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74. ( 남악사. 신궁. 박혁거세. 신라 건국. 안동 도호부. )

donkyhote 2010. 11. 12. 03:25

 

 

남악사.




노고단에 있는., 남악사 터.
노고단은 화랑의 심신 수련장.
노고단은 경주에서 보면., 서산.

하여, 노고단에 남악사를 지었던듯.

난생신화' 정기를 이어받은..박혁거세.
기자조선 전통과 단군을 계승한 신라인
선도성모 숭배는 배달국 신라인들의 전통 .

기원전 2830년, 환웅과 배달국 왕비 웅녀
여기서 태어난 <려>가 단목국 왕검.,단군

단군이 14세에 웅씨왕의 비왕이 되어
24년간 섭정한 후 이룩한.. 웅씨 왕국.
기원전 2333년 단목국 구환족까지 통일

웅씨 왕국 500 여년은 모계사회
하여, 단군의 배달민족이라 한다.
단군은 진한을 창건 아사달에 도읍

단군이 나라를 세운 시기는 모계사회
배달국 웅녀의 후손이 곧 <배달민족>.

그후 모계사회가 무너진 후,
고조선을 이룩한., '한겨례'.

남악사는 모계사회에서 유래된듯.
신라 왕실은 모계 관습을 유지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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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번지
1984년 전남 문화재 36호로 지정
현재, 화엄사 내 10평 규모 남악사.

남악사는 선도성모를 모시는., 사당.

통일신라 시대 남악사는 신라의 신궁.
박혁거세 어머니를 선도성모로서 추앙.
신라 5악 명산마다 신궁을 짓고 섬겼다.

신라 때 지리산은 오악중에 하나인 남악
당시 천왕봉에서 제사 지냈던 것으로 추측
고려에 이르러서 노고단으로 옮겨서 지냈다.

조선 세조 2년 지리산이 남악으로 정해지자
남악사가 노고단 아래 당동으로 이전하였다.
산동면 좌사리 당동마을은 당(堂)을 뜻한다

예전에는 3칸이라 제관들이 불편해 하였으므로
영조 13년 남원 부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신.
온당리 당동 남악사는 1908년 11월 12일까지 존속.

1969년 화엄사 지장암 옆에 다시 지어 명맥을 유지.
부대행사로 지리산녀 선발대회 등 20여 행사를 한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오를때 남악사는 스쳐가기 쉽다.

군 북쪽 옛 소의면 입모봉 아래에 있다.
전에는 내산면 당동에 성모사가 있었다.
어느 해에 이곳으로 옮겨졌는 잘 모른다.

신라 때 중사에 반열했고 백제와 고려에서도 그랬다.
조선조 태조와 세종 때 더러 제사를 남악으로 삼았다.
정전 3칸 정사청 4칸 재실 5칸. 융희 2년(1908) 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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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사(南岳祠)는 국모신 선도성모를 모신 곳.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받들고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 노고단 남악사.

경주 선도산 성모사(聖母祠)도 선도성모 신단

노고단(老姑壇)은 선도성모 높임말 노고(老姑)와
제사를 모시는 신단(神壇)이 합쳐진 말에서 유래

선도성모 신단은 이곳 지리산(남악사) 외에도
팔공산(중악사), 토함산(동악사), 계룡산(서악사),
태백산(북악)., 5악산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고려 ~ 조선시대에도 3악사에서의 국가 제사
(묘향산 北岳祠, 계룡산 中岳祠, 지리산 南岳祠)
노고단의 제단 흔적들은 광복 이후에 파괴되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선도성모 제단에 대하
그 어딘가 흠모의식을 갖고 보호하고 있었다.
노고단이 일본천황의 신궁역사의 뿌리이기 때문.

광복후 빨치산 토벌 때 불타고 파괴된 남악사

화랑들의 우두머리 풍월주는 본래 여성 원화
화랑을 잉태한 여인을 축복하는 여신의 상징

노고단(老姑壇)의 老姑는 '오래된 시어머니'란 뜻
노고는 사소(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를 뜻한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의 모계혈통(母系血統) 체제

모계혈통 32명의 풍월주 최상단에 여성 상선이 존재.
그것은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에 연관되고 있다
고려시대 중기 개경(개성)에 박혁거세 신사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선도성모 신사는 일본에서 만 수천개가 존재
중국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 속의 미스터리

여성 태양신 천조대신은 동신성모(東神聖母)
일본천황가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라 석굴암과 감은사 앞바다 대왕암(해중능)

석굴암의 동짓날 일출은 감은사와 해중능이 연결
일출 방향을 따라가면 일본천황의 제사터 이세신궁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신궁(神宮)인 곳.

天照皇大神宮 = 태양의 여신 = 동신성모.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화랑들은 애초에
신궁(神宮)이라는 신라 최고 제사시설에서
산꼭대기 또는 산중에서 제관 역할을 맡았다.

이세신궁에 천황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계(神鷄)
이것은 박혁거세 부인 알영이 신계였던 것과 일치.
박혁거세 부인인 알영부인은 <김씨계의 진짜 시조>

<화랑세기>에서 보여주는 신라의 잉태한 여성
화랑의 최고 지도자인 여성 원화에 의한 축복
원화제도 폐지후에 국사가 그 역활을 대신했다.


 


신궁. 



나정(羅井)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지
신라인들은 시조묘를 섬기는 전통을 갖고있다.
제2대 남해왕은 시조묘인 박혁거세 묘에 제사

그것이 신라 신궁의 시작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

기원전(紀元前) 69年 신라의 육부(六部) 촌장들이
어느날 알천 언덕에 모여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

제례 중, 나정(현재 양산) 있는 곳을 바라보니
울창한 숲에서 오색 빛이 나기에 그곳에 가보니
알 같기도 하고 박같기도 한 포가 있어 헤쳐보니

그 알 속에서 사내 아이가 나왔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켜 길러 초대왕
BC 57年에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칭했고

하여, 그가 태어난 곳이 계정.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정했다.

487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479∼500 재위)
박혁거세 시조묘(始祖廟) 자리에 세운 신궁

신라신궁의 시작이 된 것이며
훗날 일본신궁의 뿌리가 된 것.

황룡사도 신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서, 황룡사.

6세기 초에 세워진 신라 신궁
일본보다 무려 1백년 앞선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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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신모(神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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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선도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신라 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 성자를 낳았는데
뒤에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혁거세왕과 알영'일 것이라는 해석.

계룡이니 계림이니 또는 백마니하여
시조 탄생설화에 나오는 동물이 있는데,
이들 닭 흰색을 방위로는 서쪽에 속한다.

이 이야기가 서산 신모에서 비롯된 때문.

신모는 또 하늘의 선녀들을 시켜 비단을 짜게 해서
붉게 물들여 신라 여인들에게 한복을 만들게 하고는
그 남편들에게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영험에 놀랐다.

서산 신모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다.
김부식이 고려 때 송나라 사신으로 들어갔었다.
우신관에 상이 있었는데 송 접대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네 나라의 신인데
공도 잘 알고 있을 것이지마는......"

하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

"옛날에 중국 왕실에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낳은 아들이 해동의 시조
그 여인은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신의 상입니다."

여러 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산 성모는
신라시대 뿐 아니라 고려때까지 전해 왔으며
신라의 개국 시조와 결부될 만큼 추앙받았다.

박씨 시조를 선도산 성모로 보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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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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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居西干 : 居世干),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尼師今) ,

마립간(麻立干),

왕(王),

 

성(性) : 박(朴),석(昔),김(金)

56대 992년(B.C.57∼935)

 

1대 혁거세(赫居世) (B.C.57) : 박, 거서간(居西干)
2대 남해(南解, A.D.5) : 박, 차차웅
3대 유리(儒理, A.D.24) : 박, 이사금
4대 탈해(脫解, A.D.57) : 석, 이사금, 토해(吐解).
5대 파사(婆娑, A.D.80) :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대 지마(祇摩, A.D.112) : 박, 이사금, 기미(祇味).
7대 일성(逸聖, A.D.134) : 박, 이사금, 유리의 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8대 아달라(阿達羅, A.D.154) : 박, 이사금
9대 벌휴(伐休, A.D.184) :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대 내해(奈解, A.D.196) : 석, 이사금, 벌휴(伐休)의 손자.

11대 조분(助賁, A.D.230) :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대 첨해(沾解, A.D.247) :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대 미추(味鄒, A.D.262) :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 김알지(金閼智)는 왕이 될 기회도 있었으나 파사왕(5대)에게 양보한다.
14대 유례(儒禮, A.D.283) :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대 기림(基臨, A.D.298) : 석, 이사금, 기립(基立). 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 걸숙(乞淑).

16대 흘해(訖解, A.D.310) : 석, 이사금, 내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于老).
17대 내물(奈勿, A.D.356) :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
18대 실성(實聖, A.D.402) :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 대서지 이찬.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셋째 아들 미사흔은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19대 눌지(訥祗, A.D.417) : 김, 마립간, 내물왕의 장자.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20대 자비(慈悲, A.D.458) : 김, 마립간

21대 소지(炤知, A.D.479) : 김, 마립간, 비처(毗處).
22대 지증(智證, A.D.500) : 김, 마립간, 휘(諱)는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寶)의 아들. 23대 법흥(法興, A.D.514) : 김, 왕, 휘(諱)는 원종(原宗). 연호는 건원(建元)
24대 진흥(眞興, A.D.540) : 김, 왕, 휘(諱)는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연호는 개국(開國)
25대 진지(眞智, A.D.576) : 김, 왕, 휘(諱)는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대 진평(眞平, 579) : 김, 왕, 휘(諱)는 백정(白淨). 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연호는 건복(建福)
27대 선덕(善德, 632) : 김, 왕, 휘(諱)는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연호는 인평(仁平)
28대 진덕(眞德, 647) : 김, 왕, 휘(諱)는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연호는 태화(太和)
29대 태종무열(武烈, A.D.654) : 김, 왕,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
30대 문무(文武, A.D.661) : 김, 왕, 휘(諱)는 법민(法敏). 무열의 원자.

31대 신문(神文, A.D.681) : 김, 왕, 휘(諱)는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대 효소(孝昭, A.D.692) : 김, 왕, 휘(諱)는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대 성덕(聖德, A.D.702) : 김, 왕, 휘(諱)는 흥광(興光). 신문의 둘째 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대 효성(孝成, A.D.737) : 김, 왕, 휘(諱)는 승경(承慶). 성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景德, A.D.742) : 김, 왕, 휘(諱)는 헌영(憲英). 효성의 이복 동생.

36대 혜공(惠恭, A.D.765) : 김, 왕, 휘(諱)는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대 선덕(善德, A.D.780) : 김, 왕, 휘(諱)는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찬 효방(孝芳).
38대 원성(元聖, A.D.785) : 김, 왕, 휘(諱)는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대 소성(昭聖, A.D.799) : 김, 왕, 휘(諱)는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대 애장(哀莊, A.D.800) : 김, 왕, 휘(諱)는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대 헌덕(憲德, A.D.809) : 김, 왕, 휘(諱)는 언승(彦昇). 소성의 동복아우.
42대 흥덕(興德, A.D.826) : 김, 왕, 휘(諱)는 수종(秀宗). 헌덕의 동복 아우.
43대 희강(僖康, A.D.836) : 김, 왕, 휘(諱)는 제륭(悌隆). 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대 민애(閔哀, A.D.838) : 김, 왕, 휘(諱)는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대 신무(神武, A.D.839) : 김, 왕, 휘(諱)는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

46대 문성(文聖, A.D.839) : 김, 왕, 휘(諱)는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대 헌안(憲安, A.D.857) : 김, 왕, 휘(諱)는 의정(誼靖). 신무의 이복 아우.
48대 경문(景文, A.D.861) : 김, 왕, 휘(諱)는 응렴(膺廉). 희강의 아들 아찬 계명(啓明)의 아들.
49대 헌강(憲康, A.D.875) : 김, 왕, 휘(諱)는 정(晸). 경문의 태자.
50대 정강(定康, A.D.886) : 김, 왕, 휘(諱)는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대 진성(眞聖, A.D.887) : 김, 왕, 휘(諱)는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대 효공(孝恭, A.D.897) : 김, 왕, 휘(諱)는 요(嶢). 헌강의 서자.
53대 신덕(神德, A.D.912) : 박, 왕, 휘(諱)는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
54대 경명(景明, A.D.917) : 박, 왕, 휘(諱)는 승영(昇英). 신덕의 태자.
55대 경애(景哀, A.D.924) : 박, 왕, 휘(諱)는 위응(魏膺). 경명의 동복아우.
56대 경순(敬順, A.D.927) : 김, 왕, 휘(諱)는 부(傅). 문성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박혁거세.



기원전 57년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56대 경순왕까지 천년 역사의 신라
전반 오백년은 수수께끼 베일 역사.

신라의 도읍 경주는 조그마한 도시
수수께끼 같은 신라의 문화 유적지.

신라 건국 당시 진한 12국 중 하나

주변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고대국가로 발돋움
5∼6세기 들어와서는 낙동강과 한강 유역을 차지
7세기 중반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통일.

신라는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가야 당, 인도, 서역 문화를 유입.
독특한 신라 문화를 이룩하여 세계 속에 발돋움

그러나, 그 찬란한 역사에 비해 유적은 드물다.
박혁거세 탄생신화 또한 단지 설화에 불과할 뿐
하여, 신라 역사는 오늘날까지 베일속 수수께끼.

'노고단이 신라 성역인 이유는 무엇일까?'

노고단 남악사 터는 통일신라 시대의 성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면,
존재하지도 않을 어머니의 사당이 있는 의문점.

그 사당을 성역으로 여기고 대대로 제를 올린 점.
불교국에서 사당에 부처 아닌 선도성모를 모신 점.
경주에서 가장 먼 노고단이 선도성모의 성지인 점.

'박혁거세 출생의 비밀부터 풀려야..답이 나올 듯.'

박혁거세는 박씨(朴氏)의 시조이자 신라를 창건한 인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창건 전 '진한'은 사로육촌(斯盧六村) 부족사회였다.

'고조선의 일부 남하세력인듯 추정되는 사로육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신라 건국설화가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라 건국설화...........................

    서기전 69년 3월 1일 사로6촌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13세에 왕으로 추대되었고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BC 53년 알영(閼英)을 비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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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전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집단을 상정

 

말馬〕 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프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뜻하므로 태양숭배 신앙.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에 이주한듯.

 

혁거세는 BC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BC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던 사로국 영역은 경주평야 일대.

BC 28년 낙랑이 침범했으나 국경 백성들이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적이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BC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고 BC 5년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했고 박혁거세가 죽은 후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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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은 AD 4세기 무렵까지 낙동강 동쪽의 정치집단
12개 소국 중에서 규모가 큰 것은 4,000~5,000가(家),
규모가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였던 고대국가이다.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진국(辰國)의 후신이라고 기록.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진한뿐 아니라 삼한 전체의 전신
아직까지 진국과 진한의 관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상태.

<삼국지〉 진한조에 의하면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길
진나라의 만리장성 고역을 피해 한(韓)나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에게 동쪽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하룻밤 사랑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 속담.

오늘날까지 이 속담은 우리나라에 널리 전해온다.
그러므로, 진한의 형성 과정과 무관하지 않은 속담.
하여, 만리장성에 관한 전설을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하룻밤 사랑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만리장성 부역장의 고초를 대변해주는 속담 속 전설.
한번 끌려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던 만리장성 부역장.
부역장에 끌려간 신혼의 남편을 구해낸 한 여인의 기지.

남편이 부역장에 끌려간 후 홀로 지냈던 미모의 부인.
그녀의 외딴집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길 청했던 나그네.
나그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하룻밤 사랑을 간청한다.

나그네의 욕정으로부터 정절을 지키려 했던 그녀.
워낙 외딴 집이라 남자 힘에 저항할 수 없던 그녀.

'남편을 면회하게 도와준다면 허락할게요.'

나그네는 그녀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하룻밤 사랑.
나그네는 그녀와 함께 만리장성 감독관을 찾아간다.
감독관은 나그네를 인질로 그녀 남편에게 하루 휴가.

그녀는 휴가 나온 남편과 재회한 후 멀리 도망친다.
나그네는 하룻밤 사랑 탓에 평생 만리장성을 쌓는다.
그리고, 욕정에 눈이 멀었던 하룻밤 사랑을 후회한다.

'남편과 마지막 면회후 함께 살기로 약속했던 그녀.'
'그녀가 자신을 인질로 남편과 멀리 도망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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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폭정에 못이겨
한반도로 이주한.,진한인.
훗날 신라를 이룩한 원동력.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의 삼한.

마한은 한강유역 충청·전라도
진한은 경기·강원도 일부 지역,
변한은 낙동강 유역, 경상도 일대.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 + 부여족 = 예맥족.
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민족 = 부여족.
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

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유입된 위만(衛滿)
위만에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로 이주.

신라의 삼국통일로 1차 통합이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 멸망 후 유민들이 고려에 유입된다.

이러한 한민족의 통합 원동력은 동일한 언어.
예맥족과 한족이 쓴‘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
이것은 삼국시대 언어이고 오늘날 우리말 뿌리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
이어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통폐합된다.

진한은 마한에 비해 열세였던 것으로 보이며,
3세기 후반~ 4세기 중반 사로국에 의해 통합
훗날 신라로 발전했다는데 그 시조가 박혁거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 주인공.

................박혁거세 탄생신화..........................
6 촌장이 알천에 모여 군장을 추대하고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산기슭 숲속에서 서광이 빛치며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곳에 자줏빛 알 같은 박이 있어 깨보았더니 잘 생긴 사내아이.

기이하게 여겨.. 동천 샘에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
새와 짐승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며 해와 달이 청명.
하여, 성을 朴... 이름을 붉을 赫..거할 居..누리世..'박혁거세'.

같은 날, 우물가 계룡(鷄龍)의 겨드랑이로 난 여자아이 '알영'.
그들 나이 13에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 신라.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
3 성씨가 번갈아 왕이 되었는데 박씨 왕은 모두 10명.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국의 귀화족이 없다

하여, 모든 박씨의 시조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70∼80%를 차지한다.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 박씨

8 본의 박씨가 역사 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
.......................................................................

박혁거세는 난생신화로 태어난 신라의 건국 시조.
고대 부족의 시조는 알 속에서 나온다는 건국신화.
천신의 혈통을 받은 신인은 알에서 나온다는 관념.

고구려 시조 동명왕
신라 시조 박혁거세

둘 다 난생신화 신인.
동북아시아 공통 신화.


'박혁거세 그는 과연 누구인가?'

기원전 69년~서기4년, 신라의 건국 시조이며
기원전 57년~서기4년 재위한 박씨의 유일한 시조

기원전 57년 13세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진한 6촌의 왕
기원전 28년 침범한 낙랑이 '도덕의 나라' 라며 물러났다.

신라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곡식 더미가 즐비한 것을 본 탓.

기원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며 분노.
이듬해 마한의 왕이 죽자 신하가 마한을 치자고 건의.
남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하며 만류.
오히려 박혁거세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기원전 5년 동옥저에서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
서기 4년 3월에 승하하여 담암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
박혁거세 오릉(五陵)
....................

경주시 탑동에 있는 봉분 높이 10m, 지름 20m 내외에 오릉.
박혁거세와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해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

박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승천후 7일만에 유체<遺體>
그 시신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후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하려하자 큰뱀이 방해해 오체를 각각 장사

'하여, 오릉<五陵>은 일명 사릉<蛇陵>.'

나정은 박혁거세 탄강 전설이 깃든 사적 제 245호 우물.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1km 떨어진 소나무 숲
옛날 진한에 고조선 유민이 세운 여섯 마을이 있었다는 곳.

성모사는 경주 선도산 주봉의 높은 바위 밑에 지은 것.
진흥왕 때 안흥사 비구니가 황금 160냥을 얻었다는 기록
경명왕이 사냥중 매를 잃고 신모에게 기도해 되찾았다는 곳.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진한 6부 촌장.

첫째촌은 알천가의 양산촌인데 촌장은 (李)알평
둘째촌은 돌산기슭의 고허촌인데 촌장은 (崔)소벌도리
셋째촌은 무산기슭의 대수촌인데 촌장은 (孫)구례

넷째촌은 자산기슭의 진지촌인데 촌장은 (鄭)지백호
다섯째촌은 금산기슭의 가리촌인데 촌장은 (裵)지타
여섯째 촌은 명활산 기슭의 고야촌인데 촌장은 (薛)호진


............
경주 이씨.
............

원래, 신라는 6촌장이 다스렸던 진한의 영역.
경주 이씨 시조는 알평은 알천가 양산촌 어른.
알평이 처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박바위

기원전 69년 3월 1일 알평을 비롯한 6 촌장
알천 언덕 위에 모여앉아 신라 건국의 첫장.
그로부터 백년후 제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

6촌 지명을 고쳐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이씨 성을 삼아 경주를 본관으로 한 가문을 연다.

2천년 동안에 차성 우계 합천 가평 평창
아산 재령 원주 흥향 등의 지종으로 분파.
순종 무렵에는 바위 아래 표암제를 세웠다.

알천은 명활산 금오산 선비산이 애워싸고,
알천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신라 옛 도읍.

..............경주 이씨 인물................
이 항복(1556 ~ 1618)은 서울 필운동 이몽량의 아들
9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개구장이
16세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더욱 학문에 전념했다.

권율의 사위가 된 이항복은 25세 때 문과에 급제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을 지혜롭게 마무리하고
당파 싸움이 있을 때마다 잘잘못을 공평하게 가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고 왕의 총애를 받았다.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모함을 받아 죄인으로 몰렸다.
이항복은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정철을 찾아가 위로
이 일로 인해 탄핵을 받고 1591년 벼슬에서 잠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있던 이항복
어려움을 겪으며 왕비를 개성까지, 두 왕자를 평양까지,
선조를 의주까지 잘 호위한 공으로 형조 판서에 올랐다.

한편 이항복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를 모으게 하고,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
명나라 구원군 도움으로 평양성과 서울을 되찾는 공.

그뒤 이항복은 이조판서, 대제학의 벼슬에 있으면서
나라일을 보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명나라 사신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항복을 찾았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임해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다.
또한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7년 북청으로 귀양
다섯 달 만에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항복은 청백리에 이름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이덕형과 더불어
'오성과 한음'의 수많은 일화를 남겼던 인물.


이 시영(1882 ~ 1919) 구한말 항일 운동가
이 시영 (李始榮) :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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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



신라는 한반도에 있는 또 하나의 고대 중국
또는 당나라의 분국 또는 속국이였다는 학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에 관한 건국 설화가 분분.

'신라는 고대 어떤 나라로부터 유래된걸까?'

삼국유사 최치원 -“진한은 연(燕)나라 유민들이 피난온 곳."

신라 사람들 상당수가 탁록에서 이주해 온 것 같다.
탁록은 4520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현에 있던 은나라.
신라는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패망후 온 유민들의 집단.

그러나, 진나라 패망 전 한반도에 온 유민들.
단군조선 유민, 기자조선 유민, 위만조선 유민
한반도에서 삼한 시대를 이룬 고대국가 유민들.

'6촌 부락이 바탕이 되어 이룩한 신라.'

단군 조선은 진시황 8년(BC239)에 진에게 멸망
신라에 정착한 조선의 유민은 단군조선의 유민.
따라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에 정착한 유민은 진나라의 유민들.
기원전 2457년 경에 한반도에 들어온 듯 보인다.
사로국(斯盧國) 유민이 주축이 되어 신라를 건국

사로국의 사(斯)는 ‘새롭다’는 뜻이다.
로(盧)는 '말을 키우는 부족’을 지칭한다.
따라서, 신라는 기마민족(騎馬民族)의 후예.

신라 서라벌(徐羅伐)은 서벌(徐伐)이라고도 불렸다.
서(徐)는 소(蘇)의 변음, 소벌도리가 사로국 6 촌장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 마립간(麻立干)으로 내세웠다.

우리나라 고대에 사蛇(뱀)자의 부수인 충虫(벌레)자,
또 사巳(뱀)자로 씨족의 성을 삼는 예가 적지 않았다.
이로써 뱀을 숭상하는 모계사회 씨족을 이루게 되었다.

모계사회 후손은 風, 姜, 姬, 己 등 여러 성씨
강, 희, 기 모두 풍이족에서 비롯된 모계족 성씨.
고대 중국을 창건한 우씨 족과 적대 관계였던 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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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연으로 두 성씨는 앙숙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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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했는데,
마립(麻立)은 ‘마고를 세웠다’는 뜻
마고를 세우는 일이 솟대를 세우는 일.

솟대를 소도에 세우는 일을 해 온 소씨 성씨 부족
박혁거세가 신라 왕이 된후 신라에 솟대를 세웠다.
마립간은 솟대를 세운 신라의 왕이라는 뜻이 된다.

마고의 유습이 마고지나에서 한국으로, 배달나라로,
청구국으로, 단국으로, 단군조선으로, 신라로 전수.

마고가 세운 모계사회는 공동부부의 사회였고,
이 사회는 여덟 쌍의 부부가 공동부부가 되어,
종족을 번성시키며 이끌어가는 고대 씨족 사회.

마고는 8쌍 부부 사이에서 처음 태어난 여자.

모계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대단치 않게 여겼다.
마고대성(麻姑大城)은 마고가 사는 모계사회 큰 성.
구려족에서 출생한 신농은 동이족과 황제의 화하족

유망 후손과 황제 후손이 교대로 제위상속을 약조.
화하족은 유망의 증손자에게 제위를 넘겨주지 않는다.
하여, 인류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킨 화하족이 역사 왜곡 .

다음엔 거호의 아들 순(舜)이 요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
다음엔 제곡고신과 간적 사이에서 태어난 우(禹)가 쿠데타
4회 쿠데타로 3명의 제왕이 살해당했고, 제왕 후보 1명이 축출

화하족의 후손들이 부르짖어 온 요순의 태평성대
실은 쿠데타의 피로 얼룩진 역사 왜곡의 시대였다.
이 역사를 감추려고 화하족은 대를 이어 역사왜곡.

이 일을 처음 시작한 두 사람이 공자와 사마천.

유망·황제·치우천왕이 모두 구려족에 속했고,
이들은 웅족(熊族)이라고 하는 단군신화의 주역.
그러므로, 동이족과 하화족 모두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화하족이 동이족을 배반하고 홀로서기 성공
사실상 단군신화 종족 시조 신화권에서 떨어져나갔다
따라서, 신라는 동이족의 단군신화를 계승한 고대 국가.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
신라 이전 진한에서는 웅녀족 모계사회를 계승.

신라는 농본국가이므로 뱀을 영물로 귀하게 여긴 듯.
신라는 웅녀족 모계사회에서 유래되어 곰이 토탬 신앙.
지리산 뱀사골의 전설은 신라시대에 유래된 것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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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만.
.........


통일신라 영역은 원산만에서 대동강 이남.
강원도(북한) 원산시 원산만에 있는 항구.
통일신라 시대 국제 무역항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산항은 북한의 국제 무역항.'

원산만 북쪽에 돌출해 있는 호도 반도
원산만 동남쪽에 돌출한 갈마반도 사이.

반도 사이에는 여도·웅도·신도·대도·솔섬 등
원산만의 천연 방파제 역활을 하고 있는 섬들이다.
원산만은 수심이 깊고 간만의 차이가 적은 국제항구.

1880년 부산(1876) 인천(1883)과 함께 일본에 개항
1883년 인근 해안의 정어리 대량 어획으로 더욱 부각
1884년 세관 설치, 1890년 부두가 축조된 국제적 항만.

1892년 소규모 방파제 축조,
1897년 심한 폭풍우로 파손.

그뒤 파괴된 지역을 매립
그 자리에 창고를 세웠으며,
호안 매립공사와 물량장 시설.

본격적인 항만시설 작업과 수차례 보완작업
해방 전까지는 약 2만t급의 선박이 접안 가능.
당시 주요한 수출입무역항으로서 관북지방 관문

수출입무역품으로는 곡물류·수산물·광물·
기계류·피혁·인삼·도자기·사금·약재·목재
남항에서 10㎞ 북쪽 북항은 무연탄 적출 잔교 축조
일제 치하에서 무연탄을 일본으로 대량 수출한 항구.

성진항(현재 김책항)·청진항·나진항이 개발.
그 배후 지역은 원산시 공단 공업항으로도 발전.
해방후 무역항보다는 어항 군항으로 명맥을 유지.

최근 북한의 정비사업으로 부두시설이 확장.
현대적인 장비를 갖춘 국제 무역항으로 변모.

원산항은 현재 동해 남부 정치·경제·군사 중심지
1만t급 선박 3척 동시접안 가능, 1일 하역능력 2만t
앞으로 러시아 연방과 일본의 무역기지로 발전될 전망.

근해에는 한류·난류의 교차와 플랑크톤이 풍부
한때 어획량이 전국에서 가장 높기로 유명했으며,
지금도 명태·가자미·청어·송어·문어 다량 어획

'굴·해삼·미역·다시마 등의 천연 양식장.'

원산항 연안에는 수산사업소·양식사업소 등이 입지
원산 조선소·원산 종합기계공장·원산 수산 기계공장·
원산 전기공장·원산 방직공장 등 중화학 공장들이 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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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大同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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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만에서 대동강까지 통일신라 영역의 경계선
한반도 5번째 길이 441.5㎞, 유역면적 2만 247㎢.
평남 낭림산맥에서 발원 평남을 거쳐 서해로 유입.

마탄강·금천강·장선강·비류강·남강 등 상류
주변에 넓은 평야를 끼고 흐르다가 평양을 관류
하류 보통강 순화강 곤양천 매상천 황주천 재령강

상하류 크고 작은 지류들이 합류되는 대동강.

고조선 시대에는 열수(洌水),
고구려 시대에는 패수(浿水)·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

고려시대 이후 대동강이 지금의 이름
고려 고종 때 문신 최자(崔滋)가 명명.

"여러 지류가 모여 돌아 합류해 대동강."

강유역이 넓고 기름진 평야는 옛 조상 삶의 무대
역사 농업 수자원, 지하 임산자원 교통의 중심지.
무연탄·납·아연·금·철 등등 지하자원이 풍부.

대동강은 평남 대부분과 황해북도 일부를 포함
관서지방 중앙부와 하류 평원지대로 나누어진다.

상류는 평안남도 영원·맹산·양덕과 황해북도 곡산·수안,
중류는 덕천·순천·중화·서흥·성천·재령·평산·봉산 등
석회암 구릉지로 덕천·순천·성천·강동 등 석회암 용식분지

하류는 단애와 하중도가 나타난다.
평양의 모란대는 하안의 단애 지역.

능라도·양각도·두로섬·벽지도·봉래도
등의 하중도 들을 품고안고 흐르는 대동강.

평양 대동강 유역 사동 부근까지는 조수의 영향 지역.
대동강 하구 간만의 차는 4~5m, 평양 부근은 1~2m 정도.

대동강 하류 연안 일조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
하여, 하구 연안 천일염은 북한 총염전의 70% 생산.

강에는 숭어·잉어·붕어·농어·뱀장어·메기·
쏘가리 누치·산천어·열목어 등 104종이 서식
상류 지역은 감자·조·옥수수·콩 재배가 활발.

대동강 유역의 무연탄은 북한 총매장량의 90% 이상
덕천 부근의 평남북부탄전과 평양·사동·고방산 부근
대동강 하류 평양·송림·기양·강선·남포는 공업지역

제분·양조·제당·섬유·양말·
시멘트·제철·제강·기계 공업

대동강 유역은 구석기 및 신석기시대 유물 유적지.
평양 상원군 검은모루동굴 속 큰곰·동굴곰·하이에나·
코뿔소 큰뿔사슴 물소 원숭이 말 등 짐승뼈 화석 유적지.

덕천 승리산 석회암 동굴에서 구석기 청동기시대
덕천고인과 승리산 신인의 뼈화석 등 유적이 발국.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일대 빗살무늬토기 유적지

'원래, 서해안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유물.'

내륙 수운(水運)도 일찍부터 발달하여
하구에서 260㎞ 상류 덕천까지 운항 중.

현재 대동강 지류에 제방과 수로가 정리되어 있고
중소형 발전소 등과 미림갑문 각종 구조물들 설치
대동강은 관개용수·공업용수·생활용수·수력발전·
뱃길[水路]·담수어 양식 등에 종합적으로 이용된다.

대원군은 평양 기생을 이조 3대 병폐로 개탄.

신라시대 대동강 유역 평양은 국제적인 무역 도시.
고려를 거쳐 이조 후반까지도 무역이 성행한 평양.
평양기생은 국제적 무역 도시의 필연적인 존재인듯.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668년 고구려 옛 영역에 당나라가 설치한 기관.
당나라는 영토확장후 변경지역에 도호부를 설치
이민족 지배를 관장하는 기관을 6개 지역에 설치

안동(安東)·안북(安北)·선우(單于)·
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하고
안동도호로 설인귀를 임명하고 2만 군대를 파견.

또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 2만 8천 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
그러나, 평양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 세력 저항.

669년 당나라는 그 주둔군을 요동성으로 이전.
그후, 675년 매초성 전투, 이듬해 기벌포 해전
신라에게 대패후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이전.

677년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임명.
당나라로 이주시킨 고구려 유민을 요동으로 이주.
이때 연개소문 아들 남생도 안동도호부 관리로 파견.

이해에 안동도호부는 다시 신성(현재 푸순)으로 이전
요동지역 지배보다 보장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과 힘을 합쳐 반당운동을 전개.

보장왕은 다시 당나라로 소환되어 갔고,
이에 가담한 고구려인들도 함께 끌려갔다.

그뒤 698년 발해의 건국과 함께 안동도호부는 폐지,
699년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요동도독으로서 파견
고구려 유민을 통치했고 704~705년경 도호부가 복구

714년 평주(平州), 743년 요동으로 도호부 이전.
당시 도호부는 말갈국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고
점차 그 실권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가 차지한다.

도호부는 안사(安史)의 난을 거치면서
758년 경 당나라에서 완전히 폐지된다.
그 이유는 옛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

당나라는 옛 백제 영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
옛 고구려 영역인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
심지어, 통일신라 영역에 계림 도독부를 설치.

한반도 영역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던 당나라.

하여, 당은 평양에 도호부를 '안동도호부'라 명명.
당나라가 동방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이 담긴, '안동'.
하여, 신라는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뭉쳐 대응한다.

통일신라는 어제의 동지였던 당나라와 대립 관계.
어제의 적, 옛 구구려 옛 백제 발해 말갈족은 동지.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대립하는 한편, 화려한 외교술.

통일신라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발돋움.
통일신라 특유의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유지.
통일신라 때 지리산 일대 사찰들이 부흥한다.

즉, 통일신라 고승들은 문화 외교사절 역활.
당나라를 오가며 세계 각국 선진문명을 유입.
통일신라의 도읍 경주는 국제무역 도시가 된다.

'하여, 울산과 원산은 통일신라 국제무역항.'



...........
나당전쟁.
............


신라가 삼국통일후 당을 축출한 전쟁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후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문무왕 3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 칭

당은 신라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유민들을 배후에서 부추겨
당군에 대항하게 하고, 백제지역 주둔 당군을 공격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 군대 1만 명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
이후 신라는 백제지역 당군을 공격해 80여 성을 점령.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지역으로 가던 도중에 신라 수군에게 격파
671년 당군과 말갈군이 압록강 남쪽 깊이 침공.

다음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

674년초 당 고종(高宗)은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

675년 9월에 설인귀가 신라 풍훈을 향도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천성(泉城)에 쳐들어왔으나 실패.

그해 9월말 당은 20만 군을 매초성에 주둔
총력을 기울여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나
신라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크게 격파당했다.

신라군은 군마 3만마리와 3만점 무기를 노획
당군과 신라군은 그후 18차례 전투를 벌였고,
676년 11월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마지막 결전.

설인귀가 이끄는 수군과 신라의 수군과 격전
기벌포 해전은 신라 승리로 나당전쟁은 종말.

당나라는 그해 안동도호부을 요동으로,
웅진도독부을 건안성(개평)으로 옮기며
당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
실질적으로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경기도 연천 전곡에 위치한 매소성
한탄강과 전곡 평원을 내려다 보는
전략적 군사 요충지이자 교통 요지

전곡평원에서 한탄강을 도하하려던 20만 당군
그 도하을 저지할 수 있었던 신라군의 매소성.

당은 개국초부터 북방 돌궐에게 끊임없이 시달려
돌궐 기병을 막아 내기위해 당은 기병을 양성했다.
당태종은 말갈과 거란을 병합해 기병 정예부대에 편입

그 결과 당태종때 말의 수는 칠십만마리
매소성을 공격한 당군 20만 중 기병은 6만
그러나, 매소성의 신라 보병은 당군을 격파.

소수 보병이 다수 기병을 격파한 드문 사례.

신라는 매소성 전투 전에 치밀한 사전준비
매소성 축조에 공을 들였던 기록들이 있다.
나당 전쟁 기간 중 상당히 많은 성을 신축.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면전에 대비해
방어선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던 증거.
신라는 그당시 방어선 3개를 구축했다.

제 1 방어선은 임진강 한탄강변 저지선
제 2 방어선은 양주 포천 중심으로 성곽.
제 3 방어선은 한강 북쪽 북한산 아차산성

당군은 3 방어선을 돌파하려 치열한 공격.

한강까지 남하 하려면 150 성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당의 공격은 제 1 방어선에서부터 실패.
당군은 단 한차례도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기간중 신라는 대규모 군사 훈련
전시 효과를 노린 군대의 사열에 열중.
왕이 참석한 군사훈련 및 군사 퍼레이드

당군의 보급선은 서해와 임진강을 통하는 해로
신라 수군은 당군의 보급선을 격파해 보급 차단.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보급선이 끊긴 20만 당군

20만 당군은 서둘러서 신라 매소성을 공격.
신라군은 3만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전투를 경험
이미 수준급의 대기병 전술과 무기를 확보
당의 기병대에 맞설 훈련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의 사용한., 장창과 노.
노의 유효 사거리는 천보에 다달았다 한다.
예상 못한 엄청난 사거리와 정확한 관통력

당 기병들은 매소성에 접근조차 어려웠다.
매소성에 접근한 당 기병도 장창병에 의해
대열이 와해되었고 장창병 뒤에 대기한 궁수,
그뒤에 신라 보병들이 당기병을 포위 섬멸했다.

매소성 전투는 나당전쟁 승패를 갈라 놓았고
당군은 곧 신라 영역인 한반도에서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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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통일후 당과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은 친당 정책.

고구려 백제 멸망후 신라는 당나라와 영역 전쟁.
한편, 통일신라는 고구려 계승국 발해와 동맹체결.

함경도-강원도를 잇는 '신라도'라는 것을 만든다.
통일신라는 멸망할 때까지 발해와 동맹관계를 유지.
통일신라는 옛백제 옛고구려 말갈과 합쳐 당을 견제.

훗날 통일신라는 당과 밀월관계인 장보고를 제거.
동아시아 해상무역 왕국으로서 도약하려 했던 듯.
하여, 당나라는 일본과 손잡고 통일신라를 견제한듯

훗날, 고려는 발해와 통상관계로 밀월관계 유지.
발해가 패망하자 그 유민들은 고려로 대거 이주.
지리산 자락 마천 산청 함양에 발해 유민들이 정착.

고려는 고구려, 통일신라를 이어 동아시아 해상왕국.
세계에 '코리아'로 알려질만큼 고려는 해상 무역왕국.
한반도는 옛부터 동아시아 해상무역 왕국의 패권 주자.

실상사, 법화사에 지금도 전해오는 말.

"일본의 기운이 강해지면 신라가 쇠퇴하고
통일신라의 기운이 강해지면 일본이 쇠퇴."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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