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5. ( 김영한 보살. 대원각. 황진이. 무소유. )

donkyhote 2010. 10. 29. 02:46

 

 

김영한 보살.



성북동 길상사 <침묵의 방>은 하루 이용인 600 명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은 1500 여 명이 찾는다.
수녀들도 즐겨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이곳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인 대원각 터.
우리나라 3대 요정이 위치한 곳은 공교롭게 청와대 인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치권력 심장부와 함수관계일까?

이조시대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쉬어가던 기방.
이조시대 궁궐기생 소춘풍과 성종과의 몰래 한 사랑.
우리나라의 3대 요정은 베일에 가려진 안가와 같았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간 되풀이
아마도 이런 기이한 실랑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재를 뿌려준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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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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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의 수식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주차장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 위에 연꽃 스티커

따뜻한 차 한 잔, 부담스럽지 않은 침묵, 고요한 산책.
반나절 여행으로 서울 도심에서 세 가지를 즐길 만한 곳.
성북동의 조용하고 큼지한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길상사.

세속에 있으나 세속적이지 않은 사찰로 알려진 길상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이 있는 곳.
요정 대원각 시절의 낡은 소슬대문이 지금 길상사 일주문

건물의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 지붕을 뒤덮은 천막
사천왕문도 해탈문도 없지만, 설법전 앞에 가녀린 보살상
이 보살상은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

울긋불긋한 단청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 차 마실 수 있는 다원

'작은형제 수도회' 수사님들이 길상사에 부할절달걀을 선물
12월 중순 길상사의 프랭카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수녀님들은 경내만 산책하지않고 길상사 '침묵의 방’도 애용.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
캐돌릭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잘 쉬다 갑니다. 모두 감사해요.”

요정 대원각을 사찰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에만 적지 않은 비용
그래서 길상사는 현재 개보수 비용을 빚으로 짊어진 가난한 절.
대웅전, 관음전, 사천왕문, 해탈문도 없고, 석탑 하나도 없는 절.
그런데도 개원 2년 6개월 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절.

법정스님의 법문이 있는 짝수 달 셋째 일요일의 가족법회
천 명에서 이천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그야말로 인산인해.

길상사에 가면 유명인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요일 별로 당번을 정해 자원봉사하는 '보현회' 회원들.
기업체 사장 부인, 중학교 여교장, 공직자 부인에서 교사,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봉사활동.

길상사 법회 날에는 길목 어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남자들
교통정리, 주차관리, 사찰 안내를 도맡아 하는 거사림회 회원
기업체 사장, 공직자, 의사, 교사, 전문직 종사자 등 각계각층.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때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먹을 적마다 이 게송을 외우면서
뼈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는 고백들.

길상사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부를 넘보지도 않으며
허황한 영예를 쫓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누가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건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 둘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를 찾는다.
예전에 고기 굽는 냄새 진동했던 대형 음식점 대원각(大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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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지 주지육림 국내 3대 요정으로 알려진 대원각.
음주가무 풍류객들이 드나들던 출입문은 그대로 일주문
'금실'과 '은실'이 들어 있던 중앙 신관은 법당(극락전)

대원각의 오른쪽 대연회장 '송실'은 설법전으로 꾸며졌다.
경비실 겸 운전사 대기실로 쓰였던 출입문 옆 팔각정은 종각
대원각의 물레방아가 있는 계곡 옆 별채 「특실」은 스님 선방

김영한 할머니가 6·25전쟁 중 당시 6백 50만원에 터를 매입
건물들을 앉혔을 때 법정은 출가 3년 전, 전남대 철학과 학생.
대원각의 주차장과 테니스장 자리에 언젠가 대웅전이 들어설 곳.

지난 10년 갈비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지육림 터였던 대원각.
김영한 보살 장례식의 상주 호스티스만 2백명 넘었던 고급 사교장.
승속일체(僧俗一體)의 가람 대들보마다 아직도 배어있는 고기 냄새.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사찰로 뒤바뀐 옛 요정 대원각.
이 터가 오늘날 길상사를 있게 한 것은 믿기 어려운 과거지사
'길상화 보살'은 생전에 수십년 전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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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부근을 지나치는 일이 있었지요.
지금처럼 주변에 저택들이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그냥 산중이었지.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
전란 중에 켈로부대가 주둔할 때는
무슨 산적 소굴 처럼 으시시했지요.

나는 이 터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어요.
포근하고 마음이 턱 놓이고…
이런 곳에 내가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끌리는 거였어요.

말로는 참 표현하기 힘든 그런 마음의 조화였어요.
내 첫 남자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끌림.

신기한 일이라고 할 밖에요.
그로부터 몇년후 우연한 기회에
그 터의 주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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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料亭)이란 '요리집’이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방식이다.
즉, 대원각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식 요정의 선두 주자였던 곳.
구한말 기생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며 기생청 대신 권번

권번에서 기생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였으며 세금을 부과했다.
하여, 기생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화와 양성화를 유도.
그 후,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되었다가 2차 대전 막바지에 폐지.

권번에서 운영하는 기생집들을 일본인들은 요정이라고 불렀고
그 이후 기생집 또는 방석집, 고급 술집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해방 후 6·25와 5·16을 거치면서 권번기생들은 없어지고
대신 접대부를 고용해서 고급상차림으로 유흥업을 하는 업소
요정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사정권 시절의 요정정치.

과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요정에서 국정을 논의
흔히, 밀실정치(요정정치)란 고위급 정부관료들의 연회장소이다.
비지니스를 위해 접대 공간인 룸싸롱도 현대사회 정경유착의 산실.

8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던 대원각.
대원각이 사찰이 되기 전까지는 요정에서 음식점으로 탈바꿈.
그 때 이미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할 마음을 굳힌 듯.

가난한 탓에 부실한 신랑에게
몸 팔려 시집 간.. 15살의 미순.

그녀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
우물에 빠져 죽었던 부실한 남편.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미순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기생의 길'.

바람에 달 가듯 떠돌던 김삿갓 같은 백석.
기생이 된 여인 가련과 운명적인 첫 만남.

22 나이에 첫 사랑을 느낀 가련
사랑에 빠져들고 김삿갓은 떠난다.

그후, '백석'과는 남북 분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
통일이 되어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혼자 산 그녀.
백석이 돌아올 날 고대하며 모은 전재산을 시주하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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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애절한 첫 사랑, 백석!..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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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白石)은 1936년 시집 ‘사슴’을 발간하며 문단에 등단.
우리 말의 멋과 맛을 주옥 같이 담아낸 이 시집은 단 100부만 출간.
시인 윤동주마저 그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으로 베껴 간직했었다.
시인 신경림(申庚林)은 6·25 후 헌 책방에서 이 시집을 찾아내고 감격.
‘사슴’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 구실을 했다”고 되새기기도 했다.

백석의 시(詩)는 평안도 방언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낸 맛.
남쪽에서는 정지용, 북쪽에서는 백석 이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향 선배 김소월이 '한과 절규의 시'라면 백석은 '내면의 피울음'.
그는 결벽증이 유난해 전차 손잡이도 손수건으로 감고 잡을 정도.
그가 광화문을 걸으면 거리가 '파리'처럼 환해질 만큼 멋쟁이였다.

그러나, 타고 난 방랑벽은 어쩔 수 없어 만주로 떠나 온갖 고생 자청.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당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 남게 되자 그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지워져간다.

백석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끝내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이 다시 문단에 복귀한 것은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

그후, 그녀는 아낌없이 사재를 털어 '백석 문학상'을 후원.
그녀가 얼마나 '백석'을 사랑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

'그녀가 시주한 대원각은 원래 어떤 곳이었을까?




대원각.



김영한 보살이 몸담았던 대원각은 국대 3대 요정 중에 하나.
'제 3 공화국의 요정 정치'가 정치와 경제를 주름 잡던.. 시절.
그 사회적 배경을 타고 급성장한 대기업 규모의 요정이 대원각.

일본 기생파티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로 줄줄이 요정 찾던 1970년.
관광산업의 꽃 요정은 굴뚝 없는 공장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당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될, 외화획득 수입원으로 각광 받기도 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6.25 사변 이 후..굶주렸던, 보리고개를 거쳐.. 새마을 운동..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움틀 무렵.
꽃 다운 처녀들 개나리 봇다리 짊어지고 무작정 상경하던 시절.

'구로공단 수출역군' 여공들이 저임금 직업병으로 고생한.. 시절.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 대중교통과 남녀칠세부동석이 공존하던 시절.
우리나라 고유한복으로는 도저히 만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던 시절.

'특히 여성은 활동적이면서도 간편한 옷차림이 필요했던 시절.'

고루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미니 스커트 붐이 일던 1960년 대 말.
남녀유별 금기가 깨져나가며 명동 거리에 불어온 미니 스커트 열풍.
1970년대 미니 스커트가 하늘 높이 치솟을수록 성풍속은 개방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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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니 스커트 정도 여성 각선미 노출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1960년대 여성의 미니 스커트 옷차림은 충격적인 유행.
하여, 서울 도심 곳곳은 전설의 고향 '표모탄'으로 변해가는 듯.

한강 광나루에는 옛부터 표모탄(漂母灘)이라 불리웠던 전설의 여울.
10 년 수도 끝에 하늘로 오르던 신선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그곳에서 빨래하던 여인 '표모'의 치마 속 다리를 엿보고 넋을 잃은 탓.


'신선도 떨어져 죽게 할만큼 매혹적인 각선미였을까?'

이조시대 사대부 가문의 여성의 다리 및 각선미 노출은 금기사항.
특히 고대 중국에서는 여성의 다리 뿐만 아니라 발의 노출도 금기.
우리나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버선 위에 겹겹이 감싸 입었던 치마.
특히, 처녀들은 버선을 스타킹으로 치마는 미니 스커트로 바꿔 입었다.

'여성 옷차림이 바뀌자 성풍속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

해 저문 공원, 숲속, 승용차에서 미니 스커트 옷차림 애정 행각.
인물 고운 명문 여대생들까지 은밀한 요정 아르바이트로 학비 마련.
기생 파티 일본 관광객들이 처녀의 순결을 소 한마리 가격으로 흥정.

요정마다 일본에서 몰려 든 기생파티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던 시절.
요정이 풍류 문화의 산실에서.. 밀 매음 거래 장소로 탈바꿈할 무렵.
한복 단장한 요정 처녀가 2차 나갈 때에는 미니 스커트로 화려한 변신.

여성들의 순결에 대한 가치관이나 도덕관념도 나날이 변해간다.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관한 고루한 관념도 서구적으로 바뀌어 간다.
은장도로 목숨걸고 지켰던 정절관념도 황금만능주의 앞에 무너진다.

아울러, 기생은 젊고 아름다움 자체가 상품 가치.
청초하고 순결한 매력은 가치를 논할 수 없을 정도.

...................... 여상십구(女相十俱)...............................
장목려안(長目麗眼) : 눈이 길쭉하면서도 눈매가 고와야 하고,
고비복두(高鼻福頭) : 콧날이 오똑하고 콧망울이 복스러워야 하고,
피윤옥골(皮潤玉骨) : 피부가 윤택하면서도 골격은 옥처럼 고귀하고
견부반원(肩部半圓) : 어깨는 반원을 그리듯 둥글어야 하며,
유두홍흑(乳頭紅黑) : 젖꼭지가 붉으면서도 검어야 한다.

둔부광구(臀部廣球) : 엉덩이는 둥글면서도 펑퍼짐해야 하고
운발비황(雲髮非黃) : 노란 머리가 아닌 비단결 머리카락이고
수족비대(手足非大) : 손과 발이 지나치게 커서는 안되고,
체격비거(體格非巨) : 몸체가 지나치게 커서도 안되며,
신장비이(身長非異) : 크도 작지도 않은 키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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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미모..............
'살결, 치아, 손'은 3 백(三白),
눈동자, 눈썹, 속눈썹 (三黑)
입술, 볼, 손톱은 붉으며(三紅),
키, 머리카락, 손가락이 길어야.

치아, 귀, 발 길이 (三短),
가슴, 이마, 양미간(三廣)
입, 허리, 발 (三挾).
팔뚝, 허벅지, 젖가슴 (三肥),
손가락, 머리카락, 입술 (三細),
머리통, 턱, 코(三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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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팔아 돈을 쉽게 벌려는 평범한 여성들까지 급격하게 늘어났다.
사회각층에서 우려하는 여론이 들끓자 풍기사범 단속 긴급조치 발령.
그 불문곡직 무차별 단속 탓에 애궂은 남녀 대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일선 경찰관들의 무조건 마구잡이 단속.
남성장발 가위로 깎고, 신여성 스커트 길이를 잣대로 재어 단속.
장발, 미니 스커트, 청춘남녀와 단속경찰들.. 숨바꼭질하던 시절.

머리가 귀를 덮으면 장발, 무릎 위 10 cm 미니 스커트는.. 경범죄.
애매모호한 단속에 반발하는 청춘남녀로 경찰서마다.. 붐비던 시절.
장발 삭발 당한 총각과 미니 스커트 처녀와의 '로맨스 산실' 유치장.




'미니 스커트 아래

잣대질하는 경찰관.'

경찰관 앞에 서서 무릎 아래를 내려다보며 항의하는 처녀.
단속 벗어나려 허리 풀어, 미니 스커트 끌어내리기 신경전.
그 신경전과 잣대질 와중에 스커트가 흘러내린 사례도 발생.

당시 팬티 스타킹이 드물었고, 밴드 스타킹이 주종을 이룬 시기.
미니 스커트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어도 그 안은 거의 무방비 상태. 
받쳐입을 속옷이 뒤따르지 못할 만큼 유행이 앞서나간., 미니 스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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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나라 성윤리를 뒤바꿔 놓은 미니 스커트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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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스커트......................
미니스커트 첫 작품은 1925년 프랑스 디자이너 폴 포와레
당시 은밀한 신체부위인 무릎을 드러내 일대 충격을 줬다.
1950년 영국 디자이너 마리 퀀트가 허벅지를 드러내며 유행.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며 국내에 소개
그녀의 첫 앨범집에 미니스커트 사진이 실리면서 유행.
1971년 미니 스커트보다 짧은 핫 팬츠가 럭키에서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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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스커트 붐이 일자 우리나라 여성들의 속옷도 간소화.
심지어 첨단 유행에 민감한 여성은 어지간한 속옷 착용 생략.
그 보일 수 없는 곳까지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면 참을 리 만무.

'이조시대 윤리관이라면 여성이 은장도라도 뽑아야 할 상황.'

미니 스커트 처녀가 느닷없이 잣대질 단속경찰 뺨 때리기.
경찰과 미니 스커트 처녀 중 누가 풍기사범인지 알쏭 달쏭.
그당시 법이 가장 엄할 곳에서까지 사회기강은 휘청거렸다.

경제발전은 빠른 속도로 활성화 되었지만 성풍속도는 급변.
관광호텔마다 일본 관광객과 미니 스커트 요정 아가씨가 붐.
미니 스커트 옷차림에 놀라 세상 말세라며 혀차던 기성세대.
풍기문란을 엄히 다스린, 정치권 지도층에게 박수 치던 시절.

한강변 도로 차안에서 총 맞은 변시체로 발견된 아가씨.
1970년 3월 17일. 밤에 절두산 성당 앞에서 일어난 사건.
베일 속 요정의 실체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사건이 터졌다.

고급승용차에 세련된 미모의 앳된 아가씨라 언론이 주목.
통금 야밤에 검문에 걸리지 않고 강변도로를 질주할 신분.
그녀가 전직 요정 아가씨였고 미혼모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사생아가 누구의 아이인가 또 다시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
정인숙은 국내 3 대 요정 중 한 곳에서 술시중 들던 앳된 처녀.
그러나, 그 사건은 그당시 뚜렷한 이유없이 조용히 종결되었다.



.................정인숙 여인 사건의 전말................................
당시 그녀에 관해 매스컴에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오후 7시까지 집에 있었다.
미혼모인 그녀의 아이 아빠가 외국 출장 중 걸려온 한통의 전화.

그 전화를 받고 그녀가 서교동 집에서 나가 찾아간 곳은 타워호텔.
그곳 주차장에는 위장 번호판을 단 20 여 대 검은색 차량들이 주차.
그당시 권력층 핵심인사들 차량이었고 그녀는 17층으로 올라갔다.
밤 8시 10분 경. 그리고, 10시 40분 경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사모님! 약속을 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그냥 가시면 곤란해 집니다."

말없이 차에 탄 그녀가 운전자에게 청해 듣던 음악은 'Release Me'
'나를 놓아 달라'는 노래 가사가 그녀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차는 시청 앞을 지나 신촌을 거쳐 서교동 그녀 집앞 골목에 들어섰다.

포장이 안된 어두운 골목. 자동차 헤드 라이트에 비친 건장한 두 사나이.
한 사람은 검은 잠버 차림, 다른 한 사람은 바바리 코트 차림이었다 한다.
평소 라면, 이 골목에 사람이 있을 리 없는 통행금지 직전인 밤 11시 40분

두 사나이는 승용차 문을 열라고 했다. 운전수가 유리창을 약간 내렸다.
당시, 창문을 통해 두발의 총성과 함께 남겨진 말. "안녕! 비너스!! 탕탕!!!"

그들은 운전 기사에게 절두산 성당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그녀를 실은 차.
제 2 한강교 인근 절두산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
그리고, 그들은 사고 차량을 그곳에 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인숙 여인. 그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 명 중에서 50명을 뽑고, 신원 조회를 통해 25명을 선출.
그중에서 미모 순으로 5명을 선출 후 다시 1등으로 뽑힌 재원.
권력자와 경제인들의 핵심으로 너무 깊게 들어갔던 댓가일까?

그당시 그녀에게 총을 쏜 사람은 친오빠인 운전기사로 알려졌다.
동생 불륜을 용서할 수 없어 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 했다고 했다.

오빠가 승용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도
뒷자리에서 벌어진 낯뜨거운 애정 행각.
그 추한 불륜행위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그녀에게 훈계 끝에 총을 쐈다는 운전자 진술.

평소 동생에게 운전기사 이상 대접 받은 적이 없어
서운했던 차에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진술이었다.
그러나. 불륜 상대방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못한다.

'차안이 어두워, 미니 스커트만 보였다는 증언.'

참으로 아리송한 범행 진술은 오리무중 흐지부지 넘어간다.
그러나, 억울한 옥살이로 심경변화를 일으킨 그는 진술을 번복.
그의 진술은 설득력이 없어 보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사건 마감.

하여, 사건의 전말은 드러났지만, 그 진상은 오리무중.
그 전말이 밝혀진 이유도 정인숙 수첩에 적힌 명단 탓.
그 수첩 명단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베일에 덮혔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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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체에서 발견 된 수첩' 명단 때문에 '육박전'.. 부부싸움.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군 장성, 5개 재벌 그룹회장, 장관, 국회의원 등등 27 명이나 연루.

국민들은 믿었던 지도층에게 경악을 금치 못한 사건.
요정은 은밀한 정경 유착 산실로 뿌리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보이지 않는 치외법권 지대이기도 했다.

정인숙의 삶은 조선왕조 후기, 어우동의 삶과 닮았다.
마치 이조시대에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 같았다.
어우동을 통해 정인숙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이 좋을 듯.

조선왕조 성종 후기에 고관대작 성풍속도 어지러웠던 난세.
성종은 규방 출입하다가 폐비 윤씨 손톱에 용안 긁히던 시절.
경희루 '흥청망청' 연산군 대에 이르러 갑자사화가 일어난 시대.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애정행각을 즐긴 내용도 있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종실 명문인 태강수에게 출가
외명부의 정 4 품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던 효령대군 손주 며느리.

어우동은 고관대작 지위고하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던 여인.
팔촌 시숙 수산수(정종의 고손자)로부터 천민 '가파치'와도 간통.
자신과 관계한 남자의 몸 은밀한 부위까지 먹물 문신을 강요했다.

'이조시대 초기에는 천민 계급이나 중죄인도 꺼린 문신.'

그것은 그녀 치부에 문신을 새긴 태강수 및 남성 위상에 대한 보복.
기록에는 태광수가 어우동의 바람기를 막으려고 문신했다고도 한다.
어우동은 애욕의 노예로 전락한 남자들의 몸에 문신을 정표로 남긴다.

하여, 전의감 생도 박강창은 팔뚝에..서리 감의동은 등판에..어우동.
어우동은 유혹에 넘어간 사대부 양반들 몸에 문신을 새겨 천민 취급.
그 당시 이조 역사문헌엔 그녀를 성에 굶주린 음탕한 여인으로 기록.

기록에 의하면 , 병조판서 어유소, 직제학 노공필, 아전인 오종연..
과거급제 유가 길에 오른 홍찬은 어우동 때문에.. 신세 망친 사내들.
어우동에게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번좌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결국, 낱낱이 드러난 어우동의 복잡한 애정행각.
도승지 김계창 탄핵으로 의금부 문초 끝에 사형.

의금부에서 고위관리들은 한결같이 어우동과의 관계를 부인.
박 정권 시절, '정인숙 여인의 사건' 검찰 조사에서도 마찬가지.
그 사건 하나로 '요정 정치의 산실' 실체가 세상에 들어났던 사건.

1979.10.26 '궁정동의 총성'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폐지된 안가.
'그때 그 사람' 사건은 정인숙 여인 못지 않은 후폭풍이 일어난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를 거쳐 요정 마담에게 이양된 실권.

구기동, 효자동, 창성동, 적선동, 청운동, 통의동, 팔판동, 삼청동.
청와대에서 반경 500 m 일대에 어디엔가 있었던 베일 속의 안가들.
그 중 궁정동 안가는 상징적으로 철거되어 시민공원으로 변모한다.

......................... 안가는 어떤 곳이었을까?.................................
YS 정권 이전까지 궁정동 한남동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의 안전가옥.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날 사람이 있을 경우 연회를 열어 만나는 곳
외국에서는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식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권력 분산이 이루어지는 비밀장소.
정치인, 고위공직자, 학자, 재벌총수와 자주 접촉하는 연회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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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시대에 와서야 안가를 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자세히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밝혀진 사례를 살펴보자.
수출을 많이 했거나 큰 해외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했다.
안가에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했다.

연회에 참석할 다양한 직업의 여성은 몇 몇 마담이 100 여명 씩 보유.
마담이 추천하면 중정직원이 면접 후 외모와 경력을 따져 간택도 한듯.
간택된 여성은 초대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1회 참석 원칙

대통령이 한번 더 찾으면 만류를 건의한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추가로 딱 1번 만 더 접견하게 한 사례도 있었다.
퍼스트 레이디의 눈총을 외면할 수 없었을 법한 대목이다.

안가는 근본 취지에서 벗어나 운영이 된 경우도 있었던 듯.
여성 연예인은 그곳을 거쳐야만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루머.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안가.
안가는 정치권력과 스캔들에 관한 뜬소문 산실로도 여겨져 왔다.

........................정치권력과 스캔들의 유래..............................
진시황은 막강한 후원자 여불휘의 재력을 바탕으로 황제에 등극.
여불휘는 임신한 애첩을 진시황에게 받치고 훗날 진나라를 독차지.
진시황이 죽은 후 애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황제로 등극한 때문.
여불휘는 재상이 되어 막후에서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섭정했던 인물.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속에도 권력다툼과 숨은 스캔들.
환갑에 가까운 황제에게 20대 양귀비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내시.
첫만남에서 목욕하는 양귀비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진 당 헌종.

원래 당 헌종의 며느리이자 그의 18번째 아들의 첩이었던 양귀비
황제의 귀비가 된 후에도 당 헌종의 동생과도 관계를 맺은 양귀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수양아들 안록산과는 밀월관계로도 알려졌다.

안록산의 난 때 반란을 진압하려 양귀비에게 자결을 권한 당 헌종.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78세에 세상을 떠난다.
당 헌종이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힘 아닐까?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당나라 실권을 장악했던 양귀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으로 적마저 굴복시킨 이집트 여왕
자기 몸을 양탄자에 감싸 카이사르에게 선물해 왕권을 쟁취한다.
여러나라의 외국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로마 영웅을 유혹해 이집트를 이끈 여왕.

'에바 페론'은 잠자리 기교를 통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여걸.
스캔들이 남자에게 권력의 상징이라면 그녀에겐 권력장악의 수단.
10대 초반부터 남자를 사로잡을 비결을 몸으로 이미 터득했던 그녀.

그녀에게 버팀목이 될 장래성 있는 남자들을 사로잡는다.
가수, 영화 배우, 광고주, 사업가, 육군 대령, 정치가, 등등
그녀는 몸을 허락하는 대신에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얻는다.

그녀는 24세 때 최고 권력자인 <후앙 페론>을 만나게 된다 .
<에바 마리아 두아르테>에서 <에바 페론>으로 바뀌는 그녀.
노동자와 빈민들 위한 정치를 펴며 최고 권력자까지 오른다.

'미국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 <존 F. 케네디.>'

1953년 재클린과 결혼한 이후에도 마릴린 먼로, 앤지 디킨슨,
제인 맨스필드 등등 다수의 유명 여배우들과 프리실라 웨이어,
질 코완 같은 백악관 스태프들, 스트립 댄서인 블레이즈 스테어,
악명 높은 마피아 샘 지아카나의 정부 주디스 엑스너 켐벨 등등

우리나라의 기미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신혼여행 중에도.., 두번째 부인을 맞고도.., 부적절한 스캔들로 명성.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소아마비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스캔들 화제의 주인공.
아내의 비서, 자신의 비서, 백악관의 사무요원들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때 백악관에서 기거했던 노르웨이 왕세자비

자신의 여성 운전사와 사랑을 나눴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지퍼게이트 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수모
정치 권력과 스캔들은 보이지 않는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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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는 이조 관기제도가 되살아난 느낌을 주던 곳.'

YS가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 후 그곳 철거는 업적 중에 하나.
1979.10. 26부터 1993. 2. 25 이전까지 막후의 정치 산실인 곳.
그 막후의 산실은 1993년 이후부터는 어디로 옮겨갔던 것일까?

훗날, 정인숙 여인의 아이가 청년이 되어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춰진 마지막 의문이 풀리며 그 사건은 종결.
그러나, 정인숙 여인 사건의 배후 비밀까지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정인숙 여인의 친오빠는 살인죄로 19년 복역 끝에 출옥.'

어우동은 이조시대 남성우월 유교사상의 희생 양.
정인숙은 1970년대 돈과 권력에, 희생된 속죄 양.
감춰야 할 권력의 폐부를 드러낸 죄목으로 숨졌다.

김영한 보살은 '요정정치의 산실' 대원각의 천왕성모
그녀는 권력의 폐부를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한 채 운명.
요정정치의 실세지만 그녀의 막후 역활은 아무도 모른다.

97. 12월 거림 길상사 개원집회에 참석한 4000명 中 유명인사들.
그녀가 정재계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실세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공수래 공수거로 모은 재산을 공수래 공수거로 시주한 역사적 현장.

그녀와 뜻을 같이 해 수십억씩 돈 세탁까지 하며 우정출연한 기업들.
그녀는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살다갔다.
그녀는 우리나라 기생 역사상 전무후무한 본받을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의 삶은 본받을만 해도, 근대 정치사는 그녀의 치마 폭에 있었다.
그녀의 치마 폭에서 스러진, 세석평전의 철쭉꽃과 같이 고왔던 처녀들.
그녀의 영혼은 세석평전을 보며 영신과 같은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뜬구름 같은 사랑과 부평초 같은 삶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있는 것을 다 털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그녀.
거림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삶'은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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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 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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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황진이.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과 같은 황진이.

신분을 초월해 살다 간 이조시대의 전설적인 기생

꿈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

 

이조 후기를 풍미했던 여인의 바람 같은 삶.

마치, 김영한 보살은 이조시대 황진이 같은 삶.
황진이 삶을 통해 김영한 보살을 재조명해 보자.

 

송도 황진사집 고명딸로 미모와 재주로 소문난 규수.

아버지가 계집종을 범해 낳은 자식이란 사실이 밝혀져

파혼 당한후 자신을 연모해온 하인과 초야를 치르고 기생

 

양반 신분을 버리고 천한 기생의 길을 선택.


"난 평범한 여인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을 내 발밑에 두고 비웃으며 살거야",

 

"내 정조를 드릴테니까 기둥서방이 되어주세요",

 "기생을 이토록 어렵게 품는 사내가 어딨답니까?"

 

몇년후 송도 유수도 손에 넣지 못해 애태우는 최고의 기생

양반의 위선과 패악을 참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그러면서도 고독했던 진이는 서경덕을 만나 가르침을 얻는다.


15세에, 동네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되었다는., 황진이.
뛰어난 시와 학문과 용모로 당대의 문인·유림들을 매혹시킨 황진이.
10 년 수도 생불(生佛)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해 파계시킨 황진이.

석학 서경덕을 연모하다 뜻을 이루지못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 황진이.
종친(宗親) 벽계수(碧溪守)와 교제하며 독특한 애정관을 시로 표현하였다.
대표적 시조<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산은 옛 산이로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어떠하리’

벽계수는 세종의 증손자인 영해군파 벽계도정(碧溪都正) 종숙.
황진이가 연모했지만 끝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그려진 벽계수.
일설에는 황진이가 말고삐를 잡고 이 시조로 유혹해 낙마했다는 벽계수.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 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님 오시는 날, 밤에는 구비구비 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은 이사종과 헤어진 후 심경이 담긴 시조.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3년은 황진이 집에서 계약동거 후에 이별.
그후 이사종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진 황진이 작품 중 불멸의 명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조.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길 바라는 남자들의 마음은 헤일 수도 없다.
그녀의 시조에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산은 옛 산이로되>는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한 시조.
흠모한 남성에게는 당당하게 속마음을 드러낸 황진이.
서경덕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싯귀에 구구절절 맺혔다.

박연폭포 서경덕 그리고 그녀 자신을 송도삼절.
그렇게 자부하며 당당하게 살아갔던 기생 황진이.
오늘날까지 세인에게 주목받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

오페라 연극 소설 작품들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그녀.
그녀의 일생은 그렇게 알려진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겐 스쳐 지나간 남자는 많았어도 평생 곁 줄 님은 없던 탓.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는 임의 情이로다.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면서 가는가. - 황진이.

후세에 알려진 그녀의 일생은 지나치게 미화된 것 같다.
그녀의 시조 내면에는 애욕을 자극하는 깊숙한 맛이 있다.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면서 가는가.> 시조 구절이 사례.

'깊은 밤 지아비 부르는 그녀의 애틋한 울부짖음.'

그 매력이 못 남자들로 하여금 그녀를 못잊게 했다고도 한다.
그녀가 살던 방에서는 죽은 후 몇 년간 사향 냄새가 배였단다.
사향은 이성을 유혹하는 취음제로 환각제 같은 용도로도 쓰인다.

중종 6년에 태어나 갓 설흔에 숨진 그녀의 유언이 가슴 아프다.
그녀는 38세 운명 설도 있으나 언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중종(재위 1506~ 1544) 6년이면,  황진이의 출생 시기는 15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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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뭇 남자들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요.'

'제가 죽거들랑 금수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버려
개미와 땅강아지 또는 여우와 살쾡이가
제 살을 뜯어먹게 해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 삼도록 해주시어요.' -황진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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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죽을 때 자신과 같이 천한 계집은 길가에 묻어
자신의 무덤을 뭇 남성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해달라 유언.
당시 노장은 한스럽게 죽은 혼을 위로하는 정도의 장례방식.

그녀의 무덤은 실제로 송도로 가는 길목의 도로 변에 있다.
훗날, 과거 급제한 임제가 벼슬길에 그곳에 들러 애도의 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 관직에서 쫓겨난다.
벼슬아치로서 체통 없이 한낱 기생을 추모한 죄목
하여, 파면 당한 얼마후 임종을 맞으며 남긴 유언.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황진이는 여타 기생들과는 남다른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덕형 作 <송도기이>에는 황진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비록 창기이지만 몸치장을 일삼지 않았고
천금을 준다해도 시정잡배는 만나지 않았다."

화장을 한듯 만듯 해도 고운 자색이 늘 돋보였다는 황진이.
이사종과 6년 동거계약이 끝난 후 1년간 전국 방방곡곡 유람.
돈 떨어지자 스님에게 몸 팔고 잔치집에서 시 한수로 구걸연명.

산수유람 끝 무렵 나주에 들른 황진이의 해진 옷과 때낀 얼굴.
원님과 절도사가 벌인 잔치 자리에서 태연스럽게 이를 잡으며
노래 부르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당시 황진이는 왜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했을까?'

이조시대 기생의 존재 이유는 남성들의 성적욕망 해소도구.
그녀는 일부러 외모를 더럽게 하여 남성들의 욕정을 희석화
남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육탄 공세로 남성 중심주의를 조롱하고,남성의 허위성을 폭로
예컨대 왕실의 종친 벽계수가 황진이의 재색에 초연하리라 장담
그녀의 노래 한 곡조에 정신을 잃고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

30년 면벽정진 생불 지족선사는 그녀와 하룻밤 정사로 파계승.
그렇다고 황진이가 모든 남성을 이런 식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황진이가 맺은 참된 인간관계는 두 부류의 인간형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신분적, 성적 경계를 넘어 진실한 교감을 나누었던 서경덕.
서로의 존재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소세양과 같은 인격 높은 선비.
다른 하나는 예술혼이 서로 통했던 명창 이사종과 이언방 등이 사례.

소세양은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자부.
황진이 자태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호언장담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천하일색.
30일 동거후 떠나려 할때 황진이가 읊었던 시조.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며 머문다.

“아!~~ 나는 사람이 아니다.”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 -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는 모든 남성을 굴복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
벽계수의 근엄함을 꺾은 뒤에 오는 메꿀 길 없는 허전함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내로서 결혼생활에 대한 동경심

'이사종 집에서 3년, 황진이 집에서 3년간 계약 결혼.'

6년 간의 계약 결혼을 끝내고 미련 없이 돌아섰던 황진이.
오늘날 성행하는 동거계약보다 시대를 앞서간 듯한 황진이.

......................황진이.............................
이조 중기 개성 출신.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한 출생연도는 모른다.
야사로 추정해 보면 중종 6년에 태어나 중종 36년 경 사망.
미인단명이란 말처럼 그녀는 30세 전후 짧은 삶을 살다갔다.

중종 때 진사 서녀로 태어나 일찌기 사서삼경을 익혔다.
15 살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세상 남자들에게 사랑을 베풀 결심으로 기생이 된 여류시인.

뛰어난 시·서예·가창 재능 용모로
당대 석학 문인들을 사로잡았던 기생.

세련된 이미지와 매혹적인 언어 구사로
이조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시를 남긴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사로잡는 시와 미모와 춤사위.
지체 높은 사대부를 치마폭 아래 굴복시켰던 황진이.
유교사상 남성우월 사상과 신분벽까지 넘어선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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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500년이 지났어도 시대를 앞서가는 매력.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고혹적 매력이 살아있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에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비에 젖은 모시적삼에 속살 비친 고혹적 자태.
서경덕을 찾아가 유혹하다가 거절당한 황진이.
황진이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서 기다린다.

'결국, 서경덕과 하룻밤을 보내는 황진이.'

허나, 서경덕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황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더욱 흠모.
서경덕은 그녀가 접했던 어느 남자와도 달랐다.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결국,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일생동안 사모.
당대 최고의 지조와 미모로 명성을 날렸던 황진이.
먼훗날, 황진이는 고인 서경덕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

"몸 없이 어떻게 만나리이까?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지요.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며 그 길을 버리고 온 것 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나의 길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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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를 애타게 한 서경덕,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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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서경을 읽고 태음력 계산을 스스로 해득,
18세엔 대학을 읽고 성리학 원리를 깨달은 인물.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 = 사생일여(死生一如)
노자 철학과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주장을 배격.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 선조 8년 우의정 추증.

1489∼1546(성종 20∼명종 1)조선 초기 학자.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고, 본관은 당성
황진이가 스승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였던 시조.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 황진이

마야부인이 반야봉으로 떠난 남편 반야를 기다리는 듯.
기다림에 지친 마야부인의 심경이 담겨 있는 듯한 시조.
흠모했던 님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구구절절 맺혀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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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을 흠모했던 황진이가 자랑삼았던 말 '송도삼절'.
송도삼절은 박연폭포와 서경덕 황진이를 일컫는 말이다.
황진이 스스로 한 말이지만 애틋한 사연이 전해내려온다.

서경덕이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
당대 석학 서경덕이 은거하는 초당까지 들어갔었던 황진이.
비에 젖은 모시 적삼 알몸 위에 드리운 듯.. 고혹적인 자태.

서경덕을 유혹하려 단단히 마음먹고 찾아갔던 황진이.

쏟아지는 비를 구실삼아 보내려 해도 가지 않던 황진이.
결국, 서경덕은 비에 젖은 그녀를 방안에 들어오게 했고,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벗게 했다.

황진이 옷을 벗겨주고 물기까지 닦아주던 서경덕.

서경덕은 이부자리에 황진이를 눕히고 몸을 말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 글 읽기를 계속했고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져 그곳에 머무를 수 밖에 없던 황진이.

'밤이 깊어 삼경쯤 되자 황진이 곁에 누운 서경덕.'

행여, 유혹에 넘어가길 기대하며 기다렸던 황진이.
잠결인 듯 알몸 뒤척여 서경덕 품속에 파고들며 유혹.
그러나, 그녀의 애틋한 기대와 달리 무심히 잠든 서경덕.

'밤새 안타까워 잠못 이루다가 새벽녁에야 잠든 황진이.'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뜨자 이미 밥까지 차린 놓은 서경덕.
훗날 황진이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음식을 장만해 다시 찾는다.
그리고, 서경덕에게 절을 올리며 스승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간청.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첫째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 셋째 바로 저올시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경덕은 성리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지만 그 역시 남자이다.
그런데도 황진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지닌 남자.

황진이는 끝내 서경덕을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섬겼다.
황진이가 온갖 방법으로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던 서경덕.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도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듯.

마음이 어린 후(後)이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잎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경덕 -

'서경덕의 시조에 담긴 황진이를 그리는 속마음.'

부끄러운 일이기보다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다운 현상.
서경덕의 시조는 누구인가에 의해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서경덕이 부른 시조를 전해듣고 곧바로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잎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나도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으랴,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황진이 마음이 담긴 시조.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니저 우러 예어 가는고.' - 황진이 -

평생 서경덕을 흠모하다가 죽도록 잊지 못한 황진이.

황진이는 의외로 남자같은 성격에 속이 탁 트인 기질
황진이는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스승을 방문.
서경덕의 거처에서 한껏 풍류를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情)을 나도 몰라.. 하노라.'

위의 시조에는 서경덕의 속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듯.
아니면, 황진이 마음 속 희망사항을 담아낸 시조일까?
황진이 읊은 시조이지만 서경덕의 마음이 담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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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와 서경덕과는 어떠한 관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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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서경덕이 다 같은 남자인 줄 알았던 황진이.
허나 인격적으로 전혀 다른 경지에 있는 경이로운 인품.
그가 젊은 나이였다면 그녀는 끝내 연인관계도 꿈꿨을 듯.

황진이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깊이 흠모한 서경덕.
그 마음속에 없는 줄 알지만 자신을 바치고 싶었던 황진이.
허나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황진이를 안타깝게 만든 서경덕.

'이승에서 단한 번이라도 자신을 바칠 수 있다면...'

평생 그리워하다 결국 마음깊이 간직해야 했던 남자.
시조나 가무음곡으로는 도저히 유혹할 수 없는 남자.
품에 파고들어 안아달라 애원해도 미동도 않던 남자.

'여자로서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애써도 황진이가 넘을 수 없는 태산준령 서경덕.
서경덕은 황진이가 지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유일한 사랑.
황진이가 이승에서 다시 만나길 바랜 유일한 남자 서경덕.

........서경덕1489(성종 20)~1546(명종 1)............
할아버지는 순경, 아버지는 수의부위를 지낸 호번(好蕃).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양반이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고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 이치에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에 요양.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와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천거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속리산·지리산을 유람하며 기행시를 남겼다.
당시 선비들의 사화를 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 명으로 생원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사양.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 제수를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력.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
〈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

서경덕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기철학을 주장.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룬 이황 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서경덕은 우리나라 성리학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
개성 숭양서원·화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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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은 갑진년(1544) 겨울부터 계속 자리에 누워 있다가
병오년(1546) 7월 7일 새벽 서재에서 향년 58세에 운명했다.
임종할 때에 한 제자와의 일문 일답이 유언으로 전해져 온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지 이미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다."


황진이는 수많은 남성편력 일화를 남긴 이조의 여인.
유교적인 관습으로는 비천한 사람이나 하는 짓을 자행.
심지어는 이사종이라는 선전관과 계약동거 했다는 기록.

처음 3년은 이사종 집, 나중 3년은 황진이 집에서 동거.
생활비는 각자 부담했고 약속한 6년후 미련없이 이별했다.

이언방은 명종 때 명창인데 황진이가 그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언방 동생인데, 형님은 지금 안계신다. 하지만,
나도 노래 약간은 하는데 들어보겠냐며 한 곡조 뽑는다.

"이언방 아니면 누가 이렇게 노래를 잘부르겠는가?"

황진이는 노래 잘하는 남자를 무척 좋아했던 듯 싶다.
선전관 이사종을 비롯 이언방을 찾아간 걸 보면 그렇다.
선전관이란 군사적인 왕명을 전달하는 제법 중요한 관직.

'당시 이조 관리 성풍속이 문란했던걸까?'

기생을 첩으로 삼는 행위는 이조시대라도 원래 불법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기는 나이가 50세라야 기역이 면제.
50세 이전에 기역을 면제 받으려면 왕의 특별 명령으로 가능.

예를 들면 세종은 종친 이순몽의 기첩 패련향에게 기역 면제
성종은 왕실 종친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은 기녀는 기역 면제.
왕의 특명으로 기녀를 신하에게 사급으로 주었을 경우 기역 면제.

이조시대에 관기를 관할하는 관직에 있으면 으례 기둥서방.
관아에 소속된 기녀는 우두머리 행수기생에게 복종해야 한다.
기녀는 아프거나 볼 일이 있을 때 호장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기녀는 정해진 날짜마다 한달에 두 번 소집점검을 받아야 한다.
소집점검은 기녀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인원점검 제도이다.

수청기, 침비, 급수비의 직무를 부여하는 것도 호장 권한이다.
관기는 공물(公物)이라 여겼기에 생사여탈권도 관리들이 맡았다.
하여, 원님이 바뀌면 재산목록에 맞춰 관기 인원점검은 관례이다.

기녀는 기부(妓夫)가 있어야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기녀는 국록만으로 생활이 어려워 다른 경제적 수단이 필요.
기녀는 옷이 남루하면 장을 맞기에 후원자 기부(妓夫)가 필수.

'이사종은 황진이의 기부(기둥서방) 아닐까?'

황진이는 3년간 이사종의 집, 3년간 자신의 집에서 동거.
6년 후 관기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닐까?

이조 기녀 중 송도의 황진이는 창기이자 명기.
관기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창기가 된 기녀.
황진이는 스스로 계약 동거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이조 기녀는 천민이지만 가무와 시서에 능한 교양인
경기(京妓)의 경우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되어 기녀로서의 소양을 배운다.

교육과목은 가무 서화 대화법 식사예절 등등
특히 기녀들은 왕족(王族)이나 사대부를 상대.
예의범절은 물론 시문(詩文)에도 능해야 했다.


이조시대 시조문학에서 주목할 여류시인은 대부분 기생.
선비의 관념적인 풍류에 비해 기생은 숨김없는 서정 표현.
기생의 창작 시조들은 고려 가요의 맥을 잇는 진솔한 모습

유교의 엄격한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교양을 겸비한 기생.
찾아주는 사대부가 없을 때에는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여인들.
그녀들의 삶의 지주는 살겹게 찾아주는 양반 사대부가 전부였다.

하여, 그녀들의 시조에는 님을 향한 사랑의 갈구가 가득하고
떠나간 님에 대한 원망 내지 슬픔이 담겨 있을 수 밖에 없다.
기생을 '몸으로 말하는 꽃'으로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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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이사종과 동거생활을 끝낸 후 전국 유람.
이생은 황진이가 전국 유람에 동행한 재상의 아들.
혼자 유람하기 심심해 황진이가 이생을 부추겼던 듯.

단 둘이 금강산 유람하다 배고프면 절 음식 빌어먹기.
스님들에게 몸 팔거나 술자리 노래로 술과 고기를 얻기.
보리 흉년에는 곳곳을 유람하며 구걸로도 연명한듯 하다.

황진이는 금강산·태백산·지리산을 거쳐 나주에 도착.
중국 갈 사신 환송잔치에서 거지꼴로 가야금 타며 노래.
그곳 기생들을 주눅들게 하고 모인 손님들을 놀라게 한 일.

황진이는 1년간 이생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렸다는 기록.
고인이 된 서경덕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유람을 한 듯 싶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추모하며 여생을 마감한 듯 하여 안스럽다.

'송도삼절 변하지 않는 황진이 절개가 실감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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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때 황진이 매력은 전국적으로 소문났던 듯.
소세양이 장담한 말 -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
"황진이와 30일 살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송도로 가서 황진이와 30일을 살고 떠나려한다.
이때 소세양을 그곳에 더 머물게한 황진이 시가 유명.

황진이 시 : '달 아래 뜰에는 오동잎이 다 지고'
소세양은 탄식한 말. -"나는 사람이 아니다."

소세양은 1486~ 1562년 이조판서
형조판서·병조판서를 거친 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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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황진이 -

왕실 종친 이혼원(벽계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벽계수 말고삐를 잡고 읊은 시조.
벽계수는 그녀 시조와 미모에 넋을 잃고 낙마했다는 일화.
벽계수는 효령대군 증손으로서 연산군 갑자사화 당시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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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에 숙청기생의 나이 한계는 20대였다.
30대가 되면 20대 사치 기생의 뒷바라지가 임무.
하여, 30대 나이에 접어들면 퇴물 기생으로 전락.
대부분의 기생은 30대 이후 비참한 삶을 살다갔다.

'황진이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걸까?'

황진이는 죽기 전 화려한 남성편력을 후회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고나면 시신을 성문 밖에 버려서
개미와 벌래들이 뜯어먹게 해 경계를 삼게하라 유언

고적한 산중보다 대로 변에 묻히기를 바랬다고 한다.
슬픈 곡 대신 풍악으로 장례를 지내달라 유언한 때문.
그녀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 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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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임제는 서도 병마사를 제수받아 임지로 부임 중
황진이 무덤에 들러 그녀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남긴다.
오늘날 학생들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잘 알려진 시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은 어데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 임제 -

그런데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부임지 도착 전 파직당했다.
양반이 체신없게 기생의 죽음에 슬펐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역시 당대의 지조 높은 선비인지라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백호 임제..........................
1587년(선조 20년) 백호 임제는 39세를 일기로 임종.
운명하기 직전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천하에 제왕을 일컫지 못하는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 만 끝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으니,
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리라.
그러니 내가 죽거든 곡(哭)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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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죽고나서도
거처 간 남자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나 보다.

1587년 백호 임제는 39세를 일기로 임종
1592(선조 25)~ 98년 임진왜란 7년 전쟁
황진이는 1570년 대를 풍미한듯 추정된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했다.
황진이 기생이 되자 전국 풍류객들이 송도에 몰려들었다.
그당시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 기생이 있었다 한다.

'이조 500년 역사상 가장 시조가 뛰어난 기생.'

황진이가 살면서 겪어온 남자들은 세 가지 타입이었다.
첫째는 황진이을 탐하려고 자신에게 직접 달려오는 남자.
둘째는 겉으로 무심한 척하며 속으로는 몹시 탐하는 남자.
세째 수행하며 아예 쳐다보려고도 만나지도 않으려는 남자.

황진이는 세째 타입의 남자는 직접 찾아가 굴복시켰다.
황진이는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을 좋아하는 모든 남자를 위해 살겠다는 파격적인 선언
학문과 지식으로 유명한 남자들을 다 자신의 치마폭에 넣었다.

기생은 이조시대에 여덟 천민계층에 속하는 낮은 신분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상여꾼, 공장, 승려, 기생,
그러나, 시와 서예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존재.

황진이는 고루한 유교 가치관을 깨고 파격적인 삶을 살다갔다.
반야봉은 그녀의 삶을 상징하듯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속치마 같은 구름바다 위로 솟은 둔부처럼 고운 반야봉 쌍곡선.

황진이가 불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는 장면 같다.
그녀의 다리 사이 아래로 지족선사를 기어가게 만드는 도도함.
첫대면에서부터 그녀를 냉대한 지족선사에 대한 응징이었을까?

비에 젖어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지족선사를 찾아간 그녀.
어쩌면 그녀는 뭇 남자들이 만들어낸 동경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남성을 굴복시키고 마는 매력과 신비로운 운명과 고혹적인 자태.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도 그녀의 유혹대상일 뿐.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지족암으로 지족선사를 찾아간 날,
유명한 황진이가 찾아온 사실이 황망하기가 그지없었을 듯.

산에서 불공만 드리던 스님에겐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황진이
바로 쳐다볼 수 없어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마음을 꿰뚫어본 그녀는 스님을 더 유혹하고 싶었을까?

"스님. 저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나이다.
남자들은 마음에 둔 여자를 못 잊어 죽을 수도 있나이까?"

'과연 소문난 미모..저 정도면 상사병 걸릴 만도..'

지족선사는 황진이 요염한 자태에 넋을 잃었을 듯..
산사의 밤이 깊어질수록 지족선사는 참지 못했을 듯..
그녀를 덥석 안은 지족선사는 새벽녘 암자를 내려왔다.
"십년공부 나미아비타불"은 지족선사로부터 비롯된 속담.

 

 


무소유. 



무학은 태조가 농담으로 말한 것처럼
돼지처럼 생기고 돼지처럼 살았다 한다.

그는 무엇이든간에 남은 것이 있으면
갖지 않고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했다.

무학은 소유를 싫어했고,
저서를 남기는 것을 삼가.

그는 자기 사상을 글이나 말보다
침묵으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그가 늘 제자에게 했던 말.

'갓난 어린아이의 행동이 제일이다.'

무학은 말년에 회암사에서 떠나
금강산 진불암에 오래 머물렀다.

무학이 78세 때 병을 앓자
제자가 약을 달여드리려 했다.

'나이 80에 병나는 것은 당연.
약은 무슨 약' 하고 거절했다.

그해 4월 금장암으로 거처를 옮긴 어느날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이 무학사상의 총결산.

......................무학의 유언........................
무학 :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제자 :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무학 : "모르겠다."

제자 : "스님이 병중이신데 도대체
병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무학 : "모른다."

제자 : "육신은 결국 썩어 없어지는데
없어지지 않는 진법신(眞法身)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무학 : "바로 이것이다."
제자 : "............."
............................................

무학은 아는 척만 하는 후학들에게
겸양을 가르쳐 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제자와 나눈 문답
후세 사람들은 평가한다.

'바로 무학사상의 총결산.'

무학이 죽자 태종은 그 사리를
회암사로 모셔오도록 지시했다.

회암사(양주 회암리)에는
이미 태조가 세워둔 부도.
바로 무학을 위해 세운 것.

회암사에는 무학의 부도(보물 388호)
인도승 지공과 나옹선사 승탑이 있다.
지금은 잡초가 우거진 절 터 흔적 뿐.


..........................
무소유(無所有) -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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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요."
.............................................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 회의
간디가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보이며 한 말.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만큼 꼭 긴요한 것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론 그 물건 탓에 적잖이 마음쓰는 隔이 된다.
무엇인가 갖는다는 것은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얽매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 두 분을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3년 전 거처를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은
나하고 그 애들뿐.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 읽었고,
그 애들 건강을 위해 비료를 구하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부모님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난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茶來軒)을 찾아 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雲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앞 개울 물소리
숲속 매미들은 한것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 때에야 문득 생각이 났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왔던 것이다.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곧 내달려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자 고래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 몸으로,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蘭)을 가꾸면서도 산찰(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창문을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도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 품에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삼 년 가까이 함께 지낸 난.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허전함보다 홀가분함이 앞섰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것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하는 일념
물건만으로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

그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끔찍한 비극까지도 불사(不辭)한다.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의 마음을 가지려 하는 것.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한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소유에 대해 범죄처럼 자책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언제인가 한 번은 빈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간디의 말씀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서 온 세상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소유의 역리(逆理)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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