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설화.
지리산은 삼한시대부터 치열한 영토 경계선.
지리산은 변한에서 가락국 영역으로 뒤바뀐다.
진한 영역은 신라, 마한 영역은 백제가 점령한다.
고구려는 한수 이남 신라 백제와 영역다툼.
지리산은 삼국시대 격전지이자 삼국 경계선.
하여, 고구려 건국 설화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도움될 듯..'
....................................
5가지 설화의 목차(目次).
1 해부루와 금와왕 설화,
2 해모수 설화,
3 금와왕과 유화부인의 설화,
4 주몽의 탈출과 고구려 건국
5. 주몽을 애워싼 5 여성의 암투.
.................................................
1. 해부루와 금와왕 설화.
부여왕 해부루에게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날마다 산천에 제사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해부루 왕이 타고 가던 말이 곤연이라는 곳에 도착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려 이상하게 생각한 해부르왕
그 돌을 굴렸는데 그 밑에서 금빛 개구리를 닮은 아이
해부루왕은 하늘이 준 아이라며 기뻐했고
아이 이름을 '금와'라 짓고 태자로 삼았다.
2 해모수 설화,
그후 부여 국상 아란불이 해부루왕에게 말했다.
"일전에 천제가 내게 내려와 말씀 하셨읍니다."
'장차 내 자손이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하려 하니
너는 비켜가거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다.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자랄것이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
아란불은 해부루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옯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할 무렵 해부루왕이 살던 옛 도읍
자칭, 천재인 해모수가 나타나 북부여라는 나라를 세웠다.
.............해모수.......................
고구려 건국시조 동명왕(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지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리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는 두 여동생들과 물가에 놀러 나왔다가
해모수를 만나 웅심산 아래 압록가로 끌려갔다.
큰 딸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갔다는 전갈을 받은 하백
급히 달려와 해모수와 대결을 벌였는데,
하백이 잉어로 변하면 해모수가 수달이 되고
사슴이 되면 승냥이가 되고 꿩이 되면 매로 변신
하백은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딸과 혼인시켰으나 하모수가 딸을 버릴까 걱정
하무수에게 술을 권해 크게 취하게 한 다음,
딸과 함께 가죽수레에 넣어 오룡거에 실어서
하늘로 올라가도록 준비했는데 술이 깬 해모수
유화의 황금비녀로 수레에 구멍을 뚫고
홀로 빠져나와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반면 하백은 딸이 가문을 욕되게 했다고
유화의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놓고
우발수가에 버렸는에 어사(漁師) 강력부추가
그물에 걸린 여인을 건져 금와왕에게 바쳤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입술을 3번 잘라낸 뒤에야 말을 했다.
왕은 그녀가 해모수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에 거처하게 했는데 유화는 해를 품고
주몽을 낳았으니 그가 곧 고구려의 건국시조.
'해모수는 다섯 용의 수레를 타고, 따르는 사람 100 명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고 풍악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라는 등의 설화가 전해온다.
'아침에는 지상에 살고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간다'
이는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해모수의 '해'가 오늘날의 해와 같은 발음이라고도 추정.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은 천신계와 수신계 집단의 결합
그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과 주몽의 아들 유리는 천신계.
........................................................
3 금와왕과 유화부인의 설화,
동부여 해부루왕이 돌아가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어느날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만난 여인
"저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어려서 아우들과 나와 놀고있을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하면서 저를 옹심산 밑
압록강가 집에서 정을 통한 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우발수에 귀양보냈습니다."
금와왕은 이상히 여겨 그 여인을 깊숙한 방에 가두었다.
그러나 햇빛이 그녀의 몸을 따라다니며 비추더니 곧 임신
얼마뒤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 바가지만 하였다.
금와왕은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았고
또 길에 버리자 소가 덮어주었고 깨려해도 깨지지 않아
그 알을 여인에게 돌려주자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알속에서 나왔는데 영특하고 준수한 생김새였다고 한다.
그 사내아이가 일곱살이 되었는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고 활을 잘 쏴
부여사람들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
히여, 그 사내아이를 주몽이라고 불렀다.
4 주몽의 탈출과 고구려 건국
금와왕 일곱 아들은 모두 주몽보다 재능이 떨어졌다.
큰 아들의 이름은 '대소'였는데, 어느날 금와왕에게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불길한 놈이니 죽이자"고 주장.
하지만 금와왕은 활을 잘쏘고 사냥을 잘한다는 죄명으로
주몽을 죽이면 백성들이 비웃을것 같아서 죽이지 못하고
마구간지기를 시키자 주몽은 좋은말은 먹이를 적게 먹여
여위게 만들고 나쁜말은 잘먹여 살찌우게 했다.
금와왕은 살찐 말만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금와왕은 사냥을 나가서는 주몽이 활을 잘 쏘았으므로
그에게는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은 적은 화살로
짐승을 많이 잡아 왕자 및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고자 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이사실을 알고
주몽에게 달아나 나라를 세우라고 말한다.
주몽은 세 사람의 신하를 데리고 달아난다.
떠나기 전날 밤 주몽은 임신 중인 아내에게
한토막의 칼을 신표로 주며 장차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자신을 찾아오게 하라고 일러두었다.
주몽은 엄체수에 다리가 없자.,일갈.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가 다가오는데
강물이 앞을 가로막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주몽의 외치자 강물에서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어별교를 만들어주어 주몽 일행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대소의 추격군은 되돌아갔다.
금와왕의 압박에서 벗어난 주몽일행
졸본부여의 영토인 모둔곡이란 요새에
터를 잡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세력이 어느정도 커지자
주몽은 졸본부여의 왕을 찾아가 담판.
졸본부여왕 연타발은 이미 대서가 기운것을 알고
자신의 딸을 주몽에게 주며 사위로 삼았다.
졸본부여를 주몽에게 넘긴다는 의사표시.
주몽일행은 모둔곡에서 베옷입은 사람과
장사옷입은 사람과 마음옷입은 사람을 만나
이름을 물으니 그들은 각각 제사, 무골, 묵거라고 대답.
주몽은 그들에게 극씨, 중실씨, 소실씨란 성을 주고
함께 나라를 세우자고 하여 졸본천으로 갔다.
졸본땅이 기름지고 아름답고 험고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 상류에 집을 짓고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를 성씨로 삼았다.
이떄 주몽의 나이 22세로 한 효원제 건소2년.
......................................................
......................................................
고조선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고구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가 아닌 옛 고구려 영역.
즉, 우리나라는 그 역사의 흔적만 갖고 있는 고구려.
삼국통일 당시 대부분 당나라로 넘어갔던 고구려 영토.
아울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영토도 우리 것이 아니다.
한술 더 떠, 중국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
'이젠, 뒤늦게나마 바로 알아야 할 고구려 역사.'
고대 국가의 건국은 대체로 건국 신화와 함께 시작.
고구려 건국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이어 받았다.
고구려와 부여의 공통점은 새를 숭배하였던 민속신앙.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신화속 인물.
주몽은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이다.
부여에서 동부여로 귀양갔다가 동부여 왕의 눈에 띤다.
금와의 왕궁으로 들어와 낳은 알에서 주몽이 태어난다.
주몽은 동부여 왕실에서 7명의 왕자와 함께 성장하였다.
동부여의 왕태자 대소는 주몽의 비범함을 두려워하였다.
유화는 주몽이 죽을까봐 왕궁에서 떠날 것을 권한다.
주몽은 어머니 권고에 따라 신하 셋을 데리고 떠난다.
주몽은 모둔곡을 지날때 만난 세 사람을 신하로 삼는다.
주몽은 졸본천에 이르러 비류수가에 고구려를 세웠다.
나라를 세울 때 주몽의 나이 22세로 한나라 건소 2년.
하여, 고구려 대대로 왕이 취임하면 동명묘에 가서 제사
....................................................
....................................................
고구려는 아시아 동부지역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제국.
BC 37년 건국 후 668년 멸망할 때까지 705년 간의., 긴 역사
고구려도 처음엔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역에서 미약하게 출발.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부여국 출신의 추모왕(고주몽).
그가 부여를 탈출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는 궁궐조차 없었다.
고구려 주변엔 비류국, 선비, 부여, 한 같은 강국이 많이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굴복하여 속국으로 살아야 할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강한 리더쉽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다.
주변의 비류국, 옥저, 행인국, 양맥 같은 작은 나라를 정복한 고구려는
AD 1세기 초에는 부여국마저 압도하는 강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의 문화적 토대를 바탕으로 안정 기반을 닦았다.
1세기 중반 태조대왕 시대엔 후한의 동방군현인 낙랑, 현도, 요동을 공격
이들을 서쪽으로 쫓아내고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평야지대로 진출을 했다.
246년 고구려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위나라에게 일시 함락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력을 회복하여, 위나라의 거듭된 공격을 격퇴했다.
또 북쪽의 부여와 숙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4세기 초 미천왕이 낙랑, 대방군을 소멸시켜버렸다.
그러나 342년 모용 선비족의 침략으로 다시 함락되고,
371년에는 남쪽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는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고구려의 위기를 극복
율령을 제정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불교를 도입해 사상의 다양성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주력하며 두 왕 통치시기에 국력을 다졌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는다.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고, 백제 가야, 왜를 굴복시켜 조공을 받았다.
북쪽 숙신과 동부여, 서쪽 거란족,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정벌.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 시대에는 북쪽으로 더욱 세력을 넓혔다.
대흥안령에 위치한 지두우를 유목제국인 유연과 함께 분할하여 차지
남쪽으로는 경기만에서 경상북도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지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넓어져., 북쪽 영역은 동류 송화강,
서쪽은 요하 넘어 의무려산, 동쪽은 연해주 남부에 이른다.
고구려는 만주 전역과 연해주 일대,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
거란, 말갈, 지두우, 신라, 예 등이 속국과 속민의 형태
당시 고구려는 천하에서 가장 신성한 나라로 자부한 제국.
5-6세기 고구려는 유목제국인 유연, 황하 유역에 선비족이 세운 북위,
양자강 유역에 한족이 세운 송나라 등과 함께 동아시아 4대 강국의 하나
고구려는 만리장성 동쪽 세계를 지배한 주변국에서도 인정하였던 강대국.
고구려 전성기에도 닥친 바 있던 한 차례 위기.
540년대 왕위계승권을 놓고 귀족간 다툼이 벌어진 후,
55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제국인 돌궐이 공격해오고,
이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양국이 남쪽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를 주고, 돌궐 전쟁에 승리.
하지만, 더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된 것은 6세기 후반에 등장한 수나라.
수나라는 황하와 양자강 일대에서 자웅을 겨루던 나라들을 통일했다.
수나라는 초원을 지배하던 돌궐마저 굴복시킨 다음 고구려와 격돌한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 개발에 박차
612년 고구려는 수백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온 수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살수 전투에서 적의 별동대 30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는 등,
4차례에 걸친 수나라 공격을 막아내, 수나라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멸망한다.
30여 년후 고구려는 수를 계승한 당나라와 또 다시 전쟁.
645년 서부 변방의 군사요지인 신성과 건안성, 안시성과 주필산 전투
'중국 최고의 제왕' 당 태종이 이끈 수십만에 달하는 당군을 격파했다.
661년 당은 수십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다음 해 2월 실패.
고구려군은 당나라 주력군을 모두 궤멸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야욕을 분쇄했다.
642년 권력을 쟁취한 고구려의 연개소문
645년과 662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그의 독재로 고구려는 인재 등용 폭이 좁아들고,
고구려는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해져 쇠퇴해 간다.
연개소문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자식간 내분.
첫째 아들 남생과 둘째, 셋째인 남건, 남생 간 내분.
이 싸움에서 패한 남생은 고구려를 배신한다,
적국인 당에 투항해 고구려의 고급정보를 제공.
결국,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 공격으로 멸망.
고구려의 멸망 후, 동아시아는 당 중심의 단일 체제.
고구려인들이 옛 고구려의 재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결국, 대조영이 698년 발해를 건국해 고구려의 대통을 계승.
발해(698-926)는 국서에 고려왕이라 표시한 고구려의 계승자.
발해에 뒤이은 고려(918-1392) 또한 고구려 국호를 계승.
고구려는 후기에 국호를 '고려'라 불렀기에 그 국호를 계승.
고구려가 우리나라의 고대국가 임을 알게해주는 설화가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고구려 역사에서 비롯된, 요즘 유행어 '온달 콤플랙스'.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 출세한 사람으로 알려진 바보온달.
능력있는 여자를 만나 출세하려는 심리가 `온달 콤플렉스`.
`삼국사기`에서 온달의 바보스러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고,
가난하지만 노모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서민으로 씌여져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
고구려 평강왕 때 온달이라는 착한 사람이 있었다.
용모는 괴상했으나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했다.
그당시 '평강왕의 딸' 평강공주는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농담했다.
평강공주가 성장해 시집갈 나이인 28세가 되었을때
부왕은 귀족인 상부 고씨의 집으로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다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했다.
공주는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병약한 말을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
여기에서 온달의 뛰어난 실력은 왕에게까지 알려졌다.
그후 후주 무제가 침략하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이란 벼슬이 내려진다.
다음 왕 때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찾으려 출전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이때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설화로 계승.
그 설화가 <삼국사기>에 수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
5.주몽을 애워싼 5 여성의 암투.
빼앗긴 고조선의 하늘을 되찾고
고구려의 하늘을 드넓게 연 주몽
주몽을 애워싼 5 여성이 벌린 암투.
소서노, 유화, 여미을, 원후, 예부영.
주몽의 모친인 유화는 비련의 운명에서
모성애가 강한 영웅의 어머니로 변신한다.
금와왕의 부인 원후는 남편의 사랑을 유화에게 뺏기자
두 아들(대소, 영포)을 왕으로 등극시키려 악역을 자처.
부여의 신녀(神女) 여미을은 제사장.
금와왕은 주요 사안을 결정할 때마다
예지력을 지닌 그녀의 자문을 받는다.
장성한 아들을 둔 3 여성이 벌리는.. 암투.
그리고, 주몽을 사랑하는 두 여인 간.. 시샘
우리나라 역사 상 두 나라를 건설한 여걸 소서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후 사랑에 배신당한다.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둔 돈 많은 과부 소서노.
8세 연하의 주몽에게 몸도 주고 돈도 주고
결국에는 배신당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주몽은 심성이 착한 예부영과 결혼해 왕통을 잇는다.
황후가 못 되고 주몽의 둘째 아내로 주저앉은 소서노.
뼈저리고 살떨리는 절망감과 애증 속에 살아가는 운명.
쫓겨다니는 주몽과 해모수를 보호해주겠다는 소서노
그 제의를 거절한 채 부영낭자에게 마음이 기운 주몽.
소서노의 질투심이 먼훗날 두 나라를 일으키는 원동력.
백제 건국설화.
부여에서 와서 '유리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
주몽은 졸본에서 결혼해 큰아들 비류, 작은 아들은 온조.
그런데 주몽은 부여에 두고 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있었다.
유리도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동네 아주머니가 이고가는 물동이를 쏘아 맞출 정도.
하루는 그 여자가 화를 내며 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비 없는 자식! 버릇없이 남의 물동이를 깨다니."
유리는 진흙덩이 화살로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메웠다.
집에 돌아온 유리는 그 일이 겪고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 되시는 분
남쪽 나라를 세우셨는데 떠날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단다.
네가 아버지를 찾아오려거든 내가 감춰둔 물건을 찾아오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감추어 둔 물건.'
어머니 말씀을 듣고 유리는 산골짜기마다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지친 유리는 집 기둥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 기둥을 살펴보니 일곱 모서리로 난 소나무였다.
또 일곱 모서리 난 주춧돌이 소나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그 소나무 기둥 구멍 안에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이 있었다.
유리는 기뻐하며 아버지를 만나려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왕에게 가지고 온 것을 꺼내 보였다.
주몽은 자신이 갖고 있던 칼 조각을 그것과 맞추어 보았다.
두 조각은 하나로 이어져 피가 흐르며 완전한 칼로 변했다.
주몽은 유리가 아들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주몽의 두 아들은 유리가 태자가 되자 고구려를 떠난다.
그러자 신하들 가운데 오간, 마려 열 명이 따라 나섰다.
이들이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도 뒤따랐다.
한산에 도착후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비류는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한다.
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미추홀(인천)으로 간다.
온조는 부아악에 도읍을 정하여 하남 위례성이라 하고
열 명의 신하들 도움으로 세운 나라 이름이 십제(十濟)
그 뒤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扶餘)씨라고 하였다.
한편,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힘든 곳.
비류는 온조가 자리 잡은 위례성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백성들과 신하들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때문.
비류를 따랐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비류는 곧 병사했다는 설과 새 나라를 건설했다는 설이 있다.
비류가 바다를 건너 건설한 새 나라가 왜(일본)라는 설도 있다.
백제 26대 성왕이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이전.
당시 사비성으로 천도후 국호로 불렀던 '남부여'
즉 백제 왕족이 북쪽에 있던 부여 출신임을 강조
'그당시 백제의 왕족들의 성씨였던.. 부여.'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는 중국의 고대국가 부여.
한반도 전통 풍습은 부여와 상당 부분 일맥상통.
고대 일본 백제 고구려 왕실의 뿌리는 부여 인듯.
부여.
중국 만주 서북부 예맥족의 고대국가(북부여).
부여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puhu'에서 유래.
또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夫里) 유래설.
BC 1세기 중국 문헌 기록을 보아 BC 2세기 경 고대국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아주 먼 곳에서 이주해 온 민족
위략 기록에는 북쪽에서 이주해 온 민족 시조는 동명(東明).
이 기록들 공통점은 부여 민족은 만주 이외에서부터 이동.
그러나, 그 시기나 경로는 베일 속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
.....................................................
3세기 무렵 부여는 서쪽으로 오환(烏丸)·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婁)와 닿았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선,
서남쪽으로는 요동(遼東)의 중국세력과 마주 닿아 있었던.. 부여
그 중심은 부여성(夫餘城)이고 사방 2,000리 평야지대를 영역.
부여성 위치는 오늘날 창춘(長春) 눙안(農安) 일대로 추정된다.
금(金)을 세운 완안부(完顔部) 발흥지 아청(阿城)도 부여 영역.
한대(漢代) 유물이 다량 출토된 지린(吉林) 지역은 초기 중심지
눙안 일대를 후기 중심지로 보지만 유적은 아직 미확인 상태이다.
부여의 초기 정치 체제는 일종의 부족 연맹 공동체 성격
왕은 족장회의에서 선임되었고 주술 제사장 역할을 겸임.
흉년이 들면 주술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져 왕도 교체
흉년이 심할 경우 왕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부여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왕의 제사장적 성격은 퇴색되고
통치자 권한이 강화되어 3세기 전반에 왕위의 부자계승.
왕 밑 직위로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
저가(猪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가'(加)는 독자 세력을 지닌 족장으로 귀족회의 구성원
부여 국정에 참여했고 대가(大加)는 수천 호를 다스렸고
소가(小加)는 수백 호를 자치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통치.
왕은 대가 소가의 대표이자 그 자신도 대가의 하나였다.
따라서 대가 소가 개별 세력기반들에는 간여하지 못했다.
가가 지배하는 읍락은 호민(豪民)·일반민·노예로 구성
호민은 철기구 제작 및 특수업무를 담당 기술자,
종교행사를 담당하는 샤먼, 부유한 민호 등이었다.
일반민들은 목축 농경에 종사했고 각자 무기를 지참.
전쟁시 병사로 출전했고 노약자들은 식량운반을 담당
대인(大人) 족장층은 금은 장식 모피갓과 비단옷 착용.
노예는 족장층과 호민층 소유로 농경·목축·노동에 동원
이들은 주인의 장례 무덤에 순장되었고 그 숫자가 100 여명
노예는 전쟁·형벌·부채 등 제도적인 방법으로 공급되었다.
부여의 법률상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예로 삼았으며
절도를 한 사람은 12배로 배상하게 제도적인 법률로서 보장.
부여인은 농업과 목축을 겸했으므로 기마에도 능했다.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 가축이었고 오곡을 생산.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특히 유명해 중국에도 수출.
부여는 뛰어난 기마술로 오랫동안 만주의 패자로 군림.
백제·고구려도 부여족의 일부 세력에 의해 건국되었다.
부여는 흰옷을 즐겨 입었고 매년 12월 영고 대축제를 거행
영고에는 노예와 외래인을 제외한 모든 부여인이 참여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결속
또한 이 기간에는 죄인 형벌을 감하고 죄수를 석방했다.
수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대소 족장이 모여 하늘에 제사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처리하는 것이 부여의 전통.
영고는 12월에 시작하는 공동 수렵 의식을 전통으로 계승
부여 연맹체 사회 통합과 유지 결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혼인할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의 질투를 나쁘게 여겨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렸다.
만약 친정에서 딸 시신을 갖어가려면 소와 말을 보내야 했다.
이것은 혼인 때의 내준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부여는 해마다 5월에만 장례를 지낸 독특한 전통적 풍습
여름에 죽은 시신은 얼음으로 부패를 방지 후 5월에 장례.
.......................................................
.......................................................
부여는 대평원 지대에 자리잡아 주변 침략을 받기 쉬웠다.
이런 지리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군사력을 확보
서남쪽 중국과 긴밀한 외교로 타 유목민 침략 세력을 견제.
건국 초기에는 동쪽의 읍루를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했다.
BC 2세기 무렵 압록강 일대 고구려가 점차 세력 확대하자
만주 일대를 장악한 부여는 고구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부여는 남쪽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과 외교를 강화.
부여왕 위구대(慰仇臺)는 120, 136년 후한(後漢)을 방문.
요동을 지배한 공손씨(公孫氏)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244~245년 위(魏)와 고구려 전쟁 때 위군에게 식량을 공급.
그러나, 220년대초 과중한 공납을 거부한 읍루 평정에 실패
부여는 쇠퇴기에 들어섰고 3세기 중반 동맹국 북중국도 혼란
부여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압력이 가중되자 쇠퇴기가 가속화
285년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 의려는 자살하는 한편, 주민 1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부여는 큰 피해를 입고 도읍을 일시적으로 북옥저 방면으로 이전.
진(晋)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나라를 다시 찾았다.
346년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침입을 받은 부여.
국왕 현(賢)과 5만여 명의 주민이 포로로 붙잡혀갔다.
이로 인해 더이상 나라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지자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고구려 보호로 명맥 유지
5세기말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를 근거로 일어난 물길(勿吉)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부여는 왕실을 고구려 내지로 옮겼고
494년(고구려 문자왕 3)에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합병된다.
.............................................
.............................................
덧 말.
백제는 부여와 별개의 국가로 보이지는 않는다.
국가체제 문화 풍습이 상호 유사하기 때문이다.
충남 부여 지명도 중국 부여와 무관하지 않은 듯.
부여는 만주 송화강 하류에 있던 5부족 연맹체 국가
왕밑에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있고 순장, 흰옷 풍습
고구려는 압록강 상류 동가강 유역에 있던 5부족 연맹체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가 살며 일해주는 데릴사위제도 성행.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데려와 결혼
옥저는 함흥평야 지역에 있던 고대국가이며 민며느리 제도.
고구려 지배를 받았고 왕이 없었으며 군장이 통치하는 풍습
동예는 강원북부에 위치, 지역간 경계를 침범해 사냥하면
소,말,노예 등으로 배상했고, 제천행사로는 10월.. '무천'
고구려 지배를 받았고 왕이 없으며 옥저 처럼 군장이 통치
삼한은 한반도 남부 (마한,진한,변한) 군장이 통치.
삼한사회 군장은 천군 영역 소도(신성구역) 제사장.
죄인이라 해도 그 안에 들어오면 함부로 잡지 못했다.
'하여,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은 우리나라.'
'산 > 지리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이야기 - 79 ( 백제 망명정부. 각설이 타령. 임진왜란. 일본. ) (0) | 2010.12.07 |
---|---|
지리산 이야기 - 78 ( 대륙백제. 일본 황실.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 (0) | 2010.12.07 |
지리산 이야기 - 76 ( 처용가. 개운포. 중추절 전설. 호미곶. 철 ) (0) | 2010.11.12 |
지리산 이야기 - 75 ( 화랑도정신. 마의태자. 청나라. 태극권. ) (0) | 2010.11.12 |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74. ( 남악사. 신궁. 박혁거세. 신라 건국. 안동 도호부. ) (0) | 2010.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