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시대.
지리산은 금강산,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
동해 가운데 3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는 곳.
옛 문헌에는 지리산을 '地理山'으로 표기한 흔적.
고대 불교사회에서 문수도장으로 불렀던 지리산.
이성계가 이조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 기도
지리산만 반발했다하여 불복산(不伏山)또는 반역산.
역적을 지리산록으로 귀양 보내 일명 적구산(赤狗山)
여순사건에서 6.25를 거치는 동안 빨치산 근거지
지리산은 신라 5악 중 남악, 일명 지리산(地理山)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일명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깊고 깊은 골마다., 화전민 터 흔적들.
옛날부터 억압받던 민중들의 이상향 터였던 곳.
그러나, 그후 온갖 전란에 휘말려 사라진 마을들.
세석평전 음양수 인근,
대성골 단천마을 인근.
'원대성골' 안쪽 마을터
이외 수많은 마을 흔적들.
이조시대 지리산에 이상향을 일구려했던 민중들
잦은 전란과 사회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듯.
그렇다면, 이조시대의 잘못된 사회제도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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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통칭.
조선족은 중국 한족 외 55 소수민족 중 하나.
조선은 고조선에서부터 이씨 조선까지의 통칭.
우리 민족이 단군의 자손임을 뜻하는.. 조선.
지리산은 단군 이전부터의 역사가 숨쉬는 곳.
하여, 지리산 이야기에서 조선을 이조로 표기.
'우선, 이 점을 독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듯.'
이조시대 유교사상과 억불정책은 지리산에 큰 영향
이조시대 역사를 알면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
하여, 지리산에 큰 영향을 끼친 이조시대 정책과 풍습.
'지리산 이해에 도움될 만한
이조시대의 역사, 제도, 풍습.'
이조의 역사를 곰곰 되짚어 보면,
우리나라가 가야 할 미래가 보인다.
그러한 뜻에서 이조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꿈과 희망을 찾아내 보자.
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그러나, 군사를 되돌린.,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는 친명에서 친원 정책
명나라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된다.
고려는 최영이 중심이 되어 요동 정벌론 제기.
요동은 명의 대고려 전진기지인 전략적 요충지.
최영(팔도 도통사),
조민수(좌군 도통사),
이성계(우군 도통사)
당시, 고려 우왕의 명.
요동정벌론을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우왕에게 상서를 올렸다.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 등이 곤란하다.
습기로 활이 풀려 싸움을 할 수 없기에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불허.
이성계는 5월 20일 위화도 회군을 단행.
최영은 고려의 왕조를 지키려다가 장렬한 전사.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
517년(1392년~1910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조시대.
고려 말에는 귀족정치 중심이라 민생은 나날이 피폐
남쪽은 왜구의 잦은 침범, 북쪽은 홍두적 침략이 빈번
이런 난국을 극복하려 이조를 건국한 신흥 신진 사대부.
혁신천명(革新天命)의 유교적 왕도정치(王道政治) 주도.
중국 지배권이 원에서 명으로 바뀌자 역성혁명(易姓革命)
유교적 왕도정치를 내걸고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양반관료체제를 정비,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사상과 일본·류큐와 우호적 관계
동아시아 제국과 외교를 통해 국제적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조 역사는 전통사회기(1392∼1876년의 484년간의 역사)
근대사회기(1876∼1910년의 34년간의 역사)로 크게 나눈다.
한편, 건국 후 100년 간은 유교적 양반관료국가로서의 발전기
이조 1세기 동안은 국력이 신장했고
농촌사회의 경제생활도 안정 되었다.
세종·세조 시대에 개성있는 이조의 유교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다.
16세기 권력과 무력이 중앙 권력층에 집중되게 되자, 유학들이 반발.
여러차례 사화(士禍)를 거쳐, 16세기말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들 유림은 유교문화 정착에 성공했지만,
태평추구와 파벌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과 분열
국력을 쇄퇴시켜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국력이 약할때 침략을 받자
백성은 토탄에 빠지게 된다.
이조는 통치체제와 사회·경제 질서가 크게 무너져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에도 유교적 지배세력은 전통적인 구 질서와 기존체계 만 고수.
18 세기 전후 영조·정조 시대엔 정치적 개혁과 민족문화 부흥 운동.
이조는 중흥기를 맞지만 19세기에 보수적 유림세력이 정권을 장악.
일당 세도정치를 펴 이조왕국을 근대화의 역사적 흐름에서 뒤진다.
19세기에 들어와 천주교 박해, 세도정치, 외척의 융성, 부패와 수탈.
백성은 민생고에 시달리자 농민에 의해 민란이 빈번하여 혼란했다.
1660년대 통치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개혁정치로 왕권을 재확립
그러나, 그의 개혁은 유교정치의 부흥이 목적, 외세와 외래문화 거부.
프랑스와 전쟁(1866) 및 미국과 무력충돌(1871)을 일으키며 쇄국정책.
이조 말기는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일본으로부터 민족수호에 급급.
선진국 제도 및 문화를 도입하려는 개방된 개화 개국정책이 필요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깨우쳤던 개화파는 적극 개화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구 체제를 고수하는 보수세력과의 마찰로 일관성을 상실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거쳐 이조는 통치기반이 무력.
1894년 보수 집권세력의 착취로 고통겪는 농민들은 동학 혁명을 전개.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일본과 청나라간에 청일전쟁(1894∼1895),
두 차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
1894년 갑오개혁 자주민권 독립운동으로 대한제국으로 국호 개편.
강대국들인 영국,·미국 등의 국제적인 묵계 하에 이루어진 한일합방.
1910년 8월 마침내 일제는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식민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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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대원군은 이조의 3가지 병폐를 통탄한다.
<붕당정치> <평양기생>, 및 <전라 탐관오리>이다.
그러나, 정작 잘못된 점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문제.
농업 공업 상업 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을 천민 취급한 점.
일본은 장인을 각별히 예우했지만 이조는 쟁이라고 천시했다.
그 결과 이조에서 괄세받던 전문 쟁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한반도에서 천대받았던 족보까지 지워버리고 일본에 귀화.
그리고, 각분야의 장인이 되어 일본을 눈부시게 발전시킨다.
수백년간 기술을 후손에게 전승해 장인정신의 천국을 이룬다.
국제정세에 동떨어진 점과 양반 중심 집권세력을 고수한 점.
국가의 지지기반으로 고수한 일당독제가 망국의 원인이었다.
결국, 민심 이탈로 이조왕실은 힘없이 일본으로 넘어간다.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나라를 망친다는 역사적 교훈.
'민심은 천심이다.' 이는 곧 홍익인간 정신이고 단군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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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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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정치는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분립에서 비롯.
동인은 영남의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 서인은 이이의 제자들
동인 정계가 분화되며 이황 계통은 남인, 조식 계통은 북인
서인도 이조 후기에 들어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정치 세력이 붕당중심으로 결집되어 상대방의 비판을 인정하고
공론의 대결을 통해 정치가 운영되며 17세기 중엽까지는 안정화
그러나, 17세기말 숙종 이후 왕위 계승문제가 대두되며 일당 집권.
붕당의 균형원칙이 깨지고 집권세력이 나타나며 파벌간 극렬한 대립.
이조시대의 붕당정치란 무엇인가?
붕당은 요즘 우리나라의 '정당'이란 말과 유사하다.
정당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조는 국사와 민생은 뒷전에 밀어둔 채 당리당략 다툼.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일인 학자들의 시각이 주종.
정치란 원래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는 속에서 점진적 발전
이조가 국권을 잃은 것도 정치의 이런 난맥상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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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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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후기 평양 기생 67명 풍류를 '녹파잡기'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이 있다.
평양 관기(官妓)는 미모, 재능이 뛰어난데서 유래
'시(詩).서(書).화(畵)에 능하고
선비들과 자유롭게 교류했던 기생
그 풍류가 생생하게 드러난 자료.'
"아아! 첩의 나이 벌써 스물넷이랍니다.
언젠가 사내를 만나 그에게 속박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평소 꿈을 이룰 수 있겠어요.
봄가을 좋은 날에 거문고 안고 명승지에 가서
마음껏 노닐어 이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아야죠" -竹葉
"낮잠을 막 깼을 때 얼굴에 옅은 달무리가 생겨
봄날 같으니 교태와 부드러움 다 표현 못할 듯." -眞紅
'녹파잡기'는 두 권으로 이뤄졌다.
1권 평양 기생 67명, 2권 명사 5명
이 책은 1927년 국학자 이능화(李能和.1869~1943)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조 후기의 생활사.민속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듯.
황혼(黃昏)
실버들 천만가지 문 앞에 늘어져
구름인듯 인가를 볼 길이 없더니
문득 목동이 피리를 불며 지나간다
강 위에 보슬비요, 날도 저물어가누나
千絲萬縷柳垂門
綠暗如雲不見村
忽有牧童吹笛過
一江烟雨自黃昏
죽향(竹香) 作
호는 낭각(琅珏).
연우(烟雨) : 아지랑이 낀듯 내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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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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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세금, 형벌로 백성을 괴롭힌 벼슬아치.
민초들을 괴롭혔던 탐관오리를 혼내준 홍길동.
홍길동전은 어떻게 보면 국가체제에 대한 도전
사회 도덕 가치관은 물론 윤리관마저 뒤흔든다.
결국, 국가 통치 질서와 평화를 파괴한 스토리.
탐관오리 처벌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도덕관에 맞춰 법을 집행한다면 사회혼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행위.
홍길동은 의적, 사회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 이조 정권과 타협해 형조판서까지 지내게 된다.
결국, 외딴 섬에 율도국이라는 이상향 국가를 세운다.
이조 탐관오리가 존재하게 한 근본 원인은 형법.
이조의 형벌은 민초들에게 너무나도 잔인했던 듯.
이조 형벌을 재조명해 탐관오리들 비리를 들춰보자.
형벌.
이조는 한반도의 역대 어느 왕조보다 형벌제도가 지엄했다.
고려에서 계승한 5형(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을 기본
인신 구속기관을 직수아문이라고 하여 경국대전 등에서 명시.
군, 현의 수령은 장형 이하, 관찰사는 유형 이하 사건만 처리
사형은 3번 판결후 국왕의 재가에 의해서 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당쟁과 공리공론등 유교적 폐해에 젖어들며
행형에 대한 법치질서도 문란해져 남형의 사례가 빈번하였다.
특히 이조말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행형은 일반에게 더욱 가혹
이는 이조의 행형제도 전부를 왜곡시키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1) 태형(苔刑)
10대에서 50대까지 5 등급의 가장 가벼운 형벌이다.
대두경 2분 7리, 소두경 1분 7리, 길이 3척 5촌 매.
태형을 집행할 때 매의 가는 끝으로 볼기를 때렸다.
죄수를 형틀에 묶은 다음 하의를 내리고 엉덩이를 노출
댓수를 세며 집행하였는데 부녀자는 옷을 벗기지 않으나
간음한 여자에 대해서는 옷을 벗기고 태형을 집행하였다.
70세 이상 또는 15세 이하 및 폐질환자는 속전을 받았고,
임신한 여자도 70세 이상인 노약자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태형은 부정비리가 많아 1920년에 가서 완전 폐지되었다.
2) 장형(杖刑)
장형은 태형보다 중한 벌로 60대에서 100 대까지 5 등급
대두경 3분 2리, 소두경 2분 2리, 길이 3척 5촌 큰 회초리.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 행형제도를 개혁하며 장형은 폐지.
3) 도형(徒刑)
옥살이에 해당 관아에 구금하여 두고 일정한 노역에 종사.
1년에서 3년까지인데 도형에는 반드시 장형이 부과되었다.
염장 노역자는 매일 소금 3근을 굽고, 야철장에서는 철 3근
염장이나 야철장이 없는 관아에서는 관청의 잡역, 역체 노역
4) 유형(流刑)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
황무지 또는 해안 외딴 섬에 보내어 살게 하는 것,
유형은 극형으로서 사형에 대한 감형 또는 완화조치
임금의 사령, 또는 소결 등의 왕명에 의해서만 석방.
이조 정권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범들이 처벌받았다.
죄인에 대한 계호 및 처우 책임은 지방 수령에게 있다.
정치범에게는 식량 생활필수품을 관에서 공급해 주었다.
처와 첩은 동행하며 부모와 자손은 본인이 원할 때 허락.
이조 말 유형은 국사범에 한해 적용해 외딴 섬으로 유배.
처첩은 지방 관비로 자녀는 외딴 섬 노비 또는 지방 관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평생 재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 유형으로 죄인 가족을 국경지대로 이주시키는 형벌.
주거지를 벗어나면 도주로 간주해 엄한 법률로 다스렸다.
이조 초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이민정책의 일환으로 시행.
5) 사형(死刑)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며 교형(絞刑)과 참형(斬刑).
교형은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것,
참형은 머리를 잘라 죽이거나 능지처참하는 경우도 있다.
죄질에 따라 죄수의 머리나 시체를 매달아 백성에게 전시.
사형에는 대시집행과 불대시집행 두가지로 구분한다.
대시집행은 사형 확정 후 일정기간 대기하였다가 집행.
불대시집행은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즉시 사형을 집행
10악(모반 모대역 모반 부도 대불경 불효 불목 불의 내란).
사형은 3차례 재판을 거친 후 반드시 임금의 재결을 받았다.
사형은 집행방법에 대하여는 교 참 능지처사라고만 기록.
더 자세한 규정이 없지만 밧줄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형
목을 잘라 죽이는 참형의 경우에는 집행방법이 간단하였다.
능지처참은 국사범이나, 경계할 필요가 있는 반도덕적 죄인
일반에게 경계 목적으로 오살(五殺), 육시(戮屍), 거열(車裂)
여러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던 듯..
오살과 육시는 머리를 베고 팔, 다리, 몸을 자르는 극형
거열은 팔과 다리를 4 방향으로 우마에 묶어 찢어 죽이기.
그 외에도 사사(賜死) 또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있었다.
사사는 역모에 관련되었을 때 주로 행하여졌던 사약 내리기.
부관참시는 이미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참형.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된 죄인은 부관참시형.
죄수의 머리를 공중에 매달아 일반에게 보이는 것이 효수.
시체를 길거리에 버려 참혹한 죽음을 보게 하는 기시(棄市)
이조 말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파 요인들이 사형 후 효수.
6) 속전(贖錢)
형량을 선고받은 후 재산으로 대신하는 점이 벌금과 다르다.
속전은 중앙 집행기관 형조, 한성부, 사헌부에서 담당하였고,
지방은 각 수령이 담당하였다. 징수된 속전은 국가재정에 충당
7) 부가형
기본형인 5형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부가형이 있었다.
자자(刺字), 노비몰수, 재산몰수, 피해배상, 연좌제도.
자자형은 먹물 문신 형벌인데 주로 도적에게 부과되었다.
팔목과 팔꿈치 사이에 매자를 각 1촌 5분의 네모 안에 문신.
매획의 넓이를 1분 5리로 하여 먹물로 글자를 새겨 넣는 형벌.
전과자임을 알려 수치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요시찰 관리 인물.
얼굴에 자자하는 경면 죄인은 중종 20년에 단 두명 뿐이란 기록
도둑의 창궐을 막기 위해 생겼었다가 영조 16년(1740년)에 폐지.
8) 法外의 예
관에서 관습적으로 시행하던 주리, 태배, 압슬, 난장, 낙형.
권세 사가에서 임의로 행하던 의비, 월형, 비공입회수, 고족.
주리형은 결박한 양다리 중간에 2개의 주장을 넣어 가위 벌리기.
포도청에서 모반음모 연루자 조사 및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했다.
주리형은 풀려나도 불구가 되기 쉬워 엄격히 제한한 참혹한 형벌.
태배형은 태로써 등을 난타하는 형벌인데 고문의 방법으로 사용
목숨을 잃기 쉬운 형이었으므로 세종 임금 때 법으로서 금지했다.
압슬형은 이조 초기 무릎 위에 압력을 가하는 고문의 일종인 형벌
난장은 여러 명이 장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도 가리지 않고 난타
이와 비슷한 주장당문형(朱杖撞問刑)은 여럿이 죄수를 때리는 벌.
이때 사용하는 장이 붉은 색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형벌의 이름이다.
중종 6년(1511년) "난장의 형은 국법이 아니므로 이를 금한다"
영조 46년 다시 주장당문을 없애라는 하교를 내려서 이를 금지.
그러나 상,천민이 신분 높은 여자를 범하면 멍석말이 난타 관습.
낙형은 쇠를 불어 달구어 몸을 지지는 형벌로 영조 9년에 폐지.
의비형은 권세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때 코를 베어버리기
세종대왕은 이를 엄중히 금했고 역대 왕은 본 형을 엄히 단속했다.
단근형은 죄인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형벌로 도적 근절이 목적.
세종대왕 26년 황희정승의 건의로 단근형을 폐지하기로 한 사실
중종 5년 영의정 김수동의 건의로 영구히 폐지하는 영을 내렸다
월족형은 단근형의 일종으로 발뒤꿈치의 힘줄을 베어버리는 형
절음발이 앉은뱅이 형벌로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때 자행
패륜행위를 하는 자에게 문중 혹은 마을 사람들이 사벌했던 풍습.
비공입회수(鼻孔入灰水)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코에 잿물 붓기.
권세 사가에서 노비나 천민의 죄를 다스릴 때 사용된 경우가 있다
고족형은 발을 쪼개기로 권세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리며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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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이라는 어의를 지닌.. 팽형(烹刑) 형벌.
나라의 재물을 축내거나 탐관오리 서정쇄신을 위해 내렸던 형벌 제도.
종로거리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커다란 아궁이를 임시로 구축
가마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게, 나무를 쌓아 놓는다.
이 아궁이 앞에 병풍을 치고 군막을 둘러 포도대장 재판석을 설치.
죄인은 가마솥의 나무뚜껑 위에 묶인 채 꿇어 앉힌다.
포도대장은 엄숙히 죄명을 선고하고 처형을 하명한다.
가마솥에 미지근한 물을 담가 그 속에 죄인을 처박는다.
팽형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치뤄지는 사형과 같은 형벌
비록 생명은 유지될 망정 여생을 사형수처럼 살아야 한다.
일단, 팽형의 행형 집행이 끝나면 죄인은 가족에게 인도된다.
인도될 때 이 죄인이 산사람처럼 행동하여서는 절대 안된다.
마치 뜨거운 물에 삶아진 시체처럼 행세하고 가족들도 호곡.
죽은 가장을 대하듯 슬퍼해야 하고 또 장례식에 준하여 인도.
살아 있는 시체를 집으로 운반하듯 대성통곡을 하며 뒤따른다.
이 독직죄인은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식적으로 외출금지.
오로지 집안에 갇혀 가족하고만 살아야 하는 형벌인 것이다.
사람을 삶는 형벌인 팽형은 구한말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덧 말.
팽형은 징기스칸이 세운 원나라 몽골족 형벌.
고려시대 원나라로부터 유래된 형벌로 보인다.
팽형은 고려 제도를 계승한 이조시대에도 존속.
면신례(免新禮)
조선왕조실록에는 놀랄 만한 사실 기록이 많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코미디 같은 상황
태종 당시 일본 국왕이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라는 관청에서 길렀다.
날마다 콩 4∼5두를 소비해 관리들의 골머리를 앓았다.
공조전서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 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으며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라는 상황이 묘사.
코끼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사도 많을텐데 코끼리에 관한 보고가 계속 왕에게 올라왔다.
태종 13뇬 병조판서 진언에 따라 코끼리를 전라도 섬에 가두었다
그런데 코끼리가 수초를 먹지 않아 육지로 옮겼다(태종14년).
전라도 관찰사가 충청도·경상도로 옮겼으면 하는 보고서(세종 2년).
하지만 코끼리는 충청도에서 또 사고를 저질러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 발에 채여 죽었다.
충청도 관찰사는 다시 섬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
‘나라에 이득이 없습니다’
‘일년에 먹이는 콩이 수백 석에 이릅니다’
라는 말이 서로 입을 맞춘듯이 들어가 있다.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으면 이런 보고를 올렸을까?
아쉽게도 세종3년 이후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서 중 가장 특이한 내용
'왜 우리만 피해를 보느냐’는 내용의 보고다.
세종2년(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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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부를 상징하는 요즘처럼
이조시대의 가마는 부를 나타냈다.
벼슬이 높을수록,
재산이 많을수록
가마는 호화로웠다.
이런 이유로 관원들이 가마를 단속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 뇌물을 받아 말썽이 인 적도 있었다.
요즘이나 그때나 일부 단속관원들은 재량을 넘어
가마 탄 여인의 얼굴보는 재미에 빠져들기도 했다.
정조4년(1780) 3월18일
정언 이제만이 아뢰기를,
“여염의 젊은 아낙이 법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면
찾아 잡아서 감죄(勘罪)하는 것은 본디 법례가 있는데,
너울을 벗겨 보고 예쁘고 못난 것을 지점(指點)하며
조례가 다그쳐서 금품을 받아내는 것이 비일 비재하니,
형조 참의 이평을 파직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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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고루한 유교관에서도 유별났던 면신례 관습.
시험에 합격하면 한턱내야 하는 것은 이조 고유의 전통
벼슬을 얻은 신참은 면신례(免新禮)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신고식이 가혹해 폐단이 심했다.
신고식 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병을 얻을 정도
“(…) 가져다 쓰느라 허비하는 물건 값이 수만 냥이 되는데
신진(新進)인 빈한한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면 구걸
서울이고 외방(外方)이고 할 것도 없이 염치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부유한 장사치 데릴사위로 들어가
의뢰해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 심합니다.
또한 침학할 때에는 되도록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더러는 겨울철에 물에 넣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게 해
이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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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에 만 있는 독특한 풍습.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이조시대 풍습이 많이 남아있다.
관혼상제 허례허식, 직장의 상견례, 신참 신고식 등등.
웃어른 뵙고 인사하기 관습도 알게 모르게 이조의 전통.
이조시대에 만연했던 신참 신고식에 관해 알아보자.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풍습이다.
이조시대 관청의 '신참 신고식’은 전통적으로 엄격했다.
과거급제 신참을 숯검댕으로 만든 뒤 그 씻은 물 먹이기.
사모관대 한 채 연못에 뛰어들게 하여 고기잡이 흉내내기.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으로 정신적·육체적인 가학
'신고식 비용도 모두 신참부담이라 요즘보다 심했던 듯.'
신참·고참이란 용어는 비단 군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학교나 직장 등 어느 조직사회든 신참 새내기들이 있기 마련,
이들이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고참이 보살펴주어야 한다.
새내기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신고식 명분으로 새내기들에게 고통이 따르는 통과의례
특히 고통스러운 신고식 문화는 군대는 물론, 대학가에서도 성행.
대학에서 후배 길들기라는 명목으로
신입생 신고식이 버젓이 열리고 있다.
군대 신고식은 ‘얼차려’라는 이름으로 군기를 바로 세우기.
대학가의 신고식은 선후배 간 일체감 소속감 규율을 불어넣기.
범죄조직은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통해 동료 의식을 고취
이렇듯 신고식 문화는 우리 사회에 전통적으로 깊숙이 스며 있다.
대학에 갓 들어가 신입생 환영식 술자리 역시 비슷하다.
선배들이 강요하다시피 권하는 술을 다 마시면 인사불성.
신고식 통과의례 때문에 귀한 생명까지 잃는다는 보도까지.
심지어 유흥업소 직업 여성 간에도 신참 신고식은 관행.
신참 신고식은 고참 강요에 의해 손님 앞에서 행해진다.
신참은 고참의 무리한 요구도 관행으로 알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의 어느 집단이든 신참 신고식은 거부하기 어렵다.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가 성인 신고식을 치루기도 한다.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도발적인 매력을 보이기
또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숨겨진 각선미를 선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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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참 신고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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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의 '신참 신고식' 면신례(免新禮)가 그 뿌리인 듯.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신고식 문화 통과의례.
신고식 문화는 일제의 잔재가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풍습,
이조 권세가 자제의 방자한 태도를 꺾기 위한 신고식에서 유래.
이조시대 과거급제로 처음 관직에 나간 자를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했다.
말하자면 신참 관원에 대한 고참 관원들의 얼차려 통과의례인 셈이다.
이조의 신참들은 오늘날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뤄야 했다.
오늘날 신참 신고식 비용은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이조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비를 부담하며 면신례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했고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는 사례.
면신례로 인한 폐단이 많자 이조는 국가 차원에서 금하려고 노력
아직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서 면신례의 역사는 의외로 상당히 깊다.
태조 1년(1392) 11월에 신참 신고식의 폐단을 지적.
이성계 즉위 직후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풍습.
연산군 6년(1500) 8월 의정부에서 면신례 폐단을 지적.
중종 36년(1541) 12월 사헌부 상소에서 더 면신례를 거론.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방자한 기세를 꺾으려던 판결.
그러나, 그 판결 이후에도 면신례 통과의례 전통관습은 지속.
면신례는 중국의 당·송은 물론 원나라에서도 유례없던 일.
면신례란 용어가 처음으로 기록된 시기는 성종 6년(1475)경.
그 이전에는 허참(許參)이라 불리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즉 허참례란 신참 관원이 구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
인사드리는 예(禮)를 행하는 자리이며 고참이 신참과 상종을 허락
하여, 허참이라 하며, 다시 10여 일 뒤 면신례를 해야 구관원과 동석
관직에 올랐어도 통과의례를 거쳐야 현직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조시대 과거급제하면 어떻게 신고식을 치뤘을까?
이조시대에 과거급제를 하면 유가(遊街)에 나서는 풍속
유가란 과거급제를 주위에 널리 알리고 이를 자축하는 행사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마을을 돈다.
이때 나팔과 꽹과리까지 동원하고 마을잔치까지 벌린다.
수행하는 하인들은 행인들에게 길을 비키라고도 외친다.
신분이 높은 권세가가 길을 갈 때면 당연히 따르는 절차.
그러나 과거급제 하면 고참들에게 먼저 만찬을 베풀어 신고
그런 연후라야 과거급제를 해도 유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급제해도 일정 수습기간을 거친 뒤 벼슬을 받았다.
무관은 훈련원에 배속, 문관은 삼관(예문관·성균관·교서관)
혹은 사관(승문원 추가)에 나누어 배속되어 실무교육을 받았다.
예문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한림들이 근무하는 곳
성균관은 당대 최고 교육기관, 교서관은 서적 간행,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곳에 임시로 대기발령.
오늘날 관청에서 시보(試補) 내지 임시 대기직인 셈이다.
이때부터 문관은 삼관(혹은 사관)의 선배에게 신고 절차.
선배들에게 공손한 예를 다하지 않을 때에는 유가를 못한다.
신참은 유가 중 고참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했다.
삼관에 배치된 과거 급제자는 배속된 부서의 고참에게 인사
해당부서 관직 역임자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다니는 것이 관례.
이때 신참은 신상을 적은 자지(刺紙; 명함)를 가지고 가야 한다.
무명 한 필로 자지 석 장을 바꿀 수 있었으니 비용 부담이 컸다.
신참이 감내할 이러한 행위를 투자(投刺) 혹은 회자(回刺)라 칭.
이를 통해 선배 관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참은 인사 온 신참에게 우려낸 돈으로 잔치를 열어준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교서관에서 주관하는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열리는 장미연(薔薇宴),
여름에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국왕이 내린 음식으로 잔치를 열었던 관습이 변질된 것.
허참례(許參禮)나 면신례(免新禮)는 반드시 고참에게 음식접대.
이를 테면 청주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나물이 세 반(盤)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을 이 숫자에 맞춰야 했다.
만일 하나라도 격식을 갖추지 못하면 견책이 뒤따랐다.
이렇게 다섯 차례를 한 뒤에 다시 5의 수로 음식을 준비
세 차례 잔치후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서 그만둔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최종 절차인 허참연과 면신연.
사대부 권세 자제가 아니면 재산을 다 팔아야 할 일.
빚을 얻어서라도 행하지 않으면 동료들로부터 따돌림.
이조시대에 탐관오리를 양산하는 병폐를 빚어냈던 풍습.
이 통과의례를 거쳐야 정식 관원으로서 인정받는다.
장원급제후 승진하면 허참 순서에 따르는 것이 관례.
이조 관료사회는 위계질서를 엄격하게 존중하는 사회.
고참이 승진을 할때까지 후배 신참은 기다려야 한다.
법전에도 명시돼어 있는 이 제도는 차차천전(次次遷轉)
허참한 순서대로 천전(遷轉; 다른 관직으로 승진하여 옮겨감)
허참례후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관직을 기다리는 폐단도 있었다.
사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중 예문관 기강이 엄격.
관료 숫자도 승문원에 비해 갑절이라 소요 비용도 곱절이나 든다.
이런 술판이 벌어지면, 마시고 취하면서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노래
성종 6년 예문관 검열(정9품)에 제수된 조위(曺偉)가 행한 면신례.
유밀과에 소까지 잡아 잔치를 벌이는데, 현직 전직 한림까지 참여.
이미 다른 관직으로 승진해 간 한림 역임자가 선생 자격으로 참여
기생까지 동원하여 풍악을 울리며 흥건히 취하고 질펀하게 놀았다.
면신례를 주관하는 상관장(上官長)은 상석에 앉고
초청된 선생들은 정승일지라도 관원 사이에 앉는다.
각각 기녀를 끼고 앉는데, 신래와 짝 기생을 흑신래
상관장은 양쪽에 기생을 앉힌 채 잔을 돌리고 춤춘다.
이때 신래를 희롱하는 갖가지 놀이를 벌인 후 한림별곡.
고려시대 한림들이 부르던 노래로 고려사악지에 실려있다.
그런데 조위의 면신례 주연에 참석한 기생이 매맞아 죽는 사건
급기야 성종에게 보고됐는데, 옛부터 전통관례로 인정하고 불문
사관들이 금주법을 어겼다는 것만 가볍게 처벌하고 그냥 넘어갔다.
성종은 재위 8년에 친히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석전(釋奠)을 행한 뒤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한 적이 있는데, 사관 신래(新來)를 직접 불러
희학(戱謔)할 정도로 이미 면신례가 친숙한 풍속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면신례에는 신래를 괴롭히는 갖가지 침학(侵虐)과 희학(戱謔).
침학은 과도한 경제적 부담, 희학은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수반된다.
그 밖에 초도는 신참에게 강제로 열흘에서 한달을 연속 숙직을 맡기기.
희학은 연회 도중 간단한 게임이나 내기로 즉석 벌주
고참은 벌주가 없지만 신참은 벌주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
이때 신참은 난잡한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신고식을 당한다.
성종 때 대학자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그 실상을 묘사.
예를 들면 신참의 의관과 몸을 숯검댕으로 만드는.. ‘거미잡이’.
신참에게 시커먼 부엌 벽에서 양 손으로 거미잡이 흉내내기 강요.
그 다음에는 손 씻은 물을 강제로 먹이는 것으로 골탕먹이는 놀이.
방 안에 긴 서까래 같은 나무를 두고 들게 하는 경홀(擎忽)
신참이 들지 못하면 무릎을 꿇게 해 선배들이 차례로 구타,
사모관대를 한 채로 연못에 집어넣어 고기잡이 흉내내기 강요.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 바르고 얼굴에 오물 칠
겨울에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뙤약볕 쬐이기.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하는 옛 군대 신고식 방불.
신참을 괴롭히는 관습이 다양하여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 60에 처한다”는 경국대전 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부르는 신고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
승문원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 죽음.
관련자 대부분 태장 50도를 맞고 파직을 당하는 선에서 매듭
이 사건은 당시 신고식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래를 골탕먹이는 풍속은 성리학 명분에 어긋나는 일
그런데도 면신례는 다른 관직으로 옮겨갈 경우까지 확산.
그 대표적인 관직이 병조 낭관(4, 5품)이나 사헌부 감찰(6품),
이런 관직으로 진출할 때는 처음 관직에 들어설 때와 같은 신고식
이조·병조의 낭관은 각기 문·무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고,
감찰은 백관을 규찰하는 등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핵심 요직.
새로 감찰이 된 자를 신귀(新鬼)라 부르며 희롱하고, 몽둥이질.
급기야 그들이 부리는 아전이나 종들도 신참이 들어오면 면신례
아직 관직에 들어서지 못한 생원·진사들에게까지 신고식 문화
새로 생원·진사가 된 자에게 침학하는 풍속이 접방례(接房禮)
음식을 차리고 주악을 동원하는 것이 면신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조 관료사회에서 위계질서 관료주의는 매우 엄격.
같은 해, 같은 과에 급제한 동기생끼리는 매우 돈독
장유유서 유교사회에서도 동기생은 나이 불문하고 친구.
오늘날 법원이나 검찰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따지는 분위기와 비슷.
성종 25년(1494)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변종인
도총관 자리를 제수하였는데 무신으로 공을 많이 세워 공조참판
그 이후로도 변방 절도사 임무를 맡아 다년간 한양을 떠나 있었다.
하여, 그의 아내가 도성 안에 근무할 수 있도록 올린 상언이 수락.
변방절도사는 종2품 무관이니, 행정계통의 관찰사와 맞먹는 자리.
정2품 도총관은 수도를 지키는 오위도총부의 최고 자리니 총지휘관
그런데 도총관으로 부임한 뒤 허참례를 생략하자 아래 관원들이 반발.
새까만 후배가 원로 대신인 그를 “어이! 신참” 하고 불러댄 것이다.
이 사건은 이조의 허참례 풍습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대목.
계급을 떠나 그 부서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나를 따지는 풍속.
오늘날 장관이 직업관료들에게 휘둘리다 그만두는 사례가 빈번.
'신임 장관 길들이기'는 관료사회에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계급에 상관없이 새 부임자가 접대하는 상회례(相會禮) 풍습.
한 부처의 장으로 취임해도 신고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
업무의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지만 고참 관리의 폐단도 큰 병폐.
하여, 면신례를 거부한 이조시대의 뱃짱파 신참관리들도 있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배속된 이율곡
면신례 자리에서 고참들에게 공손하지 못해 파직.
이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서 면신례의 폐단을 한탄.
관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진흙에 굴리는 면신례의 폐단
율곡은 그 폐단을 강력하게 제기해 중지 왕명을 받았다.
허나 면신례는 없어지지 않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조의 신래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한층 성숙한 조직원이 돼 일체감과 소속감을 가졌다.
그들만이 갖는 철저한 동료의식과 소속부서의 소속감
그것은 임금과 대신들에게도 굽히지 않는 기개의 기반.
관료사회에서 면신례 통과의례는 소속부처 일체감 형성.
이조 관료사회 전통 관습으로서 오늘날까지 맥을 잇는다.
이조 신참 신고식은 장점보다 폐단이 더 많았던 듯.
신참 신고식은 소속 관청의 집단 이기주의 전통 관습.
오늘날까지 관료사회 고질적인 관습으로 뿌리내려 있다.
성상납.
화랑세기 필사본에 드러난 파천황(破天荒) 성풍속.
파천황이란 이 세상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뜻.
파천황 성풍속 중 자주 거론되는 마복자(摩腹子) 제도
'마복자란 아내를 상관이나 왕에게 바쳐 낳은 아들.'
신라처럼 근친혼 사회였던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
왕인 아메노피스 4세는 '신비한 파라오'라고 자처
첫번째 아내가 놀라웁게도 그의 친어머니 티티였고
둘째는 사촌 누이 네프리티티, 다섯째 아내는 친딸.
잉카제국 왕도 여동생이나 누나를 아내로 맞이했다.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트로브리앤드 섬 원주민 사회.
이곳 주민들은 결혼 전에 부모가 보는 앞에서 섹스
하지만, 결혼 이후의 혼외 섹스를 하게되면 곧 죽음.
뉴기니아 매리애드 아님.
동성애 및 윤간이 제도화.
인도 남쪽 말라바 해안의 나야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의 사회.
네팔은 일처다부제
남편들은 모두 형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그리스는 보편화된 동성애 관습.
현대 민주주의 문을 열었다는 장 자크 루소.
여자에게 맞으면 쾌감을 느끼는 피학증 환자.
............김부식「삼국사기」기록...............
내물왕 때 신라 남자들은 이모, 고모, 사촌과 결혼
어머니와 결혼하는 흉노족에 비해 나은 신라의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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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농사 짓는 풍경이 묘사되어 있는 청동기’
풍요를 기원하는 나경(裸耕) 풍속은 2천년간 지속.
5~6세기 경주 무덤에서 출토된 신라 토우 수십점.
신라인들은 성을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알려준다.
국보 195호 목 긴 항아리를 장식한 후배위 토우.
‘다리만한’ 성기가 삽입되길 기다리는 여성
그얼굴 표정에서는 희열과 설레임이 가득하다.
자위하는 모습, 섹스하는 남녀가 새겨진 토우.
돌이나 나무로 만든.. 6점 정도의 남근 조각.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소나무 남근
귀두 양쪽에 달린‘혹’으로 보아 자위용 같다.
'손’을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함이 눈길을 끈다.
2세기 한나라 제후 묘에서도 혹 달린 남자 성기
따뜻한 물에 담가 사용했을 것이란 중국학자 분석.
통일 신라인들도 고대 그리스 만큼
인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것 같다.
1970년대 말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남근
하필, 절에서 왜 남근 조각이 나왔을까?
고려시대 성교 장면을 담은 구리거울은 수두룩.
18세기 초 일본 통신사를 통해 들어온 일본 춘화.
19세기 김홍도나 신윤복의 낙관이 찍힌 것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고유의 성풍습.'
객지 손님이 들르면 융숭히 환대하는 관습
일본은 조상이 후손에게 방문한다고 여긴다.
하여, 음식을 잘 차려내고 옷과 잠자리를 제공.
삼국시대 과객이 왕족이거나 고급관리일 경우
심지어 딸을 동침시키는 성적 환대로까지 발전.
권력이나 이권을 위해 바치는 성상납인듯 싶다.
신라 문호왕 이복동생 '차득'이 무진주에 이르자
'안오'라는 관리가 첩을 인신 뇌물로 동침시킨다.
궁예 슬하 왕건이 정주 유천궁의 집에 유숙할때
양희수가 영암 수령으로 고을살이 내려가는 도중
장성의 한 장교의 집에 쉬어갈 때도.. 딸을 시숙.
시숙하면 첩으로 들여야 하지만 버리는 것이 관례.
일회용 환락의 성뇌물이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딸을 기적에 올려 성상납을 하기도 했었다.
옛날 원님은 형량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하여, 중 죄인은 딸을 기적에 등재해 달라는 첩지.
기적에 올린다는 것은 딸을 관기로서 바친다는 뜻.
즉, 원님에게 성상납을 해서 죄를 사면받기도 했다.
성상납에 희생된 딸은 효녀로서 우러름을 받게 마련.
또한 작은 고을 수령은 미모의 기생을 감사에게 상납
은결 좋은 큰 고을로 발령받았던 관례가 있었다.
성 상납으로 부정 축제를 일삼은 미인계의 전형.
대부분의 성상납을 매개로 한 접대 문화.
사회 각 분야에 걸쳐 관행처럼 된 성상납
따라서, 투명한 거래 관행이 좀 먹고 있다.
내시부(內侍府)
고려시대 최고 엘리트 집단은., 내시.
왕의 비서 역할로 막강한 권력 누렸다.
고려 때 환관과 내시가 구분되어 있었다.
내시는 환관(宦官) 내관(內官) 내수 등 명칭
서양에도 내시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싸리쓰’ 그리스어‘유누코스’
이는 ‘침실(寢室)을 지키는 자’라는 뜻
기원 전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로마제국,
인도 무굴제국과 터키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
서남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일부
이탈리아 유럽 일부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만 존재
중국 은(殷)나라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랜 역사
거세를 하는 궁형은 사형 다음 가는 중형인데,
한나라 경제 때부터는 사형수 중 뉘우치는 자는
궁형으로 감형 목숨 만 살려주는 관례가 있었다.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 이연년이 대표적 인물.
중국에서 내시의 수는 많게는 1만 3000명,
적을 때 3000명 많을 때 10만명이 넘었다.
전쟁 포로를 궁형(宮刑)으로 거세시킨 때문.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나오는
흥덕왕 원년(826) 환수(宦竪)’라는 것
고려 중기 전까지 내시는 최고 엘리트 집단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경전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하였고
때론 국왕을 대신해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고려에서 내시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
공민왕 때에 121명의 정원을 가진 내시부가 생겼다.
유계(兪棨) 기록에 의하면 명주실을 묶어 놓으면
피가 통하지 못해 결국 고환이 썩어 떨어져 나간다.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金東福·77)씨에 의하면
여의도(汝矣島)의 영등포쪽 샛강 근처 내시 시술소.
용추(龍湫)라는 연못 옆 움막에서 내시를 양산했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 있었다.
남근 부분은 남겨 놓은 채 정낭 부분만 제거하는 시술.
시술은 주로 비 오는 날, 천둥 번개가 칠 때 많이 했다.
수술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게 되는데,
이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면 혹독한 수련과정이 기다렸다.
왕 대신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내시.
내시로서 자질시험 또한 인내력을 연마하는 집중 교육.
예를 들면 고문에 얼마나 잘 견디는가 하는 교육이었다.
사정없이 물을 퍼 먹이기고,
나무에 매달아보기도 하였고,
코에 모래를 넣어 문질러대며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관문 통과
이렇게 내시부에 들어온 어린 내시를
정식 내관(內官)과 구분 소수 혹은 소환
관아에서 견습을 받은 후 실제 업무에 투입
정식 내시가 되면 내시부에 소속돼 다양한 업무 수행
대전(大殿), 왕비전, 세자궁, 빈궁(嬪宮) 등 음식물 감독,
왕명의 출납, 궁궐 문지기, 궁궐 안 청소 등이 주요한 업무
왕실 잠실(蠶室)에 파견되어 누에를 치는 잠모(蠶母)를 관리
왕릉을 보살피고 왕명으로 관리의 상가에 파견돼 왕 대신 부조
제사를 지내는 일 등을 하는 내시부의 정원은 16개 관직에 140명
이 중 종 2품 상선(尙膳)을 비롯해
종 9품의 상원(尙苑)에 이르기까지
관계(官階 :벼슬의 등급)자는 59명
내시는 어떤 식으로 승진했을까?
승정원(承政院)에 의해 1년에 4차례 인사고과
시험 과목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가운데 한 권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가운데서 한 권을 선택
하지만 35세가 되면 시험을 면제시켜 주었다.
이 나이가 되면 공부를 하기엔 무리이기 때문
내시는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시도 일반 사대부처럼 결혼생활을 했다.
내시는 성적 불구자이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양자(養子)제도를 통해 대를 이었다.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
양자는 많은 경우 한 집에 4~5명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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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환관(宦官)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1356년(공민왕 5) 환관 관직을 고쳐 내첨사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 궁위승 해관령
이어 이들을 관리하는 내시부를 설치.
관원으로 판사(判事:정2품)·검교(檢校:종2품, 정4품)·
동판사(同判事:종2품)·지사(知事:정3품)·첨사(종3품)
동지사(정4품)·동첨사(종4품)·좌승직(정5품)·우승직(종5품)
좌부승직(정6품)·우부승직(종6품)·
사알(정7품) 알자종7품)·궁위승(정8품)·
해관령(종8품)·급사(정9품)·통사(종9품)
우왕 때 권력남용이 문제되어 폐지
공양왕 때 다시 설치되었던 내시부.
내시는 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존재.
'신의 아들' 왕과 백성의 중간 역활.
내시는 거세를 하여 욕망을 초월한 존재.
내시는 왕에 버금가는.. '보이지 않는 실세.'
숙명적으로 왕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존재.
왕이 죽으면 생매장되어 무덤까지 같이 간 존재.
옛부터 '하늘의 아들' 천자로 여긴 우리나라
내시 역시 '천자' 왕과 더불어 별과 같은 존재.
왕을 신성화 한 <우리나라 역대 왕의 탄생 설화>
실질적으로 성상납 또는 정략결혼 소산물.
그러나, 대부분 탄생신화로 신격화된 왕들.
하여, 대부분 출생 신분은 베일 속 수수께끼.
'역사 상 출생 신분이 모호한 왕들..'
단군으로부터 동명왕, 금와왕, 추모왕(고주몽),
온조왕, 박혁거세, 김알지, 김수로왕, 석탈해,
탐라 3왕(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궁예, 견훤,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단군...................
삼국유사, 제왕운기 단군 설화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를 동경하여
풍백, 우사, 운사(천부인)과 신시로 강림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탄생한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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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북부여 왕으로서 알에서 태어났다는 동명왕
그외 우리나라 난생설화의 대표적인 역대 왕.
추모왕,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김수로왕.
동명왕은 우리에 버려지고 들판에 버려졌지만
짐승들이 보살폈고 장성해 북부여를 창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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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
금와왕은 부여 해부루왕이 길가 바위 아래에서 발견.
금빛 개구리 모습을 띄고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금와
훗날에 동부여의 왕으로서, 고주몽의 의붓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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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고주몽)..................
고구려를 창건한 추모왕은 일명 '주몽, 또는 중해'.
여기에서는 광개토태왕릉비 기록에 의해.. 추모왕.
아버지 해모수, 어머니 유화부인(동명왕신화와 흡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와 라이벌 관계.
하여 동부여에서 쫒겨나, 나라를 건국.
졸본부여 소서노와 연합해 건국한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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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백제의 초대왕인 온조왕은 비류와 형제.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남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비류와 온조는 서로 다른 길
결국 온조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된다.
(비류백제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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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박혁거세는 알영 부인과 결혼한 난세신화 주인공.
백마가 우는 거서간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우물에서 태어났다는 알영부인은 탄생시기가 서로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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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
궤짝 속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위에 까치가 있어 석탈해.
.....................김알지.......................
탈해 이사금 시절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그쪽(신라의 상징 계림)으로 가보니 김알지가 있었다.
선비족 계열의 기마민족들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로왕......................
'구지가'와 관계가 있는 그는 5명의 왕들과 함께 알 속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은 기마민족과 해양민족의 결합
..........탐라 3왕(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땅속에서 솟아 탄생했다는 신화 전설의 고향은 삼성혈.
.....................궁예...........................
5월 5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궁에서 쫒겨나고,
그로 인해 한쪽 눈을 잃은 궁예는 불국정토를 꿈꾸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청하였던 후백제를 창건한 통치자.
...................진훤(견훤).......................
상주 아자개의 아들이라 알려졌고 탄생설화는 2 가지,
상주에서 탄생한 것과, 무주, 즉 광주에서 태어난 설.
그리고, 진훤이 바로 지렁이 아들 즉, 지룡(地龍) 설.
...................태조 왕건......................
도선대사의 풍수지리설을 듣고 집 위치를 바꿔 탄생.
왕건은 바다를 접한 개성의 부호 호족 출신이라는 설.
무역 등을 하고 자라 상업과 국제정세에 남다른 감각.
.................태조 이성계....................
다루가치 출신 설이 있지만 특별한 설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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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수로부인 설화를 재구성해 엮은 장편소설.
소설 속 여주인공 수로부인을 서라벌 제일의 미인.
아버지의 정략결혼으로 성불구 귀족에게 시집간 여성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이조 때 사대부 가문과 내시 가문의 정략결혼
사대부 가문에서 딸을 첩으로 보낼만큼 적극적.
이조시대 내시에게 출가한 사대부 가문의 딸들
가문 권세를 위한 정략결혼 또는 성상납 희생물.
정승 반열 세도가문까지 경쟁적으로 딸을 성 상납.
내시는 궁녀와 함께 궐내에 상주하는 집단.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심부름 등
업무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항상 궁궐에 거주
국왕 측근에서 일하기에 보이지 않는 실세
궁녀들과 늘 함께 일하고 숙식을 같이하기에
아예 남성 기능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신체조건.
정치참여를 엄격히 금지하고 최고위직은 종 2 품
당상관(종3품) 이상 진급에는 국왕의 특지가 필요
사실상 하급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내시.
이조시대 내시들은 주로 어디에 살았을까?
종로 3가에서 동궐쪽 내관들이 많이 살았던 와룡동
종로 3가에서 비원으로 올라가는 동관길 양쪽 집들.
바둑대회가 자주 열렸던 곳으로 유명했던 운당여관
지금은 없어졌지만 비원 앞 일대는 유씨 내관의 집.
현재 효자동은 내시들의 사가가 밀집했던 옛 화자동
동 이름은 환관의 별칭인 화자를 따서 화자동.
거세할 때 불로 지져 최종 마무리하기에 화자.
내시가 되려면 누구나 우선 거세부터 해야 한다.
'왜 거세를 하면서까지 내시가 되려했을까?'
강남 잠실 국책 양잠사업 지역 감독관은 주로 내시.
그곳 일꾼이 모두 여자라 이조 조정에서 내시를 파견.
내시가 이조 왕실 및 국가 재산을 관리했음을 대변한다.
'하여 내시 희망자는 적지 않았던듯.'
거세한다고 모두 내시가 되지는 않았던듯.
일정한 교육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던듯.
내시가 된 후에도 일년에 4 차례 소양 시험.
'자격 미달이면 중도에 탈락된듯.'
장흥 유원지 삼상리는 옛부터 내시골.
옛부터 내시를 전문적으로 배출한 마을
아직도 그곳 내시는 삼상리 일대 어르신.
'이조 때 내시 권세가 하늘을 찌른듯.'
고대중국 '은 왕조'에서 비롯된 내시.
은왕조 무정왕이 강족 전쟁포로를 거세.
'강족'은 오늘날의 티벳 종족을 일컫는다.
'BC 13세기 경이므로 내시 역사는 3천년.'
9세기 신라 흥덕왕때 환관내시가 한반도 최초.
천명을 받은 황제와 백성간 중간 매개체가 내시.
내시는 천계에서 황제에게 봉사하는 숙명적 존재.
신성한 왕과 세속적인 인간들과의 중간역활.
스스로 기꺼이 거세해 충성을 맹세하는 존재
거세했기에 인간의 기본 욕망을 극복한 존재.
황제 또는 왕의 신비한 신성성을 높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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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진관내동 백화사 뒤 야산.
많은 상석과 비석들이 있는 내시들의 묘지
왕명을 받들고 전달했던 내시들의 공동묘지
내시 공동묘지가 있는 내시골이 진관내동.
내시골과 이웃한 그 바깥 일대가 진관외동.
북한산 자락 진관외동에 있는 사찰이 진관사.
북한산 자락에 있는 비구니 사찰 백화사
그 바로 뒤에는 이조 왕실 내시 공동묘지.
이조시대 퇴임 궁녀들이 여생을 보낸 백화사.
왕이 죽으면 궐밖으로 나와야하는 이조의 궁녀.
갈 곳 없는 궁녀들이 말년을 보내야 했던 백화사.
백화사 바로 뒤에 이조 고위직 내시들의 공동묘지.
궁녀와 내시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숙명적 운명.
그곳 공동묘지에는 성씨가 각각 다른 내시들의 묘비.
통훈대부 품계 내시부 상세직을 수행하던 승극철
맨 마지막 양위지 묘는 승극철과 그의 부인의 묘
이조왕실 내시도 결혼생활을 했음을 대변하는 묘.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내시 집안의 족보.
죽은 해와 일생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족보
양자로 대를 이었기에 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내시의 양자 후손이 키운 은혜를 못잊어 만든 족보
내시가 사라진 시기는 한일합방 두 해전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 관부를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
1908년부터는 궁궐에 머무를 이유가 없게 된 내시.
내시부 140명의 청사는 세종로 6부 청사가 있던 곳
내시부와 별도로 궁안 내시들을 위한 공간은 내반원
내반원은 왕의 집무실 선정전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
궁궐안 내반원은 내시 중 가장 핵심인물들이 근무처.
장기간 왕을 가까이 모시는 장번 내시들
왕과 세자궁에만 국한된 최고 권력층 내시
다른 내시들에 비해 권세가 당한 핵심 요직.
왕과 왕비의 대전을 지키지만 궁밖에 집.
교대 기간이 길었을 뿐 이들도 궁 밖에 가정.
와룡동 종로 3가에는 내관들의 집이 많은 곳.
비원 가는 동관 길 양쪽도 내관들이 살던 곳.
중국은 전통적으로 전쟁포로를 거세하는 풍습
궁형에 의한 거세한 자가 때로는 수만명에 달해
환관 내시를 구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이조시대에는 내시를 배출하는 사설 양성소
엄격한 선발과 일정 교육을 통해 내시를 양성.
중요한 국가 기밀을 서로 주고받고
국가의 비밀 사항은 왕을 대행한 내시.
왕명을 왜곡 전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왕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관료는 내시들.
왕의 수족이 될 수 밖에 없던 거세된 남자.
이조 시대 내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세.
내시에게 딸을 시집보냈던 권세 가문들.
하여, 부와 권세와 축첩까지 누렸던 내시.
그만큼 이조 시대에는 성상납 퐁토가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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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내시는 장원급제 등 엘리트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사립대학의 창시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 등등.
내시와 환관은 별개 존재였는데
원 간섭기때 환관의 역할이 부각
종전 내시가 가졌던 권한을 약화.
고려문관 내시의 기능을 환관 내시들이 차지
이조시대 수많은 환관들이 내시직에 진출한다.
고려 환관의 병폐를 바로잡으려 세운 내시 제도.
왕의 측근에서 근무하기에 왕명을 전달하고
궁궐의 궁녀들을 관리하기에 상당한 영향력
격변기에는 궁궐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위치.
관료들도 전혀 알 수 없는 국가 비밀들
간첩파견, 전쟁지휘, 궁중의 각종 공사.
나라 안 지방의 실정파악, 왕명의 출납.
이런 업무를 통해 치부할 기회도 많았다.
내시는 왕에게 봉사하는 운명적인 존재
하늘의 천명을 받은 신비한 존재..내시
천자와 백성이 만나기 위한 중간 매개체
신성한 존재와 속세의 사람들과 만남을 주선.
인간이면서도 비인간적인 요소를 지닌 존재.
거세를 했기에 인간의 기본욕망을 극복한 존재.
구한말 왕실이 해체되며 갈 곳이 없어진 내시.
그 후손이 모여사는 장흥 일대 삼상리 내시골.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전설의 고향..내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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