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1 ( 서해. 강화도. 온돌. 느티나무. 일본 천황.)

donkyhote 2011. 2. 28. 02:04


서해(西海)
 
 

 

 

 

 
면적 40만 4,000 ㎢,
남북길이 1,000㎞,
동서길이 700㎞
 
수심은 20~80m 정도,
최대 수심 103m,
평균 수심 44m
 
황하강에 의해 운반된 중국 내륙지방의 황토 때문에
바닷물이 항상 누렇게 흐려 있어 황해라고도 부른다.
 
동쪽 중국해와 경계는 제주도와 양자강 하구 연결선
북쪽은 랴오둥 만(遼東灣)과 산둥 반도를 잇는 연결선
일반적으로 보하이 만[渤海灣]까지를 서해 범위로 본다.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 계절풍이 강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남서풍이 약하게 분다.
 
안개는 봄에서 초여름까지
섬과 해안 돌출부 주위에서,
 
여름에는 해저 냉수괴(冷水塊)가 남아 있는
경기만 북쪽에서 남해연안까지에서 발생한다.
 
표면수온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여름 25~27℃ 내외, 겨울 2~8℃ 내외.
 

신생대 제4기의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빙하기 해수면은 현재보다 100m 이상 낮아
서해는 중국 대륙과 연결된 평탄한 육지였다.
 
이후 해빙기에 해수면이 높아져 바다가 되었다.
서해의 해저에는 한국과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사퇴가 형성되어 있고, 양자강 하구에 사퇴가  발달.
 
따라서 양자강 하구에서 300㎞ 해역에 이르기까지
수심이 30m 정도에 불과하며, 서해의 수심의 축은
한반도 서해안 쪽으로 치우쳐 125° E선을 따라 형성
 
서해 어장은 수심이 얕고
조류가 급해 바닷물이 혼탁
 
플랑크톤이 동해의 1/2 이나,
하천에서 유입되는 영양염류 풍부
대륙붕과  섬들이 많아 어류의 산란장
 
특히 봄에 수온이 올라가면
조기 갈치 가자미 병어 가오리
넙치 민어 등 회유어 족들이 북상,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수온이 낮아지기 때문에 난류성 어족이 남하.
 

서해안의 대부분은 조차(潮差)가 매우 큰데,
아산만과 경기만은  약 8.6m로 최대 조차지
 
서해안의 조차는 인천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남포 6.2m, 용암포 4.9m, 군산 6.2m, 목포 4.1m
 
서해안의 높은 조차를 조력발전에 이용할 경우
한국의 잠재 조력자원은 161.7만kW로 예상된다.
 
서해는 조차가 커서 얕은 해안의 해협이나
반도의 첨단부에서는 급격한 조류가 나타나
옛부터 연안 항해에 큰 위협이 되기도 했었다.
 
한반도와 중국 간에는 BC 300년 전부터  해상 교류
최근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협력교류가 확대되면서
서해에 대규모 방조제가 축조되고, 공업단지가 조성,
항구시설의 확장되고  영종도에는 대규모 국제공항
 
동북 아시아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서해.

 

서해가 바다로 변한 시기는 언제일까?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에 의하면

하룻밤에도 수십리씩 물에 잠겼던 서해.

서해는 그전까지는 저지대 육지였던 곳.

 

 

 

 

 

강화도




우리나라에서 간만의 차가 가장 극심한 곳.
서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참성단
참성단은 단군 성역이자 일종의 천문 관측소.

'단군이 7선녀와 함께 신선이 되었다는 곳.'

한반도가 농본사회였을 때 강화 일대는 김포평야.
단군의 고조선 세력에게는 중요한 곡창지대였을듯
서해가 저지대였을 때 동아시아 정치세력의 중심지.

'거대한 고인돌군이 있는 선사시대 유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하는 강화도(江華島)
한강 하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5번째 큰 섬.
주변에 약 15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는 강화도.

예전 3개 섬 간척지를 연결한.. 하나의 섬.

1970년 강화대교(694m)가 건설되어 육지와 연결
곳곳에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아 안보 사적 관광지
면적 293㎢, 해안선 길이 99km의 아름다운 섬이다.

서해가 저지대였을 때 육지로 이어졌을 강화군.

고대사회 인천에서 김포평야까지 선진문명 발상지.
1995년 경기도 강화군 전체가 인천 광역시에 통합.

예로부터 강화군은 한양에 인접한 관문으로서,
고려시대 몽고침입과 이조시대 병자호란·병인양요·
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

삼국시대에 강화군은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
〈대동지지〉에는 백제의 갑비고차현(甲比古此縣).

이는 많은 문헌들이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가 남하정책으로 중부지방을 점령
그 이후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이곳을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
한주(漢州: 현재 광주)에 예속시켰던, 영현은 수진현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고려 도읍을 강화로 옮겨
지군사로 승격, 1270년 개성 환도까지 38년간 도읍

이조시대 1413년 도호부로 승격.
1618년에 부윤(府尹)으로 승격,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
환도 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어 청나라와 강화.
숙종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 강화 내성·외성 등을 축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성을 함락하여
약 1개월간 머물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함정
잠시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함락했던 역사가 있다.

1876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나
일본과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이조 후기 서양세력의 물결이 밀려오는 창구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군으로,
1896년 부, 1906년 다시 강화군이 된다.

강화군은 섬으로 이루어져 교통이 매우 불편했으며,
이조시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었던 유배지

강화 고인돌, 사적 제137호,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선사시대의 유물 유적이 많다.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동막리의 고인돌
불교유적으로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 경내 대웅전
약사전·범종,·삼산면 매음리의 보문사의 석실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하점면 장정리의 5층석탑
하점면 석조 여래 입상, 화도면의 정수사 법당
선원면 강화선원사지, 강화읍 고려궁지 강화동종

단군신화와 관련된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

철종이 살던 곳에 세운 강화읍의 용흥궁(龍興宮)
특히 참성단에서는 개천절 행사와 성화 채화의식

'역사의 섬' 일 만큼 풍부한 유물·유적
강화군 특산물로 알려진 인삼·화문석 등.'

중요한 민속놀이

출항·입항과 관련된 시선뱃놀이,
논에 물을 공급하는 용두레질놀이.

설화

〈손돌목이야기〉·〈마니산전설〉·〈
벌대총이야기〉·〈모로도전설〉 등


민요

성을 쌓으며 부른〈터 다지는 노래〉
〈한강시선뱃노래〉〈강화도아용타령〉




온돌.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아궁이를 통해서
땔감에 의해 받아들인 열을 구들장에 저장
서서히 복사열을 방출해 방을 데우는 난방.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든 구들 고래.

중국에서는 '항'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구들.
온돌과 항은 그 외형과 재료에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구조와 방법이 동일하고 원류도 같다.

난방을 위한 화덕, 용호동 제1호분 출토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3호분 부뚜막과 아궁이.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
취사 난방 시설은 신석기인들 주거에서 비롯된듯.

신석기인들의 주거는 움집[穴住居]으로
중앙 가까운 곳에 냇돌이나 판석을 돌리고
진흙으로 둑을 쌓은 화덕에서 불을 사용했다.

이 화덕은 취사용 화덕이지만
난방과 야간 조명도 겸했던 듯.

두만강 유역 서포항 유적.. 집자리 9호

여러 화덕 자리는 취사용과 난방용을 분리
청동기시대(BC 1000~300) 움집은 주거 형태
화덕 위치가 신석기시대와 달리 움막의 벽쪽

2개의 화덕은 취사용과 난방용을 구분한 흔적.
함경북도 회령 오동 제2기 집자리 8호에 두 화덕
동남쪽 화덕은 방바닥을 파고 둘레를 쌓은 막돌 8개

재가 차 있던 것으로 보아 항상 불을 피운 취사용
서북쪽 화덕은 방바닥 위에 진흙으로 둘러싼 난방용.

철기시대(BC 300~AD 1) 일반주거는 움집
움 안에서 ㄱ자형 구들의 유적이 발견되고
난방시설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 같다.

수원 서둔동 주거지의 난방시설은
움막 북벽에 길이 30㎝인 얇은 흙벽돌
30㎝ 간격으로 양면에 세운 터널형 구들

서단에서 서벽을 따라 굽어져 아궁이를 만들고
동단에서 벽에 붙여 높이 쌓아 지붕 위로 굴뚝.
ㄱ자형 구들의 아궁이가 취사와 난방을 겸한 듯.

원삼국시대(AD 1~300) 움집·귀틀집·고상주거
추운 지방의 경우 철기시대 나타난 ㄱ자형 구들
남부지방에서는 ㄱ자형 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시대 ㄱ자형 구들이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전파

고구려는 삼국 중 한반도 북쪽과 만주의 추운 지역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일찍부터 취사와 난방시설이 발달
안악3호분 부엌칸 벽화를 보면 독립된 부엌 1채와 부뚜막

연기를 빼는 굴뚝이 측면 벽에 뻗어 있어
부뚜막은 난방용 아궁이와 독립되었던 듯.

<구당서〉 동이전(東夷傳) 고려 기록에 의하면
일반 주택에서는 장갱(長坑)을 건조시켜서 난방

장갱은 이조 온돌처럼 방 전체가 구들이 아니며
철기시대의 ㄱ자형 구들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이 사용한 장갱
처음에 서민의 난방수단으로 쓰이다가
후에 귀족계급까지 전파되어 널리 사용

백제의 난방시설에 대한 기록

유적·유물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철기시대 서둔동 주거지가 백제지역
백제에서도 고구려 장갱이 널리 퍼진듯.

중국문헌에서는 장갱으로 표현
<삼국유사〉에서는 돌로 표현되
훗날 온돌로 이어져 전파된 흔적.

부소산성 내 제 3 건물지 구들과 부뚜막

고구려 ㄱ자형 구들이 일직선 구들로 변화
고구려처럼 실내 아궁이는 구들과 직각방향

신라의 난방시설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

〈신당서〉 동이전 신라 기록에 겨울에는 옥내 부뚜막
여름에 밖에서 취사한 기록으로 보아 온돌이 있었던듯.
통일 신라시대는 경주 기와집에 숯을 많이 사용한 기록.

고려시대 장갱과 같은 ㄱ자형 구들과 마루 구조
취사와 난방시설의 기틀이 잡힌 시기로 추정된다.

〈고려도경〉 권28 공장1조와 탑조의 기록

귀족은 와탑(臥榻)을, 서민층은 대부분 흙침상
땅을 파 구들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했다.
여기에서 장갱을 화갱 또는 토탑(土榻)이라 표현

최자의 〈보한집〉에 의하면 13세기 초 구들
아궁이가 방 밖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로의 〈동문선〉 공주동정기 기록.

겨울에 욱실(室), 여름에 양청(凉廳)
구들을 놓은 방이 널리 축조되었으며
이런 방을 욱실이라 했고, 도배로 마감

온돌과 부뚜막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들
거의 없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온돌의 발달은 부뚜막의 발달을 가져온듯.

부뚜막과 온돌방 아궁이가 겸용으로 된 것
필요에 따라 이를 구분하여 축조한듯 추정.

이조 때는 고려 온돌을 계승하여 초기부터 온돌
온돌 용어는 고려시대 욱실이란 용어를 병행 사용
'구들항'이라는 한자표기로 이조 초기 이름은 온돌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부르고,
이외에 장갱·난돌(煖突)이라는 용어도 사용

온돌의 발달은 온돌방의 마감, 장판법 발달을 초래
영조 때 장판 마감에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하였다.

이조 부엌에 만들어진 온돌 아궁이는취사용 부뚜막

대가(大家)에서는 반빗간(음식을 만드는 곳)을 독립
안방 아궁이에 부뚜막을 만들지 않고, 방 아래 아궁이
위층에 누마루를 놓아 안방마님의 여름거처로 이용했다.

'창덕궁 금원의 연경당 안채가 그 사례.'



느티나무.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교목.
우리나라 전역 마을 어귀 시원한 그늘
그 밑에 정자가 있어 '정자나무'라 한다.

나무 모양이 거꾸로 된 3각형처럼 보이며,
굵은 가지가 줄기 밑부분에서부터 갈라지고
키가 약 30m까지 자라며 오래된 고목이 많다.

잎은 가을에 황금색 또는 윤기있는 구리색 단풍.
꽃은 5월에 새 가지 잎겨드랑이에서 암꽃과 수꽃
수꽃은 새 가지 아래쪽에 피며 암꽃은 위쪽에 핀다.

수꽃에는 4~6장의 꽃덮이 조각과 4~6개의 수술
암꽃은 가지마다 1송이만 달리는데 암술대 2개
암술은 1개이고 둥굴고 평평한 열매가 익는 10월.


해가 잘 들거나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며,
생장속도가 빠르지만 가뭄이나 바닷바람에 취약.
자동차나 공장에서 나오는 배기 가스에 쉽게 피해

뿌리가 깊게 자라지 않으며 가뭄에 약해
옮겨 심을 경우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
공원 가로수, 기념수 넓은 정원에 심는다.

재목 결은 약간 거칠지만 재질이 강하고 질겨서
뒤틀리지 않고 무거우며 무늬와 광택이 아름답다.

또한 잘 썩지 않으며 물에 잘 견디어
농기구 자루나 가구용 또는 건축자재
요즘 분재용 식물로도 널리 가꾸고 있다.

이른봄 어린 잎을 따서 떡에 섞어 쪄서 먹는다.
'줄기는 강인한 의지, 가지는 질서, 잎은 예의.'
옛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마을 나무로 심어왔다.

은행나무와 함께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우리나라에서 1,000년 이상 고목이 60 그루
천년 고목 60 그루 가운데 느티나무가 25 그루

대부분은 천연기념물 또는 보호수로 지정


고목들은 저마다 나이 만큼의 나이테.
비가 많이 온 해에는 나이테가 더 넓고
기후가 가물었던 해에는 나이테가 좁다.

나이테가 넓은 해에는 기후가 습해 전염병.
천년 간 기상변화를 읽을수 있는 천년 고목.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를 대변한다.

우리 민족이 저지대 민족 임을 알려주는 느티나무.
숯의 원료 참나무, 대들보 소나무와 더불어 향토수종.


덧 말.

일본 오사카 성 중심부에 있는 옛 천황 궁전.
그곳 사각 정원은 분명한 백제의 정원 양식.
그 정원 한가운데 한 그루의 고목 느티나무.




일본 천황.



2001년 12월 일본 천황궁에서 열린 기자회견.
아키히토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관해 중대 발언.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속 일본기 기록은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일본인들에게는 권위의 상징이요, 신성한 존재
전에도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대해 몇차례 언급
이번에는 천황가의 혈통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일황의 발언은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일본인은 만세일계라 주장하며 천황가를 신성시
'만세일계'란 대륙 피가 섞이지 않은 일본 혈통

'칸무천황의 어머니는 과연 누구일까?'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 시에 백제왕 신사.
옛날부터 백제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신사.
백제왕 신사는 8세기 중엽 쇼무 천황이 건립

칸무 천황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성지.

옛날에는 칸무 천황이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아 와서 임시거처로 사용
백제인들이 학문을 천황에게 가르치던 곳.

건립 당시 오사카 일대에서 규모가 큰 절 중 하나
당시 화려했던 건물들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곳.
의자왕 후손 경복은 불상 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기부

백제왕 신사에서는 매년 한차례씩 궁중아악을 연주
칸무천황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쿄토.
8세기 말부터 11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평안경.

794년 수도를 쿄토로 옮기고 평안경 시대를 연 인물
제 50대 칸무천황은 지금도 교토인들의 존경과 사랑.

칸무천황은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일본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내세웠다.
그가 궁궐 북쪽에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그곳이 바로 히라노 신사.

어머니 고야신립을 포함해 천황이 모신 조상신
백제인 어머니 혈통을 소중히 여겼던 칸무 천황.
백제 25대 무령왕과 같은 시기 일본에는 칸무천황.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 태자
순타 태자 직계 후손 중 화을계
화을계는 일본 조정 기록을 담당.

그 딸 고야신립은 49대 광인 천황에게 시집갔고
고야신립과 광인천황 사이에 태어난 이가 칸무천황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왕실이 혼인관계.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 발굴한 백제 고분.
백제 제 25대 무령왕 무덤에서 수많은 유물들.

이 유물들은 백제의 수많은 비밀들을 알려준다.
그 유물 중 주목할 것은 무덤 입구의.. 묘지석.
무령왕의 나이와 사망한 해가 기록된..묘지석.

62세 되는 계묘년 523년 5월 7일에 사망.
462년에 태어난 백제왕의 출생연도가 확인
무령왕이 생전에 불리워졌던 이름은 사마왕.

그 시기에 일본 서기에 사마왕의 이름이 등장.
사마왕 출생지로 전해지는 곳은 축자의 각라도.
일본 후쿠오카의 북쪽에 가까라시마 섬이 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길목.. 각라도.
약 100 호가 사는 작은 섬에 얽힌 무령왕의 전설
무령왕이 처음으로 목욕해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마을 어귀에 해양동굴이 자리잡고 있다.
동굴 안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제단.
이 동굴이 바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곳.

약 1500년 전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잦았을 때
항해도중 산기를 느끼고 가까운 각라도에서 출산
그곳에서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

북쪽 언덕에 오르면 눈앞에 보이는 이끼섬
가까라시마와 이끼섬은 한일을 잇는 일직선상
한반도에서 밀려온 부유물들이 눈에 띠는 섬이다.

가까라시마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중간 기착지.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던 도중에 태어난 무령왕

'그렇다면 당시 무령왕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서기에 출생직후 본국으로 보냈다는 기록.
그런데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령왕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마흔 살
무려 40년의 세월이 베일 속 수수께끼.
무령왕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추적해보자.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옛부터 국제항구 난파진.

현재 오사카의 중심부에 있는 역사박물관.
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나니와궁 영상 화면.
1300년 전,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

나니와궁이 있는 오사카는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
현재 오사카항에 해당하는 난파진은 당시 국제항.
이 지역에서 발굴된 백제계의 고대 유물들이 많다.

오사카는 4세기나 5세기에는 늪지대였다.
5세기 백제 토목 관개기술자이 관개시설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았던 백제인들

5세기 후반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
대마도 큐슈를 지나 일본 내해를 거쳐 난파진.
바로 이 5세기 후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자

곤지 일행의 항로도 이와 같았을 듯.

곤지 일행 흔적이 있는 곳은 오사카 아스카베 신사.
신사 안내문 기록 = '이곳 조상신은 백제의 곤지왕'
곤지는 일본에서 15년 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곤지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야쓰코
그 이름으로 일본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

백제계 아스카베씨가 조상인 곤지를 기리는 신사.
3천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은 아스카베 신사.
곤지 신사가 위치한 아스카 지역은 백제 무덤군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들은 백제식 토기.
수많은 고분 아스카베 천총은 곤지 후손의 무덤.
전형적인 백제의 무덤 양식인 횡혈식 석실 형태.

곤지가 461년 일본 열도를 건너가서 적어도
15년은 가와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한 흔적들
무령왕은 가와치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던듯.

무령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무령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군사로 백제를 공격.
백제는 개로왕과 왕족들이 살해되는 큰 패배

이무렵 왜의 한왕이 중국에 보낸 편지.

그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왕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쓰여있다.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개심

모든 정황이 백제 개로왕의 죽음과 일치.

편지를 쓴 왜왕은 당시 일본에 머물던 무령왕
따라서 왜왕 무는 개로왕의 태자(개로왕의 왕자)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오사카부 하시모토시 신사.

청동거울에 9명의 왕족들이 새겨진 인물화 상경.

거울 바깥 둘레 명문에는 '사마' 라는 글씨.
사마는 곧 백제의 무령왕을 뜻하는 듯 싶다.
503년 사마왕이 일본 남제왕에게 보낸 거울.

그 거울을 갖고간 개중비직
일본 기내지방 왕 다음 권력자.

사마왕이 환국한 직후에 만든 거울
직씨에게 거리낌없이 명령하는 걸 보면
사마왕은 개중비직과 가까운 위치였던듯.

사마왕은 일본에서 왜왕 위에 있었다는 사실
그 거울을 만든 경위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고대의 거울은 상왕이 하왕에게 주는 신임 표.

'무령왕이 왜왕이었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
오사카 일대는 지금도 수많은 백제의 유적지들.
그만큼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고장.

당시 이 지역엔 야마토 왜라는 고대국가.

무령왕 시대에 일본은 여러 왜국이 공존
여러 왜국 중의 하나가 바로 <야마토 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이고 천황가의 계보

고대 이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백제인
무령왕이 왜왕으로 머물던 야마토 지역
한때 일본 야마토 왜를 지배한 백제인들.

그렇다면 천황과 백제인은 어떤 관계일까?

천황들은 민달 천황의 조상이고 후예.
그러므로 민달 천황이 곧 백제인인 셈.

우에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신찬성씨록
"대원진인의 선조는 백제왕이라 쓰여있다.
그리고 시마네노 마히토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것은 비다츠 천황을 의미하는 듯.
일본 30대 비다츠 천황은 백제 왕족

비다츠 천황이 즉위한 572년, 일본서기
천황이 즉위한 달에 백제 대정궁 건축.

현재는 논과 연못으로 변해 버린 백제사
원래 3만평방미터의 규모의 거대한 사찰.
백제궁은 백제왕사라고 하는 사찰의 서쪽

조메이 천황은 일본 최대 탑을 건축.
그 옆에 백제사와 백제궁을 짓고 거주
장례의식도 백제대빈 백제 풍습의 3년상.

일본 야마토 왜가 문화의 꽃을 피운 아스카.
고대문화 중심지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사.
이곳에선 1300년 전 불사리 안치식이 거행됐다.

큰북과 작은북을 치는 백제인들의 행렬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사건
663년 8월 백제군과 왜군이 참전한 전투
전 백제왕족 복신은 일본에 지원군을 요청.

아스카를 출발한 사이메이 천황
오사카 나니와궁에서 만반의 준비.
천황은 지원군 파병하고 무기를 마련

군사를 이끌고 나니와에서 하카다로 이동.
백강구를 향한 2만 7천 지원군과 4백척 군함.
백제의 왕자가 왜군과 탐라 국사를 함께 인솔

'일본 천황의 조상은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