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4. ( 거림. 봉산정책. 도장골. 길상사. 법정스님. )

donkyhote 2010. 10. 29. 02:45

 

 

거림.




.............동

...........촛대봉 ........*도장골~~~~~↘................................남
...........세석 산장...음양샘~~~~~~~~~*길상사~~~~*거림(巨林)
...........영신봉...한벗샘~*자빠진골~~↗삼신봉.↗. .............청학동.

.............서

세석 남쪽으로 흘러내린 개울들이 모이는 거림.
세석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대성골과는 이웃사촌.
은밀하게 숨겨진 골짜기마다 개울 비경이 빼어난 곳.

세석을 오르기 가장 쉽고 짧은 등산로., 거림. 

세석산장에서 하루 밤을 묶은 후 천왕봉 오르기에 적당.
대부분 세석평전 자체가 목적지인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
매표소를 출발, 마지막 민박집인 솔바구 산장을 지나면 거림골.

'도장골 초입 오른쪽엔 99년 완공된 길상사.'

도장골 하류의 다리를 건너면 거림골 들머리.
도장골 초입에서 지류 두어번 건너면 세석평전.
내대리 마을 버스종점에서 시작하면 1시간 추가.

여름철 피서 인파가 몰리는 거림골.

세석고원 남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린 거림계곡.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로 광활한 고원인., 세석평전
남부능선 사이로 거림마을까지 아기자기 이어진 거림.

촛대봉에서 바라다 보면 대자연의 신비가 절로 느껴지는 세석.
거림계곡은 양쪽으로 벌어진 두갈래 등산로를 끼고 있는 골짜기.

'거림골은 올라가기가 편안한 맛,
도장골은 오를수록 까탈스러운 맛.'

거림골은 골짜기가 짧은 듯 보여도 4계절 신비롭게 물이 넘쳐 흐르는 곳.
거림은 지리산 주능선상에 위치한 연하봉과 촛대봉에서 비롯되는 도장골,
세석평원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진 능선 위에 한벗 샘에서 발원한 자빠진골. 

박단샘, 수곡샘으로도 불리우는., 한벗샘
일명 엎어진 뜰이라 불리우는., '자빠진 골' 

여러 지류가 은밀한 계곡을 이루고
60 리에 걸쳐 흐르며 거림골을 형성.

산꾼은 밋밋한 거림골 보다는
자빠진골이나 도장골을 선호.

'자빠진 골'(엎어진 뜰) 남부능선.
산이 자빠진 듯, 들판이 엎어진 듯.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남부능선.
삼신봉에서 세석까지 걷다보면 그 느낌이 와닿는다.

골짜기가 자빠지고 엎어진 듯 깊숙히 패여
오를수록 까탈스러워 접근이 어려운 도장골.

도장골 초입 길상사를 지나 50m 올라가면, 낙폭 10m 밀금(쌍)폭포.
수량 넘치면 쌍폭 거대한 물살이 물보라 일으키며 내려 꽂는..'밀금'.
소에 힘차게 내려 꽂는 폭포 풍경을 은밀한 금실에 비유한 이름인 듯.

폭포 위 용소는 용이 살았을 듯 넓고 깊은 소.
그 주변엔 수백 명이 둘러 앉을 만한 반석이다.

윗용소로 올라가면 이현상의 남부군 총지휘소.
그 만큼 도장골이 은밀하고도 깊다는 증거이다.
잡목 사이로 토굴식 집과 돌담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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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림마을에서 좌측은 거림골 통해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
우측의 길상사와 길상암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도장골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도장골.

현재 도장골은 마을 사람 외 외부인 출입통제.

도장골은 정순덕 여인이 남편을 찾아들었다가
영원한 빨치산의 상징적인 투사로 탈바꿈한 곳

도장골에는 빗점골 이현상 아지트와 같이,
14연대 출신 빨치산 대장 이영회의 아지트.
푯말엔 그당시 상황에 따른 설명이 적혀있다.

이영회는 이태선생의 <여순병란>에 등장한다.
김금일, 김홍복, 이진범, 송관일, 이영식과 같은
14연대 출신 하사관으로 여순사건을 주도 참여한다.

반란군 총대장 홍순석과 김지회가 반선마을에서 사살되자
잔당을 이끌고 토벌군에 쫒겨 지리산에 숨어든 이영회.

그도 결국 천왕봉 동북쪽인 상봉골에서 사살되었다는데
상봉골이 어딘지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듯 하다.

그 당시 빨치산 대장 이영회의 나이가 불과 26세
어떻게 빨치산 부대를 이끌어 나갔는지 의문이다.
이영회가 사살된후 사실상 빨치산 투쟁은 종지부.

이영회는 국군포로에게는 관대하여 사살하지 않고,
산에서 내려 보냈다고 이태는 <남부군> 하권에 기록.

도장골은 위급할 때 세석과 연하봉 장터목 탈출로
빨치산들이 안심하고 많이 이용했던 천혜의 은신처.

도장골에서 연하봉 코스는 아직도 산꾼들에게 두려움
촛대봉에서 흘러내린 시루봉을 만나면 세석까지 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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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성풍속도를 상징하는., 밀금폭포. 
가락국, 신라, 고려, 이조로 계승된 성풍속.

사회가 복잡할수록 성풍속도 복잡하고
사회질서가 문란할수록 성도 문란하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시기는 약 200만년 전.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시기는 60만년 전.

2만년 전, 고대 원시사회의 성풍속도는 모권 중심사회.
여성의 성을 따랐고, 여성이 남성을 선택했고 사회를 지배.
하여, 성행위 역시 여성에게 절대적인 선택의 권한이 있었다.

모계사회 일처다부제는 부권사회에서 일부다처제로 변모.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남녀평등 일부일처제로 정착했다.
미국의 인류학자 G. 머독(Murdock)의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일부다처제 415 부족, 일부일처제 135 부족, 일처다부제 4 부족
다부다처제는 개념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다처제 부족이 성행한 이유는 성 충동에 있어., 남녀 간 차이.

 

일부다처제가 다산에 유리하고 부족사회간 경쟁력에서 우월한 점.
여성의 노동력이 많을수록 생계유지 및 가족부양에 공헌도가 높다.
하여, 일부다처제 민족은 성적 욕구보다는 경제적 요인을 더욱 중시

일부일처 제도는 현대사회로 들어오며 법률적으로 고수.
중혼이나 간통을 허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여성지위 향상.
이조시대 남성우월 사상이 현대사회에서는 여성 우월주의.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란 개념까지 성행.'

거림은 '음양수 전설'을 찾아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
거림에서 세석평전까지 오르는 지름길은 불과 3시간 거리.
세석평전에 철쭉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거림은 인파로 붐빈다.


거림 - 찾아가는 길.

승용차 (고속도로) : 진주-대전 고속도로 단성IC>국도20번 덕산방향 >곡점>내대, 거림
(일반국도) : 진주, 함양, 산청에서 국도3번 원지>국도20번 단성, 덕산방향>곡점>내대, 거림

대중교통 : 진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하루 4번 거림행 버스.
06:20, 09:40, 13:40, 19:20 원지, 단성, 덕산을 경유(1시간 10분)..4600원.
진주에서 대원사 중산리행 버스로 덕산까지 간 후 택시..(요금은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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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거림 마을.
거림 마을에서 세석까지 거리는 6km.
내대리 버스종점 - 세석 = 6km + 3km.

거림 - 세석 = 등반 3시간, 하산 2시간 30분
내대리 버스종점 - 거림 마을 = 소요거리 1시간.

<곡정-내대리-거림> = 도벌 반출 산판도로.
거림(巨林) 원시림 계곡은 일제시대에 군수용.
8·15 광복 후 땔감 벌목으로 한때 벌거숭이 계곡.

마치, 체모가 깍인 듯, 살벌한 아픔을 간직했던 계곡.
그후, 숲이 되살아 났지만 거목을 찾아볼 수 없는 거림.
예전에는, 클 巨+수풀 林='아람들이 숲'이 우거졌던..'巨林'.

 

 

 

봉산(封山)정책.

 

 


이조 산림정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나무 정책.
즉 소나무 정책의 핵심은 봉산 제도라고 요약된다.

'봉산(封山) = 이조중기 국가가 관리하는 숲.'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을 신봉했던 이조 후기 사대부들
사람은 물론 사물까지 지켜야 할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산은 백두산이 으뜸이고 나무 중엔 소나무가 으뜸이었다.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는 선비가 지녀야 할 지조와 절개.
선비들은 소나무를 닮고 싶었고 소나무 뜰을 갖고 싶었다.
소나무 목재 대들보 한옥에서 살고 소나무 관에 묻혔던 것.

그렇다면 이조 중기 숙종은 왜 봉산을 지정하였을까?

17세기 후반의 이조사회는 백성과 정부 모두 힘든 시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
조정에서는 관리들에게 줄 봉급조차도 부족할 정도였다.

왕족과 관리에게 일시 지급했던 산림은 개인소유 빌미.
산림은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다 - 이조법전 경국대전
그 원칙을 조정에서 스스로 어기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세가의 산림 점유는 점차 확대
정작 나라에서 쓸 소나무 숲 조차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라가 선택한 제도가 봉산제도.

봉산제도란 궁궐을 짓고 선박을 만들 소나무를 보호.
소나무가 잘 자라는 숲을 지정하여 관리하는 제도였다.
해안가 30리 산림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기존정책을 포기

특정 산림을 선택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
봉산에서는 벌목이나 농사짓고 묘를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
이렇게 지정된 봉산은 물길 편리한 해안과 한강 유역에 분포

봉산을 해안가나 강유역에 지정한 이유는 운반이 쉽기 때문.
배 만드는데 사용하는 소나무는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
충청도 안면도 등에 282곳 특히 안면도에만 73곳의 봉산이 지정.

반면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궁궐건축과 관 제작 용도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60곳의 황장봉산(黃腸封山)을 지정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량한 소나무숲을 볼 수 있는 울진군
그곳 소광리 소나무림도 당시 지정된 황장봉산 중 한군데였다.

봉산의 가장 큰 목적은 궁궐을 짓고 배를 건조하는 원자재.
창덕궁 인정전, 수원 화성문 등 많은 목조건축문화재 원자재.
안면도, 장산곶, 완도 등의 봉산에서 키운 나무로 지어졌다.

18세기 수원성 건축에 쓴 대부등 344주는 안면도 봉산.
'대부등 = 길이 9m, 원목 양 끝 중 좁은 곳 지름이 67㎝'
대략 길이가 25m, 가슴둘레 지름이 80㎝의 거대한 소나무

이조후기 잦은 전란을 겪은 후 봉산은 대부분 사라졌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치하 36년. 6.25 사변. 등등 

현재, 거림은 온갖 잡목들이 빼곡하게 우거져있다.
일제시대의 벌목과 6.25 사변으로 사라졌던 원시림.
불과, 반세기 만에 천둥 벌거숭이 모습은 사라졌다.

앞으로 수십년 지나면, 원시림 옛 모습이 복원될듯




도장골.



유두류록에는 가섭대 아래 영신사가 있었다는 기록.
영신사가 사라진 후 가섭대가 영신대로 바뀐듯 싶다.
현재 영신사 터는 '영신대' 기도처로 명맥을 이어온다.

지리산 일대의 지명은 그 유래가 각양각색.
도장골 지명에 대해 알려진 뜻풀이가 그렇다.
'산'을 나타내는 고대 우리말 중에 '달'이 있다.

'달'이란 말의 모음이 변해 '닫' 혹은 '돋' 발음.
돋+안쪽 골 = 돋안골 = 도댠골 = 도잔골 = 도장골.
도장골은 '산 안쪽에 있는 골'에서 유래된 지명 설.

'도장골은 골안에 골짜기가 있을 만큼 험한 산세.'

잘못 골짜기 안 골짜기에 빠지면 길 잃기 쉬운 곳.
입산금지 구역이라 인적이 드물어 조난당하기 쉽다.
거림마을 사람에게는 식수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촛대봉 아래 40분 거리의 촛대샘 주변은 나물 군락지.

거림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산나물과 약초 채취 코스.
1950년대 남부 빗점골 후송병원으로 이동하는 비밀 루트.
이 계곡 초입부터 세석과 연하천까지 원시림이 숨쉬는 비경.

'밀금폭포 아래 위에 있는.. 두 용소
와룡폭포, 들돌골, 시루봉골, 촛대봉골.'

시루봉 남쪽 중산리골 첩첩산중이 바라보이는 인적 드문 곳.
시루봉과 촛대샘 사이 고원 길은 5월 말 경에는 철쭉 신비경.
아직 이런 코스가 남아 있다는 것은 산악인들에게는 기쁨이다.

거림 매표소에서 곧장 오른쪽 200 미터쯤 가면 숲속에 길상사.
그곳 산길에서 왼쪽 아래로 희미한 굴이 군데군데 있어.. 도장골.
마치, 도장처럼 깊게 파여진 바위 구멍들이 있어 도장골이라 한다.

시퍼런 용소와 폭포가 나타나고 매표소에서 40분 걸으면 마당바위.
그곳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개울건너 오르면 계속 산죽밭 개울가 숲길.
왼쪽에 들돌골 시루봉골 촛대봉골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촛대봉 가는 길.

촛대봉 계곡과 연하봉 계곡이 만나는 바로 아래 와룡폭포 (높이 20m).
이곳까지 오기 전 500 m 쯤에서 시루봉으로 오르는 왼쪽길로 들어선다.
또렷하지 않은 길. 시루봉골 옆을 지나 촛대봉 능선까지 1시간 30분 거리.

촛대샘에서 세석산장까지 20분 거리,
와룡폭포에서 계곡 따라 연하봉 코스.

이정표는 전혀 없고, 길도 또렷하지 않아
거림 매표소에서 세석까지 5시간 도보 거리.
도장골은 산세가 험해 조난사고 빈번한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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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골은 정경유착을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정경유착은 정치와 경제의 상부상조 관계를 의미.
1920년 우리나라 민족자본은 일제에 비해 14%에 불과

우리나라는 경제 면에서도 일제에 종속
민족 자본이 민족운동을 주도하는데 실패.

조선총독부는 상인조직을 만들고, 모든 상공업자를 가입시켰다.
1930년 민족자본은 상공업자 조직을 만들 수 없어 친일파가 된다.
1945년 해방 이후 친일파 기업가는 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하여, 친일파 기업가는 권력에 종속된 정경유착 관계를 맺는다.
이승만 정권도 민족자본이 없어 친일파 기업가들을 외면 못한 탓.
정경유착은 혼맥, 비자금, 부정부패, 대기업 특혜의 산실로 발전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조는 장리(부패공무원)에게 엄격한 징계.
본인은 물론 그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공직 임용을 불허했다.
증손자 때에 가서야 상급 관청 이외 하위직에만 등용될 수 있었다.

'한 번 뇌물을 받으면, 대대로 공직에 몸 담지 못하는 법.'

그러나, 철종 시절 병마절도사 백낙신은 부정부패의 표본.
진주민란의 원인이 되어 고금도에 유배 된지 1년 만에 귀향,
3년 만에 영종도 부절제사, 병인양요에는 京畿中軍으로 발탁

백낙신은 국가유공자가 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승진된다.
결국, 부정부패가 만연된 이조 정권은 얼마 후 일본에 합병.
부정부패 정권이 나라를 망친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 사례.

2004년 말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 권이다.
국가청렴도는 146 국 중 47위로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경제 수준에 비해 청렴도가 뒤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지적한 우리나라의 3대 병폐
평양기생, 붕당정치, 전라도 아전의 부정부패.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은 알게 모르게 전해온다.

 

 

 

길상사.


 

천왕봉의 일출 방향 바로 아래 위치한., 삼장면.
수많은 옛 폐사지 사찰 터와 절골 흔적이 있는 곳.
옛부터 해뜨는 방향을 신성하게 여긴 우리나라 민족.


삼장면 거림 도장골에 있는 사찰., 길상사.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 거림 도장골 입구 오른 쪽에 있는 사찰.
요정 정치의 산실인 대원각 전재산을 시주 받아 1999년 완공된 절.
당시 1000 억 전재산 시주로 그녀와의 염문설에 휘말렸던 법정스님.

김영한 보살은 가난때문에 기생이 되어 22살에 운명적인 사랑,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오직 한 사람, 월북 시인 백석(白石) 뿐.
하지만, 남북의 벽에 가로막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가슴앓이.

'사랑의 슬픔을 잊으려 평생 재산모우는 일에 전념.'

혹시, 백석 그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그녀
다시 만날 그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려 했던 그녀.
'인생사 공수레 공수거'를 실천후 빈손으로 돌아간 그녀.

1987년 대원각을 법정스님 통해 기증할 뜻을 밝혔던 그녀.
1997년 12월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 外 4천 인사 참석.
1999년 석가모니불 완공 즈음 그녀는 1999년 11월 14일 별세.

김영한 보살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리고
108 염주를 김영환 보살 목에 걸어준 법정스님.

“내가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기쁩니다”

그말을 하면서 소녀처럼 좋아하던 김영한 보살.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길상사 경내에서 유언.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에 뿌려 주세요”

1999년 11월14일 108 염주 한벌 목에 걸고 83세로 운명.
200 명의 호스테스 상주들의 애끓는 통곡 속에 장례 절차.
1999년 12월14일 오전, 눈내리는 길상사에 뿌려진 그녀 유골.

1987년 LA 법회에서 만난 법정스님 무소유론 설법에 감동한 그녀.
법정스님이 그녀 전재산 시주를 받아들이지 않자, 송광사에 시주.
그것이 거림에 길상사가 세워진 배경이자 그녀와 법정스님의 인연.

이조 500 년 새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중심에 있던 무학대사.
23 나이에 진주 길상사에 있다가 원나라로 유학을 갔던 무학.

'오백년 도읍지 한양'을 존재하게 한 무학을 배출한 산실., 지리산.
'이조 창업 숨은 뜻은 불교중흥' 그러나, 정도전 유교사상으로 좌절.
이조시대 후반에 유교가 정착되면서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어 왔다.

특히, 지리산 자락에서 이조시대에 건립한 사찰은 찾아 보기가 어렵다.
하여, 지리산 자락에 길상사가 들어서게 된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다.
우리나라의 불교 역사는 양대산맥으로 뿌리가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통일신라 선종불교인 실상산문>
<동리산문 본산 고려의 천태종과 조계종>

거림의 실상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신라 전통을 이어받은 사찰.
무학대사 청담스님 및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맥을 이어 온 고승들.

법정스님은 대원각 자리였던 성북 길상사 창립자이자 초대 주지스님.
길상사 불자들에게 거림 사찰은 회원제 여름 휴양소로 각광을 받는다.
길상사는 거림 이외에도 프랑스 파리 등등 여러 곳에 사찰이 있다.

길상사는 전재산을 시주한 김영한 보살 떠오르게 하는 곳.
거림 입지조건은 풍수지리상 그녀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듯
근대 정치사를 치마 폭에 감싸고 그 격류 속에서 살았던 그녀.

'자빠진 골(엎어진 뜰)' 도장골 길목.. 길상사.

동족상잔 반란의 역사 속에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 맴도는 곳.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어떻게 죽어야 할지.. 깨닫게 하는 길상사.
길상사 설립 유래와 더불어 그녀의 삶은 또 하나의 전설로 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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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핏빛 순결 같은 철쭉꽃이 만발하는 세석평전.
그곳에 스민 물이 음양샘으로 발원되어 흐르는.. '거림'.
김영한 보살은 촛대봉을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법정 스님(66)은 수필집 <무소유>에서 ....................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임을 깨닫고,
"나는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버리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달리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이 바로 온 세상을 갖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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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에서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답게 살고싶다

[오두막 편지] 에서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에서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버리고 떠나기] 에서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람도,다정한 눈빛도,
정겨운 음성도 가슴에서 싹이 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오두막 편지] 에서


나는 누구인가.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에서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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