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80 ( 발해. 제나라. 당나라. 축천무후. 문무왕 )

donkyhote 2010. 12. 7. 04:52

발해.



우리나라의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에 걸쳐 존속한 나라.
고구려 멸망 30년 뒤인 699년 백두산 동북지방 숙신족의 후예
그리고,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창건후 926년 멸망한 나라이다.

...................발해문화(渤海文化)......................
황하강은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강이며 길이 5,464㎞
유역면적은 중국 면적의 7.8%를 차지하는 75.24만㎢
황하강은 청해성 바얀하르산 북쪽 카르취에서 발원.

청해 사천 감숙 영하 내몽고 산서 섬서 하남 산동 등
9개 성의 자치구를 거쳐 마지막에는 발해로 유입된다.

황하유역은 땅이 광활하고 지형의 차이가 극심.
서에서 동으로 청장고원, 내몽고고원, 내몽고고원
황토고원 황준해평원(黃準海平原)이 가로놓여 있다.

발해문화는 유학, 한문학, 불교, 미술, 공예, 음악, 춤
등등으로 구분하여 한반도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발해는 초기부터 유학생을 당(唐)나라에 파견하였고,
3대 문왕 때 문치정책을 추진해 유학이 사상적 기반

중앙행정기구인 6부를 충 인 의 지 예 신으로 명명
이는 우리나라 유교 덕목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특징

문학작품으로 양태사, 왕효렴 등이 남긴 시 작품들
'양태사 -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서정적인 시

건국 초 들어와 있던 불교는 발해인의 종교적 지주
전륜성왕을 표방했던 문왕 때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여
9세기에 들어서는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발해 승려로는 석인정(?-815), 석정소(?-828)가 대표 인물
현재 남은 발해 불교의 자취로는 절터, 탑터, 불상, 사리함
주로 5경 일대에 집중된 절터는 40 군데 정도가 확인되었다.

발해 불교는 지배자 중심으로 신봉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반인들은 무속 신앙에 경도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 회화로는 무덤에 그려진 벽화가 대표적인 것이지만,
절터 벽화 파편들, 上京城 출토 벼루의 복두쓴 인물 그림.

공예품은 돌사자상과 같은 조각품, 도기와 자기,
기와와 벽돌, 금속 세공품 등이 많이 발굴되었다.
특히 河南屯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 및 순금 제품들
上京城 출토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앞선 세공기술

발해 궁중음악은 8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정효공주 무덤에 악기를 보자기에 싸 든 3명의 인물 그림.
발해인들은 세시 때마다 남녀가 모여 노래와 춤을 즐겼다.

발해는 고구려인이 주축이고 말갈과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
고구려 문화가 중심을 이루며 말갈 대중문화와 융합된 양상
당나라에서 생활한 발해 건국 세력의 당나라 문화도 보인다.

발해가 국가체제를 정비할 때 당나라 제도를 모태로 삼자,
발해 사회에 당나라 문화가 깊숙히 침투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는 당나라 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밖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문화도 보이는가 하면,
발해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발해 고유 문화도 상당하다.

이처럼 발해문화는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활발한 대외무역 외교정책과 관련이 있다.

발해에는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가 있었으니,
바다를 통하여 일본과 왕래하던 일본도(日本道),
함경도의 동해 연안을 따라 개설되었던 신라도(新羅道),
요하 상류쪽으로 연결되었던 거란도(契丹道)가 있었다.

또 당나라와 왕래하던 길은 2개가 있었으니,
하나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바닷길
다른 하나는 요동지방과 요서지방 내륙교통로

그리고 문헌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발해 북쪽 중앙아시아와 연결된 교통로

이제 각 문화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함을 알리는 지붕끝 장식
고구려 막새기와가 8개 연꽃잎이고 발해 것은 6판
고구려 양식을 따라 흙으로 구워 둥굴게 만든 불상.

발해 왕족이나 귀족들의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
근본적으로 말갈족의 움무덤과 그 계열이 다른 역사
8세기 중반부터 당나라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는 발해.

8세기 중반 이후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上京城, 西古城, 八連城 축조
1998년에 발해 무덤에서 발굴된 삼채(三彩) 여용(女俑)
和龍 北大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채 그릇은 당나라 문화

말갈족이 거주하던 곳에 발해가 건국되었고,
이들이 발해사회의 저변을 이루었기 때문에
말갈 문화도 발해 문화의 한 요소를 이루었다.

발해 변방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움무덤 전통
말갈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고구려 계와 차이.

220 년 역사의 발해가 창조한 독창적인 문화도 있다.
귀족을 위해 무덤 위에 쌓은 탑은 발해 고유문화이다.
무덤 하나에 여러 사람을 매장하는 것도 발해 고유양식

특히 왕릉으로 여겨지는 三陵屯 2호묘에서 15명의 인골
발해에 순장(殉葬) 무덤의 전통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

순장은 왕이 운명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매장하는 것.
자진해서 죽는 경우도 있었으나 강제로 묻히는 것이 대부분
산 채로 묻는 일도 있었으나 죽여서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장은 고대 중국 일본 한반도에서의 장례 풍속.'

고조선 유적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에서 각각 100여 명 순장.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 의하면 부여 풍속에 제가의 장례 때
사람을 죽여 순장하며 많을 경우 100여 명에 이르렀다는기록

신라에서는 502년(지증왕 3) 순장이 금지되기 전까지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불교 영향으로 순장 풍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 연해주 일대, 중앙아시아, 남부 시베리아
소그드인들이 사용하던 드라크마 은화(銀貨), 경교(景敎)
십자가, 부하라 내지 소그드 글씨가 새겨진 조약돌 등등

발해에서 소그드인들도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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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우리나라 역사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가 권력층 내분으로 망하자 갈 곳 없던 유민들
그 유민들이 고구려의 재건을 기치로 세운 나라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여진)족.

발해 자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내용의 국서들.

발해 황제가 보낸 국서들이 일본에 보관되어 있고,
혈통, 문화, 유물 유적 등이 우리나라 역사와 일치
지금부터 발해 역사의 옛 흔적들을 찾아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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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2년 이륙 점필제 作 유두류록 중에서..-
말방울 울리며 마천가는 길가.. 월명이 무덤.

역녀 월명이는 동경상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역녀는 월명이 직업이며, 오늘날의 여성 통역관.
(동경상인은 청년의 직업이며 무역업에 종사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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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역사적으로 지리산 일대와 밀접한 나라.'

목단강 유역의 평탄한 분지 가운데 자리잡은 상경성.
해동성국 발해 역사 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읍지이다.
상경성 중심으로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교통간선도로.

압록도, 영주도, 거란도, 신라도, 일본도로 뻗어있다.
상경성 유적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개활지
이곳은 지금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이라 부르고 있다.

상경성의 화려한 궁궐은 무너지고 잡초만 무성하지만
성벽은 천년 풍파에서도 옛 발해 역사를 지키고 있다.
외성은 직사각형 동서남북 네 성벽에 모두 10개의 문.

성벽에는 해자를 파놓았고 외성안 북쪽 한 복판에 내성.
내성 장방형 남북 길이 1,000m, 가로 900m 총둘레3,986m
지금은 거의 밭으로 변해 성벽 일부 구간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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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698∼926) 온돌 유적은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발견.
거란이나 여진족 유적에서 발견된 적 없었던 고구려 식.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서쪽 200㎞ 크라스키노 해안
가장 높은 발해 성터 안에 ㄷ 자 형태의 쌍구들식 온돌구조
2003년 중국 랴오닝성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일치.

발굴 유적지에서 온돌뿐 아니라 돌절구,항아리,3족 토기,
물결무늬 토기편,청동제 연꽃무늬 허리띠장식 유물 140 점.
발해는 역사 속에서만 존재해왔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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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으로 강제 이주
이때 대조영도 아버지와 요서지방의 영주로 옮겼다.

그곳은 고구려, 말갈,·거란 등 다수 유민들이 집결
당나라가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상태였다.

696년 5월 거란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합류한 대조영.
고구려 유민 및 말갈인과 함께 만주 동부로 이동한다.
698년 대조영은 길림성 동화연 동모산 아래 진국 창건,

훗날, 국호를 발해로 바꾸고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이전.
고구려 옛땅을 거의 되찾고 <해동성국 발해>라고 하였다.
<해동성국: 동쪽의 융성한 나라> 발해는 대외관계 중요시

초기에는 당과 적대관계였으나 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해 신라와 대립하였으나, 관계 개선
사신도 왕래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 외교문서에 대조영은 스스로 고려 왕이라고 표기했다.

발해 문화는 고구려, 당, 말갈 등의 문화가 복합되어 있다.
발해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고분을 들 수 있다.
정효공주 무덤. 기와, 석등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발해는 고구려 패망후 만주를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 유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혼을 만주 지역에 심었다.
안록산이 이끌었던 거란인 역시 고구려의 유민으로 보여진다.

훗날, 발해를 점령한 거란 역시 모두 옛 고구려의 연방국가.
거란(동이)이 여진(말잘타고 활 잘쏘는족)이고 금나라 민족.
후금은 병자호란때 이조를 침공한 청나라이고 그 뿌리는 거란.

고구려는 다수 민족이 모여 연방국가의 형태를 갖춘 통치 체제.
고구려 6대 왕부터 태조라는 칭호를 쓰면서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 전까지는 연방국가 대표들이 서로 돌아가며 나라를 통치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발해 거란은 물론 여진족까지도 연합했던 국가.

.............대조영과 안록산은 각각 어떤 인물일까?...............
중국 역사는 안록산을 당 헌종과 양귀비의 수양아들로 기록.
안록산을 당나라 때 현종의 '어양의 절도사'였던 인물로 본다.
안록산이 스스로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길 간청했다고도 한다.

안록산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양귀비를 어머니로 모셨다는 기록.
양귀비 처소를 당당히 출입하자 당 현종이 안록산에게 물었단다.

"궁에 들어오면 황제부터 알현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우리 고향에서는 어머니를 먼저 찾아뵙는 것이 예의지요."

당나라 황제 현종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위풍당당했던 안록산.
755년 11월 안록산이 20만 대군을 앞세워 장안을 향해 반란(反亂).
9년간 당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756년 낙양을 점령했던 안록산.

양귀비와 염문설의 주인공 또는 양귀비를 죽게한 인물로 묘사.
현종은 피난처에서 부하들 진언에 따라 양귀비를 자살하게 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당나라가 안록산에게 패망했음을 인정하는 증거.

먼훗날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 현종을 위대한 지도자로 떠받든다.
거란을 창건한 안록산을 '안록산의 난'으로 중국 역사는 평가한다.
이는 중국이 안록산에게 패망한 사실을 감추려고 역사를 왜곡한 증거.

'안록산의 난'은 곧 고구려에게 패망한 당의 역사 아닐까?

중국의 방대한 역사기록은 잘 '정리된 시나리오'.
그 방대한 역사가 일목요연하기란 불가능한 일.
그러나, 시나리오가 너무 완벽하다는 사실은 흠.

'중국 역사 속에 고구려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역사 속에는 아예 고구려라는 나라 존재가 없다.
우리나라의 단군은 중국 소수민족의 지도자로 여긴다.
고구려를 인정하면 중국 역사의 시나리오가 허물어진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일관성이 없다.
하여, 중국과 일본의 시나리오 역사관 장벽을 넘지 못한다.

'과연, 고구려는 역사상에서 없었던 국가일까?'

중국 진나라에서 만리장성을 쌓아 방어해야 했던 강국.
고구려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는 중국을 다스린 나라.
중국은 고구려의 속국인 시점을 역사의 공백기로 본다.

즉,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 은 주>로 이어진 왕조의 베일.
고구려는 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을 양분 또는 지배한 나라.
하여, 중국은 정책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분산시켜 강제이주.

중국 역사의 시나리오 기록에서도 그 사실이 보인다.

그러나, 이조의 사대주의 사상 탓에 그 역사는 소멸된다.
이조 창건 당시 고려 역사를 불태웠던 것은 정도전 탓일까?
중국에 의존해야만 했던 이조는 역사책이라도 태워야 했던 듯.

이조시대 사대주의 사상때문에 맥이 끊긴 고구려 역사.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 또한 입증자료가 드물어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역사학자가 앞으로 풀어야 할 베일 속 두 인물.

'두 인물 속에 끊어진 역사의 맥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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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흥망성쇄................................
<대조영>은 정책과 치적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가 진국을 세우고 돌궐의 추장 묵철과 서로 통한 것은 확실.
716년(개원 4) 묵철이 살해되고, 당나라가 영주를 되찾아 활기

대조영은 당이 군왕으로 책봉한 추장국에 지나지 않은 듯.
719년(개원 7) 대조영이 죽고 맏아들인 무왕(武王)이 즉위.
영토확장, 일본과 수교후 흑수말갈의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文王)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으며,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고 무역을 활발히 전개.
762년(보응 1)에 당나라에서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한다.

선왕은 영토를 헤이룽강 하류까지 확장<방 5천리(方五千里)>
역사적으로 발해의 황금시기를 이룩한 선왕은 830 년에 죽는다.

한편, 묵철이 죽은 뒤 세력이 약화되었던 거란의 수령은 안녹산.
당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돌궐과 같은 경로로 남하해 발해와 대립.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합하고 중국 진출

그에 앞서 발해를 공격한지 불과 20일 만에 927년 발해를 함락한다.
이로써 대조영에서부터 15대 220여 년 간 건재하던 발해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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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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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년 건국, 926년 멸망한 발해는 만주 동부에 웅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대체로 길림성, 흑룡강성
길림성 돈화 지역이 대조영이 발해를 창건한 첫 근거지.

화룡에는 중경 유적인 서고성.,
훈춘에 동경 팔련성이 남아 있다.
평북 중강진 맞은 편 임강진에 서경은
현재 강물 토사가 퇴적해 땅속에 묻혔다.

흑룡강성 영안에 가장 오랜 도읍 상경성 유적지.
만주 4경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는 함경남도 북청.

돈화시는 발해 초창기의 도읍지이다.
대조영이 영주에서 피난온 돈화 동모산.
발해인들의 젖줄이었던 목단강 상류 부근.

연길에서 용정 거쳐 화룡 부근에 이르면
백두산가는 길 옆 발해 중경 유적 서고성
지금은 조선족들이 경작하는 논으로 변했다.

그러나 일시 이곳으로 도읍지를 옮겼던 시절
발해인 고분군으로 남아있는 용두산(龍頭山)
10 여 고분 제일 위쪽은 문왕의 정효공주 무덤

발해 영토는 만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함경도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도 발해.

니콜라예프카·노보고르데예프카·크라스키노·
유즈노 우스리스크·크라스노야르 성터 등등
절터로는 아브리코스 절터, 코프이토 절터 등

니콜라예프카 성터에는 성벽이 10m 높이로 남아 있고,
성밖 성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해자가 그대로 있다.

크라스키노 성터는 두만강 삼각지대에 속한다.
포시에트 항구를 끼고 엑스페지치야만이 있는데,
그 맞은편 바닷가이고 성터 주위로 흐르는 얀치헤 강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 70㎞에 있는 우스리스크시에는
'명마의 산지'였던 유즈노 우스리스크 성터가 남아 있고
이 성터에서 서쪽으로 가면 발해 시대의 두 개 절터가 있다.

북쪽 강을 사이에 두고 양 옆의 야산에 하나씩 있는데,
서쪽에 있는 아브리코스 절터엔 많은 불상 파편과 기와들
그리고, 경교(景敎)의 십자가가 출토되는 점이 이색적이다.

함경남북도에서 발견된 발해 유적들도 상당수가 된다.
북청토성, 회령군 인계리토성, 김책시 성상리 토성(城),
신포시 오매리 절골, 개심사 절터, 어랑군 회문리 24개석

발해의 무덤군은 함경남북도에 걸쳐 수천기.

발해건축 24개돌 유적은 특이한 건축유형.
① 발해왕족 시신을 잠시 보관하는 장소였다.
② 신앙과 관련된 제례를 지내는 건축물이었다.
③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숭배하던 종교적인 대상

④ 주요 도로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역참(驛站)이었다.
⑤ 발해왕실의 기념성 건축물이었다.
⑥ 곡식창고였다

북한 발해 유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북청토성이다.
이 토성은 청해 토성, 토성리 토성이라고 불리는 것
성의 규모나 형태가 만주의 발해 도성들과 비슷한 양상

북청토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포시 부근의 오매리 절골
함경남도 신포에서 북동쪽 13㎞ 떨어진 해발 432m의 압해산
맨 아래는 고구려 문화층이고, 그 위 두 개 층은 발해 문화층

이 절터는 고구려에서 발해까지 사용된 것으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보여주는 중요 유적지.

발해 불교 유물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상이다.
가장 많이 발굴된 것은 대량생산한 소규모 전불
법당의 벽면이나 불단에 세웠던 천불(千佛)이다.

틀로 떠서 구운 소규모 관음보살 입상 역시 다량.
동경으로 추정되는 훈춘 팔련성 이불병좌상 파편
이불병좌상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에도 희귀.

이는 발해 불교의 연원이 고구려임을 암시하는 것.
이와 더불어 내세왕생을 희구하는 아미타 정토신앙

발해 토기는 고구려계와 말갈계 두 가지 기술 전통
하나는 적색이나 갈색 계열의 색조를 띠는 구운 토기
한편 당나라의 삼채(三彩)기법을 받아들여 만든 토기.

발해의 무기는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주로 발견되는 것은 살촉이며 창과 투겁창, 찰갑

이밖에 발해에서는 각종 도구 및 공구, 장식품
청동 비녀, 숟가락, 거울, 허리띠 부속, 고리, 못
건축 부속품의 장식물, 팔지, 가락지와 귀고리 등

장식물에는 갖가지 꽃무늬를 새기거나 금도금
철은 삽 호미, 낫, 보습, 손칼, 가위, 자물쇠,
집게, 고리, 갈고리, 문 여닫이 장치, 수레 굴통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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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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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 영주(營州)지방에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

696년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으로 이동.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 말갈추장에게 허국공을 봉.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 후, 말갈족과 교전하여 대승.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 당나라 추격군을 격파.

그뒤 계속 동부 만주로 이동해 길림성 동모산에 도읍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한다.
당시 대조영 집단은 강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가진 세력

대조영은 동부 만주일대에 세력을 확대
당시 그 지역은 토착세력이 없었던 지대.
말갈족과 고구려 유민들이 산재해 있던 곳.

새로운 힘의 구심점 대조영이 등장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속속 귀속한다.
대조영은 몽고 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

신라와도 통교후 당나라와 정식으로 통교한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 왕으로 책봉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719년 고왕이 죽자, 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계승.
고왕 대조영은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인.

...........................우리나라 역사 속 대조영..........................
당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요하 서쪽 영주 지방으로 이주.
696년 거란족 반란 때 고구려 유민은 말갈족과 함께 동쪽으로 탈출.
당이 거란족을 평정한 뒤 발해 집단을 추격하자 당 군대를 크게 격파

699년 지린성 돈화현 지역인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震)
이후 당 유화정책에 아들 대무예(大武藝: 뒤의 武王)를 당에 보내 답례
713년 당 현종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 국호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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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헌종과 밀월 관계에 있었던 신라의 역사.
당나라도 꺾지 못하는 고구려를 신라가 정복했다.
통일신라 시대의 막강한 국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

신라 5 대 진흥왕은 한수 이북으로 새로운 영토를 넓힌 후에
북한산 비봉(碑峰) 정상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 적이 있었고
신라 화랑은 백운대 뜀바위를 건너 뛰는 성인식 전통도 치뤘다.
밤에 그곳까지 올라 뜀바위 장부에 이름을 적는 담력 훈련이었다.

바위 틈새 깊이가 다섯 길이고 그 폭이 한길 정도나 벌어진 뜀바위.
그 바위 벽을 오르기도 힘들지만, 건너 뛰기는 더욱 어려운 곳이다.
그곳 성인식은 화랑 훈련이 얼마나 강도 높은 것인지 뒷받침한다.
한번의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극한담력 체력훈련인 것이다.

화랑훈련은 세계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훈련임을 입증하는 증거.
화랑은 '일당백' 용맹과 기상을 갖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

오늘날,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이어받는 육군사관학교 장교 후보생.
수도 서울을 지키는 좌청룡 불암산 기슭에서 용맹한 기상을 떨친다.
우리나라 역대의 국군 통수권을 장악했던 대통령 3 인물을 배출했다.
남북으로 갈라진 38선을 걷우어낼 우리 민족의 꿈나무들이기도 하다.




제나라.



당나라 중심부에 부활한 고구려의 혼.
제나라는 고구려 멸망 98년후 유민국.
그후 제나라는 55년간 당나라와 자웅.

제를 건국한 후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
최초 국명은 지금 산동반도 지역 치청국
원래 이정기는 당나라 15주 치청 절도사

755년 '안록산의 난' 혼란기
765년 상관 이희일을 죽이고
치청국을 세워 약 55년간 집권

산동반도는 당나라 경제의 중심지아자 소금 산지.
또한 당의 젖줄 강남과 연결된 당나라 심장부였다.

이정기 장군은 49세 당나라 정벌 준비를 하던 중
등창으로 운명 후, 아들 이납이 다음 왕으로 즉위.

당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이납은 국호를 '제(濟)'라 선포하였다.

이납은 당나라의 물자 보급로를 끊었는데,
제나라가 위치한 곳은 당나라 물자수송로.
하여, 당나라 수도 주민은 1년간 굶주렸다

당 황제 덕종은 수도를 장안에서 봉천으로 이전.
이납이 죽자 아들 이사고가 제 3대 왕으로 즉위.
이사고는 당나라 양주를 점령하자 당 조정은 회유.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가 제나라 왕으로 등극.
이사도는 당나라 낙양의 물자보관소 하음을 공략하였다.

당나라 제 2의 도시 낙양

장안 동쪽에 위치한 낙양.
당나라는 낙양 탈환을 시도.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819년 제국의 도지병마사 유오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죽여 제나라 정벌.
이리하여 제나라 영광은 55년 만에 끝났다.
당나라는 제나라 고구려계 장군 1200명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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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멸망시켰던 백제
혹시 백제의 일부분 아닐까?
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는 존속

백제는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중국 요서(遼西)에 도읍을 갖인 강한 제국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나라.

잃어버린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뿌리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듯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
부산, 즉 부유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곳.

중국인이 한족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고,
그의 활동무대는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

산동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 발원지이며 복희의 활동무대

부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 국조(國祖) 복희는 동이족 시조
그렇다면,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
북부여(北夫餘)는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

북부여의 한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동부여
또는 졸본부여라 칭한며 고구려에 병합된다.
부여족의 한반도 백제는 당태종에 의해 멸망.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시조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 보좌진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그후 위례로 올때 백성이 따라왔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백제 제(濟)는 산둥성 제수(濟水)에서 유래




당나라.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 고대왕조.
618년 이연이 건국하여 907년 멸망.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

당 문물(文物)과 제도는 동아시아에 큰 영향
그 주변 민족의 정치, 문화적 성장에 큰 기여
특히, 한반도 삼국체제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

그러나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 붕기로 점점 쇠퇴의 길을 간다.


<정치>

수나라 말기 진양에서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반란 진압사령관 이연은 둘째 아들 세민(世民)

618년 수나라 양제가 반란군에게 살해되자
당나라를 건국하고 반란군 평정후 천하통일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이세민

형이며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을 죽이고 626년 제2대 당 황제
'현무문 난’을평정한 세민이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적 돌궐(突厥)을 평정하고,
주변국을 평정해 한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년은 태평성대

태종 대를 이은 고종은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宮人)이던 무씨를 황후로 세우며
당나라는 '여화(女禍)’의 길이 열리게 된다.

무후는 아들인 중종과 예종을 폐하고 즉위
국호를 주나라로 개칭후 중국 여제로 등극
재위 16년간 책략과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

반대파 쿠데타로 당 황제로서 복위한 중종
황후 위씨에게 독살당하며 무후시대가 재현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나라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이융기'가 곧 현종.


현종은 정치쇄신 사회안정으로 전성기를 이룬다.
712∼756 45년간 당 수도 장안은, 문화의 중심지
당 현종은 양귀비 일족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는다.

755년 평로 등 3지구 절도사 안녹산은 양국충을 제거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四川]으로 피란하고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 사사명으로 이어진 반란은 9년간 계속
이민족의 도움으로 제압했으나, 당 조정은 힘이 없었다.
헌종은 절도사 권한을 축소해 한동안은 중앙집권에 성공

중앙집권 강화책은 민중에게 가혹한 부담
숱한 유민이 생겼고 지주 호족계층도 고통

859년 구보(甫)의 난,
868∼875년 방훈의 난
875∼884년 황소의 난.

이들 반란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나,
전란으로 강회의 곡창지대가 황폐되어
당나라 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당나라는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조정은 환관과 재상으로 갈려져 권력다툼

재상파와 내응한 황소의 옛 장수 주온이 장안 점령.
소종(昭宗)을 살해한 다음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907년 스스로 즉위해 당은 20대, 약 290년 만에 멸망.


<제도>

당나라는 3성(省) 6부(部)를 두어 국정을 관장하였고,
지방은 10도로 나누어 그 밑에 주 현(縣)을 설치하였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을 감찰

또한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령을 두어 통치
일반민은 향(500家)·이(100家)·인보(5家) 제도
이(里) 책임자 이정(里正)은 우리나라 이장 역활.


<문화>

유학은 공영달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을 정리
이백(李白), 두보(杜甫) 2대 시성(詩聖)을 비롯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王維),

특히 불교가 발전해 천태종과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
현장(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을 번역.
불교 교리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천태, 화엄, 법상 외

지론(地論), 섭론(攝論), 구사(俱舍), 성실(成實),
삼론(三論), 진언(眞言), 삼계(三階) 다수 종파 분립

이 밖에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이 개종(開宗)되어,
선종은 말기에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된 뒤에도 홀로 번영
중국불교로 완성되었고 송학(宋學)에도 다대한 영향을 준다.

한편, 도교는 노자 제실 이씨 호응을 크게 얻었고
현종은 도덕경을 집집마다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이 밖에 동서양 간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敎)·마니교(摩尼敎),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경교(景敎)
등의 외래종교 사원(寺院)들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한반도와 관계>

618년 당나라 개국때는 고구려 영류왕 1년,
신라 진평왕 40년, 백제 무왕19년 무렵이다.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은 신라,,후백제, 마진
발해가 한반도 및 만주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

당나라 건국 3년인 621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친밀관계 유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길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628년 처음 당에 사신을 파견
봉역도(국경의 경계도)를 보내는 한편, 당나라를 경계

631년(영류왕 14)부터 16년간 동북쪽에 부여성을 쌓고
서남은 발해만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백제에서는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는 새서를 주어
신라와 백제의 화해를 주선.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점령할 야심을 품었으나
수나라가 패한 사실을 감안해 신중을 기했다.

642년 백제가 신라를 쳐서 대야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 백제가 신라 당항성을 빼앗아 대당 교통로를 끊자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했다.

연개소문은 두 번째 온 당나라 사신을 굴에 감금
당나라와 고구려의 숙명적 대립 역사가 시작된다.

645년 이래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을 거듭해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당나라는 백제에 웅진 등 5도독부를,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었다.

669년 고구려 유민 2만 8200호(戶)를
중국 내지로 옮기는 이민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들을 실질적으로 예속한다.

이에 앞서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삼아 한반도를 완전 귀속.

당나라는 677년(문무왕 17) 안동도호부를
신성(만주)으로 이전해 양국관계는 정상회복
699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진(발해)을 창건.

한반도 최초 중세적 전제왕국을 확립한 고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하였고
이와 같은 고려제도는 이조 왕조에 다시 계승.

현종은 즉위 초 선정을 펴고
사치한 물건 궁전 앞에서 소각
백성들에게 검소한 생활의 모범

재위 기간이 길어지고 재정이 풍부해지자
말년에는 양귀비에 대한 무분별한 총애로
어느새부터는 안일과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를 잃고 실의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지만
이럴 즈음 현종을 사로잡은 여인이 바로 양귀비.

양귀비는 본명이 옥환(玉環)으로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 이모의 비.
며느리인 옥환에게 마음이 끌린 현종

양귀비와의 유흥으로 즐거운 하루 하루.
당나라는 이후 차츰 쇠퇴의 길을 걷는다.




축천무후.



625~705. 12.16.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당나라 고종(高宗:649~683)의 비(妃)로 들어 와
황후(皇后)의 자리에 올랐으며 40년간 중국을 통치.

생애 마지막 15년(690~705)간 국호를 당에서 주로 변경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고 중국의 제국을 차례로 통일.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재통일한 시기.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고종)와 깊은 관계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

그당시 신임 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비의 지위를 하사.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후,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 황후로 등극한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태종 때부터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
이들은 무후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대신들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무후가 귀족 출신이 아닌 점
또한 무후가 선제의 후궁이었다는 점도 반대한 이유.
660년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 추방 처형하여 모두 제거.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하거나 몰락.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해 고종을 대신해 당나라를 통치
천성이 나약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고종이 죽기까지 23년 동안 중국 통치자는 무후.

무후는 모반 가능성이 있는 정적들을 계속 제거했고
그 정적이 자기 피붙이라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후는 뛰어난 행정수완, 용기, 과괌하게 통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
궁궐 내에서 사랑 받지 못했으나 존경은 받았다.

655~675년 무후는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 철이 즉위하여 중종(中宗)

중종은 위씨(韋氏)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삼았는데
위황후는 중종이 무능하자 중종을 폐위시키고 추방
둘째 아들 예왕단을 즉위시키니 이가 곧 예종(睿宗).

예종은 명목상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무후의 손에 있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당조 지지세력 젊은 관리들이 반란
몇 주 지나지 않아 황실을 지키는 충직한 관군이 진압
무후가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자 정치기반은 요지부동.

6년 후 690년 65세 무후는 스스로 황제로 등극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15년간 황제로서 통치.

이 시기에 황위 계승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
무후의 친정 조카들은 무후가 국호를 주로 바꾸자
李家를 제치고 무씨에게 황위를 물려주리라고 기대

그러나, 무씨 중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무후의 아들 중종과 예종 또한 지지 세력이 미약했다.
그러나 무후의 측근들은 당조의 이가(李家)를 지지한다.

698년 무후는 충성스런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배된 중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무후는 임종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

699년 말년의 무후는 장역지 장창종 장씨 형제를 총애
이들은 기발한 연회와 아첨으로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장씨 형제들은 궁중 사람들과 대신들에게 원성을 산다.
무후는 중병에 걸리자 장씨 형제에게만 의존하게 된다.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켜 궁중을 장악
장씨 형제를 처형한 뒤, 늙고 병든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
무후는 아들 중종에게 황제를 양위후 705년 12월에 죽었다.

무후는 유능한 인재를 직접 골라 쓴 탁월한 통치자.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 상 매우 중대한 의의
귀족가문 보다 문인 관료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꾼 점.

왕위 찬탈, 반대파 숙청으로 과소평가된 무후 치적.
무후는 확고한 기반 위에 새 통일 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해 당조를 안정시켰던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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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 태종이 운명하자 감업사 비구니가 된 축전무후.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
감업사에 들러 축전무후을 만나 옛정에 끌렸다는 고종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고종의 황후 왕씨와 후궁 소숙비 간 시샘 갈등
당시 고종의 마음은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는 고종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려던 계략

황후는 고종에게 축전무후 입궁을 부추긴다.
실로 고양이를 잡기 위해 범을 데리고 온 셈.

황후 왕씨의 보살핌으로 황궁에 들어간 측전무후
정성껏 황후 왕씨를 모시며 고종의 총애를 받는다.
황제와 황후 총애로 정이품 소의까지 오른 축전무후

황제 9명 빈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그녀의 위에는 황후와 4명의 비(妃) 뿐.
그녀가 다시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28 세.

고종에게는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6명(4남 2녀)이 모두 축전무후의 소생이다.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던지 짐작 간다.

성격 상 다른 사람의 밑에 있지 못한 축전무후
갖은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리며 이용
특히 황후나 소숙비 행동을 감시하게 했을 정도.

축전무후는 황후 왕씨와 결탁해 소숙비를 제거
고종이 소숙비를 쫓아내자 황후 왕씨 또한 제거.

어느날 축전무후는 귀여운 둘째 딸을 낳았다.
자녀가 없던 황후는 자주 이 딸을 데리고 놀자
축전무후는 황후를 제거하는데 기회로 이용한다.

황후가 딸을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 딸를 목졸라 죽이고 이불로 덮어둔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며 반긴다.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죽어있는 딸
깜짝 놀란 고종은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묻는다.
그러자 축전무후는 울며 황후가 다녀간 사실을 고한다.

고종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황후 왕씨를 폐서인 하기로 결심을 한다.
654년 겨울 황후 왕씨와 소숙비는 폐서인

이로부터 6일 후인 10월 19일 축전무후는 황후에 책봉.
황후가 된 축전무후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제거한다.

황후 왕씨와 소숙비 두사람에게
곤장 백대씩 치고 두 다리를 잘라
술항아리 속에 넣고 죽어가게 한다.

당나라 고종 황제 비석 옆 축전무후 비석.
아무런 글귀도 새겨져 있지 않은 그녀 비석.

쿠데타로, 신흥귀족이 된 무사확의 둘째 딸
빼어난 미모도 연줄도 없지만 시와 문을 사랑
지적인 그녀는 황제가 될 치노와 운명적인 만남.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올라 정적들을 제거하고
천하를 경영하며 제국의 기틀을 닦아나갔던 그녀.
절망과 희망, 야망과 환멸, 절대자의 고독, 두려움,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과 삶에 대한 집착 등,
글귀 없는 비석은 파란만장한 축전무후 일생의 상징.




문무왕.



신라 제30대 왕(661~681 재위)이고 이름은 법민(法敏).
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 여동생 문명왕후
백제,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 축출, 삼국통일 위업


<정복활동 및 삼국통일>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공격을 시작하자,
신라군을 이끌고 남천정(경기 이천)에 머물던
태종무열왕의 명령으로 덕물도(덕적도)에 파견

뱃길로 온 소정방을 맞이해 백제 저항군을 진압.

663년 일본에 있던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삼아
백제 저항 근거 주류성을 당군과 같이 공격해 함락.
백제 저항군 근거지인 임존성(충남 대흥)도 함락한다.

그러나, 당은 663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해 신라의 독립성을 부정

665년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화약.
한편, 문무왕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도 꾸준히 전개해,
663년 평양 공격에 나선 소정방 당군에게 군량을 제공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함께 몸소 합류
평양성을 공격하려 장새(황해 수안)까지 북상
당군이 철수하자 문무왕 신라군도 함께 철군.

668년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고,
6월 문무왕도 한성주(경기 광주)에 머물면서
군사를 파견해 마침내 보장왕의 항복을 받았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그 땅을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
고구려 부흥군의 거센 반발로 지배가 사실상 불가능.

고구려 저항군 중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검모잠(劍牟岑)
한성(황해 재령)으로 남하해 당나라에 저힝을 계속한다.

보장왕 서자 안승을 왕으로 삼았으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

문무왕은 안승을 금마저(전북 익산)에 안치
문무왕은 670년 안승을 고구려왕으로서 책봉.
고구려 세력을 지원해 당과 연결된 백제를 견제

그해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의 고연무(高延武)와 더불어
각각 1만 군사로 압록강 이북을 공격.

그리고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가 안정되자
문무왕은 안승을 다시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

한편 670년 백제 고지의 63성을 점령하고
그곳 주민을 신라로 이주시키며 백제를 공략
671년 석성 전투에서 당군 3,500명을 사살한다

당시 '설인귀'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자,
문무왕은 당이 평양 이남을 주기로 한 약속을 상기
그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한편 당과 화해를 시도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 외교 양면정책을 구사하며
그해 사비성을 함락시켜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신라는 백제 고지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즈음 신라는 당군과의 전투가 치열해졌고,
672년 후 당은 신라 침략을 개시해 나당전쟁.

673년 문무왕은 구 신라 영역에 여러 성을 쌓고,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00척으로 서해를 방어.
백제 멸망 후 폐지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켰다.

한편 당과 내통한 신라인에 대한 처벌도 과감히 수행.
한성주총관 수세, 한성도독 박도유, 아찬 대토를 처형
신라는 비상체제 하에서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대응.

674년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
문무왕에 대한 불신 뜻을 보이는 한편, 신라를 공격.

675년 설인귀의 당군은 문훈이 이끈 신라군에게 참패.
이어 이근행이 이끈 20만 당군을 매초성에서 물리친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필과, 무기를 노획했다.
당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신라는 18회 전투에서 승리.
북쪽으로부터 육로를 통한 당군의 신라 침입은 저지되었다.

한편 676년 신라 시득이 이끈 해군은
해로로 남하하던 설인귀의 당군을 격퇴.
소부리주 기벌포 전투에서 4,000 명을 사살.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도 장악했다.
당은 평양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이전
신라는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이남을 차지
신라는 불완전하나마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내치>

662년 신라는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을 공격.
당과 내통한 귀족들을 주살하며 강력한 왕권정치를 발휘.

673년 외관을 감찰하는 외사정을 주에 2명, 군에 1명씩 두고,
679년 궁궐을 수리해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한것도 같은 맥락.
문무왕을 뒤이어 즉위한 신문왕대도 왕권을 크게 강화하게 된다.

671~672년에 중앙관청의 실무자 수를 늘렸고,
675년 예부·승부·사정부·창부·조부 등의
중앙관청 차관급인 경(卿)의 수를 1명씩 증설

또 재위 후반 관리 녹봉을 관장하는 좌우사록관을 설치
678년 선박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선부령 1명을 둔다.

678년 북원소경, 680년 금관소경을 설치
9주 5소경제 제도로 지방 행정을 관활한다.

기병 중심 지방군제 오주서(五州誓)를 설치
통일신라시대 군사체제 정비의 기반을 닦는다.

675년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해인 669년 고리대 제한정책
이자 탕감으로 평민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방지한다.

전쟁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

681년 7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안에 능을 만든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

'바다 속 대왕암이 곧 문무왕의 능.'


..................대왕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해가 뜨는 울산 간절곶.

2006년 1월1일 간절곶 일출은 오전 7시 31분 25초.
부산 태종대 7시 31분 43초, 경주 감포 7시 31분 55초,
포항 호미곶 7시32분29초, 정동진은 7시39분에 해가 뜬다.

간절곶은 동해의 맨 아랫 자락으로 남해와 물을 섞는 귀퉁이.
바다에서 보면 간짓대(막대기)처럼 보인다 해서 간절곶(艮絶串)

이조 초 이길곶(爾吉串)이라고 했는데 길하다는 뜻
'울산 간절곶에 해가 떠야 새벽이 온다’고 전해온다.

간절곶 등대 아래로 장승 한 쌍과 기념비,
망부석이 됐다는 신라충신 박제상 부인 석상
간절곶은 태평양을 향해 열려 있는 중요한 뱃길.

장생포는 포경선들이 고래떼를 쫓아 헤매던 바다.

지금은 원유를 실은 유조선, LPG수송선,
자동차를 싣고 가는 컨테이선 등 선박들.

울기 등대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대왕암 언덕
대왕암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은 경주 감포 앞바다의 수중릉보다 크다.

'섬에 다리도 놓여있고 공원으로 꾸며진 대왕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