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8. - 다. ( 신참을 다루던., 우리나라 옛 풍속 )

donkyhote 2010. 10. 29. 03:16

 
 이조시대 문과에 급제하면 종9품직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일하게 될 부서를 할당 받으면 해당 기관의 선배와 상견례
이를 허참이라 했는데 함께 일하게 된 것을 허락한다는 뜻


바치는 물건이 물고기이면 용(龍),
닭이면 봉(鳳) 술이 청주이면 성(聖)
탁주면 현(賢) 취하면 노래까지 불렀다.
 
이조 초 한림별곡은 신참들의 애창곡.

그것은 관례가 아니라 일종의 법으로 정한 하나의 제도였다.
태종5년 1월 사헌부에서 감찰(정6품)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면
전임자가 상종을 허락한다는 뜻에서 허참을 행하게 제도화한 것
 
신입 관원이 혹시라도 오만할 것을 경계하고
상하 구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취지.

대략 열흘간의 상납이 흡족할 경우 함께 일하는 것을 허락
그것을 면신(免新)이라 불렀는데 신참을 면했다는 뜻이다.
요즘 신고식 같은 것인데 문과급제 영광을 누리기 전., 의례
 
성종 때 유명한 문신 성현(成俔)은 문집 ‘용재총화’에서
당시 면신 병폐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흔히 문과에 급제했을 때 발령을 받는 사관(四館)
(성균관, 예문관, 승문관, 교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
충의위 내금위 같은 무신 사이에서도 허참 폐단이 극심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자리에 함께 앉아
업무볼 수 있도록 함을 불허하고,
 
연회를 베풀게 강요하되
만약 기생과 음악이 없으면
신참과 관계되는 사람들에게
책임추궁 하는 것이 끝이 없다.”

실은 이 제도가 시행되던 태종 때도
이미 그런 문제가 생겨난 때문인지
신참의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도
과도한 선물요구가 비일비재 했다.
 
나라에서 지나친 면신례 행위를 금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허참은 세월이 지나면서 말단 신참뿐만 아니라
해당 기관에 새로 부임하면 누구나 해야 하는 통과의례.
 
성종25년 9월 22일자 실록을 보면
도총관 변종인이 훈련원에서 말단 관리들에게 수모를 당했다며
자신을 처벌해줄 것을 요청 (실은 관리들을 처벌해 달라는 요구).
 
도총관이면 정2품에 해당하는 높은 직위였다.
오늘날로 치면 4성 장군 참모총장에 해당한다.

하루는 변종인이 군사훈련을 위해 훈련원에 앉아 있는데
훈련원 종9품 말단 권지(權知)들이 허참례를 않았다’서
상관인 권지의 이름을 마구 부르며 욕까지 해댔다는 것.
 
권지(權知)란 오늘날로 치자면 인턴 내지 수습직원에 해당.
그런데도 종9품밖에 안 되는 권지들이 정2품 대신을 모욕.
성종은 문제의 권지 14명을 직접 불러 연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너무도 당당했다.

허참례를 행해야 ‘선생(先生)’이라고 불러주는데
그것을 않았으니 이름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답변.
 
성종은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새로 왔다 하여
권지들이 참판까지 지낸 재상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아무리 옛 풍습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니 혁파하라 명.
 
그리고 권지 14명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모두 파직을 명했다가
사간원에서 처벌이 지나치다고 건의
하여, 그후 모두 복직하도록 해주었다.

연산군 때 의정부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면
이 폐단은 더 심해져 심지어 가산을 탕진하고
동좌를 하지 못하는 일까지 발생했었다고 한다.
 
특히 육조 중 인사를 책임졌던 이조와 병조가 가장 심했고,
사관 중에서는 예문관이 심해 과거급제하고도 임관(任官)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병폐가 심했다고 한다.

중종36년 12월 10일의 기록은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

‘새로 부임하는 문과급제자를 신래(新來)라 이름하여
멋대로 침학하기를, 몸에 진흙을 바르고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두들겨 패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래인 사람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지공에 대응하기 바쁘며,
비천하고 오욕스러워 모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도 달갑게 여기며 해야 합니다.

가져다 쓰느라 허비하는 물건값이 수만 냥(兩)이 되는데
신진(新進)인 빈한한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면
구걸하여 청하기를 서울이고 지방이고 할 것 없이 하여,
오직 눈앞의 급한 대로만 하고 염치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부유한 장사치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이 일을 의뢰하니, 몸망치고 이름을 떨어뜨리는 짓. 

침학할 때에는 되도록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더러는 겨울철에 물에다 집어넣기도 하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기도 하므로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주창했기 때문에
미관말직 잡품(雜品)과 군졸(軍卒) 같은 미천한 사람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사헌부의 관원도
오히려 세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투어 서로 본받아 하느라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하고도 또한 감당해 내지 못하여,
더러는 논밭과 노비를 팔고 더러는 집까지 팔게 됩니다.’

여기에서 구조적인 부패가 싹텄음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후 중종이나 명종도 실상을 보고받고서
혁파를 지시했으나 개선 기미는 없었던듯.
 
명종19년(1564) 문과에 장원 급제했던
율곡 이이도 피할 수 없었던 200년 악습
 
워낙 자존심 강하고 다소 거만하기까지 했던
스물아홉 청년 이이는 승문원에 발령이 났다.
 
승문원 선배들이 허참례를 요구하자 단호하게 거부했다.
물론 선배들은 발끈해 그러한 이이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이는 선배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다.
 
그때의 수모를 잊지 못한 이이는
훗날 선조에게 악습 폐지를 건의.

“대개 호걸의 선비는 (바로 이 허참례 때문에)
오히려 과거를 볼 생각조차 않고 있습니다.
관(冠)을 망가트리고 의복을 찢으며
진흙탕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위엄과 체통을
모두 손상당하고 염치를 버린 다음에야
근무할 수 있도록 한다면, 호걸의 선비로서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악폐는 수그러들지 않다가
조선이 망하며 함께 사라지게 된다.
 
허참례 때문에  백성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국망(國亡)의 원인 중 하나인 관리의 부패가 실은
허참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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