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72. ( 대왕암. 석굴암. 안압지. 미실. 화랑세기. )

donkyhote 2010. 11. 12. 03:25

 

대왕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위치.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

신라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는 곳.

문무왕은 아버지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 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

대왕암은 자연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간다.

수면 아래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 유골이 매장되었을 것이라 추측.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웠다.

감은사 법당 아래에 동해를 향한 배수로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

.....................?~681 문무왕........................
신라 제30대 왕(661~681 재위)으로 이름은 법민(法敏).
김춘추(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백제 저항군 진압,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672년 이후 당은 대군을 동원해 신라 침략을 개시했다
673년 문무왕은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고
백제 멸망 후에 폐지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켰다.

한편 신라인으로서 당과 내통한 자에 대한 과감한 처벌

674년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에 봉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며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
675년 설인귀의 당군은 문훈이 이끈 신라군에게 참패했다.

이어 이근행 20만 당군을 매초성(買肖城)에서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필과, 무기를 노획했다.
신라는 18회 전투에서 이겨 육로로 공격한 당군을 저지

676년 신라 해군은 설인귀 당군을 기벌포에서 대파.
4,000여 명을 죽임으로써 서해의 제해권도 장악했다.
당은 평양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지금의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이남을 차지했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에 대한 정책도 병행,

669년 고리대제한정책으로 이자를 탕감시키는 조치
평민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았고 전쟁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생산을 회복시켰다.

681년 7월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동해에 만든 문무왕릉이 대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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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재상 김대성 착공
혜공왕 10년(774) 완성한 당시 석불사라 불렀다.
경덕왕 재위기간(742∼765)은 불교예술의 전성기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신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의 백색 화강암을 이용한 석굴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 역사상, 천왕상 등
40구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었고
360여 개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입구 전실 좌우로 4구씩 팔부신장상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천왕상 조각

원형 주실 입구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
주실 벽면에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원숙한 조각 기법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사천왕상,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준다.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자비로운 본존불.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의 결합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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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본존불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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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한 본존불의 치수
인도 보드가야 대각사의 크기와 비례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본존상의 크기와 비례에 의해 건축된 토함산의 석굴암

석굴암과 대각사 본존불은 唐尺 치수로 같은 규격,
두상 높이와 두 무릅 사이가 1장 1척 5촌, 8척 8촌
토함산에 세워진 석굴암은 동동남으로 약 30도 방향

왜 정동(正東)이 아닌 30도 남쪽으로 이동하였을까 ?

석굴암은 동해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위치
문무대왕의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
신라에서는 왕릉 앞에 석불을 배치한 예를 따른 것.

즉, 대왕암과 석굴암을 호국불교 수호신으로 삼은 것.
왜(倭)의 침략에 대한 수호, 김씨 왕조의 안녕을 염원
석굴암의 정확한 방향은 동짓날에 해뜨는 방향과 일치.

중국과 우리나라는 동짓날이 한해의 끝이 아닌 시작
하여 동짓날 일출을 향해 예를 올려 그해 안녕을 기원
신라인들은 동짓날 일출로 동해의 독룡과 나찰을 제압

나라와 백성의 평안과 안전을 기원한., 석굴암 일출.




안압지.



경주는 찬란한 신라시대의 유적이 가득한 곳.
안압지는 신라 왕실의 성풍속을 알 수 있는 곳.
오늘날 개방된 가치관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곳
하여, 안압지에 관한 역사를 좀 더 깊숙히 알아보자.

......................경주의 안압지(雁鴨池)...........................
7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당시에 만들어진 연못.
1974년 11월 1,300여년 만에 연못 바닥을 청소하는 도중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와 다음 해 3월 발굴 작업.

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저술가인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8 명의 남자를 좌지우지했다는 미녀 '미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사다함, 세종, 설화랑, 미생랑, 풍월주.

3명은 왕이고, 5명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통일신라의 실권자들.
미실은 당당하게 자유로운 성과 사랑으로 일생을 살아간 여인.
그녀는 전쟁터로 떠나는 사다함을 위해 출정가를 지었던 문장가.

'신라시대의 性은 지금보다도 자유로웠던 것일까?'

안압지에서 출토된 17.5㎝ 남근 목기 조각품.
남녀 성 행위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된 토기.

'과연, 어떤 용도로 쓰인 물건일까?' 알아보자.

왕족이 연회를 즐기던 임해전이자 동궁전 앞 연못 속의 유물.
외설적으로 표현된 일상용구들은 왕실의 성 관념을 알려준다.
성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가장 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대상으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라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은 부인의 외도에 관대했던 남편.
미실은 신라의 8 남자를 좌지우지하며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경주의 안압지는 이조시대 경복궁의 경희루와 같은 궁중 정원.

그곳 포석정(鮑石亭) 터는 신라의 별궁(別宮) 자리.
신라 왕들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풍류의 산실.
지금은 전복 모양의 석조(石造) 구조물만 남아 있다.

'폭 35cm, 깊이는 평균 26cm, 전체 길이 10m.'

주변 경관에 인공미를 가미한 독특한 구조물.
원래는 남산계곡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바위
그곳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는 '포석정'.

신라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놀이하고 있을 때,
남산의 신이 춤을 추자 왕도 따라서 추었는데,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 신라춤은 여기서 유래.

927년 신라 경애왕이 연회를 즐기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혀
스스로 목숨 끊도록 강요받던 곳이 포석정.
신라 천년 역사에 치욕을 남긴 장소인 곳이다.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된 안압지는 현재 사라진 연못.
통일신라 당시 무산(巫山) 12 봉우리가 비쳐 보였다는 곳.
원래 화려한 임해전 앞에 통일 신라의 지도를 본 뜬 모양새.

1975년 3월부터 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 터의 발굴조사
석축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 연못 서쪽에 5개의 건물 터.
故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로 옛 모습을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는 곳.

즉, 현재는 옛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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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충격적인 것 아닐까?
신라시대 왕실의 풍습을 잘 알수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안압지의 남근 목기 조각품...................
남근 신앙의 기원은 다양한 여러 신을 섬겼던 선사시대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 가운데 커다란 남근
그 아래에 고래, 거북 등의 동물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

노출된 남근은 그당시 수렵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뜻을 상징하고 있다.
고구려에서 매년 10월 남근을 깎아 신좌에 올리고 제사

삼척 해신당(海神堂)에서는 마을사람들이 해신제를 지낸다.
자신의 실물 크기 남근을 깎아 억울한 처녀의 혼을 위로한다.
이 풍습은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안압지의 남근 목기는 궁궐의 여성이 사용한 유물로 보인다.
소나무 옹이를 이용한 음경 부위의 돌기 3개는 실용적인 용도.
성기 신앙의 용도라고 보기에는 어려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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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성 풍속도는 개방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신라 왕족의 근친결혼 또는 부인의 불륜에 관대했던 처용 설화
안압지에서 발견된 남근 목기는 혹시 미실 현녀의 유물 아닐까?


...............신라의 성풍속..........................
신라는 姓(성:sex)을 神國(신국)의 道(도)로 여긴듯.
신라시대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는 '화랑의 역사서'.
1989년 발췌본, 1995년 필사본이 발견된 신라역사 진서.

한단고기와 달리 화랑세기를 진서로 인정하는 학자들.

화랑세기에는 청랑가와 청조가 등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명 숫자 지명 관명 및 화랑관계 용어들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등에 나오며 잊혀진 신라 역사를 알려준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다소 의아한 성풍속 내용.'
오늘날 시각으로도 낯뜨거울 야한 내용이 많다.

진흥제 때 미실이 원화로 임명되자 이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참석한 낭도와 유화들이 집단 성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기록.

「이날 밤 진흥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 또한 가득.

밝은 등불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에 끓어 넘쳤다.

진흥제가 원화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했는데
낭도들이 각기 원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소리 진동.

진흥제는 매우 큰 기쁨을 느끼고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채색된 동전)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암컷과 수컷)이고
나와 너도 자웅이다"라고 말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숙모(사도황후)의 존귀함으로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진흥제가 병이 들었을 때
진흥제의 총애를 받던 미실은
자신의 숙모이자 진흥제의 부인인
사도황후를 위해 남편에게 시중들게 했다.

게다가 13세에 진평제가 즉위하자,
미실은 그와 성관계를 맺었다.

이는 미실이 음탕해서가 아니라
당시 신라 왕가의 전통적인 풍습.
일종의 성인식 또는 성교육 제도.

그런데 놀라운 건 미실과 성관계를 맺은 13세의 진평제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에게 신국의 도를 가르쳐 달라 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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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풍습인 마복자 제도...........
마복자는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화랑 우두머리가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갖는 잠자리
장차 태어날 아이와 일종의 양부 관계를 맺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왜 신라에는 마복자 풍습이 있었을까?

화랑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때문.
이처럼 『화랑세기』의 내용이 너무 선정적이고 비속해
후대 유학자들과 현대인 시각에는 신라의 성풍속이 변태.

'하지만 당시 신라 사회는 신라인 시각에서 봐야할듯.'

신라 23세 풍월주 양도의 어머니 양명고주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자매이다.
누이 보량과 혼인시키려 하자 처음에 반대

나중에 승낙하자 양명공주는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고 칭찬.
남매끼리의 결혼을 신국의 도라고 높이 평가했던 신라인들

신라에서는 성을 비속하고 저속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자, 동시에 하나의 道.
'신국의 도.' 그것은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키 워드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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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의 도.......................
신라인들은 신라를 신의 나라로 생각을 했다.
신성한 혈통을 잇고 보존하는 것 = 신국의 도
근친 간에 상간이나 혼인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 그 예.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 간 혼인을 시킨 것
왕실혈통을 지키고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는 방편.

진평왕 때 이르러 신라 왕실에 성골 남자가 없어지고
성골 여자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신라의 왕이 된 것
근친혼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고대사회에서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근친혼 제도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수단 중 하나.
'미실' 여인도 근친혼과 마복자 풍습을 대표하는 인물.

미실에 의해서 폐위 되어 왕위에서 물러난 진지왕
그 후손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잡고 정권을 잡은 후에
진덕여왕 뒤를 이어 신라 최초의 진골왕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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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
임신한 여성이 남편보다 높은 지위의 남성과 성관계
남편의 동의 아래 낳은 자식(마복자)에게는 두 아버지
마복자에게는 혈통상 부친과 정치적 부친, 즉 두 후원자

절세 미인 어머니 덕분에 비처왕의 마복자가 된 위화랑.
비처왕에게는 위화랑 외 마복칠성이라 불렸던 여러 마복자
비처왕은 수십명 중류사회 여인들과 성관계를 한듯 추정된다.

신라시대 절세 미인이자 최고의 자유부인이었던 미실

진흥왕의 태자 동륜과 관계후 그 부친 진흥왕 하고도 관계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죽는 사건에 연루되어 궁에서 쫒겨난다.
미실의 육덕을 잊지 못한 진흥왕은 해궁까지 그녀를 찾아간다.

진흥왕이 친히 해궁으로 거동해 서로 반가움에 흘린 눈물
진흥왕은 미실의 남편 세종공을 병부 우령으로 삼아 위로.
그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지 이미 여러 달인 시기.

미실은 해산후 입궁을 원했으나 진흥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궁에 들어가 옥종공을 낳아 진흥왕의 마복자로 삼았다.
이 후에 미실에 대한 진흥왕의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신라 지배층에서는 높은 지위의 인물이 부하의 아내와 관계
당시 신라인 시각에서 마복자는 상하 결속을 위한 제도적 장치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양부와 양자란 일종의 가족 관계를 맺은 것

이러한 마복자 제도는 왕궁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화랑의 하부조직 낭두들도 마복자가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이들이 거처하는 집인 선문(仙門)에 들어가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종을 자처하며 사랑을 받으려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상사의 사랑을 받다가 출산할 무렵 물러날 때
그 남편은 재물을 내놓고 예를 갖춰 아내를 맞이

이를 사함(謝函)이라 불렀고 아내가 자식을 낳으면
석달후 아내는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 관례
그 남편은 양이나 돼지를 바치는 관례 절차가 세함(洗函)

아내가 다시 사랑을 받다가 나올 때
그 남편이 또 재물로 아내를 맞이했다.
신라 이전 고대 스파르타에도 유사한 제도.

좋은 가문의 혈족이 될 아이를 낳는 관습.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닌 나라의 소유.

가장 좋은 부모로부터 좋은 아이의 출생을 원한 것
훌륭한 아이를 낳도록 아내를 빌려준 스파르타 풍습
강력한 군주국가만 명맥을 유지했던 고대 사회의 전통.

신라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차득공이라는 인물
지금의 전라도 광주 지역을 익명으로 여행하다가
안길(安吉)이란 관료 집으로 초대받고 그 아내와 동침

차득공은 훗날 높은 벼슬에 오른후
안길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된 인물.

신라에서는 색(色)은 곧 성(性).
색(色)이란 신라시대의 불교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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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용어................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차있는 것이 비어있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이 차있는 것이다.

색불이공이 색에서 벗어나는 비움의 길이라면,
공불이색은 공에서 벗어나는 나눔의 길이기 때문.
공에서 벗어남은 율법에서 벗어나 사랑의 길로 들어섬.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국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불교 용어가 많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 미망인은 불교용어.

찰라(눈깜짝할 새)도 불교 용어.
세계(世界)라는 말도 불교 용어.
과거, 현재, 미래도 불교 용어,

다비(茶毘)는 시체를 화장하는 불교 용어.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3백만 명이 모여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한 광경이 아수라장

阿 : 언덕 아
修 : 닦을 수
羅 : 비단 라
場 : 마당 장

'수라(修羅)'는 '추악하다'라는 뜻.
아수라는 육도 팔부중(八部衆)의 하나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는데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되었다고 한다.
증오심이 가득해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

그와의 싸움에서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간이 선행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행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하여 아수라의 힘이 강해진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칙하고 거대한 모습.

'피비린내나는 전쟁터' 아수라장은 여기에서 유래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

아비규환(阿鼻叫喚)은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뜻하는 말
계속되는 심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현상을 뜻하는 불교용어.
이심전심은 부처 생애 중 가섭존자와 관련된 대목에 나온 말
다반사(茶飯事)는 밥 먹듯 자주 일어나는 일을 뜻하는 불교용어.

단말마(斷末魔)는 인간이 죽을때 느끼는 최후의 고통.
밀어(密語)는 사랑하는 사이의 연인들이 사랑의 속삭임
원래 불교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교리를 전하는 불교용어.

탈락(脫落)은 빠지거나 떨어져 없어진다는 뜻.
세속(世俗)은 세상, 무사(無事)는 사고가 생기지 않음
면목(面目)은 낯, 원래 불교에서는 참사람의 참모습이란 뜻

투기(投機)란 사람들이 돈을 던져 기회를 잡는다,
마음을 열어 몸을 던져 부처님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
현관(玄關)은 건물의 입구. 불교에서는 우리의 입을 뜻함.

점심은 선종(禪宗)에서, 배고플 때 조금 먹는 음식.
마음에 점을 찍는 듯 가볍게 먹는다는 뜻의 불교용어
스님들이 소식(少食)을 하는데에서 비롯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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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아내를 귀한 손님에게 동침하게 한 풍습.
아내를 찾아온 손님에게 동침케 한 에스키모인 풍습.
신라인의 마복자 성풍습과 유사한 에스키모인 성풍습.

'신라인 혈통은 북방민족에서 유래된듯..'

신라는 패망 직전까지 당나라와 외교적으로 밀착관계.
그당시 중국 황실의 관습을 많이 도입한 듯 보여진다.
하여, 중국 황실의 현녀제도와 방중술에 관해 알아보자.

......................중국 황실의 현녀(玄女)........... .............
남성이 지켜야할 법도와 여성이 지켜야 할 아홉가지 규율.
지키지 않으면 남성은 악성종기가 생기고 여성은 월경불순
남녀 성을 잘 알고 건강하게 장수하게 하는 개인교사가 현녀.

남자 = 양, 여자 = 음, 허리 위 = 양, 배 = 음, 피부 = 양, 피하 = 음.
5장(간, 심장, 비(脾), 폐(肺), 신(腎) = 음, 6부 = 양, 3초 = 양 기운.
오랜 체험을 통해 일찍부터 관찰해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 현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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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녀(玄女)의 방중술...........................
청나라의 의학자 심금오(沈金熱)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자에게는 '삼지(三至)'가 있고 여자에게는 '오지(五至)'.
남자의 삼지란 간(흥분) 심장(피) 신장(정기)를 가르킨다.

남자의 삼지가 잘 갖추어지면
여자 마음이 몹시 즐거워진다.

오지는 홍조를 띠며 미간을 찌푸린다.
여자의 심장 기운이 활발한 때문이다.

눈동자가 젖으며 정답게 바라본다.
그것은 간의 기가 이르기 때문이다.

엎드리며 말수가 적어지고 코를 훌쩍인다.
여자의 그런 행위는 폐의 기가 활발한 증거.

상대방에게 매달리며 몸이 절로 움직인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비장의 기를 말함.

여자의 피부가 열리며 온몸이 젖는다.
신장의 기가 점점 고조로 이르는 때문.

약하고 낮은 소리를 낸다.
그것은 심장이 하는 일이다.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
그것은 간이 하는 일이다.

목이 말라 헐떡거린다.
그것은 폐가 하는 일이다.

두 다리를 구부리고 편다.
그것은 비장이 하는 일이다.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이 젖는다.
그것은 여자의 신장이 하는 일.

5 상태가 극에 이르면
아이를 점지받아도 좋다."

남녀간 성욕의 강도, 지속도, 성감은 차이가 있다.
남성은 충동적이고 여성은 충동이 완만하고 감상적

남자는 접촉에 의한 쾌감,
여성은 정서적으로 만족감

남녀의 생리적 차이를 알고
서로 보조를 맞추기는 예의.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쾌활하면
기와 혈의 유통, 오장육부의 조화,

경락의 순통, 음평양비(陰平陽秘)가 되어 사악한 기운을 예방.
금나라 명의 이동원 : 노(怒), 분(恣), 비(悲), 공(恐)은 원기손상
풍(風), 한(寒), 서(署), 습(濕), 조(燥), 화(火) 육음은 질병의 원인.

안압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 일부는 성교육 용도.
대부분의 유물은 당시 성풍속을 대변해 주는 듯.
.....................................................................




미실.




신라의 미실궁주는 후궁의 신분이었지만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40년 간
미색과 두뇌로 신라 정계를 좌지우지한 여걸.

색공을 통해 진흥대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 금륜태자 3부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대왕 등 부자 손자 3대

왕과 태자를 대물림으로 색정의 포로로 만들었으며,
사다함을 비롯, 세종, 설화랑, 미생랑 4명의 풍월주를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이도록 만들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따르면
'풍월주'란 화랑들의 우두머리.
당시 신라에서는 화랑 중 화랑

미실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유일한 남편이었던 세종전군

세종전군 사이에서 태어난 하종,
설화랑과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도
훗날 신라에서 풍월주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두 차례나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로서 그 자리를 대신해 화랑도를 거느렸다.
미실의 일생은 화랑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신라 왕족인 성골과 진골의 근친혼은 잘 알려진 사실
미실의 아버지는 법흥대왕의 삼엽공주와 아시공의 아들
어머니 묘도부인은 법흥대왕 후궁이며 제1세 풍월주 손녀.

그런 까닭에 아버지 미진부는 어머니 삼엽공주를 따라
매일 궁중에 들어가서 법흥대왕의 총신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미진부는 한창 나이인 16세였는데 벌써 홀아비였다.

법흥대왕과 백제 동성대왕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와 혼인을 했다가 남모가 죽는 바람에 홀아비

어느날 법흥대왕이 총신 박영실과 황궁 내정에서 공차기
영실의 부인 옥진궁주가 낮잠자다가 그 자리에 나타나더니
법흥왕대의 손을 잡아끌며 아래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폐하.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어서 함께 하소서!"

"무슨 꿈을 꾸었는데 느닷없이 하자는 것인고?"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꿈입니다."
"칠색은 여러 색깔이 한데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를 뜻하니 이는 딸을 낳을 조짐.
그러므로 짐이 아니라 네 지아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겠구나."

그렇게 해서 옥진궁주가 법흥대왕 대신
자기 남편과 정사를 벌여 낳은 딸이 묘도.

묘도가 남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지자
매일 궁에 들어왔던 미진부와 눈이 맞았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매일 사랑을 나누었다.

하루는 옥진이 칠색조가 자신의 가슴에서 날아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해 묘도의 침실로 다가가 엿보았더니
묘도와 미진부가 한창 사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방안으로 들어간 옥진이 말했다.
"너희는 장차 귀한 딸을 낳을 것이니라."
그렇게 해서 미실궁주가 태어났던 것이다.

법흥대왕이 재위 26년 만인 540년에 운명
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뒤였다.

미실이 자라면 자랄수록 미모가 점점 드러났다.
할머니 옥진과 어머니 묘도가 색공을 가르쳤다.
교태부리는 법, 방중술의 비법, 시문과 가무 등

황제에게 여색으로 봉사해야 하는 후궁이 갖춰야 할 절기.
온갖 비방과 절기를 전수받은 미실은 절정의 색공을 터득.


미실은 위로는 황제에서부터 아래로는 화랑에 이르기까지
평생 많은 남자를 울렸지만 정식 남편은 오직 세종전군 뿐.

세종은 진흥대왕 모후 지소태후와 중신 이사부 사이에서 출생.
지소태후는 법흥대왕의 누이동생으로 삼촌인 갈문왕 김입종에게
시집가 진흥대왕을 낳았는데, 남편이 죽자 오라비 법흥대왕 명으로
박영실을 계부로 맞았지만 지소태후가 정작 좋아한 사람은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소태후를 섬겨 1남 3녀를 두었지만
남편이 아니라 신하의 신분으로 태후를 섬겼기에
성골인 친자식들에게도 신하의 예로 대해야만 했다.

진흥대왕이 즉위한 540년 7월에 7세 소년
이후 약 10년 간은 지소태후의 섭정기였다.

미실은 처녀로 성장하자 세종전군과 결혼.
지소태후 명령에 따라 세종에게 시집갈 때
할머니 옥진이 미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내가 너에게 색공을 가르친 것은
장차 폐하를 모시게 하려는 것이었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참으로 일이 얄궂게도 되어 버렸구나!"

그러자 미실이 할머니를 위로했다.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궁에 들어가면
어찌 폐하를 모실 기회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옥진이 그 소리를 듣자 크게 기뻐하여
미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색공의 이치를 아는 것을 보니
내 근심은 전혀 쓸모 없는 것이었구나!"

입궁한 미실은 비방과 절기로 세종을 사로잡았다.
미실의 색공에 세종은 얼마 못가 정기가 고갈된다.
태후가 보니 아들이 지나친 색사로 인해 피골이 상접

'아! 참으로 놀라운 계집이로다!
나도 여러 사내를 녹여보았지만
저토록 대단한 음녀는 처음 보겠구나!
저러다가 내 아들 잡아먹는 것은 아닐까.'

태후는 미실을 며느리로 맞은 것을 후회.

"너로 하여금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이나 음식을 수발들게 하려는 것
그런데 색사로 전군의 심신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당장 궐에서 나가라!"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여
한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구슬피 울기만 하다가
며칠이 지난 뒤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부귀영화란 한때의 꿈과 같은 것.
내 이미 왕자와 전군을 모두 모셔보았으니
무슨 아쉬움이 더 있으랴!"

그리고 곱게 단장하고 서라벌 거리를 다녔다.
미실과 제5세 풍월주 사다함의 비련이 시작된 해
진흥왕 22년(561년)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서로 하루라도 못 보면 죽고 못사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맹세하고
진흥대왕의 허락까지 받자, 남편 세종이 상사병
세종이 미실을 찾자 지소태후도 미실을 불러들였다.

미실이 태후의 명에 따라 입궁하자
사다함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사다함
이사부를 따라 가야 정벌전에 출전.
미실의 행복을 위해서 출전을 자원

마지막 날 밤, 작별의 술잔을 나누며
미실이 사다함에게 받친 노래 <송출정가>.

-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소서! 다시 만나 안아보고자
아흐, 님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시려느뇨. -

한편, 미실이 입궁한다는 말을 들은 세종
너무나 기뻐 달려갔지만 미실은 쌀쌀맞기만
그리고 세종전군의 요구를 한사코 거부했다.

자기들 마음대로 나가라 들어오라 하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융명이 아직도 정실부인으로 있는데, 정작 첫째 부인이었던
자신은 첩의 신분으로 색공에 응하라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

몸이 달아오른 세종은 태후전으로 달려가 밤새 울며 통사정
그렇게 해서 미실은 다시 정실이 되고 융명은 차비가 되었다.
졸지에 첩으로 강등당한 융명은 기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융명은 궁에서 나가 살겠다고 했다.
미실은 세종에게 먼저 사랑의 맹세를 받은 후
융명을 궁궐에서 내쫓고 세종의 요구에 응했다.

사다함이 큰공을 세우고 서라벌로 개선했을 때
미실은 이미 날아간 한 마리의 파랑새와 같았다.
신분이 비슷하다면 힘으로라도 빼앗아 오겠지만
상대는 태자와 왕자 다음가는 태후의 아들 전군.

같은 김씨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사다함 자신은 주류에서 먼., 왕손
사다함은 애통한 심정을 노래로 표현.

-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느냐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려느냐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느냐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궁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는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천년 만년 오래오래 죽지 않게 하리. -


......................풍월주와 미실.........................
606년 (진평왕 28년) 가을 7월, 신라 제7대 풍월주
화랑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설화랑(薛花郞)의 죽음.
549년(진흥왕 10년) 태어나 58세에 운명한 설화랑.

당시, 설화랑의 사인(死因)은 무엇 이었을까?

"그 때 미실궁주(美室宮主)가 기이한 병(奇病)에 걸려
여러 달간 일어날 수 없어 설화랑이 밤낮으로 모시면서
미실의 병을 자기가 대신해 달라고 밤마다 기도를 하니
마침내 설화랑이 그 병을 대신했다." - <화랑세기> 참조.

그런데, 몇 달 뒤 병석에서 일어난 미실도 숨을 거둔다.
그때 미실의 나이가 58세였으므로 설화랑과는 동갑인 셈.
설화랑이 먼저 죽은 줄 뒤늦게 알고 슬퍼하며 남겼던 유언.

"설화랑과 나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해 달라."

미실을 사랑한 남자 중 설화랑 만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탓.
미실(美室)이란 이름의 실(室)은 궁(宮)과 함께 성기를 암시
그것이 아름답다는 이름이니 오죽이나 방중술이 뛰어났을까?

미실은 뛰어난 미모, 가무, 천재 문학가였기에 3대 왕의 연인.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과도 연인.
6대 풍월주인 세종(世宗)과 7대 풍월주 설화랑과도 농밀한 관계.

'미실에게 첫사랑은 15~16세에 요절했던 화랑 사다함.'

미실이 31세일 때, 13세에 즉위한 진평에게 도(導)하는 역할.
이끈다는 뜻의 도(導)는 불로장생 육체수련 중 하나인 방중술,
말하자면, 미실은 도교 의학에서 황제를 성교육하는 현녀(玄女).

미실은 어린 제왕의 성적 능력을 배양하게 하는 개인교사.
하여, 진평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실과 밤을 보냈던 세종이 다음날 휘청거리곤 했다는 기록.

진흥왕은 말년에 중풍을 앓아 미실이 국사를 대신했다는 대목.
법흥왕과 진흥왕 시대를 대표하는 훈신인 미진부(未珍夫)의 딸.

'10 대 풍월주 미생'의 누나이자, 11대와 16대 풍월주의 어머니.
두 아들 풍월주는 성이 다르며 김유신에게는 처조모가 되는 미실.
미실은 신라 왕실의 권력을 움직이는 그 중심의 '권력작동 시스템'

미실은 무려 30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렀던 여인.
골품제도, 왕위계승,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를 좌지우지.
신라말기 왕실의 근친상간은 당시 신라인 특유의 성풍속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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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누이와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
22세 풍월주 양도는 어머니의 권유를 수락한다.

“중국 풍습이 아닌 신라 풍습을 따르겠읍니다”
“참으로 나의 아들. 신라국에서는 신라인의 도."

진흥왕은 미실 군주(君主 :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대창(大昌)
당시 신라인은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를 신봉했다.

그동안 한국 사학계는 미실(美室)의 존재를 부정.
미실이 동방예의지국 이름을 더럽힌다고 여긴 탓.
이조시대 고루한 유교관념 때문에 부정한 듯 싶다.

'잉첩이란 왕족의 시중을 드는 궁중나인.'

미실은 색공을 바치던 '대원신통' 출신.
대원신통은 왕비 또는 궁녀들의 양성소
오도 - 옥진 - 묘도 - 사도 - 흥도 - 미실

색공지신 계열다운 색사(色事)의 달인들
신라 최고위층과 근친혼이 가능한 여성들.
미실은 아름다움의 진수로 빚은 듯한 미모

미실의 색공일생(色供一生)은 신라 통치계층과 긴밀
왕위계승 골품 인통 화랑을 비롯한 통일신라 역대 왕.
미실을 사랑했고 미실이 사랑했던 통일신라시대 7 남자.

1) 세종전군

미실이 입궁한 직후 색공한 첫남자 세종과 정분
세종의 모친 지소부인은 미실은 강제로 쫓아낸다.
그러나, 세종은 미실을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

미실은 다시 궁궐로 불려 들어가고.
세종은 미실을 자기 목숨처럼 여겼다
세종과 미실 아들이 11세 풍월주 하종.


2) 사다함

세종을 섬긴 5세 풍월주(화랑 지휘관) 사다함.
미실이 궁밖으로 쫓겨났을 때 혼인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가 가야 정벌에 나선 사이 미실은 입궁.

하여, 미실을 잃고 상심해 세상을 등진 사다함.


3) 진흥왕 (540~576: 색공시기 565~576년경)

진흥왕은 왕후 사도의 조카 미실을 잉첩으로 삼아 색공
미실에게 황후의 지위와 같은 황후궁 전주 자리를 하사.
미실을 총애함이 4해를 뒤집을만하다는 '화랑세기' 기록.

'진흥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는 미실.'

미실이 동륜태자가 죽는 사건에 휘말려 출궁당한 후
세종의 아이를 임신한 미실을 다시 불러 곁에 두었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을 정도로 미실을 총애.


4) 동륜태자

미실은 왕위 계승 제 1 순위인 동륜과 상통한다.
애송공주를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진흥왕과 색공.
동륜은 진흥왕 후궁 중 하나였던 보명궁주와 관계

572년 3월 보명궁의 큰 개에 물려 죽었다.

이 사건 조사과정에서 미실이 동륜을 비롯
설원랑, 자신의 동생 미생 등과 상통한 사실.
백일 하에 드러나 미실은 출궁을 당하게 된다.


5) 설원랑

7세 풍월주로 죽기까지 미실에게
충성과 사랑을 아낌없이 바친 인물.
설원랑은 미실의 애인이자 곧 후견인

설원랑은 미실의 심복 역할을 함으로써
미실의 정치적 세력이 구축에 일조한다.
설원랑과 미실 아들이 16세 풍월주 보종.


6) 진지왕 (576~579: 색공시기 576~579년경)

형인 동륜태자가 일찍이 개에 물려 죽고
진흥왕이 세상을 뜨자 제25대 왕으로 등극.
미실은 그가 태자일 때 은밀한 연인의 관계.

그가 왕이 된후 왕비 또는 후궁자리를 약속받는다.
미실과 사도태후의 공작으로 그는 왕위에 등극한다.
그러나, 여론 때문에 미실은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재임 기간을 3년도 못 채우고
사도태후와 미실의 공작에 의해 폐위된다.


7) 진평왕 (579~632: 색공시기 579~595년경)

진평왕은 13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미실은 왕에게 색을 가르치고 후궁이 된다.

미실은 정권장악후 사도태후와 함께 내정,
그 심복인 세종과 설원랑, 미생 등은 외정.
신라 정권은 사실상 미실이 좌지우지 한다.

미실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진흥·진지·진평의 세 왕을 모셨던 그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미실이 병으로 눕자
설원랑은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설원랑이 그녀를 지극정성 간호하다가 죽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 지낸다.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로 갈 것”

미실이 슬퍼하다가 세상을 뜬 나이 58세였다.
다수의 남성을 일부종사(一婦從事) 시킨 여성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남성편력 여인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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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주 사다함(風月主 斯多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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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은 미실궁주와의 사랑에 울고
서라벌은 짧은 사다함의 삶에 울었다

17년 비범한 삶 살다간 대표화랑 풍류남아
김 사다함은 신라 진흥왕 때 풍월주(風月主).

풍월주란 화랑들의 우두머리.
화랑은 또한 낭도들의 우두머리.
인품과 자태가 빼어난 사내 중 사내

전쟁터에서는 목숨걸고 앞장서 돌격한 용감한 소년 장수
밖으로 굳세고 안으로 어진 마음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
평소 낭도를 거느리고 산수를 유람하며 학문과 무술을 닦고
향가를 즐겨 부르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대표 화랑이었다.

인품·무예가 빼어난 사내 중 사내 사다함.

김 이사부를 따라 가야정벌전에 출전하여
큰 전공을 세우고 제 5 세 풍월주가 되어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린 시기가 16세 나이.

'17세 나이에 삶을 마감한 사다함.'

그의 일생은 이처럼 매우 짧았지만,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
두 군데에 그의 행적을 역사에 남긴다.

사다함과 미실궁주(美室宮主)의 슬픈 사랑 이야기,
사다함과 무관랑의 우정은 서라벌을 울린 연애사건
우리나라 풍류사에도 길이 남을 애틋한 사연이었다.

하지만,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비련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이 없고
<화랑세기> 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무려, 1천3백년 만에 공개된 것이었다.

.....<삼국사기> 기록.......
진흥왕 23년(562) 가야정벌
사다함의 전공이 으뜸이어서
왕이 논밭과 포로 200명 포상

포로는 받아서 풀어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논밭은 부하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이를 칭송.
................................................

사다함이 태어난 것은 진흥왕 7년(546)으로 추정된다.
가야정벌에 출전한 진흥왕 23년에 16세란 기록을 근거

사다함은 내물왕 7세손 급찬 구리지(仇利知)와
제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 금진 사이에서 출생.

사다함과 미실궁주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혼인을 약속한 시기는 사다함이 가야출전 전.
그당시 미실은 막 황궁에서 쫓겨난 직후였다.

미실은 지소태후와 이사부 아들 '김세종'의 부인
지소태후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내침을 당했던 것.

사다함과 미실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반했다.
혼인을 약속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
그러다가,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 출정하게 된다.

<화랑세기>는 그때 미실이 향가를 지어 부르며
사다함을 떠나보낸 노래가 풍랑가 또는 송출정가


"바람이 분다고하되 임 앞에 불지말고
물결이 친다고하되 임 앞에 치지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아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약혼녀 미실을 위로하고 전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 서라벌로 개선했는데
그 사이에 미실은 전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고 만 것.

'사랑을 잃은 사다함의 가슴은 미어질 듯.'

신분이 비슷하면 힘으로 되찾아오겠지만
상대는 신라 태자, 왕 다음가는 전군(殿君)

사다함이 애통한 마음을 담아 부른 노래가 '청조가’
청조란 '금방 날아가 버린 새' 미실을 가리키는 말.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천년 죽지않게 하리."


실연의 아픔이 너무나 컸던 사다함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귀찮던 사다함.
거기에다 어머니 금진궁주의 색광증
그 상대가 둘도 없는 친구.. 무관랑.

금진궁주의 육탄공세에 참을 수 없던 무관랑
어느날 밤 황궁 월성 담장을 넘어 도망치다가
구지(해자)에 떨어져 크게 다쳐 죽고 말았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친구마저 잃어버린 사다함
마음의 고통이 커 삶의 의욕마저 꺾인 사다함.
마침내 병들어 하루종일 눈물만 흘렸던 사다함.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날이 갈수록 쇠약.

그렇게 사다함은 병든지 7일 만에 세상을 떴다.
따라서 사다함의 죽음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후 사다함이 미실의 꿈에 나타나 했다는 유언.

“나는 너와 부부되길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장차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미실궁주는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때까지
약 40년간 미색으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
신라의 전권을 휘둘렀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그 옛날 사다함과 무관랑을 비롯한 낭도들
무술을 연마하고 호연지기를 기른 경주 남산
지금은 거대한 야외 불교미술관으로 변모했다.

사다함과 미실궁주의 비련의 무대였던 월성터.
대궁, 양궁, 사량궁 등 신라 황궁이던 월성터
사적 16호는 빈숲에 바람만 쓸쓸한 신라 황궁터.

'폐허가 되어 옛 자취는 찾을 길 없는 궁터.' 

 

 

 

화랑세기.



8세기경 신라 한산주 도독 김대문이 저술한 역사서.
판본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에 극히 일부가 인용
1989년에 조선 후기의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 발견

이 책은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되어 있다.
내용은 충격적으로 근친혼(近親婚) 동성애 다부제(多夫制)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서 중에는 최초로 발견된 사서.

저자 김대문은 4세 화랑인 이화랑(二花郞)의 후손.

이화랑의 큰아들은 원광법사이고
둘째 아들인 보리(菩利)는 12세 화랑
김대문은 보리의 아들 예원(禮元)의 손자

예원의 동생 보룡(寶龍)은 곧 문무왕의 모친.

내용은 역대 화랑들의 영웅담이 아닌 가승(家承)의 성격
구성은 화랑의 기원을 설명하고 이어 그 행적들을 기록

1세 풍월주(風月主:화랑)인 위화랑(魏花郞).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美生),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庾信)까지의 행적이 적혀있다.
그러나 김유신 부분은 중간 이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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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은 '국선도 풍월도 원화도 풍류도'라고도 한다.
젊은이들을 무리지어 놀게 하여, 행실로 인재를 선별
이들은 명산과 대천(大川)을 가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

이로 인해 그들 중 나쁘고, 나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그들 중 착한 자를 가려 조정에 추천한 것이 그 설치 목적.

설치 연대는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 이미 화랑 사다함이 대야성(고령)을 공격하여 큰 공
신라는 이때부터 미비된 상태이지만 화랑 집단이 있었던듯.

화랑도는 처음에 남모 준정 두 미녀 원화가 단장.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해 300여 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두 단장은 서로 시기하다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버렸다.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에 처해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뿔뿔히 해산했다.

그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으로서 외양이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하여
단장을 받들게 하자 무리가 전국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랑도에는 지도자에 화랑이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576년 이후 관에서 운영하며 총지도자에 국선(國仙)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를 맡았다.

화랑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①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② 대의를 존중하여 의에 어긋나는 일은 죽음으로 항거하고,
③ 병석에서 죽는 것을 꺼리고 국가를 위해 전사함을 찬양하며,
④ 오직 전진이 있을 뿐,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포로가 됨을 수치로 아는 등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함양

원광법사의 세속오계가 정신적 기저(基底).

이와 같은 화랑의 기풍은 당시 신라의 종교적 정신세계
최치원 난랑비 서문에 '묘(玄妙)한 도(道)가 풍류(風流)
이는 삼교(三敎: 유교·仙敎·佛敎)를 포함한 종교 관념.

그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며 노자(老子)의 가르침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는 석가의 교화

화랑도에게 수호신 같이 숭배되었던 미륵존(彌勒尊)이나,
낭도 중 승려가 많았던 것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의미.

또한, 화랑도를 창설하면서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진흥왕
최치원의 풍류도 또한 신선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

화랑의 원유지 포석정(鮑石亭)은 국가 제의(祭儀)와 결합
김유신 등 화랑의 출전(出戰)에 주술적(呪術的) 요소가 포함
고대 전쟁에는 주술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은 무장(武將)으로서 사령자(司靈者)의 성격도 겸한듯.

통일전쟁을 위한 국가주의와 유불선 정신세계를 융합,
청소년을 양성해 삼국통일에 필요한 많은 인재를 배출
성덕왕(재위 702∼732) 때 낭도를 이끌던 화랑은 200 명

이밖에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
안축(安軸)의 《관동유기(關東遊記)》기록.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마애단서(磨崖丹書)·
36봉비(峰碑), 강릉(江陵) 한송정(寒松亭)의 사선비(四仙碑),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의 애상비(崖上碑)·동봉고갈(東峰古碣)·
동봉비(東峰碑) 등은 화랑의 유적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신라 말 화랑이란 말은 쓰이지 않고
선랑(仙郞)·국선(國仙)으로 불렸다.

고려에서도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은 팔관회(八關會)의 무동(舞童)을,
국선은 충렬왕 후 양반 군역(軍役)을 지칭

이조시대에 이르러서 선랑·국선이란 말은 쓰지 않고
화랑이란 말은 초기에 남무(男巫:覡)를 가리키게 되어
‘화랑이’라고 하였으며, 이조 중기 이후에는 무부(巫夫),
걸립승(乞粒僧)의 무동, 사당(寺堂)의 거사(居士)로서 지칭.

화랑도는 창설 후 문무왕에 이르는 약 l세기 동안 융성
삼국통일 어려운 시기에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
통일 후 태평시대에는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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