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9. ( 정업원. 정업원 옛 터를 찾아서.. 궁녀. 후궁. )

donkyhote 2010. 10. 29. 03:16

 

 

정업원(淨業院).



이조시대 역사 기록서 조선실록은 강화 전등사에서 보관.
이조 왕실의 역대 왕비들은 불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시대 왕비 간택은 '왕실의 어른' 대왕대비가 주관했다.

왕비나 왕의 여자들은 왕이 운명한 후에도 대궐에 살았다.
왕의 후사를 본 후궁은 장성한 왕자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는 후궁들은 여승이 되어 여생을 보냈다.

이조 초 여승이 된 후궁들이 기거한 사찰 정업원(定業院)
'업(業)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정업원은 고려 이조시대 도성 내에 있던 여승방.
정업원에서 여생을 보낸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고려 공양왕비 중 하나였던 혜비 (惠妃) 이씨( 이제현의 딸)
이성계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교지를 내리고 비구니가 된 혜비.

다음은 왕자의 란으로 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는 아버지 이성계가 머리를 깍아 죽음을 모면한다.
경순공주가 정업원에 들어갈 때 만났던 고려 공양왕비 혜비.

경순공주와 고려 공양왕비의 만남은 기막힌 해후

이조 초 다시 자리를 옮겼던, 창경궁 서쪽의 정업원.
이조 초 노비, 별사전(別賜田), 분수료(焚修料)가 지급
국가보호를 받다가 1448년(세종 30) 척불정책에 의해 폐지

1457년(세조 3) 복립(復立)이 결정되고
예종 때까지 국가적 비호가 계속되었으나,
1505년(연산군 11) 왕의 타락정치로 다시 폐지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성밖으로 쫓겨났다.
그뒤 중종이 정업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유생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550년 후궁 별처로 한다는 구실로 다시 건립

그러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폐지

비구니 사찰 보문사와 가까웠던 청룡사 정업원
보문(普門)이란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문(門)

보문사는 이조시대 '탑골승방' 이라 불리웠던 사찰.
탑골공원 위치에서 배불정책으로 성밖으로 밀려난듯.
연산군이 기생 양성소로 만들려고 몰아냈다고도 한다.

'국왕을 모실 수 있었던 기쁨'
'국왕 만을 모셔야 한다는 족쇄'

고인이 된 국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비구니가 되어 수절.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후궁들의 말년은 참 쓸쓸했을 듯,
애욕을 알면서 수절해야 하는 산사의 생활은 힘들었을 듯.

정업원은 고려시대부터 왕실 여인들의 비구니 원.
자수원과 인수원은 이조시대 선왕 후궁들의 거처
이조 유교사회에서 백성과 왕실은 불심이 깊었다.

정권 교체기 全 '왕의 여인'들은 불교에 귀의.
세종 말엽 비구니원에는 궁녀들이 다투어 귀의.
역대 왕들은 정업원의 궁녀들에게 각별하게 관심.

그러나, 유림은 정업원 철폐를 요구하며 강력 반발.
이조의 국가 재정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철폐론 우세.
하여, 비구니원 제도는 폐지와 부활을 끊임없이 반복.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여생을 보낸 초가집 터도 정업원.
두 사람이 생이별 후 단종은 영월 장릉, 정순왕후는 남양주 사릉.
1453년(단종1년) 15세에 왕비로 책봉후, 82세에 비운의 생을 마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녀가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동망봉.
그녀가 단종의 유배지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다하여 동망봉.
마을 여인들이 함께 땅 한번, 가슴 한 번 쳐서 동정곡(同情哭)

청계천 영도교(永渡橋)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이별 장소.
그후 다시 못 만났다 하여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 영도교
18세에 홀로 되어 초막집에서 3 시녀와 함께 살던 정순왕후.

시녀들의 동냥으로 연명한 그녀에게 세조가 지어준 영빈전
세조가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거부.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살았던 골짜기가 '자줏골'.

동망봉과 영도교 중간 정순왕후가 살던 터에 비문 '정업원구기'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썼다는 비문이 새겨진 정업원 옛터 비문.

그녀를 도우려고 영도교 인근에 세워진 금남의 야채시장.
그녀 초막 인근에 채소를 파는 척 모여 그녀를 도운 백성들.
하여, 그곳에 여인들 만의 야채 시장이 생긴 유래가 되었단다.

그녀는 후사가 없기에 단종의 누님 시집 정씨 묘역에 묻혔다.
그 후에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 복위
정순왕후로 추복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기에 능호를 사릉.

1984년에 사릉의 소나무 두 그루를 영월 단종능인 장릉에 이식.
두 분의 한 맺힌 생이별의 한을 사후에라도 넋을 달래주기 위함.

60년간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맺힌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
짧은 생을 살며 슬픈 사랑으로 잠못이루는 밤을 보낸 단종.
단종이 자신의 신세를 두견새에 비유해서 읊었다는 '자규시.'

.............자규시.................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 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를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 가도 끝남 없는 이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 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

지하철 창신역을 지나 산동네의 옛 정업원 터가 오늘날 청룡사.
정현왕후 초막도 훗날 여승이 된 후궁들의 거처 정업원이 된다.
이곳 주민 조차 정현왕후 유래를 모를 만큼 잊혀져 가는 정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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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 옛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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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오백년 역사에서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단종.
숙부 수양대군 힘에 눌려 왕위를 빼앗기고 죽은 단종.
어린 나이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 후 죽임을 당한 단종.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해 암장한 후
중종 11년 무덤이 만들어지고 숙종 7년에 장릉.
비극의 주인공 단종의 짧은 생애는 이렇게 마무리

그러나, 단종 비 정순왕후의 생애는 더 비극적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동대문 밖에서 생이별
그후 숭인동 청룡사 터 초가집에 눌러 앉는 그녀.

이때 단종 비 송씨의 나이 18세였으며
이때부터 날마다 남동쪽 바위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눈물.

그녀가 운명한 82세까지 64년의 길고 긴 세월
늘 아침 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은 근린 공원으로 변한., 동망봉 정상 입구

정순왕후 송씨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
단종 원년에 간택된 송씨는 성품이 온화 검소
효성이 지극하고 공손하여 다음 해 왕비로 책봉.

그러나 왕비로 책봉된 뒤 겨우 1년 반 만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의덕왕대비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의 단종복위 실패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쳥령포로 유배되었고
그녀는 왕대비에서 부인으로 강봉되어 단종과는 생이별.

그 후 단 한번도 단종을 만나지 못하고
운명 전까지 정업원과 동망봉을 오가며
단종의 명복을 비는 한맺힌 삶을 살았다

그녀가 눈이오나 비가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이 동망봉.

당시 조정에서 이를 가엾게 여겨
근처에 영빈정을 지어 주었으나
그녀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초가집 정업원에서 생을 마쳤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조정의 책벌이 두려워
떳떳하게 도와줄 수 없었던 인근 백성들이
밤이면 처마 밑에 갖다놓은 곡식으로 연명

세월이 흘러 조정에서 먹을 곡식을 보내주어도
먹지 않았을 만큼 깊은 한이 맺혀있었던 그녀.

동망봉 아래 동망정을 지어 주었지만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송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후손이 없어
단종 누이 경혜공주 시가 묘역에 장례하니,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이 바로 그곳.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고
송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복위
사후에 능호를 사릉으로 추봉.

정업원 옛 터에 들어선 청룡사라는 사찰
이곳 저곳 찾아봐도 없는 정업원의 흔적
문간 사무실 보살에게 물으니 가르쳐준다.

화장실 입구로 들어가 한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쪽문
그 안으로 퇴락한 정원에 작은 비각 하나가 서 있다.
굳게 잠긴 비각 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업원이란 글씨

영조 47년에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
'정업원구기 세신묘구월육일 음체서'라는 비문.
'전봉후암어 천만년'(한문)은 영조대왕 친필

정업원 터 청룡사에서 동망봉을 바라보니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제법 가파른 언덕이다.
정순왕후가 오르 내렸던 길은 찾을 수 없다.

그 시절의 정순 왕후처럼
서민주택들이 밀집한 골목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며
넓은 배드민턴장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동망봉.

멀리 동쪽으로 아차산 너머까지 보인다.
정순왕후가 영월 쪽 임 계신 곳을 향한
눈물의 통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애닯다.

영조 47년 영조대왕 친필로 바위에 새긴'동망봉'
일제시대 바위산이 채석장이 되면서 사라진 글씨.
흉물스런 모습이 된 동망봉 서편의 바위벽이 그곳

지금은 남쪽 비스듬히 내려가는 능선에 공원
몇 사람에게 유래를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궁녀(宮女). 



궁궐에서 국왕 등의 시중을 들던 여성들 총칭.
궁녀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타나지만,
1392년(태조 6년) 조준의 건의로 규정을 마련.

1428년(세종 10년) 궁내 여관(女官)들을
내관(內官)과 궁관(宮官)으로 크게 나누고
그 품계·명칭·직위까지를 명시하게 했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수정·보완해 제도화.

고려시대 궁녀는 제도적으로도 규명되지 않고,
입궁 경위나 절차도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왕을 위한 궁중 여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고려 관계의 기록을 보면 궁녀는 거의 평민 출신.
비, 첩의 소생, 천례(賤隸) 등 하층계급의 여인들
궁중 내 의식주 관장 또는 궁중음악을 담당한 여악

궁녀의 신분을 초월하는 계층인 왕의 부실(副室:첩)
정1품 빈(嬪)에서 종4품 숙원(淑媛)까지로 크게 양분
이 경우의 궁녀는 내명부의 하나로서 좁은 의미의 궁녀.

넓은 의미의 궁녀는, 물긷기 불때기 잡일을 한 천역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는 '무수리' 출신.
궁녀 중 제일 높은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

모든 궁녀를 통솔하며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어
때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궁녀는 양가 규수보다 관청 여자종 가운데 선출.
그러나 국왕측에서는 양가의 딸을 뽑으려고 했다.
하여, 10세 이상의 딸 가진 집안에서 다투어 조혼

그러나 경종 때부터 양가 규수는 뽑지 못하게 했다.
영조 때는 각사(各司)의 비(婢) 중에서 뽑아들였다.
지밀나인처럼 중요한 궁녀는 나인 친척 중에서 소개

조선 성종 때 대왕대비전 29명, 왕대비전 27명, 대전 49명
고종 때 대전 100명, 대비전 100명, 중궁전 100명, 세자궁 60명,
세자빈궁 40명, 세손궁(世孫宮) 50명, 세손빈궁(世孫嬪宮) 30명

궁궐에 들어온 여인들은 일생을 궁중에서 마쳐야 했다.
간혹 왕의 총애를 받은 궁녀는 권세를 누렸고 지위도 향상

상전이 승하해 궁중에서 나와도 혼인금지
이를 어길 경우에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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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대전(大殿), 내전(內殿)을 모시는 내명부의 여인들.
중국의 고대국가 하(夏), ·은(殷), 주(周)나라 때부터 있던 제도.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고려, 이조에서의 궁녀제도.

궁녀는 일반적으로 상궁과 나인으로 분류되었다.
나인, 무수리, 각심이, 방자(房子), 의녀(醫女), 손님.

무수리는 유부녀인 경우도 있었고 출퇴근도 했었다.
무수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까지 오른 궁녀는 장희빈.

궁녀의 등급은 견습나인(아기나인), 나인, 상궁의 3종류.
그 중 입궁 연조(年條)와 소속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궁녀는 궁궐의 의식주로 나뉘어진 각 독립 처소에 살았다.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내소주방(內燒廚房)
외소주방(外燒廚房), 생과방(生果房), 세답방(洗踏房) 7부서
세수간(洗手間), 퇴선간(退膳間), 복이처(僕伊處), 등촉방(燈燭房)

그 중 몸종 격인 지밀나인이 가장 격이 높고 다음은 침방, 수방나인
이들은 치마를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궁녀는 맡은 직책에 따라 제조상궁(提調尙宮), 부제조상궁,
대령상궁(待令尙宮), 보모상궁(保姆尙宮), 시녀상궁, 감찰상궁
특별대우를 받는 이들은 10년에 한 번씩 대전 내에서 선출했다.

특별상궁의 기본적인 구비자격은 입궁 연령이 4∼13세라야 가능했다.
20세 정도 되면 정식나인, 나인이 된 뒤 15년이 지나야 상궁으로 승격.

상궁제도는 중국 수(隋), 당(唐), 금(金), 명(明)나라까지 존속.
이조시대 내명부 제도가 정비되면서 상궁이 궁녀 중 높은 위치.
1428년(세종 10)에 당 제도와 역대의 연혁을 참조하여 만든 제도.

정1품의 빈(嬪)에서 정7품에 이르는 여관(여성 공무원) 제도.
신분이 낮았던 궁녀라도 왕의 성은을 받게 되면 후궁으로 승격.
왕의 성은을 받지 못한 궁녀는 대부분 평생 처녀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왕의 선택을 받으면 목욕재계를 하고, 왕의 침소로 간다.
이때 겉옷만 걸친 궁녀를 내시는 등에 업어 왕의 침소로 데려간다.
혹시, 흉기를 숨겨 들어갈지 몰라 옷 안에 속옷은 입히지 않았단다.

왕과 궁녀의 합궁을 하면 지밀 상궁과 내시들이 방 주위를 지켰다.
이렇게 하룻 밤 성은을 입은 궁녀는 특별상궁으로 직위가 상승한다.
만약 그후에도 왕의 총애를 받거나 공주나 왕자를 낳으면 후궁 첩지.

궁녀는 종신제였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궁궐 재정이 어렵거나
중병에 걸렸거나, 모시던 상전이 죽으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왕을 보좌하는 상궁은 영향력도 커서 정승들도 함부로 못했다.
재산관리 또는 문서관리를 하던 궁녀들도 상당한 실세로 활동.
그러나, 왕족 이외에는 궁궐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의 법도.

궁녀들은 나이 들고 병들면 요금문이란 쪽문으로 나가야 했다.
늙고 병든 몸으로 궁궐을 나온 궁녀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다.
자손도 없고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말년에 매우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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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여자직업으로는 궁녀, 의녀, 기녀, 무녀
궁녀는 무수리, 각심이, 방자, 품계없는 여성 포함.
종9품에서 정5품까지의 품계라 당시 여성에게 인기.

궁녀는 4~10세 여아로 상궁 이상의 추천을 받아 선출.
처음 입궐한 '애기 항아님'이 상궁이 되려면 15년 교육.
신랑 없는 혼례를 치루는 성인식을 하고나면 상궁이 된다.

왕이 승하하면 3년 상을 치른 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다 해도 상궁은 평생 수절해야 했다.


.........................궁녀의 처녀 감별의식................................
이조시대 궁궐 내에서 왕이 머무는 대전에는 100 여명의 궁녀.
중궁전 대비전 세자궁 세자빈궁 세손궁까지 합하면 500~600명.
세종대왕 당시 이조의 인구 70만명에 비하면 적은 숫자는 아닌 듯.

궁녀는 왕의 여자이다. 오로지 왕 한사람을 위해 살아야만 했다.
종 9 품에서 정 5 품(상궁)까지 품계를 받아 전문적인 업무도 담당.
간혹 왕의 성은을 입으면 최소한 특별상궁, 승은상궁으로 특진했고,
장희빈의 경우에는 무수리에서 일약 중전의 직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궁녀는 별도의 하녀를 거느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
방자(방청소 및 개인 심부름), 취반비(음식), 무수리(물깃기),
수모(세숫물 및 목욕물 담당), 파지(심부름, 청소)라는 하녀 등등.

궁녀가 되려면 입궁할때 열살 이상일 경우에는 처녀 감별을 했다.
처녀 감별은 미혼궁녀만 했고, 유모 또는 보모 상궁은 하지 않았다.
유모 상궁은 왕비, 후궁이 출산하면 젖을 물리거나 돌보는 일을 한다.

그러면. 그당시 궁녀의 처녀감별은 어떻게 했을까?

의녀가 앵무새 피를 팔목에 묻혀 묻으면 처녀, 흐르면 불합격.
이는 궁녀가 얼마나 부부금술이 좋을지 앵무새의 피로 점친 것.
입궁할 때 처녀감별은 신체검사의 일환으로서 수행했다고 한다.

궁녀는 반드시 남자를 모르는 처녀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처녀감별을 했는지 기록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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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궁녀의 월급은 얼마나 되었을까?...........................
영조때 속대전 기록에 의하면, 궁녀는 직급에 비해 높은 월급을 받았다.
궁녀의 품계는 9품~5품까지 있고, 양반관료의 품계는 9품~1품까지이다.
궁녀의 최고직위는 제조상궁으로 5품이지만, 월급은 2품~3품을 능가한다.

제조상궁의 월급은 쌀 25말 5되, 콩 5말, 북어110 마리.
당상관인 정 3품 월급은 쌀 20 말, 콩17 말 정도가 고작.
또한 연말, 명절엔, 특별수당을 쌀과 돈으로 받았다 한다.

그당시 쌀농사 년간 10 가마 정도이면 잘사는 집이었다.
즉, 대여섯 식구가 일년 내내 배 곯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궁녀는 아무리 하급 나인이라도 연봉 쌀 5 ~ 10가마였다.
궁녀가 상궁으로 승진하면 20~30가마를 벌어 들인 것이다.

처녀로서 평생 궁궐에서 살아야 하는 슬픔도 있었지만
노력만 하면 충분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 선망의 대상.

간통하면 즉시 참수형, 동성애를 하면 곤장을 맞았다.
그리고 외출과 외박은 원칙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단, 부모님이 궁궐에 들어와서 면회는 가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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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형은 어떠한 형벌일까?.........................
1444년(세종 26) 부마 권공과 옹주의 궁녀 '고미'의 간통.
수강궁(壽康宮)의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가 뒤에 잡힌 사건.
이 사건 관련자 100여 명은 경복궁 밀실에 갇혀 심문받았다.
수강궁 소속 8명 혐의자는 의금부에 넘겨 엄중히 처벌받았다.

궁형은 중국의 사가 사마천이 받은 적이 있는 형벌이다.
남성은 거세하고, 여성은 질을 막아버리는 무서운 형벌.
이조 초, 사통한 궁녀와 그 상대방에게 내렸던 형벌이다.
아직도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궁형이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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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은 어떤 형벌일까?................................
이조라는 나라 이름도 몰랐던 350년 전 하멜의 제주도 표류기.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달라 무척 곤욕을 치뤘던 모양이다.

1653년 6월 14일 자카르타 -대만-나가사끼로 가다가 만난 태풍.
표류중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아 제주목사 이원진에게 끌려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처음보는 문자를 사용하는 눈이 파랗고
코가 높으며 머리는 붉은" -효종실록에 실린 이원진의 보고서 中-

그 표류기에 강빈 옥사사건으로 김홍욱이란 곧은 선비가 맞아 죽은 일.
남편을 살해한 여자나 주인을 살해한 노비를 상상못할 고문으로 죽인 일.
이조시대에 옥살이하며 목격한 아전들의 비리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목으로 유부녀를 '조리 돌리는 일.
곤장 100 대로 상놈을 마음대로 패죽일 수 있는 양반층의 폭력
사형을 독단적으로 결정 못 해도 사형제도와 다름이 없던 체형.

매품팔이 대장(代杖)은 죄지은 사람이 맞을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일
속전은 죄를 면하려 바치는 돈이고, 선셈은 물건을 받기 전 치르는 돈
곤장은 매를 약하게 때리고 뒷돈 거래하는 방법까지 포함한 비리 수단.

'<하멜의 표류기>기록에 의하면,
더욱 실감 나는 이조의 형벌 제도.'

'곤장 25대 면 어느 정도의 형벌일까?'

"곤장의 길이는 한 발쯤 되고, 그 넓이는 네 손가락 폭이나 되고,
두께는 엄지 손가락 두께, 때리는 쪽은 판판하되 다른 쪽은 둥글다.
맞은 사람들은 한 달이나 자리를 떠나지 못할정도로 무지막지 했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교대로 내리쳐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매질.
고통을 못견뎌 형틀에 묶여 몸부림 끝에 엄지 발가락이 빠질 지경."

- 화란인 하멜의 체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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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의 금표(禁標)에는 이런 문귀가 씌어진 것이 있다.
기회자장삼십(棄灰者杖三十), 기분자장오십(棄糞者杖五十).
(재를 버린 사람은 곤장 서른 대, 똥을 버린 사람은 곤장 쉰 대.)

곤장을 마흔 대 이상 맞게되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였다고 하니,
이조시대 쓰레기 불법 투기에 대한 형벌도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

<춘형전 십장가>에 수청을 강요하며 곤장 25 대를 친 기록이 있다.
남자도 아닌 궁녀에게 곤장 30 대이면 거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다.
궁녀가 애욕을 못 참아 바늘로 허벅지 찌르는 고통은 비할 바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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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에게 지엄했던 법도..............................
가난에서 벗어나려 궁녀가 된 경우가 대부분
궁녀는 신분보장은 되었지만, 성의 욕구는 포기
왕의 침소를 지키는 상궁들은 특히 동성애가 성행

왕의 신임받지만 왕과 살을 섞을 수 없는 신세.
밤마다 왕의 침소를 지키는 일은 더 없는 고통
침전나인은 내시 2명과 상궁 2명이 한조로 근무.

남자이지만 남자일 수 없는 침전내시.
여자이지만 여자일 수 없는 침전나인.

내시는 거세한 몸이라 어쩔 수 없어도
상궁은 욕정을 참기 어려웠을 듯 싶다.

하여, 그 참기 어려운 욕망을 동성애로 달랜 듯.
동성애는 곤장 30 대로 다스린 후 궐밖으로 추방.
상궁의 동성애 단속은 제조상궁 또는 감찰상궁 일

궐 밖으로 쫓겨났어도 남자와 정을 통하면., 엄벌.

내시는 종2품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거세가 필수.
궁녀와 내시 간에는 '은밀한 사랑'이 더러 있었다
하여, 궁궐의 기강을 해치는 풍기문란 행위는 엄벌.

궁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경우,
곤장 100 대 후 사형을 집행했다.

궁중법도의 엄중함을 보이기 위한 일벌백계의 본보기
임신할 경우에는 출산 직후 사형에 처하고 아이는 노비
궁녀가 아이에게 젖물릴 기회를 주지 않고 대물림 형벌.

궁녀가 왕의 은총을 받은 신분일 경우에는 즉각 사형
일반 사형수는 가을까지., 사형집행 유예 또는 사면.
궁녀일 경우에는 불륜 소문을 막으려고 즉각 처형.

궁녀의 불륜 사실을 입밖에 발설하면 도모지 형벌
얼굴에 종이를 덮고 물을 뿌려 숨막혀 죽게 하는 벌.
이런 벌을 받으면 옴짝달싹 어쩔 도리가 없어 '도무지'

도모지(塗貌紙)는 창호지 같은 종이의 한 종류.

하여, 궁녀는 오직 임금만을 꿈꾸고 섬겨야 했던 것.
미모와 젊음을 갖었어도 곱게 늙어 죽어야 했던 궁녀.
궁녀는 가난을 모면하려고 했던 계집 종 출신이 대부분.

양반 규수가 간택을 통해 후궁이 되려는 목적과 달랐다.
혹시, 운이 좋아 왕의 후궁이 되는 경우는 하늘의 별따기
궁녀는 신분이 보장되는 대신 보통여성이 누릴 행복은 포기

궁녀는 섬기던 주군이 죽기 전까지는
궁궐에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었다.
단, 왕이 죽으면 궐 밖에서 3년 상

선왕와 혼례를 치룬 궁녀의 신분은
다른 왕을 모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궁녀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은 상상도 못할 일.
궐밖으로 나왔어도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엄벌.
하여, 왕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만 했던 궁녀.

경국대전을 보면 역모죄와 궁녀간통은 즉결참형.

출궁후 사가로 나와 사는 궁녀를 범하면., 장 100대
이런 금녀에게 더 매력을 느낀 왕실 종친 조정신료들
그러나, 불륜이 들통나면 상당한 댓가를 치뤄야 했다.

일반 불륜여인 임산부는 사형집행을 미루고
100일 간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물리게 했다.
어염집 여인의 불륜은 곤장 80도 후 보통 사면

곤장 80도면 어차피 살아도 죽은 목숨,
살았어도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한 목숨

불륜관계라도 곤장맞고 사면 받으면, 재혼도 가능
재혼을 허용했지만, 곤장맞고 재혼한 사례가 없다.
사대부의 여인은 벌받기 전에 가문에서 자결을 강요.

불륜 여인은 형 집행 이전에도 온갖 문초와 형벌
이조시대 양반 가문의 여인들에게도 국법이 지엄.
불륜 여인은 옷벗기고, 동네를 끌려다니며 돌팔매

특히 양반가문일수록 남녀간 성차별 격차는 심했다.
여성을 천대하는 유교 관념은 이조의 대표적인 악습.
가문의 대를 잇는 명분으로 축첩제도가 정당했던 시대.

사대부 안방마님조차 천민의 부부 생활을 부러워했다.
남편이 축첩을 즐길 때, 대바늘로 허벅지를 찌른 마님
남편이 단명을 해도 청산과부로서 수절을 강요 받았다.

'열녀문는 여성의 정절을 장려하며, 강요한 제도.'

이조 시대 보쌈제도는 수절에서 벗어날 유일한 돌파구.
하여, 안방 마님을 보쌈해 야반 도주한 머슴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안방마님과 머슴의 관계는 이상적 부부관계.

사대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비책 보쌈제도.
청산과부 불륜을 은폐시키려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묵인된 야반도주 후에라도 국법을 피해 숨어서 살았다.

'대성골은 지금도., 사랑의 도피처.

남향이라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고
굿판 음식을 얻어 끼니 해결할 수 있고
길 잃은 등산객을 도와 돈벌 수 있는 곳.

대성골은 사랑의 도피처로서 각광받는 곳.
정체불명 연인들이 신분을 숨기고 은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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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가 임신하면 태교를 위해 매질을 국법으로 엄금.
왕비가 임신하면 왕은 성생활을 절재하는 것이 예법.
성종은 중전 윤씨가 연산군을 임신하자 후궁들과 관계

그 후궁들도 임신을 하자 후궁들을 질투하고 증오했다.
하여, 성종과의 다툼도 잦았고 후궁들을 죽이려고 했다.
윤씨의 증오심이 뱃속의 연산군 태교에 악영향을 끼쳤다.

궁녀는 모시는 후궁을 대신하여 매를 맞기도 했다.
잘못 경중에 따라 종아리, 허벅지 또는 엉덩이 매질.
엉덩이 매질은 직속상전이 때려도 참을 수 없는 모욕.

'궁녀에겐 종아리나 허벅지를 드러내기조차 수치.'

궁녀는 상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아비는 하나.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매맞는 일은 참기 힘든 모욕.

하물며, 엉덩이 회초리 매질은 국법으로도 금지된 일.
그러나, 구중궁궐 후궁들 간에 암투는 국법을 넘어섰다.
후궁 간 투기 다툼에 애궂은 궁녀가 매맞는 일도 잦았다.

 


후궁. 



궁궐에서 왕이 거처하는 곳이 왕의 첩이란 뜻으로 바뀐 말.
동궁(東宮)에도 태자비(太子妃)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후궁
왕의 후사를 위한 명분의 제도지만 왕을 단명하게 한 역효과.
왕이 여색에 빠져 정치적 혼란이 일거나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고려는 건국 때 지방호족과 공신들의 딸을 왕비로 맞는다.
그 결과 제1왕후에서 6비(妃)까지를 왕후라 칭하여 왕후 6명,
후궁 23명을 두었고 적처는 왕후, 후궁은 부인이라도 불렀다.

후궁은 정1품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훗날 궁주(宮主), 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으로 바꾸었다.

이조는 중국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왕의 적처를 후라 하지 않고 비로 호칭했다.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품계에 따라 빈(嬪 ; 정1품)
귀인(貴人 ; 종1품)·소의(昭儀 ; 정2품)·숙의(淑儀 ; 종2품)
소용(昭容 ; 정3품)·숙용(淑容 ; 종3품)·소원(昭媛 ; 정4품)
숙원(淑媛 ; 종4품) 직급에 따라 고유 직무가 부여 되었다.

빈과 귀인은 왕비를 도와 부인의 예(禮)를 의논
소의와 숙의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였으며
소용과 숙용은 제사와 접객의 일을,관장하였고
소원과 숙원은 평소 왕이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

왕비나 세자빈은 금혼령을 내린 뒤 간택하여 빙례(聘禮)
왕의 총애를 입거나 왕자를 낳으면 궁녀에서 소용·숙의
또는 궁녀에서 곧바로 빈으로 승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등.
후궁 명칭은 1897년(고종 34) 이조가 대한제국으로 되자.
중국과 똑 같이 귀비, 귀빈, 귀인, 등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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