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주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 잣나무 배
汎彼中流小柏舟(범피중류소백주)
幾年閑繫碧波頭(기년한계벽파두)
後人若問誰先渡(후인약문수선도)
文武兼全萬戶侯(문무겸전만호후)
홍랑
파주군 교하면 다률리(옛 청석리)., 홍랑의 묘.
세종대왕 때 당당한 문벌을 자랑하던 해주 최씨
기생인 홍랑의 묘를 선영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
그녀는 최씨 문중에서 어떠한 여인이었을까?
이조 선조 때 문장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최경창(1539∼1583)은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했고
그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고, 퉁소를 잘 불었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 왜구가 영암을 포위하고
청년들을 붙잡아 가자, 고죽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정철 송익필과도 어울릴 정도.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 을과(乙科)에 합격한 문신
급제 후 북평사에 임명되어 함경도 여진족을 무찔렀다.
이후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 벼슬을 잠시 그만두었다.
1582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승진하였고, 갑작스런 특진
대간(臺諫)에서 문제 삼자, 다음해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종성 객관에서 객사(客死)하였다.
홍원의 관기(官妓)였던 홍랑(洪娘)과는
고죽이 경성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잠시 홍원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불태웠다.
홍랑은 평소에 시를 즐겨 읊었는데,
그 중 고죽의 시를 몹시 좋아하였다.
사모하던 고죽을 만나 사랑에 빠진 홍랑
고죽 또한 홍랑의 미모와 예의에 반했다.
홍원을 떠나며 그녀를 데려 가려 하였으나,
변방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가는 그로써는
데려갈 수가 없어 기약만 하고 먼저 떠났다.
초조한 마음에 하루가 열흘처럼 속을 태우던 홍랑,
마침내 남장을 하고 천리 길을 걸어 경성으로 갔다.
서로 그리면서도 못만난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했고,
둘 사이는 어느 부부보다 짙은 사랑과 믿음이 생겼다.
공을 세우고도 당파 싸움으로 한양으로 불리어 간 고죽.
그녀는 쌍성(雙城)까지 따라가 작별하며 서러워 시조 한수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의 시조를 고죽은 한시(漢詩)로 한역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쌍성을 떠나 한양에 온 고죽과 3년간 끊긴 소식,
병석에 있다는 소식이 홍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날로 밤낮 7일을 걸어 낭군에게 당도하여
병간호 한 일이 조정까지 알려져 고죽은 벼슬이 면직
고죽이 격무에 피로한 몸으로 돌아오면
홍랑은 거문고와 노래로서 풀어 주었고,
봄가을엔 보약을 달여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나 고죽의 급작스런 출세를 못마땅히 여긴
반대파 모함으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
종성부사 1년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객관에서 객사
45세에 객사한 낭군의 영구를 따라 상경한 홍랑
파주군 월롱면 무덤 옆 초막에서 9년간 시묘살이
임진왜란에는 고죽이 남긴 시고(詩稿)를 정리하여
등에 지고 다니며 홍원으로 돌아가 재난을 막았으니,
고죽의 시가 오늘에 전하는 것은 모두 홍랑의 덕이다.
홍랑은 임종할 때에 남긴 유언.
"나를 낭군 곁에 묻어 주시오."
이에 고죽의 후손이 그의 정절을 기려
고죽의 묘 아래 장사를 지내었고 제사,
해주 최씨 문중에서 그녀 묘를 가꾼다.
'홍랑의 묘 바로 위에는., 고죽의 묘.'
매창(梅窓)
詩와 사랑 그리고 友情.
몸을 가려 눕혔던, 기녀
부안읍 성황산 서림 공원 입구
이조시대 여류시인 매창의 시비
유희경과 헤어지고 지은., 이별가
'李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허난설헌과 함께 이조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 매창.
1573년(선조 6년)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
여성에게 이름이 없던 당시 이름 자 호까지 지닌 매창.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듯 여겨진다.
기생이었던 그녀에게 취객들이 집적대기 마련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계랑은 평소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었기에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1590년 부안을 찾아온 시인 유희경과 첫 만남
유희경은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창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파계하였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녀에게 남겼던 시가 전해온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듯 하여라
40대 유희경과 18세 매창은 28살 차이.
당시 그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사랑의 시.
매창 유희경 직소폭포 = 부안삼절(扶安三絶)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 = 송도삼절을 본뜬듯.
유희경은 '황진이 스승'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유희경........................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천인이지만 한시에 능.
사대부와 교우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폐모론 가담에 거절
인조 반정 후 받았던 대부 품계.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 촌은(村隱)의 옛 집.
그 뜰이 훗날 창덕궁의 담장 안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창덕궁 내각 뒤뜰에 있는 그가 심은 전나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南彦經)으로부터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 상을 집례…중략
자기 집 정업원(定業院) 아래 시냇가에
문 앞으로 흐르는 개울가 침류대(枕流臺)
그곳에서 당대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했다.
선조 광해군 인조 대의 시집 <침류대시첩>을 저술.
천인시인 백대붕(白大鵬)과 풍월향도(風月香徒) 모임
................................................................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헤어진 두 사람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빴고
매창은 그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서러움과 한(恨)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긴 마찬가지.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 여년을 수절한다.
그후 그녀가 두번째 마음을 준 남자 이귀(李貴)
...................................이귀...................................
1557(명종 12)~1633(인조 11).이조 중기 문신.
父親은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 母親 안동권씨.
임진왜란 때 유성룡을 도와 한성 탈환에 기여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으뜸 공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인조 묘정에 배향된다.
................................................ ..................................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 전라도 세금을 걷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 와 부안에 들렀다.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지 서너 달 뒤
이귀(1557-1633)는 훗날 인조반정 주체세력.
허균은 홍길동전 저자이자 당대의 풍류시인
.....................홍길동전.........................
이조 광해군 때의 문인이며 정치가인 허균(1569~1618)
한국 최초 국문소설 〈홍길동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인조 때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
새 세상 건설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홍판서의 몸종 춘섬의 몸에서 태어난 길동은
서자라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과 천대
이를 견디다 못한 길동은 활빈당 이름을 내걸고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
조정에서 그를 잡으려 하지만 잡지 못하고,
그의 소원대로 병조판서의 직책을 내린다.
그러나 길동은 즉시 그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나가 율도국 새 나라를 건설.
거기서 왕이 된 길동은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정치를 실현하다가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
허균과 매창은 허균이 33세일 때(1601, 선조 34)
전라도 세금을 거둬들이는 전운판관으로 갔을 때
7월(음력)에 처음 만났고 당시 매창은 29세였다.
허균은 그 즈음의 일기를 "조관기행(漕官紀行)"
매창과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허균의 일기.....................
"23일(임자): 부안(扶安)에 도착했다.
비가 몹시 내려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귀(李貴)의 정인(情人).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었다. 생김새는 드날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시를 읊고 서로 화답.
밤에는 그녀가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들였다.
매창이 유희경을 가슴에 품고 수절하거나
이귀의 정인이라 허균과 잠자리를 피한 듯.
하지만, 매창은 기생이라 서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잠자리를 같이 할 수도 있는 처지.
..............................................
훗날 매창에게 보낸 허균의 편지를 보면
서로 그런 유혹을 느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 선을 넘지 않았다.
허균과 매창의 순수한 사귐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 2통.
그 내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1609년(허균 41세, 매창 37세. 광해 1년) 1월과 9월
허균은 그해 1월에 중국 사신으로 뽑혀서 다녀왔고
홍문관 월과(月課)에 잇달아 세번이나 일등을 하여
광해군 눈에 들어 9월 형조참의(정3품)로 급속 승진
허균은 여자 관계에 관한 한
유교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
'남녀의 정욕은 본능,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는 아니하리라.'
여행할 때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을 만큼 당당했다.
그러한 그가 기생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 교감만 가진 것은 매창의 시를 사랑한 때문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 병조정랑, 사복시정, 1604년 수안 군수에서 파직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 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
1606년 의홍위대호군(종3품)이 되어 중국사신을 접대.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불교신자이기에 파직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내세웠던 것.
................................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후 홍문관 월과에서 아홉번을 연이어 장원
이 덕분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은 후 파직되었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서 거처.
부안현 바닷가 변산, 남쪽에 '우반'이라는 골짜기
그곳 부사 김청(金淸)이 노후에 쉴 곳을 마련한 것
"나는 평소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아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못이루었다가 장차 우반에 살려 한다." -허균.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려우니 공께서 지내 주셨으면.." - 김청.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그곳에 간 허균.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 따라 골짜기
시냇물 좌우로 학이 나는듯한 봉우리와 절경.. -중략-
매창은 이곳에서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 정3품 승문원 판교 교지를 받고 서울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
매창이 그 비석 옆에서 산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하여,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
.............편지 - 1,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
매창을 잊지 못한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속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편지 - 2,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
그런데 아쉽게도 이듬해, 매창이 죽는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매창.
그 소식을 들은 허균은 눈물을 흘리고 애도.
........계랑(桂娘)에게, 기유년 1월.........
그대가 달을 바라보면서 거문고를 타며
'산자고(山 )'를 불렀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부윤의 비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3척의 거사비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이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시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
.................................
산자고는 꿩과의 새로 메추리와 비슷하다.
자고새에 빗대어 상사(想思)를 표현한 노래.
계랑과 가깝게 지낸 고을 원님이 있었는데
그가 떠난 뒤 고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석
그런데 계랑이 그 비석 옆에서 산자고를 불렀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노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하였다는 소문
허균의 친구(이원형)는 그것을 주제로 시까지 지었다.
그래서 허균은 곤란해졌고, 편지를 보내게 된 것.
.............이원형의 시...............
한가락 거문고를 뜯으며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거친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마져 외로와라
그 옛날 현산에 세웠던 남녘 정벌의 비석에도
그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눈물 흘렸던 일이 있었나
.............................................................
허균이 계랑에게 보낸 2번째 편지.
..............계량에게, 기유년 9월......................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가득 가득 난다오.
그대는 틀림없이, 성성옹(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거요.
그때에 만약 생각을 한번 잘못 먹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이처럼 교분이 돈독할 수가 있었겠소.
이제 와서야 진회해(秦淮海 송(宋)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서글프오
......................................................
그런데 아쉽게도 이듬 해에 매창이 죽는다.
그 소식을 들은 허균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
..........허균의 탄식..............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
................율시 - 1................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
...................율시 - 2.......................
凄絶班姬扇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4)
悲凉卓女琴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5)
飄花空積恨 흩날리는 꽃잎에 속절없이 한이 쌓이고
衰蕙只傷心 시든 난초에 다만 마음이 상할 뿐이네
蓬島雲無迹 봉래섬에 구름도 자취가 사라지고
滄溟月已沈 푸른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
他年蘇小宅 앞으로는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6)
殘柳不成陰 앙상한 버들이 그늘을 이루지 못하겠구려.
....................................................
구구절절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시.
8년 후에 허균은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허균과 한석봉에 관한 일화'.........
1604년 10월, 송도 인근 수안군수가 된 허균
회포를 풀고자 석봉(1543~1605)에게 초청편지
'고을 관아에 명주 베를 펼쳐 놓고
두어 말쯤 먹을 갈아 붓을 휘두르자’
석봉이 말년에 흡곡현령을 그만두고
송도 우봉 촌사에서 쉬고 있을 무렵.
그 해를 넘겨도 석봉이 오지 않자
1605년 4월 허균은 다시 초대 편지
수수술, 잉어회, 죽순나물, 자라탕을 장만
수레까지 보내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다.
둘은 충천각(沖天閣)에서 시를 읊으며
두 달간 왕희지 부럽지 않은 풍류를 만끽
여기서 석봉은 금니(金泥) ‘반야심경’
허균의 누이 난설헌이 여덟 살 때 읊은
신선세계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석봉의 절필(絶筆)
석봉은 과묵한 성격에 상찬과 비난에 초연
이백의 시풍과 장욱의 풍격을 몹시 좋아했다
석봉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각별했다.
사헌부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만큼이나.
석봉은 과중한 필사업무에서 벗어나
글씨 예술에만 잠심하도록 선조의 특명
그러나 수차례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그러나 선조는 파직을 허락지 않는다.
목마른 말이 냇물로 달려가는 글씨체
당시 석봉의 글씨는 중국에서 더 유명.
석봉처럼 글씨 하나로 출세한 인물도 없지만,
글씨 때문에 시기, 질투를 받은 사람도 없을듯.
.................................................................
기생과 사대부간의 사랑 이야기는 간혹 있지만,
허균과 매창의 정신적인 사랑 이야기는 청아하다.
풍류시인 허균과 지고지순한 우정을 나누었던 매창
매창은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후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 부른다.
그녀가 죽은지 45년 후(1655) 무덤에 세워진 비석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 개암사에서 간행된,매창집
당시 여인의 시집이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었다.
사람들이 하도 이 시집을 달라고 하여
개암사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지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 부안 시인 모임에서 4척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 라고 새겼다고 한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 나뭇꾼들이 벌초를 해오며 돌보았다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에도
먼저 그녀 무덤을 찾고 굿을 벌려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음력 4월 부안 사람들은 제사를 모신다.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 65 호로 지정.
그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은 시인이 남긴., 추모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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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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