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71 ( 합천. 해인사. 경주. 불국사. 이차돈 )

donkyhote 2010. 11. 12. 03:24

 

합천.



철기문화 유래가 깃든 지명., 합천(陜川), 야로(冶爐)
합천은 가야산을 정점으로 불교신앙이 두드러진 고장.
아울러, 야로(冶爐)를 중심으로 하는 철기문화 발원지.

합천(陜川)은 강과 산 사이가 좁은.,쇠가 나는 마을
'합천의 고읍' 야로(冶爐)의 본래 지명은 적화(赤化)
적(赤)은 '클 大' + 불 火 합성어로서 제철소를 암시

야로(冶爐)는 쇠를 녹이고 연장 만드는 불무(제련)
적화(赤火) = 시벌(쇠벌) = 야로 = 풀무 = 대장간.
옛 쇠점들이 있던, 우두산(牛頭山) 우거리(牛巨里)

가야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곧 우두봉
가야(gaya)는 '소의 머리'를 의미하는 말.
석기시대 소를 조상 토템로 여겼던 가야인

철기시대 쇠(鐵)는 석기시대 당시 최고의 신소재
하여, 신소재 쇠를 소에 비유해 쇠라고 명명한듯.
옛부터 불이 자주 난다 하여 명명된 적화리(赤火里)

"우물 셋을 파고 매화리라 하면 화재가 없을 것이오."

지나가던 스님의 말 대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우물 셋을 파고 매화리(梅花里)로 개명을 하자.
그후부터 불이 나지 않았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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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국립공원과 해인사가 있는 경남 합천군.
합천읍, 봉산면·묘산면·가야면·야로면·율곡면·
초계면·쌍책면·덕곡면·청덕면·적중면·대양면·
쌍백면·삼가면·가회면·대병면·용주면 등
1개읍 16개면 192개 동리가 있다

군청은 합천읍 합천리. 면적 983.43㎢,
인구 60,397(2003), 인구밀도 61.4명/㎢(2003).


[연혁]


합천군(이조 때 합천군·초계군·삼가현).
옛 합천군은 지금의 합천군 중부와 북부,
초계군은 동부에, 삼가현은 서남부에 위치.

옛 합천군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565년(진흥왕 26) 대량주(大良州)를 설치했으며,
661년(무열왕 8) 압량주도독을 이곳으로 옮겼다.

통일신라 때 757년(경덕왕 16) 강양군(江陽郡)으로 개칭.
고려 현종 때 왕비 이씨 고향이라 합주군으로 승격되었고,
거창군을 속군으로, 삼기현·야로현 등 11현을 속현으로 관할.

1413년(태종 13) 이조때 합천군이 되어 계속 유지되었다.
1895년 진주부 합천군, 1896년 경상남도 합천군이 되었다.

1914년 하삼리면·상삼리면(일부)·두상면이 강양면으로,
봉상면과 삼가군의 계산면·모태면·옥계면이 봉산면으로,
대목면·양산면이 대양면으로, 용주면·가의면이 용주면으로,

심묘면·거을산면이 묘산면으로,
율진면·천곡면·초계군·갑산면이 율곡면으로,
현내면·하북면·상북면이 야로면으로,
숭산면·산어면·각사면이 가야면으로 통합.

이때 초계군이 폐지되고,
덕곡면은 그대로,
택정면·양동면이 초계면으로,
중방면·적동면이 적중면으로,
청원면·덕진면이 청덕면으로,
이책면·초책면이 쌍책면으로
통합·편입되었다.

또 삼가군도 폐지되고,
백산면은 그대로,
아곡면·현내면·문송면이 삼가면으로,
백동면·상곡면이 상백면으로,
서산면·덕지면·둔내면·중촌면·감한면이 가회면으로,
고현면·병목면·대평면이 대병면으로 통합되어 합천군에 병합.

1929년에 강양면을 합천면으로,
상백면과 백산면을 합해 쌍백면으로 개칭.

1979년 합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4년에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개통
해인사 및 가야산국립공원 교통이 편리


[자연환경]

소백산맥 영향으로 북쪽 서쪽이 험준 동쪽은 완만.
군의 북쪽에는 가야산(伽倻山 : 1,430m)·두리봉(1,133m)
깃대봉(1,113m)·단지봉(1,029m)·매화산(954m) 비계산(1,126m)

서쪽에는 두무산(斗霧山 : 1,038m)·오도산(吾道山 : 1,134m)
·숙성산(899m)·월현산(616m)·황매산(1,108m)·전암산(696m)
남쪽에는 미타산(662m)·천황산(655m)·만지산(607m)·산성산(741m)

주요 하천으로는 황강(黃江)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청덕면 적포리에서 군 동쪽의 창녕군 경계따라 낙동강에 합류,
그밖에 가야천(伽倻川)이 가야면·야로면을 남동향으로 흐른다.

군의 대부분 지역이 산간지대로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나
황강이 지나는 합천읍·율곡면·쌍책면·청덕면 일대와
초계면·적중면 일대의 분지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분포.

황강 범람을 막고 발전과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합천댐 건설.
댐의 건설로 형성된 합천호는 군의 서쪽 봉산면·대병면 일대
그밖에 박실지·정양지(正陽池) 등 소규모 저수지가 곳곳에 산재.

[산업·교통]

농업이 주업이나, 농공단지 조성으로 2·3차 산업 발달.
경지면적 168.50㎢(논116.53㎢, 밭51.96㎢ 경지율 17.1%)
쌀·보리,와 완초·인삼·잎담배·땅콩 등 특용작물이 생산.

완초라고 불리는 왕골은 율곡면·용주면·쌍책면에서 재배
합천군 유일의 토산민예품인 왕골제품(돗자리·방석)을 생산.
땅콩은 합천읍·봉산면·가야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재배

가야면 성기리 고령토 광산에서 연간 8,100t을 채굴(1995).

1995년 조성된 농공단지 입주 업체는 대부분 섬유업체이다.
고령토가 생산되는 가야면에는 도자기·식기류 공장이 많고,
야로면에는 생사공장, 합천읍에는 벽지제조공장이 들어서 있다.

군내의 큰 공장으로는 율곡면 임북리 농공단지에 있는
한국물산(주)·쌍방울(주) 있고, 그밖에 공장들은 영세.

교통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군북부 가야면·야로면을 동서로 통과
야로면 매촌리에 해인사 인터체인지. 진주-성주 국도가 관통,
창녕-남원 국도는 동서로, 대구-진안 국도는 동서로 횡단한다.

그밖에 지방도가 있어 군내 곳곳을 연결하며,
야로면에서 가야면의 해인사까지는 지방도로 연결.

[유물·유적·관광]

청량사석불좌상의 사각대좌(통일신라),
높이 210cm, 경남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반계제고분군, 봉산면 송림리 가야 무덤군.

봉산면 봉계리, 대양면 대목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합천군은 고령군과 함께 가야문화가 발달했던 곳,
곳곳에 가야시대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이 많다.

가야면 황산리의 청량사에는 청량사석등(보물 제253호)·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65호)·청량사3층석탑

야로면 월광리에는 월광사지3층석탑(보물 제129호),
대양면 백암리에는 합천백암리석등(보물 제381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
가회면 합천영암사지(陜川靈巖寺址 : 사적 제131호)

영암사지귀부(보물 제489호)·
영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영암사3층석탑(보물 제480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

초계면에 초계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7호),
야로면에 합천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8호),
삼가면에 삼가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

건축물

봉산면에 현산정(玄山亭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봉서정과 도촌별묘(鳳棲亭陶村別墓 : 경남 유형문화재 제235호),
가회면에 구음재(龜陰齋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야로면 정대리에 추본사·명곡사(경남 유형문화재 제264호)

그밖의 문화재

해인사에 광해군 내외 및 상궁옷(중요민속자료 제3호),
묘산면에 합천묘산묵와고가( 중요민속자료 제206호),
대병면에 송씨종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야로면에 경재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가회면에 추담선생문집책판 및 구산선생문집책판(경남 유형문화재 제210호),
대병면에 존양재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8호)·

화산세고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9호),
청덕면에 쌍청당실기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7호),
합천읍에 주자영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이 있다.

묘산면에는 합천묘산면의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
쌍책면에 합천배티세일동굴(경상남도 기념물 제70호)이 있다.

주요관광지로는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
이곳에는 우리나라 3대사찰로 유명한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에는 일주문 안에 명부전·삼성각·응진전·조사전·
퇴설당·응향각·관음전 등을 포함하여 50채가 넘는 건물.

가야산은 웅장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잘 조화된 빼어난 산.
특히 해인사에 이르는 가야천 주변의 협곡인 홍류동 계곡
계곡 물이 봄에는 꽃, 가을에 단풍으로 물들어.. 홍류동.

옥전고분군(가야) M3호분에서 출토된 말머리가리개,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

경남 합천군 가야면 영암사지 전경,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영암사지 전경,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영암사지쌍사자석등


[교육·문화]


합천향교·삼가향교·초계향교·간양향교·동산서당 등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대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신라의 죽죽장군의 얼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사생대회·
백일장·시조경창대회 등의 문화행사, 제기차기·줄다리기·
연날리기·그네뛰기·널뛰기·씨름대회 등등 각종 민속행사

덕곡면 율지리 율지나루는 경남 탈놀이 오광대 발상지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짚신밟기·쥐불놀이·윷놀이 등.

설화

〈이수대(李秀大) 인물전설〉·〈호박고개〉〈개비리전설〉
〈초계 오광대가면극 유래에 대한 전설〉 등이 전한다.


민요

<영화로세〉·〈각설이타령〉·
〈과부노래〉 〈모심기노래〉




해인사.



지리산 일대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찰.
지리산의 수많은 사찰이 해인사의 말사.
대원사를 비롯 쌍계사 내원사 벽송사 등.

신라왕실의 호국불교 정책으로 지어진 사찰들.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확립과 국토확장에 힘썼고
불교 국교화를 통해 민심 수습 및 통치질서를 확립했다.

①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 완성(554년)
② 사람들의 출가 공인(544년)
③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한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임명(551)
④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의 형식으로 계승 발전
⑤ 승관제를 확립하여 불교의 국교화,제도화에 주력
⑥ 황룡사 건립으로 신라 왕권의 신장 및 왕권 신성화

삼국 통일에 기여한 대표적인 승려로서는 원광법사.

불교적인 관점에서 큰 획을 긋고 간 인물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라 지배 권력층 이익을 위해 일했던, 귀족 승려
이런 경향은 원광뿐만 아니라 자장법사에게서도 나타난다.

자장법사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원광 이야기를 계속하자.
원광법사 하면 오늘날까지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속5계>.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세째,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 윤리와 무관한 왕실옹호의 윤리.
당시 신라 왕실 귀족계층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윤리이다.
원광의 임전무퇴 계율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정신적인 힘.

다음으로 자장법사에 관해 알아보자.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결정적인 시기에
신라가 불교와 무관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준 승려.
신라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역활을 했던 자장

선덕 여왕 때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 중흥에 기여
하지만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더욱 봉사한 사람
대국통으로서 전국 승려를 감찰하고 민중을 동원해 사찰 건립

신라 민중은 귀족불교의 위선에 대해 반대하며,
지배층 억압과 전쟁 노역에서 해방되기를 갈구

자장은 귀족 편에 서서 민중억압 수탈을 합리화.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민중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일깨우는 종교.
중국과 신라에 이르러 민중을 무시하는 종교로 전락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호국불교 정책은 계속된다.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지금부터 해인사로 찾아가서 그러한 사실을 살펴보자.

.................................해인사............................................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기슭 해인사.
국보 제 32 호 팔만대장경 소장한 국내 3대 사찰.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대사, 이정대사 창건.

1481년(성종 12)부터 8년 간에 걸쳐 사찰 규모를 확장,
창건 당시보다 웅장한 규모였는데 숙종 이후 여러번 화재.
이조 말 중건했고, 팔만대장경은 강화 선원사에 있었던 것.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최우가 창건, 송광사와 쌍벽이던 사찰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쇄퇴, 이조 초기 이후 폐허
1398년(태조 7) 선원사의 팔만대장경은 한양으로 옮긴 기록.

한반도의 북방불교는 발해, 거란, 고려로 이어졌다.
한반도의 남방불교는 '당나라, 송나라'로 이어진 맥.
한반도의 북방불교와 남방불교가 하나로 합쳐진 경판.
1251년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불교 문화의 결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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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1236~1251년(고려 고종 23~38년)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만 목판.
몽골의 병란을 맞아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국민이 일치 단결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칠 목적으로 만든 우리 민족의 유산.
경판 재질은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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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와 돌배나무는 원래 우리나라의 향토수종.
일본의 국화 벚꽃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 지역.
왕벚나무는 가벼운 목재라 왜로 건너가 무기 원료.
임진왜란 당시 조총, 칼 등의 무기 원료로 쓰였다.

고려창건 때 왕건을 지지한 지리산 일대 토착세력.
신라 말의 어지러운 상황속에서 정권을 쟁취한 왕건.
불교를 보호하고 많은 사찰과 탑을 건립해 불교 융성.

'불교세력 및 토착세력 확보를 위한 왕건의 전략.'

왕건은 수미산파 이엄을 왕사로 하여 선종 지도자들을 포섭 ,
화엄종 지도자 희랑의 협력을 받아 지방호족과 정략적 혼인
정치 세력을 통합한 것처럼 불교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후삼국 통합을 이룬 왕건의 절대적 지지기반은 불교세력
왕건은 정치 안정을 위해 연등회 팔관회 국가행사로 주관.

고려초 불교는 왕건 유지를 따라 국가통제 아래 있었다.
지방호족의 연합체인 고려 지배계층과 연결된 불교세력들
고려 말 서로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어 정치적 대립을 조장.

11대 문종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선교통합의 천태종을 개창
지방호족 세력 구심점 선종에 비해 천태종은 왕권강화 차원

하지만, 의천의 노력은 외척 세력과 결탁한 법상종에게 밀려
전라도 선암사 일대에 머물게 되고 이자겸의 난을 통해 분열
10 년 뒤 묘청이 난을 계기로 김부식등의 보수 세력이 집권

그 후 무신난이 일기까지 문벌귀족들과 불교는 극도로 타락.
세속에 물든 불교는 무신난 이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절대절명 위기에서 불교계는 정치와 분리하여 살 길을 모색

이때 등장한 '지눌'에 의해 불교는 본연의 수행으로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정치 불참론은 최씨 무신정권의 지지를 받게 된다.
지눌은 왕권강화 입장인 의천과 달리 대중불교 조계종을 개창.

군사정권 정치성이 농후하고 왕실 귀족 편에 선 천태종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깨달음을 중시한 조계종이 부흥.
무신정권 후원 속에 지눌이 창건한 송광사는 16국사 배출

송광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삼보사찰(三寶寺刹)
신라 말 혜린선사가 지은 작은 암자에서 비롯된 길상사.
지눌스님이 참선도량으로 삼은 뒤부터 승보사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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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는 행정구역상 지리산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합천군은 지리산의 유래및 전설과 밀접하다.
그 이유는 합천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고 산청군 이웃.
산청군 대원사 내원사 등등 사찰은 해인사의 말사이다.

가야산(伽倻山1433m)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해인사.
지리산 반야봉에서 가야산까지는 옛 가락국의 영역.
하여, 가야산에 관해 좀 더 알아 볼 필요가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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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칠불봉(1433)을 비롯, 상왕봉(우두봉 1430 )
칠불봉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성불한 7 아들'을 상징.
산정 주변이 온통 기암을 이루고 있는 영산(靈山)이다.

가야산은 김수로왕 7왕자가 3년간 수도한 곳.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친 허왕후 오빠 장유화상
허왕후가 7아들이 보고싶어 자주 찾았던 가야산.

장유화상은 수도에 방해가 된다며 7왕자와 지리산 행.
그곳이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

가야산 등산코스는 해인사 - 마애불 - 상왕봉 코스
백운동-용기골-백운암지-서성재-칠불봉 - 상왕봉 코스
두개의 산행코스만이 개발되어 있어 의외로 단조로운 편.

'두 코스를 연결하면 교통편이 불편한 것이 단점.'

그런 와중 산꾼들은 의외의 호젓한 산행을 즐긴다.
수도산(1317)-단지봉(1327)-좌일곡령-목통령-분개령-
두리봉(1133)-상왕봉(1430)-칠불봉(1433) 종주코스

의상봉(1046)-마령-깃대봉(1113)-두리봉-상왕봉 코스
북쪽 독용산-형제봉부터 종주하는 산행도 이따금 한다.

원점회귀 산행 코스로 백운동 깃점으로 하여 동성봉 능선.
칠불봉-상왕봉-서성대-만물상 능선 코스가 매력적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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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에서 큰절 해인사 선방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성철스님이 큰절에 법문을 하러 갈때 오르내리신 길.

"스님. 이 길을 좋아하시는 까닭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자기 길이 있겠지...
그리고 이 길 저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 길은 세상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다."

성철스님은 평생 한길을 가셨다.

백련암엔 출가하겠다고 왔다가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말 없이 떠나간 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는 나이 일흔을 넘기고, 여자는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중노릇을 제대로 하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게 된다.”

시자가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스님은 아십니까?”
한참 시자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나도 아직 모르지.”


1912년 임자년 4월 10일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합천 이씨 이상언씨 강상봉씨 일곱 남매중 장남
성철 스님의 속세에서의 이름은 영주(英柱)였다.

"우리 마을에는 짖꿎은 개구쟁이가 하나 있었지.
돈 필요하면 동네 떠나가게 아버지 이름을 불렀지
그러면, 그 부모는 동네가 부끄러워서 돈을 주셨지.
그 아이는 그 돈으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는 했제."

그 개구쟁이는 뒤에 알고 보니 바로 성철스님 당신.
아마 개구쟁이 시절 읽기 벅찬 책들을 사려 떼쓴 듯.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성철스님이 남긴 유명한 법어.
191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스님.
1930년 진주 중학 졸업, 결혼후 스님될 결심

생가에서 멀지 않은 대원사를 찾아간 성철스님.
불가 예법도 모르며 들어선 비구니 사찰 대원사.
속복을 입은 채 대원사 방 한칸을 차지하고 수행

느닷없이 나타난 기인 때문에 난리 난 대원사.
본사인 해인사까지 이인이 나타났다고 난리법석.
결국 해인사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신 성철스님.

1935년 인연을 맺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말년을 보낸 성철스님.
10년간의 장좌불와, 묵언 등 온갖 수행에 빈틈이 없던 성철스님.
기존 불서의 해석은 물론 영,독,일,중국어 등 5개 국어에도 능통

현대물리학,심리학,심령학 등
학문에도 일가견을 이룬 스님.

수행하는 일 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 스님.
성철 스님을 만나려면 누구나 예외 없이 3천배
해인사는 열반한 성철스님 다비식을 거행한 사찰.

1993년 11월4일 '살아있는 생불, 성철스님 열반.

해인사 성철스님 다비식을 백련암에서 맞았던 불필스님.
세속의 눈물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불필(不必)은 성철스님이 유일한 혈육 딸에게 지어준 법명.

반야봉에서 합천 해인사까지는 한반도 불교의 산실.

가락국에서부터 신라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불교문화.
이조시대 억불정책에도 굳게 불교의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성철 스님이 초대 방장을 지내신 사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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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소장한 우리나라 3대 사찰 중의 하나.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창건.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연유되어 법보종찰로도 유명.

고려 태조는 고려의 국찰로 삼고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이 절에 묵던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보답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 지정된 팔만대장경.
1398년 이조 태조 7년 강화 선원사에서 지천사 이듬해 이곳.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 구광루등 문화재 암자들이 즐비.

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팔만대장경판을 봉안
법보사찰로, 조계종 종합수도도량 해인총림이 있는 곳이다.

통도사(通度寺), 송광사(松廣寺)와 더불어 한국 3보사찰.
해인은 창건주 순응이 화엄경 해인삼매에 근거를 둔 이름

삼라만상 고요한 바다에 번뇌가 끊어진 부처의 정심(定心)
만법의 실상이 바다물에 비치듯 명료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천명하고자 이루어진 도량.
신라 말기 승통(僧統)인 희랑(希朗)이 불법을 크게 일으켰고
고려 건국 후 국찰로 지정되었고 의천이 속장경(續藏經) 간행

1481년(성종 12)부터 8년간에 걸쳐 사찰규모를 확장하였는데,
창건 당시보다 웅장했는데 임진왜란에도 잘 보존되어 왔었다.
숙종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조 말기에 중창.

50 동(棟)에 이르며, 말사(末寺) 75개와 부속암자 14개가 있다.
장경각은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둔 2개의 판전으로 경판을 보관
경판제작은 물론 보관방법 또한 과학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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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홍류동 계곡에 위치.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4km의 홍류동 계곡.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홍류동 계곡.

최치원 선생이 갓과 신만 남겨놓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
그 전설을 말해주는 농산정과 선생의 시를 새겨놓은 바위.
특히 농산정 맞은편에 암각된 최치원 선생의 친필이 유명.

1966년 6월 1일 수년간 전국의 석탑 전문 도굴범 검거기사.
이 때 검찰에서 압수했던 물품 가운데 의외의 유물이 발견.
해인사 입구 길상탑에서 꺼낸 벽돌판에 새겨진 최치원의 문장.

길상탑은 895년(진성왕 9) 7월에 전몰자 명복을 빌기 위해 탑
889년(진성왕 3) 전국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삼국사기 기록.
이후 신라는 혼란기라 굶주린 농민들이 초적이 되어 사찰을 습격.

해인사는 자체 무장력으로 이를 막다가 그 와중에 수십 명이 희생.
혼란이 잦아들 즈음 해인사외 몇몇 사찰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행사

최치원이 쓴 문장에서는 병란과 흉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악(惡) 중의 악이 없는 곳이 없고, 굶주려 죽거나 전란으로 사망한 해골이 별처럼 들판에 흩어져 있다.", "하늘과 땅이 혼란에 휩싸이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었다.", "사람들이 향배(向背)를 잊고 행동하는 것이 사나운 맹수와같다."

당시 농민들의 습격대상이 된 사찰은 해인사만이 아니었다.
강원도 사찰들도 초적의 습격을 받거나, 승려들의 피난 흔적.
그당시의 사원이 많은 토지와 재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신라 왕실 후원으로 창건된 절.

'해인사가 당시 초적들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당시는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재위시절.
신라 역사상 3번째 여왕이자 화랑들과 염문을 뿌린 여주인공.
숙부 위홍과 진성여왕에 얽힌 사랑은 오늘날 시각으로는 불륜.

하지만 당시 신라의 지배층 사회는 근친혼이 일반적이었다.
어머니와 아들, 형제자매 아니면 친인척 누구와도 혼인 가능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 사이에서 난 딸과 결혼했다.
다시 말해 김춘추는 김유신의 처남이면서 장인이기도 한 셈.

신라의 근친혼은 유교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해못할 패륜.
진성여왕은 공주시절 원화였기에 화랑들과의 염문도 관습.
특히, 신라 말 왕실의 성풍속도는 그당시의 세습적인 전통.

당나라 유학파 최치원은 신라 풍습이 어지럽게 느껴졌던 듯.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내며 이상향 청학동을 찾는다.
하여,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에는 최치원이 남긴 흔적이 많다.

해인사와 홍류동 계곡을 품은 가야산은 덕산도립공원 일부
차령산맥 줄기로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이다.

신라 때에는 가야산사를 짓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곳.
이조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 가을로 제를 올렸던 곳.
가야산은 김해 하동이 영역인 가락국의 상징적인 산이다.

가야산에서 반야봉까지는 가락국 영역이자 불교 권역.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문화는 찬란하게 계승.
이조시대에는 억불정책과 아울러 강력한 산림보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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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야문화권에 속한 영.호남지역의 10개 시군들
2005. 6. 3일 가야문화권 지역발전.혁신 광역협의회'
창립총회를 갖고, 공동발전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날 모임에는 경남 창녕.함양.산청.거창.합천군과
경북 고령.성주. 전북 남원시.장수군, 대구 달성군
10개 시.군 관계자들이 고령군 유병규씨를 의장 선출.

가락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 명맥은 살아 숨쉰다.
옛 가락국 영역에서 오늘날 지역장들이 모임이 뜻 깊다.




경주.



신라의 천년 문화유산과 동질성을 고히 지켜온 경주.
1995년 전형적인 농촌지역 경주군과 통합시를 이뤘다.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양북면·양남면·
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
노동동·서부동·동부동·북부동·성동동·황오동·

노서동·성건동·석장동·사정동·탑정동·율동·배동·
황남동·인왕동·교동·서악동·충효동·효현동·광명동
동방동·도지동·남산동·평동·구황동·보문동·배반동·

황성동·용강동·동천동·구정동·시대동·시동·조양동·
진현동·마동·하동·천군동·신평동·북군동·손곡동·
덕동·황룡동·암곡동 등 4개읍 8개면 44개동 시청 노동동

면적 1,319.73㎢, 인구 282,955(2003), 인구밀도 213.7명/㎢(2003).


[연혁]

진한 중심지, 신라 수도 경주는 우리나라 최대 유적지.
경주시 전역에서 발견된 수많은 사로국의 청동기 유물들
사로국은 신라의 전신이며 경주 6촌에서 성장한 고대국가.

57년 6부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
나라 이름을 서라벌, 65년(탈해왕 9) 국호를 계림
307년 또는 503년 신라는 삼국통일 후 신라로 존속.

935년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
경순왕 식읍, 경순왕은 경주의 사심관이 된다.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했다
987년 동경(東京)으로 개명.
1012년 경주 방어사로 강등,
1015년 안동대도호부로 개칭
1031년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202년 경주야별초 반란때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
1219년 동경으로 환원되었고 1308년 계림부윤으로 개명.

1413년 경주로 정해졌다.
1415년 병마절도사영 터.
1417년 울산으로 이전했다.

1637년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독립했다.
별호는 금성 월성 낙랑 금오 문천 이었다.

1895년 대구부 관할이었다
1896년 경상북도에 속했다.
1931년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

1955년 경주읍 내동면, 천북면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고 1989년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환원.
1995년 경주군과 통합되어 경주시라는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뤘다.


[자연환경]

태백산맥 지맥인 동대산맥(東大山脈)과 단석산맥(斷石山脈)
경주시 동쪽은 해안지역, 중앙은 분지지역, 서쪽은 산악지역

해안지역은 급경사를 이루어 하천이 짧고 평야가 적다.
중앙은 토함산(745m)과 금오산(495m)에 둘러싸인 분지.
서쪽은 도덕산(703m) 구미산(594m)·주사산 단석산 등.

서면 인내산 동쪽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포항 지나 동해
복안천·남천·소현천·신당천·기계천이 형산강에 합류.

금오산은 도깨비바위 고깔바위 탁자바위 등 핵석(核石)
인천(麟川)은 울산광역시 백운산(白雲山)에서 발원하여
건천읍 대천(大川)과 남천(南川)과 합류하여 서천(西川)

이는 다시 덕동호 보문지를 거쳐 북천(北川)과 합류하며,
어림산에서 발원한 현곡천과 합류해 형산강 본류를 이룬다.

경주평야 중심으로 내남·건천·안강 등 비옥한 평야
신라 천년 문화의 바탕이 되었고 기후는 대륙성 기후


<보문호>

금오산, 경북 구미시와 칠곡군 북삼면, 김천시 남면 경계
경주시 덕황동·불국동과 양북면 사이에 있는 토함산 앞.


<교통>

우리나라 제1의 관광도시로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
교통은 경북·충북·강원도와 청량리로 이어진 중앙선
포항·울산·부산을 연결하는 동해 남부선이 교차한다.

3개 국도가 경부고속도로와 연결 전국 각지와 연계 양호.
승용차로 부산까지 1시간, 서울까지 4시간 반 소요된다.


<유물·유적·관광>

강동면과 천북면 일대 선사시대 고인돌 밀집
1968년 이후에 지정된 경주국립공원 8개 지구
남산·서악·화랑·소금강·토함산·단석산·대본·
구미산 지구가 있고, 남산은 그 자체가 노천박물관

무열왕릉(사적 제20호)·괘릉(사적 제26호)·
문무대왕릉(사적 158호)·오릉(사적 제172호)·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 등.

불교문화재

불국사·석굴암과 남산 일대의 유적이 대표적이며,
분황사(芬皇寺)·백률사(栢栗寺)·기림사(祇林寺)
황룡사지(사적 제6호)·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감은사지(사적 제31호) 등의 절터와 유물 유적.


구황동 3층석탑(국보 제37호)·나원리 5층석탑(국보 제39호)
정혜사지13층석탑(국보 제40호)·서악동마애석불상(보물 제62호)·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골굴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

월성(사적 제16호)·임해전지(사적 제18호) 성 및 궁궐터,

첨성대(국보 제31호)·계림(사적 제19호)·포석정지(사적 제1호)
'아사달 아사녀 전설의 고향' 영지, 천도교 성지인 용담정(龍潭亭)
이조시대 유물·유적으로 경주읍성, 옥산서원, 석빙고(보물 제66호)

경주는 전설에 얽힌 3기8괴(三奇八怪)가 널리 알려졌다.
민속놀이로 사자놀이·풀놀이·관등놀이, 추석 가배놀이
양동마을 줄다리기 호미씻기, 용왕을 모시는 별신굿 등등.

'풍신 영등 할머니 전설과 관련된 음력 2월 영등(靈登).'


민요

〈지신밟기노래〉·〈보리타작 노래〉〈모내기〉
〈방아타령〉·〈베틀노래〉·〈항굴래비노래〉
〈어사용〉·〈경주고적가〉 등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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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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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김씨의 양대 산맥은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따라서 거의 모든 김씨는 두 김씨 중 어느 한쪽에 뿌리.
그러나, 두 김씨는 성은 같지만 그 뿌리가 전혀 다르다.

김해 김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시조인 반면
경주 김씨는 신라의 왕성인 김알지가 그 시조다.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 3성 박. 석. 김 가운데 하나.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도 김수로왕처럼 탄생설화가 전해온다.
김알지는 서기 65년 신라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시림
(계림의 다른 이름)의 나무 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출생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여 성을 김으로 했다고 한다.
김알지 후손 미추가 13대 왕에 오르며 신라 왕성(王姓)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넘길 때까지 56왕 중 38왕을 냈다.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
마의태자로 알려진 큰 아들 김일
셋째 아들 영분공 김명종과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 바로 경주 김씨.

신라왕실 후손인 경주김씨는 신라가 망했어도
고려조에서 최고 문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는다.

왕건은 큰 딸을 김부(경순왕)에게 부인으로 주고,
김부는 백부 딸을 왕건의 후비(신성왕후)로 보낸다.

두 나라 왕실간에 정략결혼.

김부의 사위인 경종과 신성왕후 소생인 안종의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올라 더욱 굳게 된 고려의 경주 김씨.
현종의 후손으로 이어진 고려왕실은 신라 왕실 외손

김부식은 경주김씨 인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그는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진압한 장군으로도 유명.
김부식은 1134년(인종12년) 묘청이 도참설로 왕을 설득
고려가 서경에 천도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 중지시켰다.

이듬해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출전 10개월만에 난을 평정한다.

그는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났다.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을 때
문장과 음악에 통달한 그에게 감탄.
그 뒤 <고려도경>에 그가 소개되어
송나라 황실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 삼국사기를 만든 것이다.

경주김씨 후손 중에서 스님 일연도 빼놓을 수 없다.
9살에 무량사에서 출가해 22세에 깨달음을 얻는다.

남해 정림사에 있으면서도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
늘 함께 하기를 바랬고 승려 최고의 영예인 국존.
그러나 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다녔다.

일연은 1백여권 저술을 남겼다고 하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삼국유사 뿐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 이전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

특히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대신화, 전설, 민속, 사회, 옛말 등
금석문이나 고서적에서 인용해 전해준다.

특히 향가 14수는 다른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것.

추사 김정희는 이조 후기 대표적인 이름 높은 인물.
순조때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참판 등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 독특한 추사체를 이뤘다.

특히 예서, 행서에는 전무후무한 경지를 개척했다.
그림은 죽란과 산수에 능했으며 특히 남종화의 전통.
저서로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안록”,
“표장재시고“ 등 서화로 ”묵죽도“, ”묵란도“ 등

윤상도의 옥사 연루 등으로 13년간 유배생활
정치적 파란을 겪기도 했던 경주 김씨의 인물.
구한말 개화파 갑오경장 주역 김홍집도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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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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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을 만들때 김대성은 백제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정성을 쏟는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남편 일이 무사히 끝나 다시 만날 날만 고대하던 아사녀

그리워 불국사로 찾아왔지만 만날 수 없는 남편.

탑이 완성되기 전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
천리길을 달려와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던 아사녀.
날마다 불국사 앞을 서성거리며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그녀에게 지혜를 빌려준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빌면 탑 그림자가 못에 비칠 날이 올 것이오.
그러면, 탑 공사가 끝난 후라 남편도 만나게 될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못 수면에는 탑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그녀가 남편 이름을 부르며 몸을 던진, 영지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달려갔을 때 아내는 그곳에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 모습이 홀연히 앞산 바윗돌에 겹쳐보였다.
아내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 같았다.

아사달은 바위에 아내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지 안내판 : 아사달도 못에 뛰어 들어 죽었다)

먼훗날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불렀다.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 = 무영탑

정말 그립고 보고 싶어,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머리 속에 겨우 떠올리면 금새 바람결에 흩어지고,
잊자고 고개 흔들면 안개처럼 뿌옇게 다가서는 얼굴.

그래서 가슴에 새기지 못하는 그 모습.
가슴에 새겼더라도 밤마다 흐르는 눈물
그 눈물에 젖어 가슴속에서 흐려지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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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의 고향, 불국사.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
그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

신라 불교의 핵심으로 1,440년전 법흥왕 22년에 창건.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세워진 불국사.
그후에 경덕왕(742-764) 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중창.

임진왜란 때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까지 일부 건물과 탑만 퇴락한 채 남아 있었다.
그후 지속적인 복구 및 보수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


<불국사 일주문> <석굴암>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km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 본존불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유명한 석굴암이다.

불국사.석굴암은 1995.12.6 세계 문화유산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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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法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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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23대 왕(514~540 재위).
이름은 원종(原宗). 아버지는 지증왕.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

법흥왕 때 신라는 지증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대내 체제정비와 대외 영역확대를 계속했다.

대내적인 면에서는 516년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하고,
이듬해 군사업무를 관장하는 중앙 관서인 병부를 설치.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 등급을 표시하는 공복(公服)을 제정.
이때 율령의 내용은 17등 관등제와 골품제, 그리고 형벌에 관한 것

531년 국왕이 귀족회의 주재자 역활을 했던 위치에서 탈피
536년 신라에서 처음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
538년에는 지방관이 가족과 함께 현지에 부임하는 것을 허용

522년 이찬 비조부 여동생을 대가야에 시집보내 백제를 견제
524년 남쪽 국경을 순행해 영토를 넓히며 금관가야 왕과 회견.
532년 금관가야 국왕 김구해(金仇亥) 항복으로 금관가야를 병합.

'법흥왕 때 가장 중요한 조치는 불교의 공인.'

5세기 후반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귀족들 반대에 직면.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과의 타협하에 불교를 공인
불교가 집권체제를 받쳐주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다.

법흥왕은 만년에 불법에 귀의
법호를 법운(法雲)이라고 했다. 



이차돈(異次頓). 



~527(법흥왕 14)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신라 법흥왕은 늘 불교를 일으키려 하는 마음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왕과 함께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려 했다.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비록 제가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나이다" - 이차돈.

하여, 이차돈은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건립한다.
신라 귀족들의 반대를 꺽으려 이차돈은 순교를 결심.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지만 의리를 일으키려 한다.
부처가 신통력이 있다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금강산(경주 북쪽)에 떨어지고
그의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치솟아났으며,
주위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 기묘한 꽃들이 내려오며 땅이 진동.

귀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금강산에 장사.
귀족들은 이후부터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이라고 맹세.
이후부터 신라에서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당시 이차돈은 22세 또는 26세로 전해온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529년 살생금지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
544년(진흥왕 5) 완성했고 사찰 건축 재목을 천경림에서 구했다

'천경림은 수목이 울창해 재래 신앙이 행해지던 장소.'

신라불교의 공인과정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차돈의 순교 전에도 불교를 전파하려 했던 묵호자 아도화상.
신라 귀족들의 재래신앙 옹호에 부딪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데 적극 활용된다.
이차돈의 순교 전설은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
그이 순교후 왕실 내인(內人)들 명복을 빌기 위한 자추사

'이곳에서 치성 드리면 대대로 영화를 얻는다는 자추사.'

817년(헌덕왕 10) 그의 순교장면을 새긴 6각석당(六角石幢)
경주 백률사(柏栗寺)에 세워졌고 석당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법흥왕과 왕비 부부는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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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불교는 해로 또는 육로를 통해 들어왔다.
인도에서부터 오랜 세월 동쪽으로 전파되어 온 불교.
그 나라 전통과 풍습과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


<고구려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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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가운데 제일 먼저 불교를 공인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372년(소수림왕2) 고구려 왕실에서 국교로 선포했던 불교
이 무렵 소수림왕은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했다.

374년에는 진나라 승려 아도(阿道)화상이 고구려에 왔다.
375년 봄 소수림왕이 건립한 성문사와 이불란사(伊佛蘭寺)
이 두 사찰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인 것으로도 알려져왔다.

391년(고국양왕8)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
고구려 왕이 교칙을 내려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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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해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한 때문.

전란에 동요하는 민심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
지배층은 반야사상과 정토신앙으로 민중의 저항의식을 눌렀다.
하여, 백제 왕실에서 불교 교리를 왜곡해 적극 보급하였던 것.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 - 392년(아신왕 원년)

백제왕은 민중들에게 불교를 대대적으로 권장했다.
그후 170년간 백제는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 쇠퇴.
하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동안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 편찬 업적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날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
실천불교로서 민중 속에 정착한 결과.

당시 민중에게는 미륵신앙이 뿌리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지지 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해
민중적 계율실천이 가능했던 것 같다.

<신라 불교>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특징은 호국불교란 점.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의 불교는 활짝 꽃핀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지리산은 불교의 성도가 된듯.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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