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73. ( 경주 남산. 선도산 성모 설화. 대원신통. 갈문왕. )

donkyhote 2010. 11. 12. 03:25

 

 

경주 남산(慶州 南山)
 


 

 

경주시 경주평야의 남쪽에 솟아 있는 산.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통일신라 후기), 보물 제136호, 높이 436cm, 경북 경주시 ...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 큰 바위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
경주남산삼릉계석불좌상(통일산라), 보물 제666호, 높이 238cm, 경북 경주시 배동 ...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仙桃山),
동쪽에 낭산(狼山)과 명활산, 북쪽에 금강산 등
성벽처럼 둘러있는 많은 산 중 가장 크고 높은 산
 
남산에는 높이 494m 고위봉 468m 금오봉(金鰲峰)
두 봉에서 흘러내린 40 계곡과 산과 들을 합쳐 남산
 

까치봉이나 황금대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 유물들
돌도끼·반달형돌칼·돌살촉 오산골 어구에는 고인돌
암석신앙 유적 남산부석(南山浮石) 천룡암(天龍岩)
큰지바위(大地石) 상사바위[想思岩] 등이 있으며,
 
진평왕대(579~632)에 쌓은 남산신성(南山新城)
고허성(高墟城)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 무기창고터 2곳과 식량창고터 1곳.
식량창고터 길이는 100m,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여m가 넘는 큰 건물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 탄생한 나정(蘿井)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鮑石亭)도 이곳에 있다.
남산은 왕릉도 여러 군데 있어 신라 역사와 유적의 산
 
6세기초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부처의 산
많은 절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 탑 61기, 불상은 80체
61기 석탑 중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남산의 절에는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져
남산의 탑들은 구름에 걸린 듯 솟아 보인다.

 
남산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磨崖佛像)이 51체.
큰 것은 10m 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6세기말~7세기초에 조성된 것도 있다.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영광을 기념하는 칠불암(七佛庵)도 있다.
 
왕정골[王井谷]여래입상이나 삿갓골여래입상(파편)처럼
우리 민족예술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菩提寺]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9세기 초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암석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이다.
 
 우리에게는 태고부터 바위신앙이 있었다.
바위 속에 영검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사람들
경주 남산에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냉골 석가여래삼존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은
다듬지 않은 바위면에 새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경주남산삼릉계석조약사불좌상(통일신라 후기), 높이 280cm
경주남산삼화령출토석조삼존불상, 7세기에 나타나는 중국의 새로운 양식이 보이는 삼존불상, ...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절벽의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보살반가상(통일신라 후기), 보물 제199호, ...
경주남산용장사지마애불좌상(통일신라), 보물 제913호, 높이 162cm, 경북 경주시 남산
경주남산칠불암불상군의 전경, 네모난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과 그뒤 북면에 ...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동면, 보물 제201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남면의 삼존불, 보물 제201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북면의 전경, 보물 제201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

 

 

선도산 성모 설화.

 

 


베일 속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리산의 전설들.

선도산 성모 설화는  그 수수께끼들을 풀., 열쇄.

선도산 성모 설화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나정(羅井)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지
신라인들은 시조묘를 섬기는 전통을 갖고있다.
제2대 남해왕은 시조묘인 박혁거세 묘에 제사

그것이 신라 신궁의 시작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

기원전(紀元前) 69年 신라의 육부(六部) 촌장들이
어느날 알천 언덕에 모여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

제례 중, 나정(현재 양산) 있는 곳을 바라보니
울창한 숲에서 오색 빛이 나기에 그곳에 가보니
알 같기도 하고 박같기도 한 포가 있어 헤쳐보니

그 알 속에서 사내 아이가 나왔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켜 길러 초대왕
BC 57年에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칭했고

하여, 그가 태어난 곳이 계정.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정했다.

487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479∼500 재위)
박혁거세 시조묘(始祖廟) 자리에 세운 신궁

신라신궁의 시작이 된 것이며
훗날 일본신궁의 뿌리가 된 것.

황룡사도 신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서, 황룡사.

6세기 초에 세워진 신라 신궁
일본보다 무려 1백년 앞선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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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경주 덕천리 유적은 신라가 태동하던 이른바
사로국 시대의 유적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신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BC 57년, 박혁거세가 건국했다고 한다.
혁거세는 경주 사로 6촌장(村長)이 옹립

첫째가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嘴山) 진지촌(珍支村),


넷째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사로 6촌은 진한 6부'(辰韓六部)로 발전.

돌산 고허촌 촌장이 소벌(蘇伐) 혹은 소벌도리
소벌도리는 혁거세 옹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벌도리가 어느 날 양산 기슭을 바라보다가
나정(蘿井) 옆에서 발견한 아이가.,곧 혁거세
삼국유사에 형산(兄山)으로 강림했다 덧붙인다.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또는 선도산(仙桃山)
중국 황실의 혁거세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
김유신의 누이동생 보희가 방뇨하는 꿈을 꾼 장소

이 기록들이 전설 성격을 벗어버리기 힘들지만
돌산 고허촌이란 곳이 사로 6촌 중에서도 사실상
신라의 탄생지란 흔적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전설.

돌산 고허촌이 새 이름을 얻어, 사량부(沙梁部)
사량부를 무대로 족적을 남긴 신라말 학자 최치원
김유신 가문이 대대로 정착해 산곳 역시 돌산 고허촌

김유신은 6부 중 어느 곳 출신인지 기록이 없으나,
그의 조부 김무력(金武力)이 사량부 출신임은 분명

김유신은 신라 진흥왕 금석문에 보이는 무력의 고손자,
김유신의 조카인 김반굴(金盤屈) 또한 사량부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량부는 고려건국후 남산부(南山部)

즉, 사량부는 고허촌이 모태인 6촌 중 하나
고려시대 고허촌은 남산부로 바뀐 셈이 된다.

1-4세기 고분군이 발견된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돌산 고허촌 혹은 사량부 세력으로 보아야 할듯.

지금까지 돌산 고허촌, 중심지는 나정 일대를 지목
하지만 덕천리 유적 발굴이 활발해 짐에 따라 조만간
사로 6촌의 실체를 상당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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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 성자를 낳았는데
뒤에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혁거세왕과 알영'일 것이라는 해석.

계룡이니 계림이니 또는 백마니하여
시조 탄생설화에 나오는 동물이 있는데,
이들 닭 흰색을 방위로는 서쪽에 속한다.

이들 이야기가 서산 신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
신모는 또 하늘의 선녀들을 시켜 비단을 짜게 해서
붉게 물들여 신라 여인들에게 한복을 만들게 하고는
그 남편들에게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영험에 놀랐다.

서산 신모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다.
김부식이 고려 때 송나라 사신으로 들어갔었다.
우신관에 상이 있었는데 송 접대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네 나라의 신인데
공도 잘 알고 있을 것이지마는......"

하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

"옛날에 중국 왕실에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낳은 아들이 해동의 시조
그 여인은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신의 상입니다."

여러 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산 성모는
신라시대 뿐 아니라 고려때까지 전해 왔으며
신라의 개국 시조와 결부될 만큼 추앙받았다.

하여, 선도산 성모는 곧 박씨의 시조.
선도산 성모를 모신 사당이 곧 신궁.


...................<경주 선도산 성모 설화>.....................

선도산 성모가 佛事를 도와준., 이적에 관한 설화.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제목

진평왕 때 안흥사(경북 영주시)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고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 자리 밑을 파보니
황금 160냥이 나와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선도산 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라 하였는데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 하여 사소가 그대로 했다.

솔개가 선도산에 앉아 사소는 그곳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선도산 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는데
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뜻한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螺)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

고 묻자,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

이 설화에서는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융합된듯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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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사(南岳祠)는 국모신 선도성모를 모신 곳.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받들고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 노고단 남악사.

경주 선도산 성모사(聖母祠)도 선도성모 신단

노고단(老姑壇)은 선도성모 높임말 노고(老姑)와
제사를 모시는 신단(神壇)이 합쳐진 말에서 유래

선도성모 신단은 이곳 지리산(남악사) 외에도
팔공산(중악사), 토함산(동악사), 계룡산(서악사),
태백산(북악)., 5악산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고려 ~ 조선시대에도 3악사에서의 국가 제사
(묘향산 北岳祠, 계룡산 中岳祠, 지리산 南岳祠)
노고단의 제단 흔적들은 광복 이후에 파괴되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선도성모 제단에 대하
그 어딘가 흠모의식을 갖고 보호하고 있었다.
노고단이 일본천황의 신궁역사의 뿌리이기 때문.

광복후 빨치산 토벌 때 불타고 파괴된 남악사

화랑들의 우두머리 풍월주는 본래 여성 원화
화랑을 잉태한 여인을 축복하는 여신의 상징

노고단(老姑壇)의 老姑는 '오래된 시어머니'란 뜻
노고는 사소(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를 뜻한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의 모계혈통(母系血統) 체제

모계혈통 32명의 풍월주 최상단에 여성 상선이 존재.
그것은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에 연관되고 있다
고려시대 중기 개경(개성)에 박혁거세 신사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선도성모 신사는 일본에서 만 수천개가 존재
중국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 속의 미스터리

여성 태양신 천조대신은 동신성모(東神聖母)
일본천황가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라 석굴암과 감은사 앞바다 대왕암(해중능)

석굴암의 동짓날 일출은 감은사와 해중능이 연결
일출 방향을 따라가면 일본천황의 제사터 이세신궁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신궁(神宮)인 곳.

天照皇大神宮 = 태양의 여신 = 동신성모.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화랑들은 애초에
신궁(神宮)이라는 신라 최고 제사시설에서
산꼭대기 또는 산중에서 제관 역할을 맡았다.

이세신궁에 천황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계(神鷄)
이것은 박혁거세 부인 알영이 신계였던 것과 일치.
박혁거세 부인인 알영부인은 <김씨계의 진짜 시조>

<화랑세기>에서 보여주는 신라의 잉태한 여성
화랑의 최고 지도자인 여성 원화에 의한 축복
원화제도 폐지후에 국사가 그 역활을 대신했다.



 


대원신통.



32명의 풍월주에 관한 역사서., 화랑세기,
여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미실.
그녀가 신라에 미친 영향이 컸음을 알게 해준다.

미실은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약 40년 동안 오로지 빼어난 미색 하나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으로 정계를 좌지 우지

절세가인 미실은 색공(色供)을 통해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 금륜태자(25대 진지왕),
동륜태자 아들 진평왕 등 3 왕과 1 태자를 사랑

화랑 사다함을 비롯 세종, 설화랑, 미생랑
네 명의 풍월주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미실.

세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종과
설화랑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이
훗날 신라 풍월주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두 차례나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화랑을 거느렸다.
그녀의 일생은 신라 화랑사와 불가분한 관계.

미실의 혈통은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 한다.
신라 왕실에 왕비 등의 여자를 공급하는 혈통

그런데 신라에는 대원신통 이외에도
왕비를 공급하는 진골정통이 있었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모계로 이어진다
즉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특이한 혈통
두 혈통은 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

화랑세기를 보면 보미(寶美)라는 여성이
대원신통의 대원(大元)이라 설명하고 있다.
보미는 13세 풍월주 김용춘의 먼 조상이다.

보미는 눌지왕 때 활약한 인물로 그녀를
100~150년 뒤 미실과 연결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
대원신통의 종주라 볼 수 있다.
옥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장녀.

그녀는 영실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후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영실과의 사이에서 딸 묘도를 낳았다.
이 때 법흥제(법흥왕)가 옥진하고 약속하기를

'네 지아비(영실)와 나는 일체(一體)이니
네가(옥진)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빈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옥진이 딸을 낳으니 바로 묘도(妙道).
이 묘도가 바로 미실의 어머니이다.

법흥왕은 약속대로 묘도를 부인으로 삼았으니
법흥왕의 양기가 센 반면 묘도는 성기가 좁아
몹시 괴로워해서 법흥왕은 묘도를 찾기 않았다.

법흥왕과 멀어진 묘도가 2세 풍월주 미진부를 만나
그와 사랑에 깊이 빠져 낳은 딸이 바로 미실이다.
『화랑세기』는 미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소지마립간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五道 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 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

완벽한 몸매와 미모를 갖고 태어난 미실에게
옥진은 전문적인 방사(房事) 기술을 가르쳤다.
미실은 대원신통 임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노력.

옥진은 미실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사내에게 교태 부리는 방법, 방중술 비법,
시문 가무 색공(色供) 등 절기를 배운 미실.
마침내 절정의 색공(色功)을 갖춘 절세의 색녀

평생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갖었던 미실
정식 혼인한 남편은 6세 풍월주 세종 뿐
세종은 진흥왕과 이부동복(異父同腹) 동생.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세종의 어머니는 지소(只召) 태후였다

지소부인은 법흥왕과 보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법흥왕의 동생 김입종과 결혼해 진흥왕을 낳았다.
즉, 그녀는 삼춘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곧 진흥왕.

그녀는 남편인 입종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부왕이 죽기 전에 박영실을 계부(繼夫)로 정해 재혼
하지만, 지소는 재혼한 영실보다 이사부를 좋아했다.

이사부는 지소를 섬겨 그녀 사이에서 1남 3녀
아들이 세종이고 딸이 황하, 숙명, 송화였다.

이사부는 신하로서 지소 태후를 섬겼으므로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신하로 대해야만 했다.

세종이 장성하자 지소태후는 세종을 불러
여자를 고르게 했고 세종은 미실을 선택.

하지만,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 뜻은
미실이 진흥왕의 후궁이 되길 원했다.

대원신통에게 있어 색사(色事)는 곧 道였던 것
궁중에 들어간 미실은 옥진에게 배운 방사기교로
세종을 사로잡자 세종은 얼마후 정기가 고갈되었다.

미실이 세종을 섬길 무렵, 지소태후가
미실의 숙모 사도왕후를 폐하려 하였다.

진골정통 지소태후는 같은 혈통인 숙명공주에게
왕후 자리를 주기 위해 사도왕후를 폐하려 한 것.

사도왕후는 진흥왕에게 울며 억울함을 호소
진흥왕은 그녀를 왕후 자리에 그대로 앉혔다.
지소태후의 분노가 애꿎은 미실에게 향하였다.

게다가 세종이 지나친 색사로 피골이 상접한데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고 미실을 나무랬다.

"너로 하여금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전군이 의복과 음식을 받들라고 했지,
색사로 심신을 어지럽히라고 했느냐"

남편 세종을 즐겁게 해준 죄 아닌 죄로
미실은 눈물을 흘리며 궁에서 쫓겨났다.

한편 미실을 궁에서 쫓아낸 지소태후는
진종 전군의 딸을 세종의 부인으로 삼았다.

궁에서 좇겨나 제5세 풍월주 사다함을 만난 미실.
세종이 첫남자라면, 사다함은 그녀가 만난 첫사랑

이 때 사다함의 나이는 불과 15~16세
사랑에 빠진 미실은 부부가 되기로 약속
색사보다 사랑이 기쁨임을 알게된 것이다.

진흥왕 재위 23년 562년, 왕은
이사부에게 대가야 정벌을 명령.
이에 사다함 역시 참전하게 되었다.
미실은 출정가를 불러 사다함을 위로.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한되 임 앞에 치지 않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치려뇨

사다함은 전장에서 용맹을 과시하였다.
사다함의 명성을 전 신라에 떨치게 했다.
진흥왕은 가야 포로 300명과 토지를 하사.

사다함이 전선을 누비며 전공을 세울 때
미실을 그리워한 세종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는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려들였다.

사다함이 개선했을 때 미실은 세종의 부인
사다함은 청조가에 남긴 뒤 7일 후 죽는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팥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 되리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사다함의 죽음으로 인해 미실은 변했다.
미실은 운명을 자신이 결정짓기로 결심.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녀는 색공을 이용해 권력 장악의 길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숙모인 사도왕후와 협력을 꾀했다.
미실과 사도왕후는 권력장악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둘은 진흥왕과 사도왕후 아들인 동륜태자를 포섭
궁중은 지소태후파와 사도왕후파로 갈려 힘겨루기

지소태후는 태자비로 진골정통을 잇고자 했고
이를 알아차린 사도왕후는 미실을 불러들인다.

사도왕후는 대원신통을 잇고자 미실에게 몰래 약속
태자와 사귀어 아들을 낳으면 태자비로 삼을 것이다
미실은 태자 사냥에 나서 동륜태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못한 진흥왕이 미실을 찾았다.
사도왕후는 3대 왕을 모시는 첩실로서 미실을 추천했다.
미실은 왕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진흥왕에게 나아갔다.

진흥왕이 미실과 몇차례 정사를 하고나더니
푹 빠져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아비가 다른 동복아우 세종에게
융명을 부인으로 다시 맞아들이게 하였고,
미실에게 왕후궁 전주 칭호를 내리고 총애

이제 미실의 권세는 왕후와 맞먹을 정도.
미실은 진흥왕의 총애가 나날이 중해져서
황후궁 전주에 발탁되었는데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진흥왕과 동륜태자 모두 상대하면서
남편 세종도 자신의 신하처럼 만들어 놓았다.

세종은 미실의 명에 복종 6세 풍월주가 되어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지방에 가 있을 때
미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계획을 세웠다.

30여 년 전에 폐지된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
자신이 원화가 되면 자연히 풍월주는 없어지고
자신이 화랑들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

원래 화랑도는 여성 원화가 이끌던 조직.

첫 원화이자 마지막 원화 준정(俊貞)과 남모(南毛)
두 미모의 여성이 300여 명의 낭도를 이끌던 조직.

준정은 삼산(三山) 공의 딸,
남모는 법흥왕의 딸이었는데,
남모의 큰 세력을 시기한 준정

남모를 술로 유혹해 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 사건이 발생하면서 원화 제도가 폐지.
원화 대신 화랑을 이끈 선화(仙花) 풍월주.

미실은 화랑이 되려했던 동생 미생(美生)과
또 다른 화랑 설원랑(薛原郞)을 끌어들였다.

설원랑은 죽은 연인 사다함과는 아비가 다른 형제
미실은 설원랑은 물론 미생과 정을 통했다고 한다.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중망(衆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째서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느냐?"

두 화랑을 앞세워 여론을 형성한 미실은
진흥왕에게 원화제도의 부활을 요청했다.

진흥왕은 세종을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느닷없이 풍월주를 폐지하고 미실을 원화로 내세우자
세종의 낭도들이 반발했다. 세종은 낭도들에게 당부.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니,
그대들은 불평 말고 잘 섬기라."

『화랑세기』에 많은 낭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원화가 된 미실은 화랑 설원랑과 친동생 미생을
봉사화랑으로 삼아 원화제도는 29년만에 다시 부활

진흥왕은 미실 궁주와 함께 곤룡포를 입고서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었다.

.........이날의 잔치 장면......
「이날 밤 진흥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

낭도와 유화(遊花)들은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했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왔던 여자들 또한 가득찼다.

등불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에 넘쳤다.
진흥제가 원화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했는데
낭도들이 각기 원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소리가 진동 하였다.

진흥제는 매우 큰 기쁨을 느끼고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채색된 동전)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나와 너도 자웅이라고 말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숙모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미실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마치 집단 섹스를 연상케하는 잔치 장면을
화랑세기에서는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실이 숙모의 남자 진흥왕과의 사랑은
고대 신라인에게는 불륜이 아니었다.

진흥왕은 『화랑세기』에서 천하를 뒤집을만큼
사랑했다고 표현할 만큼 미실에게 반해 있었다.

미실이 진흥왕을 사로 잡은 것은
미모와 색공 때문 만은 아니었다.
글을 잘 지었고 학문에도 능했다.

진흥왕이 업무를 볼 때 그녀는 옆에서 모시며
문서를 참결해 권세를 옥진궁으로 돌아가게 했고,
대원신통이 진골정통보다 융성하게 일어나게 했다.

자신을 내쫓았던 지소태후의 진골정통과 맞서
거둔 완벽한 승리으나 그 권력에 위기가 닥쳤다.
동륜태자이 변사(變死)하는 사건이 벌어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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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진흥왕과 동륜태자와 사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실은 진흥왕이 이 사실을 알까 두려워
태자와 만남을 꺼렸지만, 동륜태자는 색공을 강요

그래서 미실은 자기가 거느린 유화 중에서
빼어난 미인들을 골라 동륜에게 붙여주었다.
동륜은 설원랑, 미생 등과 어울려 엽색 행각

동륜태자는 부친 진흥왕의 후궁과도 사통
보명궁주는 추문이 두려워 응하지 않았으나
이미 색광이 된 동륜태자를 막을 수 없었다.

미실이 진흥왕의 총애를 받자 태자를 받아들였다.
동륜태자는 걸핏하면 보명궁을 찾아 보명궁주와 관계
그러다가 보명궁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고 말았다.

진흥왕은 태자의 종인(從人)들을 조사
결국 동륜태자의 엽색행각이 밝혀졌고,
설원랑과 미생 화랑들의 개입이 밝혀졌다.

또한 그 중심에는 원화 미실이 있었다.
미실의 추행(醜行)에 관한 증언들이 속출
미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때 미실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사도왕후
미실이 잘못은 있지만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시려는 거지요?

동륜태자 친모가 나서서 아들의 혼령을 언급하며
미실을 두둔하자 진흥왕은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
진흥왕이 사건을 봉합한 것은 미실을 사랑한 때문.

진흥왕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음에도 불구하고
미실은 세종이 풍월주가 된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에게 풍월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후
자신의 정부인 설원랑을 그 자리에 대신 앉히고
동생 미생를 부제로 삼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

뿐만 아니라 죽은 동륜태자 대신 금륜태자와 상통
다음 제위에 오르면 왕후자리 약속을 받아 내었다.

미실이 출궁한후 진흥왕은 다시 미실을 찾지만
미실은 죄가 너무 커 왕을 모실 수 없다고 했다.

진흥왕은 그녀를 전주로 임명했지만, 미실은 거절
진흥왕 대신 남편 세종을 선택한 것은 그녀의 전략.

세종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고,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일생동안 정절을 바쳤다.
누구도 책망하지 않았고, 판결도 그릇됨이 없었다.

김대문은 세종을 화랑 중의 화랑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미실의 종이었다.
미실은 세종과 해궁(海宮)으로 이주해., 운우지정

표면적으로 보면 미실이 진흥왕을 완전히 떠난듯.
그러나 미실이 진흥왕 사이에서 낳은 수종(壽宗)을
데리고 간 것은 진흥왕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의 일환.

수종이 어리다는 명분으로 데려갔으나,
수종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실이 궁을 나가자 보고 싶어진 진흥왕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차례 미실을 불렀으나 거절.
미실은 죄를 지었으므로 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면상 이유일뿐 실제의 목적은 진흥왕 길들이기.

결국 진흥왕이 몸소 해궁에 거동,
미실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제서야 미실은 못 이기는척 허락.

이 때 미실은 세종의 아이를 임신중.
그래서 해산 후 입궁하겠다고 했으나
미실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던 진흥왕

미실이 입궁해서 낳은 아이가 옥종(玉宗).
세종은 또 다시 사랑을 빼앗긴 외로운 신세.
미실은 세종에게 병부우령(兵部右令)을 제수
궁에 입궁해 살게 했고 그의 심복들을 모두 요직

이로써 그녀의 권세는 전보다 더 높아졌다.
이와는 반대로 진흥왕은 몸이 갈수록 쇠약
40대 초반이었지만 지나친 색사로 몸이 병약.

결국 진흥왕은 중풍에 걸려 거동도 못하고
내정(內政)은 미실과 사도왕후가 장악했다.

진흥왕이 풍질에 걸려 사도왕후가 남녀관계를 못하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왕후의 사랑을 받으라고 권했다.

세종은 왕이 살아있기에 황후와의 통정을 거절.
미실의 거듭된 강요에 할 수 없이 황후와 사랑.
미실에게 성교는 모두가 즐거움을 누릴., 오락

병석에 누운 진흥왕은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 미실, 보명, 옥리, 월화의 다섯 궁주와
병석에서도 색을 탐한 때문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재위 36년 576년 8월 43세로 운명한 진흥왕.

미실은 진흥왕이 붕어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권력 확대를 위한 계기로 사용

미실은 사도왕후, 세종, 미생과 함께
진흥왕의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미실은 사도왕후와 짜고 태자 금륜과 정을 통한 후
딴 마음을 먹지 않기로 약속받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하여 왕위에 오른 금륜이 진지왕이다.
그는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정사조차 돌보지 않은 채 엽색행각에만 몰두.

당시 궁중에는 3 태후가 있었지만
진지왕의 엽색행각을 말리지 못했다.

미실은 사도왕후와 논의해
진지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정.

거사에 성공한 미실과 사도왕후는
동륜태자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곧 사도왕후 손자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당시 13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미실이 조정의 일을 처리했다.

미실은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璽主)가 되어
정당(政堂)에서 정사 중 꿈을 꾸었다.

이것이 길한 꿈이라 생각한 미실은
진평왕을 장막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진평왕은 아직 너무 나이가 어려
미실의 기분에 따라주지 못해 설원랑과 통정

이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보종.

사도왕후는 진평왕이 즉위한 뒤
진흥왕의 후궁 보명과 미실에게
진평왕을 받들어 모시도록 했다.

미실은 이미 나이 30이 넘었고,
골품도 보명에 비해 낮은지라
보명에게 양보했지만
보명도 임신 중이라 사양

따라서 미실이 13세 소년 진평왕을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영광을 차지.

미실은 열세 살의 어린 진평왕에게
신국의 도라는 성교육을 시킨 것이다.
진평왕이 즉위했을 때 미실은 32세였다.

신라에서 국왕의 남녀관계는 육욕 차원이 아니라
왕실 번영을 추구하는 필수적 의식이자 신국의 도
미실은 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키울 수 있었다.

미실에 의해 대원신통은 왕가보다 높아졌다.
대원통신 옥진궁주는 신궁(神宮)에서 살았다.

미실의 아들 하종이 법흥왕보다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을 할 만큼

인재 양성제도인 화랑도까지 좌지우지
진흥, 진지, 진평 세 왕을 모셨던 미실
진평왕 28년 병에 걸리자 설원랑이 간호.

설원랑은 미실 대신 자신이 병에 걸려 죽었다.
설원랑이 죽자 자신의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미실은 58세.

다수의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미실
미실이 주도하던 신라는 진정한 여인천하(女人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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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국가체제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지만
삼국통일 원동력을 손꼽으라면 호국불교와 화랑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록이 거의 없었다는 것.

1989년 조선 후기의 필사본〈화랑세기〉발견

이 책은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
분량은 총 7,406자,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근친혼(近親婚)·동성애·다부제(多夫制) 등등.

저자 김대문은 4세 화랑 이화랑(二花郞)의 후손.
이화랑의 큰아들은 원광법사(圓光法師)이고
둘째 아들인 보리(菩利)는 12세 화랑.

김대문은 보리의 아들 예원(禮元)의 손자,
예원의 동생 보룡(寶龍)은 문무왕의 모친.

화랑세기는 서문에서 화랑의 기원을 설명
그러나, 김유신 부분은 중간 이하가 탈락
김유신에 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서문에 따르면 화랑은 선도(仙道) 조직으로
고대 신궁(神宮) 제사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집행자는 처음에 여성이었으나
남성으로 바뀌며 화랑이 되었고,
나중에 낭도를 거느리고 서로 연마

낭도 편제를 군사 조직으로 만든 이는 문노.

사다함의 검술스승이며 진평왕 때 8세 화랑
모친은 가야의 공주라 초기에 배척 받았으나
사다함과 연합, 거칠부 딸과 결혼해 세력 형성

그는 골품에 관계없이 인물을 발탁했고
고운 낭도들을 동원해 군사들을 위로했다
화랑은 정치군사적 행적보다 가족관계에 중점

그러나 각파 간에 암투,
가야파 성장이 흥미롭다.

법흥왕에서 무열왕에 이르는 시기는
삼국 대립, 신라 국가체제 정비 시기.

이로 인한 관습의 변동, 왕실의 계층분화
모권의 역할변동, 사회 계층간의 대립 시기.

등장인물은 총 138명에 달하는데,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골품에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大元神統)
대원신통 층이 진골정통보다 격이 낮았다.

삼국사기 神文王 원년(681년) 8월 8일 條를 보면
蘇判(제3위관등) 欽突, 파진판(제4위관 등) 興元,
대아찬(제5위관등) 眞攻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김흠돌은 가야계 김유신 사위이며, 신문왕 장인.
이 사건 여파로 흠돌의 딸 왕비 金씨를 폐위하고,
병무령(국방부 장관) 軍官은 자결, 화랑제도 폐지

주모자 흠돌은 27세 풍월주로서
김유신의 딸인 眞光의 남편이다.

반란집단은 김유신계의 화랑인맥이다.
화랑세기 김흠돌은 간악한 인물로 묘사

문무왕 말년 김유신의 사위인 김흠돌은
김유신의 위세를 업고 화랑 행정을 장악.
文明황후가 죽자 진골정통파로부터 견제

그런데 김유신은 673년, 그의 동생은 680년 사망
가야파에겐 기댈 언덕이 없어지자 가야파가 몰락
삼국통일전쟁에서 나름대로의 무공을 세운 인물들

흠돌의 숙청은 통일신라 왕권 확립의 희생물
삼국통일후 쓸모가 없어진 무관들을 제거한것
가야파 화랑 인맥은 정통 진골세력에게 큰 위협

그후 부활된 화랑제도
武士와 거리가 먼 得道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이었지만
실책은 사후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점
그는 가야파가 신라진골과 융화되길 바란듯.

그의 아들 원술은 김유신의 기대에 부응 못해
자연히 사위 흠돌에게 가야계 힘이 집결된 것.

흠돌은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했을 때
자신의 딸을 왕비로서 삼을 만큼 위세가 등등

가야파의 제거와 화랑제도의 폐지로 인해
통일신라 왕권 수립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신라의 군사력 약화과 정신력 해이에 기여


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 연구(硏究)

일제시대 南堂 朴昌和(1889-1962)에 의해 筆寫
왕실 모계혈통 제도는 여러 의문을 해명하게 될듯.

특히 두 갈래의 모계혈통이 신라지배층을 二元化
특히 三姓交立 등 姓氏問題, 部體制, 骨品制, 近親婚,
葛文王, 女王登極 등이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체제

신라의 모계문제는 단순한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兩大 모계집단이 결성한 하나의 체제, 즉 二部體制

1. 신라인이 혈통을 계승하는 주체는 母系.
2. 母系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3. 두 母系集團 "二部體制"가 왕실체제

4.大元神統은 6세기 金石文 喙部 훗날 朴氏姓.
5. 眞骨正統은 沙喙部이며 姓氏 사용기에는 金氏.
6.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母系로 전해진 金氏, 朴氏

7. 두 母系集團 최상층부가 交代로 王과 葛文王을 계승.
8. 葛文王은 왕을 배출하지 않은 모계집단에서 맡게된다.
9. 두 母系集團 중 수뇌 宗(여인)이 왕과 갈문왕을 낳는다.

10. 宗은 聖骨身分이 배출, 眞骨身分도 모계로 전승.
11. 中古期 末의 두 여왕도 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12. 모계체제는 김유신이 진골에 편입될 계기를 만든다.

13. 兩大 모계집단의 결합은 원시사회의 한 형태
즉, 모계(母系) 반족사회(半族社會)에 뿌리를 둔다.





갈문왕




신라 때 왕의 친척 대표에게 주던 직위이다.
갈문왕은 지배세력 내에 특수한 위치를 차지
왕과 비 호칭을 사용했고 따로 신하를 거느렸다

1.왕과 일정한 혈연 관계가 있어야 했다
(왕비의 아버지, 왕의 외조부, 왕의 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

2. 왕위 계승권에 있는 박씨, 석씨, 김씨
족장이나 집단의 가계 우두머리여야 했다.
갈문왕은 새로운 왕이 즉위한 해에., 책봉

3대 성씨는 갈문왕 책봉 때 다른 특징을 보였다.
박씨 대에는 주로 왕비의 아버지가 갈문왕을 했고,
석씨 때는 왕의 외할아버지나 왕의 아버지가 했다.

김씨는 대부분 왕이 동생이., 갈문왕.

갈문왕의 역할은 정확하게 나타나 있진 않지만,
왕의 행차, 귀족회의, 외국 사신이 방문할 시에
왕을 따라다니며 영향력있는 발언을 했던것 같다.

신라 갈문왕은 왕권을 강화에 목적이 있었다.
왕권 지지기반 대표에게 갈문왕 직위를 준 것
왕권이 강화되었을 때는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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