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內侍).
이조시대 주색에 빠진 연산군이 즐겼던 처용무
처용무 중지를 간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던 김처선.
판내시부사 김처선은 환관 출신 가운데 최고의 충신.
그를 미워했던 연산군은 김처선이란 이름 사용 금지령.
같은 이름은 다 고치게 했고 '처(處)' 자도 사용 금지령.
또 모든 공문서와 민간의 문서에도 처’자 사용을 금했다.
반면, 연산군을 주색에 빠지게 하여 총애를 입은 내시.
김자원(金子猿)은 ‘조선왕조실록’에 간신으로서 기록
은평구 진관내동 중골마을
이사문공파 내시 분묘 45기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버려졌던 무덤
후손이 내시 조상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없어지거나 훼손된 것이 많던 내시 무덤.
하지만. 왕을 섬기는 궁궐 내 최고의 고위관직
하여, 동네에서 가장 큰 어른 대접을 받던 내시.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존재까지 잊혀져갔던 내시.
신체적으로 불구였지만 분명 가문을 이뤘던 내시.
양자를 들여 후손을 이어갔기에 형성된 내시가문
경복궁 바로 옆 현재 효자동에 해당하는.. 내반원.
중국 내시에 대한 기록은 3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내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첫 등장.
당시 내시는 신성한 존재와 속세를 이어주는 중간자,
거세를 통해 욕망을 극복한 자들로서
황제의 신성함을 높이기 위한 존재였다.
궁형이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사설 양성소.
거세를 하고 내시가 되려는 희망자가 많았다.
궁중 내의 많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던 내시.
정치적 혼란기에는 국사에 관여될 여지가 많았다.
특히 극비에 속하는 정책, 간첩, 국제첩보.
부를 축적할 기회도 많았던 왕실의 재산관리
각종 국가 공사는 내시가 맡아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목숨걸고 선조를 구한 내시 김계한
그 공을 인정해 공신에 봉하자 반대하는 상소들.
공을 세워도 내시라는 이유로 무시되는 경우 태반
역사는 그들을 비하하고, 분란 행적 만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조시대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내시들
그들에 대한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할듯.
내시는 천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변형된 역할은 현재도 여전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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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를 따라 이조로 건너와
망국의 한을 품고 죽은 궁녀 굴저.
조국이 멸망하자 자살한 명나라 궁녀
고양시 덕양구 대자2동 간촌마을 묘.
원래 내시마을 화자(火者)동이 현재 효자동.
은평구 갈현동에 퇴직한 궁녀들이 살던, 궁말
궁궐에서 궁녀와 함께 왕을 섬긴 고위관리 내시
내시는 왕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는 고위관료였고
환관은 원래 내시보다는 아래 직급의 사람이었다.
이조시대부터 내시와 환관을 뭉뚱그려서 사용했다.
고대 중국에서 패전국 지배층 포로는 왕실 노예.
남성을 거세한 후에 승전국 왕실 노예가 된 내시.
패전국 궁녀는 승전국의 병사들을 위로하는 관기.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이 있는지
사마천도 인위적인 거세를 당한 사학자로 알려졌다.
중국 명나라 때는 거세한 환관 신청자가 무려 2만명
그들은 스스로 환관이 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환관은 왕과 가까운 사람이라 권력 잡기가 매우 쉬웠다.
삼국지에 십상시 권력자들은 많은 권력을 장악했던 내시.
중국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내시들을 보내달라 요구했었다.
고려 내시들은 원나라 황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고려에서 공출되는 궁녀에 관해서도 깊숙하게 관여했다.
내시는 왕명을 전달하기도 하고 궁중 궁녀들을 관리했다.
내시가 담당한 일은 궁궐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심부름으로 국왕 측근에서 일하기에 엄격한 자격이 요구.
왕실 측근에 있음을 기화로 경제적인 이권(利權)을 챙겼으며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국사를 좌우하는 폐단도 많이 있었다.
하여, 환관 제도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의 환관.'
여성처럼 피부가 희고 깨끗하지만 말씨나 행동도 여성스럽다.
환관은 감성이 예민해 눈물도 많고 공포도 많이 느끼는 편이다.
환관은 거세한 후부터, 여성 호르몬이 증가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일을 맡아 보던 관원.
재예(才藝), 용모 뛰어나고 시문,·경문(經文)에 능통한 문신
고려 말 의종 이후, 원(元)나라를 섬기며 환관은 천시의 대상.
이조시대 내시부 관원에 속하는 환관.
내시부에 속해 '내시'라 부르기도 했다.
환관은 그리스어 유너크(eunuch)는 '침실을 지키는 사람'
고대 그리스에서는 환관을 중요한 교역품으로 사고 팔았다.
소아시아의 에페소, 리디아 왕국 사르데스(현재 : 터키 서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상인에게 비싼 값에 판 미소년 내시.
페르시아의 달리우스 왕은 거세 소년 500 명 헌납을 강요.
기원전 6 세기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 조공한 기록.
19세기 교황 레오 13세 금지령 전까지 유럽의 거세한 소년들.
그전까지는 주로 소프라노 가수의 조달 창구로서 이용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맥이 끊긴 후에도 중국은 환관제도가 지속.
우리나라 내시에 대한 최초 기록은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환관내시'였고 1894년 갑오개혁까지 내시 제도가 있었다.
환관 관직은 종2~9품, 대내감선, 왕명출납, 수문, 소제 등이 업무.
일반 관료처럼 궁 밖에 살며 출퇴근했고 결혼해 가정도 이루었다.
단,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여 거세하여 환관의 계보를 잇게 하였다.
환관은 왕실의 측근에서 일하기에 엄격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궁녀들과 항상 접촉하며 일하고 궁궐에서 숙식을 하기 때문에
불미한 문제를 일으킬 여지를 아예 없애려고 거세를 하는 조건.
이들은 내정 규율, 논어, 중용, 사서, 소학, 삼강행실을 익히고
35세가 될 때까지는 시험을 거쳐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직위 높은 내시들이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며 모여 살았던 화자동.
환관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란 뜻이 화자동이며 화자는 환관의 별칭.
궁궐 밖에서 효자동과 강남 잠실에 가면 간혹 환관을 볼 수 있었다.
잠실은 양잠단지 일꾼이 모두 여자라 감독관으로 환관을 파견했다.
내시 중에는 궁궐 내에서 상주하는 잡부 내시들도 많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심부름.
업무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이들은 항상 궁궐에 거주한다.
잡부 내시는 대부분 궁녀들과 함께 일하고 궁궐에 상주했다.
내시 중 일부는 권세와 부를 누리려고 거세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 말기에 환관들이 득세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 이조에서는 그 횡포를 막으려고 정치 참여를 금했다.
품계는 종2품까지 있지만, 당상관(종3품) 이상은 왕이 임명.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하급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첩 대부분이 왕실 측근인 환관에게 잘 보이려는 명문가의 딸들.
환관은 거세를 하였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어 양자를 들여야 했다.
가문을 잇고 제사를 지낼 목적과 자식 키우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그당시 일반인은 양자를 가문 내의 동성에서 들이도록 돼어 있었다.
그러나, 환관에게는 다른 성씨의 양자도 들일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환관의 가문은 대대로 거세를 했기에 동성 양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관은 왕과 왕족의 수라상 감식, 궁중경호, 어명전달, 어전청소.
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 또는 경호실에 해당하는 곳이다.
환관은 궁중의 부정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고환을 제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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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이 없는 내시는 정관(定款.精管)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발기(發起,勃起)가 되지 않아, 정사(政事,情事)를 벌릴 수 없고
사정(司正,射精)하려 해도, 난관(難關,卵管)을 극복 못할 것이다."
내시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왕에게 상소를 올리자
왕이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변한 말이다.
내시는 발기인이 있을 수 없어 도장찍을 정관이 없다.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어디가서 사정할 수도 없다.
어려운 일이나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 결성을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내시는 성생활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일까?'
환관들은 거세를 했어도 궁중에서 정사를 벌린 사례가 많다.
거세를 했어도 완전히 남성 기능이 제거되지 않은 때문이다.
3∼4일간 굶어 노폐물을 제거 후 거세수술을 해 감염을 예방.
수술할때 고추를 끓인 물로 마취후 음낭과 음경을 잘라냈다.
잘라낸 상처 부위에는 찬물에 적신 흰 종이를 덮어 지혈했다.
만약 요도가 막히는 경우가 생기면 그저 죽는 날만 기다렸다.
중국에서는 초기에 거세 기술자를 양성한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환관제도 초기에 열명 중 아홉명이 사망한 탓.
무지막지한 절단식 시술과 달리 정교한 시술법을 개발했다.
이조에서는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에서 시술했다는 구전.
아직도 그곳은 내시를 대대로 배출한 마을로 알려져있다.
소년을 거세해 환관 가문에 양자를 주로 보냈던 내시 마을.
거세수술 중 목숨을 잃어도 수술 담당자는 처벌 받지 않았다.
죽음을 무릎쓰고 내시가 되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정상적인 행위가 불가능해도 궁녀 또는 비빈들과의 은밀한 정사.
음경이나 고환을 절제 당해 성적 기능을 박탈 당했던 내시들
궁녀나 비빈들에게 내시는 안전 잠금장치가 있는 대상이었다.
서로 몰래 만나 다양한 방법으로 욕망을 해소한 경우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박탈당했던 인간다움을 되찾으려는 금지된 불장난.
비록 정상적인 관계는 갖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뜨거웠을 듯 싶다.
하여, 내시와 궁녀는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렸던 사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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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에서는 궁궐 밖에 거주하는 환관은 결혼을 허용.
환관은 궁중 내관으로, 환시(宦侍) 등으로 불리웠다.
후천적 환관은 권력과 부를 잡으려고 거세
또는 죄를 짓거나 전쟁포로가 붙잡혀 거세
내시는 팔다리가 길어지고,
어깨는 좁고 골반은 넓어지며,
등은 구부러져 척추가 후만된다.
대퇴부는 지방질이 많아져 통통하지만
쉽게 피곤해하고 골다공증이 쉽게 온다.
솜털은 있으나 수염이나 음모는 나지 않고
수염이 있던 남자도 거세한 후에는 없어지고,
거세를 하게되면 음성은 여자 음성처럼 변한다.
성욕은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으나 체취가 심하며,
갑상선 기능은 낮고 저혈당, 저혈압, 빈혈 갱년기
고금소총에 어떤 내시의 부인이 외간남자와 간통하여
임신하자, 남편 내시에게 대나무관을 착용케 하고 성교
대나무관을 통해 임신하면 대를 이을 것이라고 속여 관계
내시는 자기의 아이인 줄 알고 자랑하고 다니자
주위에서 아이의 성을 죽씨(竹氏)라고 불렀단다.
왕녀(王女).
왕의 딸 중 적녀는 공주(公主),
서녀는 옹주(翁主)라고 부른다.
이조 초 왕의 딸과 후궁은 모두 궁주(宮主)
태종 대에 후궁과 왕의 딸을 구분하기 시작
왕의 딸에게도 적서의 차별을 적용되게 된다.
원래 옹주는 후궁이나 대군 부인에게 주어진 칭호
하지만 세종 때 내명부 외명부에 대한 칭호법이 확립
옹주는 왕의 서녀를 부르는 칭호로서 굳혀지게 되었다.
공주와 옹주는 품계가 없는 외명부의 무품 작위
궁중에서 자란 뒤 궁밖으로 시집가기 때문에 외명부
공주와 옹주 외 세자의 딸 군주(君主)와 현주(縣主).
군주와 현주는 정2품과 정 3품 上 작위를 각각 받았다.
왕녀들은 통상적으로 대개 13살을 전후하여 결혼
왕자들 혼례와 마찬가지로 왕녀 결혼 때도 금혼령
몇명의 부마 후보를 택해 왕과 왕비가 최종적 선택
대개 부마는 정치적 이해 관계를 통해 내정되곤 했기에
공주와 옹주는 정치상황에 따라 처지가 급변하기도 했다.
왕녀지만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
왕녀의 운명은 시가 보다는 친정의 처지에 더 크게 좌우
시가 혈족들이 몰락해도 왕녀들은 대체적으로 신분을 보장
그러나 친정이 몰락하는 경우에는 목숨 부지에도 힘든 지경
예를 들어 문종의 딸 경혜공주는 동생 단종이 쫓겨난뒤
남편은 사약을 받아 죽고, 그녀는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
이밖에도 성종의 서녀 공신옹주는 어머니 귀인 엄씨가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를 내쫓는데 가담한 죄로 죽었다.
성종의 또 다른 서녀인 정혜옹주도 같은 사건으로
어머니 귀인 정씨의 죄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노예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딸들도 서인으로 전락해 살았다.
중종과 경빈 박씨의 딸인 혜순옹주는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으로 죽자 서인
그녀의 동생 혜정옹주도 남편을 잃고 서인.
왕녀들도 당대의 여느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축첩에 눈물흘리며 사는 일도 많았다.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는
남편이 다른 사람의 첩을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에 망신살이 뻗쳤다.
그녀가 죽을 때 남편 남휘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아
탄핵을 당했고 반성의 기미가 없자 세종대왕이 유배
왕녀들은 재가나 개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유하고 호와로운 삶을 살았다.
왕녀 신분 덕분에 늘 특권을 누린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렸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반역이나 불충과 연루되지 않았으면 형벌이 면제되었다.
역사 속에 기억되는 왕의 딸로는
태조의 딸로 여승이 된 경순공주
태종의 딸이자 남이 장군의 생모 정선공주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세종의 딸 정의공주
성종의 딸이며 연산군 이복남매로
연산군과 간통을 벌렸던 휘숙옹주
친조카 정조와 정치적 경합을 벌인., 영조 딸 화완옹주
마지막 황제 고종의 딸이며 비운의 여인이었던 덕혜옹주.
의녀.
이조에서 내의원 혜민서 소속 의녀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약방기생과 상의원(尙衣院)의 침선비(針饍婢)인 상방기생.
의녀제도는 여자진료를 남자에게 맡길 수 없어 마련되었다.
1406년(태종 6년) 남자의원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부인들이 치료를 못해 죽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생긴 제도.
이것은 여성의 인명보다 남성과의 접촉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남녀 칠세 부동석’ 유교사회 ‘금남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의녀.
진맥과 침뜸을 익혀 부인들의 질병을 직접 진찰하고 치료했고,
제생원과 전국 각 지방관서의 요구를 충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세종 세조 및 성종 3대에 걸쳐 저명한 의녀가 많이 배출되었다.
성종 때는 치과치료에 뛰어난 장덕이라는 제주도 의녀도 있었고
세조 때 중추원부사 이순지의 딸과 동거한 사방지를 체포할 당시
의녀가 투입되어 은밀한 부위를 검사해 중성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세종 때 지방관청의 노비를 제생원에 데려다 의술을 가르쳤다.
의술을 익히면 소속 관청으로 돌아가 그 지역 환자를 보살폈다.
의녀들은 의학서적과 약방문을 읽을 수준의 한자교육을 시켰다.
그 다음에 침술과 출산을 배웠고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배웠다.
의녀는 의술을 배우더라도 주로 남자의원의 보조역할을 담당했다.
의녀가 여자 환자를 진료할 때에는 방 밖에서 남자 의원이 동석했다.
하여, 의녀가 말하는 증세를 듣고 남자 의원은 치료 방법을 처방했다.
남자 의원이 여자를 볼수 없어 의녀만 환자의 환부를 만질 수 있었다.
따라서 여자들의 부스럼과 출산, 간호 등은 의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상의원에 소속된 침선비는 왕과 왕비 의복을 짓는 일을 하는 기녀였다.
의녀와 침선비가 기녀인 이유는 왕실과 관료들의 접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약방기생,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라고도 불렸다.
특히 내의원 의녀는 '약방기생 예복' 녹의홍삼을 입고 침통을 찼다.
궁중이나 고관집 연회에 첩이 되어 권세가문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의녀가 기녀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은 연산군 시절부터였다.
연산군은 진료에 종사하던 의녀에게 가무와 악기를 가르쳤다.
의녀는 한문과 교양을 익혔기에 일반 관기보다 품격이 높았다.
연산군은 궁중연회를 자주 열어 의녀는 기녀 역할을 많이 했다.
중종 반정 이후에 의녀의 연회 참석을 금지 시키려 한적이 있다.
그러나, 잘 시행이 되지않아 구한말까지 의료와 가무를 병행했다.
한번 흐려진 의녀의 풍기문란은 명조 선조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결국, 의녀는 이조 말기까지 ‘약방 기생’이란 별칭으로 불리웠다.
하여, 궁궐에서 근무하는 의녀라도 궁녀와는 신분 차이가 있었다.
의녀는 궁중 기생으로서 권세 가문의 첩실 또는 결혼도 가능했다.
하여, 의녀가 스스로 정절을 지킬 방법은 님과 함께 야반 도주 뿐.
궁중 기생.
소춘풍은 이조 성종때 미모, 재치 시조가 뛰어난 영흥 기생.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해져 오는 3 편의 시로도 유명하다.
소춘풍을 통해 궁중기생이 어떠한 신분의 여성인지 살펴보자.
성종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인 경회루 연회에 이름난 기생들도
많이 참석하여 권주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소춘풍이 문무백관을 사로잡은 3편의 시를 소개한다.
'요순 시대를 어제 본 듯, 한 당 송을 오늘 본 듯
고금의 사리를 통달한 명철한 선비가 어이하여
제 설 곳도 똑똑히 모르는 무부를 어찌 따르리.'
'앞의 말은 농담이라 내 말씀 허물마오.
문부 백관이 하나인 줄 나도 잘 아옵거니
두어라 씩씩한 무장을 아니 따르고 어이하리.'
'제나라도 대국이요, 초나라 역시 큰 나라이라
작은 등나라가 제나라 초나라의 사이에 있으니
두어라.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기며 살리라.'
첫 시조는 문신을 한껏 치켜 올리며, 무신을 비하하고 있다.
문신들은 흐뭇했겠지만 무신들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을 듯.
두번째 시조는 그 무신들의 얼굴을 활짝 펴지게 했다는 권주가
세 번째 시조는 '맹자 양혜왕장구 하'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시.
제와 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 등나라.
맹자에게 그 해법을 묻는 등나라를 기생인 자신에게 비유한 대목.
천한 기생이기에 문신도 섬기고 무신도 섬길 수 밖에 없다는 내용.
'3편의 시는 모두 왕을 향한 소춘풍의 권주가 아니었을까?'
소춘풍의 시를 듣고 성종은 매우 기뻐 많은 비단과 호피를 하사.
이를 계기로 기생 소춘풍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아울러 소춘풍은 성종과 신분의 벽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소춘풍(笑春風)은 '봄바람에 웃는다'는 의미심장한 뜻.
고려속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에서 따온 이름이다.
총 5연 중 1, 2연이 소춘풍이란 뜻의 진면목을 말해준다.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정(情) 둔 오늘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경경(耿耿) 고침상(孤枕上)애 어느 자미 오리오
서창(西窓)을 여러하니 도화(桃花) 발(發)하도다.
도화난 시름 업서 소춘풍하나다. 소춘풍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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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위에 대나무 잎을 깔아 잠자리를 만들어서
얼어 죽을망정 정을 나눈 오늘 밤 더디 밝으소서
근심싸인 외로운 배갯머리에 어찌 잠오리오
서쪽 창을 여니 복사꽃이 피기 시작하는구나.
복사꽃은 시름없이 봄바람에 웃는구나라는 뜻.
'시름없이 봄바람에 웃는 복사꽃..기녀 소춘풍.'
만전춘별사는 한국 문학사 시조의 근원이라 평가할 만큼
남녀 사이의 애정을 지나칠 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노래.
제 1연은 님과의 짙은 사랑, 제 2연은 님 떠난 고독을 탄식.
문무백관들을 서릿발처럼 얼리고 봄바람처럼 녹인 그녀.
성종이 첫눈에 반해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혹적인 소춘풍.
그러나, 소춘풍의 모친은 함경도 산골에 사는 박색의 과부.
보쌈하려는 홀아비 조차 없어 늘 외로운 청상과부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늙은 스님이 찾아와 머물기를 청했다.
본래 오는 사람 거절하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았던 과부.
간밤에 바다 한복판에서 피어 바다를 가득 채운 연꽃 한송이.
지난밤 꿈처럼 그녀 몸에 연꽃 한송이를 심어놓고 떠난 탁발승.
그후 태어난 아이가 연꽃을 닮은 듯 곱고 총명한 미모의 '소춘풍'.
5세에 쌍용사에서 불경을 읽고, 10세에 불경을 무불통지(無不通知)
12세에 모친이 죽자 불공을 드리러 왔던 영흥 기생의 수양딸이 된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동기가 되어 성인지례 첫 남자는 가난한 선비.
소춘풍은 첫 순결만큼은 남자의 돈에 팔리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 탓.
'풍류를 모르는 남자에겐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소춘풍.'
그 소문이 성종에게까지 알려져 대궐로 불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성종은 13세에 등극해 38세로 승하할 때까지 25년간 집권한 임금.
뇌물 근절, 젊은 과부 수절강요 예법철폐, 미신 타파가 성종의 업적.
뛰어난 성군이자 보기 드문 풍류객 성종과 명기 소춘풍의 첫만남.
궁궐의 모든 여자가 왕의 여자가 되길 갈구해왔지만 그녀는 예외.
성종의 구애를 선뜻 받아들이기는 커녕 의외로 머뭇거리는 소춘풍.
성종은 기녀이면서도 총애를 마다하는 소춘풍에게 더욱 끌린다.
소춘풍은 내심 성종이 한남자로서 마음에 들지만 왕이라 싫었다.
하룻밤을 모시면 평생 얽매인 몸이 되는 신세가 싫었던 탓이었다.
"왜 마음이 내키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그 대답이 애매하구나..."
"오늘 성상을 뫼시면 그후부터 많은 구속을 받으며 살 일이..."
"음, 과인은 일국의 군주이지만 너는 인생의 군주로구나.
지금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술이나 마음껏 마시자."
그로부터 10 여 일 후, 늦은 밤에 홀로 소춘풍을 찾아온 나그네.
어둑한 마당에 서 있는 나그네는 흔히 볼 수 있었던 한량이었다.
"어찌 저를 아시고 여기까지 찾아오셨나이까?"
"천하 명기 소춘풍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느냐?"
"아하! 상감마마,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하하하, 한량으로서 너를 찾은 것이니 놀라지 말라."
"하오나..."
"허허, 걱정 말래두. 꽃을 찾아온 한 마리의 나비라지 않느냐?
나는 어린 나이에 등극해 20여 년간 권세와 아첨 속에서 살아 왔다.
오늘 저녁 나 자신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다시 없는 기쁨을 맛보는구나.
군왕이 아닌 한 지아비로서 한 지어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겠느냐?"
"오직 황공하올 뿐이옵니다...."
'새벽달이 밝다. 몇번 잠 깨었다.
달빛 내리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얼음 위에 대나무 잎을 깔아 보낸 밤.
은애하는 님과 차라리 얼어 죽을 망정
정둔 그 밤 더디 새길 바랐던 뜨거운 사랑.
아득한 시선으로 느낀 달빛에 가슴 헹군 새벽.'
성종이 소춘풍의 집에 잠행해 정염을 불태운지 4년이 흘렀다.
누구도 그 비밀을 아는 이 없지만 성종은 젊은 나이에 승하한다.
그녀는 성종이 승하한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수양모도 이미 별세.
하여, 모친이 생전에 일러준 아버지가 그리워 석왕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운야대사 역시 금강산 유첩사에서 이미 입적한 직후였다.
인생무상을 느낀 그녀는 28세 나이로 불교에 귀의, 법명은 운심(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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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춘풍은 왕의 여자이면서도 인생의 자유를 택한 기녀.
'왕의 여자' 소춘풍을 누구도 함부로 여기지 못했을 듯.
순결과 정절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이 기녀지만,
이름 없는 기녀들의 시조 조차 애간장을 태운다.
가을 비.
즈문 저녘 추녀 밑
굵은 눈물 첨벙이는 널
앞산 물안개 측은지심 싸안는구나.
어쩌랴 망년든 세월 살아 내기
그 속마음 말로는 못하겠더냐...
詩 才
가을이 이고 가는 詩才
내려 주고갈 마음 없는 듯하니
바람아 얼른 뛰어 가서
다리만 슬쩍걸어 넘어뜨려라
그라고 얼른 나몰라라 가거라
뒷 감당 내 하리니 -
못 이기는체 이르켜 세우며
덩근 놈만 골라 훔칠 거니라...
風
건들바람
문 삐금 열더니
뭐하냐 묻는구나 ?
들어 오라 하여 앉혀 놓고
이즘 봄 무슨 생각하냐니
제 생각만 한다 이르네.
足
오늘은 하늘 내려 앉고
비는 오락 가락
들판 좁다며 쌈질하는 바람소리
여기가 봄 안인가 ?
흘 뿌려지는 꽃눈 스러지는 길
대관령 눈 소문 깊으니
발목 빠진 봄
오늘 밤은 발 많이 시리겠다...
行路
그대 마음 길 나섰다가 행여 적적할 때.
들꽃에 물으시라. 어떻게 하면 되냐 구요.
개지꽃 자면 들국화 고개 들고 일러 줄거요
님 위해 기도 하라 눈짓을 하면 얼른 허세요.
그대야 瀟灑(소쇄)한 바람 이는 때이옵니다.
춘조(春鳥)
累年을 울다 지쳐 침침 하여라.
이 깊은 深重이야 연못도 모른 척
빗방울 방울 번짐만 웃는 봄날에...
얼마나 더 그려 여위어
천년 由魂, 달래 안을 건고
아마도 바람 든
작은 새 혀의 逍遙만 밝구나...
無 深
문을 민다.
그냥 연 건데...
공연히
지나는 바람 한 자락
불러 드려 앉혀 놓고
요즈음 지내기
어떠냐고 물어 본다.
'몸은 천민, 눈은 양반'인 이중적인 신분을 갖고 있는 운명.
기생은 여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남성사회에서 살아갔다.
기생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면서 여성에겐 부러움의 대상.
무녀, 신라의 원화, 전쟁포로에서 유래.
일명, 유녀, 노는 계집, 창녀 기생으로 불리우는 여성들.
신라 제 24대 진흥왕 37년 봄에, '원화를 바치다'라는 기록.
원화는 화랑과 대조되는 뜻으로, 원화는 여색, 화랑은 남색.
신라시대 창녀와 음방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인로의 파한집
원화와 화랑제도가 있을 당시 매음이 있었던 것이 기녀의 기원.
신격인 무녀가 지방 토호와 결탁하면서 매춘부로 전락한., 기녀.
원래, 무녀는 신을 몸으로 섬기고
인간을 다스리는., 지체 높은 신분.
신을 즐겁게 해주는 본분의 무녀는
그 대상이 신에서 권력자로 바뀐다.
고려 태조는 백제 유민들을 관리들에게 노비로 나눠주고,
그중 미녀를 뽑아 가무를 배우게 한 것이 고려여악의 기생.
커다란 쟁반 네 개 위에 얼음을 산봉우리처럼 쌓아올리고
쟁반은 은장식 조개껍질으로 세공한 수십 송이의 예쁜 꽃
비단 장막 안 기녀들에겐 거상들이 금과 비단을 하사한다.
기생을 아끼고 사랑했던, 고려 충렬왕, 충숙왕, 우왕.
고려시대 기녀의 역할은 여악(女樂)을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이조로 이어져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기생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종은 종묘에서 조상들에게 기생들이 춤과 노래를 진상한다.
아울러 문무백관이 모여 연회를 베푸는 백관하전을 진행한다.
이조 역대 왕 중 성종과 연산군이 특히 기생과 창기를 좋아했다
중종 이후 기녀제도는 해체되지만, 기녀 자체가 없어지지 않았다.
양반 계층의 선비나 관리들이 기녀를 첩으로 삼는 경우는 많았다.
이러한 경우 기녀는 기예만 팔고 매음은 하지 않는 것이 기부제도.
기부는 별감, 포도청의 군관, 승정원의 사령, 의금부의 나장이 했다.
이조 후기에 위안부 성격이 강해지자 창(娼)과 기(妓)로 구분
고종 시대에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구분했다.
국가 연회에 참석하는 관기., 일패.
출퇴근이 가능했고 기방도 운영했다.
30세면 기계(妓界) 은퇴기생인., 이패
남몰래 은근히 매춘을 한다 하여 은근자
매춘 자체가 직업인 기녀가 삼패.
탑앙모리 별칭의 기녀가 곧 삼패.
관기는 관에 속한 노비였으므로 역은 공적 의무였다.
따라서, 국연에서 주악과 가무를 의무적으로 실시했다.
관기들은 대개 15세부터 50세까지 기녀의 소임에 종사
10대 기생은 동기(童妓),
50 미만 기생은 노기(老妓),
현역에서 퇴역한 기생은 퇴기
기녀란 동기에서부터 20대까지의 사치노예를 말한다.
관기 나이가 30 넘으면 수청 뒷전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50에 퇴직하려면 조카나 딸을 들여놓아야 물러날 수 있다.
기생이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면 속신을 해야만 한다.
일정 금액을 물고 기생에서 벗어나 소실로 들어가는 길.
아니면, 퇴기가 된 후에도 술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조 초기에 기생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병영이나 수영.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이 사행로(使行路)가 있는 평양과 개성.
기생은 춤 노래는 물론 흥을 돋우기 위한 기예를 익혀야 했다.
기녀 교육과정은 엄격하여 15세에 기안에 오르면 음률을 익히고
악생들로부터 호된 꾸지람과 가혹한 횟초리를 맞아가며 연습했다.
꼭 배워야할 악기가 있고, 악기마다 선생이 따로 있었으며,
다 배운 뒤에는 감독이 학습 성취 정도를 직접 시험하였으며,
서툴면 벌을 주거나 아예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혹독한 교육을 거쳐야만., 전문 예능인 기생.
관동 기녀는 '관동별곡'을 잘 했고, 평양의 기녀는 '관산융마'
호남지방의 기녀들은 판소리나 단가를 잘 불렀다고 전해온다.
관아에 소속된 기녀는 우두머리인 행수기생에게 복종해야 한다.
기녀는 아프거나 볼 일이 있을 때 관아 호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기녀는 정해진 날짜마다 한달에 두 차례씩 소집점검을 받아야 했다.
소집점검은 기녀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인원점검이라 볼 수 있다.
수청기, 침비, 급수비의 직무 분담을 부여하는 것도 호장의 권한이다.
관기는 공물(公物)이라 여겼기에 생사여탈권도 관리들이 맡고 있었다.
하여, 원님이 바뀌면 재산목록에 맞춰 관기 인원점검을 하는 것이 관례.
기녀는 부유한 양반 기부(妓夫)가 있어야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어린 동기로부터 노기(老妓)까지 경제적으로 윤택한 기녀는 극히 일부.
법률상 금은 장식 비단 옷이 허용되었지만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
기생은 여염집 여인보다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는 만큼 돈이 필요했다.
기녀는 국록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다른 경제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기녀는 옷이 남루하면 장(杖)을 맞기에 후원자 기부(妓夫)가 필요했다.
경제 후원자 도움은 의녀(醫女)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
세종(世宗)때 창기 소생은 그 부(父)가 양반일지라도 자녀는 천민
따라서, 기녀의 자손들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가지 신분
그러나, 부(父)의 지위에 따라 양반이 될 수도, 천민이 될 수도 있다.
기녀는 나라에서 양성하는 여성 악공이나 무용수 겸 가수였다.
예전에 대중 앞에서 노래와 춤추는 행위는 천민인 기녀들의 일
여색을 멀리한 세조는 궁궐 기생에게 분을 두껍게 바르라 지시.
기생을 사람 취급하지않고 혐오한 왕으로도 유명.
재능이 탁월해 서울로 불러들인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 했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궁중잔치에 가무로 흥을 돋우는 일을 맡았다.
왕이 사냥 온천 행차 또는 환궁할 때 왕의 공덕을 칭송하게 한다.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 동원되지만 평상시에는 연폐(宴幣)로 생활.
연폐는 오늘날 유흥가의 여성에게 주는 화대 또는 팁에 해당한다.
기생은 노래와 춤은 물론 몸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
지방 관기들은 사신이나 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수청기생 역.
수청이란 관리숙소 마루에서 심부름을 하며 수발을 들어준다는 뜻,
왕명을 받은 관찰사 어사 또는 사신의 객고를 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관기의 수청거부란 관명의 거역이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원의 관기가 수청을 거절한 이유로 볼기를 맞아 죽은 사건도 있었다.
태종 때 나주 관기 명화(名花)가 매를 맞고 사흘 만에 죽은 사례가 있다.
이조시대 관기는 원래 의약, 침술 가무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던 여성
그러나 이조 후기에 혼자 부임한 수령의 수발을 들어주는 일로 바뀐다.
관기는 천민이지만 사대부와 더불어 시와 학문을 논하는 수평적인 대상.
이조 궁궐제도.
이조의 궁궐 제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대장금 촬영장.
국내 최초 드라마 대장금 촬영장소가 테마 파크로 화려한 변신
대비전과 수라간 등 20여 개 세트장에서 장금이와의 데이트 붐.
'경기도 양주시 만송동 MBC 문화동산 대장금 세트장.'
특히, 대만, 일본 등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을 방문해 세트장을 관광하겠다는 요청이 쇄도해 관광 명소
드라마 영상이 나오고 감찰내시로 출연했던 이경원씨(39)가 안내.
출연 당시 복장으로 차려 입었기에 관광객들 사진촬영 요청이 쇄도.
극중 궁궐 문으로 사용됐던 장소. 곳곳에 안내판과 함께 드라마 장면.
드라마 장면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 있는 그래픽 패널은 관람의 재미.
<대전>에는 갖가지 궁중 의상이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며 진열돼 있다.
주로 조회와 회의, 나인들의 교육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또 나인 선발, 어선 경연, 최고 상궁 어선경연과 대전 장면.
대전을 비롯해 한상궁과 장금의 처소, 퇴선간, 서고와 내의원
이조 관리들이 타고 다녔던 가마를 전시해 직접 타볼 수 있으며,
대장금 출연자들 브로마이드 사진 옆에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대전을 지나면 아기자기한 동선을 따라 다양한 볼거리가 기다린다.
수라간 나인 연생이 숙원이 되면서 생활한 숙원처소.
한상궁과 장금 등 수라간 나인들이 생활한 상궁처소
숙원처소를 찾아온 그당시의 임금 중종의 모습,
장금과 한상궁이 함께 생활한 처소도 볼수 있다.
제조상궁과 감찰상궁이 나인처소를 검사하는 모습.
드라마의 중요한 장면을 모두 그래픽으로 볼 수 있다.
한상궁과 어린 장금의 처소에 딸린 부엌 <퇴선간>.
<궁궐의 서고> <내의원> 건물로 촬영된 곳도 있다.
중종 명령을 받은 감찰내시들이 장금을 보쌈하던 곳.
감옥. 옥사 내에 전시해 놓은 목칼, 주리 틀기와 곤장 맞기
이조에서 죄인에게 집행했던 형벌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궁궐의 후원으로 대장금 드라마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정자.
민상궁이 달빛을 받아 정기를 모으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장면
잣 그릇과 솔잎 그릇이 전시돼 잣에 솔가지를 끼우는 체험 가능.
드라마 대장금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로 장금의 부엌도 있다.
최고상궁 어선경연 때 장금과 한상궁의 부엌으로 설정됐던 곳.
최고상궁 어선경연 때 장금이 한상궁 대신 음식을 만들던 장면,
장금이 민정호를 위해 삼색단자를 만들던 장면,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만들던 수라간 전체구조
12첩 수라상 등등 음식 모형들이 전시돼 있고
궁중 음식 전문가 한복려씨의 음식 이야기 영상.
땔감으로 불을 펴서 군고구마와 감자 즉석 서비스
테마파크 관람 소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방송화면을 위해 실제 크기의 85% 세트장.
10시~ 17시 입장 성인 5천원, 어린이 3천원.
일요일 관람장 한방 클리닉에서 무료 진료.
대장금 촬영장 찾아가는 길 (문의 031-849-5030)
의정부 시내 - 주내검문소 - 주내고가도로 옆(송우리방향 우회전)
- 원학동 삼거리 우회전 - 로열 컨트리 골프장 - MBC 문화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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