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3 ( 범왕 마을. 가야사 . 변한. 商. 흑치국. )

donkyhote 2011. 2. 28. 02:11


범왕마을(梵王村).



범왕골은 고로쇠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범왕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고로쇠물을 받아 파는데,
보통 이월 중순에서 삼월 말까지 물을 얻을 수 있다

높은 곳에서는 사월 초순까지 고로쇠물이 나지만,
양도 적고 품삯이 나오지 않아 산에 오르지 않는다.

범왕리 목통마을에서 한창 고로쇠물이 날 때면
새벽 다섯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물을 받는다.

"이 근방에서 여기 물이 젤로 당도가 높아요.
지대가 높아서인지 여기가 다른곳보다 늦어요."

이곳 고로쇠물은 다른 곳보다 몇천 원 싸다.
하동에서 가장 많은 고로쇠물이 나는 화개골.
화개에서도 범왕골, 단천골, 빗점골, 왼골 등.

고로쇠물은 날씨에 따라 물의 양이 달라진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적어야 물이 많이 나온다.

................찾아가는 길........................
칠불사 능선은 토끼봉 정남향으로 내리뻗은 능선.
지리산 종주 중도에 하산하는 이들이 애용하는 길.
과거 칠불사로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철망으로 폐쇄.

그대신 범왕마을과 칠불사 사이 계곡따라 도로 개설.
이는 칠불사 스님들 참선을 위해 취해진 공단의 조치.

'민박 지정촌' 팻말이 선명한 범왕마을 입구
도로는 계곡을 건너며 크게 왼쪽으로 휘어든다.
그곳 오른쪽 비탈에 '토끼봉 등산로 입구' 팻말

계곡을 오른쪽 아래로 두고 8부 능선쯤 오르면
작은 샘이 있고 여기서 30분쯤 더 가면 이정표.
왼쪽으로 5m 지점에 '행운의 샘' 팻말이 서있다.

행운의 샘에서 토끼봉까지는 일직선의 능선길.

소잔등처럼 밋밋한 능선이 토끼봉까지 이어진다.
빠른 걸음으로 토끼봉에서 범왕 마을까지 2시간
반대로 오를 땐 경사가 다소 급해 3~ 4시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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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주변을 벗어나 칠불사 가는 길목.. 범왕리.

남방불교 전래와 얽힌 '칠불암과 허왕후' 전설의 고향.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 일곱 왕자가 성불한 칠불암.
속세와 인연을 끊은 왕자들을 만나려 찾아갔던 허황후.

불법이 엄해 허왕후 조차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날 선원 밖에서 아들 이름만 차례로 부른 허왕후
이미 성불해 속인을 만날 수 없다는 7 왕자의 음성 뿐.

허왕후는 7 아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7 아들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한다.
아들들은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대답한다.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7 왕자 아들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연못 속을 보니 합장한 일곱 왕자 모습.

하황후가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한순간.
사라진 일곱 왕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영지(影池)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문 곳이 범왕촌(梵王村)
현재 범왕리(凡王里)로 변해버린 범왕마을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
지금 쌍계사 아래에 있는 대비리(大比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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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에 관련된 지명이 많은 범왕마을 일대.
허황후 측근 인도 세력 정착지로도 추정된다.
수로왕과 허황후는 가야국 세력의 최초 구심점.

'그들은 어떤 경로로 한반도까지 들어온걸까?'

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야 정치체들은
대개 3천~3천5백명 가량 '소국(小國)'들
김해 구야국, 함안 안야국은 2만 정도 대국

낙랑군 대방군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
3세기 경 대방군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해상 무역.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 구야국에 정박후 대한해협 건너
쓰시마를 거쳐 큐슈에 도착하는 항로

이는 당시 한(漢)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던 경로
남해에 인접한 가야 소국들은 관문 같은 위치
그 때문에 일찍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313-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하자 남부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1세기에 걸쳐 이동한 가야세력.

김수로왕은 혹시 아라비아 거상이 아니었을까?

김해 구야국에 중동 선진문명을 전수한 김수로.
아울러, 허황후 세력은 인도의 선진문명을 전수.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해외에서 이주해온 세력인듯. 


 


가야사. 




경상도와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다른 문화 풍습.
전통 음식 맛이나 상호 고유 풍습 또한 다르다.
지리산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한데 어우러지는 곳.

원래, 지리산은 3국시대 가야국의 영역.

당시 가야국은 제 4국, 일본은 제 5국 이었다.
가야국은 현재의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위치.
가야국은 동아시아 해상왕국이자 삼국시대 제 4 국.

기원 전후 시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경상도 서부 연합국의 총칭..가야국.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야마토 정권이 식민 지배했다고 왜곡.
현재, 가야사는 독자 세력으로 체계화

가야사는 5세기 후반을 경계 전기와 후기
전기는 김해 구야국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후기는 고령 대가야국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기원 전후 경상도 해안지역 철기문화 집단들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어 소국(小國) 단위로 통합
동일한 문화 기반을 토대로 3세기 경에 상호 연맹

이때부터 이들은 변한(弁韓)으로 총칭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수로왕 중심 김해지역의 9간.
그러나, 가야제국 연맹은 백제국 중심으로 통합.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지극히 느슨한 연합 집단.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중심으로 낙동강 하구
내륙지방을 제외한 경남 해안 소국들에 국한
내륙 지역에는 가야문화가 보급되지 않았다.

가야 영역은 해상교통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로 낙랑과 왜를 잇는 교역 중개지
따라서 이 지역 교역 거점들은 일찌기 선진 문물

가야 연맹은 소국 단위 선진문화를 이루고,
각기 독자적인 교역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신라 백제 왜가 주목하는 대상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세력을 형성

일원적인 통합이 어려워 완만한 연맹관계 유지
고성 사천 마산 동래 등 경남 해안 유적 유물들
각각 독자적으로 수준높게 발전한 면모를 보인다.

이와 같은 정치적·문화적 특징으로
전기 가야연맹은 신라 백제로부터 도전
재빨리 대처하지 못하는 취약성이 문제점.

더구나 4세기에 이르러 교역상대국이자
후원세력 역할을 담당하던 낙랑과 대방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자
주변 세력판도가 일변하며 위기에 봉착.

고구려는 백제를 견제려 신라를 적극 후원했고,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여
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

신라는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인 가야 지역을 잠식.
백제는 왜와 연합해 가야를 친 백제세력을 만든다.
이로 인해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두 세력으로 양분

김해지역 중심의 가야 연맹은 친 신라를 표방하고,
탁순국(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세력은 친 백제

그러나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
가야지역 백제계 세력을 정토(征討)
가야의 세력은 신라에 정치적인 예속

고구려가 백제를 견제하려 신라를 후원한 때문.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으로 이동.

전쟁을 피해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고
해안지역은 선진세력이 이주해 철산지를 개발
특히, 고령 반파국은 새로운 가야연맹의 맹주국.

이를 후기 가야연맹을 대가야 연맹이라고 한다.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 중심으로 통합력을 발휘.
5세기 후반에 중국 제(齊)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

제나라와 가야는 밀접한 문화교류.
옛 가야 영역엔 지금도 제나라 풍습.

가야국은 삼국 관계에서 정치적인 변수.
백제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
백제 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초 백제와의 국경 기문(임실)을 둘러싸고
가야는 백제와의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 결과 왜와 교역중심 대사(하동)지역마저 뺏겨
대왜 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며 가야는 급격히 쇠약.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
가야 연맹 체제를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

전기 가야연맹 소국들은 잇따라 신라에 복속
562년(진흥왕 23)에 마지막으로 대가야 멸망.
'신라의 화랑' 장수 이사부, 사다함에게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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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소국들은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
낙동강 서안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낙동강 서안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남해안의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 등등.
그 외 낙동강의 서안에 작은 규모의 집단들
가야지역을 묶는 정치집단이 형성되기 시작

가야는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전기와 후기

전기 가야는 4세기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는 5~6세기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
이 두개 가야에서의 정치 지배자는 왕이라 불리었다.

특히, 대가야의 왕은 6세기 이후에 금관을 머리에 쓰고
스스로 ‘大王’이라고 칭하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김수로왕 설화와 대가야의 가야산신 설화를 중심으로 전개

금관가야는 532년 구형왕(仇衡王)이 스스로 신라에 투항
대가야도 562년 낙동강을 장악한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김해 봉황대 집터와 패총, 장유 대청, 진해 용원의 마을터
산청 옥산리·묵곡리의 마을과 제사유적, 매장, 촌락의 모습
김해 화정유적의 숯가마의 확인으로 가야 철생산 실마리를 제공

양산 물금유적, 밀양 사촌제철유적은 고대 제철소의 유적.
562년 대가야의 멸망 이후 가야지역은 대부분 신라로 편입
지방제도가 신라에 편제되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신라의 양식

6세기 후반 이후에는 완전히 신라화되는 변화를 맞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경주 일원을 중심으로 횡구식석실분이 유행한다.

이전 가야지역에서는 세장방형의 평면구조로 축조된 반면,
이 시기부터는 정방형형태로 바뀌고 거대한 봉분도 사라진다.
이는 신라에 복속되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6세기 후반부터 신라에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가야의 특색있는 토기들은 점차로 신라양식으로 변모
통일 신라시대에는 완전한 신라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통일양식토기 시기(6세기~7세기)를 거쳐
통일 신라의 지방문화로 경향을 변모한다.
굽다리가 짧아지고 무늬가 규격화되는 특징

통일 신라시대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 정책
경남 일원의 옛 가야문화권 내 분묘유적들도 사라진다.
반면, 통일신라 불교유적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숭불정책은 경남 일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리산 일원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불교문화가 형성된다.
불교유적 중 사지, 불상, 석탑, 석등, 기타 석조물 등등.

'하여, 지리산 불교문화 전성기는 통일 신라시대.'

특히, 반야봉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50리 화개계곡
쌍계사 신흥사 의신사(神興寺·義神寺) 등 53 사찰
반야봉의 전설은 가락국 영화가 스러지는 것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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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문화는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기원 전 2500년 신석기시대 김해지역에서 발굴된 집단 주거지
조개 무지, 장유수가리 덧띠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 뼈 낚시바늘
기원전 10세기∼1세기 청동기시대, 108년 고조선 멸망, 한사군설치

구간사회(九干社會) 김해지역이 가락구촌(駕洛九村) 촌장에 의해 영도,
연합하여 부족사회 단계의 사회생활을 했던 가락국 이전의 고인돌 유물들.
구산동 구지봉, 장유면 무계리, 주촌면 양동리, 대동면 감내리, 상동면 우계리

진영읍 본산리 독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돌널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좁은놋단검 대롱옥 구슬옥 간돌검 간돌촉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널무덤 구지로12호분 내덕리19호분 양동리17호분 양동리427호분
봉황대유적 철제관 가야식동검 가야식본 뜬거울 중국식청 동거울

구석기시대 김해 문자기록이 보이기 시작
김해의 신석기시대는 약 7천∼5천5백년 전


<가야국 역사>

42년 가락국 신답평에 도읍, 43년 왕궁 건설,
44년 왕위를 넘본 탈해를 계림으로 축출
48년 수로왕 야후타국 공주 허황후와 혼인,
77년 아찬 길문의 신라 군과 황산진 전투.
94년 신라의 마두성(馬頭城)을 공격,

96년 신라의 남경을 침략 가성주 장세를 살해.
97년 신라에게 사죄.(삼국지 삼국유사)
111년 부여 낙랑 공격 157년 신라 세오녀 도일
173년 신라 왜 외교 194년 고구려 을파소 진대법 실시
205년 위 대방 군설치 214년 백제 신라 전쟁

102년 수로왕은 신라에 가음즙벌국(안강)과 실직곡국(삼 척)의 영토분쟁을 조정
106년 신라 마두성주 가야를 침략 115년 2월에 신라의 남경을 공격,
115년 7 월에 신라 지마왕의 침입을 황산하(黃山 河)에서 격퇴하였다
116년 신라 정병 1만의 침입을 물리쳤다
189년 허왕후가 157세로 돌아갔다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고, 제2 대 거등왕(居登王)이 즉위

201년 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209년 포상팔국이 연합하여 가락국을 공격하자 신라에 왕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
신라는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을 보내 포상팔국군을 격퇴하였다.
212년 골포( 마산)·칠포(칠원)·고사포(고성)의 3국이 신라의 갈화성(울산)을 공략
3세기 가락국은 고대 동아시아의 유일한 중개무역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해상왕국
3세기 가락국은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대 방군과 일본에까지 철을 수출하는 철의 왕국

- 삼국사기 -


토광목곽묘. 대성동27호분 대성동53호분 양동162호분 허왕후릉 수로왕릉 마을유적
봉황대유적 부원동유적 토광목곽묘 대성동45호분 철촉 철검 철부 소뿔 잡이단지
유리옥목걸 이 판상철부 철정 철검 오르도스형 철솥 따비 재갈 본뜬거울 구슬옥목걸이
중국식청동거울 환호 송풍관 이동식 부뚜막 점치는뼈 고정식부뚜막 노형토기 철창
철촉 고리큰칼 옥꾸미개, 보습 따비, 막대모양철부

- 삼국유사, 삼 국 지 -


3세기 233년 신라 왜에 대승 246년 위 관구검 고구려 침략
212년 전기가야 당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었다
253년 거등왕이 돌아가고, 제3대 마품 왕(麻品王)이 즉위하였다
291년 마품왕이 돌아가고, 제4대 거질 미왕(居叱彌王)이 즉위하였다

대성동29호 양동235호 금동관편 노형기대 두귀단지
오르도스형 청동솥 고리큰칼 수정목걸이 철정

304년 백제낙랑 공격
307년 신라 국호 사용
313·4년 고구려 낙 랑·대방축출
346년 백제 근초고왕 즉위
399년 신라 고구려에 구원요청 가야사의 전환기 가락국의 쇠퇴
313·4년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하여, 가락국에 들어오던 중국 선진문물의 수입이 단절
346년 거질미왕이 돌아가고, 제5대 이 시품왕(伊尸品王)이 즉위하였다
400년 광개토왕이 보낸 5만이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자, 안라(함안)가 대항하다가 항복.

덧널무덤 대성동13호 대성동10·18호 대성동1·2·3·23호 구덩식돌방무덤 대성동42호
대성동Ⅱ16호 예안리고분군 노형기대 바람개비모 양청동기 몽고발모양 투구
비늘갑옷 통모양청동기 굽다리접시 사발모양기대 철기류 편두 (두개골 성형)

414년 광개토왕비 건립
424년 고구려 신라 외교
449년 중원 고구려비
475년 백제 개로왕 패사 웅진천도
493년 신라 백제 결혼 동맹
494년 부여 고구려에 투항

407년 후기가야 이시품왕이 돌아가고, 제6대 좌지왕(坐知王)이 즉위
421년 좌지왕이 돌아가고, 제7대 취희 왕(吹希王)이 즉위하였다
451년 취희왕이 돌아가고, 제8대 질지 왕이 즉위하였다
452년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 기위해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
479년 대가야왕이 중국 남제에 외교 사절을 파견, 대가야의 우륵이 가야금12곡을 작곡
481년 가야·백제·신라연합군 고구려 격퇴
492년 질지왕이 돌아가고, 제9대 겸지 왕(鉗知王)이 즉위하였다
496년 가야가 꼬리가 다섯 자 되는 흰꿩을 신라에 보냈다

토광목곽묘 대성동1호 대성동7호 명월사 흥국사 부산강서지사동
구덩식돌방무덤 대성Ⅰ3·4호 굽다리접시 발형기대 마주 행엽 등자
철정 통형동기 컵형토기 판갑 금동삼존불 대도 은귀걸이

503년 신라 왕호 제정 513년 백제 일본에 오경 박사 파견
520년 신라 율령반포
525년 무녕 왕릉
538년 백제 일본에 불교 전파
551년 단양 적성비
553년 신라 한강유역확 보
554년 백제 신라 관산성 전투 성왕전사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 비

521년 후기가야 겸지왕이 돌아가고,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이 즉위
522년 대가야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가 가락국의 멸망
524년 신라 법흥왕이 남쪽의 변경을 순행할 때 가야 왕이 가서 만났다
532년 구형왕이 왕비와 노종·무덕·무력(武力)의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
신라는 이들을 진골(眞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해 주었다

551년 대가야 우륵이 신라 에 투항하였다
554년 가라가 관산성전투에 참전하였다
561년 안라국(함안) 멸망
562년 대가야(고령) 멸망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굴식돌방무덤 ,구산동 고분군, 구산동 유적, 유하리 왕릉,
산청 구형왕릉, 신라식토기 신라토기 가마 도장무늬토기 금동장식

가야시대란 김해에 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던 시대.
삼국시대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한반도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야시대는 가야의 여러나라가 경남 일원에 기원 전부터
532년 김해 대가락과 562년 고령가야의 멸망까지 600 년간

............가락국(駕洛國)의 이름...............
김해의 가야에 대한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가야인 자신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
백제 신라의 역사기록에 의해 전해졌기 때문.

가락국기는 삼국사기보다 일찍 편찬된 김해의 가야사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의식에서 편찬된 역사서

가락국 마지막 왕의 증손인 김유신(金庾信)의 비문에도
수로왕 이전 김해가 가락구촌(駕洛九村)으로 불리워졌다.

김해의 가야는 보통 가락국으로 많이 부른다.
금관가야는 수로왕도 몰랐던 이름으로 추정된다.
금관이란 국호는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때 생긴 이름

금관은 가락국 철을 관리하겠다는 정복자 신라의 의지
금관(金冠)이 아니고, 고려 행정 명칭은 금관주(金官州)
금관주에 있었던 가야국(고려시대 지어진 이름이 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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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가야국의 뿌리는 어디일까?'

가야국은 동아시아 거상 집단이 세운 국가인듯.
삼국시대 전부터 동아시아를 누비고 다닌 흔적들.
가야국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그 나라마다의 역사.

가야국은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 집단세력
부동항을 찾아 우리나라에 정착한 세력 같다.
우리나라에 고대 선진문명을 전수한 상인 세력.

'동서양의 문화를 잇는 교역로..실크로드.'

................실크 로드......................
총길이 6,400㎞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중국 중원 - 허시후이랑(河西回廊) - 타클라마칸 사막
- 파미르 고원 - 중앙 아시아 초원 - 이란 고원 - 지중해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
장안(현재 西安 또는 洛陽)은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과 사막 북쪽 두 길

서쪽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 길.
남로는 파미르 고원 쿠시쿠르간에서 서쪽 쿠샨 왕국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 옛 이름)까지.

인더스강을 따라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는 길.

북로는 강거(키르기스 평원 투르크계 유목국가)에서
서쪽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
현재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10 여 국.

'이 길의 중앙과 서쪽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전한(前漢 : BC 206~AD 25) 시기.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 오손(鳥孫) 같은 나라들과 연합
중국 북방 변경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 교통로를 확보

2차례 파견한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중앙 아시아 및 서방과 사절을 교환
서역과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전한 때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 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
AD 97년 감영을 대진국(로마)으로까지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실크로드를 서쪽 서아시아 끝까지 연장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618~907).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
중원을 위협해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 서돌궐을 제압 실크로드 개통.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
남도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가 주로 이용되었다.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 가는 길(톈산 남로)
그리고, 톈산 산맥 북쪽 길이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을 활발히 전개

소그디아나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

9세기 당이 쇠퇴하자 위구르족과 이슬람 상인이 활약.
송대 이후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 파르티아 홍해
카이로를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장건이 서역을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 아시아 및 서아시아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
사신과 민간인 잦은 왕래는 문물 문화 교류를 촉진

위진남북조시대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 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가 불교가 활성화

당대에는 불교가 중국에서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
현장(玄) 이후 유교 도교와 더불어 3대 사상 중 하나
중국의 불교발전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된 네스토리우스교(景敎), 이슬람교
실크로드 따라 전해지며 페르시아 서역인이 당에 거주

호복(胡服) 호모(胡帽) 호악(胡樂) 호무(胡舞) 호병(胡餠)
등 각종 서역 문물이 중국에 전파되어 호풍(胡風)이 유행
중국의 주철(鑄鐵)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으로 전달.

실크로드는 상업면에서뿐만 아니라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큰 의의

실크로드 포장도로 흔적이 남아있는 곳
파키스탄과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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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실크로드를 왕래했던 각국의 상인집단들
말하자면, 오늘날 다국적 기업 형태의 무역세력
다양한 국적의 상인세력 연합체가., 가야 연맹국.

변한(弁韓), 고대중국 商나라.
흑치국, 대륙백제, 제나라, 초나라.
대식국(아라비아), 인도대륙 아유타국.
가야 세력 뿌리로 추정되는 고대 국가들 


 


변한(弁韓) 



지리산 일대는 삼한시대 변한의 영역이었다.
대성골의 무속은 변한에서 유래된 풍속 같다.

기원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경상도 지역에 분포
여러 정치집단 중 진한 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
변진(弁辰)으로도 부르며, 훗날 가야 연맹체 소국들.

진한과는 낙동강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역적 차이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언어·법속·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을 섬김이 다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

이 기록을 보면, 훗날 변한은 가야, 진한은 신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영남지역 1~3세기 유적 유물은
지역적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진한과 변한은 같은 문화기반을 가진 집단
중국 군현들과의 교역 과정에서 나타난 어떤 차이,
즉 교역 주도집단과 교역 루트의 차이 등으로 구분.

중국인들에게 구별되어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에 의하면
변진 소국으로는 김해지방 구야국(狗邪國),
함안 안야국(安邪國), 고령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동래 독로국(瀆盧國) 등 12개 나라의 이름이 나온다.

변한은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한 철산지로 유명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은 문신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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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야국은 가야,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야마토 정권 식민 지배했다는 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라 이러한 억설을 극복.

가야는 독자적 발전과정이 체계화되는 단계로 나타난다.
가야사는 5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

전기는 김해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후기는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기원 전후 철기시대 경상도 해안에 여러 소국들이 통폐합.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3세기경 상호 연맹관계 형성
변한으로 총칭되었고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은 김수로왕

김해지역 9간(九干)을 통합해 건설한 구야국이 가락국.
그러나, 가야 연맹 집단은 백제국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 신라에 비해 느슨한 집단.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및
경남 해안에 국한되며, 내륙은 힘이 미치지 못한듯.
해상교통 요지 또는 풍부한 철산지 중심으로 발달.

낙랑과 왜를 잇는 해상교역의 중개지로 발달.
일찌기 중국 선진문물이 들어와 높은 문화수준.
가야는 각기 독자적 교역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대외적으로 신라·백제·왜 등
이웃 집권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 가야 소국들이 각기 독자세력을 형성

그로인해 일원적인 통합이 어려워 완만한 연맹관계
고성·사천·마산·동래는 김해 못지않은 유적 유물
이와 같은 특징으로 취약성을 안고있던 전기 가야연맹

이웃 신라 백제 등의 도전에 민첩성을 발휘 못한 집단.
4세기 가야연맹과 교역국이자 후원세력이던 낙랑과 대방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축출되자 가야 연맹은 쇠퇴해 간다.

고구려는 경쟁국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 후원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여
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인 가야의 영역을 잠식해갔다.

백제는 왜와 연합해 이를 견제하면서
가야 지역에 친백제 세력을 만들어갔다.

이로 인해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은
친 신라세력과 친 백제세력으로 양분.

김해지역 가야 연맹체는 친 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창원) 중심 가야 서부 세력들은 친백제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계 가야를 정토(征討)
친백제 가야 세력은 고구려 후원을 받는 신라에게 예속

5세기 이후 가야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 경상도로 이전.
후진적이던 내륙지역은 해안지역의 선진세력들이 이주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해 각광을 받게 된 곳이 고령지역

고령 반파국은 가야지역의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이를 후기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연맹이라 부른다.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 중심으로 통합력을 발휘
5세기 후반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던 고령 가야.

6세기초 백제와의 국경 기문(임실)에서 백제와 일전
패배해 왜와의 교역중심지인 대사(하동)마저 빼앗겨
대왜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기 가야연맹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복속

562년(진흥왕 23)에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패망한다.




상(商) 나라



고조선 이웃인 은나라가 곧.,상(商) 나라.
하은주 중국 역사상 3대 고대국가 중 하나.
특히, 상업이 발달했기에 상(商)나라라 한다.

'도시 국가일까? 영역 국가일까?'

상왕조는 농경촌락을 지배하고 수탈 대상으로 인식
도시 중심으로만 발전했으므로 도시국가의 형태였다.

1.상족의 문화

1) 상대 전기 :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

용산문화로부터 점차 상대의 특징을 가진 문화로 발전.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는 하왕조를 멸망후 상왕조 도읍.
대궁전 유적지로 보아 상당한 권력자가 존재 했던 도시.

2) 상대 중기 : 이리강문화(二里岡文化)

하남성 정주시 남쪽 교외 이리강 언덕의 거대한 성벽
정주에 근거했던 정권은 막강한 정치력을 장악했던 듯.
즉 지배자와 피지배층 사이에 확연한 계급분화가 생긴듯.

계급분화 증거를 나타내는 것은 바로 순사(殉死).

어린아이까지 무덤에서 발견되는 순장과 청동제 부속품들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강력한 계급이 있었던듯 보인다.
황하강 하류와 양자강 하류 문화가 합쳐져 상 문화를 발전.

3) 상대 후기 : 은허(殷墟)의 발굴

안양시 서북쪽 소둔촌 북부에서 1천 수백여기 묘 발굴
큰 묘의 발굴을 통해 수많은 순사자와 청동기들이 발굴
수많은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쳤던 신격화 수준의 왕권.

상대 후기 대가족 내 족장권한은 한층 강화된듯.
왕의 신임으로 족장은 막강한 지위를 확보했던듯
왕에게 지위를 인정받은 사실을 족인들에게 과시.

왕실의 지배력은 왕으로부터 대족장에게,
대족장으로부터 소족장에게 종적으로 침투
횡적으로는 족장으로부터 족인에게까지 영향.


2. 상대의 정치 형태와 국가구조

1)정치 형태

제사와 갑골문을 통해 신격 존재로서 통치.
포유동물 어깨벼, 거북이 배껍데기로 복점
국가의 길흉을 점친 무속이 성행했던 풍습.

정치. 관직 등에 일정한 조직. 제도가 있지 않음.
왕에 따라 지배층 조직 제도가 교체된듯 추정된다.
하급관직은 유력한 족장들이 필요에 따라 임용된듯.

2)국가구조

소국이나 족집단에 대해 조직적이지 못한 동맹관계 유지
족장을 통해 촌 단위로 집단을 노예화한 후 가혹한 수탈
통치자의 강한 군사력에 따라 촌 전체를 노예로서도 통제

3)영역

왕기(상왕의 직할지)는 종교적 정신적 중심지
현실적인 정치 중심지를 합한 통치지역이 도읍
외복(직할지 밖)은 전 후 백 자 남 등의 제후들.

봉건제도와 비슷한 제후들이 지방을 통치.
농민들은 노예보다 제사의 희생물이 된듯.

3. 상대의 사회와 경제

1)상대의 경제 발달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2~4도 높아 동식물이 풍부
농기구 개량 농업기술 발달로 농산물 수확량이 증가.
노동력을 동원해 수로 정비, 관개사업을 활발히 전개.

수수 .고량. 밀. 조. 쌀 등의 농산물 확대
농업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면서 상거래 활발
귀중품 수입, 화폐 유통으로 해외 무역이 발달.
수공업 전문화, 분업화, 관영 수공업 발달(청동기)

4. 상대의 사회 구조

지배층은 상왕 중심으로 왕실귀족, 지방유력자
상왕은 정치적인 최고 지배자이며 종교적 제사장.
왕실귀족이나 작위를 지닌 지배층을 총칭해 백성(百姓)

평민(소인)은 공물을 바치고 병역 노역의 의무
정복 전쟁,는 약탈로 노예(피지배 하층민) 확보.
노예는 제물, 순장자로 사용하자 상대 후기에 폭동.

5. 종교적 관념의 변화

제(帝)를 섬기고, 제끼리 서열을 결정.
상왕이 죽으면 신성한 제물을 올려 제사.
상나라에서는 하늘(天)을 숭배했던 풍습. 




흑치국.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고대국가란 설이 전해져 온다.
중국 라오시(遼西)지방은 대륙백제 최남단 영역이란 설.

중국 동해안에서부터 베트남 경계까지., 대륙백제 영역.
대륙백제 영역의 최남단은 흑치국(黑齒常之·630∼689)
대륙백제 최남단 광시(廣西)자치구 출신이라는 새 학설.

흑치상지는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해
중국에서 200개 성을 회복했던 장수.

이후 당 고종의 회유로 투항해
토번(티베트)과 돌궐 공략 때 위용.

1986년 중국에서 발견된 흑치상지 묘비명(銘)
‘부여(夫餘)씨로 선조가 흑치(黑齒)에 봉(封)해졌다’

원래 백제 왕족이었던 '흑치상지'가 선대에 백제 왕실로부터
흑치국을 봉토로 받으면서 성(姓)도 하사받은 듯 해석해 왔다.

'그렇다면 흑치국의 위치는 어디일까?'.

흑치상지가 백제 서부인(西部人)이었다는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록에 따라
국내 학계는 사비성(부여) 서쪽으로만 추정.

소 교수가 흑치국으로 주장하는 곳은
베트남과 인접한 중국 광시(廣西)좡(壯)족자치구
융닝(邕寧)현 바이지(百濟)향. 2002년 답사한 소 교수

중국 좡족 거주지인 이곳 주민들이
백제 지명을 간직했을 뿐맘 아니라
‘대백제’라 부르고 있다고 증언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빈랑(檳(낭,랑))이라는
나무열매를 씹는 풍속으로 '치아가 검은 종족들'
흑치(黑齒)국은 '검은 치아'와 관련 있다는 설명.

“중국측 사서인 ‘양서(梁書)’와 ‘송서(宋書)’
백제가 진(晉) 말 진평(晉平)군에 백제군을 설치
진평군은 광저우(廣州) 위린(郁林)군에 속하는데
오늘날 광시좡족자치구에 해당한다”=소 교수 -

흑치국이 광시좡족자치구일 가능성을 뒷받침.
이는 대륙 백제가 중국 영토를 다스렸던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