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망명정부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하나였던..백제
기원 전 마한 50 소국 중 하나로 출발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삼국을 이루고 있다가,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고조선 멸망 후 파상적으로 남하해온 북방 이주민들
토착주민과 결합 철기문화를 바탕으로한 새 정치세력
온조는 이주민집단 우두머리로 토착세력 지배권을 장악
백제는 기원 전 마한세력 정치체제가 모체가 되고,
그후 고구려계 이주민이 융합됨으로써 성립한 국가.
3세기 고이왕대 중국과 대항하는 한(韓) 세력의 구심
3세기 후반 마한의 맹주노릇을 해오던 목지국까지 정복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 전남 해안 마한 잔여세력을 복속
북으로 고구려와 다툼으로써 명실상부 한반도 중남부 패자
4세기말 고구려 남진정책에 직면해 대외팽창은 침체
7세기 무왕대 신라를 공격해 국력을 서서히 회복했고,
그 아들 의자왕대에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의자왕은 즉위초부터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신라를 압박했으며, 안으로 왕자 41명을 좌평에 임명
그러나 지나친 공격전은 국력 소모로, 민심 이반을 초래
결국 당과 연합한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660년(의자왕 20) 멸망했고, 그후 약 3년간 저항운동
663년 완전히 진압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임시정부.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 각국과 활발하게 교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와
모시박사(毛詩博士) 공장(工匠) 화사(畵師)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 노력을 기울였고 왜와 활발한 문화 교류.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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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자연환경 탓에 역사적으로 천재지변이 많았던 나라.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여건은 일본에게 부러움의 대상.
백제 패망후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진출하려고 한다.
왜구의 침략사를 보면, 후지산의 화산폭팔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하여, 왜의 숨은 야심을 감지하고 경계하여 세운 사찰이 실상사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왜을 과소평가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는 우를 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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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는 우리 민족의 피맺힌 한이 맺혀있는 사찰.
지금부터 수천년 역사 속에서 그 흔적들을 살펴보자.
기원전 84년에 달궁으로 쫓겨 들어온 마한왕조.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합병된...가락국.
백제 온조왕 27년 (서기 9년)에 마한 왕조가 멸망.
마한은 3세기 후반에 중국과 무역 및 교류를 한 점............ (삼국사기)
4 세기 경에 마한의 일부세력이 전라도 해안에 진출.......... ('일본서기')
마한은 3국((고구려 신라 백제)에 쫓긴 망했던 나라.
가락국은 마한을 점령 후, 서기 532년 신라에게 합병.
김수로왕의 금관 가락국은 ..16개 가락국 중 한 나라..........(가락국 = 해상왕국).
김수로왕은 가락국 10 왕이 선출한 대표였을 뿐이다.
828년(신라 흥덕왕 3)에 실상사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은
한국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우려해 건립한 사찰.
통일 신라에 쫓긴 세력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 갔다는 증거.
그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고 추측이 된다
그 당시 통일신라가 사찰을 지어 경계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망명정부는 훗날 일본왕국을 건설한다.
일본을 중심으로 신라에 구혼이 많았던 여러 세력들이 합류된다.
가락국의 흩어진 세력, 마한왕조의 유랑세력, 구 백제의 망명세력.
.........백제 망명정부가 일본왕실을 찾이한, 역사적 유래...............
지금부터 1400 여년전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백제귀족과 지배계층이 백마강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 수군의 도움으로
3만명이 바다 건너, 백제 망명정부를 수립했던, 일본 시가현 요까이찌시.
이곳은 또한, 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이룬 일본의 전진기지 유적지.
'왓따산(渡來山) 정상에 있는... 3층 석탑.'
부여의 정림사 5층 석탑과 닮았고 모국을 그리며 만든 탑.
그 주변에는 망명 백제인들의 혼백이 담겨 있는, 중요한 유적.
주변에는 3만 5천여개 이상의 부도가 바다를 이루는 유서깊은 곳.
백제인들의 이곳 망명정부는 훗날 일본왕실의 주인이 되고야 만다.
일본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역사를 안고 태어났다.
의자왕과 왕자들이 당나라에 끌려가자 왜의 제명여제가 구원군을 파병.
왜의 천왕 제명여제(의자왕의 누이동생) 구원병은 나당연합군에게 참패.
전쟁중 제명여제가 죽고 그 아들 천지가 이끈 백제와의 연합군 역시 패망.
결국, 왜와 백제 망명정부가 힘을 합쳐 이룬 왕국을 일본(日本)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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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나당연합군이 언제 처들어올지 몰라 국력을 키웠다.
통일신라 역시 옛 백제 세력과 왜의 침공을 항상 경계했다.
하여, 828년 통일신라에서 왜를 경계하려 실상사를 창건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AD 396년(병신년) 비류백제 응신(應神)천황은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자
해상탈출 후 백제의 지배권 왜열도에 AD 400년경 나라 지역에 망명 정부
그 망명정부가 (나라 백제, 야마토 왜, 대화 왜)을 수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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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구혼이 많았던 나라.
왜는 나당연합군의 재 침공을 대비해 군사력을 길렀다.
나당연합군이 언제 전국토를 초토화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에게 쫓긴 역사를 안고 품은 '천년의 한'.
통일 신라에게 구혼이 많은 세력도 왜로 건너가 똘똘 뭉친다.
특히, 장보고 추종 세력이 왜로 건너가자 왜의 국력은 급신장.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신라 무장,·국제무역가. 장보고.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일찍이 중국 당(唐)나라에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 장교.
해적이 신라 해안 주민들을 붙잡아 중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에 분개
828년(흥덕왕 3) 귀국, 왕에게 무역로 보호 및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1만 민군을 조직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
'청해진대사' 벼슬을 받고, 해적을 소탕 동북아시아 일대 해상무역권을 장악
당나라·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
836년(희강왕 1)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신무왕)이 청해진으로 피란.
희강왕은 838년 왕권분쟁중 피살되자,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큰 공.
그는 8세기 후반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절정기를 이루게 한 호족세력의 선구자.
1990년 복원된 중국 산둥성 원덩현 츠산촌 법화원은 장보고해상군단의 중국 거점
신라의 승려 30명이 상주하였으며, 연간 500섬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갖춘 대가람.
840년(문성왕 2)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 교역.
845년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다가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불만.
이듬해 불안을 느낀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 의해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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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보고의 해상왕국 일부 세력은 신라에 원한을 품고 일본으로 합류.
그 일본세력이 커져가는 동안에, 한반도는 후 삼국시대를 거쳐 이조가 장악.
조선 선조 25 (1592.임진)년에 6년간의 ..<임진왜란>.
이 순신 장군은 물론 승병까지 일어나 나라를 구했지만
백제인은 일본 왕실이 된후에도 신라에게 한이 맺혔던 듯.
일본 동경성 안 왕궁 정원에 심어진 느티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는 황토 흙' 4각 정원 가운데 심어져 있다.
동경성 왕궁은 백제 양식의 건축물로서 규모가 웅장하다.
성밖 수로와 집채 만한 돌로 쌓은 높은 성벽과 화려한 정원.
일본의 지방성주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지은..동경성.
풍신수길은 일본을 통일 후 동경성을 축조하는데 앞장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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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폐한 뜰안 느티나무 한그루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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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티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곳에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의 마을 어귀마다 있는 향토수종.
임진왜란은 왜적들이 단순한 노략질 침입이 아니란 증거.
임진왜란을 주도한 인물은 왕의 다음 서열인 <풍신수길>.
일본인들이 신앙처럼 섬기는 왕실은 '천년의 한'을 잊지 않았다.
<황토 흙 다짐 = 구 백제> <느티나무 = 그 땅을 되찾겠다는.. 一心.>
일본 왕은 밤낮으로 그 백제 양식의 뜰 앞에서 마음 다짐을 했던 것.
일본 왕실의 주인이 된 백제인들은 구혼을 잊지 않았다는...'증거'.
신라에게 패망후, 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지.
백제의 핏줄인 일본 왕은 문명을 전수해준 일본에서 국력을 키웠다.
이조의 '흥청망청' 연산군과 부정부패 관료들은 그 백제 역사를 망각.
이 때 왜는 전역을 하나(一)로 통일(心 :일본 국토 4개의 섬)한 후 침략.
조총을 개발한 왜는 자신감을 갖고 한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정벌할 계획.
왜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의 여인들까지 붙잡아간 만행.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청나라도 비슷한 짓.
이조는 1592년부터 7년 임진왜란을 겪고도 또 같은 수모.
일본이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동안 이조는 쇄국정책.
이조는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체결후 한일합병.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조는 일본에게 합병 빌미를 제공.
이조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고, 36년 간이나 치욕적인 식민 통치.
정신대 처녀들이 일본군에게 유린 당하고 전쟁터에서 죽어갔다.
2 차 대전 당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 신세.
임진왜란은 백제의 왕실 후예들의 천년간 맺힌..한풀이.
일본의 공주는 전쟁터로 떠나는 풍신수길을 배웅했었다.
반드시 전쟁에 이기고 돌아와 구혼을 갚으라는.. 격려였다.
일본의 천하통일 꿈은 풍신수길에서 2차 대전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일본은 장인정신과 경제적 부국으로 천하통일을 꿈꾼다.
일본은 우리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2차대전 전범인 일본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도 다시 일어선다.
일본은 미국에게 패했지만, 반세기 만에 미국과는 경제전쟁 경쟁국.
일본은 점령국들은 물론 미국과도 외교적으로 유대관계가 원활하다.
현재, 일본은 경제전쟁을 통해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상사는 신라가 828년에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여.. 창건.
1679년에 치욕적인 국란을 수 차례 겪고나서야.. 2 창, 3창
1882년 (고종 19) 한일합방 이후에 불에 탄 후.. 1884년 중건.
실상사는 뼈아픈 역사를 갖고있으면서도 그 유래는 잊혀져간다.
하여, 그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실상사의 사찰 유래를 밝혀둔다.
실상사는 뼈아픈 역사를 망각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아울러,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정책은 패망을 초래한다는 교훈도 남긴다.
이조에서 상민 또는 천민이라 노골적으로 천대했던, '쟁이'들.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대국 주춧돌이 된 사실도 알아야만 할 듯.
.........................일본의 장인정신................................
자신이 하는 일과 기술에 전념하여 정통하려는 직업 정신.
그 일에 정통한 사람을 예우하고 계승하여 보존하는 전통
15세기엔 힘 있는 사람은 신분이 낮아도 득세할 수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계급이동과 신분변경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한다.
이는 곧 신분제도가 정착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사무라이는 농촌 귀환을 금하고 농민은 농토이탈 제한
기술자와 상인은 그 직분에 머물러야 하는 내용의 법령
사농공상 제도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막부통치 때 정착.
상공업자, 운수업자, 예능인 등이 결성한 특권적인 동업자 단체.
막부시대의 조정 귀족 또는 신사, 절에 각종 편의와 이익을 제공
그 대신 갖가지 판매독점권, 과세면제 등의 특권을 보장받게 된다.
이런 이해관계로 인해 상인과 장인은 막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는다.
에도시대 후반기 무사계급과 상인계급는 정경유착적 관계를 유지.
특히 상인계급은 무사 계급과 사실상 동등한 반열까지 오르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기술 존중의 사회적 풍토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 기술존중 풍토가 장인정신을 유지 할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18~19세기에는 봉건 무사들이 몰락하고 사농공상`제도역시 무너진다.
그러나, 사농공상 사민(四民)은 신분은 높지 않아도 장인정신을 지킨다.
결국, 일본의 장인정신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각분야에서 발전해 나간다.
일본에서는 천민이라도 장인은 귀족 만큼 예우를 했기 때문.
하여, 이조 상민으로 천대받던 쟁이들도 일본으로 건너간다.
구한말, 일제시대, 8.15 해방, 6.25 이후 같은 현상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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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
품바 각설이 타령은 변강쇠전과 더불어 서민 노래.
품바란 각설이타령 후렴에서 장단을 맞추는 의성어
현재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서 일반화 된 품바.
품바란 낱말이 처음 기록된 문헌은 신재효의 '변강쇠歌'
품바란, 타령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입장고 소리
그후 일제, 해방, 자유당, 공화당 시절까지는 '입방귀'
옛부터 피지배 계급에 불만 품은 사람이 하는 걸인행각
가난한 자, 역모에 몰린 자, 관을 피하여 다니는 자,
지배계급에 불만을 품고 다니는 자, 소외된 자 등등
그들은 부정으로 치부한 자, 아첨하여 관직에 오른 자,
기회주의자, 매국노 등의 문전에서 한과 울분을 표출했다.
"방귀나 처먹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라는 의미로 입방귀
품바란 가진 게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그런 상태에서 쑥스러움을 전하며 구걸할 때 쓰는 말
"품바"란 "예, 왔쉬다. 한푼 줍쇼. 타령 들어갑니다."뜻
또, 품바란 한자의 '품(稟)'자에서 '주다' '받다'의 의미.
또 달리 일하는데에 드는 수고, 품앗이, 품삯 등에서 연유.
"사랑을 베푼 자만이 희망을 가진다"라는 말로 변해온 품바.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났을 때 반드시 '품바'라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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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된걸까?'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떠돌이가 된 지배층.
나그네 거지로 변장하거나 혹은 정신병자나 병신으로 위장.
문인 계통은 광대로, 무인 계통은 백정, 줄타기꾼으로 전락.
야유, 해학, 무심, 허무, 탄식 등을 각설이 타령으로 풍자.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맛보게 되는 비애감
한반도 민족의 전통적이고도 독특한 민족문학적 채취를 풍긴다.
신재효(1812~1884)의 변강쇠가에서 품바의 뜻이 '입장고'라고 기록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며 걸인 행각 도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그러나, 각설이 타령이 가장 활발한 때는 해방 직후로부터 자유당 시절
1968년 법으로 걸인 행각을 금지하며 일시적으로 각설이타령이 사라졌다.
어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요놈의 소리가 요래봬도 천냥 닷푼 주고 배운소리…
속도에서 당겼다, 늘였다, 늘어뜨렸다, 뽑아올렸다 한다.
인어걸이, 완자걸이 등등 그 타령 기술 또한 변화무쌍하다.
장단 또한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로 맞추거나 자유분방
타령을 부르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 걸직걸직 넘어가거나
한맺힌 애조로 가슴을 치거나, 판소리처럼 사설조가 많던가
민요처럼 구성지게 부르는 경우 등등 다양하게 불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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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은 백제 패망세력의 한풀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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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 포로로 압송당하던 도중에 병사.
끝내 기개를 꺽지 않았지만 역사는 승전국에 의해 왜곡.
삼천궁녀와 주색을 탐하다가 나라를 망쳤다는 오명을 쓴다.
계백장군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일전.
결국 5천 결사대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백제는 멸망.
660년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웅진성에서 당에 항복.
.......................황산벌 전투.............................................
660년(태종 무열왕 7) 신라와 백제 간의 황산벌 전투.
신라는 백제 고구려 압력이 가중되자 당과 외교 강화
당 역시 몇 차례 고구려 원정 실패후 백제를 선제공격
'하여, 신라와 당의 나당연합군 군사동맹을 체결.'
660년 3월 당 소정방은 13만 군사로 산동을 출발.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도 그해 5월에 백제를 협공
경주를 출발한 김유신이 6월 남천정(이천)에 포진.
신라 태자 법민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덕적도)
그곳에서 소정방을 맞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할 계획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부여)으로 떠난다.
당시 백제 조정은 방비책을 강구하던 중
당군이 백강(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의 견해를 묵살해 당군에게 대패한다.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한다.
의자왕은 계백 5,000명 결사대로 이를 저지.
계백은 가족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한다.
계백은 황산벌에 먼저 도착하고 3군데 진영을 설치.
신라군은 군사를 3갈래로 나눠 4번 싸워 모두 진다.
이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아들 반굴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자, 장군 품일 역시 아들 관창을 보낸다.
결국 관창은 단신으로 백제 진영에 뛰어들어가 전사한다.
반굴 관창 두 화랑의 장열한 전사에 감격한 신라군
결사항전으로 진격해 계백은 전사하고 백제군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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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최후....................................
의자왕의 두 왕자, 문무백관 88명, 백성 1만 2천명 인질.
그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삶을 산다.
백제 부활을 근본적으로 봉쇄한 당나라의 백제유민 분산정책
백마강 전투에서 지자 황해 항로를 따라
금강 기벌포 거쳐 웅진성으로 간 의자왕
병사들은 사비성으로 들어가 항거하였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사비성
의자왕은 7월 18일 전의를 잃었고 웅진성에서 나와
소부리에서 소정방에게 항복 백제는 678년 만에 멸망.
8월 17일 의자왕, 태자 효, 중신 88명,백성 12,807명
당나라로 압송되는 첫 배에 의자왕이 탔을 것으로 추정.
의자왕을 태운 배가 유왕산 앞을 지날 때, 백성들이 통곡
대부분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들이었다.
익산 쪽에서 몰려들어 유왕산을 온통 하얗게 덮었다.
망국의 설움을 달래려는 듯 소복을 입은 백제 백성들.
이때 유왕산 최후의 백제군이 당나라 군사에게 활로 공격
당군이 배에서 내려 그들과 싸워 전멸시켰던 최후의 전쟁터.
오늘날까지 백제 후손은 유왕산을 사당산(射唐山)이라 부른다.
'사당산(射唐山)은 당군에게 활을 쏘아 공격한 산.'
그후부터 이날이 오면 백제 후예들은 소복을 입고
유왕산에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한을 달래어 왔다.
이 행사가 이어 내려온 횟수가 2005년까지 1296 회.
그당시 일부 백제 패망 세력은 갈 곳이 없어 떠돌이 신세.
백제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형태라 지배층은 왕실 측근.
백제 지배층은 신분을 감추기 어려웠고 살 곳도 없었기 때문.
백제 지배층 부여 성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부여 성씨를 사용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
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부여 씨'.
백제 지배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수립.
일본에서 패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온갖 노력.
당나라에 잡혀간 백제 유민들도 일본 망명정부로 집결.
당나라에 인질로 붙잡혀간 의자왕의 태자.. 융.
당나라 황제 고종로부터 서씨 성을 하사받는다.
그러나, 백제 포로들은 대부분 당나라 노예생활.
그 비참함을 목격한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
그당시 당나라에서 신라에 파견했던 장보고
통일신라 청해진대사로 봉해진 해상 무역왕.
일본으로 건너가 재기를 꿈꾼 백제인들.
천년동안 백제 부활을 꿈꾸며 망명생활.
백제 망명정부 지배층이 오늘날 일본 황실.
천년이 지났어도 옛 백제를 재건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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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산동반도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항로 구축.
장보고 시대 이후에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군림.
오늘날 일본을 세계적인 무역대국으로 만든 주역들.
고구려와 백제 창건을 주도한 전설 속 여인 소서노.
소서노(召西弩)의 召는 입에 칼을 물고 있다는 뜻.
입에 칼을 물고 서쪽에서 온 활을 잘 사용하는 여인
일본은 소서노가 창건한 백제 계열의 또 다른 국가.
소서노는 여자로서 일본까지 3 나라를 창건한 존재.
소서노는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한 통치자.
백제의 형벌은 가혹해 살인자 및 반역자는 참수형.
전쟁포로 범법자 채무자는 평민 아래 노예로 전락.
부녀자를 범간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가 되었다.
도둑은 유형 및 2 배상. 살인자가 노예 3명으로 형벌을 모면
토지는 국유제이고 왕은 최대의 지주, 백성들은 국유지를 경작
그들은 백제의 착취 계층이었기에 자신의 옛 신분도 숨겨야했다.
패망한 백제 지배계층 역시 붙잡히면 죽음 아니면 노예로 전락.
결국, 자기 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타향을 전전하는 떠돌이 신세.
일본 백제 망명정부에 합류 못한 유랑민 애환이 담긴 각설이 타령.
각설(脚舌)이 타령은 '다리 사이에 달린 혀' 타령.
각설이 타령으로 가슴속 맺힌 울분과 한을 푸는 노래.
하여, 각설이 타령에는 백제 유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판소리 - 각설이 타령.>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어젯밤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당신본께로 반갑소. 내꼬라지 본께로 서럽소.
주머니가 비어서 서럽소. 곱창이 비어서 서럽소.
그런 걱정하지 말고 어서 오소.
돈없어도 좋으니 마음컷 포식을 하소.
용궁 속의 수정궁 월궁 속의 광한궁
너와 내가 합궁하니 한 평생 무궁이라
이 궁 저 궁 다버리고 너의 두 다리 사이 수룡궁에
나의 힘줄 방망이로 길을 내자꾸나
두다리를 번쩍들고 옥문관을 굽어보니
이상히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른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든지 언덕 깊게 파이었다.
콩밭 팥밭 지났던지 돔부꽃이 비치었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바르게 터져 있다.
수탉머리 너무 먹었는지 닭의 벼슬 비치였다
임실 (任實) 곶감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물(臟物)이요
만첩산중(萬疊山中) 으름인지 제가 절로 벌어졌다
생수처 옥답인지 물이 항상 괴어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다.
불에 딘 조개인지 혀를 삐쭘삐쭘 빼밀었다
제 무엇이 즐거은지 반쯤 웃어 두었구나.
방망이 형상 또한 어떠한지 아소
밤보초 서려는지 쌍방울 느직하게 달고,
칠팔월 알밤인지 두쪽 한데 붙어 있다
제주도 하루방인지 벙거지 모자 붉게 쓰고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렀다.
고추 찧던 절굿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구멍이 그저 있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이며
소년인사 다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는 무슨 일꼬.
성정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 많다
나의 기물 성나고
너의 환한 두 보름달 밑에 방초가 더욱 우거지니 .
우리 서로 교접지도하며
두 도깨비 함께 놀아 보자꾸나
무릉 도원 복숭아
붉고 검은 건포도
움폭 솟은 당참외
둥글 둥글 참수박
숨어 있는 외꽈리
삐쯕 내민 조갯살
내 무엇을 먼저 먹어 볼까?
그것이 문제로다
입안의 백청(百淸)묻혀 은수로 살살 문지르고
흘러넘치는 액즙을 혀로 조금씩 핱어먹어 볼까나.
한 발 가진 깍귀가
끼우고, 휘젓고, 가볍게대고. 떨게하고,
비비고, 밀고, 찌르고, 진동을주고,
두 발 가진 까마귀가
부드럽게두드리고, 꼬집고, 잡고, 끌어당기고,
굴리고, 긁고, 문지르고, 돌리고
세 발 가진 통노귀가
만지고, 튀기고. 움츠려 잡고, 압박하고,
두들기고, 더듬고, 스치듯이 쓰다듬고, 스치고,
네 발 가진 당나귀가
찰싹 때리고, 감싸고, 가볍게 때리고, 주무르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핥고, 빠니
저리시구 이리시구 잘이한다.
품바 품바나 잘이한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서 못 먹고
술은 수리수리 잘 넘어간다
저리시구 이리시구 잘이한다.
품바 품바나 잘이한다
앉은 고리는 등고리 선 고리는 문고리
뛰는 고리는 개구리 나는 고리는 꾀꼬리
입는 고리는 저고리 품바 품바 잘이한다
삼정승은 평교자 타고 육판서는 초헌 타고
각급 수령은 독교 타고 나는 탈 것이 없으니
오늘 밤 삼경 깊은 밤에 너의 배를 넌즈시 올라타고
홑이불로 돛을 달아 내 방망이로 노를 저어
너의 오목샘으로 들어가자꾸나
사랑하는 우리 님아
칠야삼경 깊은 밤에 가죽방아 찧을적에
꿍덕 꿍덕 떡방아만 찧지마라
방아 처음 내던 사람 알고 찧나 모르고 찧나
강태공의 낚시방아처럼
사시장춘(四時長春) 걸어 두고
떨구덩떨구덩 찧어주소
얼시구 시구
디딜방아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전진은 천천히 후퇴는
재빨리 약입강출 들어간다
3천 1심 들어가네 9천1심 들어가네
얕게 찌르다 깊게 찌르니 황홀감이 확산되네.
각설이 머리가
문턱에서 서성이니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몰라
‘애태움’에 자지러지네
얼시구 시구
사행운동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위에서 아래로
지렛대를 대듯 힘을 가하니
봉알이 더욱 빨개지는구나
얼시구 시구
회전운동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팽이 돌아가듯
맷돌방아 돌아간다
한푼 벌기가 땀이 난다
품품 품바가 잘이한다
네 선생이 누군지
남보다도 잘이한다
논어 맹자 읽었는지
대문대문 잘이한다
냉수동이나 먹었는지
시원시원이 잘이한다
뜨물통이나 먹었는지
걸직걸직 잘이한다
기름통이나 먹었는지
미끈미끈 잘이한다
아이구 숨이차서 못살겠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세
쉬면서도 치골이
전체를 압박하듯 누르고
천골이 돌아가며
허리를 좁고 넓게,
상하, 좌우로 움직이네
회전과 진동운동을 가하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니
보름달이 더욱 부푸는구나
요놈의 각설이가
찌를 듯이 들어가니
한숨소리 절로나네
편한 마음에 다스름,
진양조를 서서히 흐느끼다가,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더욱 힘차게 울부짖으니
요놈의 소리가 요래도오
천냥을 주고 배운 소리
아이구 나죽겠네
죽더라도 멈추지마라
몸속에 타는 불이 육신을 녹여
점액이 분출하니 미끌어서 더욱좋다
수축과 팽창이 계속되니
하늘에 떠 있는 것 같구나
신체의 합일를 초월하여
다른 인간과 하나로 결합되니
우주와 합일되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나.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아까왔던 각설이가 까마귀고기 먹고 또왔네
저리시구 이리시구 잘이한다 품바 품바나 잘이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들도 산도 섬도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을 하고
자식은 부모찾아 헤메는 비참한 광경은 난생 처음
적국인 전라도라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러한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의 일.
...일본에서 온 포르투갈 인신매매 상인들도 있다.
그들은 본진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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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6월 일본 큐슈 안양사 주지 게이넨
우스키성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한 체험담 <일일기>
이순신 투옥으로 원균이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조 수군이 1597년 7월 16일 일본 수군에 대패한 것.
이때 전라도는 살육, 방화,고문,인신매매,구타 아수라장
백성들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가져간 일본군 만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한 일본군에게 내린 군령 탓.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 - 1597년 8월.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
전공에 눈먼 일본군이 무고한 백성 코까지 베어낸 것.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아래와 같이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힌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리에 걸쳐
있었으며,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 많게는 10만명.
임진왜란 7년중 정유재란은 '살육전쟁'이자 '노예전쟁'
'그때 충무공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 도요도미 히데요시.
남해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의 야심을 좌절시킨 충무공.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올랐던 충무공.
말도 안되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고문 당한 충무공.
원균과 조정 대신들이 충무공에게 씌운 죄목 4가지.
(1)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3)남의 공을 가로채고 나서도 남을 모함한 죄
(4)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 없이 방자한 죄
결국 충무공은 우의정 정탁 등의 구명운동으로 석방
파직 죄인의 신분으로 무등병 백의종군 길에 나선다.
그 아들을 보려고 멀리 여순에서 아산으로 오던 노모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한고 숨지자 충무공은 탄식을 한다.
"해가 캄캄하게 보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임진왜란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던 노예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륙 정복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총을 보유한 국가
일본군 15만 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 병력은 600명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임진왜란 당시 21만 4752명 수급을 베었다고 집계.
"해마다 출병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나라를 빈 터로 만들 것이다."-도요도미 히데요시.
당시 조선의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서는 거의 30년간 찻잔도생산되지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에 기여
도공 일부는 노예로서 포르투갈 유럽으로 팔려갔다.
임진왜란후 경지 면적 170만결에서 54만결로 준 조선.
일본군의 살육, 전쟁 후유증 질병, 전염병, 흉년 등등.
농본국가 조선은 총 경지면적이 1/3로 줄어들 정도였다.
그후 300년 동안 경복궁을 재건못할 만큼 피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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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이조의 집권체계가 완성되고 문화의 완숙기.
연산군 때 부정부패와 사화가 일고 선조때 당파싸움.
권력투쟁이 일고 북방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한 시기.
성종 때 왜에 삼포를 열어 왜구를 달랜다.
삼포란 일본인 왕래와 거주를 허가한 3 포구.
부산포(동래), 내이포(態川),염포(울산) 3 항구.
1407년(태종 7) 부산포와 제포를 개항하고,
1426년(세종 8)에는 또다시 염포까지 개항하여
삼포개항을 단행하고 개항장에는 왜관을 설치한다.
여기에 거류하는 왜인은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일시 체류하는 자와는 구별해 그 숫자를 총60호로 한정
그외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했다.
그러나, 점차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의 숫자가 증가
관원과 마찰이 잦아져, 1510년(중종 5)에 삼포의 난
이 왜란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 체결
일본과 국교가 회복되면서 제포만 다시 개항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끊임 없이 약탈과 외침
특히 대마도는 해적 왜구들의 본거지였다.
일본 본토는 호족 영웅의 춘추전국시대 말기
풍신수길이 일본을 평정후 천하통일을 꿈꾼다.
중국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먼저 이조와의 교섭.
풍신수길은 교섭이 결렬되자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조는 전란에 휘말리고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온다.
이순신과 의병들 활약에 힘입어 7년 임진왜란을 마감.
그러나, 장기주둔한 명군 및 日人과 혼인한 이조 여인들.
日本, 明, 남방, 만주로 피난간 유민들과 팔려간 노예들
그 한반도 유민들의 숫자를 이루 헤일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족 또는 조센징에는 노예를 일컫는 뜻이 담겨있다.
과거 일본인은 우리 민족을 경멸할 때 조센징이라 했다.
조선족 또는 조센징은 보이지 않는.. '수난의 역사 흔적'.
'동의보감이 씌여진 시대는 이조 여인의 수난시대.'
왜적은 죄없는 백성까지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만행.
이조의 여인들이 은장도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웠던 듯.
죽거나 노예가 되지 않으려 정절을 받친 여인도 많았다.
명나라는 본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해 이조로 구원병을 파견했다.
이조는 그 뒷바라지에 고통과 수모가 많았고 사대주의 사상까지 팽배
이조에 조총, 고추, 호박, 토마토가 日本을 거쳐 들어온 시기도 이 무렵.
매운 고추를 이용한 고추장 김치 등
전통음식 맛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담배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시기도 임진왜란 전후.
하여, 궁녀 의녀 기생이 담배를 피는 풍속도는 이조 후반.
이조에 담배가 들어온 경로는 일본과 청나라를 통해서였다.
서양 문명이 실크 로드와 남방 항로를 통해 유입된 흔적이다.
기녀가 담뱃대를 물고 누워 정사를 벌리는 단원의 풍속도.
이조시대에도 담배는 웃 사람 앞에서 피울 수 없던 기호품.
선비가 의관을 벗어던지고 품위없이 기생에게 달려드는 모습.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이조의 사회 기강이 무너진 흔적.
임진왜란 후 왜는 이조의 각 분야에서 종사하는 장인들을 붙잡아간다.
아울러, 궁궐 사찰 등등에서 각종 문화재 및 국가 보물들을 약탈해간다.
그리고, 이조의 정전인 경복궁을 포함하여 궁궐 역사책 모두를 불태운다.
왜보다 선진국이었던 이조는 이때부터 문화적으로 점점 역전되기 시작.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문화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조시대의 남성우월 유교 관념이 남존여비로 뒤바뀐 전환기도 임진왜란.
옛부터 왜에서는 여성이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
벚꽃처럼 남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스러진다는 일본여성.
일본은 가부장 제도가 엄격하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조는 보이지 않게 그 영향을 받는다.
특히, 한반도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인 지역은 경상도.
남자가 먹고 남은 밥상의 음식만 여자들의 몫이 될 정도이다.
'아직도 주부 혼자 부엌에서 밥먹는 관습.'
일인 거주를 허가했던 삼포에서 비롯된 듯 싶다.
동래의 부산포, 웅천의 제포(진해), 울산의 염포.
울산의 염포는 '삼포의 난' 이후 진을 폐지하였다.
이조 세종 때에는 대마도(쓰시마섬)를 정벌하였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km, 후쿠오카시 138km 거리.
아시아 대륙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창구였다.
대마도 정벌후 한반도와 교류가 중단한 적도 있었지만,
대마도주는 이조 통신사를 에도까지 안내한 적도 있었다.
이조는 부산포를 개항하고 왜인들의 왕래 및 거주를 허락.
왜관(倭館)을 설정했는데 훗날 이조 관원들과 마찰이 잦았다.
한반도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시기는 임진왜란부터 구한말.
병자호란, 2차대전, 6.25 등 잦은 전란으로 가문의 대가 끈길 정도.
이조 후반에 들어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축첩제도가 성행하게 된다.
그 시기를 제외하면 남녀평등 또는 여성 우월사상이 지배적인 한반도.
특히, 신석기시대 모계사회 여성은 남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
아직도 한반도 민족 자녀들에게 어머니는 신격화되어 있는 존재.
한반도 민족의 모성애는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지리산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토속적인 성모 신앙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국가가 형성되고 전쟁이 일어나며 힘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모계사회의 일처 다부제는 일부 다처제로 바뀐다.
풍신수길은 이조, 명, 류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 고산국(高山國;타이완),
루손(呂宋; 필리핀) 천축(天竺; 인도)까지 지배하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당시 군사적 현황을 분석해 보면 일본은 이조와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조에서는 불세출의 영웅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왜군과 싸워 23전 23승 무패 신화로 이조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임진왜란은 중국, 이조, 일본 삼국의 흥망성쇄가 뒤바꾸는 계기.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쇠퇘해 훗날 청나라에게 패권이 넘어간다.
이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성풍속에 커다란 전환기를 맞는다.
그당시 궁중화가 단원 김홍도 및 신윤복의 풍속도는 오늘날 춘화와도 같다.
김홍도의 운우도첩 춘화는 당시 성풍속을 말해준다.
김홍도는 이조시대의 음양사상을 예술로 승격시킨다.
아울러 그당시 성풍속도를 적나라하게 화폭에 남겼다.
........................운우지정............................................
운우는 신농의 세딸 중 하나인 요희가 환생한 다음의 별칭.
요염한 운우는 처녀귀신이 되어 산중턱의 노란 꽃으로 환생.
옥황상제는 그녀를 가엾이 여겨 운우의 신으로 격상.
낮에는 한조각 구름으로 산과 골짜기를 거닐게 하고
밤이면 쓸쓸한 비로 변해 욕구불만을 달래게 해준다.
하여, 남녀 간 육체적인 사랑을 운우지정이라 한다.
운우지정은 우리나라 산의 지명에도 큰 영향을 준다.
운우지정은 선녀탕, 옥녀탕, 숲속의 요정, 전설의 모체.
..............................................................................
한낮에 뜰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는 처녀와 총각
이조시대 그림의 뒷배경은 나무절구와 절구공이.
단원 김홍도의 성풍속도는 오늘날 춘화 수준이다.
자식을 기원하며 절에서 백일 불공을 드리던 여인
그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려는 듯 노승과의 성행위
그 광경을 문 틈으로 몰래 엿보고 있는 동자승의 모습.
산속 개울가 넓은바위에서 달빛 아래 벌리는 정사.
그림 같은 산수와 동녀의 정기를 함께 받으려는 듯.
이조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풍류로 보여지는 그림이다.
이조 양반들은 기생을 동반해 산수 좋은 곳을 즐겨 행차.
두 선비와 두 기녀가 한방에서 동시에 벌리는 정사
각각 다른 체위로 운우지정을 나누는 적나라한 춘화.
한반도에 춘화가 유입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알려졌다.
원나라 황실과 밀접했던 고려 왕실 귀족층을 통해 유입.
물론 그당시 춘화는 몇몇 특권층 만이 누렸던 외래문화.
원나라 춘화가 고려 귀족을 통해 한반도 성풍속으로 정착.
본격적인 춘화 유입은 청을 통해 외국 문물이 들어온 17∼8세기.
이조 역관들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며 몰래 갖고 들어온 춘화
그당시 사대부를 포함한 양반 사회에 빠른 속도로 은밀히 퍼졌다.
사대부들이 춘화처럼 기생들과 어울리며 성풍속은 문란해진다.
구한말에 일본 창녀의 유입과 매음이 번창하며 저질 춘화 유입.
음란성이 강조되며 예술적 품격은 떨어지고 퇴폐 향락으로 발전.
남녀간에 운우의 정을 나누는 적나라한 그림이 전해온다.
아울러, 지리산 일대의 풍습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하여, 지리산의 유래를 알려면 임진왜란을 알아야 만 한다.
-임진왜란 약사.-
1592년 4월 13일 : 일본, 21만명의 병력으로 이조 침입
4월 14일 : 부산진 함락
4월 15일 : 동래성 함락. - 본격적으로 일본군 북상 시작.
4월 28일 : 8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던 이일, 신립 충주에서 대패 - 신립 자결
4월 30일 : 선조 몽진
5월 2일 : 일본군 한성 점령
5월 7일 : 이순신, 옥포에서 일본함대 격파
5월 29일 : 사천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5월 : 선조, 이덕형을 명으로 보내 구원요청,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화재
6월 13일 : 일본군, 평양 점령
6월 : 선조, 의주에 피난, 명의 지원군 도착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일본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저해권 장악
7월말, : 곽재우가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7월, : 묘향산의 휴정이 전국의 승병을 일으킴
7월, : 회령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일본군에게 잡힘
8월, : 금산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전사
8월, : 명나라 대표 심유경이 종전을 위한 회담시작
9월, : 이순신, 부산포에서 일본수군 대파
10월, : 제1차 진주대첩
12월, : 이여송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옴
1593년 1월, : 의병, 관군, 명군이 연합하여 평양성 탈환
2월, : 행주대첩, 함경, 평안도의 왜군 한성으로 퇴각
3월, : 심유경 일본과의 강화회담 재개
6월, : 제2차 진주성싸움
8월, : 일본군 철수 시작, 명군 철군
10월, : 한성으로 선조 돌아옴
1594년 1월, : 전국에 대기근 발생
2월, : 훈련도감 설치
3월, : 당항포의 일본수군 격파
1596년 7월, : 이몽학이 난을 일으킴
8월, : 김덕령 사망
9월, :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과의 화의조건에 반발하여 조선 재침을 명함
1597년 1월, : 정유재란 발발
2월, : 이순신 무고로 투옥
7월, : 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하고 원균사망, 이순신 재임용
9월, : 명량해전
10월, : 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
1598년 9월, :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일본 철군 시작
11월, : 노량해전. 일본 수군 대파, 이순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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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은 일본이 호남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전란.
임진왜란의 패인이 호남 의병 때문이라 판단한 일본
지리산 일대 호남지역에 보복하 듯 무자비하게 찬탈.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부녀자들을 겁탈한다.
왜인들의 만행을 경계하려고 마을마다 세웠던 장승들.
문란한 성풍속과 성병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문화.
8도 장승의 공격을 받아 오장육부가 썩어 죽는 변강쇠.
외지인이 마을 부녀자를 겁탈하면 장승에게 죽는다는 뜻.
왜인들은 산 사람의 껍질을 벗겨 장승에 거는 만행도 자행.
왜인들은 칼로 목숨을 위협해 이조 부녀자들을 유린.
이조의 성풍속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문란해지기 시작.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간에 걸친 기나긴 전쟁.
결국, 충무공은 임진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목숨을 잃는다.
만약 충무공이 전사를 하지 않았다면 숙청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의 격전장은 거의 이조 정권의 유배지.
육지와 단절된 남해의 섬들은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
당파싸움 잦았던 이조 후기에 제주도 남해 고도는 유배 적지.
행정구역상으로 추자도는 북제주군에 속한다.
현재 추자도에서 제주도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영암, 완도군에 딸린 섬이라 호남 말씨.
1946년 북제주군 편입, 1831년 제주목, 1891년 완도군
추자도 뱃길은 목포로 열려져 있기에 호남 문화권이다.
추자도는 옛부터 육지와 제주도의 징검다리였다
고려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려 들른 곳.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머물렀던 고장이다.
추자도는 영암 무안 나주 진도 전남 해안의 뱃길.
북제주 애월 조천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자 유배지.
추자군도는 해적 및 왜구들이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추자도에 딸린 섬들이 42개나 되고 청산도는 참치어장.
즉,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청산도, 나로도, 추자도 남쪽.
추자도 최남단 관탈도는 귀양객이 갓을 벗었다는 섬.
관탈도에서 뱃길로 불과 30분이면 제주항에 도달한다.
완도-청산도-추자도-관탈도-제주도가 일렬로 징검다리
해남 땅끝마을 앞 섬이 보길도, 좌우 섬이 완도와 진도
경치는 아름다워 보여도 생활환경오로는 몹시 열악한 편.
추자군도의 최대 문제는 역시 물이다.
횡견도 같은 섬에서는 빗물을 받아 쓴다.
추자도에서는 바닷물로 만든 물을 먹고 산다.
그래서 집집마다 거대한 물탱크 한두 개씩 있다.
척박한 농토, 육지와 고립된 외딴 섬의 열악한 생활환경.
해적에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거나 심한 풍랑에 시달리기.
가뭄이 들면 식수조차 귀하고 흉년이 들면 굶어죽기도 십상.
'제주도에서 한시간 거리의 추자도는 악명 높은 유배지'
진도와 완도 역시 이조 후반에 악명 높기로 알려진 유배지.
진도는 붓을 다루던 문인들 귀양지라 지금도 문인들이 많다.
완도는 산이 많고 척박해 칼 쓰는 힘센 무인들을 귀양보냈다.
'완도는 이조정권에 항거할 만한 무인들의 귀양지.'
완도는 신라시대 장보고의 거점이자 역사적으로 해적들의 소굴.
완도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을 장악할 만한 전략적인 요충지.
이조시대에 공도령을 내려 완도 주민을 강제로 이주한 곳이 김제.
하여, 김제를 비롯 여수 목포는 이조시대부터 무인의 고장.
국란에 처해 있을때마다 나라를 구한 의인이 많았던 전라도.
역사적으론 민중 봉기가 많았기에 핍박 받은 고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막바지 즈음에 이조 왕실은 정권 유지에 급급.
임진왜란 공신들을 푸대접하고 의병장들을 모함하기 일쑤.
공신들을 숙청한 시기라 이순신도 권력에 환멸을 느꼈을 듯.
전라도는 임진왜란 당시 왕실 통치권이 영향력을 못미친 자치지역.
이조 왕실은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보다 이순신이 두려웠던 존재.
이순신이 반기를 든다면 무능한 이조왕실을 뒤엎을 수도 있었기 때문.
이순신 함대와는 일본 풍신수길도 싸우지 말라고 했을 정도.
명나라 황실에서도 천하무적 이순신 함대를 높이 평가할 정도.
하물며 이조 왕실은 백성들이 따르는 이순신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
당시 전라도 백성들은 무능한 왕실보다 충무공을 더욱 따랐다.
그 탓에 충무공은 왜적과의 전쟁보다 조정 당파싸움에 시달렸다.
충무공은 일본과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했던 충무공.
충무공은 전사한 걸까? 숙청을 피해 미리 은둔한걸까?
그의 죽음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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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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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은 거북선일까?
그당시 거북선은 불과 몇척이고 이순신의 주력함대는 판옥선.
일본의 안택선(층루선)과는 근본적으로 그 구조 형태가 달랐다.
안택선은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헤쳐나가기에 적당한 서양식.
판옥선은 바닥이 둘글어 강에서 유리하지만, 바다에서는 불리.
이순신은 기존 판옥선을 성처럼 크게 개조하고 현자총통을 장착.
대장군전(철로 만든 큰 화살)을 넣고 발사하여 적의 배를 격침.
크고 높은 판옥선에서 화포를 쏘아 장거리에서 명중율을 높였다.
왜선은 충무공과 미처 싸워보지도 못하고 바다에 수몰되었던 듯.
또한, 일본 수군은 성벽같은 판옥선에 오르기조차도 어려웠단다.
마치 성벽 아래 일본 수군이 성벽 위의 충무공 수군과 싸우는 형국.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신화를 일군 이순신은 탁월한 전술 전략가.
1598년 철군하는 왜군과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그당시 기록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첫째, 노량해전에서 갑옷을 벗고 진두지휘 했다는 기록.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충무공의 유언.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살아 돌아와 16년간 은둔 생활 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아들, 조카, 몸종 외 없다는 점.
나라에서 국장을 치룬 무덤이 16년 뒤 다른 곳으로 이장된 점.
지금부터 충무공 죽음에 관한 사실을 좀 더 알아보자.
충무공의 전사 기록을 보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고금도로 영구를 이동해, 12월 10일 아산으로 옮겨진다.
1598 년 2월 11일 장례를 치루고 15년 후에 묘지를 이장
1614년은 이순신이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70세가 되는 해.
만약 은둔 했었다면 그때까지 살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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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두 영웅 이순신과 권율.
모두 임진왜란을 이미 예측한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
프로 바둑기사인 유시훈은 유성룡의 14 대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던 이순신.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이조왕실은 그가 두려웠다.
임진왜란 공신들은 전란이 끝날 무렵에 선별하여 숙청한다.
이조왕실과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굴복했던 공신들만 무사.
임진왜란에서 이조가 승리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명나라의 지원, 의병활동 등등.
그리고, 임진왜란 긴 전쟁에 지쳐 이조에 귀화한 '항왜'
명분없는 기나 긴 전쟁에 회의를 느낀 왜군들이 많았다.
이조의 투항왜군 우대정책으로 항왜 왜군은 약 1만 명.
반면 이조 백성이면서도 왜에 협력한 자들은 순왜(順倭).
화승총과 화약제조기술, 검술과 포술 등을 가르치고,
왜군에 관한 정보제공 및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
선조는 눈부신 활약을 한 항왜에게 벼슬과 함께 은 포상
'사야카는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한반도를 침략.
하지만, 사야카는 한 차례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귀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 그가 쓴 귀순 이유.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해 본의 아니게 선봉장.
인의의 나라를 공격할 수 없어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저의 소원은 이 나라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사야카는 귀화후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
그 결과 권율과 어사 한준겸 주청으로 차관급 자헌대부
1600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에 거처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사야카는 일본인으로 태어나 22년을 살았으며,
김충선이 되어 50년을 살다가 1642년 72세 사망.
인조는 그에게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
<모하당문집>에 실린 김충선의 한시 <남풍유감>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고
봄풀을 봐도 고향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땐들 없겠는가
일가친척은 살아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하직했을까
고향산천 그리움 끊일 날 없도다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무의미한 전쟁을 반대하였던 평화주의자 사야카.
육순 노구를 이끌고 여진족과 맞서 싸운 김충선.
낳고 길러준 부모와 나라를 버리고 적국의 장수로
동족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서야 했던 사야카의 번뇌
7년 전쟁 후 선조는 덕천가강 국서에 대한 회답
포로를 귀환시키려고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한다.
이로부터 1811년 순조 11년까지 12번 통신사 파견
특히 1682년 숙종 8년에 파견된 제7회 통신사 기록.
정사 윤지완을 대표로 475명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 지은이들은 제7회 통신사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7회 통신사는 의사만이 아니라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
한시 잘하는 사람, 서예나 그림에 능통한 사람, 악기 명인,
춤의 명수 등 문화교류를 위한 인재가 선발된 문화사절단."
일본의 요청으로 특별 파견된 사람들은 의원·영원·마상재인
이들은 오늘날 의사·화가, 곡마단의 기예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경로는 한양에서 쓰시마, 쓰시마에서 경도, 경도에서 동경
일본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짐을 운반하기 위해 총인원 30 만명
8만 마리 말이 동원되었고 한양에서 에도까지 6~9달 가량 걸렸다.
통신사의 여정은 화려했지만 매우 힘든 여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평화를 원했던 쇼군들은 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했다.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막부가 쓴 돈은 100만 냥
그당시 막부의 연간 예산은 78만 냥 정도였다 하니 융숭한 대접.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 1876년 강화도 조약,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한합방으로 구체화.
일본.
일본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와 1,000 여 섬나라.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이지만 보다 더 춥고 더 더운 지역
면적은 한반도의 약 1.5배인 37만㎢로 중국의 약 1/25 크기.
태평양 몬순기후로 비가 풍부해 벼 재배와 수력발전에 적합
급한 물줄기는 국토의 3/4 산악지형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
대륙과 이웃한 섬나라로서의 일본은 흔히 영국과 비교를 한다.
영국은 대륙과의 거리가 약 30㎞에 불과하지만,
일본과 한반도와 최단거리 200㎞, 중국과 800㎞
해마다 인구 밀집 지역을 휩쓰는 태풍과 예고 없는 지진
자연재해가 형성한 불안, 체념, 복종은 민족적 집단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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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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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0만 년 전
이때 일본 열도는 동아시아 대륙의 끝부분으로 연결.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구석기 유적이 고르게 분포.
첫 주민들은 남북의 두 방향에서 육로를 따라 이주한 듯.
그들이 쓰던 타제석기와 뼈 연장 등은 점차 세련되어졌다.
빙하가 녹고 충적세로 접어들 즈음 일본에 신석기시대 문화
약 1만 년 전 동아시아 대륙 끝과 이어진 육교가 사라지고
일본열도는 지금의 형태이고 1만 2,700년 전의 토기가 발견
일본의 다양한 토기문화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일본인은 마제석기와 활, 통나무배, 그물을 사용.
사냥감 쫓아 2~3년 떠돌이 또는 4~5명 가족 10가구씩 집단거주
빈부, 신분 차이는 없었고 집단의 어른이 질서를 잡고 협동작업
제사, 배분을 맡았고 농사, 수렵 및 어업으로 자급자족 사회였다.
평균수명은 30세 이하였고 질병과 재해를 막기 위해 주술
토우를 빚어 풍요를 빌었고 성인식 의식으로서 이빨 뽑기.
사람이 죽으면 사지를 구부려서 묻는 굴장 풍습이 있었다.
조몬 사회는 8,000년간 지속하다가 BC 3~2세기 야요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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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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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는 청동기문화가 마감되고 본격적 철기시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막을 내릴 무렵이었다.
수십 년 사이에 조몬 토기는 사라지고 벼 재배와 청동기,
철기를 동반한 새 문화가 규슈 섬의 북쪽에서부터 전파.
목제, 철제 농기구가 등장했으며 수로, 둑, 창고를 갖춘
대규모 농경지와 주거집단 협동작업 농경사회가 형성된다.
원시국가 기초가 마련되고 가야(加耶)토기 문화가 유입.
이 토기가 처음 발견된 도쿄 거리를 본 따 야요이 시대
야요이 문화는 불과 반세기 만에 일본 전역에 확산된다.
야요이인은 조몬인보다는 한반도 남부 고대인에 가깝다.
새 문화에 능숙한 대륙인이 일본열도 조몬 문화를 점령,
중국 춘추전국시대 및 한반도 세력다툼에서 탈락한 무리
이 시대 일본을 대륙에서는 왜라 부른 100 여 개의 소국.
특히 3세기 말 중국과 가장 왕래가 잦았던 야마타이코쿠
무녀출신 여왕 히미코는 조세권과 관제를 갖추었던 세력
아직도 여성의 주술적 권위가 우세한 사회였음이 분명하다.
또 약 30 개국으로 이루어진 원시국가 연합체가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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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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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전후의 동아시아는 정치적 통합과 팽창의 시대였다.
진 왕조가 무너지고, 고구려는 낙랑·대방·현도군을 점령.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고 백제와 신라도 제각기 힘겨루기.
통합과 팽창의 물결이 일본열도까지 미친 기마(騎馬)문화.
3~4세기 경 앞은 모나고 뒤는 둥글며, 기묘한 형태의 고분,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쇠구멍 같은 전방후원(前方後圓) 고분
5세기에는 호(濠)까지 두른 거대한 고분이 평지에 자리잡는다.
가장 큰 것은 피라미드보다 크고 긴 쪽은 약 470m에 이른다.
축조하는데 약 14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리라 추산,
초기 고분에는 청동·거울·옥 등 야요이 후기의 주술적 요소
5세기 중기 고분 안에는 갑옷과 마구, 금·은 장식과 철제무기
중국·한반도·일본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말해주듯,
이 시기가 되면 일본열도와 대륙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진다.
5세기 중국 사서는 중국식 이름 왜왕이 상주문 올렸다는 기사
그러나 일본 사료에는 그러한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이 시점의 일본에 통일된 정권이 나타났다고 보긴 이르다.
다만 중국은 당시 팽창하는 한반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왜는 대내적 통일을 목적으로 외교 접촉이 빈번했다는 사실
또한 가야 지방에서 발굴된 철제·투구·갑옷 기마용 장비,
그리고 전방후원 무덤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한반도의 유적
북방계 기마민족 전법과 기동력을 갖춘, 한반도의 거점세력
분열된 일본열도를 정복해 고대국가를 이뤘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통치이념 불교와 유학, 통치기술, 의술
6세기에 백제세력 미마나 일본부가 수세기 동안 일본을 통치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세력과 함께 왜는 5대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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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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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에 대륙의 고급문물과 지적 체계가 일본으로 유입.
일본 사회에서 고대 통일국가들이 가시화 되기 시작한다.
당시 약 400만~500만 인구 일본 사회는 혈연적 상하조직
최고 권력자 우지가미가 오미(臣), 무라지(連) 가바네(성) 하사.
야마토 중앙정치를 주도했고, 지방호족에게 구니노미야쓰코 직함
우지가미 오키미(大王)가 바로 일본 천황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는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일본사회의 기본적 성격의 기원
이러한 일본의 고대국가 추진력은 주로 백제인들이 제공해주었다.
513년 5경박사(五經博士)가 파견되어 유교를 전했고,
554년 천문학자 왕보손을 비롯한 의학·약학과 역학.
538년에는 성명왕이 불상,불경을 보내어 불교를 전파.
중심지 기나이 고급 기술인력 30%가 한반도 남부 출신
527~528년 규슈 지역의 구니노미야쓰코였던 이와이(磐井)
신라의 사주로 일으킨 반란을 야마토 친백제 세력이 진압
6세기 후반 불교의 수용 여부로 일어난 세력다툼
친백제파 소가 우마코(蘇我馬子) 승리로 돌아갔다.
소가가 592년 조카딸을 스이코(推古) 천황으로 즉위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일본 고대국가 성립.
첫째, 출신을 묻지 않고 인재등용
둘째, 군신, 신신, 신민 위계질서
새 관명은 모두 덕 인 예 신 의 지
스스로 '해 뜨는 곳의 천자'로 칭하고
'해 지는 곳의 천자'로 수 양제를 지칭
수를 이은 당(唐)은 중앙집권체제를 완비
한반도는 삼국통일이 막바지에 와 있었다.
열도에서는 쇼토쿠와 소가가 620년대에 죽고
소가의 아들이 천황가를 핍박하며 전횡했다.
지방 호족들은 세력 확장에 따라 민간 수탈
대흉작과 참혹한 기근도 뒤따랐던 7세기 전반
일본은 국정쇄신과 선진 문물 도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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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과 율령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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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단에 속한 황자(皇子) 나카노 오에와 나카토미 가마타리
64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씨를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일본 사상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를 지어 다이카(大化)라고 하고
'개신의 조(詔)'를 냈고, 당의 제도 문물과 신라 적용례를 따랐다.
일본 국호와 '천황'(天皇) 호칭도 이때 확정
당의 장안(長安)을 1/4로 축소한 새수도 건설.
660년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했다.
이때 백제에 구원 병력을 파견했으나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퇴.
8세기 당나라와 공식사절(遣唐使)도 부활
신라와의 국교도 회복하였고 발해와도 교류
혼슈 북쪽 에조 땅도 복속되어 열도 내의 영역이 확장,
금,동광의 개발, 기술향상과 개간, 관개 수리의 개량 등
지역적인 부가 축적되자 사유지와 호족 세력이 커져갔다.
이를테면 723년에는 개간지의 사용 연한이 완화되었고,
743년 영구 사유지 허용으로 귀족 및 대사원에 토지 집중
영주들은 땅을 넓히고 부랑자·농민 노동력을 끌어모았으며
납세나 노역 의무를 면제받는 등 독자적 재산권 확충에 주력.
율령체제의 핵심인 중앙집권적 정신이 실종되었을 뿐 아니라,
원래 이 체제의 전제였던 과거제도도 제대로 실시된 적 없이
출신 가문에 의한 관리임용이 보통이고 귀족세력 대두는 필연.
다이카 개신의 공신 나카토미 후손 후지와라 가문이 그 전형.
이들은 율령 규정에 없는 간파쿠를 신설하고 국정을 전단했다.
천황 세력은 때로는 후지와라 가문을 배제하는 인사(人事)로써,
때로는 율령의 세부사항 격식(格式)을 편찬하는 제도적 조처로써
율령체제를 중흥하고자 했으나 일시적인 성공을 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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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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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이 보편화되고 고분이 자취를 감춘 것은 불교영향.
지금까지 사찰에서 장례식을 행하는 관습도 이때 정착.
쇼무 천황은 구니마다 사찰(고쿠분 사 : 國分寺)을 건축.
수도에 높이 16m의 대불상을 갖춘 도다이 사(東大寺) 건립.
신라 문서, 당나라 미술품, 아라비아 그림 소장한 부속건물.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는 국가 주도의 불교 문화가 융성
대륙문화 홍수속 피곤한 인민들에게 종교적 안식이 절실
신도(神道)신앙과 불교신앙이 이 시기에 서로 융합.
부처가 일본의 제신으로 변해 나타났다는 권현(權現)
신사에 불탑을 세우고 승려가 신사를 관리하기도 한다.
한자 발음에서 일본 발음을 본떠 만든 50 음도 일본어.
10세기부터 쓰여진 일본어 덕분에 일본문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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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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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만 남은 율령체제 위에서 일본은 새로운 전환기.
10, 11세기에는 장원을 지배하는 영주들이 세력 확장
정부는 장원정리령(莊園整理令)을 내리며 기득권 방어
장원의 영주이기도 했던 사찰과 신사도 독자적 무장 세력.
12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두 전란 호겐과 헤이지의 난
황위계승 문제로 출발했으나 강한 무력이 정권에 밀착.
이 전통은 황족과 외척세력이 중앙정부 권력기반을 장악.
일본은 귀족정치와 군사정치의 과도적 양면성을 보였다.
한편 대송무역 활성화로 중세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진출.
미나모토가 바쿠후(幕府: 막부)를 세우고 군사적인 패자
명목만 남은 황위를 보호한 댓가로 '쇼군'칭호를 받는다.
바쿠후와 쇼군은 12세기말부터 1868년까지 680년간 지속.
한편, 몽골의 징기스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고
1274년과 1281년에 고려의 군함을 타고 규슈로 침공
그러나 모두 폭풍으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퇴각.
"신통력이 가미카제(神風)를 일으켜 침략군을 막아냈다."
신도와 불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득세한 반면,
병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던 가마쿠라 바쿠후는 몰락
이러한 과도기 상태에서 쇼군가(家) 내부문제로 분쟁
혼란중 농촌에서는 이모작과 목화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상공업자들은 동업조합을 조직해 생산과 판매조직 독점
15세기 명나라와 교역을 사전허가 받는 제한된 조공무역
상인 자금과, 바쿠후·다이묘·사찰과 신사 소유의 선박.
도검·동·유황을 주고 동전·비단제품을 받아오는 무역.
그러나, 제한된 무역마저 1550년 이후 끊기자 왜구 창궐.
일본의 영주들과 서부지역 거상들이 뒤 봐주고 자금 투입.
중국과 이조의 해안을 끈질기게 약탈하던 왜구 때문에
건국초의 명은 해안을 봉쇄하고 주민 소개령까지 내렸다.
고려 이성계는 왜구 정벌로 쿠데타에 이르는 실권을 장악.
이조는 임진왜란까지 왜구에 대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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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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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겪고 난 17세기 서유럽
민족국가와 부르주아 팽배 기운이 동아시아 세계까지 도달.
1549년 예수회 선교사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포교
'크리스천 다이묘'가 생겨 교황청으로 사절을 보낼 만큼 활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3 영웅이 일본을 통일.
오다는 아시카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사원 세력을 강타
이리하여 통일기반은 조성했으나 모반으로 오다가 죽자
도요토미가 거대한 요새 오사카 성을 쌓고 완전한 통일
주요 도시와 금은광을 장악하고 영지를 직할지로 편입
인가받은 무사 외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칼사냥 명령'
병농(兵農) 신분을 분리하고, 사농공상 신분 이동 금지
이조에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어달라고 요구한다.
이조가 이에 응하지 않자 도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
1592, 1597년에 십수 만명의 병력으로 이조를 침공한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퇴각함으로써 7년전란은 끝난다.
명나라도 참전했던 국제전쟁이었지만 피해는 조선에 집중.
전쟁폐허 위에 이조에는 봉건사회 재편과 동요가 일어난다.
명은 임진왜란 부담으로 반세기 뒤(1644)에 청(淸)으로 대치
국내에서 힘을 기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일본통일.
모반 가능성 있는 사찰, 신사마다 감시 사찰기구를 두고
마을 단위의 행정기구와 이웃끼리 묶은 연대책임 조직력.
전국적 운송·유통·금융 망이 충실해진 17세기 산업발전
에도 인구 100만 명, 오사카, 교토 35만 명은 서구의 수준.
사·농·공·상의 신분차이가 흐려짐을 볼 수 있었는데,
가부키(歌舞伎), 노(能) 공연 탓에 사무라이가 빚질 정도
성(性)과 돈을 스스럼없이 그려 근세 부르주아 문화 탄생.
1853년 미 해군 제독 매슈 C. 페리가 문호개방을 요구
일본은 이때 변혁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은 바깥 사정에 어두운 쇄국국가는 더욱 아니었다.
조선과는 임진왜란후 400~500명 규모의 통신사절단 왕래
해외 진출도 활발하여 동남아 곳곳에 일본인 거류지 형성
18~19세기 몇 차례 대기근으로 경제성장 침체로 민생 곤궁.
1866년 농민들이 부농·거상·관청을 공격하는 폭동 40 회.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불리는 1868년의 왕정복고
1854년 미국, 영국·러시아·프랑스 등과 통상조약 체결
수입증가에 따른 물가고로 각지에서 서민들의 폭동이 빈번.
1866년말 고메이(孝明)가 죽고 메이지가 15세에 천황 즉위
바쿠후 세력을 토멸하라는 밀칙을 내리며 사무라이 세력 도산.
1873년에는 징병령으로 국민군을 편제로 사무라이 신분은 해체.
일본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산업화에 나섰다.
1877년 가고시마 반란은 진압기간이 7개월 걸린 대반란
옛 무사들의 마지막 반란이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890년 의회정치로 이토 히로부미가 권력의 핵으로 부상.
1894년 영국과 맺은 개정통상조약으로 불평등조약체제 종결.
1874년 일본어부 살해사건때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해결.
근대 일본이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한 출발점이다.
이듬해 이조에 군함을 보내 강화도 서울의 관문 포격
무력시위를 벌려 이조는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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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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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에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규정한 이래
일본의 1차 목표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영향력 배제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을 지원하며 청국과 공동 출병권 확보
1894년 이조의 갑오 농민전쟁 혼란은 일본이 기다리던 일이었다.
일본은 작전, 기동력, 장병들의 사기가 청군을 압도했다.
전쟁 외교에서도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 독립
배상금 외에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등의 일본 할양, 그리고
중국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통상권을 얻었으니 기대 이상의 전과.
막대한 배상금은 금본위제도와 군비증강의 밑천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이조를 해방하는 전쟁이라 세계에 선전.
그러나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따른 국제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전개에 국제적 전기
새로운 일본의 등장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본격적인 등장
시베리아 철도의 착공(1891, 완공 1902), 미국의 관심팽배
청일 강화과정에는 국무성과 대통령도 간여했으며
중국과 조선에서 확보해 둔 기득권도 적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산업국가로 성장한 일본·미국·러시아
새로운 제국주의 팽창세력으로 만난 것은 이때 이 지역.
그러나 내란과 혁명으로 러시아가 곧 탈락함으로써
미·일 두 나라가 남게 되었다. 1890년대 서로 경합,
1898년을 계기로 미국의 폭발적인 팽창에 밀린 일본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장악하는데만 주력하게 된다.
러일전쟁 중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의 필리핀과 조선 독점권을 상호 승인했다.
일본은 같은 해 11월 이조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팽창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일본이 적극개입
하여 '극동의 헌병'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도 얻게 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의 일본은 해외 침략전쟁으로 얼룩진다.
1904~ 05년의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대독선전
중국에 대한 21개 조항 요구, 1918년 러시아 시베리아 침략,
1928년에 시작된 중국 본토의 무력 도발.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거치며 중국과의 전면전이 1945년까지 지속.
1941~45년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을 둘러싼 미국,일본의 최종 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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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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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2세대 만에 부국강병을 달성.
자본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천황중심 헌정체제 수립
1945년 8월 세계 최초 핵공격으로 인한 비극은 하나의 상징.
메이지 헌법 중의원 선거때 45만 명 참여(일본 국민 1%)
1925년 보통선거법에 참정권이 없었던 여성 빈민 식민지인
언론·출판·집회 등 기본권도 1945년까지 줄곧 제한되었다.
189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일어났고,
오이 겐타로 같은 진보적 자유민권론자 출현.
고토쿠 슈스이 가타야마 센 같은 사회주의자 등장
1901, 1906년에는 사회민주당과 일본사회당도 발족.
식민지가 반드시 일본인들을 이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식민지 경영 비용 때문에 타이완 매각을 고려했고,
이조에 쌀 반출이 늘어나면서 일본 농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만주에서의 개발은 패전까지의 투자액도 못 건졌다.
일본 제국주의 일반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
쌀 생산은 100년간 2배, 인구는 3,000만에서 6,500만
20세기 농민의 30%가 소작농
소작료는 1930년대에도 50 %.
20세기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 위주로 노동운동과 결부
1922년에는 일본농민조합이 설립되지만 투쟁 경험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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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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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했다.
1886년 최초의 파업이 있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미국 유학파 가타야마 센이 조직적인 노동운동
노동운동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정점에 달했다.
1920년에는 일본사회주의 동맹,
1922년에는 일본공산당이 조직.
1930년대 전체주의 통제 제도하.
일본의 민중 운동이 비교적 허약했던 까닭은
민중들의 자발적 운동보다 지식인들 이념중심
정치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이지 시대 사상적 규범은 문명개화라는 계몽주의
그 방법론은 서양화 목표에 국가의 독립과 부국강병
민주주의의 본질은 천황제와의 관계가 핵심문제였다.
이 시기에 이토가 우리나라의 안중근에게 암살 당한다.
메이지 '겐로'[元老]들이 대부분 퇴장하면서 세대교체
정치 활동도 메이지 헌법의 틀 안에서 정당 중심으로 발전.
1913년에 정우회 국민당이 언론인과 제휴 정치력을 과시한다.
1918년에는 쌀소동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물러나자
하라 다카시가 정우회 총재로 내각조직한 것이 정당내각 시초.
1924년 선거에서 다수당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가 총리
중의원의 다수당이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적 관례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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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침략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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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는 유신 이후의 반세기를 결산하듯
성숙한 자본주의 보편적 면모가 여실히 나타났다.
그러나 1926년 쇼와가 즉위하고 1930년대부터 파국
192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인한 세계 대공황
자원과 시장을 해외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의 타격은 컸다.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쳤다. 금수출 금지
산업합리화 조치 등으로 해결될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뉴딜 정책 등 체계적 차원의 대개혁으로 헤쳐나갔고,
이탈리아 독일은 전체주의 부상, 일본은 군인들이 체제 변혁
문제는 중국이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전면 무력 도발,
이듬해에는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溥儀]를 수반으로 앉혔다.
도쿄에서도 기성 정치체제 타도와 신체제 수립 거사가 줄을 이었다.
사관 생도 또는 현역 장교들이 1932년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
1936년에는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 등 정치지도자들을 죽였다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움츠러들었고
군부는 오히려 발언권이 강화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메이지 시대 이래 교육칙어(敎育勅語)와 군인칙유(軍人勅諭)
충군·애국 및 천황에의 절대적 복종이 핵심인 유신주의자들
의회민주주의 체제와 천황주의라는 이념과 체제가 그들의 목표.
1910~20년대 유럽은 전후처리에 골몰,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에 몰두해 있었고,
미국은 레닌주의에 대응한 14개조 윌슨주의
따라서 일본의 대외팽창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1922년의 워싱턴 회의,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
미국과 영국의 견제는 일본 군부세력의 불만 폭발.
군부는 가상적국 1순위 소련 대신 미국으로 바꾼다.
미국 내 일본 이민을 둘러싼 반미감정도 커져갔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일본인 배척과 적대행위가 그 배경.
1924년 극에 달한 일본의 반미여론은 선전포고까지 거론.
일본은 타락한 천민자본주의 미국에 대한 경멸을 부추겼다.
이러한 서양에 대비한 동양을 순수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고
일본은 서양인들의 유색인 박해사상을 응징하자고 대외 표명.
1937년에는 '국체의 본의'를 배포하며 국수주의를 고취.
이 이념은 천황 중심이고 천황 이름으로 모든 죄를 단죄.
일본 파시즘은 유럽 파시즘과 손 잡고 전쟁으로 치달았다.
1933년일본은 만주침략을 제소하는 국제연맹에서 탈퇴
1936년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이 방공협정을 맺는다.
일본은 중국으로 파고들어 동북아시아 경제 블록을 다졌고
남방으로 자원 확보에 나서며 1937~38년 중국은 일본 식민지.
1940년 9월 군부는 내각을 사퇴시키고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
이조에서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하게 한후 세계정복을 위한 전시체제
1941년 7월 고노에 후미마로 2차 내각은 '대동아 신질서' 수립을 공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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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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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은 태평양 지역에서도 공동전선을 폈다.
1939년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고철류와 석유류 금수, 그리고 일본인 자산 동결조치
영국은 미얀마 루트를 통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본격 지원,
미국·네덜란드로 이루어진 대일 봉쇄망 ABCD 라인이 형성.
일본의 기업가, 외교관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
영미 결의는 굳어져 있었고 일본 국내는 강경파 내각이 형성.
1941년 11월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자 12월 일본은 진주만 기습.
3년 8개월 전쟁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제압 후반에는 미국이 우세.
1945년에는 본토의 일부인 오키나와 섬이 미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 공군이 일본의 대도시를 공습.
전쟁이 막바지에 일본은 자원과 군사력 열세는 맨몸 수준.
전쟁 초 240만 병력이 말기에는 학생까지 동원해 700만 명
어린 소녀까지 포함된 여자정신대로 장병들의 성욕을 충족.
한국인 70만 명, 중국인 4만 명을 징용하여 광산, 막장에 투입.
물속 인간어뢰 가이텐과 하늘 가미카제 특공대로 미국 함대 공격
자살 공격에 선발된 이들은 한결같이 천황 만세를 외치며 산화했다.
그러나 혼슈 대도시까지 미군의 소이탄 공습으로 잿더미
8월초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1발씩 핵공격
수십만 민간인이 숨진 1주일 뒤 일본 왕은 무조건 항복.
중일전쟁부터 일본군인 230여 만 명, 민간인 80만 사망.
중국은 1,000만~2,000만 명,
인도네시아·베트남은 각각 200만 명,
필리핀은 100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한국으로,
전쟁기간의 인적·물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36년간 일본의 강점에 이어 국토가 분단되었다.
1945년 9월 2일 조인딘 일본의 항복문서.
미군의 주둔과 침략시의 즉각 참전을 규정.
일본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극동군사재판에서
1급 전범 28명 중 7명을 교수형, 16명 종신형.
그러나, 중국 정세는 미국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
전쟁 중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국제적으로 중국을 대표
대내적으로는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우세를 유지
1946년 공산당 소탕을 노린 야심적 대공세가 역공을 불러
1년 사이에 국민군 1/4을 잃고 황허강 이북은 공산군 수중
미국의 집중적인 원조도 효력이 없어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는 타이완을 제외한 전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판도
1948년 8월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졌고,
10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대일정책의 기본을 '민주화'로부터 '경제부흥'으로 대선회.
12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 16명 1급 전범이 모두 석방된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을 전후로 공산당 색출 추방
반면 11월에는 옛 공직자와 군인들에 대한 추방령 해제.
3년간의 6·25전쟁은 일본을 군수 보급 기지로 만들었다.
군수물자 생산이 주도하는 이른바 '특수'(特需)가 일어나
광공업은 전쟁 전의 수준을 되찾으며 고도 경제성장 지속.
1960년대 연평균 성장률 11.9%~ 1980년대까지 평균 7.7%
1968년 국민총생산량(GNP)이 미국에 이어 자본주의 세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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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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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의 밑바탕에는 대미 의존도가 깊게 깔려 있다.
지난 30년간 수출의 25% 이상, 수입의 평균 20%가 미국
수입품 대부분은 식량과 원자재, 수출품 대부분은 공산품.
총수입액의 75% 이상이 식품·원자재·에너지
총수출액의 95%가 공산품일 만큼 의존도는 심각.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최근 핵무기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지만
일본이 미국을 위협할 군비 증강은 희박.
U N 깃발 아래 평화유지군 범주에 속한다.
20세기 역사는 미국과 일본 두 신제국주의 경합
태평양전쟁은 그 마지막 무력 대결이었다는 사실
전쟁 수단을 영구히 부인한 헌법 제 9조의 개정
20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반성.
일본은 단기간에 국위를 선양하고 대제국을 건설
경제대국으로서 주체성을 넓혀온 20세기 후반 역사
일본은 '전통과 개성'이란 2개의 잣대로서 균형 유지.
일본 천황은 조상이 백제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천황가문은 원래 성씨를 쓰지 않았던 점이 특징.
천황 가문의 뿌리는 김해 김씨라는 설이 지배적.
김해 김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시조로 알려졌다.
원래 김씨는 고대중국에서 금을 추구하는 민족의 성.
일본은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멀고 먼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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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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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이 위나라 황제를 폐위시키고 세운 진(晉)
서진(西晉:265~317) 동진(317~420)으로 나뉜다.
동진은 6조(六朝) 가운데 하나.
무제(武帝) 사마염은 유능하고도 정력적인 군주.
268년 중국 최고의 법전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280년 사마염이 오(吳)를 무너뜨린 후 중국 통일.
사마염은 통일 국가를 계속 유지해나갔기에,
멀리 로마 사절단이 알현하러 왔을 정도였다.
진나라는 불교의 철학·예술·건축영향을 많이 받았다.
290년 사마염이 죽고 후임 황제들 무능으로 잦은 내란
황족들은 제국을 분할하여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권력
특히 300년 이후 황제를 시해하거나, 황제가 제위를 포기
제국이 허물어져가며 진나라 왕조는 쇠망기 유형을 보인다.
진나라는 농노와 사병을 거느린 대지주 호족들의 봉건 체제
흉노족과 북방 유목민들이 변경지방에서 반란.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뤄양(洛陽)을 약탈
황제를 죽이고 옛 수도 장안(長安)에 새 황제 옹립.
진의 수도 뤄양과 장안이 이민족에게 함락되고
파괴된 것은 중국 전체에 충격적 파문을 던졌다.
진이 망한 뒤 200년 이상 남북조(南北朝) 시대.
중국에서 수많은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317년 사마예가 난징(南京)에 세운 동진,
중국 북부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로 구성.
반란, 음모, 전쟁 등 편할 날이 없던 동진.
서진과 마찬가지로 대지주 세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정치적 난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형성
동진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미술이 발달했다.
중국 최초의 위대한 천재화가 고개지(344~406?)
동진 궁정을 아름답게 장식한 선화(線畵)의 거장
또 다른 유명한 인물은 초서(草書)의 거장 왕희지
'그 아들 왕헌지는 아버지에 이어 초서의 2인자.'
동진은 몇 차례 북부 공격을 이겨내고
347년에는 쓰촨[四川] 지방을 수복했다.
승리를 거두는데 공이 컸던 무장 환온(桓溫)
황제를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환온과 꼭두각시 황제는 얼마후 사망.
383년 동진은 페이수이[水] 전투에서
북부 유목민 국가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400년 조정에 반대하는 지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402년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무장들은 더욱 큰 권력
415~417년 동진은 서북 중앙 아시아까지 영토확장.
그러나 동진은 궁중 음모가 일어나고 무장들이 정변
처음 제위를 찬탈한 것은 환현(桓玄)이었는데,
그는 북조 왕조들을 물리친 유유(劉裕)에게 타도.
유유는 황제를 죽이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스스로 제위에 올라 세운 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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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六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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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이 망하고 수(隋)가 중국통일하기까지 과도기(220~589).
중국 중부 난징(南京)에 수도를 두고 흥망성쇠를 거듭한 6 왕조
오(吳:222~280)·동진(東晉:317~420)·유송(劉宋:420~479)·
남제(南齊:479~502)·남량(南梁:502~557)·남진(南陳:557~589)
이와 같은 시기에 중국 북부 중앙 아시아에서
침입해 온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들 북조(北朝)
뤄양[洛陽]에 도읍을 세웠던 북위(北魏:386~534/535),
안양[安陽]에 도읍을 세웠던 동위(東魏:534~550),
장안(長安)에 도읍을 세웠던 서위(西魏:535~556/557),
안양에 도읍을 세웠던 북제(北齊:550~577),
장안에 도읍을 세웠던 북주(北周:557~581)
이 시대 명칭이 6조가 된 것은
중국 문명의 중심이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해갔음을 반영한다.
새로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된 남조(南朝)의 왕조들
양자강을 경계로 북쪽 침략자로부터 떨어진 곳에 도읍
이 시기에는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끊임없이 이민족 침입
중국 북부 전역을 통치하면서
중국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
그때까지 사회질서를 유지해오던 유교이념이 쇠퇴
도교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불교가 유입되며 큰 변화
불교는 민중종교로 번성했고 북조 지배층도 불교를 수용
이는 불교관념이 완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경배와 선행을 강조해 그리스도교와 유사 영향력
도교도 소수 신앙에서 벗어나 대규모 민중종교가 되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혼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약학·천문학·식물학·화학에서 대단한 발전한다.
외바퀴 손수레와 돛이 발명되고, 석탄이 연료로 사용.
문벌귀족 가문이 형성된 것도 6조시대.
말기에 문벌귀족의 지배가 확립되었으며,
당대(唐代:618~907)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 나타난 변화와 불확실성은
자연스럽게 예술에 반영되어 꽃피웠고,
정치적으로 혼란기를 넘어서게 되었다.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며 문학과 서예가 중시
시 작품이 많이 나와서 사랑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잦았던 북조에서는 군사적인 영향이 문학에 반영
〈목란시 木蘭詩〉와 같은 작품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내용은 남장 소녀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운다는 것이다.
조식(192~232)·도연명(365~427) 서정시인의 시가 각광.
도교의 영향으로 작가 자신의 개성이 담긴 표현을 했고,
지적 대화와 논쟁이 유행했고 음률있는 염불이 성행했다.
청각이 섬세해졌고 중국어 음조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졌다.
예술은 세속적이고 한족과 북방의 침략자들 간 대립은 심화.
문화적인 경쟁의식과 전통문학과 예술작품 보존의지가 고조.
북조에서 타타르족의 침략을 알리기 위한 군사 악기들
나팔·북·퉁소 같은 것이 순수한 악기로 사용되었다.
한편 북조에서 불교가 성행하여 북위에서 절을 지었다.
불교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시각 예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자극은 남조에서 좀더 서서히 나타났지만,
4세기 북조 피난 유민과 인도차이나에서 온 승려들
예술을 발전시켜 난징은 이미 중국 문화의 중심지.
시인 외에도 많은 위대한 화가와 서예가가 배출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예술비평까지 해 '6법론'(六法論)을 제시
초기의 화가들은 주로 불교와 도교를 예술 주제로 다루었다.
시인·음악가·조각가로서 다재다능했던 대규(戴逵)
고개지는 문인화(文人畵)의 전통을 세우는 데 기여.
사원이나 수도원의 건설과 더불어 건축예술 발달.
사원이나 수도원은 4~5세기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북조는 485년 북위가 도읍을 뤄양으로 옮기며
건축가들이 새 도읍에 화려한 도시를 건설했다.
남·북조 모두 벽돌과 돌을 층층으로 쌓은 탑을 만들었다.
북조의 탑은 인도 탑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인 치장을 했고,
남조의 탑은 꼭대기가 곡선 모양인 지붕처럼 되어 있었다.
벽면에 채색한 벽화를 그렸고
사원의 벽에는 부조(浮彫)된 인물상
때로 동굴에도 벽화나 인물의 부조상.
동굴 속 북조 불교벽화 일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대(漢代)에 유행했던 방대한 규모의 인물상 조각
날개 달린 사자나 기타 기념비 같은 작품으로 대체.
6조시대 문학의 특징이 개성과 우아함에 있었듯
시각 예술에서도 모든 분야에 걸쳐 우아한 모습.
6세기초 남조의 회화에서는 매우 우아한 형태가 발전,
늘어진 옷감과 고급 의상을 걸친 5세기 궁중 인물화.
남조에 인구가 증가하며 양자강 하류에서 만든 도자기
동부 도요지의 물병이 대표적이고, 북방은 청자가 개발
여기에 북조 지배층이 수입해온 예술양식이 이국적인 향취
결국 수나라가 중국통일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놓은 것은 6조의 문화생활
북조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유목민족의 왕조들
지배권을 확립하고 정통성을 인정 받으려고 중국화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에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북위의 경우 중국에 침입해 들어온지 1세기도 못되어
중국에 동화되어 자기네 고유 의상까지 법으로 금했다.
덧 말.
6조시대 동진은 일본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듯.
도자기 문학 예술양식, 음악 건축 탑 사찰 건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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