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2 ( 김해. 대마도. 통신사. 연락선. 경부선. 김밥. )

donkyhote 2011. 2. 28. 02:06


김해(金海).




김해는 전기 가야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영역이다.
전기 가야문화의 구심점은 김수로왕이 이끈 가야국.
부산을 포함한 김해는 가야국 유물 유적 흔적이 많다.

'신라가 이곳에 소경을 설치하며 명명된 <김해>.'

수로왕은 물론 가락국 사람들은 알 수 없었던, 김해.
김해(금바다 란 뜻)는 756년 신라의 작은 수도, 소경.
500년간 번창하던 가락국 이곳에 <김해 소경>이 설치.

1896년 김해군으로 바뀌었고,
1981년 7월 -1일 김해시로 승격
김해군과 김해시가 분리되었던 곳

1995년 5월 10일 양시·군이 14년만에 통합
경상남도 중추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김해 일대에서 가야 유적 흔적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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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각 지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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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읍

설창리는 현종 7년(1666년) 국가 납세물 보관창고
인근 화포천까지 강물이 밀려왔던 곳이라 전해온다.

현재 읍소재지 여래리는 옛 절터였고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진영(陣營)의 형국

금병산을 상제봉조형(上帝奉詔形)으로 보고,
여래리 동쪽은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
하여, 가야 주거지가 처음 형성된 산마루 선달바우.

최초 가야인글의 배가 도래한 곳인듯 싶다.
'선달바우'는 그러한 유래를 품은 이름인듯.


장유면

장유는 오랜 역사의 향기가 깃들어 있는 고장.
허황후를 따라왔던 김수로왕의 처남, 허 보옥.
이곳 장유산에 절을 세우고 오래 머물다가 입적.

'훗날, 그가 장유불 또는 장유화상(長遊和尙)'

지금 대청리 장유사 경내에 사리탑이 있고
그 연유로 장유촌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고,
유하촌을 유지앵소(버드나무의 꾀꼬리 집)

명당 자리가 있기 때문에 버등으로 불렀고,
능동마을은 가락국의 어느 왕능이 있던 곳.

능동의 일부는 신라 말기부터 향, 소, 부곡
특수 부락의 하나로 절미향이라고 불렀던 곳.

이보다 앞서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까지
주거지터 수가리 가동마을과 유하리 하손마을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무계리의 지석묘(고인돌)
일제시대에는 김해 서부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현재,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는 장유면.


진례면

경상도지리지(1469)에 의하면 부서 진례촌(府西 進禮村)
가락국때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進禮城主)로 봉했다
통일신라 말에는 진례성 제군사(諸軍事)가 이곳을 지켰다.

열두계곡이 청천(晴川)에 모여 북쪽으로 흘러 '열두청내'


회현동

가락국 시대 '정절의 여인' 여의(如意) 낭자.
그 이름을 본딴 여의 고개가 여우고개라 변음.
여우고개는 다시 호현(狐峴)으로 바뀌게 된다.


구산동

허왕후의 능과 가야의 탄생설화가 깃든 구지봉.


경우개

옛날 허씨 3형제가 여기에서 공부했으며,
1921년 삼우정을 지었는데 지금은 수인사.


경원교

대성동과 연결하는 다리로서 1992년 준공했다.
이 다리에서 대성동 3거리까지의 길을 구지로.

당산할머니

1통의 새 각단에 있는 바위너덜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은 형국이다.
매년 정월 초 3일 이곳에서 당산제.


우암

소바위이며, 쇠바위(金岩)가 소바위가 된듯.
소(牛)같이 생긴 바위 형상을 따서 우암(牛岩).


임호산

유민산 가조산 호구산 안민산 봉명산.
임어산 약산 등 여러가지 별칭이 있다.

대부분 호랑이 형상같다고 임호산이라 부르며
호랑이의 벌린 입이 너무 험악하다고 하여 악산
(호랑이는 인도제국을 상징하는 토탬신앙의 대상)

장유화상이 호랑이 입이 되는 곳에 절을 세워
백성을 평안하게 했다고 안민산이라고도 부른다.

가락국 9대 겸지왕때 여의낭자와 정혼한 황세장군
왕이 유민공주의 부마로 삼았으므로 여의와는 파혼

여의낭자는 상심 끝에 죽고
황세 장군도 뒤따라 죽었다.
여의낭자가 너무 그리웠던 탓.

유민공주도 경운도사를 따라서
임호산에 들어가 입산수도했으므로
산 이름을 유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지봉

구산동 1구에 있는 조그만 독메산. 일명 개라봉
가야국 시조 수로왕 탄생지이며 탄강비가 있는 곳
수로왕이 탄생할 때 9간이 불렀다는 '구지가' 본향.


논실


대성동 2구 본부락. 김해시 최초 부락
수로왕 때 신답평(新沓坪)이라 불렀다


애구지

대성동 2구 논실 윗편 터로.. 일명 새끼 구지봉
대성동 고분군이 있는 곳이라..일명 대성동 고분군

...........가야 연맹국................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5소국(아라국, 고동람국, 성산국 비화국 ?)
후백제 처럼 가야국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듯.
가야 연맹체 소국들은 무려 10 여국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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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국은 어떤 성격의 정치집단일까?
가야 연맹국 유물 유적지를 통해 알아보자.

...........................김해 가락국의 섬유 역사...................................
<삼국지>에는 변진이 “뽕을 재배 누에를 쳐 '겸'과 '포'를 생산한 기록.
<겸>은 실크류의 고급 직물인데, 중국 한나라 지배신분 계층의 외출복
<광폭의 세포>는 마 종류인 <경마>로 짠 섬세한 직물인 고급직물이다.

<능>은 얼음결 무늬가 있는 얇은 천.
허왕후가 시집올 때 능현(綾峴)에서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친 기록

겸포나 능에 버금가는 수준의 직물로는 면포.
면포는 품질낮은 고치를 부풀려 만든 누에 솜
물레로 자아 만든 실로서 두텁게 짠 포를 뜻한다.

견직물보다 품질은 떨어지나 질기고 실용적인 직물.
또 고운 베 직물이 있다면 거친 베 직물도 있었을 것
3세기에도 직물 짜는 기술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

6세기에 가야금을 만들려면 끊어지지 않는 '현'은 필수.
현은 소리의 고저에 맞도록 굵고 가늘게 만들어야 한다.
즉, 현악기를 만들려면 섬유기술이 맞물려 따라야 한다.

섬유는 쉽게 부식되어 고분에서 출토된 예가 희귀,
고령 지산리 32호분 금동관을 감싼 섬유조직 발견
고령 지산동 44, 45호분에도 직물흔적이 남은 왕릉
가야의 직조 기술은 나중에 왜(일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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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역엔 순장 고분이 많아 가야의 사회 구조를 알려준다.
순장이란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때 노비 동물을 함께 묻는 제도
이집트, 중국에서 행해졌고 영혼불멸 내세사상에서 비롯된 관습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 시킨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의 순장고분은 신라, 가야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그중 대부분 가야 것인데 출토된 최대 규모 순장고분을 살펴보자.

...........가락국의 <지산리 44호분 다곽순장묘 내부>................
묘역 중앙에 주인공이 안치된 주실과 2개의 부장품실을 만들고,
이 석실들을 감싸듯 원주상이나 부채살 모양으로 32기의 순장석곽

순장자는 순장곽에 32인, 주실의 주인공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1인.
2개의 부실에 1인씩 2인을 합하여 모두 36인이 순장된 것으로 추정.

순장자들의 유골은 50대 남성도 있고, 20대 여성이 있는가 하면
한 순장곽에 성인 남녀의 머리를 반대로 두고 합장 한 것도 있다,
10 세 정도의 여아만 합장한 것, 성인과 여아를 합장한 것도 있다.

이들의 신분이나 역할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순장자의 유물과 매장된 위치를 통해 대략적인 추정은 가능.

주실의 순장자는 금제 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로 치장.
이들은 주피장자인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근신으로 추정.
부장실의 순장자는 창고 지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순장곽의 순장자들도 말재갈과 같은 마구, 낫과 같은 농구,
직조 도구인 방추차, 화살촉, 창, 칼과 같은 무기를 갖고있다.
마부, 식량 생산인, 직조인, 호위무사 등의 맡은 직분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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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先史時代)란 문자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
고려 문종 30년(1076)에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
가락국의 건국을 42년으로 기록할 즈음이 선사시대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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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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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김수로왕을 시조로 섬기는.. 김해 김씨.
경주 김씨와 더불어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찾이하고 있다.

'김해 김씨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구형왕 9년(AD529)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고 금관가야를 공격.
구형왕 12년(AD532)에 신라가 금관가야에 침범하니 항복했다.
구형왕 42년(AD562) 신라 진흥왕이 침범하니, 항전 끝 항복.

진흥제 23(AD563)년 가야가 모반하니
이사부에 명해 치게 해 항복하게 한다.
가락국은 창건 520 년 만에 신라에 합병.

서기 40년 경 변한의 땅에는
나라 이름과 임금제도가 없었다.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9간 대표가 통치.
백성들은 산과 들에서 각각 집단을 이루고 고기잡이와 농사가 생업.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 형태가 발전하자
공동체 생활을 위한 국가 형태의 필요성.

금관가야가 창건한 시기는 서기 42년이다.
신라 유리왕 19년이고 백제의 다루왕 15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에 한반도는 삼국시대.

그해 3월 (계浴日: 음력 3월첫 뱀날인 삼월 삼짇날.
액을 물리치기 위해 목욕재배하고 회음하는 풍습날.

9간 대표가 시냇가에 모여 통치자를 뽑으려고 회의 중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며 오색찬란한, 서광.
그 아래 자주빛 밧줄에 묶인 분홍빛 보자기에 쌓인 금합.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금합 안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9간 대표들은 상의 끝에 금합을 아도간의 집에 모신다.
다음날 아침 다시 아도간의 집에 모여 금합을 열어보니.. 놀라운 변화.
여섯개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여섯 동자 모두가 용모가 준수하고 거룩.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화생한 동자는 10 여일 후에는 키가 9척이요,
얼굴은 용안, 눈섭은 八자, 눈은 중동의 신비로운 용모를 갖춘 대장부.
9간 대표들은 놀라고 기뻐, 엎드려 절을 올리며 그 달 보름날에 즉위식.

그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니
그가 바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김씨 성은 금알, 어휘를 수로라 한 것은 먼저 화생한 까닭.
이에 시조 대왕은 국호를 대가락이라 정하고 그 수도를 김해.
나머지 다섯 분도 각각 차례로 영토를 정해 분봉하였다고 한다.

아라 가야 (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함안),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5 가야국이 탄생.

김해 김씨.허 씨. 인천 이씨는 동본이고 같은 혈족이다.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는 가락국 시조 대왕의 혈족.
즉 허씨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모계의 성을 따랐던 특색.

시조 허왕후는 왕자 열 분을 낳으셨다.
시조 대왕은 태자에게 왕통을 잇게 했다.

두 왕자는 머나먼 이국에 출가해 온 어머니.
허황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의 성을 계승.

가락국이 신라와 합친 후 김해에 남아 김해 허씨이고 그 시조는 허염.
하양에 이주한 하양허씨(河陽許氏) 시조는 호장(戶長) 허강안(許康安).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양천 허씨의 그 시조는 허선문이다.

모든 허씨들은 김해 김씨로부터 갈라졌으므로 가락국의 왕손.
가락국 역사가 끊긴후 각각 사방으로 흩어졌진 곳에서 정착하며
그 고장을 관적으로 삼았는데, 인천 이씨는 허씨로부터 갈라졌다.

그 시조는 고려 때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다.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안록산의 난' 때 당 현종 피난길에 동행.
위기의 현종을 보필한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이씨 성을 받게된다.

이 허겸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자
고려 왕이 소송현개국후로 봉하고
이 허겸에게 인천 이씨로 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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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대 단오절과 추석 풍습'
가락국 풍습에서 비롯된듯 보인다.

김수로왕은 김해에 처음 가락국을 창건한 통치자.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 같은 그의 출생 설화.
'9척 장신에 중동의 신비감을 갖고 있다는 그의 외모.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전설 속 야후타국 공주.
야후타국은 석가모니 탄신국 가야에서 10km 거리.
가락국은 나라가 형성되기 전 9족장이 다스린 부족.

가야 부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역사는
기원 전 4000 년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낙동강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유물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1세기 초 한반도에 정착한 인물.
최초의 가야 부족은 서해 저지대 원주민들이 아닐까?

서해는 만년전 빙하기에 중국과 이어진 육지.
한반도는 중국 양자강과 황하강 유역의 하류.

가야국이 해상왕국인 이유는 서해항로를 잘 알기 때문.
저지대였던 서해 바다 속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가야국은 기원 전후에 제철 기술을 보유한 해상무역 집단.

하여, 도시국가 형태를 이룬 가야연맹 소국들.
그 유물 유적지 도시들이 김해 부산 안동 인천.
차례대로 찾아가 옛 가야의 흔적을 찾아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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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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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신석기시대는 약 7천∼5천5백년 전이다.
기원전 5천년간은 김해의 선사시대로 추정된다.
한반도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2∼10세기에 시작
남해안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경에 꽃을 피운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나눠지는 김해의 선사시대
김해의 청동기문화는 구간사회에 김수로왕부터 꽃 핀다.

...........................김해의 신라시대...........................
가락국은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고려 건국후 신라 패망
신라의 삼국통일 100 년 전, 김해는 신라의 금관군으로 편입
신라는 가락국의 제철 기술을 관장하겠다는 의지로 붙였던 이름.

신라 문무왕은 680년에 금관소경으로 이름을 고쳤다.
김해 지방은 군에서 작은 도읍지로 승격한 셈이 된다.
철(金)과 해상(海)왕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김해(金海)

문무왕이 김해지역을 작은 도읍지로 정한 이유는 같은 핏줄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명왕후의 子.
문명왕후는 가락국 10대 구해(형)왕의 증손인 가락왕실의 후예

김해에서 신라 개막을 알리는
<구산동 백운대 고분> 유적지.

가야의 돌덧널 무덤에서 비롯된
백제 신라의 돌방무덤으로의 변화.
김해 지배층에 큰 변화가 일어난듯.

532년에 가락국이 신라에 통합.
백운대 고분은 새로 만든 무덤
신라의 개막을 알리는 유적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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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김해..............................
1393년 이성계가 전국 각도에 수관(首官)을 설치.
경상도에 계림, 안동, 상주, 진주, 경산, 김해 등.
1413년 각도의 관명을 고치면서 김해도호부를 설치

1459년 세조5년 김해진관 설치(웅천, 완포(진해) 2 현
행정적으로 창원 칠원 함안 고성 거제 진해 웅천을 통제.
김해부의 행정은 정 3 품의 부사, 사법은 종 5 품의 판관

교육은 종 6품의 교수가 맡았고,
부사는 6방을 두어 실무를 담당.
김해부사 아래로 <면>, <리> 편성.

면에는 면임 집강 풍헌 등으로 불린 면장.
리에는 동수 동장 존위 등으로 불린 이장.
향리들과 협의, 자치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1489년 현령, 현감, 진사를 역임한 5명의 향정을 구성.
태종이 유향소를 폐지할 만큼 지방자치제였던 영남지역.
유교의 교양과 인격을 밑바탕으로 덕치주의적 지방자치

지방에서 ‘어르신’의 위치란
이조의 통치체제 전통에서 비롯.

1421년 세종3년 경상좌도 수군도안무처치사
대마도 정벌 때 얻은 왜선 34척을 개조한다.

대마도 정벌은 세종1년(1419) 이종무에 의해 단행.
낙동강 김해는 그 배를 묶어두었던 중요한 곳이다.

1407년 삼포 개항 이전부터
구랑촌 수참에 있었던 왜관.

고려 때 김해에 있었던 왜관
이조 때 대일 외교지역 김해.

1485년 성종16년 녹산 금단곶
돌성을 쌓았던 군마와 소 목장.

고려 말∼조선 초 왜구침략 방어책으로 정비된 봉수
남해안에서 서울로 전해지던 김해의 성화야봉수(녹산)
분산성봉수(시내) - 자암산봉수(진영) 봉화신호의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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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1510년 중중5년 4월

제포(내이포, 웅천)·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삼포 일본 거류민들
쓰시마 도주와 내통
삼포왜란을 일으킨다.

제포를 함락시킨 왜인들이
웅천성(진해 웅동)을 포위.

김해부사 성수재는
너더리 고개(세산) 넘어
현감 한윤과 함께 협공 작전.

이 때 왜적에게 큰 타격을 준 부대
돌팔매를 특기로 하는 석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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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석전놀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의하면,
김해 풍속은 강하고 간결함

매년 4월 8일이 되면 아동들이
읍성 남쪽에 모여 석전을 연습,

단오 날이 되면 청장년들이
좌우로 나뉘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돌을 비오듯 서로 던져
죽거나 다쳐도 후회없을 만큼 승부욕

수령도 차마 금할 수 없을 만큼
김해 사람들의 기백 넘치는 전통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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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과 김해평야........................
낙동강의 삼국시대 이름은 황산하, 황산강, 황산진.
이조 시대에 와서 낙동강 낙수, 가야진으로 불렀다.
고려, 이조시대에 낙동강은 영남지방 특산물 운송로
가락국 영토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낙동강.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동일대는 구석기시대 유적지
구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돌망치 등의 석기가 발견된 곳.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두만강으로 유입.
3세기 중엽에 진한과 변한에는 모두 24개의 국가.
1세기 무렵 변한과 진한은 철기시대를 맞게 된다.

울산, 동래 지방의 제철유지등이 철기시대의 역사
김해식 토기와 사천, 진주, 고성, 밀양, 동래의 패총,
지석묘, 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 철검, 철제 유물

낙동강은 남쪽 대마도와 일본과의 교통무역에 수로.
일본 - 낙동강 - 조령 - 충주 - 한강 - 한성 = 교역로.
이 왕래의 깃점 낙동강 하구 '삼포'는 무역거래 요충지.

왜인에게 수참을 설치하여 편의를 준 곳이 '삼포 동원동'
현재 부산특별시 북쪽 온천지역이 많은 동래구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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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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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구석기시대 유적은 웅기의 굴포리, 공주의 석장리,
제주도의 비레곳 동굴 등 수십곳이 있고 전국적으로 분포.
부산은 기후가 좋고 산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해운대 청사포 좌동 신시가지의 구석기 유물(사냥돌, 격지)

신석기 패총은 동삼동(東三洞), 조도(朝島), 영선동(瀛仙洞),
다대동(多大洞), 암남동(岩南洞), 금곡동 율리(金谷洞 栗里),
녹산동 범방(菉山洞 凡方) 등등 모두 강가나 바닷가에 위치.

시베리아, 몽고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같은 계통으로 보인다.
처음 한 갈래는 랴오뚱반도 서해안을 통해 남해안으로 유입.
뒤에 들어온 다른 갈래는 동만주로부터 동해안을 거쳐 동삼동
따라서, 부산 지역의신석기문화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한반도 남해안의 신석기 문화는 부산을 중심으로 형성 되었다.
이곳을 통해 일본의 북구주 지방의 신석기문화와도 밀접한 교류.
신석기 문화는 5000∼6000년 전 시작되어 약 3000년 지속후 소멸.

부산에서는 영도 동삼동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게 되었고,
뒤이어 이웃한 조도, 영선동, 다대동 등에서도 취락들이 형성
가장 늦게 암남동, 금곡동 등에서도 집단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점차 해안선을 따라 낙동강 하류쪽으로 퍼져 나갔을 가능성.

약 3000년전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청동기 문화권 민족은 농경문화를 겆고 만주를 거쳐 들어왔다.
그들은 빗살무늬 토기권을 정복하고 동화된 한반도 민족의 주류.

부산은 한반도의 최남단이라 청동기문화의 유입이 조금 늦었다.
청동기시대 유물 및 유적지는 구서동, 온천동의 금강공원, 장전동,
금사동, 거제동, 사직동, 수영동, 부곡동, 낙민동, 대신동, 괴정1동,
괴정2동, 감천동 등등 내륙 구릉지로 옮겨가며 전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동삼동과 금곡동에서는 신석기 말기에 이미 초기 청동기 유물.
부산은 청동기 유물을 찾지 못했을 뿐 문화가 뒤늦은 것은 아닌 듯 하다.

부산 청동기 문화는 일본의 야요이 문화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1세기 전후에 부산의 청동기 문화는 삼국시대로 계승 발전

기원전 1세기 ∼ 3세기까지 대략 300년 간을 철기문화의 꽃이 핀다.
괴정동, 동래, 청학동, 전포동, 범천동, 하단동, 신평동 등등 유적지.
특히 동래 조개무지 야철 시설은 부근에 있는 사철을 채집 제련한 것
여기서 만든 철은 수영강을 통해 왜, 낙랑(樂浪), 대방(帶方)에 수출

부산 낙동강 하류에서 생산된 철은 가야문화 발전의 촉진제가 된 듯.
복천동, 연산동, 반여동에 밀집된 고분을 보면 동래 일대가 문화중심.
삼국시대 이전 부산은 가야 문화권인 거칠산국(장산국 또는 내산국)

거칠산국은 "거친 뫼"란 뜻이며, 지금 양정동 뒷산인 황령산의 옛이름.
동래는 중국식 지명이며 변진 24국의 하나인 <독로 - 동네- 동래> 설.
동래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 거칠산군을 중국식 지명으로 고친 것.

절영도의 목마장은 통일신라 무렵 이후부터 유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절영도(현재 : 영도)는 명마가 빨리 달려 '명마를 사육하는 섬'이란 의미.
태종대는 신라 태종 무열왕이 와서 사냥하고 유람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

동래는 고려시대에 목욕만 하면 병자도 낳는다고 알려진 곳이다.
고려말 부산은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곳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부산포 (富山浦)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태조 6년(1367)에 동래에 진(鎭)이 설치, 태종 5년(1405)에 동래현
세종 22년(1440)에 일본인들 내왕이 빈번, 명종 2년(1547)에 도호부
1655년 동래부에 독진을 설치, 숙종 16년에는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
영조 15년(1739) 부사가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임을 한다.

고려말부터 계속되는 왜구의 창궐은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태종 7년(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항해 교역 허용
왜구 피혜가 크자 세종 원년(1419)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

일본이 사죄하자 세종 5년(1423)에는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항
동왕 9년에는 울산 염포까지 개항하니, 이른바 삼포의 개항시대.
부산포에 설립된 왜관의 변천을 보면, 태종대에서 중종 5년(1510)
경오왜변 이전까지는 부산포왜관 (현재 자성대 부근으로 추정된다),

선조 36년(1603)에는 절영도왜관(현 대평동)
선조 40년(1607) 두모포왜관(현 수정동 일대)
1678~ 고종 13년(1876) 초량왜관(현 용두산)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전관 거류지로 바뀌었다.
부산 동래는 한반도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였다.

즉 금정산성은 이조의 대표적 성곽이었으며,
지금의 수영만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
부산진은 부산진영, 육군은 동래부사가 관장
해군은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이 관장하였다.

19세기 중반이후 이조는 내적으로 봉건사회의 위기
외적으로는 구미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1866년 프랑스함대의 강화도 침범으로 병인양요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야기되었다.

1875년 일본의 군함 2척이 부산항에서 무력 시위를 전개
1876년 일본은 운양호 포격을 구실삼아 군함 7척으로 위협.
1876년 2월에 이조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890년(고종 27)에는 독립된 관서로서의 감리서(監理暑 )를 설치
1895년 5월 1일 폐지후 이듬해 8월 7일 재설치(현 봉래초등 자리).
1884년 7월 청은 초량에 영사관과 청관을 설치후 감리서원이 간수.
청일전쟁에서 패배후 청의 토지, 가옥은 일본 소유로 전부 넘어간다.

1883년 영국은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 영선산 일대에 바다 매립공사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후 일본은 동년 11월 을사보호조약 강제 체결
일본전관 거류지가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일대 11만평에 설치한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인 부산항 매축, 토목, 철도, 도로공사
1902년 7월~ 1909년 8월까지 초량과 부산진 앞바다 37만평 매축.
1925년에는 진주에 있던 경남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여 옮겨왔고,
1936년 제1차 행정구역 확장(서면, 암남리)으로 면적이 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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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낙동강 하구에 퇴적층이 쌓여 발달한 김해평야.
면적 약 130 km 제곱. 넓이 약 6~12 km. 길이 약 20 km.
부산 북구(낙동강 하구 삼각주)와 강서구 가락동 일대 평야

낙동강은 구포역 북쪽 2 km지점 안막리에서 갈라진다.
하구 부근에는 저습한 일웅도(日雄島) ·을숙도(乙淑島)
현재 철새 도래지 갈대밭 삼각주는 매년 면적이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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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항구로 일본과 교역창구 역할을 했고,
6·25 전쟁 때에는 임시 수도로서 국가 보위의 기능
1960년대 이후 동양 굴지의 대표적인 국제항구로 부상

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공업도시
지난 30년간 급속한 인구증가로 교통난·주택난 등이 심각

동래를 중심으로 해안과 강변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
내륙의 구릉지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유적들이 발견
일찌기 인간의 거주가 동래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거칠산국(居漆山國) 또는 장산국
79년(탈해왕 23) 신라가 이곳을 공격하여 거칠산군을 설치


1749년(영조 25) 동래부에 독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강화
동래부의 별호는 봉래(蓬萊)·봉산(蓬山)·내산(萊山)이었다.
이조시대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水軍節度使營)을 비롯
부산포·다대포·두모포·개운포·포이포·서평포 등 수군 기지.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최초의 개항장이 부산포
1877년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일본·중국·영국 영사관이 자리
1950년 6.25 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였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노면전차도 개통되었으며,
경부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경부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해상교통은 국제여객선인 페리호가 시모노세키를 주 7회,
부산-오사카, 부산-고베, 부산-하카타를 취항하고 있으며,
정기연안여객은 제주·거제·통영·여수 등 총 13개 항로

강서구에 위치한 김해국제공항에는 국내선과 국제선이 취항

금정산성, 부산 동래구와 부산진구에 걸친 삼국시대 석축산성,
범어사, 부산 금정구 청룡동 복천동고분군, 부산 동래구 충렬사,
동래 온천동, 송시열 이하 임진왜란 때의 문화재 국보, 보물 다수.

선사시대 문화재로는 구석기시대 청사포 유적
신석기시대 동삼동·영선동·아치섬·암남동 패총
청동기시대 노포동·반여동·온천동 등지의 주거지와
감천동지석묘의 분묘, 동모2점, 동파두·마제석검 등

복천동고분군·연산동고분군·반여동고분군·
오륜대고분군·두구동임석유적·서동토광묘 등,
유물로는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보물 제598호).

삼국시대 창건된 범어사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

무형문화재로 동래들놀음·수영들놀음·대금산조·
좌수영 어방놀이·동해안 별신굿과 수영농청놀이
동래학춤·동래지신밟기·충렬사제향, 부산농악
다대포후리소리·가야금산조 등이 지정되어 보존

천연기념물 범어사 등나무 군생지, 낙동강 철새도래지


민속놀이는 윷놀이·연날리기·연등놀이 등
노동요로는 〈모찌기노래〉〈논매는노래〉 등
의식요로는 〈지신밟기〉·〈성주풀이〉 등.

설화로는 〈범어사 창건 이야기〉, 성지곡·
신선대에 대한 문헌설화와 동래정씨 시조묘,
동래온천에 대한 구비설화 등 다수가 전한다.





대마도(對馬 : 쓰시마).




대마도는 3세기 위지 왜인전의 기록처럼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겨우
새나 사슴이 다닐 정도로 평지는 얼마 없다.

2006년 현재 인구도 약 1500명 정도.

대마도는 우리나라 남단에서 약 53km 떨어진 위치,
일본 큐슈 본도에서 제일 가까운 나고야에서 147km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해상에 떠 있는 섬.

남북 72km,동서 16km, 면적 714km2
섬이라기 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

백악(518.2m),원견산(375.5m),홍엽산(328.6m) 등
높은 산들은 남쪽에 있고 전 섬이 무수한 산의 연속
그래서 산과 계곡 일부 해안 지대에서만 농사가 가능.

그러므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자연환경
어떻게 삶을 꾸려갈 것인지가 대마도의 생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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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왕조의 비극을 떠오르게 하는 대마도.
1919년 10세 옹주는 대마 도주 아들과 결혼
강제 결혼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고종의 딸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사망.

창경궁의 후원이었던 곳이 비원.
그곳 별궁이 왕실의 거처 낙선재.
창경궁에서 낙선재로 쫓겨난 왕실.

1904년 '비원'으로 불리우며
낙선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된 순종은 1926년 43세에 운명.
순정효황후는 그후 43년간 홀로 비운을 달랜 낙선재
1910년 한일합방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춰 쥐고 통곡.

숙부 윤덕영에게 옥쇄를 빼앗긴 통분을 겪었던 왕비.

그 아들 영왕 이은도 1963년 귀국때 실어증에 기억 상실.
7년 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운명.
1920년 일본의 4대 귀족의 19세 규수(개명 : 이방자)와 결혼.

낙선재는 이조 최후의 왕손들이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였다.

'이조는 어쩌다가 국권을 뺏긴걸까?'

일본이 대륙 진출 발판으로 삼았던 대마도.
일본의 경제적 지원으로 일본 영역이 된 섬.
미국이 극동 진출을 위해 일본을 교두보 삼듯.

해상무역이 활발한 삼국시대부터 요충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징검다리 외교술.
임진왜란 후 친일본 정책으로 돌아선 대마도.
지금은 일본 영역이 된 옛 우리 영토인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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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는 열도.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속한 5개의 바위섬
가미아가타[上縣]와 시모아가타[下縣]가 큰 섬.

행정 중심지는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

일본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만든 최초의 섬 중 하나
대마도는 역사상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중계지 역할.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다이묘(大名) 소씨(宗氏) 봉토였다.
1274, 1281년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 대량 학살.
1861년 이 지역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다 실패로 끝난 러시아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
러시아 발틱 함대는 이곳에서 참패.
총면적 705㎢, 인구 50,810(1980).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

대마도 원정은 고려 창왕 때와 이조 태조 때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李從茂)의 정벌.

대마도는 토지가 좁고 척박해 고려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 곡물을 받아갔다.
이조는 그들을 회유하려 통상편의 및 우대.

그러나, 기근이 들면 해적이 되어 해안을 약탈
우리나라에서는 몇차례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명나라행.
도중에 이조 비인(庇仁)·해주(海州)를 침입.

당시 대마도에서는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그뒤를 계승한 직후였다.

이조는 왜구 창궐이 대마도 신도주 선동이라 하여,
1419년 6월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삼아
삼남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으로 마산포를 출발

대마도 두지포(豆知浦)에 상륙, 전도(全島)를 수색해
왜구의 배 127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왜구를 소탕했다.

그후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수색을 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복병을 만나 패했으나
우군절제사 이순몽의 활약으로 왜구를 무찔렀다.

당시 일본은 규슈[九州] 제후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
이조의 원정군은 전도를 토벌할 수는 없어 그해 7월 회군.

세종 1년이 기해동정(己亥東征) 또는
기해정왜역(己亥征倭役)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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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규슈와 한반도 사이에 위치하며,
후쿠오카에서 147Km, 부산에서 53Km인 위치.
옛부터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

일본과 한반도 중개무역이 대마도 영주의 재정기반
한반도와 일본의 외교 관계가 곧 대마도의 사활문제
이조는 한때 대마도 영주 소씨에게 왜구 감시를 요청

그 댓가로 이조는 대마도주에게 무역상 특권을 부여

임진왜란으로 한일 양국 관계는 한때 단절되었으나,
대마도는 몇차례 사신을 파견해 국교 정상화를 도모.
양국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후

대마도 영주 소씨는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한일 협상을 위임받고 무역 독점권을 획득.
대마도 영주는 한일 간 외교문서를 변조한다.

이는 쌍방 타협점 모색 및 중개역할이 목적.
양국은 국서 변조가 드러나도 눈감아 주었다.
일본에게 중개자 대마도 영주는 중요한 존재

한반도에서도 대마도는 전략적인 요충지.
하여, 옛부터 대마도는 한일 간 징검다리.
한일 간 무역, 외교, 항로 등의 중개 역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진기지였던 대마도.
대마도는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의 교두보'.
임진왜란 전까지 한반도 영역이었던 대마도.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본에 가까워진 대마도.
이조의 몇 차례 대마도 정벌이 원인이 된듯
세종 때 대식국 상인 교역처를 대마도로 국한.

'사실상, 대식국(아랍) 상인 국외추방 정책.'

이조는 차츰 국제무역 외교 정세에서 고립.
대마도는 한반도보다 일본에 더 가까워진다.
원래, 이조 영역 대마도는 일본 영역이 된다.

대마도는 원래부터 한반도 영역일까?
아니면, 일본에 속한 속국 이었을까?
한반도와 일본 소속이 아닌 소국일까?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까지
저녁 배를 타고 부산에서 술마시고
영화보고 놀다가 이튿날 돌아갔었다.

이후 오랫동안 끊겼던 부산∼대마도 간 뱃길
1999년 정기여객선 운행으로 대한해협은 활기
서울∼부산 고속철도(KTX) 개통으로 반나절 거리.

서울에서 오전 6시 KTX로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 여객선으로 정오 대마도 도착.
최북단 대마도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다.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 없는 동물들
이 섬의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이조 범종
대마도에는 쓰라린 민족 역사의 현장들이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
그를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 순국비,

이조 숙종 때 조난당한 역관 108명 역관사비,
“왜놈 음식은 먹을 수 없다”는 최익현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 가문에 출가한 덕혜옹주

덕해옹주 (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
땅이 비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섬
그런데 일본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

대마도로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세종실록 기록)

16세기 이조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대마도는 언제 왜인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및 이조 지도 상 우리나라 영토.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
백두산이 머리, 태백산맥은 척추
영남 대마와 호남 탐라(耽羅)는 양발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하가 만든지도.
팔도총도라는 지도에 대마도는 이조 영토로서 표기.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내린 구당관과 만호 관직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으로 대마도 정벌.

1436년 대마도 식량사정이 어렵자
도주 소우 사다모리는 이조에 상소.
대마도를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

이조는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
대마도의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18세기 초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
그의 해유록(海游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
대마번이 이조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백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 류큐왕국
대마도도 이조와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을 요구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이러한 배경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맥아더 장군에게 손을 내민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바다에 '이승만 라인’
어업구역을 설정해 침범한 일본 어선을 붙잡았다.

재일 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 일본 주민들
‘한국이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감.

이조는 임진왜란 이후 해금정책과 '공도정책’

그 때문에 대마도를 복속시킬 기회를 놓친 이조.
국운이 쇠퇴할수록 점점 더 강화되었던 해금정책.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은 일본으로 넘어간다.




통신사.



이조가 일본 바쿠후(幕府)의 장군에게 보낸 공식사절단.
1603년(선조 36) 도쿠가와(덕천가강) 바쿠후 때 12회 파견
이조 창건 이후 1592년 임진왜란까지 62회에 걸쳐 사절 파견

사절단 명칭은 통신사 외에 회례사, 통신관, 경차관 등등.
반면, 왜 사절단 이조 입국 횟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 이유는 양국간 사절파견의 근본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무역을 중심으로 한 절박한 경제문제로 이조에 입국
이조는 왜구의 침략을 정치와 외교적으로 방지할 목적이었다.
이조와 일본 사이에 본격적인 외교 전개는 임진왜란 이후였다.

1607년 이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國書)에 대한 회답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게 하기 위한 외교.
일본의 정세를 직접 방문하여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목적이 컸다.

1617(광해군 9), 1624년(인조 2)의 사절도 회답 겸 쇄환사.
일본과 상호 정치적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즉, 이조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외교 당사자로 여기지 않았다.

아직은 그가 일본의 실권자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636년 임진왜란 이후 양국간의 통교의 계기가 되었던 국서
그당시 개작(改作)된 사실이 드러나며 커다란 현안으로 등장.

이조는 그해 청나라 침략을 받고 일본과 화친을 적극 추진.
몇 차례 도쿠가와 정권에게 재침 의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
또한 임진왜란이 40년 경과했으므로 전쟁포로 쇄환문제 소멸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대마도주의 통신사 파견요청에 호응
한편, 일본도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 국제정세에 적극 대응
외교를 통해 정권의 권위를 과시해 일본 국내 토호세력을 결속.

1636년 이조는 일본과 대등한 외교란 뜻에서 통신사 명칭을 사용
양국 간 사신 파견과 접대를 둘러싼 갖가지 절차와 내용을 공식화.
이후 통신사는 일본 바쿠후의 장군이 교체될 때마다 파견되었는데,
이조는 이를 내면적으로 정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는 기회로 이용.

즉 이조는 도쿠가와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며 일본의 동요를 진정
외교 안건을 해결하고 일본의 정보를 수집해 대일정책에 이용했다.
하여, 1811년(순조 11)까지 9회(회답 겸 쇄환사 포함 12회) 파견.

대마도주가 일본 막부의 장군교체 사실을 알려주면 통신사 파견
통신사는 이조 예조(禮曹)와 대마도주의 연계 속에서 준비되었다.
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을 포함 500명

통신사는 막부에게 보내는 국서와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서계
바쿠후 장군에게 보내는 국서는 이조 국왕 명의로 되어 있었고
대마도주, 일본 관리에게 보내는 서계는 예조참판·예조참의 직명.

통신사는 한양-부산-쓰시마 섬-에도 왕복 5~8개월 소요 일정.
한편, 일본 바쿠후의 통신사에 대한 접대는 대단한 규모였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를 경호한 대마도 군사 1,300명이 동원

대마도와 에도 사이에서 직접 접대를 맡았던 다이묘는 33명
그밖에 통신사 행렬이 지나는 지방마다 하루에 3,000명 동원.
바쿠후는 이조 통신사에 대해 국빈으로서 융숭하게 영송했다.

1811년 통신사는 에도가 아닌 대마도에서 국서교환으로 변경.
이는 이조-중국-일본 사이의 국제관계가 다시 재정립된 결과.
상대적으로 양국 정부간 교류의 중요성이 감소된 상황이 반영.

또한 통신사에 소요되는 경비지출이 양국 공통의 문제점.
일본 지도층 지식인 계급에서 이조에 대한 멸시의식 팽배.
결국, 일본이 이조를 식민지화하는 불행한 관계로 진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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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과 한일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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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 문물제도를 근대 국가형태로 개혁.
일명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 외세 배척운동인 동학농민운동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조 조정은 청일 양국에 원병을 요청
그러나, 동학 농민군 진압후 양국 원병은 한반도에 주둔했다.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공동으로 이조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
청의 거절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청일전쟁이 발발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 결과 이조는 일본이 지배
그 사실을 인정해 주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
이조에 대한 기존 청국의 영향력은 완전히 제거된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이조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
이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할 발판을 만들려 한 탓.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일파를 축출
김홍집 중심 온건개화파 친일정부를 수립해 국정개혁을 단행.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

'이조 정부는 교정청 독자개혁을 한다는 이유로 거절.'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 조약’(경술국치)
서울 남산 조선통감 관저 터가 발견된 문서.
최근까지 국가안전기획부 관할지역이었던 곳.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男爵林權助君像)
이곳이 일제시대 통감 관저 자리임을 보여준다.

하야시는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주도
1936년 희수(77살)때 이곳에 세운 동상

동상 판석이 놓인 바로 옆에 있는 500년 수령 은행나무
이 일대가 일본의 통감 관저였음을 증명해주는 증거이다.
통감 관저가 한일 합병 장소라는 기록은 몇 군데 남아있다.

1934년 경성부에서 펴낸 <경성부사> 2권 154쪽에 보면
양국 전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
총독(합병 전 통감) 관저의 한 방에서 병합 조약에 조인.




연락선.



가슴 아프게 / 남진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초량 - 영등포) 철도 개통.
철도 개통에 이어 일본과 부산을 잇는 연락선 연결
철도와 철도를 연락한다 해서 여객선이 아닌 연락선.

동경에서 서울까지 기차표 한장으로 오갈 수 있었다.
관부 여객선은 1905년 9월 개통, 11월 매일 1회 출항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으로 중국 요동반도를 차지.
노일전쟁(1904∼1905) 승리로 만주의 철도를 양도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대륙침략 발판을 굳히고 이조와 을사조약.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 하루에 두 번씩 출항하는 선편
1908년 12만 명, 1912년에 약 20만 명(1,416회 취항) 이용.
1912년 지금의 연안부두는 1912 지금의 제1부두(국제 부두)

1913년 출입인원은 총 31만8천명이었다
한국행 20만 3천명, 일본행 11만 6천명.
한해 9만명 일본인이 조선과 중국에 잔류

1922년 종전의 여객선은 화물선으로 교체.
1937년 중일전쟁 도발할 병력과 물자 수송.
식민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의 사전조치.

1940년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7천 5백톤급 운항.
시속 16노트로 11시간에서 7시간 30분으로 단축.
1941년 7천9백톤급 天山丸과 崑崙丸을 증강 취항.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탄광의 광부로,
부두의 노무자로, 일본행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강점 후 10년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은 70만 명

이들 가운데 약 40%는 경상남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자리가 없어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중일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전환될 무렵
징용, 보국대, 징병, 학병, 정신대(挺身隊)
본의 아닌 타의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45년 8.15 광복이 후 연락선은 사라지고
미군 통제 아래 일본인 귀환민 수송만 담당
그 일이 끝나고나자 연락선 운항이 끊어졌다.

1964년 부산과 오사카(大阪) 사이 아리랑호 운항.
1970년 부관(釜關) 페리호(3,875톤)가 다시 운항.

관부 연락선에는 민족의 비애와 고통이 점철
가수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사랑 이야기

윤심덕은 여류 성악가이자 명성을 날리던 여배우
김우진은 목포 갑부 아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
희곡 문학을 전공한 끝에 '극예술협회'를 조직한 사람

두 연인은 김우진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여 동반자살.
1926년 8월 3일 일본에서 돌아오는 관부 연락선에서 투신.
윤심덕이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 '사(死)의 찬미'.


- 사(死)의 찬미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윤심덕[尹心悳]
...............


1897 평양 ~ 1926. 8. 4 현해탄(玄海灘).
본관 파평. 호 수선(水仙). 성악가. 배우.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년간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

그해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1921년 동우회 주최 국내순회공연에서 만난 김우진
1922년 음악학교 졸업후 조교로 1년 근무후 1923년 귀국.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 재직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명성.

당시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대중가요,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

1926년 여동생 성진의 미국 유학길을 배웅차 일본행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하고 귀국길
김우진을 만나 겐카이나다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이는 신극운동 때의 유명한 연애사건으로,
박승희는 이 사랑을 주제로 공연한〈死 승리〉

이바노비치 작곡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
윤심덕이 직접 노랫말을 쓴 〈사(死)의 찬미〉
그녀가 죽고 난 뒤 더욱 유명해진 노래이다.




경부선[京釜線]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길이 444.5㎞의 복선철도.
서울을 기점으로 천안-대전-대구-부산 등을 연결

1901년 8월 20일 일본 자본으로 설립한 경부철도주식회사
서울 영등포와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각각 공사를 시작해
1904년 12월 27일 완공했고 1905년(광무9) 1월 1일 개통되었다.

경인선은 경인선에 이은 우리나라 2번째 철도.
일본이 침략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부설했기 때문에
공사 진행시 우리나라 관민의 저항과 반대가 심했다.

그밖에도 용지매수분쟁, 결빙과 홍수, 화폐차이 등 어려움
1902년말까지 서울 쪽에서 51.5㎞,부산 쪽에서 53.1㎞만 완성.

그러나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본은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하려
무리한 일정을 강행해 서둘러 공사.

경부선이 개통되자 경부선과 일본의 철도가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매개로 연결되었다.

1906년 경의선 개통으로
1908년부터 부산-신의주 간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

1931년 일본이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수송량이 늘어나자 1936년부터 복선공사를 시작해
약 8년 동안에 거의 모든 노선을 복선화했다.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 기간 동안
이민자가 귀국하거나 전쟁으로 피난갈 때
경부선은 주요 교통 수단이었다.

또 1960~70년대 경제개발시대에 농촌 인구가
서울로 몰려들 때도 주로 경부선을 이용했다.
경부선은 현대 한국사회 인구 이동에 큰 역할.
1974년 서울-수원 전철화, 일부 구간 복복선화.

여객 수송량은 전국철도 중 가장 많으나
화물 수송량은 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경부선에는 모두 84개의 역이 있으며,
노선간 운행 횟수는 서울-수원 간이 많고
다음으로 수원-대전 간, 대전-부산 간이 많다.

서울에서 경인선·경의선·경춘선·
서울교외선·중앙선·지하철과 연결

천안에서 장항선 및 안성선,
조치원에서 충북선,
대전에서 호남선,
김천에서 경북선,
대구에서 대구선,
삼랑진에서 경전선,
부산에서 동해남부선과 연결.

철도 부설 목적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지금은 국토의 대동맥으로서 남한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곳곳의 대도시 지역을 지선(支線)으로 연결해
시간상 국토 공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
철도.
........

1880년대 이후 서양문물의 도입과 함께
철도에 관한 지식과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1889년 이조 정부에서 철도부설 문제를 논의

1894년 일본은 한일잠정합동조관의 체결로
이조에서 실질적인 철도부설권을 확보했다.

이조에서도 민족자본으로
철도사업을 할 필요성을 깨닫고
박기종 등이 대한철도회사를 세워
1899년 서울-의주 간 철도부설 허가
그러나, 국내 자금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1899년 일본이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제물포-노량진(지금의 영등포) 간
33.2km 구간을 개통, 1900년 한강철교를 준공
지금의 서울역까지 연장했다.

이를 계기로 철도부설권을 장악한 일본은
1901년부터 경부선을 건설하기 시작해
1905년 서울-초량 간이 개통되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력과 군수품 수송을 위한 군용철도로
간선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해,

1905년 마산선의 마산-삼랑진 간이 개통되었으며,
1906년에 경의선의 서울-신의주 간이 개통되었다.

이로써 경부선과 경의선이 이어져
남북종관철도(南北縱貫鐵道)가 완성

1911년에 압록강철교가 완공되자
1912년 부산-장춘 간 직통열차 운행
1913년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과도 연락

경부선과 경의선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
국제철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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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옛날부터 물품교역 수로였다면
경부선은 낙동강을 대신한 화물운송 수단.





김밥.




징기스칸 군사의 비상식량은 말 안장에 깐 육포.
3개월 분 비상식량을 깔고 열흘만에 고려를 점령.
그것도 추운 엄동설한에 침공한 그 원동력은 육포.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 비상식량은 청국장.

1940년대 태평양 전쟁때 발전한 일본군 김밥.
쉽게 상하지 않게 식초를 넣은 김초밥을 개발.
전세계를 정복하려 했던 일본의 원동력은 김밥.

..................김의 유래....................
<경상도지리지>에 우리나라 토산품으로 기록된 김.
<동국여지승람>에 전라남도 광양군 태인도 토산품.
특히, 김 양식업에 관해 구전되어 오는 몇 이야기.

섬진강 하구에서 떠내려오는 김이 붙은 나무토막
경남 하동의 한 할머니가 발견한후 처음으로 양식.

360년 전 관찰사 수행원이 가르쳐 주었다는 양식법
인조 때 태인도 김여익이 표류해온 김을 보고 양식

여러가지 설로 보아 이조 중기에 양식을 시작한듯.
정월 보름에 김밥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풍습
김에 비타민 A 성분이 많아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
.................................................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된 김.
김여익은 1640년(인조 18) 태인도(太仁島)에 들어 와
처음으로 해의(海衣 : 김)를 양식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1714년 광양현감 허담은 김여익을 추모하고
김 양식 보급에 대한 업적을 기린 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나, 오늘날 그 비문만 전해져 온다.

태인동 궁기마을에 있는 김여익의 묘역과 사당
1987년에 기념물로 지정, 1992년 김시식 전시관,
1999년 옆마을 용지마을에 김시식지 유래비 건립.

울산·동래·영일·진도·순천·광양 등지의 토산물.
광양 등지에서의 토산품이 임금에게 올린 해의(海衣)
김여익은 병자호란때 김여준 따라 의병을 일으킨 인물.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1640년에 장흥을 거쳐
광양에 들어와 해의(海衣)를 양식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김여익이 김양식법을 고안한 시기 = 1640 ~ 1660년(현종1)

완도 조약도의 김유몽(金有夢),
완도 고금면의 정시원(鄭時元)
두 사람보다 먼저 시작한 김여익.

해의(海衣)를 김이라 부르는 이유는 뭘까?
처음 김여익의 성씨를 본따 김이라고 명명.
김에 대한 문헌상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

신라 초기 경남 하동에서 김을 먹었다는 기록
<경상도지리지> 저자는 세종 때 경상감사 "하연"

일본은 오후사쓰요이 박사가 쓴 <바다채소>라는 책
에도시대 교호 초기부터 김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좋은 김 구별법..........
잡티가 적어야 한다.
검고 광택이 좋아야한다.
연녹색 파래가 적어야 한다.

얇으면서도 질겨야 한다.
김 표면에 여백이 없어야 한다.
구울 때 청록색 빛깔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채취하는 김이 상품
겨울 김에서 상기 조건을 갖추면 특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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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밥에 여러 반찬을 넣고 김으로 말아 싼 음식
이는 일본 음식 김초밥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일본초밥의 원조는 관서 지방
김초밥(노리마끼)은 관동(동경)

김밥 모양이 총(대포)을 닮아 '대포마끼'.
호소마끼(김 반장을 밥에 넣어 만든 김밥)
데까마끼(생선말이 김밥)는 에도 지방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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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김밥의 유래....................
1960년대 통영 황무지 <벼락땅> 노점상 할머니들
양념 갑오징어와 김밥을 뱃머리에서 판데서 유래.
김밥이 쉽게 쉬어 밥과 반찬을 분리하여 팔기 시작

특히 갑오징어 무침은 술꾼들로 부터 인기
넙게 썰어 통영 멸치젓으로 담근 무우 김치
미륵도, 사량도 등지와 통영을 오가던 뱃머리

충무 김밥을 파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
어느날 뚱보할매(이두익씨)의 충무 김밥
<국풍 80>에 참가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뚱보할매 김밥은 항남동 구여객선 터미널 앞
특히 기름기를 사용하지 않아 맛이 담백하고,
국물은 시락국이 아닌 멸치 우려낸 국물에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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