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6. ( 청학연못. 여기소. 기생. 관기. 풍류. 해어화. )

donkyhote 2010. 10. 29. 02:46

 

청학 연못.



.....1558년 남명 유두류록........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이라 부르는 곳.
바위로 된 묏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 뻗어
그 아래를 허리 굽혀 내려다 볼수 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

서쪽 푸른 벼랑 만길 낭떠러지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며
하늘로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 밑에는 학연(청학연못)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 상하에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 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다시 한 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다시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수북히 우거져 있고
물고기나 새 또한 지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중국 서부 약수보다도 아득해 보였다.
..............4월 19일에서 일부 발췌..............

세석평전은 지리산의 이상향 후보지 중 한 곳.
푸른 학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고향 청학동처럼.
불일폭포 근처 역시 이상향 후보지 중에 하나였다.

전쟁과 부역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만한 곳.
병을 치료할 약초가 풍부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곳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하고 물이 풍부한 곳.

넓은 세석평원은 이상향의 모든 조건을 구비한 곳
촛대봉에서 시루봉 사이의 숲속 어딘가에 연못 하나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


 

마실 만큼 깨끗하거나 맑지는 않은., 연못.

그렇다고, 외면할 만큼 혼탁하지 않은., 연못.

인적이 거의 없는 외딴 곳에 숨겨져 있는.,연못.

 

깊은 산속 맑은 샘물 대부분은 은밀한 여성에 비유한다.

그러나, 마실만큼 깨끗하지 않아 여성에 비유하기 부적합.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청학연못.


왜 그렇게 깊고 높은 곳에 연못을 만들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세인들이 청학연못이라 부르는 곳.
청학연못에 관한 지리산 탐구 모임들의 관심 집중.
그 탐구 모임들이 밝혀낸 청학연못 실체가 흥미롭다.

..................청학연못 찾아가는 길......................

도장골 따라 촛대봉을 오르면 뿌리 채 뽑힌 철쭉들
야생 멧돼지 출몰지역이라고 여겨지면 등골이 오싹. 

 그만큼 청학연못으로 찾아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다.


촛대봉 넘어 시루봉(또는 장군봉)으로 가다가
작은 빈터가 있는 곳에 서서 2시 방향을 본다.


희미한 발자취가 보이는 그 길 따라 내려가면
크랙이 있는 바위가 나오고 그 크랙 바위 직전
왼쪽으로 또 다른 희미한 족적이 보이는 등산로.

그길 따라 내려가면 청학연못이 정말 나올까?
혹시, 남부능선 어디쯤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마음속 가벼운 갈등을 느끼며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
그 바로 아래 작은 물웅덩이가 바로 청학연못이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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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랩이 앞 물길, 둥근 돌이 뒷 물길을, 막는 연못.
해발 1500m 고원의 연못은 누가 언제 만든 것일까?

'길이 10-15m, 넓이 6-7m. 깊이 1m 타원형 연못.'

연못에서는 심심찮게 용오름 현상이 일기도 하고
연못 풍경을 담는 카메라가 작동을 멈추는가 하면
다시 찾아가면 어디로인가 사라지기도 한다는 연못.

어떤 사람은 약 150년 전쯤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곳 대슬랩 위에 서면 삼신봉과 남부능선의 파노라마

아무 곳에서도 이곳을 볼 수 없지만
여기서는 지리산 남쪽 조망이 트인 곳. 


.....청학연못 등산코스......
거림골-세석-촛대봉-청학연못
-시루봉-북해도교-거림골 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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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어도 홀대하지 않고
보잘 것이 없어도 천대하지 않는
물길을 따라 걷고 길 따라 걷는 산

사방을 굽이쳐 흐르는 듯한 산하.
세상에 부러울 것이 따로 있으랴.
가슴 깊이 각인되는 산의 아름다움."

"바람이 불면 불어서 좋고
눈비가 내리면 그래서 좋다.

운무가 끼고 운해가 날리고
해뜨고 또 해가 지는 순간들
어느 한순간도 아름다운 시간."

 

 

 

 

여기소.


 

 

옛 성현들의 지리산 산행기에 등장하는 기생들.

바늘 가는데 실 가듯.,으례 기생을 대동했던 산행.

옛부터 풍류묵객과 기생은 떼어놓을 수 없었던 관계

 

그 사실을 대변해주는 여기소.
생극면 소재지 신양리에서 5㎞
음성 기점 19㎞ 지점에.. 여기소

약 20 평 너럭바위는 옛 선비들의 선유처(仙遊處)
어느해 여름 경기도 광주땅에 선옥이란 예쁜 기생
이곳 폭포수를 바라보며 줄을 타다가 몸을 날린 소.

선옥은 천하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기생.
그녀는 노래도 잘했지만 시작(時作)도 일품이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얼굴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

그 때 이 곳에 지나가다 잠시 쉬어 가게된 노승
은밀히 그녀를 불러 그녀의 죽음을 예고해 준다.

"얼굴을 보니 곧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살아나고 싶으면 내일 칠장사를 찾아오라"

"그 운명을 알고 있으며 피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 편안함이 고요한 대해(大海)와 같습니다.
그러니, 뜻은 고맙지만 스님은 염려 마십시오"

노승이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선옥이는 여러 선비들 앞에서 줄타기
폭포 중심으로 못(沼) 양쪽 나무에 줄을 맨다.

선옥이는 하얀 치마 저고리에 흰 버선을 신고
줄 위에 오른 모습이 한 마리의 백학과 같았다.
선비들은 넋을 잃고 그녀의 춤사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침은 고사하고 숨소리마저 죽인 선비들.
한번 지나가고 돌아가는 순간 몸을 날린 그녀

그녀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치자 경악한 선비들
하얗게 솟구치며 끓어 오르는 폭포수 속 물거품.
그녀의 시체가 떠오른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상처 한 군데 없는 그 아름다운 얼굴
흡사 생전에 얼굴처럼 온화스러운.. 혈기
기생이 죽은 웅덩이라 하여 여기소(麗妓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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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계곡에도 여기소.
'비구니 사찰' 백화사 가는 길목에 있는., 여기소.
이조 사대부들이 기생과 풍류를 나눴다는 피서지.

 

이곳도 기생이 죽은 웅덩이라 하여., 여기소.
현재, 은평구 진관내동., 여기소 마을 경로당.


기생이 연회 도중에 자살 했음을 뜻하는 여기소.
그러나, 이곳에 얽힌 전설은 맥이 끊어진듯 하다.
여기소란 지명만 죽은 기생의 애환을 대변하는 듯.

오죽 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백화사 뒷편에는 이조왕조 내시들의 공동묘지. 
백화사는 궁궐에서 나온 궁녀들의 노후 은둔지.
백화사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역활을 한듯 보인다.

 

백화사 계곡을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비경

개울가에는 기생과 풍류를 즐길만한 너럭 바위들.
백화사 계곡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커다란 동굴.

동굴 안에서 은밀히 솟는 샘물은 '여인의 상징'인듯.

 

민간신앙 기도처로서 각광받는 동굴. 

 

그 앞 암반 위에 목욕하기 적당한 소가 있다.

옛부터 이곳 기도처 여인들이 목욕재개하던 곳. 

그 뒤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계곡이 숨겨져 있다.


남근처럼 우뚝 솟은 용출봉.

여근곡처럼 은밀한 그곳 계곡.

그곳에서 흘러내려 고인., 여기소.

 

아름다울 려(麗)

기생 기(妓)

늪 소(沼)

 

 

 

 

기생.



19세기 평양기생에 관한 ‘녹파잡기’기록.
평양 기생 67명의 재주와 특징을 기록한 책.
경연과 화월 색향(色鄕) 이야기가 흥미롭다.

"노을빛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그녀 머리는 드높다."

의자에 걸터앉아 선비에게 버선을 신기게 한 기생
경연(輕燕)에게 버선을 신기며 귀공자 선비가 한 말.

"일찍이 봄날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비단 주렴을 걷어 달빛을 방으로 들인 그녀.
쓸쓸한 감정을 주체 못하며 나를 보고 반겼다." - 선비.

"달빛은 밝고 밤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

- 화월 색향(色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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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기녀를 배치한 이조.
관청의 행사와 관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했다.
따라서 관기가 기방을 차리고 손님을 받는 일은 이조 후기

기녀는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
각 고을의 지방기(地方妓)로 나뉜다.
기녀의 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

연회를 자주 연 연산조때 기녀 수는 크게 증가
한때 한양에 머문 기녀 수가 만 여명에 달했다.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에 따라 기녀 수가 정해졌고
평양과 같이 유명한 색향(色鄕)은 200명
규모가 작은 행정구역에는 20명 정도였다.

기녀제도는 이조의 유교관과 사회질서에 상반

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이조 초부터 활발했다.
그러나 기녀제도가 관리들의 처신에 직접 관련
그 때문에 폐지는 당시 현실로서는 불가능했다.

“전국의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받게 될 것
하여 기녀제도 폐지는 안된다”

오늘날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
결국, 이조 통치이념과 상반되면서도 구한말까지 유지.

관기란 여악(女樂), 의녀(醫女), 창기(娼妓), 등
이들은 천인으로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같은 존재.
기적에 올려지면 천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기녀.

양반과 혼인해도 그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기녀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된 채 세습.

늙거나 병들어 기녀 역할을 못할 때는
딸이나 조카를 대신 들여보내야 했으며
혹은 돈을 바치고 속량되는 경우가 아니면
평생 벗어날 수가 없어 대부분 모녀가 세습

그외 일반 백성이나 양반이 기녀가 되기도 했다.
흉년이 들면 흔히 여자아이는 기녀로 팔려갔으며,
역적 집안의 여자들이 강제로 기녀가 되기도 했다.

기녀의 활동기간은 15~50세인데 어린 기녀를 동기(童妓),
나이 든 기녀를 노기(老妓), 퇴역한 기녀를 퇴기라 불렀다.
체계적 교육을 받고 활동한 관기는 한양에 거주한 경기(京妓).

이들은 어린 나이에 기녀 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 15세면 기적에 올라 장악원 소속으로 본격 수업.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

이들이 상대한 부류는 왕족, 고관, 학덕 높은 유생
그러므로,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한명마다 담당선생이 지정되었고
악기 하나는 전문적으로 배우게 했다.

교육 내용에 대해 수시로 점검했고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면 벌을 받았다.
하여, 한양 기녀는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주는 중앙에서 가르치면 충분
인물에 있어서는 지방 출신도 필요했다.
하여, 지방기 중 출중하면 한양으로 발탁

옥 같이 흰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정갈한 얼굴
이런 미인은 각 지에서 선발해야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친 후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 2패, 3패 3등급

1패는 왕과 고관이 도열한 어전에 나가는 최상급 기녀
2패는 관아와 고관집에 출입하는 기녀, 3패는 하급 기녀.
3패 기생은 일반 백성들과도 상대하는..오늘날 공창 역활.

 

 


 

관기.

 



이조 양반사회에서는 축첩, 기생, 간통, 강간이 성행.
특히, 기생제도는 양반 남성들이 성적욕구 돌파구였다.
이조 양반들은 성리학과 유교관을 추구했던 윤리적 관념

축첩제도는 공인되었으나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금기.
여성은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벌받던 불균형 사회.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유감동(兪甘同).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고 그 아버지는 검한성 유귀수,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 감동은 당당한 사대부 양반기문이다.
만약, 그녀가 평민이라면, 남성 편력은 사건화 되지 않았을 듯.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 8월17일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아내 감동을 데리고 갔다.
밤길에 그녀를 겁탈한 김여달은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강제 통정.

그후, 병을 핑계로 한양에 올라 온., 유감동.
방종을 일 삼자 남편 최중기가 버렸던, 사건.

그녀가 관계한 남자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 40 명.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에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 판관 오안로, 前 도사 이곡
장연 첨절제사, 사직,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아치.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 수정장, 안자장, 은장(銀匠)과도 애정행각.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다.
정효문은 숙부 정탁이 감동과의 간통사실을 알면서 감동과 관계
물론 정효문은 정탁과 감동과의 관계를 몰랐다고 변명으로 일축.

40 여명과 간통한 유감동을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 9년 9월16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쳐 개가한 여인.
즉, 유감동이 최중기와 부부로 살 적에 김여달과 첫 간통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며 달아나 김여달에게 갔다.

하여, 그녀의 형량은., 중형벌
간통죄로 곤장 100 대 + 10 대.
그녀가 유부녀였기에., 10대 추가.

간통했던 남성들은 가벼운 처벌
곤장 40대, 곤장 100대, 태형 50대,
파면 등 다양한 판결을 내린., 사헌부.

유감동은 겁탈당한 후 두문불출해야 마땅.
그러나, 수치심도 모르고 오히려 방종의 길.
그것이 당시 사헌부에서 내린 유죄 판결 내용.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창기라고 행세하며
수십명 사대부와 관계를 맺어 장안에 소문이 파다.
그녀가 수치심을 더욱 더 갖도록 옷을 벗기고 때렸다.

유감동 사건은 원래 김여달의 겁탈에서 비롯된 사건
김여달은 어두운 밤 무뢰배와 작당하여 거리를 순찰.
유감동이 조사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위협과 공갈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밤새 희롱하여 비롯된 사건.

모든 잘못은 김여달의 강간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유감동이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후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 날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판결
이조시대에는 미혼남녀의 혼인전 관계도 간통죄 처벌.
유감동은 양반에서 8천민으로 전락., 변방 관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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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
화랑의 원화(源花) 또는 고려 시대부터 발생하였다고도 한다.
이밖에 전쟁 포로 부녀자의 노비화, 사노비의 매음녀화(천관녀)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및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化) 등

고려 문종 때 팔관연등회 여악(女樂)이 관기(官妓)의 시초
여악은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해 이조시대 들어와서 활성화
태조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

이조시대 관기 설치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
관기는 의녀(醫女)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 담당
상방기생은 연회 때 노래 춤 거문고 가야금 등 악기도 능숙.

관기는 지방관아 지방관의 위락(慰樂) 대상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등
역대 군주 및 왕족들은 기생을 즐겼던 인물들

이들 기녀들의 지방 가무(歌舞) 특색으로
안동기(安東妓)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의 송출사표(誦出師表),

관동기(關東妓)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의주기(義州妓)의 치마무검(馳馬舞劍),
제주기(濟州妓)의 주마지기(走馬之技),

평양기(平壤妓)의 창관산융마시(唱關山戎馬詩),
북청기(北靑妓)의 치마지기(馳馬之技),
영흥기(永興妓)의 창용비어천가(唱龍飛御天敬)

중종 때 의녀(醫女) 창기(娼妓)의 연회 참여를 금지
1510년 중종은 연회 때 의녀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
그러나 이러한 왕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기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가무 행의 시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그들이 대하는 상류층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券番)으로 개칭되어
서울 평양 기생학교에 15~20세 처녀를 입학
가음곡 예의 서예를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
성천(成川) 해주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시(詩)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로는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소백주(小柏舟)
의기(義妓)로 유명하기는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 등.

기생제도는 이조시대에 발전해 자리를 굳히게 되어
신분상 천민이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 


 

기생들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이조시대 혹독한 수련을 감래해야 했던 어린 기생들.
폭포수 아래로 잠수하기, 거꾸로 매달리기, 외줄타기
춤사위, 시조, 노래, 악기, 예절, 등 기본 수련 과정.

경기 중앙 관청에 소속된 기생은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기녀 소양을 학습.

교육과목은 가무, 서화,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이었다.
이들이 상대하는 부류가 왕족을 포함한 사대부들

예의범절은 물론 시문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중 창가에 속한 명기가 수없이 배출
송도 창기 황진이, 부안 창기 계랑이 그 예

기생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이조 시대 패션을 선도.
대중의 의복에 크게 영향력을 끼친 '유행의 선도자'.
금은 수식과 능라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기생의 의복

옷감은 중국제 비단을 비롯한 고급 소재를,
색상도 붉은색, 노랑색 등 화려한 색상과 수
신발도 가죽신에 수를 놓은 화려한 신을 착용.

금은으로 된 노리개와 일체의 장신구 등을 사용.
머리치장도 높이 얹어 화려하고 사치한 머리 장식
남성 눈을 끌기 위해 여성적 매력을 드러낸 차림새

저고리 길이는 가능한 짧게 입어
흰 치마에 허리 일부가 나오게 하고,
겨드랑이 살이 살짝 보일 정도로 입었다.

한편 아래로는 치마 밑에 많은 속곳을 입어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여 Erotic을 강조했다.

유교사회에서 남녀 내외법에 의해 썼던 쓰개
이들에게는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쓰개로 사용.
신분 높은 사대부 및 풍류 묵객들을 사로잡았다.


 

 

 

풍류.

 



풍류(風流)란 속되지 않고 운치가 있는 일.
<삼국사기> 진흥왕이 설치한 화랑제도 기록.
최치원이 화랑 난랑을 위해 쓴 난랑비 서문 중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3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풍류.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

공자의 가르침,
노자의 종지(宗旨)
석가모니의 교화사상.

신라 유불선(儒佛仙) 3교 이전 가치관
또 풍류의 수련자들이 바로 화랑이었다.

화랑의 교과목 3가지

① 도의로써 몸을 닦기,
② 노래와 춤으로 즐기기,
③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기.

고려 궁중의 연중행사 팔관회
양가의 자제를 뽑아 춤과 노래
고려 풍류 문화가 이조 때 계승.

고려시대 음악과 노래에서 제외된 노래.
이조시대에는 음악 만을 풍류로 일컫는다.

시문(詩文)·음주가무·청담(淸談) 등을 즐기는 풍류.
선비들의 우아한 태도나 생활을 풍류라고도 일컬었다.
이조 때 풍류는 예술에 의한 탈속성과 술에 의한 무아경

 

 

 

헤어화.

 

 


신라 화랑 문화가 이조시대에 들어와 변질된 풍류.
남무(男巫). 창우(倡優). 유녀(遊女). 무동(舞童).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질탕하게 노는 뜻으로 타락.

기생이란 해어화, 유녀, 노는 계집, 의녀,
기녀, 예기. 의기. 은근짜. 탑앙모리, 창기,
여사당, 현지 처, 색주가(작부), 창녀, 갈보,

양공주.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호칭.
기생이란 곧 몸 파는 여성을 뜻한다.

이조 유림들이 세종대왕에게 상소한 관기제도 폐지.
기생 때문에 추한 반목과 유흥 폐해가 적지 않은 탓.
훗날 좌의정까지 지낸 청백리 허조(1369~1439)는 반대.

"남녀관계는 인생의 큰 욕구 중 하나라 금할 수 없다.
관기를 없애면 인재들이 어염집 처자를 범해 벌받는다"

'중종 때 대사헌 조광조(1482~1519)는 여악 폐지를 주장.'

당시 관기로 인한 퇴폐풍속을 고치려다 반대의견에 부딪쳐 좌절.
1945.8.15 해방후 성매매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했지만 실패.
수요와 공급이 맞고, 성매매에 대해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한몫.

2004년 11월 23일 성매매 처벌법이 시행후 성매매 논쟁이 다시 가열.
인신매매.감금 성매매를 엄벌하고, 성매매가 근절돼야 한다는 공감대.
그러나, 문제는 성매매를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

2004년 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매매 산업 현주소.
총 규모는 연간 24조원으로 국내 총생산(GDP)의 4.1%를 차지한다고 한다.
매춘여성은 33만명이지만 성매매 종사자는 150만명이란 여성단체도 있다.

고려 이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기생문화는 정치와 외교의 산실.
성종, 연산군 시절 기생문화는 왕족, 양반들의 위안물이었을 뿐 아니라,
두만강 6개 진에 파견해 병사들을 달랬고, 외교사절에겐 관기를 제공했다.

'이조 후기는 관기로 외교를 유지해야 할 만큼 정권 밑바탕이 취약.'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슬프고 가련한 천민이다.
한 여사당의 노래인 <여사당 자탄가>는 이들의 신세를 잘 보여준다.

한산 세모시로 치마저고리 예쁘게 차려 입고
안성 청룡사로 줄타기 놀이를 하러나 가세나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핥고 저놈도 핥네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조선 해어화사 中에서-


구한말 대원군은 평양기생을 나라의 3대 병폐로 지적한다.
평양기생이 어떤 존재였기에 나라의 일인자가 지적했을까?
평양은 옛부터 기름진 옥토로 모든 것이 풍부한 천혜의 땅

옛 벼슬아치들은 평양기생과 멋지게 놀아보는 것이 꿈.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땡전 한 푼 남아나지 않을 망정.
벼슬아치라면 평양으로 발령받는 그 자체가 소원이었다.

평양은 이조시대에 첫손가락 꼽는 색향으로 명성 높았다.
예전에 개성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아 송도(松都)
평양은 흐드러진 유흥을 상징하는 버들이 많아 유경(柳京)

개성에는 절개과부가 많고, 평양에는 풍류기생이 많았다.
평양은 명기의 고장이라 한양기생을 주로 공급하는 고장.
18세기에는 80 여명 정도였지만 16세기 말에 약 180 여명

평안감사로 도임하면 기녀들 200 여명이 길가에서 영접.
마치, 꿈속에서 도원경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평양은 대동강가의 경치가 일품이고 어여쁜 기생도 많아,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

평양은 예로부터 중국과 이조 사신들이 오가던 길목
하여, 평양기생이 유명해진 것은 지리적인 특성 때문.

관기는 대부분 인물이 곱고 재주 많은 천민 소녀 출신.
이조시대에는 기녀 양성소 교방에서 특별 교육을 시켰다.
기생들은 공식적으로 1년에 백미 한 섬을 연봉으로 받았다.

그러나, 연희에 불려가 몸 팔아 받는 해우채가 주 수입원.
하여 풍류양반 중 기생에 빠져 가산탕진하는 일도 비일비재
'이춘풍전' 이서방이 재산을 기생에게 빼앗기는 소설이 대표적.

이와 반대로 몰락한 사대부를 입신양면 시킨 기생도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한 의기 계월향.
훗날 시인 한용운은 계월향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한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 볕을 받치고 매화 가지에
새봄을 걸어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오.”

선조 때 시재에 뛰어나 천재칭송을 받았던 임제(林悌)와
화담을 나눈 평양 기생 한우(寒雨)를 먼저 손꼽을 만하다.
한우와 술잔을 나누던 임제가 슬쩍 한우의 마음을 떠본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이 업시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 임제 -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 -

지금도 평양 예술단원 여성들의 미모는 세계적으로 유명.
평양 기생은 사내들이 애간장을 태우며 한번 보기를 열망,
구미호가 환생한 여인처럼 한번 빠져들면 패가망신할 정도

만석군의 전답이 다 들어가도
그 흔적 조차 없다는 평양기생.
만석 전답보다 넓다는 한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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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녀 제도는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유녀에서 비롯, 관기가 전국 관아에 배치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에도 기녀가 있었던 듯 싶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
신라 초 진흥왕 무렵 원화제도, 백제 '꽃쟁취'라는 유녀
우리나라 기녀 역사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구려가 정벌한 부족들의 부녀자들이 유녀로 전락
그러나, 유녀가 관기가 된 때는 중앙집권이 정착된 고려때.
이조때는 기녀 이외에 유녀 집단이 존속되어 유녀금론이 대두

이조때 기녀란 원칙적으로 관기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녀란 가무 기예를 익혀 나라에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인
따라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신분 상 천민에 속했다.

관기는 또 경기(京妓)와 지방기(地方妓)로 나뉘어 졌으며,
지방기 중 자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으면 경기로 뽑혔다.

경기 중에는 내의원 혜민서에 속해 있는 의녀가 있고,
공조상의원에 침선비가 있었다. 즉 내외법이 엄격해져
부녀들의 질병까지도 남자 의사에게 보일수 없게 되자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 의녀로서의 기녀였던 것.

침선비는 왕과 왕비의 의복을 짓는 일을 하는 기녀였다.
그러나 이들은 약방기생,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도 겸했다.
의녀들은 주로 궁중에서 비빈, 나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연산조에 들어와 일반 관기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시켰다.
나중에 의녀들의 궁중 연회 참석을 금지 시키려 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 이들은 이조 말까지 진료와 가무를 병행.

민간에서는 이조 중엽까지 창가비라는 성비와 가비가 있었다.
기녀들은 젊고 아름다웠고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되는 존재였다.

기녀는 관아에 소속된한 노예로서 세습되었고,
일단 기적에 오르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었다.

기녀는 열다섯 살부터 쉰살까지 있었는데,
어린 기생은 동기, 나이가 든 기생을 노기.

열다섯 살이 되어 기생명부에 오르면
교방에서 음률을 익히면서부터 기녀의 길
일정 교습기간이 끝나면 행수기생이 엄한 제재

기생 안배는 주로 호장이 맡아 했기에
아전과 기녀는 떼려야 땔 수가 없는 관계.

기녀의 옷차림은 이조 여인들 옷차림에 상당한 영향
기녀는 매우 사치하고 요란스런 복장을 즐겼 입었다.
비록 창기라 하더라도 모두 능라 비단이 허용되었다.

즉, 기생의 능라비단 옷은 양반 여인과 동등한 예우.

그러나 궁중연회에서 국빈을 대접할때에는 흑색 옷만 허용
대궐에서 가무를 맡은 정재의 옷은 붉은색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겹치마 사용은 금지되었으며 옷소매는 일자형이었고,

치마도 오른편으로 여미게 해서 양반 부녀와 구별했다.
단 약방기생쯤되면 예복으로 녹의홍삼에 큰머리를 하고,
고름에는 침통을 찰 수 있는 이례적인 대우를 하기도 했다.

기녀들은 일반 부녀자와 달리 속곳을 치마밑으로 노출
또 저고리 길이를 짧게해 치마 허리가 드러나게 입었고
이 치마 허리에는 갖가지 화려한 수를 놓아 멋을 내었다.

또한 남자의 눈길을 끌려고 속곳을 노출시켰지만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둔부를 부풀려 매력을 강조.
고쟁이 위에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단속곳을 입었다.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임신을 했어도 감추기에 적당.
겹겹이 껴입은 속곳은 남자를 애태우는데 매우 효과적.
사치노예 기생의 옷차림은 일반 부녀자에겐 부러움의 대상.

즉, 기생들의 겨드랑이 살이 보일 만큼 짧은 저고리
평민 부녀자들에게까지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다

기녀들의 옷차림을 일반 부녀자들이 은근히 동경하여
본받으려는 일반 부녀자 때문에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이조 중기에는 사치를 금하는 여러 금제조항이 내려졌다.

장신구 역시 기녀들에게는 예외적으로 많이 허용되었다.
후덕함을 강조한 일반 부녀자들의 몸치장은 규제한 반면
마음껏 사치를 누린 기생은 일반 부녀자에게 선망의 대상. 

'말하는 꽃'이란 뜻으로 '해어화(解語花)'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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