 도읍지나 임금의 무덤,
마麻는 마고로, 洞窟은 절로, 수宿는 별로 풀이된다.
즉,‘마고를 모신 동굴 무덤을 비추는 별’이란 의미.
마고와 동일시되는 별은 베가성으로 불리는 직녀성.
베가성이란 풍이족 말로‘베를 짜는 집안 여자 별’
상고시대 절을 짓기 전 동굴을 절로 여긴 우리 조상.
아직도 그
흔적인 곰굴이나 범굴이란 옛 지명이 있다.
곰굴은 마고할미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절이었고,
범굴은 남신(할아버지 신)에게
제사지내던 절이었다.
오늘날까지 옛 절인 토굴에서 수도 하는 고승이 많다.
마고는 14,000년전 빙하기 말 혹한 속에서
생존자
인도,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자’
인류 조상 마고는 궁희와 소희를 낳고,
궁희에게서는
청궁과 황궁이 태어났고,
소희에게 백소와 흑소가 태어났다는 설.
황궁에게서 유인이 태어났고,
유인에게서 한인이
태어났고,
한인에게서 한웅이 태어났고,
한웅에게서 단군이 태어났다.
마고에서 단군까지 역사는 약 만년
우리
민족은 황궁의 후손인 셈이다.
마고는 태초 하늘에서 직녀성이고,
북두칠성에 좌정하여 곰으로 불렸다.
마고의 자손은
북두칠성의 자손인 셈.
삼각산 기슭에 소서노와 온조 모자가 백제를 세울 때,
인수봉에 우뢰가 쳤다고 하여, 한자 지명으로
위례성
당시 전세계를 지배한 풍이족을 추축으로 한 한국(桓國)
마고를 계승한 조선과 백제는 국조(國祖)를 마고로 여긴듯.
우리나라 지방마다 마고를 모신 사당이 할미당 또는 삼신당
삼각산 부아악으로 불리는 인수봉에서 마고가 출현했다는 설.
마고의 변음인 곰이나 고마를 처음 쓴 소서노(召西弩)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고,
그 아들 온조를 도와
백제를 건국.
'마고는 우리 민족 최초의 여신상.'
가야는 원래 김해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옛 불쥬신 왕손
이비는 고령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이비는 정견모주 여인을 만나게 된다.
정견모주는 산신을 모시는 그 지역 무당이다.
이비는 정견모주와 결혼해 두 아들을 얻는다.
..................정견모주
전설....................
가야산처럼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정견모주 여신
가야연맹 내의 많은 산신들이 주인처럼
높이 받들었고
백성들도 우러러 섬기던 가야산의 여신이 곧 정견모주
백성들에게 살기좋은 터전을 닦아주려던 여신
가야산 큰바위 밑에 제단을 차리고
옥같이 맑은 물에서 목욕재개 한 후에
하늘신 '이비하'의 짝이 되게 해달라 기원.
그러던 어느 봄날에, 이를 가상히 여긴 하늘신
정견모주의 소망을 이뤄 주겠다는 계시를 내렸다.
하늘신
'이비하'가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에 오자
여신도 잠자리 날개와 같은 옷깃을 나부끼며 하늘신을 맞이
뭉게구름 속에 신방을
꾸미고 가야산 정상에서 부부가 되었다.
옥동자도 둘 낳았는데 형은 '주일' 동생은 '청예'
형은 대가야국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아우 '청예'는 김해 가야국의 '수로왕'이 되었다.
................................................
..................불쥬신 전설....................
이두식 표기는 조선, 숙신, 주리진, 주신
등이다.
하여 숙신, 누, 물길, 말갈, 여진, 만주 등의 민족
모두 쥬신족과 동일한 만주일대에 자리잡은 배달민족.
'조선'의 원래 우리 발음은 '쥬신'
그 뜻은 '배달민족이 사는 온 누리'.
단군의 선조들은
태백산(불함산,백두산) 북쪽
아사달에서 일어나 만주일대에 널리 자리잡았다
숙신 :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발음은 여전히
쥬신.
여진 :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발음을 하면 쥬리진
중국인들은 옛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
뜻은 '떳떳하다','당당하다'
사기에는 '상하다',죽이다'의 뜻
동이란 '동쪽의 큰 활을 쓰는 대인'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중화족이다.
즉, 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족은 대륙 서쪽에 있다.
9천년전
동이족 한인씨가 파미르 고원 아래 세운 한국
그 중심을 바이칼 호 근처로 옮겼던 시기가 '한국시대'
그곳에서 사백력(시베리아)으로
옮겨왔던 BC 7000년 경
동북쪽의 일족은 베링해 건너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
동쪽 끝으로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들어가
왜 일부가 되고,
서북쪽으로 핀란드,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남쪽으로는 치우 천황이 티베트를 정복해 800년간
통치.
처음에는 기마민족 중화족이 내륙 화산주위에 정착.
황해 진출은 봉쇄당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역전된다.
바이칼호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은 불함산에 도착
아사달 부족장 군장회의에서 선출된 대제사장 단군.
배달
민족의 3신 = 한님(하느님), (지신), 단군
단군은 기마 민족들의 기동성으로 황하족을 제압
이때 한님의 아들 한웅씨가 스스로
천왕으로 등극.
태백산 신단수(성스러운 박달나무)아래
도읍지 신시를 세운.. 1대 한웅 거발한.
천황은
배달나라를 세우고 전 쥬신을 통치
거발한 천황 아래 전 쥬신이 뭉친 동이 9족.
그 영토는 천해(:바이칼 호)로부터
남쪽의 양자강까지 무려 남북 5만리,
서쪽의 몽고 사막으로부터
동쪽의 대해까지 동서 2만리.
BC
3898년18대 1565년 동안의 한웅 시대가 열렸다.
BC 3512년 제 5대 태우의천황 큰 아들은 제 6대 천황
5대 천황의
막내인 태호가 삼황의 하나인 복희씨이다.
BC 3240년 제 8대 천황 안부련 한웅은
강수지역의 신국(산둥반도)을
식민통치.
소전의 아들 신농은 농경기술을 발전시켜
황하족 영토를 옥토로 바꾸고 성곽을 축성.
동이족의 기마전술에
반발해 황하족이 저항.
제 10대 천황 갈고 한웅은 사신을 보내 신농씨를 문책
신농씨는 조공을 바치고 천황 영토를 침범
않겠다는 맹약
이로써 쥬신족과 중화족의 최초 국경 조약이 이루어졌다.
BC 2707년 배달민족의 불세출 영웅 자오지천황
제 14대 한웅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치우천황.
치우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모실 정도로 뛰어난 용병술
탁록으로
진격해 신농씨 후예 유망(5제중 염제)을 섬멸
하여, 공상을 되찾고 화하족 12제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동이족의
식민지배를 벗어나려는 화족
공손씨 헌원 중심 화산족과 하족이 뭉쳐 화하족
봉황을 숭배하는 대쥬신
용을 숭배하는
중화족
10년간 73회의 대전쟁.
치우천황은 청동기 무기와 뛰어난 용병술로 승리
헌원의 항복을 받아 그를 화하족
황제로 임명한다.
치우천황은 산둥반도 청구로 옮겨 불쥬신 역사를 개막.
단군은 제 18대 거불단 한웅의 큰 아들로
도읍을 청구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국호를 쥬신
이후 청구국은 치우천황 후손 불쥬신이 계속 통치
단군시대(檀君時代) :
47대 2096년
BC 2333년 백두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쥬신(朝鮮)우로 개칭하였다.
배달나라와
구분된 단기 원년의 단군 쥬신.
단군은 3신 5제를 신설해, 3경 5부제 운영
3경은 신쥬신(만주북부∼한반도
북부)의 서울 아스라(上京),
불쥬신(요하 서쪽∼양쯔강 남부)의 서울 아리터(중경),
말쥬신(요하 동쪽∼한반도 남부)의 서울
펴라.
단군을 천자로 하는 쥬신 제국은
종교적으로 수두를 중심으로 통일
통치 영역을 3 쥬신 영역으로 구분.
신쥬신은 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불쥬신은 기씨, 말쥬신은 한씨가 통치
대 단군은 3년마다 대군장 회의를 주관.
BC 2167년 단군의 태자 부루는
남국 하나라에 우씨를 파견해
중국의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또한
유주와 영주의 영토권을 분명히 하고
병주를 양보하는 부루와 우의 도산회의를 개최
BC 2221년 부루 단군은 벼농사 장려와
패엽전을사용.
BC 2183년 태자 가륵이 제3대 대단군의 천왕에 등극.
BC 2173년 소시모리 반란을 진압해 대추장이
되었다.
소시모리 부장 협야노가 삼도(일본 구주) 추장이 된다.
BC 2137년 제3대 오사구 단군에서
제21대
소태단군까지 소강상태 유지.
BC 1766년 하나라가 멸망하고 은나라가 건국.
이때 색불루 단군이 은을 정벌 속국으로
삼았다.
BC 1285년 색불루가 22 대 단군 즉위후 백악산에 도읍
BC 125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국경수비대장 신독이
반란
BC 1238년 아사달 탈환후 태자 아홀이 제23대 단군에 즉위.
BC 1250년 솔라가 제 25대 대단군에
즉위하다.
이때 서여를 단군으로 삼아 남쪽을 통치한다.
태양신의 아들 기자(奇子) 주신시대
단군기자 때는 은
말기로 중원의 주(周)나라 등장.
강태공은 은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건국하자
은의 충신 기자(奇子)는 기자 조선에 망명해
정착.
BC 909년 신쥬신 나휴천황 때 주 무왕(武王)은 조공을 중단.
BC 902년 신쥬신은 명장 고력을 파견해 주와의
전쟁에서 승리
다시 조공을 받고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산둥 진출 요지인
래국을 정벌
산둥 반도로 진출하였다.
이에 제 36대 매륵천황은 현제를 파견
대륙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패전하여
대륙의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언파불합장군의 제 1차 3도(:오늘의 일본)의 난 진압
BC 723년 제 35대
사벌단군은 삼도 구마소에 특사를 파견
언파불합장군을 보내 삼도(일본)를 평정하였다.
BC 667년 제36대 천황 매륵천황
삼도의 2차 왜란을 평정하였다.
BC 426년 제 43대 물리천황은
우화충의 반란으로 영고탑에 포위
백민성
욕살 왕수긍이 우화충을 제거
천황이 죽어 후사가 끊기자
BC 425년 제 44대 구물천황으로 즉위
쥬신 천황가의
혈통이 1908년만에 단절.
BC 425년 구물천황이 국호를 대부여라 개칭
이때 중원에서는 황하문명이 발달해 연이 강성
쥬신은 잦은 침입을 받게 된다.
BC 380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의 침입.
BC 365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이 요서를 공격.
BC 364년 제 45대 단군 여루 때 연군을 연운도에서 격파.
BC 341년 제 46대
보을천황
연나라가 보낸 간자에 의해
불쥬신의 왕 해인이 암살되다.
해인 후임을 둘러싸고 쥬신의 5제가
분열기미를 보이고 연의 침략을 받다.
그러나 연을 격파하고 볼모로 받은 연의 왕자 진개에 의해
요수를 연에게
넘겨줌으로써 천황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BC 323년 읍차 기허가 무력으로
불쥬신 왕위 임명을 받아내다.
BC 296년 제 47대 고열가가 대단군으로 즉위.
BC 283년 제 47대 고열가가 욕살에게 후사를 남기고
입산하니 이로써 단군쥬신은 제 47대 2096년 만에 멸망.
BC 238년 고열가단군 57년 해모수가 한구를 축출
고열가 대단군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자
불쥬신 영지를 차지하고 대단군위에 즉위.
BC 206년 고진(해모수의
동생)이 서안평으로 진격
불쥬신의 영지를 회복하고 고구려 후(동명왕)에 봉.
.........................................
.........................................
삼국시대의 제 4국 가야국. 제 5국 일본.
5 나라는 모두 시조를 단군 혈통이라 주장.
단국은 상고시대 동아시아 통치국으로 보인다.
'산 > 지리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이야기 - 106 (혼례길. 전통혼례. 궁합. 신랑 매달기. 신방 엿보기) (0) | 2011.02.28 |
---|---|
지리산 이야기 - 105 (칠불사. 거문고 .불교음악. 칠불암과 허황후. ) (0) | 2011.02.28 |
지리산 이야기 - 103 ( 범왕 마을. 가야사 . 변한. 商. 흑치국. ) (0) | 2011.02.28 |
지리산 이야기 - 102 ( 김해. 대마도. 통신사. 연락선. 경부선. 김밥. ) (0) | 2011.02.28 |
지리산 이야기 - 101 ( 서해. 강화도. 온돌. 느티나무. 일본 천황.) (0) | 201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