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53. ( 빗점골. 이헌상. 토벌군. 오봉마을. 공개바위.)

donkyhote 2010. 10. 29. 02:45

 

 

빗점골.




빗점골과 도장골 합수지점은 남부군 총사령부 및 식량 저장지.
와룡폭포 상단은 남부군 지휘부, 환자 수용소, 남부군 은신처.
토벌대와 빨치산과의 끊임없던 교전이 '피습과 은신'으로 묘사.

빗점골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명선봉으로 오르는 명선봉 능선길,

토끼봉 쪽으로 오르는 왼골 코스.
총각샘 쪽으로 오르는 산태골 코스,
연하천 우측으로 오르는 절터골 코스.

삼각봉과 연하천에서 흐르는 절터골
명선봉과 토기봉에서 흘러내리는 산태골,
왼골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이., 합수내

빗점골 너덜지대는 일명 '합수내 흐른바위'.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제5지구당을 이끌고
벽소령과 토끼봉 사이 빗절골과 절터골, 산태골을
거점으로 칠불사 능선과 뱀사골 광대골 등지로 진출

게릴라전을 구사한 빨치산 최후의 항전무대
남로당 간부와 유격대 사령관들 최후의 회의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던 그때가 53년 10월 18일

남부군 행적이 자주 묘사되는 너덜지대 '합수내 흐른바위'.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전략회의를 주최한 곳이자 숨진 곳.
지구당 회의에서 이현상이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된 곳.

세석에서 벽소령산장 2km 전에, 오른쪽 군사도로
그곳 따라 하산하면 빗점골, 더 내려가면 의신마을
삼정마을까지 이어진 골짜기를 의신계곡이라 부른다.

절골 삼태골 왼골 3지류가 합쳐지는 빗점골.
3지류 합수지점 너덜지대는 이헌상 사살 지점.
빗점골에 합류되는 왼골 산태골 절골은 비경지대.

'벽소령도로 따라 내려와 땀 씻을만한 개울들.'

지리산 종주 도중 여유를 갖고 둘러볼만한 곳.
연인과 함께 목욕하고 싶어지는 인적없는 개울.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3 개울 가운데 산태골은 토벌군의 양민 학살현장.
왼골은 빗점골로 합류되는 3 지류 중 왼쪽의 계곡.
오른쪽의 절골은 이조 불교탄압으로 폐허가 된 절터.

'절골은 '절터골' 줄임말에서 유래된듯.'

오랜 세월이 흘러 옛날 절터마저 사라진 절골.
그옛날 빈대가 들끓만큼 북적거렸을 절골 사찰들.
옛 절터는 커냥 폐찰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절골.

옥황상제 시녀인 선녀들이 밥짓고 목욕할만한 곳.
절골은 벽소령 부자바위 전설의 산실로도 추정된다.
목욕하는 아미선녀 날개옷을 감춘 사냥꾼 총각의 전설.

혹시, 아미선녀는 절골 처녀 아니었을까?

사냥꾼은 능선 산 넘어 음정 마을 총각(?).
늘 음지일 만큼 깊은 계곡에 있는 음정마을.
아미 선녀가 세 자녀와 남편을 두고 떠난 곳.

그 야속함을 원망하듯 명명된.. 비리내골.
빨치산 토벌때 피비린내 격전지.. 비린내골.
그런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벽소령 계곡

왼골, 산태골, 절골은 잊혀진 '전설의 고향'.
절골의 마을 흔적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빗점골이 남부군 사령부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6.25 전쟁 직전에 좌익세력 숙청 사건들.
특히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원 집단 사살.
마산 진전 산태골이 그 대표적인 사건 현장.

...............마산 진전 산태골.............
태풍 '루사' 로 인해 드러난 한국판 킬링 필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 일대 2천여구 유골
그 현장을 찾아간 '부산 경남 피학살자 유족회

'회장 송철순(71세 부산 제송동) 와 20 여명

52년 한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을 터트린 송회장.
6.25 때 부친과 함께 끌려갔다 극적으로 생존한 사람)

당시 13세였던 김명철 옹(65세. 여양리 의산마을) 증언.
1950년 7월12일일 오후 1시경 GMC트럭 6대와 버스 한대
여항지서(현 의산마을 회관)앞에 주차하고 있었다는 것.

양쪽으로는 군복을 입은 헌병이 감시하고 있었고,
끌려온 사람들은 피로 낭자해 이미 반죽음 상태였다
차들은 한대씩 차례로 옥방마을(산태골과 도둑골)행.

학살을 마친 헌병은 마을 어귀에 임시 초소를 설치.
경찰에게 근무를 서도록 지시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이날 끌려온 사람은 어림잡아 300여명으로 기억한다.

'그당시 희생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학살현장에 강제동원되어 매장을 한 주민들의 증언.
경찰과 군인에게 들은 얘기는 '보도연맹원'이라 기억.

해방직후 미국 도움으로 정권을 잡은 이승만 대통령
좌익세력 활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제정.
좌익세력을 계몽하기 위한 만든 단체가 국민 보도연맹

정부는 보도연맹을 세 그룹으로 분류
좌익활동 움직임 여부를 늘 감시했다.
6.25 전쟁 직후, 사살된 보도 연맹원들

전쟁전까지만 해도 교화 프로그램
궐기대회나 웅변대회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모두 떼죽음.

1950년 7월경, 광주 광산지역 보도연맹원들
경찰의 소집령을 받고 광산구 암탉굴에 매장.
광주 보도연맹원들도 증심사 계곡에서 집단사살.

경남 마산 삼진면의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형무소 재소자 가운데 피학살자 수가 1681명
보도연맹원을 시민극장에 모아 마산형무소 수감

심지어 오키나와 인근 해역에 수장한후
일본 외교부의 공식 항의를 받기도 했다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된 산태골과 도둑골 외
비실광산등지에 최소 2천여명이 학살된 뒤 매장

산태골 현장은 찾은 송철순 회장(71세. 부산 제송동)
19살 되던 50년 7월 부친과 함께 동래경찰서에 유치장
이틀동안 유치됐다가, 의누나 덕분에 혼자 살아나왔다

원래, 보도연맹은 일제의 독립군 감시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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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태골 역시 좌익세력 집단학살 현장.
당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주민들도 많았던듯.
하여, 이헌상의 남부군 총사령부가 된 빗점골.

억울한 죽음을 당한 유가족들이 빨치산에 가담.
1950년 6.25 이후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점령.
억울한 죽음을 당한 좌익 세력은 우익 세력에 보복.

인민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숨은 좌익세력.
지리산은 겉잡을 수 없는 격전지로 변하고 만다.
하여, 대부분의 지리산 산골마을에 내려진 소개령.

낮에는 토벌군이 지배하는 세상.
밤이면 빨치산이 지배하는 세상.
그 어느 편도 들수 없던 주민들.

작전상 소개령에 의해 산골마을 폐쇄.

아미선녀 전설을 간직한 삼정마을 선유동 정자.
음정 절골 빗점마을 소개령으로 떠나간 주민들.
그후 의신마을과 바로 윗동네 삼정마을에 정착.

절골 사찰에 기대어 살던 인근 마을 주민들.
절골이 폐허가 된후 먹고 살 길 찾아 떠난듯.
연하천 일대에 지금껏 남아있는 요정의 전설.

'혹시, 절골 인근에 살던 규수들 아닐까?'

...........절골에서 빗점골까지.........
빨치산들이 통신수단의 배터리 충전을 위해
절터골에 수력발전 시설까지 갖추었다는 설.
그만큼 절골은 빨치산 최후의 항전무대인 곳.

남로당 간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회의
그 최후의 회의 이후 이현상은 최후를 맞이했다.
이헌상 최후의 날이 1953년 10월 18일로 전해온다.

빨치산 최후의 항전지였던 빗점골
화개천 거슬러 50리 올라야 빗점골.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까지 포장도로
의신마을에서 삼정마을까지 비포장도로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 계곡에서부터 빗점골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도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km 남짓한 비포장도로
삼정마을은 수만 평 넓은 초원지대 염소방목장
3가구가 사는 삼정마을 지나 2km 더 가면 벽소령

삼정마을에서 벽소령까지 연결되는 작전도로
주민들이 고로쇠 채취와 수송을 목적으로 보수
아마도 멀지 않아 벽소령까지 도로가 정비될 듯.

삼정마을에서 방목하는 염소무리들
이미 벽소령까지 영역을 넓힌 상태

더욱이 산 너머 마천면 삼정에서는
지프형 택시비가 벽소령까지 10만원

벽소령에서 하동 작전도로는 현재 폐도.
역시 곧 보수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부분.

삼정에서 조금 지나면 차량진입이 불가능
그곳 주차장에는 늘 차가 몇 대씩 보인다.
주차장 못미쳐 계곡과 도로 사이 꽤 넓은 곳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날 빗점마을 터로 보인다.
빗점마을은 한때 화개천에서 가장 높은 곳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터만 남아 있는 곳.

당국이 삼정마을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
어릴때 빗점마을에 살았던 의신마을 조봉문씨
빗점마을 위 주차장이 곧 빗점골 코스 들머리.

주차장에서 좀 걷다보면 넓은 너덜지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삼정 합수내.

합수내는 삼각봉과 연하천에서 흐르는, 절터골
명선봉(1586m)과 토끼봉에서 흘러내린, 산태골,
왼골의 3 개울물이 합수하는 지점이라.. 합수내

빗점골에서 주능선까지의 등산로는 세 갈래

첫째 절골따라 연하천 산장 또는 삼각봉 8km
둘째 산태골따라 명선봉 또는 총각샘으로 연결
셋째 산태골따라 왼쪽 왼골 통해 토끼봉으로 연결.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숨어있는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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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 형제바위에서 구도자 형제를 유혹하던 요정.
연하천 요정 실체도 절골에 살던 규수일 듯 추정된다.
벽소령 넘어 대성골 무당이 되거나 진주 기생이 된듯.

영원사에 기대에 살았던 함양 삼정마을 주민들.
고려 명찰 영원사 덕분에 퍽 융성했던 삼정마을.
이조시대 불교탄압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삼정마을.

비구 비구니는 강제 환속시켜 관비 또는 궁방비.
사찰 재산은 이조 조정에서 환수해 국고로 충당.

비구니는 관비, 궁방비 신세를 모면하려고 무당.
생계 막연한 절골 빗점마을 처녀들은 기생이 된듯
영원사와 생사고락 운명을 같이한 삼정마을 규수들.

...............영원사.................
영원사(靈源寺)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중턱(920m)에 있는 통일신라 고찰.
한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제일 큰 사찰.

선방 9채, 100간 넘는 방, 득도한 고승들.

서산대사, 청매,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 상언(雪坡 常彦), 포광(包光)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 109명이 도를 닦은 곳.

여수 반란사건때 반란군들의 아지트
정부군이 작전상 불태워 버렸던 사찰.
그 후 1971년 중건해 새로 지은 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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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봉 삼각고지 형제봉이 삼태기처럼 감싼 산태골.
그 왼쪽의 왼골과 오른쪽 절골은 빗점골로 합류한다.
빗점골은 이헌상이 이끄는 남부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

빗점골과 도장골 합류지점은 식량 저장 및 전략적 요충지.
와룡폭포 상단은 남부군 지휘부, 환자수용소, 남부군 은신처.
지금은 거림까지 도로가 있지만, 당시에는 곡점에서부터 산길.

곡점에서 거림 도장골까지는 깊고도 먼 골짜기.
도장골에서 빗점골까지 험하고 길 없는 골짜기.
와룡폭포 상단에서 빗점골까지는 난공불락 요새.

빗점골 아래 여러 골짜기가 합쳐져 의신골.
의신골 아래로 여러 지류가 합쳐져 화개천.

지리산 북쪽 마천 삼정마을을 잇는 벽소령 작전도로는
덕평골 지나 빗점골 거쳐 의신마을 대성골로 이어진다.
벽소령 작전도로는 원래 일제 때 벌목을 하기 위한 임도.

작전도로가 뚫려 인적마저 끊긴 왼골 산태골 절골.
지리산 비경을 간직한채 지명 조차 잊혀져 가는 곳.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비닐 파이프만 눈에 띄는 곳.

의신계곡 좌측은 호남정맥 마루금 광양 백운산 억불봉
우측은 악양의 진산 형제봉이 운무에 휩쌓여 있는 산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 지나 신흥 삼거리 우측 대성리

의신마을은 경주 정씨, 단양 우씨, 전주 최씨의 집성촌
임진왜란 때 피난와 의좋게 살며 조성된 대성리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동학 농민군이 1908년에 참살 당한 역사의 현장.

주민들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위령탑 건립 준비중
매년 정월 초하루 '동학의 난' 혼을 달래는 원혼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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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마을은 현재는 벽소령에서 임도를 통해서만 산행이 가능
이현상의 최후의 장소 빗점골과 산태골은 입산이 통제되고있다.
다만, 하동 군청과 국립공원관리소 사전승인을 받으면 출입 가능.

남부군 토벌대 백야전사 또는 남경대 벼락부대에 의해 최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빨치산 제 2 병단장,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 이헌상.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끈 주역.
1953년 9월까지 6년간 지리산 유격투쟁을 주도했던 인물.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될 당시 47세였던 이헌상.

충남 금산에서 출생
고창 고등학교 중퇴
서울 중앙 보통고 입학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지금의 고대 법학과를 졸업)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서전사 2 연대장 차일혁 총경
그 아들 차길진이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수기'

'빨치산 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 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
이현상은 곧 빨치산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
북에서 조차 외면당하면서 고립무원
끝까지 버티었던 외로운 빨치산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
남한 최고의 빨치산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부상.
1948년 10월, 여순사건 순천역의 반란군을 인도.

지리산으로 이끌고 간 뒤
1953년 9월까지 유격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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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에서 삼정까지 3km는 비포장 임도가 뚫린 벽소령 계곡.
수만평의 염소 방목장 초원지대는 3 가구가 사는 삼정 마을.
벽소령까지 연결된 이 도로는 주민에게 채취한 고로쇠 수송로.

쌍계사에서 칠불사로 오르다 신흥 마을에서
대성리 쪽의 의신으로 이어지는 벽소령 도로.
반란군이 활동하지 못하게 뚫은 군사 작전도로.

아직도 4륜 구동차는 벽소령까지 올라갈 수 있다.
지리산 북쪽 주민이 화개장터에 소금 사러가던 길.
벽소령에서 삼정마을까지 7km 지점에 주차장 인근

그곳에 흩어진 폐가들이 예전에 빗점마을 흔적이다.
1950. 6.25 전까지는 지리산 가장 높은 곳 마을이었다.
전란 중 당국이 삼정마을과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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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빗점골은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은 곳.
여름 빗점골 개울은 수량이 풍부해 무더위를 씻어내기 안성맞춤.
예전엔 하루종일 알몸으로 서성거려도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던 곳.

오늘날 벽소령 작전도로가 뚫렸어도 인적없는 빗점골.
거림 도장골에서 빗점골까지는 산세 깊고 길이 험한 곳.
빗점골에서도 절골, 산태골, 왼골은 더욱 깊은 골짜기들.

마치, 산세가 머리를 빗는 '머리빗'과 같아
'빗살 점점이 패인 골'에서 유래 된, 빗점골.

덕유산 이헌상 부대원들과 회문산에서 철수한 전북도당원들
남부군 오백 명이 1년만에 처음으로 목욕하는 인상적인 장면.
빗점골은 수백 남녀 남부군의 혼욕 실화가 떠오르게 하는 개울.

여러 갈래 물줄기가 합쳐지는 그곳 주변능선들이 부채살처럼 퍼진 곳.
긴급상황이면 지리산 어느 방향으로도 피신할 수 있는 천혜의 은신처.

남부군 영화 속 수백명 남녀 혼욕 장면.
남부군 영화의 촬영장소는 덕산계곡이다.

지리산 중심부 빗점골은 남부군 전략적 요충지.
남부군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는 빗점골.
'이헌상의 최후'를 통해 빗점골에 관해 알아보자.




이헌상.



빗점골 합수내 위 당귀밭 너머 군용 헬기장 옆
고로쇠나무 우거진 도랑길따라 형성된 너덜지대

1953년 9월18일 상오 11시5분 경
3년간 산 생활을 마감한., 이현상.
그후 창경원에 전시되었던 그의 시신

서남 경찰대 최고 책임자가 화장
섬진강에 뿌렸다고 하는 그의 유골.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던 빗점골
한국 현대사에서 그 의미가 크다.

52년 초여름 남로당 간부와 각지구 유격대 사령관 회의.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등 참가.
이른바 5. 25 결정(각도당을 해산하는 대신 지구당 개편안)

1953년 9월 6일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주재 하에 지구당 해체 결정.
이 회의에서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고 전해져온다.
빗점골 너덜지대 합수내 흐른바위는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약력

1906 충남 군산군 군북면에서 남
1925 중앙고보 재학중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
1927 보성전문 법학과에 들어감

해방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남로당 연락부장을 맡음

1948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시작
1951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됨
1953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사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 이헌상.'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당시 <남부군>이란 수기를 펴낸 이태(본명 이우태)씨.
조선 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술회하는 말.

우리 현대사에서 이현상만큼 전설속에 가리워 있고
인생 역경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드물 듯.
따라서 그에 대한 의문도 그만큼 강렬하다 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족적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이헌상.'

그는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한 인물.
그의 낡은 이데올로기는 우리사회에서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측근 생존자 몇몇 조차 입을 다물어 묻혀진 존재이다.

그에 관해서는 인물사진 한 장 조차도 변변히 남아 있지 않다.
최근들어 이현상의 실체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은 미흡.
그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거의 없어 구전으로 만 전해져오는 탓.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듯.
당시 토벌대장이던 차일혁 총경(58년 사망)이 남긴 기록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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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경 잠복중이던 돌격조 중 한조가
갈미봉 방향에서 3명 이상의 남부군을 발견
개인 간격 10m를 두고 남하하는 남부군 감시
15m까지 접근해 일제사격으로 3분 교전끝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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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지구 로동신문>주필로 이현상과 같이 생활한 송영회 씨.
2005년 현재 81세, 경기도 수원시 송영회 씨가 회고한 이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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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비트에서 이현상과 마지막 만남
1952년 9월 18일 오전이었던 것으로 기억.
이헌상은 안색이 썩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헌상 :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난 지하로 들어갈 생각이네, 진주로 가겠네."

송영회 : "어떻게든 일본으로 빠져나가 자네를 돕겠네"

내가 아끼던 포킷용 <소련공산당사>와 <일어판 노어사전>
그는 자신이 항상 즐기던 <마도로스 파이프>를 쥐어주었다.

이헌상 :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송영회 : "싱거운 소리를 다하는군."

'이 사람 마음이 약해진 게로구나.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일지 모른다'
..............................................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

이날 이현상은 동료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송씨는 뱀사골로 내려간후 이현상이 사살된 소식을 접했다.
비행기에서 뿌려진 전단을 받아 보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토벌대의 발표는 조작된 것일까?'
'아니면, 이헌상 그가 자살한 걸까?'

일부에서 제기했던 의문점이지만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현상은 사망 시 줄선 미제 사지옷에 깨끗한 군용 농구화 차림.
그의 주머니엔 염주가..,수첩엔 한시 몇수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평정 없이 남한의 평정 있을 수 없고,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이 평정될 수 없다"

이현상 생포를 지시했고, 보고 싶어했던 이승만 대통령
그는 이헌상의 죽은 시신을 끝내 보려하지 않았다 한다.

이현상과 동향인 임영신, 유진산 씨 등등이 사체를 확인.
그 유품은 창경원에 전시되었고 군경 사이에서 공훈 다툼.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 태극무공훈장

이현상은 축지법으로 몇길 담장을 훌쩍훌쩍 뛰어 넘는다는 소문.
그는 실제 토벌대를 농락하 듯 신출귀몰했다고 송씨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래 글은 송씨의 술회를 간단히 편집한 내용으로 원문과는 차이가 있다.

......................( 송씨의 술회 내용 )...........................
한번은 벼랑 끝에 천막을 치고 이현상을 포함해 3-4명이 같이 자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순간 드러누운 채 벼랑으로 굴렀고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현상이 혼자 있더군요, "어떻게 된거냐?"
"밤에 소변보며 뭔가 찜찜해 권총을 빼 들고 엄호사격으로 적을 쫓았어."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산중생활을 오래하다가 보니까
위험을 간파하는 뛰어난 촉각이 온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이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자리를 옮기자며 뛰길래
멋모르고 쫓아가 화를 면한 적도 두어 번 있었읍니다.

그는 포로를 살상하지 않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토벌대들은 남부군에 잡혀도 안 죽는다고 알려졌지요.

포로에게 각서받은 후 총만 빼앗고 풀어주어,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도 궁금해 한적이 있지요.

이현상의 심리전인지, 아니면 철학인지
혼돈 된다는 말을 되뇌였다고 하더군요.

그는 토벌군에 대해 적개심보다는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작고 통통한 몸집에 팔자 콧수염, 이현상
냉정 침착하지만 정이 깊은 성격의 소유자.

어느날 행군에 지쳐 짐을 간신히 지고 가는데
웬 중년남자가 짐을 대신 짊어져 주었다지요.

"선생님, 이게 무신 일이십니까?"

청년들이 달려와 그 짐을 내려놓기도 했다는 이헌상.
이현상은 1906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출생.
3백석 부농 이면배의 4남 2녀 중 다섯째(아들로는 넷째).

면장을 지낸 이헌상 아버지의 송덕비.
현재, 금산 대전 간 도로 변에 있다 한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과 둘째 형도 면장일을 보았고,
셋째 형은 6.25 뒤 행방불명, 어머니는 1975년 90세로 사망.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생전에 아들을 기다렸다고 해요.
출가한 누이들은 세상을 떴고 조카들만 서울과 전주에 살지요.

이현상은 부인 경주 최씨와 사이에 딸 무영과 아들 극 남매를 두었지요.
북한 잡지에 극의 입당보증을 김정일이 선 내용을 보아 극은 북한에 생존.
이헌상 부인 최씨도 북한에 있고, 이현상의 호적 상에 34년생 둘째딸 문영.

실제 나이가 73살인 이헌사의 의붓딸 '문영'.
이현상의 고향마을에 지금까지도 살고 있어요.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 주었다고 말하곤 했죠.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시중을 들어주던,
20대의 가냘프고 작은 몸매의 <하 여인>

19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를 갇혔다가 풀려났다고 해요.
<하 여인>의 아들은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에서 살고 있지요.
<하 여인>과 아들은 그 관계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기를 원해요.

1989년 청주보안 감호소에서 76세에 병사했던 김삼홍
이현상 부대의 정치위원 김삼홍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녀.

이현상의 고향마을 외부리엔 그의 생가와 살림집.
아직 그대로 남았지만 그의 일가는 그곳에 드물고,
그에 관한 기억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어요. -중략-

이현상은 53년 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판단.
새로운 지하조직 운동을 하려던 과정에서 최후를 맞은 것 같아요.
이제 이현상은 전설의 영웅이 아닌 역사 속 인물로 생각할 때인 듯.

"남북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상황에서
그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눈보라치는 산마루에서 우수에 잠긴듯한 이현상
이제 그 의미를 역사가 밝혀야 할 시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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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곳곳마다 만들어지는 남부군 산행코스.
청소년이 혼돈되지 않을만한 민족 역사관이 중요.
'이조 때 비극의 여인들' 환향녀를 두번 죽인 정책.

이제 지구촌에서 공산주의는 북한 외 설 곳이 없다.
통일에 앞서 낡은 이데올로기 희생자들을 포용할 시기.
지금은 남북 민족 화합을 위한 가치관은 세워야 할 시기.

구한말 세계 강대국들의 영역 분활에 뒤흔들린 이조.
다시는 같은 역사가 재현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때.
이헌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숨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토벌군.



지리산의 남부군은 누가 어떻게 토벌했을까?
국국 1군단이 토벌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온다.
백선엽 총사령관이 이끈.. '백야전 전투 사령부.'

.............백야전 전투 사령부...............
6.25 전쟁 중 1951년 11월 지리산 지구
빨치산 토벌을 위해 조직된 전투사령부.
사령관 백선엽의 성을 따 명명된 사령부

미8군 작전에 따라 명명된 'Task force Paik'
'쥐잡이 작전'으로 불리우는 토벌작전을 총괄.
당시 지리산에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들

소위 남부군이라 부르는 유격대 세력이 강했다.
이들 토벌군이 1군단 소속의 수도 사단과 8 사단.
군단장 백선엽, 수도사단장 송요찬, 최영희 8사단장.

1군단 2개 사단 사령부는 지리산 일대 남원에 투입
약 200명의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경찰부대의 지원
치안국 요원, 작전연락, 통신, 심리전 요원 60여 명

미국 군사고문단까지 합류해 작전지역에 병력을 배치
지리산을 소탕한 다음 순차적으로 타지역을 소탕 계획.

수도사단은 해상으로 전라남도 여수에 상륙해
남에서 북으로, 8사단은 육로로 북에서 남으로
각각 지리산을 포위 공격하며 타격 부대의 역할

기존 남서지구 전투사령부(준장 김용배)
경비 연대와 각종 경찰부대는 외곽 부대
목표지역 외곽 빨치산 통로와 도주로 차단

분산 도주하는 빨치산을 섬멸하는 임무.
공군 편대는 인근 사천비행장에서 지원

제1기 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포위망을 형성
압축해 들어가며 지리산 정상까지 1주일 내에 진격
그뒤로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빨치산을 추격했다.

제2기 작전은 12월 19일부터 1952년 1월 6일까지
전주-순천을 잇는 남북선을 중심으로 서쪽은 8사단,
동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해 지리산 외곽 빨치산 소탕.

제3기 작전은 1월 15일부터 개시되어 다시 지리산을 포위
토벌작전이 사실상 마감된 1월말까지 수색 추격 매복 작전
그 결과 1만 9,000명 이상의 빨치산들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 작전으로 남부군 중심 빨치산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
후방에 '제2전선'을 구축하려던 북한의 전략은 치명적 타격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후 탄생한 국군 제2군단의 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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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역사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부터 일제 치하에 저항한 지리산 항일투쟁
갑오농민 지도자 및 독립 운동가들이 은둔했던 곳.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민중 들에게 새로운 희망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
민중들의 희망과 의지와 달리 남북이 분단되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제물로 희생되어 갔다.

남한 단독정부 주도 세력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좌익으로 몰아 탄압.

해가 갈수록 탄압의 강도가 날로 거세지자
그를 피해 사람들은 지리산 속으로 숨어든다.

그들 중에는 먹고살려 싸웠던 자도 있었고,
자유롭고 해방된 사회를 꿈꾸던 자도 있었고,
해방이후 농민, 노동운동에 앞장선 자도 있었다.

통일국가를 열망하던 민족주의자
또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그들은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공통점.
그러나, 공통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총알받이
그에 강력히 맞서 침묵만 지키지 않던 민중 세력.

그들은 점점 하나의 지리산 산사람들로 뭉쳤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가정 사실화되자
비합법인 무장 투쟁으로 대항하는 야산대를 조직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는 1948년 2.7 구국투쟁
같은 해 제주 4.3 민중 항쟁을 일으켰던 야산대.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봉기한 무장군인들
조직적 항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유격전구를 형성
광양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왕시루봉 문수골에 첫발

1948년 10월 25일 김지회 등이 이끈 14연대 반란군.
그 이틀 뒤 총성이 울리고 지리산은 피로 물들었다.
지리산 속에서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긴 김지회부대

1949년 4월 9일 뱀사골 반선전투에서 결국 궤멸.
그렇지만 다른 지역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집결
북한 공산당 정권의 지원을 받아 점점 세력이 확산.

1949년 6월에 평양에서 조국전선이 결성되자
7월부터 무장투쟁을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
인민유격대가 편성되며 각 지구별 3개 병단을 편성

제1병단은 오대산지구,
제2병단은 지리산지구,
제3병단은 태백산지구.

6월부터는 북한에서 남파된 유격대 2,400명 가세
남한에서의 빨치산 무장투쟁은 한층 확대되었다.

1950년 군경 동계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활동이 주춤
그러나, 지리산을 비롯한 경북, 전남에서 무장 투쟁
지리산 빨치산은 1월 1일 화개면에서 국군 70명 기습

3일 화개 지곡 산청 오곡 네 곳을 공격
군경 특수부대 요원 70여 명을 사살했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교전횟수는 1,423회.
사살된 군경은 2,868명. 빨치산이 탈취한 무기
박격포 3문과 기관총 2문, 소총 220 여 정 등등.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과 군경이 싸울 때
북한은 남조선 해방명분으로 6월 25일 남침
이때 지리산 빨치산들은 인민군과 협동작전

대표적인 부대는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

경남 산청지구 햠양지구 지리산 유격대,
전남 영광군 서해안과 화순 일대 유격대,
경남 백운산과 산청 하동 남해안 유격대.

그러나 곧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자
자기 도내의 산악 지대로 다시 이동해
북한 노동당 지휘를 받아가며 무장투쟁

1951년 5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 6개 도당회의
이헌상은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총사령관 이헌상이 지리산에 총지휘본부를 설치

부사령관은 이영회가 맡고 조개골에 거점 확보
이른바 남부군 '남반부 인민유격대'가 조직된 것.

그뒤 빨치산과 군경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951년 7월 이후에는 전선이 38선에서 교착상태
그러자 남한은 전방 국군 병력을 후방으로 배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빨치산의 영역은 점점 산악지대로 좁혀졌다.

지리산 빨치산에 대한 군경 토벌작전 5단계

그중 1951년 12월부터 1952년 2월 겨울 작전
1951년 11월 26일 남원에 설치된 백야전 사령부
4기로 나누어 지리산 인근의 빨치산을 집중 공격

1951년 11월말 이전까지는 9,247명이던 빨치산
백야전사 작전이 끝난 1952년 3월말에는 2,431명

그들은 총에 맞아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산속에서 굶어 죽어갔다.

겨울을 보낼 때마다 급격히 줄었고
활동 지역은 지리산 회문산, 속리산,
운장산, 백운산, 덕유산 등지로 고립.

전쟁이 끝난 1953년 9월 지리산에는 800여 명
9월 18일 이현상이 의신마을 빗점골에서 사살

11월 28일 의령경찰서를 기습하고 오던 이영희
산청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게 사살
그밖 간부들도 1953년 12월에서 이듬해 5월에 피살

1954년 5월 국군의 작전이 끝났을 때
조국출판사, 삼승부대, 남원군당 뿐.
이들마저 1955년 후반 대부분 소탕.

1956년 12월 31일 경 43명의 빨치산 생존자.
지리산 일대 빨치산의 무장투쟁은 끝이 났다.

1만 수천여 명에 이르는 빨치산과 죄없는 군경,
지리산에 산 죄로 학살된 산청, 함양, 거창 양민들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당시 서울 대학생들을 따라 총 메고 들어온 여자들
예쁜 아가씨들은 산골 마을의 아가씨들은 아니었고
그당시 대학에 다녔다면 거의 부유층 집구석의 딸들.

산속에서 수없이 죽었다는 지리산 주민들의 증언.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주민 하재호(1942년 생) 씨.


........
맥아더.
.........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UN군 최고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적을 한반도 만주 국경까지 몰아내는데 성공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만주폭격과 중국 연안봉쇄, 대만 국부군 사용을 주장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

귀국 후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기도 함

1964년 4월 워싱턴 D.C.에서 사망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약력............................
1950년 6.25전쟁 발발, 국제연합군(UN) 최고 사령관
인천 상륙작전 지휘로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

1988년 1월 미국 아칸소주 리틀콕 출생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수석졸업
1917년 제 42단의 참모진에 배속
1918년 준장으로 진급

1920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
1925년 소장으로 진급
1928년 미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직 역임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 육군 대장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
1937년 퇴역
1941년 7월 현역 복귀, 미국 극동군 사령관, 필리핀 근무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 대일작전 지휘

1942년 뉴기니작전을 비롯한 반격작전 전개
1945년 7월 필리핀 탈환,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됨
1950년 6.25전쟁 발발, UN 최고 사령관 인천상륙작전 지휘
1951년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으로 4월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

1952년 레밍턴랜드사 이사회 회장 역임
1964년 4월 워싱턴 D.C.에서 사망
................................................


...........
원산폭격
...........


1950년 6.25 당시 원산 평양은 미공군 폭격 대상.
B - 29 폭격기 12대가 원산의 군사 요충지를 폭격.
원산 앞바다에 수많은 기뢰를 투하하여 항구를 봉쇄.

인천상륙작전 당시 적을 따돌리기 위해 폭격.

하여, 원산폭격 기합은 끔찍했던 원산폭격에서 유래.
철모 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뻗친 채 뒷짐을 쥔다.
B - 29 폭격기 형태와 유사한 기합 자세가 원산 폭격.

미 공군의 원산폭격과 국군과 UN군의 태백산맥 봉쇄.
북상하던 빨치산은 퇴로가 차단되자 덕유산에서 남하.
지리산에 숨어 전세가 역전되기를 기다리며 유격투쟁.

그러나, 이헌상은 믿었던 북한으로부터 버림받는다.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뀐 때문이다.
북한은 패색이 짙어지자 빨치산 지원도 사실상 중단.

이헌상은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이헌상을 믿고 지리산으로 후퇴 은닉한 빨치산.
북한은 그 책임을 이헌상에게 전가했던 것 같다.

남부군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헌상.
북한 공산당에게서도 버림받았던 '고독한 영웅'
그 근본적 원인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덧 말.

6.25 이후에도 1968년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 해군에게 피격, 나포되자 원산폭격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고집불통 외골수 북한 당국에게 통하지 않았다.


...............
인천 상륙작전.
...............


1950년 9월 UN군이 인민군 후방을 타격한 작전.
1950년 6·25전쟁 이후 남진을 계속했던 인민군
UN군 참전으로 120 마일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

UN군은 인민군 배후에서 공격해 전열의 허리를 단절
인민군 병력과 장비를 섬멸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 첫 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1단계 9월 15일 06시 한미해병대가 인천 월미도 점령.
2단계 남한 해병대와 미군 보병 및 해병사단 인천 상륙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해 인천항 주변을 완전히 점령.

3단계 남한 해병 2개 대대, 미 1해병사단 19일 한강 도하
26일 정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작전 완료.

................................................
................................................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 작전을 계획했을 때,
미군 수뇌부는 동경회의에서 크게 반론을 제기
인천 조수 간만의 차이와 항공지원이 어려운 탓.

결과적으로 맥아더가 주장한 작전은 대성공
당시 맥아더 원수가 설득한 말이 인상 깊다.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군의 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것이며,
따라서 인천은 방비가 소홀할 것이다.

고로, 이 허점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덧 말.


인천 상륙작전 이후 38선 퇴로까지 차단한 UN군.
지리산에 고립되어 남부군 유격투쟁을 이끈 이헌상.
그 자신도 더 이상의 유격투쟁은 무의미하다고 인식.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았던 이헌상.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오봉마을.



지리산 동북쪽 경남 산청과 함양 경계지점
오봉계곡 중간쯤, 깔때기 모양의 분지 속
해발 500m 오봉마을은 농사지을 땅이 없다.

고로쇠 수액, 토종꿀, 산나물, 약재 채취로 생활.
가족단위 자연체험 여행객들의 정감어린 쉼터 마을
왕등재 늪지에서 1km 아래이고 구형왕릉과도 가깝다.

하늘 아래 첫동네 오봉마을은 산청군 오지.
눈내리는 날엔 차량통행도 힘든 산골 마을.
방곡리 위령탑엔 언제나 참배객 한 명 없다.

대전~ 통영 국도 생초IC로 나와 화계리쪽으로 좌회전.
화계에서 경호 중고교를 지나 방곡리 추모공원 이정표
추모공원 지나 가현교 갈림길에서 화림사 오봉마을 이정표

'하늘 아래 첫동네' 경남 산청군 금서면 오봉리.

오봉마을은 산 깊고 물 맑지만 하늘이 작고 둥굴다.
사방에서 뻗어내린 다섯 산봉우리에 싸여있는 분지.
해발 500~600m에 숨어있는 산청의 대표적인 오지마을.

예전엔 장 보려면 새벽에 나가 별 보고 돌아왔다.
지금은 계곡따라 시멘트 길도 났고 전기도 들어온다.
하지만, 휴대폰은 무용지물이고, 인터넷은 꿈도 못꾼다.

12가구 20명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오봉마을 주민들.
해 뜨면 일어나고 배가 고프면 먹고. 개울에서 목욕.
하루 하루 무슨 요일인지 잘 모르고, 뉴스도 어두운 편.

'원두막에 누우면 하늘로 빨려 들어갈 듯..'

집채만한 바위 위에 얼기설기 엮은 원두막 풍경
윙윙거리는 벌소리, 소리치듯 흐르는 계곡 물소리
농사지을 땅도 없어 절로 청정 지역이 된 오봉마을.

고로쇠물, 산나물, 토종꿀, 흑염소 등.
특산물 채취로 생계를 잇는 마을 주민들.

산골마을에 어울리지 않은 세련된 집들도 몇채
대부분 요양을 하기 위해 들어온 외지인의 주택.
2개월만에 만들었다는 이장 집 안방은 뜨끈 뜨끈.

황토를 바르고 대나무로 마감해 자연을 끌어들인 집.
방안에는 산에서 채취한 약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당귀, 오가피, 땅두릅, 거름나무, 오미자, 웅지, 등등.

대나무 옷걸이도 운치 있고.
부엌에서 흐르는 개울물도 멋.
제멋대로 들어와 제맘대로 간다.

마을 초입 염소막 아래 외딴집은 지난 여름 태풍에 반파.
오봉마을에서는 유일한 초등학생 병윤은 염소막 주인 아들.
스물아홉 청춘때 산에서 만난 부인과 신혼살림 차렸기 때문.

전기도 없어 촛불 켜고 알콩달콩 살았었다는 최씨
"안개낀 날은 어린애 만한 도깨비불이 돌아 다녀요."

저녁 밥상에 토종꿀 곶감까지 맛보라며 내민다.
전기 없이 살던 시절이 더 행복했었다는 그의 말.
문명과 가까워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진다는 그의 말.

자연을 닮은 그가 있어 다시 찾아가고도 싶은 오지.
그러나, 토박이는 이장과 80세 넘은 할머니 한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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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딴 오지마을에 토박이 주민이
단 두 사람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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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마을 아래 방곡리는 1951년 참사의 현장.
불행하게도 마을로 돌아와 살 원주민이 없었다.
1951년 음력 1월 2일 원주민들은 모두 사라진 탓.

그후 주민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1951년 산청 함양사건' 합동묘역 추모공원.

1951년 토벌군이 4개 마을 주민 705명을 학살한 사건.
훗날 진실이 밝혀져 그들을 달래는 위령탑과 추모공원
가락국 구형왕릉도 방곡리 추모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양민학살은 또 다른 사건.
지리산이 품고 있는 가슴이 아픈 사건들 중 하나.

- 1951년 음력 1월 2일 함양 산청 사건-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은 51년 2월 8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할 당시 였다.

국군 제 11사단(화랑부대·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에 의한 주민학살 사건.
모두 지리산의 동쪽 하늘 아래 첫동네 마을들.

산위에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시간을 아는 두메산골
가현 방곡 점촌(산청 금서면) 서주리(함양 휴천면) 4곳
양민 705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3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

남원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 보11사 작전명은 '견벽청야’
3대대(대대장 한동석 대위) 7~11일 수행한 학살작전이다.

7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 학살이 이틀에 끝났고,
9~11일 거창 신원면 작전(719명)으로 닷새에 마무리.

그동안 발견된 기록과 목격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불이나 냄비 세간살이를 든 11대 버스의 민간인들.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이곳으로 실려와 모두 총살됐다.

"냄비까지 소지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500명으로
피란민을 이민시켜 준다며 끌고와 학살했다" -증언.

당시 양민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통주씨
현재 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도 이같은 신문 보도와 일치한다.
총살현장을 목격한 시아버지로부터 전해들었다는 한 아주머니.

"당시 군인들이 한사람씩 세워놓고 차례로 총쏘아 죽였고,
이 때문에 다른 학살사건과 달리 생존자가 없었다" - 증언.

"1~2대 장갑차를 앞세우고 3대 트럭에 타고 온 군인들."-증언.

1951년 3월 12일 부산일보 & 2월 21일 한국일보.
학살터 발견은 3년전 마산 MBC 김석창 PD의 보도.

발굴작업에서 인상(仁商), 금중(金中) 등 학교명 단추
피학살자들의 신원을 밝히는 작업도 활기 띨 전망이다.

............당시 '견벽청야 사건'의 전말................
당시 육군 11사단 최덕신 사단장이 내린 작전명령
'견벽청야'는 빨치산 근거지가 될 곳은 모두 소개.
그 명령이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로 변하고 말았다.

가현마을, 방곡마을, 점촌마을을 초토화시킨 군인들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서 학살했다.

서주리는 경호강 강변에 있으며 강 건너편은 산청군.
강변은 빈터와 밭들이 있어 군중 모으기에 안성맞춤.

1951년 2월 7일(음 1월 2일) 아침 밥상을 물리는 시간

화계, 화산, 주상, 자혜마을과 지곡, 손곡 등의 마을들.
경찰, 향토 방위대원, 군인 등이 조를 짠 듯이 나타나서
모든 마을 주민들을 강건너 서주리로 모일 것을 통지했다.

주민들은 다들 겁에 질려 나갔는데
서주리에 가까운 지곡과 손곡마을 주민들
쉽게 갈 수 있었으나 강 건너 산청군 마을들
얼음이 얼어있는 경호강 위를 건너야만 했다.

오전 11시경 5개 마을 천여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남자와 여자를 먼저 구별해 앉혔으며
노인과 청장년, 어린이 3개로 구별하여 앉혔다.

군경 2인이 한 조가 되어 주민들을 심문했으며
군경 가족인가 아닌가가 선별의 1차 기준이었다.

오후 4시경 가현, 방곡, 점촌, 묵은터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 군인이 서주리에 도착
선별되지 않은 주민은 유림지서 쪽으로 가라는 명령

선별된 주민들은 3대대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엄천강 둔덕에 교실만한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후 주민 300여 명을 구덩이에 몰아 넣었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해 310명 학살

주민 학살을 마친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은
2월 8일 밤 숙영지를 생초 초등학교로 택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끌어온 가축을 잡아 축하잔치.

제4대국회 제 35 회 임시회의
산청.함양.거창 사건 진상보고서,
박상길 외 2인에 따르면 1,818명 학살

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 심의 위원회에서
발표한 사망자 386명(산청 292명, 함양 94명).
그러나 유족회는 705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증언.

견벽청야 사건발생 5개월 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
12월 15일 구형공판에 이어 다음날 12월 16일 선고.

9연대장 오익경 대령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무죄(구형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3년(구형 7년)

견벽청야 관련 군지휘관에게 실형이 확정.

사단장 최덕신은 기소조차 안되었고
오익경, 한동석도 1년이 되지 않아 석방.

최덕신은 그후 대사에 임명되며 출세가도
김종원은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된 후
전북 경찰국장으로 복권되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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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 터미널~ 산청' 버스는 9천 8백원. 2시간 반.
오전 5시40분부터 오후 7시41분까지 30~40분 간격 운행.
산청~ 방곡리 버스 2천원 30분 소요. 도보 1시간 오봉마을.

서울 - 남원 - 산청 - 마천 - 원기나 절터에 하차
임천강 건너 방곡천 입구에서 도보로 두 시간 거리.

방곡리를 지나 200m 나아가면 계곡이 갈라지는 지점.
다리 지나 오른쪽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1시간 거리.
톨게이트에서부터 계곡따라 오르면 도보로 30분 거리.

오봉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평리 대원사
추성리 벽송사로 넘어가는 산행 길 연계가 가능하다. 




공개바위. 

 


 

 

 

마고할미 공기돌 5개가 쌓여 있어., 공개바위.

 

 

 

 

 

억새들~


오봉마을에 차를 주차하고 베틀재를 지나 공개바위,
군계능선 따라 오르면 상내봉이 있고 독바위가 있다.
인근에는 의논대, 고열암 터. 신열암 터, 선녀굴, 등.

(1472년에 김종직이 쓴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지명들)
(유두류록은 당시 함양군수였던 김종직의 지리산 산행기)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야산 755m 능선 상.
피사의 사탑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5층 바위.
곧 쓰러질듯 아슬아슬 서있는 돌탑 같은 형태.

5개의 정육면체 바위로 이뤄져 추정 무게만 100t,
높이 12.7m, 둘레 12.4m로 곧 25도 쯤 기울은 바위,
지금은 등산로와 동떨어져.. 주민들만 알고 있던 바위.

'공개바위가 알려진 시기는 불과 몇년전인듯..'

............공개바위 찾아가는 길...............
방곡마을 지나 가현리 다리 건너기 직전 임도따라 이동
마지막 파란지붕이 있는 곳에 주차한 뒤에 가파른 임도

공개바위라 쓰여있는 곳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다섯 개 바위가 포개져 공깃돌처럼 쌓여있는 곳이 보인다.
공개바위 앞으로 왕산과 필봉산이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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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희미하게 전해오는 공개바위 전설.'

마고할미가 5개 바위로 공기돌 놀이를 한 뒤 떠나
'공기바위' 이름이‘공개바위’로 변했다는 전설 뿐.
지역 주민에게도 풀리지 않는 천연바위 돌탑 미스테리.

“사람이 쌓았다기엔 너무 거대하고
자연이 만들었다기엔 너무 신비하다”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자연이 빚은 돌탑인듯.
산청군은 문화재 지정을 신청을 할 계획이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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