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75 ( 화랑도정신. 마의태자. 청나라. 태극권. )

donkyhote 2010. 11. 12. 03:28

 


화랑도 정신.




서울 불암산(佛巖山) 자락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에서 보면, 불암산은 좌청룡
풍수지리상 북악산은 용의 머리이고,인왕산은 우백호

북한산이 용의 몸통이면, 북악산은 용의 머리.
인왕산은 이조 시대까지 호랑이가 출몰하던 곳.
불암산은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경계

서쪽으로는 북한산이 마주보이고,
북서쪽과 북쪽에는 도봉산 수락산

'모자를 쓴 부처의 형상'이라 불암산.
필암산(筆巖山) 또는 천보산(天寶山)
거대한 암벽과 울창한 수림이 멋진 곳.

남쪽 사면에는 불암산 폭포가 일대 장관
824년(헌덕왕 16) 지증대사가 세운 불암사
부속암자 석천암 학도암이 있는 신성한 사찰.

불암산은 '돌아가신 왕을 지키는 산'이라 하여
태릉 강릉 동구릉 광릉 등 주변에는., 많은 왕릉
불암산 정상에는 옛 성터 봉화대 터가 남아 있다.

남쪽 산록에 육군사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삼육대학교 태릉선수촌 태릉푸른동산이 있다.
육군사관학교의 기본적 이념은., '화랑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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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사도 정신
660년 백제정벌군 장수 김유신과 아우 흠순과 품일

황산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한다.

672년(문무왕 12) 김유신은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에서 당군과 싸워 패전 끝에 돌아오자
아들 원술을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 뒤 감히 아버지 김유신을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조차 만날 수 없었다.

화랑도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와 춤
명승지 순례와 놀이 성격이 강한 점이 특징.
놀이의 사상은 직(直)과 예(禮)의 균형 강조.

화랑도의 인격형성 및 세계관 형성은 놀이에 내포
화랑도는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다.

화랑 집단 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졌고
화랑은 미륵신앙에 결합된 신자 집단으로 보고 있다.
600년 전후는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신앙의 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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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노고단과 세석평전은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지리산은 신라시대 화랑도 정신의 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화랑은 통일신라시대 청소년 수련 단체의 중심 인물을 일컫는다.
국선(國仙) 선랑(仙郞) 풍월주(風月主) 화판(花判)이라고도 했다.
단체정신이 강했고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삼국지> <후한서>에 의하면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의 청소년 단체.
그들 고유의 집회장소가 있었고 견디기 힘든 행사를 즐겁게 받았었다.

신라는 4세기 중엽에 국가체제를 정비, 6세기 우경(牛耕)의 보급에 따라
경작능력에 차이가 생겨 촌락 공동체 균형이 파괴되고 군현제의 실시로,
청소년 조직이 쇠퇴하자 중앙정부가 인재양성을 위해 만든 원화 제도였다.

화랑도는 진흥왕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가 위기에 필요한 인재 양성이 목적이었다.

화랑도는 교육기관 성격을 가진 제도였으나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다.
종전 청소년조직 전통과 중국 제도를 도입한 반관 반민 성격의 조직체.

기록에 의하면 신라 화랑은 전 역사를 통해 모두 200 여명 정도.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다수의 낭도.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에는 1000 명 정도의 규모.
화랑은 진골귀족 추대로 뽑은 용모단정하고 사교성 풍부한 낭도.

승려는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
낭도들은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

즉,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귀족단체가 아닌 자발적인 단체 조직.
구성원들은 경주 남산이나 금강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고 단체수양을 통해 기질과 기풍을 길렀다.

즉,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대의를 존중.
의에 어긋나는 일은 죽음으로 항거, 국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함을 찬양.
오직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게 패하면 자결.
포로됨을 수치로 아는 등등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상을 고취하였다.

화랑도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무사도 정신.
660년 김유신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 사기를 높인 화랑

' 화랑 관창과 ·반굴의 용맹성.'

672년 김유신의 아들인 화랑 원술(元述)이
석문전투에서 당 군사와 싸움에서 보여준 용맹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화랑의 지도이념.

<충 효·신 용·인> 5계 中 특히 소중히 여긴 덕목은 충과 신.
화랑도는 진흥왕 때부터 삼국통일시대까지 활기를 띠었다.

김유신·김흠춘·죽지·사다함·관창·원술·비령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를 화랑에서 배출.

화랑도는 국가적 위기때 군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다.
수련 기간이 끝난 이후에는 정규 부대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와 춤 그리고 인격 형성
세계관을 형성하는 놀이의 자유스러움과 호방함을 보여주는 기백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포괄해 이룬 풍류도가 화랑의 정신세계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통일후 군사목표를 상실한 놀이문화로 변질.
신라 말기에는 귀족들의 사적인 병력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바뀐다.
그러나, 화랑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으로 계승되어 온다.


'아!... 장하다. 신라의 화랑정신이여~~ 그 높은 기상이여~~'


바이칼 호수 서쪽으로부터 말을 타고 도래했던.... 단군 환웅.
서요하 상류 백악산 아사달 신시에 살기 좋은 배달국을 건국했듯.
신라의 화랑도 정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영토를 향해 달리려 했다.

결국, 통일 신라시대 화랑도 정신의 출발점은 지리산 <노고단>.
지리산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일본) 5 나라의 격전 경계선.
결국, 지리산은 한겨례 5 나라 조상의 얼이 담긴 백두대간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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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原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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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서 청소년 단체를 이끄는 대표 여성이 원화.
4세기 연맹왕국에서 6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한 신라.
그당시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한 것이 원화제도.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한 것.

신라는 그 청소년 단체 단장으로 어여쁜 여성 2명을 선출.
이때 원화로 뽑힌 두 여성 단장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그녀들은 300명 여에 달하는 무리(화랑)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
결국, 이 단체는 해산되었고, 원화제도는 실패

신라 조정은 인재양성·및 확보가 절실한 상황.
특히 6세기 전반 신라는 활발한 영토 확장 전쟁
따라서, 당시 진흥왕은 대규모 군대 편성이 필요.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 화랑도를 제정
화랑도는 국가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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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花郞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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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는 법률상으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
그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 수용

화랑은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민간의 조직
화랑도 운동이 번성힌 시기는 진평왕(579~632 재위)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이 단체를 통솔할 화주(花主)를 제정

화랑 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 낭도로 구성
낭도 수효는 일정치 않지만 많으면 수백명.

화랑은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선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
신라시대 화랑은 모두 합쳐 200 여 명이나 되었다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으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
이처럼 화랑은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

화랑 구성원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른 자발적 단체.
즉, 혈연주의를 초월한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결사체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 동안 수련의무의 이행기간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 ~ 18세

화랑집단 구성원들은 경주의 남산, 금강산, 지리산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고취.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6세기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5계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간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

노래가 정신교육과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데 이바지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춤과 노래의 비중은 거의 절대적
화랑 운동이 일어난 진평왕 때 신라사회에는 불교 전성기

화랑 집단도 불교 영향을 받아,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
당시 화랑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들이 인식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용화향도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

당시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이상 국가가 건설을 염원.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따라서,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단체.
그위에 조국수호 및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

일정한 기간(약 3년) 동안 함께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 간 함께 죽고 살기를 맹세할 결속력이 강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의 화신.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

국가가 위급하면 군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 국가의 정규부대 편입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은 화랑.

신라 신분제도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다.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군사적 과업이 달성되자 화랑 존재의 의미도 약화
삼국통일 후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기강이 해이.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단체로 변질.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
신라 말 최치원이 주장한 화랑도 정신은 유교 불교 도교

'3교 융합에서 나온 풍류 = 삼국통일후 화랑도 정신.'

신라는 9세기에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세력이 위세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 또는 사병 성격
이처럼 신라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간 화랑도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화랑도 도풍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

민간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증거이다.

그러나,이조시대에 들어와서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 기능 만이 남았다.
하여, 화랑 = 남자무당, 창우(倡優), 유녀(遊女),무동(巫童)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 화랑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 남자무당으로 생각
이처럼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 것으로 잘못 판단

'오늘날, 육군사관학교는 신라의 화랑제도를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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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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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가체제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지만
삼국통일의 원동력은 호국불교와 화랑 제도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록이 거의 없었다는 것.

1989년에 조선 후기 필사본.,〈화랑세기〉발견.
이 책은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
분량은 총 7,406자,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근친혼(近親婚) 동성애 다부제(多夫制) 등등.

저자 김대문은 4세 풍월주 이화랑의 후손.
이화랑의 큰아들은 원광법사(圓光法師).
둘째 아들인 보리(菩利)는 12세 풍월주.

<풍월주>란 화랑집단을 이끄는 총 지도자
김대문은 보리의 아들 예원(禮元)의 손자,
예원의 동생 보룡(寶龍)은 문무왕의 모친.

화랑세기 구성은 서문에서 화랑의 기원을 설명
1세 풍월주(風月主:화랑)인 위화랑(魏花郞)부터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까지 행적을 기록.

그러나 김유신 부분은 중간 이하가 탈락
김유신에 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서문에 따르면 화랑은 선도(仙道) 조직으로
고대 신궁(神宮) 제사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집행자는 처음에 여성이었으나
남성으로 바뀌며 화랑이 되었고,
나중에 낭도를 거느리고 서로 연마

낭도 편제를 군사 조직으로 만든 이는 문노.

사다함의 검술스승이며 진평왕 때 8세 화랑
모친은 가야의 공주라 초기에 배척 받았으나
사다함과 연합, 거칠부 딸과 결혼해 세력 형성

그는 골품에 관계없이 인물을 발탁했고
고운 낭도들을 동원해 군사들을 위로했다
화랑은 정치군사적 행적보다 가족관계에 중점

그러나 각파 간에 암투,
가야파 성장이 흥미롭다.

법흥왕에서 무열왕에 이르는 시기는
삼국 대립, 신라 국가체제 정비 시기.

이로 인한 관습의 변동, 왕실의 계층분화
모권의 역할변동, 사회 계층간의 대립 시기.

등장인물은 총 138명에 달하는데,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골품에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大元神統)
대원신통 층이 진골정통보다 격이 낮았다.

삼국사기 神文王 원년(681년) 8월 8일 條를 보면
蘇判(제3위관등) 欽突, 파진판(제4위관 등) 興元,
대아찬(제5위관등) 眞攻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김흠돌은 가야계 김유신 사위이며, 신문왕 장인.
이 사건 여파로 흠돌의 딸 왕비 金씨를 폐위하고,
병무령(국방부 장관) 軍官은 자결, 화랑제도 폐지

주모자 흠돌은 27세 풍월주로서
김유신의 딸인 眞光의 남편이다.

반란집단은 김유신계의 화랑인맥이다.
화랑세기 김흠돌은 간악한 인물로 묘사

문무왕 말년 김유신의 사위인 김흠돌은
김유신의 위세를 업고 화랑 행정을 장악.
文明황후가 죽자 진골정통파로부터 견제

그런데 김유신은 673년, 그의 동생은 680년 사망
가야파에겐 기댈 언덕이 없어지자 가야파가 몰락
삼국통일전쟁에서 나름대로의 무공을 세운 인물들

흠돌의 숙청은 통일신라 왕권 확립의 희생물
삼국통일후 쓸모가 없어진 무관들을 제거한것
가야파 화랑 인맥은 정통 진골세력에게 큰 위협

그후 부활된 화랑제도
武士와 거리가 먼 得道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이었지만
실책은 사후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점
그는 가야파가 신라진골과 융화되길 바란듯.

그의 아들 원술은 김유신의 기대에 부응 못해
자연히 사위 흠돌에게 가야계 힘이 집결된 것.

흠돌은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했을 때
자신의 딸을 왕비로서 삼을 만큼 위세가 등등

가야파의 제거와 화랑제도의 폐지로 인해
통일신라 왕권 수립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신라의 군사력 약화과 정신력 해이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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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 연구(硏究)

일제시대 南堂 朴昌和(1889-1962)에 의해 筆寫
왕실 모계혈통 제도는 여러 의문을 해명하게 될듯.

특히 두 갈래의 모계혈통이 신라지배층을 二元化
특히 三姓交立 등 姓氏問題, 部體制, 骨品制, 近親婚,
葛文王, 女王登極 등이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체제

신라의 모계문제는 단순한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하나의 체제, 즉 二部體制

1. 신라인이 혈통을 계승하는 주체는 母系.
2. 母系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3. 두 母系集團 "二部體制"가 왕실체제

4.大元神統은 6세기 金石文 喙部 훗날 朴氏姓.
5. 眞骨正統은 沙喙部이며 姓氏 사용기에는 金氏.
6.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母系로 전해진 金氏, 朴氏

7. 두 母系集團 최상층부가 交代로 王과 葛文王을 계승.
8. 葛文王은 왕을 배출하지 않은 모계집단에서 맡게된다.
9. 두 母系集團 중 수뇌 宗(여인)이 왕과 갈문왕을 낳는다.

10. 宗은 聖骨身分이 배출, 眞骨身分도 모계로 전승.
11. 中古期 末의 두 여왕도 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12. 모계체제는 김유신이 진골에 편입될 계기를 만든다.

13. 兩大 모계집단의 결합은 원시사회의 한 형태
즉, 모계(母系) 반족사회(半族社會)에 뿌리를 둔다.




마의태자.



천년 신라의 자존심,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
'마의태자'는 ‘삼베옷을 입은 태자’란 뜻.

'충북 단양군에 마의태자 얼이 담긴 국망봉.'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주자
백성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명산대찰을 찾아 헤멨다는데,
엄동설한에 배옷 한벌만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랜 마의태자.

개골산(설악산)으로 가던중 국망봉에 올라
멀리 옛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흘렸다 하여 국망봉이라 한다.

죄없는 백성을 전쟁으로 괴롭힐 수 없다 하며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나자
마의태자는 신라의 운명은 끝났다고 통곡을 하고
초식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왔던 마의태자.

마의태자는 고려가 내리는 편안한 생활을 거부.
금강산에 살다가 자결한 것으로도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금강산 아닌 설악산에 갔다는 설.

신라 후계자인 마의태자가 내심 껄끄러웠던 왕건.
마의태자가 산속으로 사라지자 마음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신라를 재건하려 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강원도 인제는 속초 쪽으로 가다 한계령을 넘기 직전.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있었다한다.
서울에서 46번 국도변 인제 어구에 '마의태자 유적비’

원래 김부동 지명은 김보왕촌 김보왕동 김보리 김부리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와서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려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 양병

'김부리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김부리와 갑둔리의 현재 지명은 ‘하늘 아래 첫 동네’
군부대 사격연습장으로 사용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지금 김부리 텅빈 초등학교 건물 옆에 대왕각.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는 곳.
천년 동안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신 곳.

마의태자 설악산 유적지를 밝힌 실학자 이규경(1788∼?)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증언했다.
이규경은 이곳을 답사못한 탓에, 김부를 경순왕으로 이해

'이 탑은 마의태자 시후에 그 후손이 세운 것인듯'

김부리에는 마의태자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 등.

맹개골은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는 뜻.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
김부리가 고려에 항거하는 기지였음을 뒷받침한다.

김부리 옆 갑둔리는 갑옷 갑(甲)자에 진 칠 둔(屯),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의 마을지명.
골짜기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

이렇게 위험한 지명을 붙여 불렀던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다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
더욱 괴이한 다물리 지명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뜻하거나 그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
마의태자 부하 맹장군이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 저장한 곳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경내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과 이 마을 거쳐 인제로 떠난 곳.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인 대왕각의 동제
제상에 마의태자가 좋아했던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제례 때는 왕에게 절하는듯 네번 절을 올린다고 한다.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간 몰래 지냈다.
고려 왕조 입장에서는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쓴듯.

고려의 탄압 또는 일족 몰살이 두려웠던 탓일까?

신라 멸망 200년후 영남지방에서의 신라 유민들 항려운동
고려왕조는 위기를 맞기도 했고 그후에도 늘 불안했던 듯.

신라는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나라.
화랑이 아무런 저항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할리는 만무.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무조건 항복에 반대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는 해인사 스님이 되었단다.
이 삼국유사 기록은 마의태자만 반대한 것이 아닌 듯.

신라 왕손 박(朴) 석(昔)김(金) 세 성씨 족보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두명의 왕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갔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두 사람이었다는 기록이다.

일제 때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의 기록.
경순왕의 첫째 부인 석씨가 북한에서 간행된 족보에 기록
마의태자 후손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마의태자의 마지막 거점은 한계산성.'

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 지지세력 일행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의태자 조부 효종랑은 1000명 화랑 우두머리였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도읍 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
그 이유는 경순왕이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

마의태자는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

왕건에게 항복하러 가는 경순왕 행렬은 30 여 리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곳 한계산성 안에는 병사 500명이 들어설 수 있던 곳.
넓이 600여 평의 대궐 터와 절터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외성이고 훨씬 더 올라가면 내성이 있는데,
그곳에 대궐 터가 있었다는 험한 지형안에 천제단
한계산성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삼신단 비명에 새겨진 글씨의 이름들.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

의선운장이란 의병장, 김성진과 김세진은 신라 장군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 김씨인 듯 하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후

이 산성은 신라 멸망후 37년간 신라 유민들이 장악
강원도 인제는 마의태자가 광복운동을 했다는 고장.
인제 땅은 본래 신라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였다.

그래서 고구려 말로 구토(舊土)회복이란 단어인 다물(多勿)
한계산성은 맥국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산성이었다고도 하니
일찍부터 인제 땅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산성은 난공불락의 산성.
마의태자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개골산과 금강산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

고려시대 금강산 유배지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곳

그러다 이조시대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불교색채 이름인 금강산은 개골산이나 풍악산 등으로 개명.
첫째 금강, 둘째 개골, 셋째 열반, 넷째 풍악, 다섯째 지달.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풍악이지만 불교에서는 금강산

삼국시대에는 상악산,
고려시대에는 금강산
이조시대에는 풍악산


금강산 태자 유적지로서 태자성, 망군대, 장군봉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

'또 다른 마의태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
훗날 금 태조가 공격해 되찾은 중국 속에 있는 신라 도읍.

마의태자 후손은 여진 영흥에서 이성계와 힘을 합쳐 고려를 전복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이성계가 태어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이다.
마의태자 후손은 원시사회 여진에 문명을 전파하고 금나라를 건국.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고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 동쪽은 생여진.

요나라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신라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를 맞이하여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의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자로 왕이란 뜻으로 풀이가 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란 사실은 고려 때부터 전해온 이야기
이조시대 실학자 이수광이 ‘지봉유설’저서에서의 주장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져온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우리나라 역사로 편입이 마땅.'

이제 여기에 와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

몽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킨 나라는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 여진족의 나라였고 마의태자 후손이 세운 나라.

금태조 아쿠타는 신라왕손 김함보 후손이란 금나라 역사기록.
후금을 세운 누루하찌는 금국 태조 아쿠타의 후손이자 신라계
마의태자 후손이 함흥평야를 거처 압록강변 여진족의 우두머리

바로 김함보이며 후손 아쿠타가 금국을 세운 것이라는 기록.
지금은 거의 한족에 동화되었고 약 160만명 정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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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에 관한 역사는 다시 써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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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청국장은 이조시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전투식량.
전쟁 때 단시일 내 만들 수 있게 만든 전국장(戰國醬)
청나라에서 들어와 유래된 것이라 하여 청국장(淸國醬)

징기스칸 몽골군이 질풍노도 같이 아시아 유럽을 정복.
그 기동력 비결은 양고기 쇠고기 육포로 식사를 해결
병사들이 말 안장 밑에 3개월 전투 식량을 비축한 때문.

이조시대 군사 편제는 전투원 100명에 보급병사 30명.
솥단지 쌀 장작 된장 간장 등을 전쟁터마다 운반했다.
불필요한 병력 낭비와 기동력에 큰 지장이 있었을 듯.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미군의 C-레이션처럼 발효된 콩을 각자 전대에 차고 다니며
끼니 대용으로 꺼내먹어 기동력을 높였다는 전투식량 수시장.

수시장은 콩을 볶아 삶은 다음 띄워 온돌에서 말린 뒤
물에 섞어 삶아먹거나, 채소와 함께 끓여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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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실록 세조편>.............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문

"수나라 당나라는 우리를 신하로 삼지 못하였고,
요(遼)나라는 우리를 이웃 국가 예의로 대했고,
금(金)나라는 우리를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고,

송(宋)나라는 우리를 손님의 예절로 대했고,
원(元)나라는 혼인으로 우리와 통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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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금나라를 이은 후금...........
청나라 황제는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 후손.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비밀.
'애신각라'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뜻.

고조선 영역은 상당 부분 고구려 영토와 비슷하다.
고구려 역사가 중국 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 역사.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과 고구려를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 한강 이남.
따라서, 백제 역사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외된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
온조는 백제의 시조가 아니라 중국인이 되기 때문.
청나라 전신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 성은 '애신각라'.

'금나라의 금(金)은 신라왕실 성씨인 김(金)'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쓴 편지.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내용.
그당시 이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도움을 거절했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에도 "우리 시조는 신라인"'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이어 '후금' 국호.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 시조 함보가 60세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내용.

..........마의태자 후손 부안 김씨 족보.........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
마의태자 김일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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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부터 청나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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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殷)왕조(BC1600~BC 1046)는 중국 최초의 국가.
은나라 전 하나라는 유적이 없어 공인받지 못한다.
은나라는 주나라에게 멸망전까지 동남아와 무역 교류.

은나라 주왕은 백성 위에 군림해 혹독한 전제정치
달기와의 애정 행각으로 주지육림 고사숙어를 유래.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무너트리고 주왕조를 창건.
주 왕조는 BC 1122~BC 256년까지 존재한 고대 왕조.
제례의식 과 예의를 중시하는 요순시대를 열어 치세.

주 왕조는 원래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

BC 722 춘추시대, BC 5세기 하극상 시대,
BC 403 전국시대, BC 256년 진나라 시대.
BC 8세기~ BC 3세기 제후 난립의 혼란기.

BC 453 또는 BC 403 춘추 전국시대로 구분.

BC 221~BC 207 진(秦)은 주(周) 왕실 제후국 중 하나
중국 역사 상 최초로 중국통일 제국을 이룬 나라이다.

BC 206년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후에 장양, 한신 도움으로 항우를 꺽고 천하통일
BC 202년 유방은 한나라 황제에 등극후 장안에 도읍.

조조 아들 조비는 한 왕조를 꺾고 위 왕조를 창건.
그후 위 실력자 사마의 손자 사마염이 진나라 창건.

양자강 이남에 동진이 들어선 사이
양자강 이북은 북방 5호 족이 점령.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징기스칸)
명나라 금나라 후금 청나라로 이어진다.

청(淸)왕조는 만주인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인은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여진족.
그 일부가 금나라를 세운후 농경 생활

명조 말기 금나라는 명나라 통치를 받고 있었다.
여진족이 사냥기술을 전투에 이용했던 팔기제도.
여진족 1명을 1천명 중국병사가 못당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출병으로 명나라가 쇠약해지자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누르하치(청 태조)는 청나라 기반을 닦은 후
2대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후금을 넘겨주었다.
그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 황제 제위에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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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국가들을 침공해 영토를 확장하고
군사 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 때
팔기군이 명나라의 도읍이었던 베이징을 점령
베이징을 수도로 삼고 만주족이 일으킨 청나라.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가 즉위한 초기까지
1683년 청나라 걸림돌 오삼계(吳三桂) 진압.
대만도 청나라 영토로 편입해 조공국을 삼았다.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청나라.

그러나 백련(白蓮, 1796년-1804년),·
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국력이 쇠퇴하게 된다.

영국은 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개방을 권유했으나 청은 쇄국정책.

오직 청의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마침내 삼각무역(아편무역)을 거쳐
1840년-1842년 아편 전쟁이 벌어진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넘어가고
샹하이 등 5개 항구 개항으로 서구 열강이 쇄도
청나라는 중국역사 상 유례 없을만큼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일으켰던 태평천국 운동.

외형상 그리스도교를 표방했으나
내용은 만주족으로부터 한족의 독립,
토지 균분, 만민평등을 주장한 농민혁명.

그러나, 1860년대 청나라 조정과 서구 열강의 협공
1864년 천경 함락 후 홍수전도 자살해 막을 내렸다.
청나라의 선택은 서양문물의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

1860년대 이후 전개된 양무(洋務)운동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군함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
그러나 정부 관리의 감독을 받았기에 발전에 한계

1894년-1895년 청일전쟁이 청나라 패배로 끝나
양무운동은 실패하고 중국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여 무술(戊戌)개혁
입헌군주제는 서태후 이홍장의 반격으로 실패한다.

1899년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 연합군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北淸)사변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거쳐
1904년-1905년 러일 전쟁은 중국에 커다란 충격.

자신들이 한때 '왜적'이라고 깔보았던
일본이 세계최강 러시아를 물리쳤기 때문.

이제 청나라 선택은 근본적 개혁 뿐.
서태후는 유학생들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 헌법과 의회 제도를 도입했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
최신식 군대도 만드는 도중 각지에서의 혁명세력.
한족 공화국을 지향하는 민중 혁명세력이 일어났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취임하며 영토를 계승.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성-부-주-현-청 (省 府 州 縣 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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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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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1644-1512)에 들어서면서부터 발전한 권법.
기존 권법을 연구해 고도의 기술로 발전시켜 수행
타 문파 권법을 자기 문파 권법에 가미한 신 권법.

두 세 문파 고수가 서로 교제해 새 권법을 창출.

하남성 진가구(陳家溝) 진씨들의 태극권(太極拳)
또 하북성 창현 팔극권(八極拳)은 강한 발경(發勁)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 팔괘장(八卦掌)

권법은, 외형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형의권(形意拳)이나,
북방 열 여덟 문파 기술을 편집, 정리하여 집대성한 당랑권
권법을 기술 특징으로 분류한다면 장권(長拳)과 단타(短打)

장권은 동작이 크고 활발해 원거리 공격법
단타는 손발 팔꿈치 무릎 머리로서 접근전

청나라 이전까지는 내공을 연구한 흔적이 없는 편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내공 위력에도 치중하여 연구
청나라 무술이 고도로 발달한 계기는 태극권의 영향.

청나라 말기에 일어났던 중국 북방 의화단(義和團)사건
어떠한 무력이나 무술의 연습, 권법의 연습을 금지시켰다.
의화단 사건에 의화권(義和拳)은 독특한 권법을 사용한 탓.

청나라 말기에 무술을 금지시키기는 했으나
정치가의 경호인과 대상(隊商) 호위무사들은
타 문파와 교류로 권법과 무술을 발전시킨다.

청나라 말기에는 교통이 발달해,
각지 무술가 사이에 교류가 빈번
권법 무술의 명인과 달인들도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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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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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초기 여진족은 길림, 흑룡강, 요령 일대에 거주
명은 명목상 관직, 하사품, 교역 특전을 주어 회유했다.

이러한 기미정책(기미정책)은 여진족을 직접 통치보다는
조공과 교역을 통해 중국문화에 동화하도록 한 통치방식
그러나, 명나라 의도와 달리 오히려 위협적 요인이 된다.

여진족은 명나라에 복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조를 파악하고 도전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누르하치(애신각라 노이합적)는 명조에 신하로 가장

명나라에 조공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여진족 내부를 결속시켜 조직화 한다.
하여, 그의 권력을 더욱 다지기 시작.

명 조정은 그의 세력확장을 경계하지 않게 된다.
그는 1599년 몽고문자를 차용한 만주문자를 제정
만주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 의식을 함양

1616년 정월 초하루(양 2월17일)에 국호를 ‘금’
연호를 ‘천명’이라 하고 칸(한) 지위에 올랐다.
국호 금은 여진족이 건립한 금왕조를 계승한다는 뜻.

명나라 조정에 대한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후금 세력에 놀란 명은 1619년 대군을 파견
명은 후금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만다.

1626년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아들 태종이 즉위.
1636년 홍타이치는 청나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동시에 여진족이라는 명칭도 만주(만주)로 고쳤다.

'결국, 신라 후예인 청나라는 중국을 천하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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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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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842년 아편을 둘러싼 청나라와 영국간 전쟁.
청나라는 쇄국정책을 시행해 무역은 광저우에 국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를 통해서만 인허가.

18세기 후반 영국이 청나라 광저우 무역의 중심.

중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비단·차·도자기 등
영국은 모직물과 향료 정도가 수출품목의 전부.
비단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 대량의 은(銀)을 제공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에 대한 수입관세를 인하
영국민의 홍차 마시는 풍습때문에 중국차 수입 급증
1832년까지 중국무역 독점권을 갖었던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산(産)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
홍차의 수입 구매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
특히, 아편은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

1830년대 중국의 은값이 뛰어오르기 시작
은화의 등귀는 중국 재정에 파괴적인 영향
특히 중국 군인과 관리들 아편 중독이 격증

전제왕조(專制王朝)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중국은 아편 금지령을 시행하고 밀수를 근절.
강경수단으로 영국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몰수

영국의 아편 전매수입은 인도 재정 안정에 큰 비중
아편무역이 영국의 인도 지배에 빼놓을 수 없는 지위
중국 은은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의 결제 수단

1825년 공황 후 절실히 요구된 중국시장의 개방
아편 문제로 청나라와 영국의 갈등은 1840년 여름
함선 48척과 병력 4000명 영국 함대가 중국을 위협.

화평을 위한 협상에 쌍방은 불만을 보여 전쟁이 재개.
다음해 증원부대 1만명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자강 침입
청나라 군은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아편전쟁 중 영국군 사상자(死傷者)가 520 명
청나라 정규군 사상자는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청조는 영국의 요구를 수락하고 난징 조약을 체결

그러나, 영국군 만행에 격분한 농민수만 명이 봉기.
영국군을 포위 자발적으로 영국군 침략의 반발 투쟁
난징조약과 추가조약 등으로 중국은 사법상 주권 제한

프랑스·미국도 영국을 따라 1844년 불평등조약 체결.
중국을 세계 시장에 강제적으로 끌어들여 반 식민지화.
중국은 전쟁후 막대한 배상금 지불, 아편 거래로 은 유출,

국내 산업을 압박해오는 외국 공업제품의 보급
행정기관의 퇴폐로 봉건사회의 뿌리가 흔들린다.

1842년 8월 아편전쟁 종결을 위해 난징조약.
영국과 청(淸)나라가 전후 체결한 강화조약.

....난진조약 주요 내용.....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5항 개항
3.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
⑤ 행상,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영국은 이 조약을 더욱 구체화하여
1843년 7월, 5항 통상장정(通商章程),
10월에 호문채(虎門寨) 추가조약을 체결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개항장에 조계(租界)설치 최혜국 대우 특권 획득

1844년 미국이 청나라와 망하(望廈)조약을 체결
프랑스도 청나라와 조약으로 영국과 같은 특권 획득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에게 중국 침략에 길을 연 결과

중국은 유럽 및 일본 등 자본주의의 종속적인 시장
중국은 반식민지(半植民地) 반봉건사회 체제로 변화.
이조 역시 서양 열강과 연대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




태극권.



중국 고유의 독특한 공격 방어 권법이라고 한다.
태극권은 굳은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된 권법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양(陽)의 조화를 응용했다.

음 양은 수동적 소극적 성질과
능동적 적극적 성질을 나타낸다.

태극권은 물흐르듯 유연하고 율동적인 동작을 이용.
각 동작마다 발 자세와 몸 자세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르치는 사람마다 권법의 체계가 다르다.

공격·방어 권법으로서의 태극권은 쿵후와 비슷.

태극권은 비무장 또는 무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건강증진을 위한 맨손운동은 3세기경에 나타났고,
5세기 소림사 승려들이 5가지 동물을 흉내낸 권법

곰·새·사슴·원숭이·호랑이 동작으로 권법을 개발.
그후 뱀을 흉내낸 권법이 덧붙여졌고, 명대 초기(1368)에
음·양의 원리를 추가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 권법 등장.

태극권에는 많은 파가 있었지만, '우'와 '양' 2파 만 존속
규정된 자세 수는 24 ~ 108가지 또는 그 이상으로 다양하다

모든 태극권은 3가지 자세,

무게 중심을 앞으로 둔 자세,
무게 중심을 뒷발에 둔 자세,
말 타는 자세 또는 기운 자세.



덧 말.


'과연 태극권은 중국의 무술일까?'

태극권은 일당 백 신라 화랑의 무술인듯.
지리산 노고단 세석평전을 누비던 화랑들.
지리산 태극능선 곳곳을 누비며 심신 단련.

불교국가 신라 화랑의 무술이 청나라로 전수된듯.
마의태자를 따르던 화랑들이 청나라에 전파한 듯.
태극 무늬는 옛부터 우리나라를 뜻하는 고유 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