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
신라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
최치원은 신라 말기 학자이다.
속리산에 와서 남긴 시가 유명.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 886(헌강왕 12) -.
신라 제 49 대 헌강왕(875~886 재위).
경주는 대부분 숯으로 밥을 짓는 기와집.
그러나, 이 무렵부터 신라는 점차 쇠퇴기
그당시 성행했던 처용가무(處容歌舞)
신라의 개방된 성풍속을 대변해준다.
남성의 심벌을 상징하는 남성의 코.
처용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남성의 큰코는 선망의 대상.
처용가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런만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신라 헌강왕 때 처용(處容)이 지은 8구체 향가.
헌강왕이 개운포 바닷가로 갔다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렸다.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왕 앞에 나와 인사했다.
동해 용왕 일곱 아들 중 1명이 왕을 따라
신라 서라벌에 와서 정사를 보좌했다는 처용
왕은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 벼슬을 하사.
'이국인 처용 마음을 붙잡기 위한 왕의 배려.'
그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사모.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그의 아내를 찾아와 동침.
처용이 외출후 귀가하니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
〈처용가〉를 부르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는 처용.
역신은 본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무릎 꿇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밤 범했습니다.
그런데 공은 화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할 일.
이후로는 공의 화상만 보아도 얼씬 않겠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복(慶福)을 맞았다 한다.
'과연, 처용은 어떤 인물일까?'
처용은 무당, 화랑, 불자 또는 지방호족의 자제,
이슬람 또는 아라비아 상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헌강왕 당시 신라 개운포(울산)는 국제 무역항.
당나라, 발해, 왜, 아라비아 상인까지 교역한 곳.
처용은 신라 기후가 좋아 귀화했다는 아라비아 상인.
경주 쾌릉 석조 武人像은 쌍거풀 깊은 눈에 큰 코.
8세기 경 중국 광주, 양주 해안도시에 자치구 형성
해상 무역 아라비아 상인은 9세기 중엽 신라와 교역.
신라에 무슬림이 처음 정착하고 교역했다는 기록.
그무렵 중국 끝 깐수 맞은 편에도 있었던 신라국.
신라국은 산이 많았고 여러 왕들이 지배하는 나라.
풍부한 금, 기후가 좋아 많은 무슬림들이 정착했다.
주요 산물은 금, 은, 인삼, 옷감, 안장, 토기, 칼
신라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처용 같은 이슬람 상인들
당시 아라비아와 신라 간의 국제 무역이 성행했던듯.
삼국시대 국제무역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우리나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는 기원전 인도에서 귀화
3세기 이탈리아 유리가 수입되어 신라 왕실에서 사용
야사에 용왕의 아들이라고도 불리우는 처용.
처용은 먼 바다에서 온 남자라고 봐야 맞을듯.
외모도 신라인과 틀리니 용왕의 아들이라 한듯.
고려 무신시대 이의민 조상은 베트남 왕자 중 한명
베트남 패망 후 고려에 귀화할 만큼 국제무역이 활발.
처용가는 역신을 몰아내는 고려속요로서 널리 불리운다.
......고려속요 <처용가>........
신라 성대 밝고 거룩한 시대
천하 태평 나후의 덕
처용 아비여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삼재와 팔난이 단번에 없어지시도다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머리 가득 꽃을 꽂아 기우신 머리에
아아, 목숨 길고 멀어 넓으신 이마에
산의 기상 비슷 무성하신 눈썹에
애인 상견 하시어 온전하신 눈에
바람이 찬 뜰에 들어 우그러지신 귀에
복사꽃같이 붉은 모양에
오향 맡으시어 우묵하신 코에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내미신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어진 어깨에
길경에 겨워서 늘어진 소매에
슬기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복과 지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태평을 함께 즐겨 기나긴 다리에
계면조 맞추어 춤추며 돌아 넓은 발에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지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의 가면을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많고 많은 사람이여
모든 나라가 모이어
만들어 세웠으니
아아, 처용 아비를
많고 많은 사람들이여.
버찌야, 오얏아, 녹리야
빨리 나와 나의 신코를 매어라
아니 매면 나릴 것이나 궂은 말이
신라 서울 밝은 달밤에 새도록 놀다가
돌아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누구의 것인가?
이런 때에 처용 아비가 보시면
열병신 따위야 횟갓이로다.
천금을 줄까? 처용 아비여
칠보를 줄까? 처용 아비여
천금도 칠보도 다 말고
열병신을 나에게 잡아 주소서
산이나 들이나 천리 먼 곳으로
처용 아비를 피해 가고 싶다.
아아, 열병 대신의 소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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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 해설.............
주제 : 역신을 몰아내는 처용의 위용.
나후 : 해와 달을 가리는 신
삼재 : 불, 물, 바람의 재앙
팔난 : 많은 괴로움, 여덟 가지의 괴로움
애인상견 : 사랑하는 사람을 서로 보시어
온전하신 : 원만하신
오향 : 다섯 가지 향기
칠보 : 일곱 가지의 보배
길경 : 길함과 경사로움
계면조 : 애조를 띤 가락과 춤.
신코 : 짚신의 앞 끝의 뾰족한 곳,
열병신 : 열병을 일으키는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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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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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1대 혁거세 거서간 (재위: 서기전 57년 -서기 4년)
기원전 69년에 출생한 혁거세왕은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세력을 확대해 진한 6부를 장악
거서간(居西干)은 마한에서 왕을 파견한 것과 관련된듯.
거서간의 한자 뜻을 풀어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다.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기에 서쪽에 살던 왕은 즉 마한왕
원래 진한 왕을 마한에서 파견했기에
진한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거서간은 마한 속국시대의 용어.
‘거실한’ 신라어는 왕 또는 귀인을 지칭하는 말.
박혁거세는 스스로를 ‘알지 거서간’이라고 칭했다
신라어‘알지 거서간’은 '어린아이 왕’이란 뜻이다.
'거서간'의 ‘간’은 ‘칸’ 다시말해 왕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선간은 거서(족장)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뜻
박혁거세가 17세가 되던 재위 5년(서기전 53년)에
고허촌 출신 알영을 왕비로 맞이하며 세력을 넓혔고,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 6부를 순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한 6부의 촌장이
박혁거세를 왕으로서 옹립했다고 쓰여 있지만,
박혁거세는 마한에서 거서간으로 파견한듯 싶다.
박혁거세가 진한 6부를 장악했던 시기는 29세.
그는 알영을 신부로 맞이하여 신라를 창건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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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신라 만의 독특한 성풍습을 갖고있다.
유부녀가 왕과 귀족들에게 수청드는 `색공' 풍습
신라 중기 왕실녀가 된 미실은 화랑 사다함의 연인.
미실은 원래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세종공의 부인이었으나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을 색공으로 접대,
미실은 그녀의 남동생 미생 뿐 아니라, 화랑 설원랑과도 사통했다.
사도, 보명, 옥리 등의 여인들도 진흥왕을 번갈아 수청들었고
왕족과 화랑들은 심지어 상급자에게 아내를 뇌물처럼 상납했고
심지어 형제들 간에도 색공 여인들을 서로 자유롭게 물려주었다.
진흥황 때 미실이 원화로 임명되자
축하하는 잔치에 모인 낭도와 유화들
이날 밤 진흥왕과 미실은 남도 정궁(正宮)에서 합환.
낭도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가득찼다.
밝은 등불이 이어졌고 환성이 끓어 넘쳤다.
진흥왕이 원화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했는데
낭도들이 각기 원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소리.
진흥제는 매우 큰 기쁨을 느끼고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 채색된 동전)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나와 너도 자웅이라 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숙모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 말했다.
(여기에서 미실의 숙모는 진흥왕의 부인 사도황후)
진흥왕이 병들자 미실은 사도황후를 위해
자신의 남편인 세종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 7세기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필사본 중-
<화랑세기>는 1933~44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서 일한
'남당 박창화' 재야 한문학자가 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랑세기는 고대 문화의 비밀을 푸는 암호문.
신라의 고유 관습, 윤리체계인 `신국(神國)의 도'
진골정통, 대원신통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골품체제
족내혼, 친족사통, 왕위계승방식 등에 관한 해설 형식
540~681년 400명 넘는 화랑들과 왕실 남녀의 혈연관계
권력에 얽힌 행적 등은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마복자'라 하여 실력자가 아랫 사람 부인을 빼앗는 관행
색공, 근친혼은 권력 세습자를 확보하려는 수단인듯 싶다.
일부 일처제와 적서 구분이 지켜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늘날 윤리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라 성풍습.
처용 설화는 당시 신라의 성풍습을 알 수 있는 사료.
아울러, 아라비아 무슬램 상인들과 국제 무역이 성행.
개운포.
처용은 '용의 얼굴' 또는 '무당의 이름'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전설만 분분할 뿐.
그가 처음 나타났다는 울산 개운포 처용암
울산 시내에서 장생포 방향으로 가면 처용로
처용로 따라 2km쯤 가면 처용암이라는 이정표
이정표 오른 쪽 샛길로 가면., 작고 아담한 포구
이 포구의 수면 가운데에 6평 가량 되는 섬
삼국유사 기록에 나오는 '개운포'와 '처용암'
개운포(開雲浦)는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
............삼국유사 처용 설화.........
신라 49대 헌강왕 5년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개운포(남구 황성동)에서 놀다가 돌아갈 무렵
운무가 가렸다가 걷히며 동해 용왕과 일곱 자식
흥겨운 춤과 노래를 부르며 왕의 덕을 칭송,
왕은 그 중 처용을 골라 경주로 데리고 갔다.
왕은 벼슬과 아내를 주어 정사를 같이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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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는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춤
궁중 연회에서는 처용탈을 쓰고 추었다고 한다.
처용탈은 유덕하게 미소 짓는 모습
큰 코와 검붉은 얼굴에 잔잔한 여유.
서역인 또는 아라비아인 인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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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중앙부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울산만.
신라 경주의 문호로서 경제 교통 무역의 중심지
울산만 내에는 고래잡이 어항인 장생포와 방어진
선사시대부터 귀신고래 어항으로 알려진 울산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동·강동동, 울주군
온산읍·언양읍·서생면·온양면·청량면·웅촌면·
범서면·두동면·두서면·상북면·삼남면·삼동면
'2개읍 10개면 190개 동리가 울산에 해당.'
울산군은 삼국시대 신라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娑王) 때 비로소 지변현(知邊縣)을 설치.
(경덕왕 16) 때 하곡현으로 고쳤던 '임관군' 영현
고려초 우풍현 동진현을 병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
1018년(현종 9) '동래현 속현' 울주군에서 방어사로 개명.
이조시대 1397년(태조 6) 진을 설치 1413년(태종 13) 울산군
1417년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
1418년 염포를 개항해 일본에 대한 문호를 개방,
1895년까지 경상좌도 육군의 중심지 기능을 했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울산도호부로 승격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폐지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파사왕(婆娑王) 때 비로소 지변현(知邊縣) 설치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하곡현(河曲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초 흥려부로 승격
..........울산 '무거와 김신암.' 전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 때의 일이었다.
천년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말 귀족층의 분열.
신라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고 후백제의 침입.
신라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 구원병을 요청
1만 고려군이 도착 전까지 포석정에서 환락.
후백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염려.
둘째 왕자와 함께 하곡현의 영축산으로 간다.
그곳에서 문수대성 계시에 따를 결심을 한다.
태화사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한 동자승이 나타나 경순왕을 인도.
삼호 앞 태화강을 건너자 사라져버린 동자승
경순왕은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며 탄식.
하여, 월성에 환궁후 고려 태조에게 항복 결심.
이때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에 들어가 초식으로 생을 마쳤다
또 막내 아들은 화엄종 스님이 되어.. 범공
해인사에 머물다가 문수산 남쪽에 절을 지어
살았으니 그 절의 이름을 김신암이라 하였다.
하여, <김신기산>이라 하다가 지금은 남암산
이 절 김신대는 그가 풍류를 즐기던 곳.
지금은 김신암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훗날 이러한 전설이 전해내려와 '헐수정'
동자가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동이라 명명.
전설의 주인공 <짐부대왕> 또는 <김부대왕>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또 다른 이름.'
................................................
.......................울산.........................
선사시대 유물·유적이 시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서생면 신암리에는 신석기시대 각종 토기와 석기 등
농소동·온산읍·언양읍 등 여러 지역에서는 청동기유물
특히 언양읍 서부리의 언양지석묘총 등 고인돌들,
울주 천전리 각석,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
큰 바위에 각종 그림과 글이 새겨진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 장현동·화봉동·신정동 등 시내 곳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무늬 없는토기 석기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열리는 처용제전·처용가장행렬·처용무·
다향제·쇠부리놀이·처용놀이·농악시연을 비롯해
한글백일장·울산국악제·처용미술제 등 다양한 행사
설화
〈헐수정과 무거동전설〉·〈처용암전설〉·
〈병영성전설〉·〈치술령망부석전설〉·
〈원효대사와 천성산전설〉·〈쌀바위전설〉 등
노동요
담바귀타령〉〈장타령〉〈멸치후릿배노래〉모심기노래〉
<후리질노래〉〈돈타령〉, 특히 〈불매노래〉 3 종류
...........................................................
신라 중추절 전설.
신라 제 8대 임금인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위 하나가 나타나 미역 따는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행.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멘 세오녀는 바닷가 바위에서 남편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에 오르자 바위는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를 본 일본인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괴변.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겼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는 탓입니다.”
이에 신라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연오랑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비단을 짜 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라.”
그 말대로 신라에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하였단다.
...............해설........................
신라 8대 왕은 '아달라 이사금.'
5년(157) 왜인이 수교하러 왔다.
20년(174) 정월에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신라는 왜와 수교하였다
연오랑 세오녀가 아달라 왕때 일본으로 갔다는 설화
하여, 세오녀를 '비미호' 또는 '신공왕후'라고 추정.
9대 벌휴 이사금 10년(193) 6월
왜인 천여명이 기근으로 식량 구걸.
10대 나해 이사금 13년(208) 4월
왜인들이 신라 변경에 침입하므로
왕이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게 했다.
.............................................
덧 말.
이러한 삼국시대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와 왜는 옛부터 상호간 교역이 활발.
..............
후지산 전설.
...............
후지산에 얽힌 전설은 우리나라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후지산의 화산폭팔은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백두산의 화산폭팔이 발해 패망 역사와 무관하지 않듯.
후지산을 모르고서는 지리산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지금부터 후지산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자.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
태평양 연안에 있고 1707년 마지막 폭발
BC 286년 일어난 지진 때문에 생성된 화산
'영원한 삶'이란 뜻이 담겨있는 후지산.
5개의 작은 호수가 후지 산 기슭에 있는데,
가와구치 호수에 거꾸로 비친 후지산의 영상
제지화학 산업, 농업, 무지개송어 양식, 낙농업
대칭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정상이 눈으로 덮힌 원뿔형의 화산
일본에서 늘 예술적 주제가 되어왔다.
신성시되는 후지산은 일본의 상징
해마다 여름이면 수천 일본인들
정상에 있는 신사로 등산을 한다.
'후지-하코네- 이즈 국립공원.'
.....................주.................................
북서쪽에는 오무로산(大室山)을 비롯한 기생 화산들.
남동쪽 사면에는 1707년에 호에이 산의 폭발 분화구.
고미산(2,314m) 고후지는 후지산보다 오래 된 화산.
781~1707년까지 10 여 차례의 화산폭팔 기록.
그 중 800년, 864년, 1707년의 분화가 유명하다.
.................................................
후지산 어원은 원주민 아이누족 언어인 아이누어
'후찌'나 '푸슈' 우리 말로 해석하면 '분화'란 뜻.
백제어 '불', 말레이어 '푸지(멋지다)', Huge(크다).
후지산의 전설에는 <카구야 공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타케토리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있었다.
할아버지는 대나무를 베어 바구니와 소쿠리를 만들어 팔았다.
구름 한점 없는 가을 아침,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대나무를 베러 갔다.
대나무숲 속에서, 할아버지는 뿌리 쪽이 빛나는 대나무 한 그루를 발견.
그 대나무를 베어내자 그 안에 반짝거리는 작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키울 마음을 먹고 손바닥 위에 얹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 참 행운이군. 우리가 키웁시다."
"어머나! 귀여운 여자애!! 그렇게 해요."
할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려오자 할머니는 몹시 기뻐했다.
부부는 파란 대나무 바구니를 짜서 그 안에 아이를 키웠다.
집안에 활기가 넘칠수록 부부는 더욱 아이를 소중히 키웠다.
그 후부터 할아버지가 자르는 대나무 안에서 자주 보물이 나왔다.
생활은 점점 좋아졌고 여자 애는 3개월 만에 보통사람만큼 자랐다.
여자 아이는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 온 집안이 훤히 밝아질 정도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이에게 '카구야히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곱고 아름다운 카구야히메. 현명하고 빛나는 카구야히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구혼자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카구야히메는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은 천황에게까지 알려져 천황도 청혼했다.
"아니오, 저는 천황과 결혼할 수 있는 몸이 못 됩니다."
천왕의 사자를 만난 카구야히메는 겸손하게 사양했다.
천황이 궁중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천황은 카구야히메를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해의 봄이었다.
카구야히메는 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두 부부는 매우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떻게 된거니? 왜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니?"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윽고 가을이 되었고 한가위가 가까워졌다.
카구야히메는 매일 밤마다 훌쩍훌쩍 울었다.
두사람이 연유를 묻자 카구야히메가 대답했다.
"아! 영원히 두분 곁에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달나라 사람입니다.
이번 한가위엔 달나라에서 데려갈 듯..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기에 슬퍼 웁니다."
그녀는 원래 달나라 사람으로 죄를 지어 잠시 지상에 왔던 것.
하지만, 이젠 죄를 다 갚았기에 오는 8월 15일에 보름달이 뜨면,
달나라에서 내려온 사신과 함께 돌아가야 할 몸이라고 고백했다.
두사람은 놀라 천황에게 부탁했다.
"부디 저희들의 딸을 지켜 주십시요."
드디어, 한가위가 다가왔다.
천황의 부하들이 많이 와 있었다.
활과 칼을 들고 집 주위를 애워쌌다.
천황 역시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날이 저물었다.
동산에서 둥글고 큰 달이 솟았다.
할머니는 카구야히메를 창고에 숨겼다
할아버지는 그 창고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 : "제발 영원히 이 집에 있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 : "소중한 딸을 이대로 넘겨 줄 수는 없다."
달이 뜨자 주위는 낮과 같이 밝아졌다.
어딘가에선가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다.
달나라에서 황금마차가 구름타고 내려왔다.
천황의 부하들은 눈이 부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창고 문은 저절로 열리자 카구야히메는 밖으로 나왔다.
"여러모로 신세졌습니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달밝은 밤에는 아무쪼록 저와의 일들을 생각해 주세요."
카구야히메는 달나라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달빛에 비친 카구야히메는 한층 더 아름다웠다.
카구야히메를 태운 황금수레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천인들의 음악도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카구야히메가 떠나기 전에 할아버지와 천황에게 남긴 편지와 불사약.
날개옷을 입고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승천한 카구야히메.
그 아픔으로 노부부는 병이 들었다.
천황도 그녀와의 사랑을 잊고 싶었다.
천황은 그녀가 남긴 편지와 불사약을 후지산에서 태우게 했다.
천황은 많은 부하들을 호위하게 해 그 일을 무사히 치루게 했다.
하여, 그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후지산은 불사약의 후지(不死)와 병사가 많다는 후지(富士)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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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에서 화산이 폭팔할 때마다 왜는 지진 및 천재지변.
왜는 화산폭팔 및 지진이 없는 한반도가 이상향이었을 듯.
통일신라 말기 혼란기부터 왜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라의 중추절 전설에서도 그 조짐을 감지할 수 있듯.'
일본은 오늘날까지 근친상간에 대해서 관대하다.
성욕을 못 참는 오빠가 여동생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모가 알았다 해도 그다지 큰 일은 못 된다.
형수와 시동생, 부녀 모자 간 근친상간.
일본인은 사촌 이내의 근친혼은 금지하지만
전통적으로 사촌 간에 결혼이 성행했던 나라.
형이 죽으면 형수와 결혼해 사는 풍습도 남아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형 대신
형수와 같이 살아줘야 하는 것이 도리로 일본인은 여겼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가 있더라도
가문과 죽은 형을 위한 결혼 풍습.
과거 일본수상 사토 에이사쿠의 부인은 4촌 여동생
옛날부터 근친혼이 가장 많이 성행했던 일본의 왕실
일본의 성풍속은 고대 신라 왕실의 성풍속과 유사하다.
호미곶.
일몰과 일출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포항 호미곶
이곳 일몰에서 일출까지 보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
일몰 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일출까지 맞는 명소.
한반도 산세는 호랑이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
호미곶은 한반도 호랑이 형상의 꼬리부분에 해당된다.
일출을 보며 진로를 정하고 빌면 소원성취 한다는 명소.
옛부터 신혼부부가 새 인생의 시작을 해돋이와 함께 빌었고,
음력 초하루와 열다샛날 흰비단을 깔고 소원성취를 빌던 곳.
특히, 아들을 원하는 이는 여기의 기도가 영험하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된 연오랑 세오녀
해와 달을 상징하는 비단을 보내 광명을 되찾았다는 우리나라
특히 사업적으로 어려움이 클 때 기도의 영험함을 크다는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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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동단 지점인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
새천년 해맞이의 고장 답게, 매년 1월1일 해맞이 축전
이곳은 장기반도의 가장 꼭지점에 해당하여 일출의 명소
일년 중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알려진 후
전국의 관광 인파가 신년 해맞이 여행을 오는 곳
호미곶 독수리 바위, 그곳 광장의 조각 '상생의 손.
거대한 손 모양의 조각상 사이로 떠오르는 해맞이
왼 손은 육지에 있고, 오른손은 바다 가운데 있다.
호미곶은 바닷가에 들어갈 수 없지만,
좌측의 갯바위들을 딛고 들어가서 보면
갈매기 떼들이 무리져 앉은 모습이 장관
...................포항 과매기......................
포항 구룡포, 대보지역의 겨울 특산품으로 `과메기’
과메기는 원료가 '꽁치'지만 원래 청어로 만들어졌다
청어가 감당할 수 없을만치 파도에 밀려와 잡힌 구룡포
갈고리로 끌어 담을 정도로 흔하게 잡을 수 있던 곳
겨울의 매서운 해풍을 받아 만든 청어 과메기가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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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은 오늘날 국제무역 항구로 성장한., 포항.
신라시대 호미곶 용덕곶 장기곶은., 오늘날 영일만.
영일만, 포항, 신포항은 신라시대 제철 무역의 중심.
'북한에 있는 신포항은 포항에서 유래된 지명.'
....................영일만(迎日灣)...................
경북 포항시 중심으로 북으로 흥해읍 용덕곶,
남으로는 대보면 장기곶 그 사이에 있는 만.
포항시 중심지와 흥해읍·동해면·대보면에 싸여 있다.
신라 때 아호 근호지변, 고려 때 어룡담·어룡호·용담만
일제 때 영일만이라 개칭되었고 옛부터 천혜의 국제 항구.
영일만은 북동쪽으로 열려 있으며,
입구 너비 12㎞, 만내 너비 약 10㎞,
수심이 16~19m로 깊고 해안단구가 발달.
형산강이 경북 경주시·포항시를 거쳐 만내로 유입하고,
냉천·여남천이 흘러들며, 연안에 포항평야(형산강 평야)
1940년 대 현대적인 해수욕장으로 개장된 송도 해수욕장.
2㎞에 이르는 반달형의 모래사장과 맑은 물,
방풍림으로 조성된 울창한 해송림과 흑백나무
영일만은 형산강지구대의 북동단에 있으며,
포항에서 울릉도를 잇는 여객선이 매일 운항
영일만 포항은 한때 고래잡이 양식업 수산도시
부산항과 원산항을 잇는 항로가 개설되기도 했다.
1962년 국제무역항 지정 1967년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그후 본격적인 동남해안공업지대의 거점지역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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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浦項市)......................
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된 도농통합시.
1970년대에 포항제철(주)이 들어서고 시설확장
세계적인 제철도시이고 관광자원도 풍부한 지역.
포항시는 옛 영일현지역 포항창이 설치된데서 유래.
삼국시대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오량지현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영일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1018년(현종 9) 경주 속현이 되었다가 1390년에 독립
1732년(영조 8) 통양포(通洋浦) 아래 포항창을 설치하고
이 창의 곡식으로 함경도 진휼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이 일대는 함경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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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항(新浦港)....................
함경남도 신포시에 있는 어항.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한 편이며,
남쪽 앞바다에 마양도가 자연방파제
부두에 2,000~3,000t급 배들이 정박
연안 일대는 한류 난류 교차지역으로 세계적인 어장
명태·대구·청어·정어리·고등어·연어·송어 등
특히, 신포 마양도 부근은 예로부터 유명한 명태어장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명태 어선들이 성시를 이룬다.
특히 이곳에서 어획되는 명태는 '북청명태'라 하여 유명.
그밖에 가자미 멸치 까나리 등이 어획되며,
미역·다시마·해삼·조개류 등이 채취된다.
명태 알을 가공한 '신포명란'이 특산물로 유명
그밖에 수산물가공품으로 통조림·냉동제품·염장·
건어물·젓갈류·어묵·창란젓·어유 등이 생산된다.
원양어업기지 신포수산연합기업소를 비롯한 어업사업소
육대·신호·호남·남흥 등 10여 개의 수산협동조합
조선소·어유공장이 있는 신포항은 북청 들어가는 관문
남으로 원산, 북으로 단천·김책·나진·선봉 정기선 운항
신포와 마양도 간에 매일 수차례 정기여객선이 왕래,
마양도 동단에 등대가 있고 해안따라 평라선(평양-나진)
신포역을 지나며, 신포에서 홍원과 북청 사이를 잇는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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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장작불과 흙이 만나면., 도자기
숯불과 철광석이 만나면., 철기.
도자기를 구울 때 최고 온도가 1,350℃,
숯불 최고 온도는 100℃ 더 높은 1,450℃
인간이 숯을 처음 쓴 시기는 약 50만 년 전 북경원인 때
그러나, 숯이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 농경시대에 사용했던 숯은 뜬숯(消炭)
남해 창선과 삼천포 대방 사이에 놓인 연륙교
그 사이에 3개의 섬., 즉, 늑도 초양섬 모개섬
1998년 늑도에서 BC 17년 중국 동전 반량(半兩)이 발굴
부뚜막과 남방형 온돌이 숯부스러기(뜬숯)와 함께 발굴
옛날 어머니들이 재래식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청솔가지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뜸 냄새가 나면
아궁이 불덩어리를 끄집어내 물을 끼얹어 만든 뜬숯
이 불덩어리 적외선(넘붉은살)은 자궁암에 효험.
우리나라에서 불(火)의 발명자는 고시례(高矢禮)
호랑이에게 돌진 돌이 바위에 맞아 번쩍하고 불
하여, 고시례가 처음으로 부싯돌을 발명
철기시대 야금용 숯이 필요해 복소법(伏燒法) 개발
장작(薪炭)으로는 1,000℃ 이상 올리기 어렵기 때문.
철(鐵) 자는 금(金)과 동이의 이(夷)를 합쳐 만든 글자.
중국 한나라보다 선진 제철기술을 보유했던 동이(東夷)족
한반도 서북지역 주조철기는 BC 3∼4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동이)에서 철기문화는 가야에 이르러 눈부시게 발전.
가야국을 건국한 김수로왕은 벼농사와 수산업을 비롯
제철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했다.
하여, 수로왕의 성이 쇠 금(金)이고 가야 연합국의 맹주.
양산 동래 마산 창원 진해 등지의 철광석으로 철을 생산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침 철검 철낚싯바늘 철주 쇠갑옷
등을 만들어 쓰는 한편 철정을 만들어 화폐로도 사용했다.
이로써 가야국은 완전한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
마한 예 왜 대방 등이 가야를 찾아와 철을 수입
창원시 한복판 성산 패총은 기원전 가야의 야철지
여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 중국 엽전 오수전이 출토.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4대 탈해왕
“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
탈해왕은 사로(서라벌→쇠벌)로 이주한 대장장이
헌강왕 6년 9월 9일 서민들도 밥지을 때 숯을 사용
이때 이미 숯이 대량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 : (사로 - 서라벌 - 쇠벌 - 서울 - 수도)
신라는 진한에 소속된 사로국에서 출발한 작은 나라
풍부한 철광석과 철 생산으로 7세기 경에 삼국을 통일
철기문화 발달이 신라의 삼국통일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황룡사 장륙존상.
장륙존상은 진흥왕이 야철 기술을 과시
무려 21톤이나 나가는 동양 최대의 철불
당시, 인도 중국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실패
신라 만이 거대한 불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라의 제철기술이 동양 최고의 수준인 사례.
..............황룡사 구층탑..................
황룡사는 황궁인 용궁(龍宮) 남쪽에 진흥왕 때 완성
그로부터 79년 지난 후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 완공,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왕성 월성(月城)의 동쪽.
신라 황룡사 9층탑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건립
1 층은 日本(倭), 2 층은 중화(中華), 3 층은 오월(吳越),
4 층은 탁라(托羅), 5 층은 응유(鷹遊), 6 층은 말갈(靺鞨),
7 층은 丹國(契丹),8 층은 여적(女狄), 9 층은 예맥(穢貊).."
신라 황룡사 9층탑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건립
황룡사(皇龍寺)는 신라 왕성 월성(月城)의 동쪽.
황룡사는 황궁인 용궁(龍宮) 남쪽에 진흥왕 때 완성
그로부터 79년 지난 후 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 완공,
신라에서 황룡사 구층탑 건립은 첨단기술 선전이 목적.
앞선 건축 기술과 첨단 철기제품 수출이 목적이었던듯.
당시, 신라 기술 및 국력을 주변국들에게 알리려 한 것.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소실.'
............................................................
제철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시기는 백제 말엽인 641년.
백제인은 흔히 목라(木羅)·사택(砂宅) 등 두 자의 성
사택의 사는 무쇠, 택은 달구. 사택은 무쇠달구를 의미.
지적의 일본 이름은 후지하라 노가에타리(藤原鎌足)
가문의 상징이 소나무에 칭칭 얽혀 있는.. 등꽃이다.
무쇠를 소나무 숯으로 달구면 보라색 등꽃 빛의 불꽃
지금도 일본에서 후지하라(藤原) 성은 명문 가문.
예나 지금이나 불덩어리를 잘 다루어야 명문 가문.
...................
가야의 철기문화.
....................
수로왕은 혁거세처럼 북방에서 이주해온 유민들
한반도의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초기국가를 형성
삼국이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발전해 가던 시기에,
낙동강 하류 변한지역에서 별도의 독립세력이 성장
가야 유민은 주로 해변으로 들어왔으나,
당시 신라 사회처럼 토착 세력이 강했다.
2,3세기경, 김해의 금관 가야를 주축으로
경남 해안 지대에 소국 연맹체가 형성된다.
연맹체 맹주 금관 가야는 김수로에 의해 건국
금관 가야는 이웃 소국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확장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세력 다툼
가야연맹은 더 이상 통합을 못한 채 신라에 의해 병합된다.
이러한 가야가 성장한 경남 해안, 낙동강 유역
기원 전후 철기 문화로 토착 사회의 통합이 진전.
그리하여 변한 12국 작은 나라들이 나타나기 시작
더 진행되어 6가야가 성립해 금관가야가 탄생.
2, 3세기경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 연맹
김해는 해상과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
강을 따라 내륙과 교류할 수 있었고
바다를 통해 왜 한 군현들과도 무역
또 이 지역은 철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철은 무기나 농기구의 재료였으므로
사회 발전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가야에서 발굴한 철정, 환두대도 철기류는
가야가 철을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알려준다.
금관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하여
한군현이나 왜 등과의 무역 중계지 역할
새로운 북방 유물을 수용하면서 발전 기틀을 마련
해상 왕국으로서 번영을 누리며 가야 연맹체를 주도.
.................................................
............................................
4세기 후반 신라와도 맞설 만큼 성장한 가야 연맹
이 시기 가야연맹의 영토는 낙동강 동쪽 및 중상류
가야는 영토 확장 문제를 둘러싸고 신라와 잦은 대립
백제와는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남하 정책은
한반도 남부의 세력 판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낙동강 하류 지역까지 진출
가야 연맹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5세기 전반 신라가 낙동강으로 진출
가야 연맹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5세기 중엽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펼쳐왔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자 위협을 느낀 가야
내륙의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 연맹을 형성
6세기 이후 신라의 영토확장 정책
가야 연맹의 결속은 흩트러져 갔다.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후,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이어 신라에 편입.
562년 대가야는 신라 이사부 군대에게 항복
가야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
금관의 비밀.
..............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 이(李), 박(朴).
그중에서도 김씨 성은 한반도 민족을 대표하는 성씨이다.
금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이 금을 찾아서 한반도로 대이동.
한반도 끝에서 바다가 가로막자 왜까지 건너갔다고도 한다.
청나라의 전신 후금(後金)을 창건한 '누루하치' 황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성씨 역시 애신각라(愛新覺羅).
신라를 각별히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청나라와 신라 왕족은 족보를 따져보면 그 뿌리가 같다.
발해가 망한 후 북방 거란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나라.
만주족이 명나라를 몰아내고서 중원의 패자가 된 금(金).
그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 이름이 후금(後金)이다.
금(金)을 잘 다루고 세공을 잘하던 사람들이 김씨.
일본황실 성이 김해 김씨, 김은 김씨가 즐기는 음식.
금은 고대국가 이전부터 국제무역에서 화폐 대용수단.
경주 김씨 조상은 김알지가 이끈 신라 부족.
박혁거세와 석탈해 다음으로 왕족이 된 김씨.
당시 왕은 세습이 아닌 3 종족이 교대로 집권,
결국, 김씨 종족이 왕족을 맡아서 신라를 통치.
동서양을 마구 넘나든 기마족(스키타이족)의 이야기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족의 전형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도 다른 카스피해 근처의 금관
최소한 같은 문화 뿌리를 가진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
만주족의 또 다른 호칭 여진(女眞)족 그 말은 이두문자.
여진은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같은 뜻
그 말의 뜻은 '밝은 온누리' = 박달(밝은 들) = 배달.
고대 소아시아, 우랄산맥,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족.
적의 피를 마시고 해골을 기념으로 차고 다닌 기마족.
또 팔 가죽을 벗겨 화살통으로 쓰는 잔인했던 민족이다.
스키타이 기마족 군사들은 가는 곳마다 공포의 대상
스키타이족은 흑해와 소아시아 중앙아시아까지 점령.
그리고, 동쪽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까지 달려간다.
스키타이인은 흑해 북쪽 볼가강 유역에 살던 종족.
이란 또는 아리안이라 부르는 인도 유럽 스키타이인'.
평민의 신장은 평균 164cm, 상류층은 176~ 180cm 정도.
흑해 북안 스키타이족은 코카서스나 쿠반처럼 유럽인 특징
동쪽 사르마티아 지역에서는 몽골리안의 특징이 첨가되는데
이들은 기원 전 6세기 경에는 서쪽으로 유럽까지 진출한다.
하여, 금을 잘 다루는 민족 간 해상무역 또는 교역이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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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국가에서 청동기문화 꽃을 피웠던 가락국.
최초로 금관을 만든 나라라 하여 고려에서는 금관가야.
금관과 가야를 합친 금관가야는 고려 때 가락국의 국호.
'금관가야는 이조나 고려의 사학자가 편의상 붙인 국호.'
<금관 가야> 이름 속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통일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번쩍거리는 금관에 숨겨진 비밀.'
금관에 나무 나뭇잎 꽃 열매 사슴 뿔 새 모양들이 새겨진 장식.
1천 5백년 전 한반도에 갑자기 등장한 금관의 장식을 살펴보자.
금관을 쓰고 허리띠에 금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의상을 걸친 왕.
<푸른 숲>출판사에서 펴낸 `금관의 비밀`.
저자는 고고학자인 '김병모' 교수(한양대)
30년에 걸친 현장답사와 고증으로 금관의 상징성을 풀어낸다.
금관의 모양새는 역사의 비밀을 풀어 줄 수 있는 암호와도 같다.
신라 금관은 그 가치나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연구는 미미했었다.
'1997년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금관에 설명 조차 없을 만큼.'
금관의 옥구슬(반달 또는 맹수 송곳니 모양) = 나무열매를 상징.
숲과 나무를 숭배하는 기마 민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장식구.
신라 금관의 나무열매 장식물은 생명의 탄생과 자손의 번영을 상징.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알타이의 유물과 민속품은 신라 유물과 공통점.
'타이가 지역의 끝없는 하얀 숲' 그 자작나무로 만든 신라시대의 유물.
신라 금관은 알타이 지역의 사금으로 만든 것으로 김병모 교수는 추정.
신라시대 금관 6개 중 순금인 것은 무열왕능(김춘추왕)에서 출토된 것 뿐.
신라에 합병된 가락국이 신라왕실을 장악한 후에야 순금 금관을 만든 증거.
가락국은 금을 숭배하는 우랄 알타이 족의 공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나라.
'황금빛 알., 난생신화의 주인공, 김 수로왕'
쇠金 성은 철기문화, 황금빛 알은..金을 상징.
신라의 삼국통일 숨은 원동력은 첨단 철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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